쁠랙 피분송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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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쁠랙 피분송크람은 1897년 태국에서 태어난 군인, 정치인으로, 1938년부터 1944년, 1948년부터 195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태국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1932년 입헌군주제 전환을 이끈 혁명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 '태국 문화 혁명'을 통해 민족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과 동맹을 맺었으나, 전쟁 말기 쿠데타로 실각하여 망명 생활을 했다. 1964년 일본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여러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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쁠랙 피분송크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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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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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플랙 |
출생일 | 1897년 7월 14일 |
출생지 | 논타부리, 끄룽텝, 시암 (현재 므앙논타부리, 논타부리, 태국) |
사망일 | 1964년 6월 11일 |
사망지 | 사가미하라시, 가나가와, 일본 |
배우자 | 라이앗 반두크라비 (1903–1964) |
파트너 | 피싸마이 윌라이싹 캄능닛 피분송크람 |
자녀 | 6명, 니따 포함 |
친척 | 크리싸나품 피분송크람 (증손자) |
로마자 표기 | Plaek Phibunsongkhram |
태국어 표기 | 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
별칭 | จอมพล ป. (원수 뻐.) |
기타 표기 | 루앙 피분송크람 Luang Pibulsonggram แปลกปิบูลสงคราม ป.พิบูลสงคราม P. Pibulsonggram 키따상카 |
관직 | |
직책 | 총리 |
임기 시작 | 1948년 4월 8일 |
임기 종료 | 1957년 9월 16일 |
국왕 | 푸미폰 아둔야뎃 |
부총리 | 픈 론나파그랏 릿타카니 쁘라윤 유타사스트코손 워라칸 반차 핀 추나완 싸왓 싸왓디론나차이 싸왓디케아 |
전임 | 쿠앙 아파이웡 |
후임 | 싸릿 타나랏 (사실상) |
임기 시작2 | 1938년 12월 16일 |
임기 종료2 | 1944년 8월 1일 |
국왕2 | 아난다 마히돈 |
부총리2 | 아둘 아둘뎃짜랏 차웽 싹송크람 |
전임2 |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 |
후임2 | 쿠앙 아파이웡 |
장관직 (1934–1957) | |
직책2 | 국방부 장관 |
임기 시작3 | 1957년 9월 12일 |
임기 종료3 | 1957년 9월 16일 |
총리3 | 본인 |
전임3 | 싸릿 타나랏 |
후임3 | 타놈 킷티카촌 |
임기 시작4 | 1949년 6월 28일 |
임기 종료4 | 1957년 3월 21일 |
총리4 | 본인 |
전임4 | 쑥 차트나끄롭 |
후임4 | 싸릿 타나랏 |
임기 시작5 | 1941년 12월 15일 |
임기 종료5 | 1943년 11월 15일 |
총리5 | 본인 |
전임5 | 망꼰 프롬요티 |
후임5 | 피칫 크리앙삭피칫 |
임기 시작6 | 1934년 9월 22일 |
임기 종료6 | 1941년 8월 19일 |
총리6 |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 본인 |
전임6 |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 |
후임6 | 망꼰 프롬요티 |
직책3 | 협동조합부 장관 |
임기 시작7 | 1957년 9월 12일 |
임기 종료7 | 1957년 9월 16일 |
총리7 | 본인 |
전임7 | 씨리 씨리요틴 |
후임7 | 위분 탐마붓 |
직책4 | 내무부 장관 |
임기 시작8 | 1955년 8월 2일 |
임기 종료8 | 1957년 3월 21일 |
총리8 | 본인 |
전임8 | 피싼 수나윈비왓 |
후임8 | 파오 시야논 |
임기 시작9 | 1948년 4월 15일 |
임기 종료9 | 1949년 6월 25일 |
총리9 | 본인 |
전임9 | 쿠앙 아파이웡 |
후임9 | 망꼰 프롬요티 |
임기 시작10 | 1938년 12월 21일 |
임기 종료10 | 1941년 8월 22일 |
총리10 | 본인 |
전임10 | 타완 탐롱나와사왓 |
후임10 | 추앙 콴체르드 |
직책5 | 상무부 장관 |
임기 시작11 | 1954년 2월 4일 |
임기 종료11 | 1954년 3월 23일 |
총리11 | 본인 |
전임11 | 분커드 수탄타논 |
후임11 | 씨리 씨리요틴 |
직책6 | 문화부 장관 |
임기 시작12 | 1952년 3월 24일 |
임기 종료12 | 1955년 8월 2일 |
총리12 | 본인 |
전임12 | 신설 |
후임12 | 피싼 수나윈비왓 |
직책7 | 재무부 장관 |
임기 시작13 | 1949년 10월 13일 |
임기 종료13 | 1950년 7월 18일 |
총리13 | 본인 |
전임13 | 위왓다나자야 |
후임13 | 촘 자몬만 |
직책8 | 외무부 장관 |
임기 시작14 | 1949년 6월 28일 |
임기 종료14 | 1949년 10월 13일 |
총리14 | 본인 |
전임14 | 몯 짜오 프릿디텝퐁 데와꿀라 |
후임14 | 폿 싸라신 |
임기 시작15 | 1941년 12월 15일 |
임기 종료15 | 1942년 6월 19일 |
총리15 | 본인 |
전임15 | 디렉 자야나마 |
후임15 | 루앙 위칫와타칸 |
임기 시작16 | 1939년 7월 14일 |
임기 종료16 | 1941년 8월 22일 |
총리16 | 본인 |
전임16 | 찟 나 송클라 |
후임16 | 디렉 자야나마 |
직책9 | 교육부 장관 |
임기 시작17 | 1942년 2월 16일 |
임기 종료17 | 1942년 3월 7일 |
총리17 | 본인 |
전임17 | 신두 카몰나윈 |
후임17 | 프라윤 파몬몬트리 |
군사 경력 | |
직책10 | 최고사령관 |
임기 시작18 | 1940년 11월 13일 |
임기 종료18 | 1943년 11월 24일 |
전임18 | 신설 |
후임18 | 싸릿 타나랏 |
직책11 | 육군 사령관 |
임기 시작19 | 1947년 11월 9일 |
임기 종료19 | 1948년 5월 15일 |
전임19 | 아둔 아둔데짜랏 |
후임19 | 핀 추나완 |
임기 시작20 | 1938년 1월 4일 |
임기 종료20 | 1944년 8월 5일 |
전임20 | 프라야 파혼폰파유하세나 |
후임20 | 피칫 크리앙삭피칫 |
소속 | 육군 |
복무 기간 | 1914–1957년 |
계급 | 원수 해군 원수 공군 원수 |
지휘 | 최고사령관 |
정치 활동 | |
정당 | 세리 마낭카실라 (1955–1957) |
기타 정당 | 카나 랏사돈 (1927–1954) |
주요 참전 | |
전투 | 시암 혁명 보원뎃 반란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태국 전쟁 태평양 전쟁 궁궐 반란 |
2. 생애
쁠랙 피분송크람은 1897년 7월 14일 방콕 인근 논타부리에서 화교 아버지 키엣과 태국인 어머니 삼안 사이에서 태어났다.[29] 귀 모양이 특이하여 '이상하다'는 뜻의 '쁘렉'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13년 라마 6세의 성명령으로 쁘렉 키타산카(Pleak Khittasangkha)라는 태국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출라촘클라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참모학교를 수석 졸업하여 루안이라는 관직과 피분송크람이라는 칙명을 받았다. 이후 쁘렉을 이름으로, 피분송크람을 성으로 사용했다. 1924년에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근대 민주주의 사상을 접했다.
2. 1. 초기 생애
피분은 1897년 7월 14일 논타부리 주 므앙 논타부리에서 두리안 농사를 짓는 부모에게서 쁠랙(Plaek)으로 태어났다.[1] 그의 가족은 1913년 성씨 사용에 관한 법령 이후 킷타상카(ขีตตะสังคะ|킷타상카th)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2]어린 시절 그는 눈보다 귀가 아래에 위치하는 등 이례적인 외모 때문에 "이상한" 또는 "기이한"을 의미하는 이름을 받았다.[1]
쁠랙의 외조부는 광둥성 출신의 광둥인계 화교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완전히 동화되어 태국인으로 여겨졌다. 태국의 대부분의 중국인이 차오저우인 방언 집단 출신이기 때문에, 쁠랙은 중국인으로 간주될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다.[3] 이로 인해 그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중국계 뿌리를 숨기고 부인할 수 있었다.[4]
그는 불교 사찰에서 공부했다.[1] 그 후 왕립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 후 왕실 시암 육군에 소위로 임관되어 포병에 배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프랑스로 파견되어 포병 응용학교(École d'application d'artillerie)에서 포병 전술을 연구했다. 1928년, 프라차디폭 국왕으로부터 ''루앙''이라는 귀족 작위를 받고 루앙 피분송크람(Luang Phibunsongkhram)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루앙''이라는 칭호는 버렸지만 피분송크람이라는 성은 계속 사용했다.
2. 2. 1932년 혁명과 권력 장악
1932년, 피분은 시암의 절대군주제를 전복하고 입헌군주제로 대체한 쿠데타를 일으킨 정치 조직인 국민당(Khana Ratsadon)의 왕립 시암 육군 계열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중령이었던 피분은 군부에서 "기마병"으로 급부상했다.[5]1897년에 태어난 피분송크람은 1927년 중령, 1931년 대령으로 빠르게 진급했다. 1932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 라마 7세를 영국으로 쫓아냈다. 귀국 후, 피분송크람은 '''인민당'''에 입당하여 1932년 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마노파콘 니티타다 백작 정권에서 각료를 지냈다. 이듬해 10월 보워라뎃 왕자가 쿠데타(Boworadet Rebellion)를 일으켰으나 피분송크람은 이를 진압했다.
젊은 나이에 고위직에 오른 피분송크람은 동시에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1934년 2월과 1938년 11월 9일에는 습격을 당했고, 같은 해 1938년 12월 9일에는 음식에 독이 든 것을 먹고 암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2. 3. 총리 재임 (1938-1944)
1938년 12월 16일, 피분송크람은 파혼을 대신하여 태국 총리이자 태국 왕실 육군 사령관이 되었다. 피분송크람은 사실상의 독재자가 되었고, 군사 독재를 수립하여 자신의 군부 세력에 속한 여러 인물들에게 정부 내 영향력 있는 자리를 주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1932년 혁명 이후, 파혼의 태국 정부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의 로마 진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피분송크람 또한 파시스트식 선전 전술을 모방하려 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이것이 가장 강력한 정치적 권력 수단 중 하나로 여겨졌다. 그는 로마식 경례를 본떠 만든 파시스트 경례를 연설 중에 사용했다. 그는 선전부 장관인 루앙 위칫와타칸(Luang Wichitwathakan)과 함께 1938년 이후로 지도자 숭배를 구축했다. 피분송크람의 사진은 어디에나 있었고, 그의 어록은 신문에 실리고, 게시판에 붙여졌으며, 라디오를 통해 반복적으로 방송되었다.
'''1938년 12월 20일 – 1942년 3월 6일'''
1938년 12월 15일 당시 총리 파혼폰 파유하세나 백작에 대한 불신임 투표에서 피분송크람은 육해군의 지지를 받아 12월 20일 총리에 취임하였다. 피분송크람은 이듬해 1월 21일 왕족, 관료, 민선 의원 51명을 체포하여 그 중 18명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국외 추방 또는 왕족 지위 박탈을 명령했다.
이후, '''랏타니욤'''이라 불리는 일종의 애국주의 정책을 잇달아 발표하며 국호 변경(샴에서 태국으로), 복장 규제, 태국 문자 개정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중국계 태국인을 태국인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책이거나 국민 통제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피분송크람은 중국어 학교를 모두 폐쇄하고, 중국어 신문은 『중원보』만 허용하는 등 강경책을 통해 중국계 태국인들을 억압했다. 하지만 중국계 태국인의 귀화 자체는 허용했기 때문에, 이는 중국계 태국인의 동화를 촉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40년6월 12일, 피분송크람은 프랑스-태국, 일본-태국 간에 같은 날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중립 정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피분송크람은 이를 즉시 뒤집고, 같은 해 9월 10일, 프랑스와 '''대불 국경 분쟁'''을 시작했다. 1941년 일본이 이를 중재하여 5월 9일 '''토쿄 조약'''이 체결되었고, 프랑스는 태국에 구 태국 영토 4개 주를 반환하는 데 동의했다. 같은 해 7월 28일 이 공로로 피분송크람은 원수로 승진했고, 이후 중립 정책을 표방했지만, 10월에 일본과 태국이 양국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격상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이후로는 일본에 기울었다고 볼 수 있다.
1941년 12월경, 피분송크람은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인한 위기감에서 국민 총동원 체제를 도입했다. 같은 달 8일 일본은 태국 영토 통과를 강행하며 일본군을 태국 영토에 진주시켰다. 각지에서 저항 운동이 일어났고, 태국 측은 183명이 사망하고 일본 측은 141명이 사망했다. 피분송크람은 11일 '''일본 국군의 태국 영토 통과에 관한 협정'''을 승인했다.
그러나 피분송크람은 협정 체결 후 태도가 돌변했다. 이 협정은 태국이 일본에 협력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비밀 조항으로 일본이 태국의 상실지역 회복에 협력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분송크람은 이때 일본과의 협정이 태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1942년1월 8일 영국군이 수도 방콕을 폭격하자 25일, 피분송크람은 중립 정책을 완전히 뒤집고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태국은 추축국이 되었다.
'''1942년 3월 6일 - 1944년 8월 1일'''
1942년 4월경, 쁘라쨍 쁘라뫁(เซอญี ปรโมท)은 미국 유학 동료들과 함께 '''자유 태국'''이라는 항일 운동을 시작했다. 피분 송크람 내각의 각료로 국내에 있던 루앙 피리디 판옴용(루앙 프라디파 마누탐)까지 참여했다. 피분 송크람은 이를 알고 있었지만 묵인했고,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해서는 자유 태국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 무렵 일본의 행위는 태국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태국산 쌀을 일본으로 보내려고 했고, 바트화를 엔화와 동등하게 평가절하했다. 또한 태국 정부로부터 대량의 군자금을 차용하여 전시 물류가 부족했던 태국 시장에서 대량으로 소비했는데, 이는 태국 국내에서 큰 인플레이션을 야기하여 농촌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1943년 2월 13일 패전의 색깔이 짙어짐에 따라 피분 송크람은 사표를 라마 8세(아난다 마히돈)에게 제출한다. 10월 20일에는 자유 태국의 구성원이었던 디렉 차이야남(เดียรชัยยานนท์)을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이때 피분 송크람은 이미 패전에 대해 어느 정도 각오를 한 것으로 보인다.
1943년 7월 4일에는 도조 히데키가 말레이시아의 4개 주와 버마(미얀마)의 몬주, 카렌주를 선물로 가지고 피분 송크람을 방문했지만, 피분 송크람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듬해 7월 22일, 인민대표원에 의해 펫차분 불교 도시 계획이 부결되고, 동시에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피분 송크람은 2일 후 스스로 사표를 제출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 3. 1. 태국 문화 혁명
피분은 태국 민족주의를 증진하고 태국의 근대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태국 문화 혁명'이라는 일련의 주요 개혁을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국가 정신과 도덕률을 고양하고 태국 생활에 진보적인 경향과 새로움을 불어넣는 것이었다.[6]정부는 모든 태국인에게 공공장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새로운 국가를 배우고, 표준화된 태국어를 사용하도록 장려하는 문화 명령을 발표했다. 사람들은 전통 의복 대신 서구식 의복을 착용하고, 포크와 스푼과 같은 서구식 식기류로 식사하도록 장려받았다. 피분은 이러한 정책들이 태국의 낙후된 이미지를 문명화되고 현대적인 국가로 바꾸는 데 필요하다고 보았다.[6]
피분 정부는 경제 민족주의를 장려하고 반중 감정을 표명했다. 정부는 시암의 화교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국 혐오 정책을 시행하고 태국인들이 가능한 한 많은 태국 제품을 구매하도록 장려했다. 1938년 연설에서 루앙 위칫와타칸은 시암의 화교를 탄압받던 독일의 유대인에 비교하며 라마 6세의 책 ''동방의 유대인''을 따랐다.
1939년 6월 24일, 피분은 위칫와타칸의 촉구에 따라 국가의 공식 영어명을 "Siam"에서 "Thailand"로 변경했다.[7][8] "Siam"이라는 이름은 외국 기원의 외래어였으며, 피분의 민족주의 정책과 상충되었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피분은 1월 1일을 새해의 공식 시작일로 선포했다.
2. 3. 2. 프랑스-태국 전쟁

피분송크람은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과 1940년 9월 일본의 프랑스 인도차이나 침공을 이용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와의 국경 분쟁을 이유로 태국의 이익을 증진시키려 했다. 피분송크람은 프랑스가 무력 충돌을 피하거나 심각한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라마 5세 때 프랑스에 할양된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태국은 1940년 10월부터 1941년 5월까지 프랑스 비시 정부와 분쟁 지역을 놓고 싸웠다. 기술적으로나 수적으로 우세한 태국군은 프랑스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여 주요 도시의 군사 시설을 공격했다. 태국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코 창 해전에서 프랑스의 전술적 승리는 일본의 개입을 초래했고, 일본은 프랑스가 분쟁 지역을 태국에 할양하도록 강제하는 휴전을 중재했다.
2. 3. 3. 일본과의 동맹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으로 75만 일본군이 태국을 침공하자, 피분 송크람은 2달 만에 굴복하여 일본의 동맹국이 되었다.[9][10] 그는 1942년 1월 미국 등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했다.피분 송크람은 프랑스-태국 전쟁의 결과를 승리로 여겼지만, 그 결과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할 권리를 얻게 되면서 일본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위협을 느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태국을 침공했을 때, 피분은 하루 만의 저항 끝에 휴전을 명령하고 일본군이 태국을 버마와 말레이 침공 기지로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일본군이 말레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자, 피분은 일본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11][12] 1942년 1월 25일, 피분은 영국과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뉴질랜드는 같은 날 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호주도 곧 이어 선전포고를 했다.[13]
피분은 일본과의 동맹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부에서 숙청했다. 쁘리디 판묘엉은 국왕을 대신하여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디렉 차이나마는 대사로 도쿄로 파견되었다. 미국은 태국을 일본의 괴뢰 국가로 간주하고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승리하자 미국은 영국이 징벌적인 평화를 강요하려는 노력을 막았다.[14]
2. 3. 4. 실각
1944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지하 반일 운동인 자유 태국 운동이 꾸준히 세력을 키우자, 태국 국민의회는 피분을 총리직에서 축출했고, 그의 6년간의 군 참모총장직도 끝이 났다.[15] 피분의 사임은 두 가지 야심 찬 계획 때문이기도 했다. 하나는 수도를 방콕에서 태국 중북부 펫차분 근처 정글의 외딴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라부리에 "불교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발표된 이러한 구상들은 많은 정부 관리들의 반감을 샀다.[15] 사임 후 피분은 롭부리의 육군 본부에 머물렀다.꾸앙 아파이봉이 피분을 대신하여 총리가 되었는데, 명목상으로는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유 태국 운동을 비밀리에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피분은 연합군의 요구에 따라 주로 추축국과의 협력이라는 혐의로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여론이 여전히 그에게 호의적이었고, 태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여겨졌기에, 엄청난 압력 속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피분의 일본과의 동맹으로 태국은 일본의 지원을 이용하여 말레이시아와 버마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16]
2. 4. 총리 재임 (1948-1957)
1946년 라마 8세가 총기 사고로 사망하고 라마 9세가 즉위했다. 1947년 11월, 군부는 사회 혼란을 구실로 쿠데타를 일으켜 문민내각을 몰아내고 쁠랙 피분송크람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는 1948년부터 1973년까지 이어진 군사 독재의 시작이었다.
피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원조를 받았으나, 이는 오히려 부정부패를 심화시켰다. 피분은 미국의 민주화 요구를 거절했고, 이에 반발한 쿠데타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1947년 11월, 피분은 1947년 태국 쿠데타를 일으켜 타완 탐롱나와사왓 총리를 사임시켰다. 국제적 비난을 우려한 군부는 쿠앙 아파이웡을 총리로 임명했지만, 1948년 4월 군부는 쿠앙을 축출하고 피분을 총리로 복귀시켰다.
피분의 두 번째 총리 임기는 이전과 달리 파시즘적 성향을 버리고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냉전 시작과 함께 피분은 태국을 반공주의 진영에 합류시켰다.
피분은 한국 전쟁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4,000명의 병력을 파병했고[7], 이후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원조를 받았다. 피분은 반중국 정책을 펼쳐 중국 이민을 제한하고 중국계 태국인의 시장 지배력을 억제하려 했다. 중국 학교와 협회는 폐쇄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피분은 중국과의 비밀 대화 채널을 구축하기 위해 측근 상 파타노타이의 자녀들을 중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시린 파타노타이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용의 진주''라는 자서전을 썼다.
피분은 1955년 미국과 유럽을 방문한 후 언론의 자유에 감명받아 방콕 사남루앙에 스피커스 코너를 설치했다. 그는 정당 설립을 허용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사면했으며, 자유 선거를 계획하는 등 민주화를 추진했다. 피분은 자신의 정당인 세리 마낭카실라당을 창당하고, 1957년 고용법을 통해 노동조합을 합법화하고 노동 시간을 규제하는 등 노동 환경 개선에도 힘썼다. 국제 노동절이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47년 태국 쿠데타 이후, 1948년 4월 8일 피분은 콴 아파이원을 압박하여 사퇴시키고 총리직에 복귀했다. (피분의 복귀)
피분은 1949년 6월 25일 제4차 내각을 구성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반란에 직면했다. 1948년 10월 1일 '''장교 반란''', 1949년 2월 26일 '''왕궁 반란''' 등을 진압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특히 왕궁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사릿 타나랏은 이후 피분 정권의 실세로 떠올랐다. 1950년 1월 29일에는 '''홍수 반란'''도 발생했다.
1949년 3월 23일, '''불력 2492년 태국 왕국 헌법''' 제정 후, 피분은 1949년 6월 25일 제4차 내각을 구성했다.
피분은 1950년 미국과 경제협정(9월 19일) 및 군사협정(10월 27일)을 체결하며 친미 외교 노선을 강화했다.
1951년 6월 21일, '''맨해튼호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이 태국 해군에 맨해튼호를 기증하는 기념식 중 공군이 맨해튼호를 폭파한 사건이다. 피분은 해군에 의해 연행되었으나, 정부 측의 폭격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짜오프라야 강으로 뛰어들어 탈출했다.[32] 이 사건으로 해군은 세력이 약화되었다.
1951년 11월 29일, '''조용한 쿠데타'''가 발생하여 '''불력 2475년 사얌 왕국 헌법'''이 부활하고 피분의 독재 체제가 강화되었다.
1951년 12월 6일 피분은 불력 2492년 태국 헌법을 폐지하고, 불력 2475년 사얌 왕국 헌법과 그 개정 헌법을 일시적으로 부활시켰다. 1951년 12월 8일 제6차 피분 내각이 발족했다.
1952년 2월 26일 선거 후, 3월 8일 '''불력 2495년 개정판·불력 2475년 태국 왕국 헌법'''이 성립되고, 1952년 3월 24일 제7차 피분 내각이 구성되었다.
제7차 내각 초기, '''평화위원회 반란''' 계획이 발각되었으나 미수에 그쳤다.
1953년 4월 14일, 피분은 유럽과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 후 "태국도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하이드 파크 운동을 시작했다.
2. 4. 1. 권력 투쟁과 1957년 쿠데타
1947년 11월, 사회 혼란을 구실로 삼아 군사 쿠데타가 다시 일어나 문민내각을 몰아내고 피분 송크람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 쿠데타는 1948년에서 1973년까지 이어진 군사 독재의 서막이었다.[17]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미국의 원조가 태국에 집중되었으나, 미국의 원조는 오히려 부정부패를 낳았으며 그는 미국의 민주화와 민주 정치를 거절했다. 이에 부패한 송크람을 몰아내려는 쿠데타가 많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피분의 두 번째 총리직은 더 오래 지속되었지만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렸으며, 그의 통치에 반대하고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총리직과는 달리, 피분은 일본과의 동맹으로 인해 자유 태국 운동과 관련된 사람들로부터 눈에 띄는 반대에 직면했는데, 군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피분은 그를 권력에 복귀시킨 강력한 쿠데타 그룹에 빚을 지고 있었다.
1948년 10월 1일, 육군 참모총장들이 그의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한 육군 참모총장 음모는 쿠데타 그룹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그 결과 50명이 넘는 육군과 예비역 장교들과 프리디 파놈용의 저명한 지지자들이 체포되었다.
1949년 2월 26일, 궁궐 반란은 방콕의 왕궁을 점령하고 프리디의 측근인 디렉 자야나마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를 선포함으로써 프리디 파놈용을 복권시키려는 또 다른 쿠데타 시도였지만 실패했다. 민간 반군들은 궁궐에서 신속하게 축출되었지만, 군 반군과 충성파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일주일 이상 계속되었다.
1951년 6월 29일, 피분은 미국의 준설선인 ''맨해튼''에서 의식에 참석하던 중 왕립 태국 해군 장교들에게 인질로 잡혔고, 이어서 ''스리 아유타야'' 군함에 감금되었다. 정부와 쿠데타 주모자들 간의 협상은 신속하게 결렬되었고, 해군과 왕립 태국 공군의 지원을 받은 육군 사이에 방콕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피분은 공군이 ''스리 아유타야''를 폭격했을 때 탈출하여 해안으로 헤엄쳐 돌아갈 수 있었고, 인질이 사라지자 해군은 무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1951년 11월 29일, 침묵의 쿠데타가 쿠데타 그룹에 의해 일어났고, 이는 군부의 국가 장악을 강화했다. 이 쿠데타는 1932년 헌법을 복원하여 사실상 상원을 없앴고, 선출된 의원과 정부가 임명한 의원으로 구성된 일원제 의회를 설립했으며, 현역 군 장교들이 중요한 장관직으로 자신의 지휘권을 보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54년 피분은 냉전에서 SEATO를 설립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태국을 서방과 더욱 긴밀히 연결했다.[7]
1956년, 파오와 동맹을 맺은 플렉이 "삭디나"(왕족과 왕당파)로 구성된 사릿이 이끄는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집단에 밀리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플렉과 파오는 모두 라마 8세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해소하기 위해 프리디 바놈용을 귀국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그들은 계획을 취소했다.[17]
1955년 9월 26일 피분 송크람은 정당법을 제정했다. 한편 피분 송크람은 자신의 지지 기반인 ''자유 마낭카실라당''을 설립하여 태국에 정당 정치가 침투하도록 노력했다.
1957년 2월 26일 피분 송크람의 임기 만료에 따라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때 피분 송크람의 부정이 발각되었고, 3월 2일 이 부정에 대한 시위가 발생했다. 이에 피분 송크람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시위 진압을 담당한 인물이 사릿 타나랏 육군 사령관이었다. 사릿은 시위를 무력으로 억압하는 것을 피하고 대화의 자세를 취했다. 이 무렵부터 사릿은 피분 송크람에게 실망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14일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21일 제8차 피분 내각이 구성되었다.
1957년 9월부터 피분 송크람 정권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먼저 12일 사릿 타나랏 육군 원수, 타놈 킷티카촌 육군 중장 등이 줄줄이 자유 마나카실라당을 탈당했다. 다음 날 사릿 타나랏은 피분 송크람 총리와 파오 시야논 경찰국장의 해임을 압박했다. 15일에는 왕궁 광장의 하이드 파크 운동으로 피분 정권이 비판받았다. 사릿은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조직해 놓았던 '''병력'''을 이용하여 다음 날인 16일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써 팟 사라신이 새 총리로 취임했다.
2. 5. 망명과 죽음
1957년 사릿 타나랏의 쿠데타가 성공하자 송크람과 군부 독재 정부 요인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18] 쿠데타 이후 피분은 망명을 강요당했고, 처음에는 캄보디아로 도피했지만, 나중에 사릿의 새로운 정권이 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그의 요청을 거부하자 일본에 정착했다. 1964년 6월 11일 일본 도쿄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19][20]사망 후 피분의 유골은 단지에 담겨 태국으로 옮겨졌고, 그가 방켄에 설립한 왓 프라 스리 마하탓(민주주의 사원이라고도 불림)에서 군사 의전을 갖추어 안치되었다.
1964년 6월 11일 오후 8시 30분경,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 자택에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날 낮까지는 평소처럼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건강했으나 저녁 무렵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독살설도 있다.[33]
3. 훈장
쁠랙 피분송크람은 태국의 훈장 제도에서 다음과 같은 왕실 훈장을 받았다.[23]
수여 일자 | 훈장 |
---|---|
1941년 | |
1942년 | |
1942년 | |
1940년 | |
1937년 | |
1944년 | |
1941년 | |
1943년 | |
1934년 | |
1934년 | |
1943년 | |
1943년 | |
1954년 | |
1930년 | |
1938년 | |
1953년 | |
1911년 | ![]() |
1925년 | |
1932년 |
또한, 쁠랙 피분송크람은 다음과 같은 외국 훈장도 받았다.
국가 | 훈장 |
---|---|
독일 | |
독일 | |
이탈리아 왕국 | |
이탈리아 왕국 | |
스페인 | ![]() |
스페인 | |
일본 | |
필리핀 | ![]() |
영국 | |
미국 | ![]() |
프랑스 | |
벨기에 | ![]() |
네덜란드 | |
덴마크 | ![]() |
이탈리아 | |
라오스 | |
캄보디아 | |
그리스 | ![]() |
독일 | |
버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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