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수원 김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수원 김씨는 경순왕의 후예인 김품언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김품언은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을 토평한 공으로 정난공신에 책록되었고, 수원은 김씨의 옛 지명이다. 김씨 분관록 등 문헌에는 경순왕의 후예 김변이 수원으로 분적했다는 기록과 신라 상대등 김숭빈을 시조로 보는 설도 있다. 수원 김씨는 김알지의 후손으로, 김녕 김씨, 서흥 김씨, 한남 김씨, 용담 김씨, 용궁 김씨, 인동 김씨, 용성 김씨, 평해 김씨 등 여러 분파를 이루었다. 고려 시대에는 김자이, 김순보, 김세익, 김사경, 김한진 등이, 조선 시대에는 김정, 김한우, 인빈 김씨, 김공량, 김현룡, 김팔음, 김중채 등이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수원 김씨 - 인빈 김씨
    인빈 김씨는 선조의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원종), 의창군을 포함한 4남 5녀를 낳았으며, 특히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으로 인해 인조의 조모가 되었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철을 유배시키고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총애를 약화시켰다.
수원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성씨수원 김씨
水原金氏
관향경기도 수원시
나라한국
기원
원시조김알지(金閼智)
시조김품언(金稟言)
또는 김숭빈(金崇斌)
중시조김변(金忭)
집성촌
주요 인물
통계
년도2000
인구16,009명

2. 역사

수원 김씨는 시조가 누구인지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김품언(金稟言), 김변(金忭), 김숭빈(金崇斌)을 각각 시조로 하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광산 김씨, 나주 김씨, 안동 김씨, 의성 김씨, 경주 김씨, 광주 김씨는 모두 경순왕의 후손으로 수원이 바로 그 전의 우리 관향(貫鄕)이었다고 한다.

수원 김씨에서 분관한 성씨는 다음과 같다.

성씨시조시조와의 관계
김녕 김씨김시흥(金時興)김품언의 고손
서흥 김씨김보(金寶)김품언의 고손
한남 김씨김록연(金祿延)김품언의 손자
용담 김씨김순서(金順瑞)김품언의 넷째 아들
용궁 김씨김존중(金存中)김품언의 5세손
인동 김씨김정(金淀)김품언의 22세손
용성 김씨김시보(金時輔)김품언의 22세손
평해 김씨김숙흥(金俶興)김품언의 고손[2]



평해 김씨의 경우 일설에는 시조가 조선조 판관(判官) 김맹절(金孟節)이라고 한다.

2. 1. 시조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亂功臣)에 책록되고, 이후 태자소보(太子少保)를 역임하고 수성군(隨城君)에 봉해진 경순왕의 후예 김품언(金稟言)이 시조이다.[1] 수성(隨城)은 수원(水原)의 옛 지명이다.

《김씨 분관록》, 《증보문헌비고》, 《조선씨족통보》 등의 문헌에는 시조가 경순왕의 후예 상낙군(上洛君) 김변(金忭)이 수원(水原)으로 분적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시조가 신라 상대등(上大等) 김숭빈(金崇斌)이라고도 한다. 그는 신라 원성왕 김경신(金敬信)의 손자이며, 혜충태자 김인겸(金仁謙)의 셋째 아들이다. 김품언(金稟言)은 김숭빈(金崇斌)의 방계 후손이라고 한다.

2. 2. 본관

수원(水原)은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 때는 매홀(買忽)이라 불렸다. 757년(경덕왕 16) 신라에 편입되면서 수성군(水城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수주(水州)로 승격되었고, 1310년(충선왕 2)에 수원(水原)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조선 초기인 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가 되었으나, 이후 군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1793년(정조 17) 유수부로 승격되었고,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수원성을 쌓아 새로운 성곽도시로 변모했다. 1896년 지방 제도 개편으로 경기도 수원군이 되었다. 1949년 수원시로 승격되었고, 1967년 경기도청이 이전해 오면서 경기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3. 분적

《김씨 분관록》, 《증보문헌비고》, 《조선씨족통보》 등의 문헌에 따르면, 시조는 경순왕의 후예인 상낙군(上洛君) '''김변'''(金忭)이며 수원(水原)으로 분적하였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시조는 신라 상대등(上大等) '''김숭빈'''(金崇斌)이다. 그는 원성왕 김경신(金敬信)의 손자이자, 혜충태자(惠忠太子) 김인겸(金仁謙)의 셋째 아들이다. 김품언(金稟言)은 김숭빈(金崇斌)의 방계 후손이라고 한다.

김해 김씨(후김) 강희갑자보(康熙甲子譜) 서문에는 광산, 나주, 안동, 의성, 경주, 광주, 수원 김씨는 모두 그 후손(後孫)이며, 수원(水原)이 바로 그 이전의 우리 관향(貫鄕)이었다고 적혀 있다.(光羅安義慶廣水原之金皆其餘裔而水原卽我之舊貫也)

수원 김씨에서 분적된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광산 김씨(光山 金氏):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김알지 후예의 왕자라고 한다.
  • 나주 김씨(羅州 金氏):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경순왕의 손자라고 한다.
  • 안동 김씨(安東 金氏): 시조 '''김숙승'''(金叔承)은 경순왕의 손자라고 한다.
  • 의성 김씨(義城 金氏): 시조 '''김용비'''(金龍庇)는 경순왕의 후예라고 한다.
  • 경주 김씨(慶州 金氏): 시조 김알지(金閼智)는 전설로 전해지는 신라 김씨의 시조이다. 경순왕의 일부 후손들이 경주(慶州)로 분파하였다.
  • 광주 김씨(廣州 金氏): 시조 '''김녹광'''(金祿光)은 경순왕의 후예라고 한다.
  • 김녕 김씨 (金寧 金氏):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김품언의 고손이라고 한다.
  • 서흥 김씨(瑞興 金氏): 시조 '''김보'''(金寶)는 김품언의 고손이라고 한다.
  • 한남 김씨(漢南 金氏): 시조 '''김록연'''(金祿延)은 김품언의 손자라고 한다.
  • 용담 김씨(龍潭 金氏): 시조 '''김순서'''(金順瑞)는 김품언의 넷째 아들이라고 한다.
  • 용궁 김씨(龍宮 金氏): 시조 '''김존중'''(金存中)은 김품언의 5세손이라고 한다.
  • 인동 김씨(仁同 金氏): 시조 '''김정'''(金淀)은 김품언의 22세손이라고 한다.
  • 용성 김씨(龍城 金氏): 시조 '''김시보'''(金時輔)는 김품언의 22세손이라고 한다.
  • 평해 김씨(平海 金氏): 시조 '''김숙흥'''(金俶興)은 김품언의 고손이라고 한다.[2] 다른 설에 의하면 시조가 조선조 판관(判官) 김맹절(金孟節)이라고 한다.

4. 인물

수원 김씨 বংশ은 고려시대에 김자이가 태자소보, 김순보가 중서령을 지내는 등 여러 인물들이 관직에 진출했다. 조선시대에는 인빈 김씨가 선조의 후궁이 되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인빈 김씨의 아버지 김한우는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오라버니 김공량은 누이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세를 누렸다.

4. 1. 고려

이름직위비고
김자이태자소보(太子少保)김품언 장남
김순보중서령(中書令)김품언 차남
김세익중추원(中樞院) 좌승선(左承宣)김품언 손자
김사경평장사(平章事)김세익의 증손
김순평장사(平章事)
김변상락공(上洛公)일파(一派)를 이루었다.
김방중현대부(中顯大夫), 수성군(隨城君)
김지천두정(紏正)일파(一派)를 이루었다.
김준수성부원군(隋城府院君)
김인순공부시랑(工部侍郞), 수성군(隋城君)
김한진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충목왕 때 토적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록, 1362년(공민왕 11) 김용 등이 일으킨 흥왕사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록, 순성보절공신(純誠保節功臣) 호를 받고 수성군(隨城君)에 봉해짐.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안동으로 호종한 공과 경성을 수복한 공으로 각각 1등 공신에 책록됨. 판도판서(版圖判書), 개성윤(開城尹) 역임. 고려 멸망 후 불사이군(不事二君) 충절을 지켜 한산(漢山) 유의동(柳依洞)으로 은거.


4. 2. 조선


  • 김정(金淀) : 김예중(金禮仲)의 아들로, 1456년(세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사포(司圃)·인동현감(仁同縣監)·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 김한우(金漢佑) :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와 김공량의 아버지이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인빈 김씨(仁嬪 金氏) :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후궁이다.
  • 김공량(金公諒) : 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를 지냈다.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오라버니로, 누이가 선조의 총애를 받자 권세를 부렸다.
  • 김현룡(金見龍) : 김대흥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안강전투(安康戰鬪)에 참전하고 영천성(永川城)·경주성(慶州城) 수복에도 공을 세웠다. 절충장군(折衝將軍) 두모포(豆毛浦) 만호(萬戶)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만 힘썼다. 사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다.
  • 김팔음(金八音) : 1676년(숙종 2)에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 김중채(金重彩) : 숙종 때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참조

[1] 문서 김염 김해 김씨 (후김)
[2] 문서 김봉기 동정공(同正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