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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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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석린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으로, 1357년 과거에 급제하여 신돈의 모함으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여러 관직을 거쳐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기여하여 9공신에 녹훈되었다. 조선 개국 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1395년 판한성부사, 1415년 영의정부사를 역임했다. 시문에 능하고 명필로 이름을 떨쳤으며, 저서로는 《독곡집》이 전한다. 묘소는 포천시에 있으며,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2. 생애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하였다.[3] 벼슬이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이르러 신돈의 모함으로 해주목사로 좌천, 다시 돌아와서 성균관사성이 되고 밀직대언(密直代言)에 뽑혀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3]

1375년 우왕 즉위 후 밀직제학이 되었을 때 왜구가 대거 침입하자 조전(助戰)원수가 되어 양백연의 부하로 참전, 크게 전공을 세우고 공신의 호를 받았다.[3]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승진, 뒤에 양백연의 옥에 연좌되어 함안(咸安)에 귀양갔다 돌아와서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다.[3]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양광도 관찰사를 지낼 때 큰 흉년이 들자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구호에 만전을 기하니 조정에서는 다른 도에서도 모두 의창을 두게 하였고,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3]

1389년 이성계와 공모하여 우왕, 창왕 부자를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워 9공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3] 대제학을 지내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3]

그 후 조선 개국 초에 이색, 우현보의 일당으로 몰려 고향에 안치되었다가 뒤에 벼슬에 들어 문하우정승, 좌정승,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3]

1395년(태조 4년) 음력 6월 13일 판한성부사에 최초로 임명되었다.[1]

1415년 음력 7월 3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2]

《명신록》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의 오랜 벗으로서 이성계를 만나러 가는 차사로 자원한 적이 있다고 한다.[1][4]

성석린은 본관이 창녕(昌寧,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이듯이 창녕이 세거지였다. 호는 독곡(獨谷), 조부는 판도 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이고, 모친은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나천부(羅天富)의 딸이다. 둘째 동생인 성석용과 성석연은 각각 보문각대제학(普文閣大提學)과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성석린은 순흥 안씨 안원숭(安元崇)의 딸과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성지도(成志道), 2남은 성발도이다. 문집으로 『독곡집(獨谷集)』(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5호)이 전한다.[3]

한편 시문에 능하고 진초(眞草)를 잘 써 당대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있다. 1986년 4월 9일 포천시의 향토유적 제22호 《성석린선생 묘》로 지정되었다.

2. 1. 고려 시대 활동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하였다.[3] 벼슬이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이르러 신돈의 모함으로 해주목사로 좌천, 다시 돌아와서 성균관사성이 되고 밀직대언(密直代言)에 뽑혀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3]

1375년 우왕 즉위 후 밀직제학이 되었을 때 왜구가 대거 침입하자 조전(助戰)원수가 되어 양백연의 부하로 참전, 크게 전공을 세우고 공신의 호를 받았다.[3]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승진, 뒤에 양백연의 옥에 연좌되어 함안(咸安)에 귀양갔다 돌아와서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다.[3]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양광도 관찰사를 지낼 때 큰 흉년이 들자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구호에 만전을 기하니 조정에서는 다른 도에서도 모두 의창을 두게 하였고,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3]

1389년 이성계와 공모하여 우왕·창왕 부자를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워 9공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3] 대제학을 지내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3]

2. 2. 조선 건국과 초기 활동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이르러 신돈의 모함으로 인하여 해주목사로 좌천, 다시 돌아와서 성균관사성이 되고 밀직대언(密直代言)에 뽑혀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3]

1375년 우왕이 즉위한 후 밀직제학이 되었을 때 왜구가 대거 침입하자 조전(助戰)원수가 되어 양백연의 부하로 참전, 크게 전공을 세우고 공신의 호를 받았으며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승진, 뒤에 양백연의 옥에 연좌되어 함안(咸安)에 귀양갔다. 돌아와서 창원군(昌原君)에 피봉되었다.[3]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양광도 관찰사를 지낼 때 큰 흉년이 들자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구호에 만전을 기하니 조정에서는 다른 도에서도 모두 의창을 두게 하였고,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3]

1389년 이성계와 공모하여 우왕, 창왕 부자를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워 9공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대제학을 지내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3]

그 후 조선 개국 초에 이색, 우현보의 일당으로 몰려 고향에 안치되었다가 뒤에 벼슬에 들어 문하우정승, 좌정승,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3]

1395년(태조 4년) 음력 6월 13일 판한성부사에 최초로 임명되었다.[1]

1415년 음력 7월 3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2]

《명신록》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의 오랜 벗으로서 이성계를 만나러 가는 차사로 자원한 적이 있다고 한다.[1][4]

2. 3. 가계와 평가

3. 가족

고조부는 성송국(成松國)이다. 증조부는 성공필(成公弼)이다. 조부는 성군미(成君美)이다. 아버지는 성여완(成汝完)이다. 외조부는 나천부(羅天富)이며, 어머니는 금성 나씨이다.

동생은 성석용(成石瑢)과 성석연(成石珚)이다. 성석용은 성담수성삼문의 증조부이고, 성석연은 성현의 증조부이다. 성석용의 처는 김성리(金成利)의 딸이며, 슬하에 성담수의 조부인 성개(成槪)와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成達生)을 두었다. 성석연의 처는 유실(柳實)의 딸이며, 슬하에 성현의 조부인 성엄(成揜)을 두었다.

부인은 안원숭(安元崇)의 딸 순흥 안씨이다. 장남은 성지도(成志道)이고, 차남은 성발도(成發道)이다. 장녀는 송석동(宋石同)에게 출가하였다.

3. 1. 가계

고조부는 성송국(成松國)이다. 증조부는 성공필(成公弼)이다. 조부는 성군미(成君美)이다. 아버지는 성여완(成汝完)이다. 외조부는 나천부(羅天富)이며, 어머니는 금성 나씨이다.

동생은 성석용(成石瑢)과 성석연(成石珚)이다. 성석용은 성담수성삼문의 증조부이고, 성석연은 성현의 증조부이다. 성석용의 처는 김성리(金成利)의 딸이며, 슬하에 성담수의 조부인 성개(成槪)와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成達生)을 두었다. 성석연의 처는 유실(柳實)의 딸이며, 슬하에 성현의 조부인 성엄(成揜)을 두었다.

부인은 안원숭(安元崇)의 딸 순흥 안씨이다. 장남은 성지도(成志道)이고, 차남은 성발도(成發道)이다. 장녀는 송석동(宋石同)에게 출가하였다.

3. 2. 성석린이 등장하는 작품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안형식이 성석린 역을 연기했다.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원종선이 성석린 역을 맡았다.

4. 평가

5. 묘소

참조

[1] 서적 조선왕조 기네스북 씨앤드씨그룹 1998-02-25
[2] 서적 태종실록
[3] 서적 국역 고려사 경인문화사 2006
[4] 서적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김영사 199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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