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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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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 영은 1867년에 태어나 1955년에 사망한 미국의 야구 선수로,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511승으로 역대 최다 승리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통산 7356이닝, 815선발 등 다양한 부문에서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37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6년부터 사이 영 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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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사이 영
1911년 클리블랜드 냅스 시절의 사이 영
이름사이 영
본명덴튼 트루 "사이" 영
영어 이름Cy Young
일본어 이름サイ・ヤング
출생일1867년 3월 29일
출생지미국 오하이오주 길모어
사망일1955년 11월 4일
사망지미국 오하이오주 뉴커머스타운
신장6피트 2인치 (188cm)
체중210파운드 (95kg)
투구우투
타석우타
포지션투수
선수 경력
프로 입단 연도1890년
첫 출장MLB / 1890년 8월 6일
마지막 출장MLB / 1911년 10월 11일
선수 경력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1890–1898)
세인트루이스 퍼펙토스 / 카디널스 (1899–1900)
보스턴 아메리칸스 / 레드삭스 (1901–1908)
클리블랜드 냅스 (1909–1911)
보스턴 러슬러스 (1911)
감독 경력보스턴 아메리칸스 (1907)
수상 및 업적
월드 시리즈 우승1903년
트리플 크라운1901년
승리 횟수 1위5회 (1892, 1895, 1901–1903)
평균 자책점 1위2회 (1892, 1901)
탈삼진 1위2회 (1896, 1901)
퍼펙트 게임1904년 5월 5일
노히트 게임3회 (1897, 1904, 1908)
명예의 전당보스턴 레드삭스 명예의 전당,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명예의 전당, 국립 야구 명예의 전당
MLB 올센추리 팀선정
MLB 기록511승 (통산)
7,356이닝 (통산)
815경기 선발 출장 (통산)
749경기 완투 (통산)
25⅓이닝 연속 무피안타
국가대표
선출국미국
선출년도1937년
득표율76.12%
선출 방법BBWAA 선출
통계 (MLB)
승패 기록511승 315패
평균자책점2.63
탈삼진2,803

2. 어린 시절

사이 영은 오하이오주 동부에 있는 작은 마을 길모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Denton True Young|덴턴 트루 영영어으로, Nancy Mottmiller|낸시 모트밀러영어와 McKinzie Young Jr.|맥킨지 영 주니어영어 사이의 다섯 자녀 중 장남이었다.[1] 그는 부분적으로 독일계 미국인 혈통을 가졌다. 부모님이 결혼할 때 할아버지는 22000m2 (54에이커)의 농지를 주었고,[1] 영은 오하이오주 Tuscarawas County|투스카라와스 군영어 Washington Township|워싱턴 타운십영어에 위치한 이 시골 농가에서 자랐다.[2] 어린 시절에는 Dent Young|덴트 영영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2] 때때로 'Farmer Young|파머 영영어'이나 'Farmboy Young|팜보이 영영어'으로 불리기도 했다.[3] 영은 가족 농장 일을 돕기 위해 6학년까지만 학교를 다니고 학업을 중단했다.[3]

1885년, 영은 아버지와 함께 네브래스카주로 이주했다가 1887년 여름에 길모어로 돌아왔다. 그는 젊은 시절 여러 아마추어 야구 리그에서 활동했으며, 아버지의 격려를 받아 농사일 틈틈이 투구 연습을 했다고 전해진다. 스스로 팀을 만들어 야구 실력을 키우기도 했다. 1888년에는 준프로 팀인 캐롤턴 팀에서 투수2루수로 활약했다. 그의 이름이 기록된 첫 경기는 그해 시즌의 것으로, 당시 영은 1루수로 출전하여 3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후, 영은 마이너 리그 팀인 캔턴 팀으로부터 선수 계약 제안을 받았고, 이는 그의 프로 선수 경력의 시작이 되었다.[1]

3. 프로 경력

사이 영은 1889년 마이너 리그 팀인 오하이오주 캔턴의 팀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때 빠른 공 때문에 '사이클론'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는 곧 '사이'(Cy)로 줄여져 그의 애칭이 되었다.[5][4] 1890년 내셔널 리그의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와 계약하며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48]

클리블랜드에서 그는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빠르게 성장하여 1892년에는 36승과 리그 최저 평균자책점(1.93)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10] 1893년 투구 거리 변경이라는 규칙 변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으며, 1895년 팀의 템플 컵 우승에 기여하고 1897년에는 첫 노히터를 달성했다.[3][12]

1899년 구단주 사정으로 세인트루이스 퍼펙토스(이후 카디널스)로 이적하여 2년간 활동했다.[13] 1901년에는 신생 리그인 아메리칸 리그의 보스턴 아메리칸스(이후 레드삭스)로 팀을 옮겼다.[3][14] 보스턴 이적 첫해에 다승, 탈삼진,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투수 삼관왕에 올랐고,[16] 1903년에는 팀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04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으며,[18][19] 1908년에는 41세의 나이로 개인 통산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16]

1909년 친정팀이라 할 수 있는 클리블랜드(당시 클리블랜드 냅스)로 트레이드되어 활동하다가, 1911년 시즌 중 보스턴 러슬러스로 다시 이적했다. 그해 9월 22일 통산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고,[27] 시즌 종료 후 22년간의 프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3. 1. 마이너 리그 시절 (1889-1890)

사이 영은 1889년 마이너 리그 프로 팀인 오하이오주 캔턴 연고의 트리 스테이트 리그 소속 캔턴 나지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테스트 당시 영은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훗날 그는 "제 빠른 공에 그랜드스탠드의 널빤지가 거의 다 뜯겨져 나갈 정도였습니다."라고 회상했다.[4] 당시 그의 공을 받은 포수는 매우 빠른 공에 감탄하여 그에게 '사이클론'(Cyclone)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기자들은 이 별명을 '사이'(Cy)로 줄여 불렀고, 이는 영의 남은 야구 인생 동안 그를 상징하는 애칭이 되었다.[5] 영은 캔턴 팀에서 1년간 활약하며 15승 15패를 기록했다.[2]

3. 2.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시절 (1890-1898)

1890년 내셔널 리그의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는 마이너 리그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사이 영과 연봉 500USD에 계약했다.[48] 1890년 8월 6일, 영은 시카고 컬츠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고, 3피안타만 내주며 8-1 완투승을 거두었다.[6]

스파이더스 시절, 영은 주로 포수 치프 짐머와 배터리를 이루었다. 야구 통계학자 빌 제임스는 두 사람이 야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배터리일 것으로 추정했다.[7] 영은 데뷔 초창기부터 리그에서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얻었다. 당시 구속 측정기가 없어 정확한 구속은 알 수 없으나, 제임스에 따르면 포수 짐머는 영의 강속구 충격을 줄이기 위해 종종 야구 글러브 안에 비프스테이크 조각을 넣기도 했다고 한다.[7] 영은 데뷔 첫 해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1890 시즌 마지막 날에는 더블헤더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 투수가 되었다.[3]

영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본 시카고 컬츠의 선수 겸 감독 캡 앤슨은 스파이더스 감독 거스 슈멜츠에게 "그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지만, 내가 가르치면 2년 안에 제대로 된 투수로 만들 수 있다. 그의 실력에 비해 비싼 값이지만 1000USD를 줄 테니 영을 넘겨라"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슈멜츠 감독은 "캡, 돈은 됐고 우리는 영을 데리고 있겠다"며 단호히 거절했다.[8]

영은 데뷔 2년 차인 1891년 27승을 거두며 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1892년에는 36승(리그 1위), 평균자책점 1.93(리그 1위), 9완봉승(리그 1위)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10] 당시 내셔널 리그는 스플릿 시즌 제도를 운영했는데, 스파이더스는 후반기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전반기 우승팀 보스턴 비니터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5전 전패로 패배했다. 영은 이 시리즈에서 3경기에 등판해 완투했지만 2패와 1무승부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1893년, 내셔널 리그는 투구 거리를 종전 약 16.92m에서 현재와 같은 약 18.44m로 늘렸다.[9] 스포츠 저널리스트 롭 네이어는 사이 영을 비롯한 강속구 투수들의 위력 때문에 이러한 규칙 변경이 이루어졌다고 분석했다.[9] 거리 변경 후 영의 평균자책점은 3점대로 상승했지만, 그는 여전히 리그 정상급 투수로 활약하며 그해 34승 16패를 기록했고, 이후에도 매년 400이닝 이상을 던지며 꾸준함을 보였다.

1895년, 스파이더스는 월드 시리즈의 전신 격인 템플 컵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맞붙었다. 영은 이 시리즈에서 3승을 거두며 팀의 4승 1패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시기부터 영은 팔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구종에 '느린 공', 즉 오늘날의 체인지업을 추가하기 시작했다.[3] 1896년에는 28승과 함께 리그 최다인 140탈삼진을 기록했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에드 델라핸티에게 9회 2사 후 안타를 맞아 아쉽게 노히트 노런을 놓치기도 했다.[11]

1897년 9월 18일, 영은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마침내 개인 통산 첫 노히터를 달성했다. 볼넷은 하나도 내주지 않았으나, 팀 수비진이 4개의 에러를 범하는 바람에 퍼펙트 게임은 무산되었다. 에러 중 하나는 처음에 안타로 기록되었으나, 8회말 클리블랜드 3루수가 직접 기자석에 메모를 보내 자신의 실책임을 밝히면서 기록이 정정되었다. 그럼에도 영 본인은 훗날 그 경기를 1피안타 경기로 생각한다고 말했다.[12] 영은 1898년까지 스파이더스에 머무르며 데뷔 첫 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20승 이상을 거두는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다.

3. 3. 세인트루이스 퍼펙토스/카디널스 시절 (1899-1900)

1899년 시즌 전,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 구단주 프랭크 로비슨(Frank Robison)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인수하여 두 구단을 동시에 소유하게 되었다. 브라운스는 팀 이름을 "퍼펙토스"(Perfectos)로 바꾸고, 클리블랜드의 유망주들로 선수 구성을 새롭게 했다. 시즌 개막 몇 주 전, 영, 제시 버켓, 바비 월러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실력 있는 스파이더스 선수들이 세인트루이스로 이적했다.[13] 하지만 이러한 선수 이동은 퍼펙토스를 강팀으로 만들지는 못했고, 세인트루이스는 1899년과 1900년 모두 5위를 기록했다. 한편, 선수들이 빠져나간 스파이더스는 134경기를 패하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다 패배 기록을 세운 후 해체되었다. 영은 2년 동안 세인트루이스에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자신의 최고의 포수였던 루 크라이거를 만났다. 두 사람은 이후 10년 동안 한 팀으로 활동했다.[3][14]

3. 4. 보스턴 아메리칸스/레드삭스 시절 (1901-1908)

1901년, 라이벌 아메리칸 리그가 메이저 리그 지위를 선포하고 내셔널 리그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을 때, 영은 세인트루이스를 떠나 아메리칸 리그의 보스턴 아메리칸스와 연봉 3500USD에 계약했다.[3][14] 영은 1909년까지 보스턴 팀에 남게 되었다.

아메리칸 리그 첫 해, 영은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역시 보스턴으로 이적한 포수 루 크라이거와 호흡을 맞추며, 영은 리그 다승, 탈삼진,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여 투수 부문에서 소위 아메리칸 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그는 1901년 팀 전체 79승 중 33승(팀 승리의 거의 42%)을 책임졌다.[16] 이는 70년 후 스티브 칼턴이 필리스의 59승 중 27승을 기록하며 경신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는 기여도였다. 영은 다음 해인 1902년에도 선발로만 32승을 거두어 아메리칸 리그 투수 중 유일하게 2년 연속 30선발승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1902년 영


1902년 2월, 야구 시즌 시작 전 영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정규 교육을 6학년까지만 마친 영이 하버드 학생들을 지도하는 모습은 당시 보스턴 신문들의 관심을 끌었다.[3] 이듬해 봄에는 머서 대학교에서 코치를 맡았으며, 팀은 1903년, 1904년, 1905년 조지아 주 선수권을 차지했다.[17]

1903년,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최초의 현대적 월드 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맞붙었다. 1차전에 선발 등판한 영은 월드 시리즈 역사상 첫 공을 던진 투수가 되었다. 하지만 파이리츠가 1회에 4점을 뽑으면서 영은 패전 투수가 되었다. 영은 이후 등판에서 2승을 거두며 좋은 모습을 보였고, 5차전에서는 3타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영은 시리즈 동안 총 4경기에 등판하여 2승 1패, 평균자책점 1.85를 기록하며 보스턴이 피츠버그를 5승 3패로 꺾고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1904년 5월 2일,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투수 루브 웨델이 보스턴을 상대로 1안타 완봉승을 거둔 후, 영에게 맞대결을 제안하며 다시 한번 1안타로 막겠다고 도발했다. 사흘 뒤인 5월 5일, 영은 웨델과의 맞대결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이는 아메리칸 리그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이었다.[18][19] 마지막 27번째 타자는 웨델이었고, 그가 뜬공으로 아웃되자 영은 "How do you like that, you rube?|맛이 어때, 시골뜨기야?eng"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이 퍼펙트 게임은 영의 연속 기록 행진의 일부였다. 영은 메이저 리그 기록인 최다 연속 이닝 무실점과 최다 연속 이닝 무피안타 기록을 세웠는데, 후자는 25와 3분의 1이닝 또는 76타자 연속 무안타 기록으로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21][22] 안타를 허용한 후에도 영의 무실점 행진은 당시 기록인 45이닝에 달했다.

영 이전에는 1880년 리 리치먼드와 존 몽고메리 워드가 닷새 간격으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지만, 당시에는 규칙이 다소 달랐다. 투수판 앞쪽은 홈플레이트에서 약 13.72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현대의 투구 지점은 약 약 3.05m 더 멀리 떨어져 있다), 볼넷은 8개의 볼이 필요했으며, 투수는 사이드암으로 던져야 했다. 영의 퍼펙트 게임은 1893년에 제정된 현대 규칙 하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것이었다.

1905년 7월 4일, 루브 웨델은 영과의 20이닝에 걸친 긴 승부 끝에 4-2로 승리하며 설욕했다. 영은 마지막 이닝에서 비자책 2점을 내주기 전까지 13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고, 볼넷을 하나도 내주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내 생각에는 내가 참가했던 최고의 야구 경기였다"고 말했다.[23] 1907년에는 영과 웨델이 다시 만나 13이닝 동안 양 팀 모두 점수를 내지 못하는 무승부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1908년 6월 30일, 영은 뉴욕 하일랜더스를 상대로 통산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 3개월로, 이는 82년 후 놀런 라이언이 43세에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역대 최고령 노히트 노런 기록이었다. 이 경기에서 영은 첫 타자에게 볼넷을 내준 것을 제외하면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펼쳤다. 볼넷으로 출루한 주자는 도루를 시도하다 아웃되었고, 이후 어떤 타자도 1루를 밟지 못했다. 당시 영은 양 리그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선수였으나 여전히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었다. 노히터를 기록하기 한 달 전에도 그는 28타자를 상대로 단 한 개의 안타만 허용하는 경기를 펼친 바 있었다.[16]

1908년 8월 13일, 아메리칸 리그는 "사이 영 데이"를 기념했다. 그날 리그 경기는 열리지 않았고, 대신 다른 팀의 올스타 선수들이 보스턴에 모여 영과 레드삭스를 상대로 기념 경기를 치렀다.[24] 영은 1908 시즌을 평균자책점 1.26으로 마쳤는데, 이는 그의 개인 통산 최저 기록일 뿐만 아니라, 150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 중 최고령(당시 41세)으로 평균자책점 1.50 미만을 기록한 메이저 리그 기록이기도 하다.

3. 5. 클리블랜드 냅스 시절 (1909-1911)

1909년 시즌을 앞두고, 사이 영은 아메리칸 리그클리블랜드 냅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클리블랜드는 그가 선수 생활의 절반 이상을 보낸 곳이었다. 다음 해인 1910년 7월 19일, 영은 워싱턴과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로 통산 500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25][26] 영은 1911년 시즌 중반까지 냅스에서 활동하다가, 시즌 중 보스턴 러슬러스로 이적했다.

3. 6. 보스턴 러슬러스 시절 (1911)

1911년, 선수 생활 마지막 해였던 사이 영은 시즌 중반 클리블랜드 냅스에서 보스턴 러슬러스로 이적했다. 러슬러스 소속으로는 11경기에 등판하여 4승 5패, 평균자책점 3.71을 기록했다.

1911년 9월 22일, 영은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상대로 1-0 완봉승을 거두며 개인 통산 마지막 승리를 기록했다.[27] 그러나 2주 후 그의 마지막 선발 등판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상대한 8명의 타자에게 3루타 1개, 단타 4개, 2루타 3개를 허용하며 난타당했다.[28] 은퇴가 가까워진 이 시기 영은 제구력이 흔들리고 체중이 늘어난 상태였으며,[3] 선수 생활 마지막 3시즌 중 2시즌 동안 리그 최고령 선수이기도 했다.[15]

4. 은퇴 이후

영은 1911년 시즌을 마치고 통산 511승이라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다승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68][29] 은퇴 후에도 그의 팔은 여전히 강했지만, 체중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 투수로 활동하기는 어려워졌다.

은퇴 후 영은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13년에는 당시 비공인 리그였던 페더럴 리그 소속 클리블랜드 그린 삭스의 감독을 잠시 맡았으나[39], 이후로는 야구계에서 직접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16년에는 오하이오주 터스커러워스 군의 재무관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41] 비록 현장을 떠났지만, 은퇴 후에도 여러 야구 관련 행사에는 꾸준히 참여했다.[3]

1933년,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아내 로바(Roba)가 세상을 떠났다.[42][1][3] 아내 사후 여러 직업을 거쳤으며, 말년에는 친구인 존 베네덤과 루스 베네덤 부부의 집에서 함께 살며 농장 잡일 등을 도왔다.[3] 1940년대까지 그의 주 수입원은 연간 300USD의 주식 배당금뿐이었다고 전해진다.[1][43]

1937년, 은퇴한 지 26년 만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명예의 전당에 개인 소장품을 기증한 초창기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1955년 11월 4일, 88세의 나이로 오하이오주 뉴커머스타운 인근 베네덤 부부의 농장에서 세상을 떠났으며,[1] 오하이오주 페올리에 안장되었다.[44]

5. 사이 영 상

메이저 리그는 사이 영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6년 사이 영 상을 제정했다. 최초의 사이 영 상 수상자 투표는 1956년에 이루어졌으며, 첫 수상의 영광은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 소속이었던 돈 뉴컴에게 돌아갔다. 초기에는 내셔널 리그아메리칸 리그를 통합하여 단 한 명의 투수에게만 상을 수여했으나, 1967년부터는 각 리그에서 최고의 투수를 한 명씩 선정하여 시상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6. 사이 영의 업적과 유산

1908년 영의 투구 모습을 찍은 사진과 그것을 본따서 그린 그림.


사이 영은 1911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통산 511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이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그 누구도 넘어서지 못한 압도적인 기록으로, 당시 2위였던 퍼드 갤빈의 364승과는 큰 차이가 난다. 훗날 417승으로 역대 2위에 오르게 되는 월터 존슨은 영이 은퇴할 당시 이제 막 네 번째 시즌을 치르고 있었다.[34] 영의 511승 기록은 투수 분업화가 정착된 현대 야구에서는 사실상 깨질 수 없는 불멸의 기록으로 평가받는다.[68]

영은 미국 프로야구의 초창기부터 현대 야구의 문턱까지, 약 22년에 걸쳐 선수 생활을 했다. 그는 1876년 내셔널 리그 창립 멤버였던 캡 앤슨을 상대로 투구했고, 1930년대까지 활약한 에디 콜린스와도 맞대결을 펼쳤다. 그가 데뷔했을 당시에는 투수들이 언더핸드로 던져야 했고, 파울스트라이크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가 데뷔한 지 4년 만에 투수판은 이전보다 약 3m 뒤로 물러났으며, 프로 6년 차까지는 글러브 없이 공을 던졌다.[3] 또한 그의 네 번째 시즌 중 투수판과 홈플레이트 사이의 거리가 현재와 같은 60피트 6인치(18.44m)로 늘어나는 규칙 개정이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영은 꾸준히 최고의 투수로 활약하며 야구 역사의 산증인이 되었다.

사이 영의 주요 메이저 리그 통산 기록 (역대 순위)
부문기록순위
승리5111위[29]
투구 이닝7,3561위[30]
선발 등판8151위[31]
완투7491위[32]
패전3161위[33]
자책점2,1471위[54]
피안타7,0921위[54]
완봉승764위[35]
탈삼진2,80320위 (은퇴 시점 1위)[34]



영은 리그에서 다섯 번이나 다승왕(1892년, 1895년, 1901년~1903년)을 차지했고, 두 번 2위에 올랐다. 개인 한 시즌 최다승은 1892년의 36승이다. 그는 무려 15시즌 동안 20승 이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공동 2위인 크리스티 매튜슨과 워렌 스판보다 2시즌이나 많은 기록이다. 평균자책점 부문에서는 두 차례(1892년 1.93, 1901년 1.62)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세 시즌 동안 2위를 기록했다. 여섯 시즌 동안 2.00 미만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이는 공의 반발력이 낮았던 데드볼 시대임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두 번(1896년 140개, 1901년 158개) 리그 탈삼진 1위에 올랐고, 일곱 번이나 리그 최다 완봉승 투수였다.[15]

나이가 들면서 구속은 줄었지만, 영은 대신 뛰어난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상대했다. 그는 "변화구 구사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제구력이다. 원하는 곳에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변화구와 제구력을 동시에 잡으려는 투수보다 훨씬 빨리 발전할 수 있다. 변화구는 제구력에 붙는 장식품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제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1893년부터 1906년까지 14년 연속으로 리그에서 9이닝당 가장 적은 볼넷을 허용한 투수였으며, 22년의 프로 생활 동안 이 부문에서 6위 아래로 내려간 적이 단 두 번뿐이었다. 훗날 중요 지표로 자리 잡은 이닝당 출루 허용률(WHIP)을 소급 적용했을 때, 영은 일곱 시즌 동안 리그 1위를 차지했고, 다른 일곱 시즌 동안 2위 또는 3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제구력을 자랑했다.[15]

뛰어난 제구력과 더불어 영의 가장 큰 장점은 부상을 모르는 강철 체력이었다. 그는 1891년부터 1909년까지 19년 연속으로 리그 투구 이닝 10걸 안에 들었으며, 그중 14년은 5위 안에 들 정도로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프로 경력 초기에는 하루에 두 경기를 연속으로 등판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춘계 훈련 외에는 거의 연습 투구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는데, "이미 너무 많이 던져 팔이 지친 것을 알기에 굳이 혹사시킬 필요가 없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경기 전에도 3~4분 정도만 몸을 풀고 바로 마운드에 올랐으며, 불펜 투구 없이 구원 등판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는 "내 목표는 타자들이 내 공을 맞춰서 투구 수를 최대한 절약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매일 등판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라고 말했다. 시즌이 끝나면 농장 일을 하며 체력을 단련했고, 덕분에 44세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영은 1901년 신생 리그인 아메리칸 리그보스턴 아메리칸스(현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다. 당시 내셔널 리그의 연봉 상한선(2,400달러)보다 높은 3500USD의 계약 조건이었다.[48] 이적 첫해, 영은 다승, 탈삼진,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모두 리그 1위를 차지하며 투수 부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15] 그는 1903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첫 번째 현대 월드 시리즈에서 2승 1패, 평균자책점 1.85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사이 영의 노히터 및 퍼펙트 게임 기록
날짜상대 팀비고
1897년 9월 18일신시내티 레즈노히트 노런
1904년 5월 5일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퍼펙트 게임 (현대 야구 최초)[18][19]
1908년 6월 30일뉴욕 하이랜더스노히트 노런 (당시 최고령 기록)[52]



1904년 5월 5일, 영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아메리칸 리그 최초이자 현대 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이는 투수판 거리가 60피트 6인치(18.44m)로 바뀐 이후 최초의 퍼펙트 게임이기도 했다. 당시 37세였던 영의 이 기록은 2004년 랜디 존슨이 40세의 나이로 경신하기 전까지 최고령 퍼펙트 게임 기록으로 남아있었다.[49] 이 퍼펙트 게임을 전후로 영은 25와 1/3이닝 연속 무안타(76타자 연속 무안타)라는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웠으며, 이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21][22] 또한 당시 신기록이었던 45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도 세웠다. 1908년에는 41세의 나이로 개인 통산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는데, 이는 놀런 라이언이 1990년에 경신하기 전까지 82년간 최고령 노히터 기록이었다.[52]

투수로서뿐만 아니라 타자로서도 준수한 능력을 보였다. 통산 타율 .210(2960타수 623안타)을 기록했으며, 18개의 홈런과 290타점을 올렸다.[15]

사이 영의 명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및 박물관


사이 영의 업적은 야구계에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1937년, 그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의 사후 1년 뒤인 1956년, 메이저 리그 커미셔너 포드 프릭은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양대 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하는 사이 영 상(Cy Young Award)을 제정했다.[55] 처음에는 양대 리그를 통틀어 한 명에게만 수여했지만, 1967년부터는 각 리그별로 한 명씩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1999년, ''스포팅 뉴스''는 그를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100인" 중 14위로 선정했으며,[46] 같은 해 팬들의 투표로 메이저 리그 올 센추리 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보스턴 레드삭스 역사상 최다승 기록(192승)은 로저 클레멘스와 함께 공동 1위로 남아있다.[37] 노스이스턴 대학교 캠퍼스 내 옛 헌팅턴 애비뉴 구장 터에는 1993년 그의 동상이 세워져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45] 시인 오그든 내시는 1949년 잡지 ''스포츠''에 기고한 시 "어제의 라인업"에서 영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36]

>''Y는 영을 의미해''
''위대한 사이 영;''
''사람들은 그를 상대로 타석에 섰지만,''
''나는 그 이유를 몰랐네.''

7. 기타

구속이 줄어들면서 영은 뛰어난 제구력으로 타자들을 제압했다. 그는 "혹자는 어떤 것보다 변화구를 잘 구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공을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는 젊은 투수는, 제구력과 변화구 구사력을 둘 다 잡으려 하는 투수보다 훨씬 빨리 좋은 변화구 투수가 될 수 있다. 변화구는 제구력에 붙는 장식품에 불과하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8]

실제로 1893년부터 1906년까지 14년 연속으로 사이 영은 리그에서 9이닝당 가장 적은 볼넷만 허용한 선수였고, 두 번의 시즌은 두 번째로 적은 볼넷 비율을 기록했다. 22년간 프로에서 활약하면서 영은 이 분야에서 6위 이하로 떨어진 적이 두 번밖에 없었다. 이닝당 출루 허용률(WHIP) 개념은 영이 죽고 난 한참 뒤에 생겼지만, 소급하여 적용할 경우 영은 일곱 시즌에 걸쳐 리그에서 가장 낮은 WHIP을 기록했고, 또 다른 일곱 시즌 동안 2위 혹은 3위를 차지했다.[15]

뛰어난 제구력 외에도 그는 부상을 모르는 철완이었다. 이는 어깨의 높낮이를 다양하게 바꿔서 투구할 수 있는 능력(오버핸드, 스리쿼터, 사이드암, 심지어 언더핸드까지) 덕분이기도 했다. 영은 1891년부터 1909년까지 19년 연속 리그 내 최다 이닝 투구 10걸 안에 꾸준히 들었고, 14년에 걸쳐 다섯 손가락 내에 들 정도로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12] 프로 인생 초기 10년 동안, 영은 하루 동안 연속 두 경기에 등판한 적도 많았다.[12]

습관적으로, 영은 춘계 훈련 시기를 제외하고는 연습 투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는 "공을 너무 많이 던져서 팔이 지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굳이 혹사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8] 경기 전 준비에 대해서는 "나는 대부분 투수들처럼 10분, 15분 전 연습투구를 한 적이 없다. 3~4분 동안 몸을 풀고, 5분이 되면 투수판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불펜 투구를 한 적도 전혀 없다... 연습투구 몇 개로 등판준비를 끝냈다. 그러고도 제구력에 문제가 없었다. 내 목표는 타자들이 내 공을 맞춰서 투구수를 최대한 절약하는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나는 매일매일 등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8]

영은 시즌 종료 후 벌목 등 농장 잡일에 전념했고, 이를 통해 44세까지 투구에 필요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은퇴한 후에도 영의 팔은 싱싱했지만, 체중이 불어나 더 이상 투수로 뛰기는 힘들어졌다.

1908년 8월 13일, 아메리칸 리그는 '사이 영의 날'(Cy Young Day) 행사를 열어 올스타 팀과 영이 속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이벤트 경기를 개최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53]

1910년, 영은 야구와 농장 일을 그만둔 후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알려졌다.[38] 1913년에는 당시 비공인 리그였던 페더럴 리그의 클리블랜드 그린 삭스 감독을 잠시 맡았으나,[39] 이후로는 야구계에서 직접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프리메이슨이기도 했다.[40] 1916년에는 오하이오주 터스커러워스 군의 군 재무관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41]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아내 로바[42]가 1933년에 사망한 후,[1][3] 영은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친구인 존과 루스 베네덤 부부와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해 잡일을 도왔다. 은퇴 후에도 많은 야구 관련 행사에 참여했으며,[3] 1937년에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기념품을 기증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55년 11월 4일, 영은 베네덤 부부의 농장에서 관상동맥 폐색증으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그는 오하이오주 페올리에 묻혔다.[44]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후인 1956년 메이저 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하는 사이 영 상이 제정되었다.[5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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