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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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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북학회는 1908년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창립한 단체이다. 안창호, 이갑, 박은식 등이 대표적 인물이며, 기관지 발간, 서북협성학교 운영 등을 통해 교육 운동에 힘썼다. 1909년 대한협회, 일진회와 연합을 추진했으나 실패했고,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해산되었다. 서북학회는 낙원동에 회관을 건립했는데, 이 건물은 여러 대학의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서북학회는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사를 양성했다.

2. 서북학회 창립과 통합

1908년 1월, 한성부에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안창호, 이갑, 박은식, 이동휘 등이 있다.[1]

서북학회는 기관지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를 발행하였는데, 통감부의 세력이 강한 시기라 정치 단체를 표방하지 못하고 교육운동을 목적으로 내세웠다. 1909년 9월, 대한협회, 서북학회, 일진회가 삼파 연합을 추진하였으나, 정체성 문제로 협상이 결렬되어 성사되지 못했다.[2]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서북학회는 해체되었다.

2. 1. 서우학회

1906년 평안도·황해도 출신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자강회, 국민교육회, 기독교청년회, 무관·언론인 집단 등을 기반으로 창립되었다.[1]

2. 2. 한북흥학회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는 한북학회(漢北學會)라고도 하며, 1906년 이준, 오상규(吳相奎), 유진호, 이동휘 등이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단체였다.[1]

2. 3. 서북학회

1908년 1월 대한제국 말기,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한성부에서 서북학회를 조직했다. 이는 기존의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한 것으로, 안창호, 이갑, 박은식, 이동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1] 회장은 오상규, 부회장은 정운복이 맡았다.

1906년 설립된 서우학회는 평안도·황해도 출신 지식인들이 대한자강회, 국민교육회, 기독교청년회, 무관·언론인 집단 등을 기반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한북흥학회(한북학회)는 1906년 이준, 오상규, 유진호, 이동휘 등이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결성했다.

서북학회는 한북흥학회와 서우학회를 통합하여 계승하면서 기관지「서북학회월보」를 발행했다. 통감부의 감시가 강한 상황에서 정치 단체를 표방하는 대신 교육운동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서북학회월보》를 발행하고, 서북협성학교에 사범과를 설치하여 애국계몽 운동을 위한 교사 양성에 힘썼다.

1909년 9월, 대한협회, 서북학회, 그리고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삼파 연합을 추진했다. 대한협회이완용의 정치적 공백을 틈타 새 내각을 장악하려 했고, 일진회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촉구하며 소극적인 이완용 내각을 타도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세 단체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일진회는 이완용을 실각시키고 한일 병합을 조속히 실현하려 했고, 서북학회는 오랜 차별을 받아온 서북 출신의 정치적 세력 확장에 관심이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2] 그러나 삼파 연합은 협상 과정에서 정체성 문제로 결렬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각종 단체가 강제 해산되면서 대한협회와 서북학회도 해체되었다.

3. 주요 활동

서북학회는 교육,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3. 1. 교육 운동

서북학회는 교육운동을 목표로 삼고, 교사 양성을 위해 서북협성학교에서 사범과를 운영하였다.[7] 평안도황해도 출신이 구성한 서우학회가 설립한 서우학교와 함경도 출신의 한북흥학회가 설립한 한북의숙이 전신이다. 두 단체의 통합으로 학교도 통합되면서 서북협성학교라고 명명하고 서북학회가 직접 관리하였다.[7]

3. 2. 정치 활동

1909년 9월부터 대한협회, 서북학회와 구한말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삼파 연합을 추진하였다. 대한협회이완용의 정치적 공백을 틈타 새 내각을 장악하려 했으며, 일진회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촉구하면서 이에 소극적인 이완용 내각을 타도하고자 했는데, 여기에서 세 정파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일진회는 이완용을 실각시키고 한일 병합을 조속히 실현시키려 했고, 서북학회는 오랜 차별을 받아온 서북 출신의 정치적 세력 확장에 관심이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2] 삼파 연합은 협상 과정에서 정체성 문제로 결렬되어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4. 낙원동 교사

서울 종로구에 있었던 낙원동 교사 모습(1908년 11월 2일 준공, 일명 서북회관)


1908년 서북학회는 회원들의 모금을 통해 서울 낙원동에 교사를 건립했다. 이 건물은 단국대, 건국대, 국민대 등이 거쳐갔으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서북협성학교도 한때 이 건물에서 교육을 진행했다.[3] '낙원동 교사'는 혜화동 대학로(마로니에 공원)와 더불어 대학가에서 꽤 알려졌던 곳이었다.[3]

4. 1. 건립 과정

1908년 박은식, 이갑, 이동휘, 안창호 등 33명이 서울특별시에서 서북학회를 만들고 모금을 통해 회관 건립을 계획하고 착수하여, 33명의 공동 소유로 낙원동 282번지에 건물을 지었다.[3]

건물은 청나라 기술자를 불러들여 지었고, 당시에는 보기 드문 현대식 건축물이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33명의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 이채롭다.[3] 공사 기간을 거쳐 1908년 11월 2일에 준공되었다.

낙원동 교사는 3층 양옥이었는데, 3층이지만 1층은 반지하였다. 연건평은 395평이었다.[3]

4. 2. 역사적 의의

낙원동 교사는 서북학회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대학의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단국대, 건국대, 국민대 등이 낙원동 교사를 거쳐갔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서북협성학교도 한때 이 건물에서 교육을 진행했다.[3] 광복 이후, 여러 대학들이 설립 인가를 받는 과정에서 낙원동 교사의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5. 서북협성학교

서북학회는 교육운동을 목표로 삼고 교사 양성을 위해 서북협성학교에서 사범과를 운영하였다. 서우학교와 한북의숙이 그 전신으로, 각각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이 구성한 서우학회, 함경도 출신의 한북흥학회가 설립하였다. 두 단체가 통합되면서 학교도 통합되어 서북협성학교로 명명되었고, 서북학회가 직접 관리하였다.[7]

5. 1. 설립 배경

1908년 1월 대한제국 말기,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한성부에서 서북학회를 조직했다. 이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한 것으로, 안창호, 이갑, 박은식, 이동휘 등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이 대표적이었다.[1]

서우학회는 1906년 평안도·황해도 출신의 지식인들이 대한자강회, 국민교육회, 기독교청년회와 무관·언론인 집단 등을 기반으로 탄생시킨 단체였고, 한북흥학회(또는 한북학회)는 1906년 이준, 오상규, 유진호, 이동휘 등이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서북학회는 이 두 단체가 통합되면서 만들어졌다.

5. 2. 연혁

1908년 1월 한성부에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의 인사들이 기존의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서북학회를 창설하였다. 서우학회는 1906년 평안도·황해도 출신의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고, 한북흥학회는 1906년 이준, 오상규, 유진호, 이동휘 등이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했던 단체였다.[1]

서북학회는 교육운동을 목표로, 1905년 11월 1일 이갑, 유동렬, 박은식 등이 설립한 서우 사범학교와 1907년 1월 3일 이종호, 김주병, 이준 등이 설립한 한북의숙을 통합하여 1908년 11월 3일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했다. 1908년 11월 2일에는 경성부 낙원동 282번지에 신축 교사를 개교하였다.[7]

1909년 9월부터 대한협회, 서북학회와 구한말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삼파 연합을 추진하였으나, 협상 과정에서 정체성의 문제로 결렬되어 성사되지 못했다.[2]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각종 단체가 강제 해산되면서 서북학회도 해체되었다. 서북협성학교는 1910년 10월 1일 오성학교로 개명되었다가, 1918년 4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다. 이후 1921년 4월 오성강습소로 개교, 1922년 3월 협성학교로 다시 개명, 1940년 7월 1일 광신상업학교로 개명했다. 광신상업학교는 1943년 4월 동대문구 회기동 신축교사로 이전하고, 1987년 2월 1일 관악구 신림동 신축교사로 이전하였다. 이후 광신중학교,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 광신고등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 사전 청아출판사 2001-03-03
[2]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5 (개화기편,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인물과사상사 2007-11-19
[3] 뉴스 (17) 유서 깊은 낙원동 교사 - 신흥 사학의 산실 http://www.unn.net/C[...] 한국대학신문 2000-07-31
[4] 뉴스 미 군정기 대학 설립 봇물 http://www.unn.net/C[...] 한국대학신문 2004-01-15
[5] 뉴스 "1953년 戰禍 속 졸업생에게" 김창숙 선생 친필 훈사 발견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06-25
[6] 뉴스 成大 창립자 김창숙 선생의 1953년 졸업훈사 공개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1-06-25
[7] 서적 구한말의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200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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