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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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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척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김추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고려 시대에 김추의 후손 김위옹이 실직군왕에 봉해졌고, 조선 시대에는 개국원종공신 김천봉, 중종반정의 정국공신 김병충 등 다양한 인물을 배출했다. 근현대에는 정치, 경제,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본관은 삼척이며,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동해시, 인제군, 영월군 등에 집성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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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척 김씨 - 김우영 (1969년)
    김우영은 성균관대학교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국회의원 비서관, 노무현재단 기획위원, 은평구청장, 대통령비서실 비서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22대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서울 은평구 을)에 당선되었다.
삼척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씨삼척 김씨
三陟金氏
관향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시조김추(金錘)
원시조김알지(金閼智)
집성촌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장항리
함경남도 영흥군 순령면 송전리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도화1리
주요 인물김위, 김인궤, 김상, 김률, 김미, 김령, 김건
년도2015
인구92,671명
비고삼척 김씨 대종회

2. 역사

삼척 김씨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를 원조로 하며,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김추(金錘)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삼척군(三陟君)에 책봉되어 관향(貫鄕)을 삼척(三陟)으로 하였다. 김추(金錘)는 김알지의 29세손이다.

아들 김위옹(金渭翁)은 경순왕의 손자로, 그의 음덕을 입어 고려조에 검교·사농경을 거쳐 은청광록대부상주국좌승상을 지내고 실직군왕(悉直郡王)에 봉해졌다고 한다.[1][2][3]

후손 김인궤(金仁軌)는 고려 충렬왕때 전법총랑(典法摠郞) 호군전객령(護軍典客令)을 역임하고 조현대부(朝顯大夫)에 올랐는데, 아버지는 대장군 김윤성(金允成)이다. 그는 안동부(安東府) 가야향(加也鄕) 사람인데, 호군(護軍)의 벼슬에 올라 1284년(충렬왕 10)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워 그 향(鄕)을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시켰다.[4] 1393년(태조2) 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에 증직(贈職)되고, 왕으로부터 서대(犀帶)를 받았다. 일파(一派)를 형성하였다.[5]

2. 1. 시조 및 초기 역사

삼척 김씨(三陟 金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제56대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여덟째 아들인 김추(金錘)이다. 그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고, 자손들이 관향(貫鄕)을 삼척(三陟)으로 하였다. 그의 외아들 김위옹(渭翁)은 검교사농경(檢校司農卿)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주국(上柱國)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冊祿)되어 실직군(悉直君)에 봉(封)하여졌다. 이후 고려 왕실에서 경순대왕(敬順大王)의 후손(後孫)으로는 유일(唯一)하게 실직군왕(悉直郡王)으로 책봉(冊封)되면서 그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지배하였다.

김위옹(金渭翁)의 장남 김자영(金自英)은 배융교위(陪戎校尉) 차남 김자남(自男)은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였다. 5세손 김복영(僕永)은 관찰사(觀察使), 김승련(承鍊)은 사공(司空:정1품)을 지냈다. 6세손 김정위(正位)는 동래부사(東來府使), 7세손 김자주(自柱)와 10세손 김윤성(允成)은 대장군(大將軍), 김정휘(正暉)는 도통사(都統使) 대장군(大將軍), 김산수(山壽)는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였다. 11세손 김득강(得江)은 간의대부(諫議大夫), 김해(偕)는 호부상서(戶部尙書), 김응(膺)은 상장군(上將軍) 등을 역임(歷任)하였다. 김인궤(仁軌)는 충열왕(忠烈王) 16년(1290년)에 합단적(哈丹賊)의 칩임시 호군(護軍)으로서 왕(王)을 호위(護衛)하여 많은 공(功)을 세워 가야향(加也鄕)을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昇格)시켜 주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11세손 김천봉(天奉)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13세손 김익정(益精)은 이부상서(吏部尙書), 김학(鶴)은 전의감(典醫監), 김광연(光鍊)은 전리판서(典理判書), 김광유(光裕)는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였다. 14세손 김충민(忠敏)은 한성판윤(漢城判尹), 김미(美)는 대사간(大司諫), 15세손 김성경(成慶)은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김욱(郁)은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중순(仲淳)과 김계순(季淳)은 상장군(上將軍), 김말순(末淳)은 군자정감(軍資正監) 등을 역임하였다.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김중순(仲淳)은 단종손위(端宗遜位)를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려장망혜(藜杖芒鞋)로 여생(餘生)을 마쳤다는 기록이 상장군(上將軍) 김공묘갈(金公墓碣)에 적혀있다.

조선 중종 때 박원종, 성희안 등과 함께 연산군의 혼정(昏政)에 반기를 들어 중종반정을 성공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김병충(金秉忠)은 정국공신(靖國功臣) 107명 중 한 명이다.

삼포왜란때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된 김양필(金良弼)은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 겸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부임하여 치적을 쌓았다. 그의 동생인 김양보(金良輔)는 임진왜란 중 어가(御駕)를 의주까지 호송(護送)하였다가 환어도 함께 한 공(功)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고, 척주군(陟州君)에 봉(封)해졌다.

조선 건국 초 원종공신(原從功臣) 봉열대부(奉列大夫)였던 김성고(金成告), 목릉(穆陵)의 용사역(龍蛇役)에 공(功)을 세워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추증(追贈)된 김론동(金論仝)과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왕자사부(王子師傅)로서 왕(王)을 호송(護送)한 공(功)으로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으로 책록(冊祿)되어 진성군(眞城君)으로 봉(封)하여진 김기문(金起文) 등을 향사(享祀)하는 삼공신묘(三功臣廟)는 충의(忠義)가 가치기준이 되었던 그 시대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뒤 충절을 높이 평가받은 김언수(金彦守)공에게 인조는 병조참의를 제수하였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개국2년(開國2年)에 고조부(高祖父)인 이안사와 비(妣)를 목조대왕(穆祖大王)과 효공왕후로 추존(追尊)하면서 목조대왕(穆祖大王)이 부모와 같이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진외조부인 11세손 김인궤(金仁軌) 가문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으면서 거주(居住)하였던 삼척군(三陟郡)을 부(府)로 승격(昇格)시켰다. 고려조(高麗朝)에서 호군(護軍) 전객령(典客令) 전법총랑(典法摠郞), 조현대부(朝顯大夫)를 역임(歷任)하였던 김인궤(金仁軌)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추봉(追封)하였다. 그리고 삼척시 미로면 노동에 있는 5대 조부(祖父)인 이양무의 묘(墓)와 미로면 동산리에 있는 비(妣)의 묘(墓)를 준경릉과 영경릉(永慶陵)으로 높였다. 양릉(兩陵)에 매년 명절시 참례(參禮)하여 제(祭)를 올릴 수 없으므로 친히 사용하던 관복대(官服帶)인 홍서대(紅犀帶)를 삼척부사(三陟府使)에게 하사(下賜)하고 부사(府使)로 하여금 동 홍서대(紅犀帶)를 착복대(着服帶)하여 제(祭)를 대행(代行)케 하였다. 영조 23년(1747년)에 왕명(王命)으로 홍서대(紅犀帶)를 삼척김씨(三陟金氏) 종중(宗中)에 하사(下賜)하였다. 홍서대(紅犀帶)는 강원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삼척김씨(三陟金氏) 보본단(報本壇) 경내(境內) 보대운한각(寶帶雲漢閣)에 소장(所藏)되어 있다.

태종 원년(太宗元年)(1400년)에 왕(王)의 전교(傳敎)로 신라경순대왕(新羅敬順大王)의 후손(後孫)을 대대(代代)로 보살피고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며 비록 지서(枝庶)라도 군보(軍保)에 정하지 말며 사태(沙汰)시 동원(動員)하지 말고 고강(考講)할 때 강례(講例)에 들지 않도록 정녕(丁寧)하게 신칙(申飭)하였다.

그 후에도 선조(宣祖:1567년~1608년) 효종(孝宗:1649년~1659년)왕때도 같은 교지(敎旨)를 하였다고 규장각소장도서(奎章閣所藏圖書 상백고 929.2G429)인 김씨소원록(金氏溯源錄)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2. 2. 씨족의 역사

삼척 김씨는 신라 제56대 경순대왕의 여덟째 아들 김추(金錘)를 시조로 한다. 김추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으며, 자손들이 삼척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의 외아들 김위옹(金渭翁)은 검교사농경(檢校司農卿)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주국(上柱國)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어 실직군(悉直君)에 봉해졌다. 이후 고려 왕실에서 경순왕의 후손으로는 유일하게 실직군왕(悉直郡王)으로 책봉되면서 그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지배하였다.

김위옹의 장남 김자영(金自英)은 배융교위(陪戎校尉), 차남 김자남(金自男)은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였다. 5세손 김복영(金僕永)은 관찰사(觀察使), 김승련(金承鍊)은 사공(司空:정1품)을 지냈다. 6세손 김정위(金正位)는 동래부사(東來府使), 7세손 김자주(金自柱)와 10세손 김윤성(金允成)은 대장군(大將軍), 김정휘(金正暉)는 도통사(都統使) 대장군(大將軍), 김산수(金山壽)는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11세손 김득강(金得江)은 간의대부(諫議大夫), 김해(金偕)는 호부상서(戶部尙書), 김응(金膺)은 상장군(上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김인궤(金仁軌)는 충렬왕 16년(1290년)에 합단적(哈丹賊)의 침입 시 호군(護軍)으로서 왕을 호위하여 공을 세워 가야향(加也鄕)을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조선조에 와서 11세손 김천봉(金天奉)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13세손 김익정(金益精)은 이부상서(吏部尙書), 김학(金鶴)은 전의감(典醫監), 김광연(金光鍊)은 전리판서(典理判書), 김광유(金光裕)는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14세손 김충민(金忠敏)은 한성판윤(漢城判尹), 김미(金美)는 대사간(大司諫), 15세손 김성경(金成慶)은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김욱(金郁)은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중순(金仲淳)과 김계순(金季淳)은 상장군(上將軍), 김말순(金末淳)은 군자정감(軍資正監) 등을 역임하였다.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김중순(金仲淳)은 단종 손위(遜位)를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였다는 기록이 김공묘갈(金公墓碣)에 적혀있다.

중종반정박원종, 성희안 등과 함께 연산군(燕山君)의 혼정(昏政)에 반기를 들어 중종반정을 성공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김병충(金秉忠)은 정국공신(靖國功臣) 107명 중 한 명이다. 중종 때 동래부사(東來府使)를 지낸 김양필(金良弼)은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 겸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부임하였다. 그의 동생인 김양보(金良輔)도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분으로 임진왜란 중 어가(御駕)를 의주까지 호송(護送)하였다가 환어도 함께 한 공(功)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고, 척주군(陟州君)에 봉해졌다.

조선 건국 초 원종공신(原從功臣) 봉열대부(奉列大夫)였던 김성고(金成告), 목릉(穆陵)의 용사역(龍蛇役)에 공을 세워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추증된 김론동(金論仝)과 임진왜란 중 왕자사부(王子師傅)로서 왕을 호송한 공으로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으로 책록되어 진성군(眞城君)으로 봉하여진 김기문(金起文) 등을 향사(享祀)하는 삼공신묘(三功臣廟)가 있다.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김언수(金彦守)는 그 충절을 높이 평가한 인조에 의해 병조참의에 제수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 2년에 고조부인 이안사와 비(妣)를 목조대왕과 효공왕후(孝恭王后)로 추존하면서, 목조대왕이 보살핌을 받으며 거주하였던 삼척군(陟郡)을 부(府)로 승격시키고, 김인궤(金仁軌)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추봉하였다. 또한 이양무의 묘와 비의 묘를 준경릉과 영경릉으로 높이고, 사용하던 관복대(官服帶)인 홍서대(紅犀帶)를 삼척부사(陟府使)에게 하사하여 제(祭)를 대행케 하였다. 영조 23년(1747년)에 왕명으로 홍서대는 삼척김씨 종중에 하사되었으며, 강원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삼척김씨 보본단(報本壇) 경내 보대운한각(寶帶雲漢閣)에 소장되어 있다.

태종 원년(1400년)에는 왕의 전교(傳敎)로 신라 경순대왕의 후손을 대대로 보살피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며, 군보(軍保)에 정하지 말고 고강(考講)할 때 강례(講例)에 들지 않도록 하였다. 그 후에도 선조(1567년~1608년), 효종(1649년~1659년) 때도 같은 교지(敎旨)를 하였다고 규장각소장도서(奎章閣所藏圖書 상백고 929.2G429)인 김씨소원록(金氏溯源錄)에 기록되어 있다.

3. 본관

삼척은 삼한시대에 실직국(悉直國)이었는데,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일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나, 505년(신라 지증왕 6) 신라가 다시 회복해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삼척군으로 개칭되고, 강릉(江陵)·명주(溟州)의 관하가 되었다. 영현으로 죽령(竹嶺)·만경(滿卿)·우계(羽溪)·해리(海利)를 관할 하였다.

995년(성종 14) 척주(陟州)로 승격되고, 1018년(현종 9) 삼척현으로 강등되어 동계에 속했다가 1377년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 1393년(태조 2)에 태조의 5대조 목조(穆祖)의 외향이므로 부(府)로 승격되어 부사가 파견되었다. 1413년(태종 13)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척주·진주 등의 별호로 불렸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강릉부 삼척군, 1896년강원도 삼척군이 되었다. 1986년에 삼척읍이 삼척시로 승격되었다.

4. 인물

4. 1. 고려

김위옹(金渭翁)의 아들 김자남(金自男)은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를 지냈다. 김자영(金自英)의 증손 김정위(金正位)는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냈다. 김자영(金自英)은 김위옹(金渭翁)의 첫째 아들로 교위(校尉)를 지냈다.

김도남(金圖南)은 공조참판(工曺參判)과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했다. 김중순(金仲淳)과 김계순(金季淳)은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김난손(金蘭孫)은 정국원종이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김득강(金得綱)은 용담부사를 지냈다.

김보(金寶)는 병조참정(兵曹參正)과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역임했으며, 아버지는 김양좌(金良佐)이다. 김윤성(金允成)은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도통사(都統使)와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김정휘(金正暉)의 아들 김유(金儒)는 전리총랑 친종호군(典理摠郎親從護軍)과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김산수(金山壽)는 안동 부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득강(金得江)은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김인궤(金仁軌)는 호군(護軍)으로 충렬왕 때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워 일파(一派)를 형성하였다. 그의 형 김의궤(金義軌)는 1347년(충목왕 3)에 급제하여 문하시랑(門下侍郞)과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

김위(金偉)는 지양주사(知襄州事)를 지냈고, 김광연(金光演)은 전리판서(典理判書)와 중랑장을 역임하였다.

4. 2. 조선

삼척 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8명을 배출하였다.[6] 주요 인물로는 조선 개국원종공신 김천봉(金天奉)이 있다. 김충민(金忠敏)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계(金啓)는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7] 김상(金尙)은 1405년(태종 5) 식년시 동진사에 급제하고 숙천부사(肅川府使)를 지냈다. 김율(金硉)은 1478년(성종 9) 친시에 급제하여 제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김미(金亹)는 1522년(중종 17) 식년시에 급제한 후 한림(翰林), 옥당(玉堂),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를 거쳤다. 김병충(金秉忠)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靖國功臣)이다. 김양보(金良輔)는 내시(內侍)로서 선조 때 호종공신(扈聖功臣) 3등에 올랐다. 김취장(金就章)은 1630년(인조 8)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냈다. 김염(金埝)은 1682년(숙종 8)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曺佐郞)과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그 외에도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김의택(金儀宅), 한성좌윤(漢城左尹) 김사남(金士男), 왕자사부(王子師傅) 김기문(金起文), 한성부윤 김충민(金忠敏), 승정원 좌부승지 김응한(金應漢), 호조판서 김억수(金億壽) 등이 있다. 김병수(金秉洙)는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였고, 김달준(金達㻐)은 1851년(철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김문수(金汶秀)는 고종 때 장연부사를 지냈으며, 김윤성(金允聲)은 1866년(고종 3) 문과에 급제하였다.

4. 3. 근·현대

삼척 김씨는 근현대에 들어 여러 분야에서 주요 인물들을 배출했다. 김건(金 鍵)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김 윤(金 潤)은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강원대 교수로 재직했다. 김 일(金 一)은 공학박사 학위와 함께 단국대 교수 및 신라김씨연합대종원교육위원으로 활동했다. 김 진(金 辰)은 서울대 법학 박사 교수로 재직했다. 김 진(金 振)은 치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카톨릭대 교수 및 성모병원 치과장을 역임했다. 김 희(金 熙)는 서울 대신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김규환(金圭煥)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자유한국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했다. 김대수(金大壽)는 공학 박사로 삼척대 총장과 삼척시장(민선4~5대)을 역임했다. 김도준(金道俊)은 강원도의회 의장을 지냈다. 김동열(金東㤠)은 강원도의회 의원, 철탑산업훈장 수훈, 한국농수산유통공사 상임이사,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중앙회장을 역임했다.

김상용(金相龍)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했다. 김상용(金相龍)은 강원도의회 의원과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중앙회장을 역임했다. 김성기(金盛基)는 가평군수(민선5~7기)를 지냈다. 김수근(金洙根)은 강원도 교육감을 역임했다. 김수진(金洙振)은 중앙회 고문, 인천국제공항 상임고문, 전 대통령특보를 지냈다.

김양호(金良鎬)는 삼척시장을 역임하고 강원도의회 의원을 지냈다. 김연식(金鍊寔)은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태백시장, 강원도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김용호(金龍鎬)는 국회의원(7, 8, 9, 10대)을 지냈고 공화당 원내총무 및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김우영(金宇榮)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제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원창(金源昌)은 정선군수를 역임했다. 김원천(金源千)은 황조근정훈장을 받았고, 대종회 상임부회장, 삼척김씨 기축대동보 편집, 삼척김씨 인터넷족보, 시조삼척군 휘 추 영정기를 썼다. 김효영(金孝榮)은 서울대학교와 경희대 교수를 거쳐 충북, 경남지사, 석공총재, 국제키비탄 한국총재, 국회의원(9, 10, 12, 14대)을 역임했다. 김흥률(金興律)은 문막 중·고 교장을 지내고 황조근정 훈장을 받았다. 김형배(金炯培)는 공업진흥청장과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5. 분파

삼척 김씨는 아래와 같은 분파가 있다.


  • 교위공파(校尉公) - 김자영(金自英)
  • 상서공파(尙書公派) - 김려(金麗)
  • 금자광록대부공파(金紫光祿大夫公派) - 김인궤(金仁軌)
  •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 김의궤(金義軌)
  • 합문지후공파(閤門祗侯公派) - 김유(金儒)
  • 호부상서공파(戶部尙書公派) - 김해(金偕)
  • 수의부위공파(修義副慰公派) - 김인(金仁)
  • 양간공파(良簡公派) - 김흥례(金興禮)
  • 태사공파(太師公) - 김자남(金自男)
  • 지정주사공파(知定州事公派) - 김리(金理)
  •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 김응(金膺)
  • 첨정공파(僉正公派) - 김극(金郤)
  •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 김충(金冲)
  • 무공랑공파(務工郞公派) - 김제(金隄)
  •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 김수(金隋)
  • 사정재훈공파(司正載勳公派) - 김천봉(金天奉)
  • 부령공파(部令公派) - 김정실(金精實)
  • 대사간공파(大司諫公派) - 김득강(金得江)
  • 병절교위공파(秉節校慰公派) - 김득영(金得泳)
  • 진사공파(進士公派) - 김서(金西)
  • 보공랑공파(保功郞公派) - 김거(金琚)
  • 보공랑공파(保功郞公派) - 김순(金珣)

6. 항렬표

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
흥(興)○○호(鎬)
34세35세36세37세38세39세40세
○하(河)
41세42세44세44세45세46세47세
병(炳)○
48세49세50세51세52세53세54세
○록(錄)


7. 집성촌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동해시 일원에 집성촌이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근덕면, 원덕읍, 하장면 일원에도 집성촌이 분포한다.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 북면 월학리,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에도 집성촌이 있다.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장항리와 함경남도 영흥군 순령면 송전리에도 집성촌이 있었다.

참조

[1] 문서 1838년 삼척부사 이규헌에게 선조의 유적과 지석을 찾아보겠다고 간청하여 발굴
[2] 문서 김위옹을 소원 시켰다
[3] 문서 1937년 후손 김원갑, 김형익 등이 종중에 수축할 것을 건의하여 석의를 갖추어 능으로 봉하였다
[4] 서적 고려사 권57지 권제11 지리2(地理 二) 경상도 안동부 연혁
[5] 문서 경산 김씨 시조라 한다
[6] 간행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LST_039_252_0061
[7] 문서 사위 호조좌랑 김자수(金自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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