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선진리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천선진리성은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진항 북방에 있는 반도 지형에 위치한 성이다. 고려 시대에는 조창을 방어하기 위한 토성이 축조되었고, 조선 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육로로 조세 운송이 변경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이 왜성을 쌓고 주둔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제2차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곳으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수군이 주둔하며 해안을 방어했고, 구한말에 진보가 해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이 공원으로 정비했으나, 해방 후 석비가 파괴되었다. 현재는 사적 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흙으로 쌓은 성벽과 터가 남아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사천시의 문화유산 - 사천읍성
사천읍성은 조선시대에 백성을 보호하고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읍성으로, 현재는 일부 성곽과 산성공원이 남아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 사천시의 문화유산 - 사천 아두섬 공룡화석 산지
사천 아두섬 공룡화석 산지는 경상 누층군에서 다양한 공룡 발자국, 공룡알, 공룡 뼈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 익룡의 이족 보행 가능성을 시사하는 뒷발 자국 화석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보존을 위해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다. - 사천시의 건축물 - 완사역
완사역은 사천시에 위치한 경전선 철도역으로, 옥녀봉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을 따라 이름이 지어졌으며, 1968년 영업을 시작하여 현재 섬식 승강장 1면 2선 구조로 운영된다. - 사천시의 건축물 - 다솔사역
다솔사역은 1968년 영업을 시작한 경전선의 폐역으로,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 간이역사로 대체, 화물 및 여객 취급 중단을 거쳐 2016년 경전선 이설로 폐역된 섬식 승강장의 지상역이었다. - 해제된 대한민국의 사적 - 소쇄원
전라남도 담양군에 위치한 소쇄원은 양산보가 기묘사화 이후 은거하며 1520년대 후반부터 1530년대 중반에 걸쳐 건립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돋보이는 원림이자 추월정, 광풍각, 대봉대 등의 건물과 아름다운 계곡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국가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되어 현재 양산보의 15대손이 관리하며 학술 연구와 사회적 관심을 받고 있다. - 해제된 대한민국의 사적 - 울산왜성
울산왜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울산에 축성한 왜성으로, 도산왜성이라고도 불렸으며 현재는 학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석축 일부가 남아 있는 곳이다.
사천선진리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사천선진리성 |
한자 표기 | 泗川船津里城 |
![]() | |
유형 |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
지정 번호 | 274 |
지정일 | 1998년 11월 13일 |
소재지 |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770번지 외 |
종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소유자 | 사천시 |
관리자 | 사천시 |
면적 | 알 수 없음 |
수량 | 1원 |
참고 사항 | 사천 선진리 |
지정 정보 (과거) | |
유형 (과거) | 사적 |
지정 번호 (과거) | 50 |
지정일 (과거) | 1963년 1월 21일 |
해제일 (과거) | 1997년 1월 1일 |
2. 역사
고려 초기, 이 지역은 남도수군의 조창 중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있던 곳으로, 통양포 또는 통조포로 불렸다. 조창을 방어하기 위해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2]
조선 시대에는 통조포라는 지명이 굳어졌고, 조창은 통양창(通洋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태종 3년(1403년) 왜구가 통양창에 출몰하자 조세 운송 방식이 해로에서 육로로 변경되었고, 통양창의 역할은 축소되었다.[2]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는 토성 주변에 왜성을 축조하였고, 시마즈 요시히로와 시마즈 다다쓰네 부자가 성 수비를 맡았다. 사천선진리성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선조 25년(1592년) 사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2차 사천해전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 선조 31년(1598년) 동일원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이 전시 중 오발 사고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일본군이 역습하여 연합군이 패주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전투에서 연합군 7천~8천 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3]
이후 숙종 때 진보가 설치되어 수군이 주둔하며 해안을 방어하였다. 영조 36년(1760년)에는 진주 가산창의 방어를 맡은 군대가 주둔하였다.[3] 1895년 모든 군영이 해체될 때 선진리성의 진보도 함께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3]
1918년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이 성을 정비하고 조상을 기리는 석비를 세웠으나, 해방 후 주민들이 석비를 파괴하였다. 1978년 공원 내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천해전 승첩비가 건립되었으며, 현재 시마즈 가문이 세웠던 비석 터에는 한국 전쟁 중 순국한 공군 장병의 위령비인 충령비가 세워져 있다.[3]
1936년 고적 제81호로 지정된 뒤, 1963년 사적 제50호로, 1998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2. 1. 고려 시대
고려 초기 남도수군의 조창 중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있어 이 지역은 통양포 또는 통조포로 불렸으며, 조창을 방어하기 위해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2]2. 2.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통조포로 지명이 굳어졌고, 조창은 통양창(通洋倉)으로 개명되었다. 태종 3년(1403년) 통양창에 왜구가 출몰하자 조세 운송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으며 통양창의 역할은 축소되었다.[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는 토성 주변에 왜성을 쌓았고, 시마즈 요시히로와 시마즈 다다쓰네 부자가 성의 수비를 맡았다. 사천선진리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선조 25년(1592년) 사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2차 사천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적선 13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하나는 선조 31년(1598년) 동일원이 이끄는 3만의 조명 연합군이 전시 중 오발로 탄약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연합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8천의 일본군이 성을 나와 역습한 사건이다. 이 역습으로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명 연합군 3만여 명을 전사시켰다고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7천 8백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명 연합군의 병력이 3만여 명임을 감안하면, 아마 이전까지 전사한 조명 연합군의 수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추정된다.[3]
이후 숙종 때에 진보가 설치되어 수군이 주둔하였고, 해안을 방어하였다. 영조 36년(1760년)에는 진주에 설치된 가산창의 방어 임무와 호위를 맡은 능노군, 포수, 화포수, 사궁으로 이루어진 군이 주둔하였다.[3]
2. 3. 임진왜란과 선진리성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진항 북쪽에 있는 사천선진리성은 삼면이 바다와 접하고 동쪽만 육지와 닿아 있는 반도 지형에 세워졌다.[1] 조선 시대에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선진(싸움터에서 앞장서는 군대)이 설치되기도 했다. 『읍지』와 『대동지지』 기록에 따르면, 이 선진에는 전함 1척, 병선 1척, 하후선 2척이 있어 삼천진이라 불렸다. 선조 30년(1597년)에는 왜의 석만자가 이곳에서 지내면서 울산의 도산, 순천의 왜교와 더불어 3굴이라 불렀다고 한다.[1]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은 성으로, 규모나 구조면에서 볼 때 활동의 주요 근거지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격파 당하기도 하였다. 현재 흙으로 쌓은 성벽이 1㎞가량 남아 있으며, 돌로 만든 누(樓)는 무너졌으나 대체로 성의 규모대로 터가 남아 있다.[1]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는 토성 주변에 왜성을 쌓았고, 요시히로, 다다쓰네 부자가 성의 수비를 맡았다. 사천선진리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선조 25년(1592년) 사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2차 사천해전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 선조 31년(1598년) 동일원이 이끄는 3만의 조명연합군이 전시 중 오발로 탄약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혼란에 빠졌다. 이때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8천의 일본군이 성을 나와 역습하였고,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 3만여 명을 전사시켰다고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7,8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조명연합군의 병력이 3만여 명임을 들어 이전까지 전사한 조명연합군의 수를 포함한 것으로 보고 있다.[3]
2. 4. 조선 후기 ~ 구한말
조선 시대에 들어서 통조포로 지명이 굳어졌고, 조창은 통양창(通洋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태종 3년(1403년) 통양창에 왜구가 출몰하자 조세 운송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으며 통양창의 역할은 축소되었다.[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는 토성 주변에 왜성을 쌓았고, 요시히로, 다다쓰네 부자가 성의 수비를 맡았다. 이 사천선진리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선조 25년(1592년) 사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2차 사천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적선 13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하나는 선조 31년(1598년) 동일원이 이끄는 3만의 조명연합군이 전시 중 오발로 탄약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연합군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틈을 노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8천의 일본군이 성을 나와 역습하였고,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 3만여 명을 전사시켰다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7,8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조명연합군의 병력이 3만여 명임을 들어 아마 이전까지 전사한 조명연합군의 수를 포함한 것으로 보고 있다.[3]
이후 숙종 때에 진보가 설치되어 수군이 주둔하였고, 해안을 방어하였다. 또, 영조 36년(1760년) 진주에 설치된 가산창의 방어 임무와 호위를 맡은 능노군, 포수, 화포수, 사궁으로 이루어진 군이 주둔하였다.[3]
구한말인 1895년 통제영을 비롯한 모든 군영이 해체될 때 선진리성에 설치된 진보도 해체된 것으로 보고 있다.[3]
2. 5.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1918년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이 성을 매수 또는 기부받아 공원으로 정비하고 그 위에 조상을 기리는 석비를 세웠다. 하지만 해방 후 석비는 마을 주민에 의해 파괴되었다. 1978년 공원 내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천해전 승첩비가 세워졌으며, 현재 시마즈 가문이 세웠던 비석 터에는 한국 전쟁 중 순국한 공군 장병의 위령비인 충령비가 세워져 있다.[3]1936년 고적 제81호로 지정된 뒤, 1963년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었고, 1998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3. 지리적 특징 및 구조
사천선진리성은 사천읍에서 약 7km 서남쪽에 위치한 평산성이다. 바다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조창이 설치되어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조창 터에 왜성을 쌓아 주둔하였고, 정유재란 때 성 주변에서 일본군과 조명 연합군의 큰 싸움이 있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 성 주변은 선진공원으로 정비되었고, 일부는 농지로 변해있다. 두 차례의 시·발굴조사에서 왜성의 성벽(석원)이 확인되었으며, 500×600cm의 북곽이 딸린 ‘ㄱ’자 형태의 천수각과 폭 150cm의 문설주가 설치된 왜성 문지(호구), 주거지 2기, 수혈 70여 기가 조사되었는데 목책열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와편이 주류를 이루고 문양은 무문양, 사격자문, 복합문, 어골문 등이 시문되어 있다.
참조
[1]
안내문
현지 안내문 인용
[2]
웹사이트
경남관광길잡이
http://www.gntour.co[...]
2008-12-13
[3]
웹사이트
경남관광길잡이
http://www.gntour.co[...]
2008-12-13
[4]
보고서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 1185번지 일원 내 梁山 架山里遺蹟
https://www.cha.go.k[...]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5-09-01
[4]
보고서
대한주택공사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양산석산지구 文化遺蹟 地表調査 報告書
http://www.feaci.or.[...]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06-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