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쓰기가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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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쓰기가와 전투는 1586년, 규슈를 장악하려는 시마즈 가문과 이를 막으려는 오토모 가문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오토모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히데요시는 센고쿠 히데히사를 지휘관으로 시코쿠의 다이묘들을 파견했다. 그러나 센고쿠 히데히사의 독단적인 도하 작전으로 도요토미 연합군은 시마즈 군에게 대패했고, 센고쿠 히데히사는 문책을 받아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 전투는 시마즈 가문의 일시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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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7년 분쟁 - 규슈 정벌
규슈 정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토모 소린의 구원 요청을 계기로 시마즈 가문을 중심으로 규슈 다이묘들을 평정하고 규슈 대부분을 장악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영향력을 확고히 한 군사 작전이다. - 소고씨 - 도라마루성
도라마루 성은 호랑이 해에 축성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1570년 야스토미 모리사다에게, 1584년 소고 마사야스에게 함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오이타시 - 구마모토번
구마모토번은 1600년 가토 기요마사가 히고국을 통치하기 위해 세운 번으로, 가토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통치했으며, 막말에는 번론이 나뉘고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신정부에 가담하여 폐번되었다.
헤쓰기가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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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헤쓰기가와 전투 |
일부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
시기 | 1587년 1월 20일 |
장소 | 규슈 헤쓰기가와 (현재의 오이타현 오노가와) |
결과 | 시마즈 씨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 |
교전 2 | 시마즈 씨 군 |
지휘관 및 병력 | |
도요토미 군 지휘관 | 센고쿠 히데히사 |
시마즈 군 지휘관 | 시마즈 이에히사 |
도요토미 군 병력 | 20,000명 (실제 즉시 행동 가능한 군은 6,000명) |
시마즈 군 병력 | 10,000명 - 13,000명 |
피해 규모 | |
도요토미 군 피해 | 1,000명 이상, 조소카베 노부치카, 소고 마사야스 등 전사 |
시마즈 군 피해 | 불명 |
기타 정보 | |
관련 캠페인 | 규슈 정벌 |
일본어 명칭 | (Hetsugigawa no Tatak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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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586년(덴쇼 14년), 규슈 제패를 꿈꾸던 시마즈 가문은 숙적 오토모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토모 가문의 영지로 침공을 시작했다. 미미가와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중신 다치바나 도세쓰마저 잃는 등 연이은 악재로 인해 스스로 시마즈 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오토모 소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신하로서 섬기겠다는 뜻을 밝히고 원군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 역시 언젠가는 규슈를 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겨 소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1]
하지만 당시 히데요시는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원군은 보내지 못하고, 센고쿠 히데히사를 군감으로 삼아 조소카베와 소고 등의 시코쿠 군을 분고에 파견하였다.[1]
한편, 시마즈 군은 오토모 영지를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 1586년 12월 초, 도시미쓰 소교가 지키는 쓰루가 성(鶴賀城)이 시마즈 군에 포위되었다. 소교는 용감하게 싸워 시마즈 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안타깝게도 유탄에 맞아 전사하면서 쓰루가 성은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이 성이 함락되면 오토모 가문의 본거지인 후나이도 위험해진다. 쓰루가 성의 구원 요청을 받은 오토모 요시무네는 도요토미의 원군을 이끌고 쓰루가 성을 지원해야 했지만,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시마즈 군은 1만여 명으로 분고 침입 초기보다 병력이 절반 가까이 줄었지만, 오토모 가문에서 배신한 세력 등을 합쳐 병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시마즈 군 총대장 시마즈 이에히사는 군대를 우익 2천, 주력 3천(실제로는 6천이지만 절반은 쓰루가 성 감시와 매복에 투입), 좌익 5천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전술은 시마즈 가문의 특기인 '쓰리노부세(釣り野伏せ)'라고 불리지만, 이 경우에는 매복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형태였다. 이에히사는 군대를 분고 헤쓰기가와(현 오이타시 헤쓰기 촌 부근의 오노가와(大野川)의 옛 이름)와 쓰루가 성 사이에 배치하고, 도요토미 군이 강을 건널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서 기다렸다. 이에히사 자신은 쓰루가 성이 내려다보이는 나시오 산(梨尾山)에 본진을 설치했다.
도요토미 군은 2만 명이라고 하지만, 오토모 요시무네가 움직이지 않아 즉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절반 이하였다. 시마즈 군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요시무네가 이끄는 오토모 군이 필요했지만, 히데요시의 권위를 믿고 공을 세우는 데 급급했던 센고쿠 히데히사는 독단적으로 쓰루가 성 구원을 위해 출진하기로 결정했다. 센고쿠 히데히사가 이끄는 아와지 군 1천여 명, 소고 마사야스가 이끄는 사누키 군 3천여 명, 조소카베 부자가 이끄는 도사 군 3천여 명으로 총 6천여 명의 병력이었다.
2. 1. 규슈 정세
규슈 제패를 노리던 시마즈 가문은 1586년(덴쇼 14년) 숙적 오토모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토모 가문의 영지로 침공을 시작했다. 미미가와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중신 다치바나 도세쓰가 사망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 놓인 오토모 소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원군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언젠가 규슈를 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하지만 당시 히데요시는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원군을 보내는 대신 센고쿠 히데히사를 군사 지휘관으로 삼아 조소카베와 소고 등 시코쿠 군을 분고에 파견하였다.
한편, 시마즈 군은 오토모 영지를 빠르게 점령하고 있었다. 1586년 12월 초, 도시미쓰 소교가 지키는 쓰루가 성(鶴賀城)이 시마즈 군에 포위되었다. 소교는 용감하게 싸워 시마즈 군에 큰 피해를 입혔지만, 안타깝게도 유탄에 맞아 전사하면서 쓰루가 성은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이 성이 함락되면 오토모 가문의 본거지인 후나이도 위험해진다. 쓰루가 성의 구원 요청을 받은 오토모 요시무네는 도요토미의 원군을 이끌고 쓰루가 성을 지원해야 했지만,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시마즈 군은 1만여 명으로 분고 침입 초기보다 병력이 절반 가까이 줄었지만, 오토모 가문에서 배신한 세력 등을 합쳐 병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시마즈 군 총대장 시마즈 이에히사는 군대를 우익 2천, 주력 3천(실제로는 6천이지만 절반은 쓰루가 성 감시와 매복에 투입), 좌익 5천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전술은 시마즈 가문의 특기인 '쓰리노부세(釣り野伏せ)'라고 불리지만, 이 경우에는 매복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형태였다. 이에히사는 군대를 분고 헤쓰기가와(현 오이타시 헤쓰기 촌 부근의 오노가와(大野川)의 옛 이름)와 쓰루가 성 사이에 배치하고, 도요토미 군이 강을 건널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서 기다렸다. 이에히사 자신은 쓰루가 성이 내려다보이는 나시오 산(梨尾山)에 본진을 설치했다.
도요토미 군은 2만 명이라고 하지만, 오토모 요시무네가 움직이지 않아 즉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절반 이하였다. 시마즈 군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요시무네가 이끄는 오토모 군이 필요했지만, 히데요시의 권위를 믿고 공을 세우는 데 급급했던 센고쿠 히데히사는 독단적으로 쓰루가 성 구원을 위해 출진하기로 결정했다. 센고쿠 히데히사가 이끄는 아와지 군 1천여 명, 소고 마사야스가 이끄는 사누키 군 3천여 명, 조소카베 부자가 이끄는 도사 군 3천여 명으로 총 6천여 명의 병력이었다.
2. 1. 1. 시마즈 가문의 규슈 통일 야망
1586년(덴쇼 14년) 시마즈 가문은 규슈 제패를 위해 숙적 오토모 가문 영지로 침공을 시작했다. 미미가와 전투 패배와 중신 다치바나 도세쓰의 죽음 등으로 오토모 소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신하의 예를 표하고 원군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적대 관계였기에 대규모 원군 대신 센고쿠 히데히사를 군감으로, 조소카베와 소고 등 시코쿠 군을 분고에 파견했다.시마즈 군은 오토모 영지를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 1586년 12월 초, 도시미쓰 소교(利光宗魚)가 지키는 쓰루가 성(鶴賀城)이 포위되었다. 소교는 시마즈 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전사했고, 성은 함락 위기에 놓였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도요토미 원군과 함께 쓰루가 성을 구원해야 했지만, 적극적이지 않았다.
시마즈 군은 1만여 명으로 분고 침입 초기보다 병력이 줄었지만, 배반 세력을 더해 병력을 회복했다. 시마즈 군 총대장 시마즈 이에히사는 군을 셋으로 나누는 '쓰리노부세(釣り野伏せ)' 전법을 사용, 헤쓰기가와(현 오이타시 헤쓰기 촌 부근의 오노가와(大野川)의 옛 이름)와 쓰루가 성 사이에 배치하고 도요토미 군을 기다렸다. 이에히사는 나시오 산(梨尾山)에 본영을 두었다.
도요토미 군은 2만 명이었지만, 요시무네의 부재로 즉시 전투 가능한 병력은 절반 이하였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독단으로 쓰루가 성 구원을 결정, 아와지 군 1천여 명, 소고 마사야스의 사누키 군 3천여 명, 조소카베 부자의 도사 군 3천여 명, 총 6천여 명으로 진군했다.
2. 1. 2. 오토모 가문의 위기
시마즈 가문이 1586년 규슈 제패를 위해 숙적 오토모 가문을 공격하면서, 미미가와 전투의 패배와 중신 다치바나 도세쓰의 죽음 등으로 약해진 오토모 소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규슈 평정의 기회로 보고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립으로 대규모 원군 대신 센고쿠 히데히사를 중심으로 한 시코쿠 군을 분고에 파견했다.시마즈 군은 오토모 영지를 빠르게 점령해 나갔고, 1586년 12월 초에는 도시미쓰 소교가 지키는 쓰루가 성을 포위했다. 소교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유탄에 맞아 전사하면서 성은 함락 위기에 처했고, 이는 오토모 가문의 본거지인 후나이까지 위협했다. 쓰루가 성의 구원 요청에도 오토모 요시무네는 소극적이었다.
시마즈 군은 1만여 명으로 줄었지만 배반 세력을 합쳐 병력을 회복했다. 총대장 시마즈 이에히사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헤쓰기가와(현 오이타시 헤쓰기 촌 부근의 오노가와(大野川)의 옛 이름)와 쓰루가 성 사이에 배치하여 도요토미 군을 기다렸다. 이에히사는 나시오 산에 본영을 두었다.
도요토미 군은 2만 명이었으나 요시무네의 부재로 실제 전투 병력은 절반 이하였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독단으로 쓰루가 성 구원을 결정하고, 아와지, 사누키, 도사 군을 합쳐 6천여 명으로 출진했다.
1586년 4월 5일, 분고의 오토모 소린은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만나 시마즈 요시히사의 침략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이를 승낙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모리 군을 이끌게 했으며, 센고쿠 히데히사, 조소카베 모토치카・노부치카 부자에게 분고 출진을 명했다.
2. 1. 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입
규슈 제패를 목표로 하던 시마즈 가문은 1586년(덴쇼 14년)에 숙적 오토모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토모 가문의 영지로 침공을 시작했다. 미미가와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중신 다치바나 도세쓰가 사망하는 등 연이은 악재로 인해 스스로 시마즈 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오토모 소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신하로서 섬기겠다는 뜻을 밝히고 원군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 역시 언젠가는 규슈를 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겨 소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1]같은 해 4월 5일, 분고의 오토모 소린은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만나 시마즈 요시히사가 분고를 침략한 것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1] 히데요시는 이를 승낙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모리 가문의 병사를 총괄하여 선발대로 보냈으며, 사누키의 센고쿠 히데히사를 주장으로 하고, 조소카베 모토치카・노부치카 부자를 더하여 분고로 출진을 명했다.[1]
하지만 당시 히데요시는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원군은 보내지 못하고, 센고쿠 히데히사를 군감으로 삼아 조소카베와 소고 등의 시코쿠 군을 분고에 파견하였다.[1]
2. 2. 도요토미 연합군 파견
규슈 제패를 노리던 시마즈 가문은 1586년(덴쇼 14년) 오토모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침공을 시작했다. 미미가와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중신 다치바나 도세쓰마저 잃는 등 어려움을 겪던 오토모 소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소린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립으로 대규모 병력 대신 센고쿠 히데히사를 군감으로 하는 시코쿠 군을 분고에 파견했다.시마즈 군은 오토모 영지를 빠르게 점령해 나갔고, 1586년 12월 초 도시미쓰 소교가 지키는 쓰루가 성이 포위되었다. 소교는 용감히 싸워 시마즈 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유탄에 맞아 전사하면서 성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쓰루가 성이 함락되면 오토모 가문의 본거지인 후나이(오이타시)도 위험해지므로, 오토모 요시무네는 쓰루가 성의 구원 요청을 받았으나,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시마즈 군 총대장 시마즈 이에히사는 오토모 군과 도요토미 군의 후방 기습을 예상하고 군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우익 2천, 주력 3천(실제로는 6천이지만 절반은 쓰루가 성 감시와 복병), 좌익 5천으로 구성된 이 전법은 '쓰리노부세'라고 불리는 시마즈 특유의 전술이었으나, 이 경우에는 복병을 많이 활용하지 않았다. 이에히사는 군대를 헤쓰기가와(현 오이타시 헤쓰기 촌 부근의 오노가와)와 쓰루가 성 사이에 배치하고, 도요토미 군이 강을 건널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서 기다렸다. 이에히사는 쓰루가 성이 내려다보이는 나시오 산에 본진을 설치했다.
도요토미 군은 2만 명이라고 하지만, 오토모 요시무네가 움직이지 않아 즉시 전투에 투입 가능한 병력은 절반 이하였다.
2. 2. 1. 센고쿠 히데히사의 지휘
1586년(덴쇼 14년) 시마즈 가문이 오토모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침공하자, 오토모 소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시코쿠 군을 분고에 파견하면서 센고쿠 히데히사를 군감으로 삼았다.[1]시마즈 군의 공격으로 도시미쓰 소교가 지키는 쓰루가 성이 포위되자, 오토모 요시무네는 도요토미 군과 함께 구원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요시무네는 소극적이었고, 공功에 조급해진 센고쿠 히데히사는 독단적으로 출진을 결정했다. 당시 도요토미 군은 6천여 명으로, 히데히사의 아와지 군 천여 명, 소고 마사야스가 이끄는 사누키 군 3천여 명, 조소카베 모토치카 부자가 이끄는 도사 군 3천여 명으로 구성되었다.[1]
히데요시는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모리의 병사를 총괄하여 선발대로 보냈고, 센고쿠 히데히사를 주장으로, 조소카베 모토치카・노부치카 부자를 더하여 분고로 출진을 명했다.[1]
2. 2. 2. 도요토미 연합군의 구성과 문제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오토모 소린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립 중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원군 대신 센고쿠 히데히사를 군감으로 하는 시코쿠 군을 분고에 파견했다.덴쇼 14년(1586년) 4월 5일, 분고의 오토모 소린은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만나 시마즈 요시히사의 분고 침략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이를 승낙하고 구로다 요시타카에게 모리의 병사를 이끌고 선발대로 가게 했으며, 사누키의 센고쿠 히데히사를 주장으로, 조소카베 모토치카・노부치카 부자를 더하여 분고로 출진을 명했다.
도요토미 연합군은 센고쿠 히데히사의 아와지 군 1천여 명, 소고 마사야스가 이끄는 사누키 군 3천여 명, 조소카베 부자가 이끄는 도사 군 3천여 명으로 구성되어 총 6천여 명이었다. 하지만, 오토모 요시무네가 참전하지 않아 실제 전투 병력은 부족했고, 센고쿠 히데히사는 히데요시의 위세를 믿고 독단적으로 쓰루가 성 구원을 결정하는 문제점을 보였다.
3. 전투 경과
1586년(덴쇼 14년) 12월 12일 이른 아침, 센고쿠 히데히사는 시코쿠 정벌의 공으로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나, 영지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속 부대를 포함하여 오합지졸로 결속력이 약한 군대를 이끌고 헤쓰기가와를 사이에 두고 시마즈 군과 대치했다. 종군한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는 낮았고, 구원에 나선 오토모 군은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의 병력뿐이라 시마즈 군에 비해 병력이 열세였다.[3]
공을 세우는 데 집착한 히데히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무모하게도 겨울에 도하 작전을 결행했다. 전략 회의에서 히데히사는 강을 건너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원군을 기다린 후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반대했지만, 히데히사는 성을 구원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듣지 않았다. 소고 마사야스 역시 히데히사의 주장에 동조하여 결국 강을 건너는 작전을 실행하게 되었다.[4]
해질 무렵, 시마즈 군 좌익의 이쥬인 히사노부(伊集院久宣)와 아와지 군이 처음으로 교전하였다. 초반에는 도요토미 군이 우세했으나, 아와지 군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진형이 무너져 궤멸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히데히사 군도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도주했다. 기세를 탄 시마즈 군은 아와지 군에 이어 제2진인 사누키 군과 조소카베 노부치카 군을 복병과 함께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헤쓰기가와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끄는 제3진은 전투도 하지 않고 패주하였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다른 장수의 군세를 버려두고 고쿠라 성으로 철수하고, 그 후 사누키까지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3][4]
12월 12일 저녁부터 13일에 걸쳐 벌어진 전투에서 선봉인 센고쿠 부대가 기습을 받아 패주하자, 조소카베 군 3천 명이 고립되었고, 시마즈 측 니이로 다이젠노스케의 5천 병력과 전투를 벌였다. 모토치카와 노부치카 등은 난전 속에서 헤어졌다. 모토치카는 전장을 벗어나 규슈를 탈출, 이요국 히부리 섬까지 도주했다.[3] 노부치카는 나카쓰루가와라에서 싸우다 스즈키 다이젠에게 죽임을 당했다.[4] 향년 22세. 노부치카를 따르던 700명은 전사했고, 소고도 전사했으며, 쓰루가 성도 함락되었다.
이 대승으로 시마즈 군은 쓰루가 성을 함락시키고, 다음 날인 13일에는 후나이에 침공하였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속수무책으로 부젠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오토모 군은 각지에서 격렬한 저항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도요토미의 대군이 부젠에 들어오자 시마즈 군은 분고에서 철수하게 된다.
군감 센고쿠 히데히사는 귀환 후 패전의 책임을 물어 영지 몰수와 가이에키 처분을 받고 고야산으로 추방되었다.[4]
3. 1. 시마즈 군의 전략
시마즈 가문은 1586년(덴쇼 14년) 오토모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토모 가문의 영지로 침공을 시작했다. 미미가와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중신 다치바나 도세쓰마저 잃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한 오토모 소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의 기회로 보고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로 대규모 원군 대신 시코쿠 군을 파견했다.시마즈 군은 오토모 령을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 1586년 12월 초, 도시미쓰 소교가 지키는 쓰루가 성이 포위되었다. 이 성은 한때 시마즈 군에게 함락되었으나 도시미쓰 소교가 탈환한 곳이었다. 소교는 용감히 싸웠으나 유탄에 맞아 전사했고, 성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쓰루가 성이 함락되면 오토모 가문의 본거지인 후나이 (오이타시)도 위험해진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쓰루가 성을 구원해야 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시마즈 군은 1만여 명으로 분고 침입 초기보다 병력이 줄었지만, 배반한 세력 등을 합쳐 병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시마즈 이에히사는 오토모 군이나 도요토미 군의 후방 기습을 예측하고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는 전략을 세웠다.
3. 1. 1. 시마즈 이에히사의 배치
시마즈 이에히사는 오토모 군이나 도요토미 군의 후방 기습을 예측하고, 자신의 군대를 우익 2천 명, 주력 3천 명(실제로는 6천 명이었으나 절반은 쓰루가 성 감시와 복병으로 활용), 좌익 5천 명으로 나누었다. 이러한 전술은 시마즈 가문 특유의 ‘쓰리노부세(釣り野伏せ)’로 알려져 있지만, 이 경우에는 복병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히사는 자신의 군대를 분고 헤쓰기가와(현재 오이타시 헤쓰기 촌 근처 오노가와(大野川)의 옛 이름)와 쓰루가 성 사이에 배치하여, 도요토미 군이 강을 건널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이에히사 자신은 쓰루가 성이 내려다보이는 나시오 산(梨尾山)에 본진을 설치했다.[1]3. 1. 2. '쓰리노부세' 전술 (논란)
시마즈 군은 군세를 셋으로 나누어 전투에 임하는 전법인 '쓰리노부세(釣り野伏せ)'를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헤쓰기가와 전투에서는 복병을 별로 사용하지 않은 변형된 형태였다. 시마즈 이에히사는 군세를 우익 2천, 주력 3천(실제로는 6천이었으나 절반은 쓰루가 성 감시와 복병으로 운용), 좌익 5천으로 나누었다. 이들은 분고 헤쓰기가와(현 오이타시 헤쓰기 촌 부근의 오노가와(大野川)의 옛 이름)와 쓰루가 성 사이에 배치되었으며, 도요토미 군이 강을 건널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서 대기했다. 이에히사는 쓰루가 성이 내려다보이는 나시오 산(梨尾山)에 본진을 설치했다.[1]3. 2. 도요토미 연합군의 오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코쿠 정벌 이후 시마즈 가문과의 전투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지 않고 센고쿠 히데히사를 총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히데히사는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워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되었지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적 기반이 약했다. 히데히사가 이끄는 군대는 직속 부대를 포함하여 오합지졸이었고,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도 낮았다. 오토모 군 역시 소수의 병력만 파견되어 시마즈 군에 비해 열세였다.[3]이러한 상황에서 히데히사는 공을 세우려는 조급함에 조소카베 모토치카를 비롯한 다른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겨울철 헤쓰기가와 도하 작전을 강행했다. 결국, 도요토미 연합군은 1586년 12월 12일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시마즈 군에게 대패했다.[4] 이 패배로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 등 주요 무장들이 전사하고, 센고쿠 히데히사는 영지를 몰수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3. 2. 1. 센고쿠 히데히사의 독단적인 결정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직접 출진하는 대신 센고쿠 히데히사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히데히사는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워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나,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속 부대를 포함한 군대의 결속력이 약했다. 종군한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도 높지 않았다. 오토모 군은 구원을 위해 파견되었으나, 길 안내를 맡은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의 병력뿐이어서 시마즈 군에 비해 병력에서 열세였다.[3]히데히사는 공을 세우는 데 집착하여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선수쳐서 사기를 올리고자 했다. 그는 무모하게도 겨울에 도하 작전을 결행하여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 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하게 된다. 전략 회의에서 도요토미 군의 군감(軍監)이었던 센고쿠는 강을 건너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원군을 기다린 후에 전투를 벌여야 한다며 반대했지만, 센고쿠는 성을 구원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듣지 않았다. 소고 마사야스 역시 센고쿠의 주장에 동조하여 결국 강을 건너 출진하게 되었다.[4]
히데요시는 전투를 시작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지만, 센고쿠 히데히사는 명령에 불복종했다. 이는 도요토미 정권의 권위 저하로 이어지는 패전으로 이어졌고, 히데요시는 크게 분노하여 센고쿠의 사누키 국 영지를 몰수하고 오토 치노부에게 주었다.
3. 2. 2. 도하 작전의 실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출진하는 대신 지휘를 맡긴 센고쿠 히데히사는 시코쿠 정벌의 공으로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나, 영지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속 부대를 포함하여 결속력이 약한 오합지졸이었다. 종군한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도 높지 않았다. 구원군으로 나선 오토모 군도 길 안내를 맡은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의 병력뿐으로, 시마즈 군에 비해 병력에서 열세였다.[3]공을 세우는 데 집착한 히데히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선수쳐서 사기를 올리고자 했다. 그리하여 무모하게도 겨울에 도하 작전을 결행하여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하게 된다. 해질 무렵 처음으로 교전한 것은 시마즈 군 좌익의 이쥬인 히사노부(伊集院久宣)와 아와지 군이었다. 전황은 처음에는 이에히사가 낭패를 볼 정도로 도요토미 군이 우세했으나, 아와지 군이 적진 깊숙이 쳐들어갔다가 진형이 무너져 궤멸당했다. 그러자 수적으로 열세였던 히데히사 군도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도주했다.[4]
기세를 탄 시마즈 군은 아와지 군에 이어 제2진인 사누키 군과 조소카베 노부치카 군을 복병과 함께 포위하여 섬멸했다.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헤쓰기가와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끄는 제3진은 전투도 하지 않고 패주했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다른 장수의 군세를 버려두고 고쿠라성으로 철수하고, 그 후 사누키까지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도요토미 군의 군감이었던 센고쿠는 강을 건너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토치카는 원군을 기다린 후에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센고쿠의 작전에 반대했지만, 센고쿠는 성을 구원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듣지 않았고, 소고 역시 센고쿠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 때문에 강을 건너 출진하게 되었다.
전투는 12월 12일 저녁부터 13일에 걸쳐 벌어졌다. 선봉인 센고쿠 부대가 기습을 받아 패주했기 때문에, 조소카베 군 3,000명이 고립되었고, 시마즈 측 니이로 다이젠노스케의 5,000명과 전투 상태가 되었다. 모토치카와 노부치카 등은 난전 속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모토치카는 전장을 벗어나는 데 성공하여 그대로 규슈를 탈출, 이요국의 히부리섬까지 도주했다.[3] 노부치카는 나카쓰루가와라에서 싸웠지만, 스즈키 다이젠에게 죽임을 당했다. 향년 22세였다. 노부치카를 따르던 700명은 전사했고, 소고도 전사했으며, 쓰루가 성도 함락되었다.
히데요시는 전투를 시작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센고쿠가 명령을 어기고 도요토미 정권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패전을 초래한 것에 분노하여, 센고쿠의 사누키 국 영지를 몰수하고 오토 치노부에게 주었다.[4]
3. 3. 전투의 전개
히데요시는 직접 출진하는 대신 센고쿠 히데히사에게 지휘를 맡겼다. 히데히사는 시코쿠 정벌의 공으로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나, 영지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속 부대를 포함한 병력은 결속력이 약한 오합지졸이었다. 종군한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도 낮았고, 구원군으로 온 오토모 군도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의 병력뿐이라 시마즈 군에 비해 병력이 열세였다.히데히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선제 공격으로 사기를 올리려 했다.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하게 된다.
이 대승으로 시마즈 군은 쓰루가 성을 함락시키고, 다음 날인 13일에는 후나이에 침공하였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속수무책으로 부젠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오토모 군은 각지에서 격렬한 저항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도요토미의 대군이 부젠에 들어오자 시마즈 군은 분고에서 철수하게 된다.
3. 3. 1. 초기 교전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워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된 센고쿠 히데히사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헤쓰기가와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영지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속 부대를 포함한 병력은 결속력이 약한 오합지졸이었다. 종군한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도 낮았고, 오토모 군 역시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의 병력뿐이라 시마즈 군에 비해 병력에서 열세였다.공을 세우는 데 급급했던 히데히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선제 공격으로 사기를 올리려 했다. 무모하게도 겨울에 도하 작전을 결행하여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하게 된다. 해질 무렵, 시마즈 군 좌익의 이쥬인 히사노부(伊集院久宣)와 아와지 군이 처음으로 교전하였다. 초반에는 도요토미 군이 우세했지만, 아와지 군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진형이 무너지면서 궤멸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히데히사 군도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도주했다. 시마즈 군은 기세를 몰아 아와지 군에 이어 제2진인 사누키 군과 조소카베 노부치카 군을 복병과 함께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헤쓰기가와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끄는 제3진은 전투도 하지 않고 패주하였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다른 장수의 군세를 버려두고 고쿠라 성으로 철수하고, 이후 사누키까지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도요토미 측 군감이었던 센고쿠는 강을 건너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토치카는 원군을 기다린 후에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센고쿠의 작전에 반대했지만, 센고쿠는 성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듣지 않았고, 소고 역시 센고쿠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동조했다. 이 때문에 강을 건너 출진하게 되었다. 전투는 12월 12일 저녁부터 13일에 걸쳐 벌어졌다. 선봉인 센고쿠 부대가 기습을 받아 패주했기 때문에, 조소카베 군 3천 명이 고립되었고, 시마즈 측 니이로 다이젠노스케의 5천 병력과 전투 상태가 되었다. 모토치카와 노부치카 등은 난전 속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모토치카는 전장을 벗어나는 데 성공하여 그대로 규슈를 탈출, 이요 국 히부리 섬까지 도주했다.[3] 노부치카는 나카쓰루가와라에서 싸우지만, 스즈키 다이젠에게 죽임을 당했다.[4] 향년 22세. 노부치카를 따르던 700명은 전사했고, 소고도 전사했으며, 쓰루가 성도 함락되었다.
3. 3. 2. 도요토미 연합군의 궤멸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워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된 센고쿠 히데히사는 규슈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신하여 군을 지휘했다. 그러나 히데히사의 군대는 직속 부대를 포함하여 결속력이 약한 오합지졸이었고, 종군한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도 낮았다. 구원군으로 파견된 오토모 군 역시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의 병력뿐이라 시마즈 군에 비해 병력에서 열세였다.[3]히데히사는 공을 세우려는 조급함에 선제 공격으로 사기를 올리고자 했다. 무모하게도 겨울에 도하 작전을 결행하여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하게 된다. 해질 무렵 시마즈 군 좌익의 이쥬인 히사노부(伊集院久宣)와 아와지 군이 처음으로 교전하였다. 초반에는 도요토미 군이 우세했으나, 아와지 군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진형이 무너져 궤멸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히데히사 군도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도주했다. 시마즈 군은 아와지 군에 이어 제2진인 사누키 군과 조소카베 노부치카 군을 복병과 함께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끄는 제3진은 전투도 하지 않고 패주하였다.[4]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헤쓰기가와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다른 장수의 군세를 버려두고 고쿠라성으로 철수하고, 그 후 사누키까지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도요토미 측 군감이었던 센고쿠는 강을 건너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토치카는 원군을 기다린 후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반대했지만, 센고쿠는 성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듣지 않았고, 소고 역시 센고쿠의 주장에 동조하여 강을 건너 출진하게 되었다.
전투는 12월 12일 저녁부터 13일에 걸쳐 벌어졌다. 선봉인 센고쿠 부대가 기습을 받아 패주했기 때문에, 조소카베 군 3천 병력이 고립되었고, 시마즈 측 니이로 다이젠노스케의 5천 병력과 전투를 벌였다. 모토치카와 노부치카 등은 난전 속에서 헤어졌고, 모토치카는 전장을 벗어나 규슈를 탈출, 이요국 히부리섬까지 도주했다. 노부치카는 나카쓰루가와라에서 싸우다 스즈키 다이젠에게 죽임을 당했다. 향년 22세. 노부치카를 따르던 700명은 전사했고, 소고도 전사했으며, 쓰루가 성도 함락되었다.
히데요시는 센고쿠의 명령 불복종과 도요토미 정권의 권위 저하로 이어지는 패전에 분노하여 사누키 국 영지를 몰수하고 오토 치노부에게 주었다.
3. 3. 3. 센고쿠 히데히사의 도주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워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 영주가 된 센고쿠 히데히사는 영지에 봉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속 부대를 포함한 결속력이 약했다. 공을 세우는 데 집착한 히데히사는 선수를 쳐서 사기를 올리려 했다.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를 끼고 양군이 대치했을 때, 히데히사는 무모하게도 겨울에 도하 작전을 결행했다.해질 무렵 첫 교전에서 도요토미 군이 우세를 보였으나, 아와지 군이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진형이 무너져 궤멸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히데히사 군도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도주하였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다른 장수의 군세를 내버려두고 고쿠라 성으로 철수했고, 그 후 사누키까지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3]
군감 센고쿠 히데히사는 귀환 후 패전의 책임을 물어 영지 몰수와 가이에키 처분을 받고 고야산으로 추방되었다.[4]
4. 전투의 결과
헤쓰기가와 전투는 시마즈 이에히사가 이끄는 시마즈 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가 전사했고,[3]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이요의 히부리섬까지 도주했다.[3]
시마즈 군은 쓰루가 성을 함락시키고 후나이를 침공했으며, 오토모 요시무네는 부젠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오토모 군은 각지에서 저항을 계속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이 부젠에 들어오자 시마즈 군은 분고에서 철수했다.[1]
4. 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와 센고쿠 히데히사의 처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헤쓰기가와 전투에서 센고쿠 히데히사가 명령을 어기고 패전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 히데요시는 센고쿠 히데히사가 도요토미 정권의 권위를 떨어뜨렸다고 판단했다.[4] 히데요시는 센고쿠의 사누키 영지를 몰수하고 오토 치노부에게 주었으며,[4] 센고쿠 히데히사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영지를 몰수당하는 가이에키 처분을 받고 고야산으로 추방되었다.4. 2. 시마즈 가문의 일시적 승리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워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된 센고쿠 히데히사는 시마즈 이에히사가 분고로 침공하여 오토모 씨의 쓰루가 성을 공격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다.[3] 그러나 히데히사의 군대는 직속 부대를 포함하여 오합지졸이었고,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도 낮았다.1586년 12월 11일, 센고쿠 히데히사, 조소카베 노부치카 등은 도지강(현 오노강) 앞에 진을 쳤다.[3] 전략 회의에서 센고쿠는 강을 건너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소카베 모토치카는 원군을 기다린 후 전투를 벌여야 한다고 반대했다.[3] 하지만 센고쿠는 성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듣지 않았고, 소고 마사야스 역시 센고쿠의 주장에 동조하여 결국 강을 건너 공격하기로 결정되었다.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 군이 대치했다. 해질 무렵 시마즈 군 좌익의 이쥬인 히사노부와 아와지 군이 처음으로 교전하였는데, 도요토미 군이 우세했으나 아와지 군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진형이 무너져 궤멸되었다. 이로 인해 히데히사 군은 전의를 잃고 도주했고, 시마즈 군은 조소카베 노부치카 군을 포위하여 섬멸했다. 이 과정에서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전사했다.[3]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끄는 제3진은 전투도 하지 않고 패주했고, 센고쿠 히데히사는 다른 장수들을 버려두고 고쿠라성으로 철수했다가 사누키까지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이 대승으로 시마즈 군은 쓰루가 성을 함락시키고, 다음 날인 13일에는 후나이에 침공했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속수무책으로 부젠으로 도주했다.
전투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센고쿠 히데히사의 명령 불복종과 도요토미 정권의 권위 저하를 야기한 패전에 분노하여 그의 영지를 몰수하고 고야산으로 추방했다.[4]
4. 3. 규슈 정벌의 본격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직접 출진하지 않고, 대신 센고쿠 히데히사에게 지휘를 맡겼다. 히데히사는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워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나, 영지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속 부대를 포함한 병사들이 오합지졸이라 결속력이 약했다. 종군한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도 높지 않았다. 오토모 군은 길 안내를 맡은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의 병사뿐이었고, 시마즈 군에 비해 병력도 부족했다. 공을 세우는 데 급급했던 히데히사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먼저 공격하여 사기를 올리려 했다. 무모하게도 겨울에 도하 작전을 강행하여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하게 된다. 해질 무렵 시마즈 군 좌익의 이쥬인 히사노부(伊集院久宣)와 아와지 군이 처음으로 교전하였다. 처음에는 이에히사가 낭패할 정도로 도요토미 군이 우세했으나, 아와지 군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진형이 무너져 궤멸되었다. 그러자 수적으로 열세였던 히데히사 군도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도주하였다. 기세를 탄 시마즈 군은 아와지 군에 이어 제2진인 사누키 군과 조소카베 노부치카 군을 복병과 함께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헤쓰기가와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끄는 제3진은 전투도 하지 않고 패주하였다. 센고쿠 히데히사는 다른 장수들의 군세를 버려두고 고쿠라성으로 철수했고, 이후 사누키까지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1]이 대승으로 기세를 탄 시마즈 군은 쓰루가성을 함락시키고, 다음 날인 13일에는 후나이를 침공하였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속수무책으로 부젠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토모 군은 각지에서 격렬하게 저항했고, 도요토미의 대군이 부젠에 들어오자 시마즈 군은 분고에서 철수하게 된다.[1]
군감 센고쿠 히데히사는 귀환 후 패전의 책임을 물어 영지를 몰수당하고 가이에키 처분을 받아 고야산으로 추방되었다.[1]
5. 전투에 대한 평가 및 분석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센고쿠 히데히사를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나, 히데히사는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워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 영주가 되었지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력은 결속력이 약했다.[1]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도 낮았고, 오토모 군의 지원 병력도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에 불과하여 시마즈 군에 비해 열세였다.[1]
히데히사는 공을 세우는 데 급급하여 먼저 공격해 사기를 높이려 했으나,[1] 겨울에 무모하게 도하 작전을 감행했다.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 군이 대치했고,[1] 해질녘 시마즈 군 좌익 이쥬인 히사노부(伊集院久宣)와 아와지 군이 처음 교전했다.[1] 초반에는 도요토미 군이 우세했으나, 아와지 군이 너무 깊숙이 진격하여 진형이 무너져 궤멸되었다.[1]
수적으로 열세였던 히데히사 군도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도주했고,[1] 시마즈 군은 복병으로 사누키 군과 조소카베 노부치카 군을 섬멸했다.[1]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전사했고,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제3진은 전투 없이 패주했으며, 히데히사는 고쿠라성을 거쳐 사누키까지 도망쳤다.[1] 결국 히데히사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영지를 몰수당하고 고야산으로 추방되었다.[1]
5. 1. 센고쿠 히데히사의 지휘에 대한 비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직접 출진하지 않고 센고쿠 히데히사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히데히사는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워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 영주가 되었으나,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속 부대를 포함한 병력은 결속력이 약한 오합지졸이었다.[1]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 또한 낮았고, 오토모 군의 지원 병력도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에 불과하여 시마즈 군에 비해 열세였다.[1]공을 세우는 데 급급했던 히데히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먼저 공격하여 사기를 높이려 했다.[1] 무모하게도 겨울에 도하 작전을 감행,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 군이 대치했다.[1] 해질녘 시마즈 군 좌익 이쥬인 히사노부(伊集院久宣)와 아와지 군이 처음 교전했다.[1] 초반에는 도요토미 군이 우세했으나, 아와지 군이 너무 깊숙이 진격하여 진형이 무너져 궤멸되었다.[1] 수적으로 열세였던 히데히사 군도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도주했다.[1] 시마즈 군은 아와지 군에 이어 사누키 군과 조소카베 노부치카 군을 복병으로 포위, 섬멸했다.[1]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이 과정에서 전사했다.[1]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제3진은 전투 없이 패주했고, 히데히사는 다른 장수들을 버리고 고쿠라성으로 퇴각, 이후 사누키까지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1]
결국 히데히사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영지를 몰수당한 채 가이에키 처분을 받아 고야산으로 추방되었다.[1]
5. 2. 도요토미 연합군의 문제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직접 출진하지 않고, 센고쿠 히데히사를 대신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히데히사는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워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나, 영지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속 부대를 포함한 병사들의 결속력이 약했다. 종군한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 또한 높지 않았다. 게다가 구원을 위해 파견된 오토모 군은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의 병력뿐이었고, 시마즈 군에 비해 병력 수에서도 열세였다. 히데히사는 공을 세우는 데 집착하여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선제 공격을 시도했다.5. 3. 시마즈 군의 전술적 우위
시코쿠 정벌에서 공을 세운 센고쿠 히데히사는 사누키 다카마쓰 10만 석의 영주가 되었으나, 직속 부대를 포함한 군대의 결속력은 약했다. 시코쿠 다이묘들의 사기도 낮았고, 지원군으로 합류한 오토모 군 역시 벳키 무네쓰네(戸次統常)가 이끄는 소수 병력뿐이라 시마즈 군에 비해 병력에서 열세였다. 히데히사는 공을 세우려는 조급함에 겨울철 도하 작전을 감행, 12월 12일 이른 아침 헤쓰기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 군이 대치하게 된다.해질 무렵 시마즈 군 좌익의 이쥬인 히사노부(伊集院久宣)와 아와지 군 사이에 첫 교전이 벌어졌다. 초기에는 도요토미 군이 우세했으나, 아와지 군이 적진 깊숙이 진격하면서 진형이 무너져 궤멸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히데히사 군은 전의를 잃고 도주했고, 시마즈 군은 복병을 활용해 제2진인 사누키 군과 조소카베 노부치카 군을 포위 섬멸했다. 조소카베 노부치카와 소고 마사야스는 헤쓰기가와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제3진은 전투 없이 패주했고, 센고쿠 히데히사는 고쿠라 성을 거쳐 사누키까지 도망쳤다.
이 승리로 시마즈 군은 쓰루가 성을 함락시키고, 다음 날인 13일 후나이를 공격했다. 오토모 요시무네는 부젠으로 도주했으나, 오토모 군의 저항이 계속되자 도요토미의 대군이 부젠에 도착하면서 시마즈 군은 분고에서 철수하게 된다.
군감 센고쿠 히데히사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영지를 몰수당하는 가이에키 처분을 받고 고야산으로 추방되었다.
6. 관련 사료
포르투갈pt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프로이스 일본사』에는 1586년 규슈 정벌(시마즈 정벌) 당시 헤쓰기가와 전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오토모 소린의 적자 요시무네는 사쓰마 군이 침공해 오자 센고쿠 히데히사, 초소카베 모토치카와 함께 우에노하루(上原)에 성을 쌓기로 결정했지만, 향락과 부정한 행위에 빠져 성은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다.
1587년 1월 16일, 사쓰마 군은 도요미쓰 무네우오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분고의 지휘관들은 방심한 채 1월 20일에 부내를 출발하여 다카다 강(호츠키 강)에서 사쓰마 군과 맞붙었다.
전투 초기에는 분고 군이 우세한 듯 보였으나, 이는 사쓰마 군의 계략이었다. 사쓰마 군은 분고 군이 강을 다 건너자 숨겨두었던 병력을 동원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분고 군은 패주했고,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장남 노부치카를 포함한 2,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초소카베 모토치카는 말을 버리고 배로 탈출했고, 센고쿠 히데히사는 히지에서 배를 타려 했으나 분고 사람들의 증오를 사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20명의 부하와 함께 묘켄으로 탈출했다.
6. 1. 『플로이스 일본사』의 기록
분고 국주(오토모 소린)의 적자는 사쓰마 군이 쳐들어왔을 때 몸을 지키기 위해 센고쿠 히데히사, 초소카베 모토치카와 함께 우에노하루(上原)라는 곳에 성을 쌓기로 결정했다.하지만 그들은 성을 쌓는 작업에 집중하지 않았다. 부주의가 심했으며, 향연, 음란한 놀이, 부정한 행위에 정신이 팔려 성은 우스운 꼴이 되었다.
(사쓰마 군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이 살아남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국주 프란시스코(오토모 소린)의 아들 판탈리안(친모리, 오토모 소린의 셋째 아들. 다하라 친겐의 양자.)는 사제에게, 만약 부내(府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사제는 가산을 가지고 묘켄다케 성으로 피신하라고 전했다.
사쓰마 군세는 공격력을 강화하며 분고로 진입하여 영지를 빼앗아갔다.
분고의 지휘관들은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더욱 방심했다.
1587年|1587년일본어 1월 16일, 사쓰마 군세는 부내에서 3리 떨어진 도요미쓰 무네우오의 성을 습격했다.
성주는 부내로부터의 원조를 믿고 선전했지만, 적은 공격을 늦추지 않아 결국 무력으로 성을 점령하고 성주와 다수의 병사를 살해했다.
부내의 아군은 도요미쓰의 성이 점령되었는지 알지 못한 채, 포위를 풀지 여부를 평정하다가 결국 출동하기로 결정하고, 성 피비안과 성 세바스티안의 축일(1월 20일)에 부내를 출발했다.
부내에서는 센고쿠, 토사 국주 초소카베 모토치카와 그의 장남(노부치카), 판탈리안(다하라 친모리), 그 외 분고의 특정 영주들이 병사를 이끌고 출발했다. 기요타와 다카다의 사람들에게도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사쓰마 세력은 분고 세력의 동태를 알고 있었던 듯, 여유 있게 계략을 짜고 준비하여 일부 소수 병사만 밖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숨겨두었다.
분고 세력은 다카다 강(호츠키 강)에 도착했고, 강 건너편의 사쓰마 세력이 소수임을 보고 주저 없이 강을 건넜다. 전투 초기에는 분고 세력이 우세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는 사쓰마 세력이 상대 전원을 건너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강을 다 건너자 숨어 있던 병사들이 뛰쳐나와 맹공을 가했다. 토사의 조총대는 기대를 받았지만 조총을 발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 사쓰마 군은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며 맹렬하게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아군은 쉽게 격퇴되어 패주했고, 조총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분고 사람들은 하천의 흐름을 알고 있어 살아남았지만, 센고쿠와 초소카베의 병사들은 타국 사람이었으므로 얕은 곳을 알지 못해 익사했다.
이 전투에서 2,300명 이상이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토사 국주의 후계자(노부치카), 한때 아와의 영주였던 소고 도노, 그 외 다수의 귀인과 요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쓰마 세력은 그날 오후 부내에서 1/4리 지점까지 도달하여 도중에 있던 것을 모조리 불태워 파괴했다.
토사 국주 초소카베 모토치카는 말을 버리고 몇 명의 부하와 함께 배로 탈출했고, 가산은 도중에 포기했다.
사누키 국주 센고쿠 히데히사도 히지에서 승선하려 했다. 그는 관백에게서 분고 세력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악행, 분고 사람 모욕, 폭정으로 인해 깊은 증오를 받았고, 육지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죽일 위험이 있었다.
센고쿠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20명과 함께 탈출하여 가산을 포기하고 묘켄에 도착했다.
7. 기타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2]
문서
伊予武田氏で仙石配下。敗戦後、戦線離脱し[[高野山]]に蟄居。[[武田道安]]の父。
[3]
문서
「[[川上久智]]」項目参照。
[4]
문서
この後の[[九州平定]]において尾藤は仙石と同様の軍監を勤めるが、[[根白坂の戦い]]の際に仙石とは逆に消極策を採ったことを咎められ、所領没収となった。のちの豊臣氏による[[小田原征伐]]の際、仙石は機を得て大名に返り咲くが、尾藤は咎を受けて処刑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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