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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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녕 김씨는 경상남도 김해시의 옛 지명인 김녕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김시흥은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인종 때 김녕군에 봉해졌다. 김녕 김씨는 김해 김씨와 본관을 공유하여 구별하기 위해 수로왕의 후손을 선김, 김녕 김씨를 후김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김문기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가문이 쇠퇴했으나, 이후 김문기의 신원 회복과 함께 본관을 김녕으로 복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현재 김녕 김씨는 여러 파로 나뉘어 있으며, 주요 인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 등이 있다. 2015년에는 김녕 김씨와 금녕 김씨를 합하여 총 577,793명으로 집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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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 김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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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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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김녕 김씨 |
이칭 | 금녕 김씨, 후(後) 김해 김씨 |
나라 | 한국 |
관향 | 경상남도 김해시 |
시조 | 김시흥(金時興) |
집성촌 |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경상북도 김천시·상주시·군위군 경상남도 진주시·의령군·합천군 전라북도 고창군·순창군 전라남도 고흥군·무안군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방축리 황해도 신계군 중산리 |
인물 | 김문기 김응수 김도현 김병조 김상호 김법린 김도근 김재규 김성룡 김영삼 김석수 김찬우 김광일 김덕룡 김명규 김진재 김병일 김연태 김진표 김종빈 김성진 김형자 김판석 김진태 김재원 김세연 |
년도 | 2015 |
인구 | 577,793명 |
비고 | 김녕 김씨 중앙종친회 |
원시조 | 김알지 |
2. 본관
김녕(金寧)은 경상남도 김해(金海)의 옛 지명이다. 낙동강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해 오다가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금주(金州) 등으로 불렸으며,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금주목(金州牧)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다. 조선 태종이 다시 도호부로 고쳤다가 세조 때 진(鎭)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다. 19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김해군과 통합되어 도농통합시인 김해시가 되었다.
김녕(金寧)은 경상남도 김해시의 옛 지명이다. 낙동강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가락국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다가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으로 바뀌었고,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부로 고쳐 임해, 금주 등으로 불렸다. 1270년(원종 11) 방어사 김훤이 밀성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금주목 김해부로 개칭되었다. 조선 태종이 다시 도호부로 고쳤다가 세조 때 진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다. 19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김해군과 통합되어 김해시가 되었다.
3. 역사
고려 말 김녕의 지명이 김해로 바뀌면서 후손들이 김해를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들도 김해를 본관으로 쓰고 있어,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 수로왕의 후손들을 선김, 김녕군 후손들을 후김이라 불렀다. 1884년(고종 21) 시조가 봉해진 김녕을 본관으로 복귀하였다.[1] 그러나 1896년(고종 33) 갑오개혁 당시 일부 후손들이 김해를 그대로 등록하거나 분성으로 등록하기도 하였다.[1]
조선시대에 가문이 크게 번성하지 못했는데, 이는 김문기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면서 집안이 몰락했기 때문이다.[1] 이후 김문기의 명예가 회복되자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는 조선 헌종~고종 때 본관을 김녕으로 되돌린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1]
3. 1. 시조 및 유래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 인종 때 평장사를 역임하고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는 고려 현종 때 정란공신으로 은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태자소보(太子少保) 수성군(隨城君) 김품언(金禀言)의 고손인 동정공(同正公) 김봉기(金鳳麒)의 넷째 아들이라 한다.
고려 말 김녕의 지명이 김해로 바뀌어 후손들이 김해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런데 가락국(駕洛國) 수로왕의 후예들도 본관을 김해로 써오고 있어 양 김씨(金氏)를 구별하기 위하여 수로왕의 후손들을 선김이라 하고, 김녕군(金寧君) 후손들을 후김이라 하였다. 조선조 말 1884년(고종 21) 예조(禮曹)의 비준(批准)을 받아 시조가 봉군(封君) 받은 김녕(金寧. 김해의 고호)을 본관으로 복관(復貫) 하였다. 1896년(고종 33) 갑오개혁으로 민적령(民籍令)이 시행되면서 본관(本貫)이 복관(復貫)이 된지도 모른 채 일부 후손들이 옛 본적인 김해를 그대로 등록하거나 분성(盆城)하였다.
현재 일부는 '''김녕 김씨 충의공파'''(忠毅公派), '''경주 김씨 백촌공파'''(白村公派), '''김해 김씨 백촌공파'''(白村公派)로 갈라져 있으며, 또 일부는 김해 본관을 유지시켜 '''김해 김씨 익화파'''(益和派), ''' 김해 김씨 종남파'''(從南派), 김해 김씨 법흥파(法興派), '''김해 김씨 종민파'''(宗敏派) 등으로 남아 있다.
조선조 들어 가문이 크게 현달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후손 김문기가 단종 절신 사육신들이 주살당할 때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면서 집안이 멸문지화 풍비박산 나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김문기의 신원 회복이 이루어지자 여기저기서 자신들이 후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조선 헌종~고종 때 본관을 김녕으로 되돌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3. 2. 분파 및 분적
김녕 김씨는 크게 35개 계파로 나뉜다.
파명 | 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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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돈녕공파(領敦寧公派) | 김준 |
충의공파(忠毅公派) | 김문기 |
목사공파(牧使公派) | 김형 |
충정공파(忠貞公派) | 김준영 |
영광군수공파(靈光郡守公派) | 김대영 |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 김후영 |
동지사공파(知事公派) | 김희영 |
진천군수공파(鎭川郡守公派) | 김석종 |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 김희간 |
충경공파(忠敬公派) | 김경세 |
서윤공파(庶尹公派) | 김여택 |
주부공파(主簿公派) | 김위거 |
유수공파(留守公派) | 김안도 |
현감공파(縣監公派) | 김정필 |
충숙공파(忠肅公派) | 김흔 |
송암공파(松菴公派) | 김질 |
만은공파(晩隱公派) | 김길상 |
진사공파(進士公派) | 김정기 |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 김지 |
분성군파(盆城君派) | 김응수 |
생원공파(生員公派) | 김보철 |
좌승선공파(左承宣公派) | 김계저 |
전서공파(典書公派) | 김명로 |
판사공파(判事公派) | 김극원 |
판서공파(判書公派) | 김전 |
도순찰사공파(都巡察使公派) | 김문제 |
충민공파(忠愍公派) | 김인찬 |
상서공파(尙書公派) | 김문희 |
시랑공파(侍郞公派) | 김문백 |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 김문엽 |
참찬공파(參贊公派) | 김문강 |
부윤공파(副尹公派) | 김문해 |
부승선공파(副承宣公派) | 김극준 |
승선공파(承宣公派) | 김극중 |
김녕 김씨에서 분적한 성씨로는 분성 김씨, 양근 김씨가 있다.
3. 3. 조선시대의 쇠퇴와 복권
고려 말 김녕(金寧)의 지명이 김해(金海)로 바뀌어 후손들이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런데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후예들도 본관을 김해(金海)로 써오고 있어 양 김씨(金氏)를 구별하기 위하여 수로왕의 후손들을 선김(先金)이라 하고, 김녕군(金寧君) 후손들을 후김(後金)이라 하였다. 조선조 말 1884년(고종 21) 예조(禮曹)의 비준(批准)을 받아 시조가 봉군(封君) 받은 김녕(金寧. 김해의 고호)을 본관으로 복관(復貫) 하였다.[1]1896년(고종 33) 갑오개혁으로 민적령(民籍令)이 시행되면서 본관(本貫)이 복관(復貫)이 된지도 모른 채 일부 후손들이 옛 본적인 김해(金海)를 그대로 등록하거나 분성(盆城)하였다.[1]
조선조 들어 가문이 크게 현달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후손 김문기가 단종 절신 사육신들이 주살당할 때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면서 집안이 멸문지화 풍비박산 나버렸기 때문이다.[1] 이후 김문기의 신원이 회복되자 여기저기서 자신들이 후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조선 헌종~고종 때 본관을 김녕(金寧)으로 되돌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1]
4. 주요 인물
김녕 김씨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고려시대에는 평장사 김향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사육신 김문기,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김병조 등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을 역임한 김영삼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4. 1. 고려
이름 | 직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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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金珦) | 평장사 |
김정병(金挺丙) | 병부상서 |
김광저(金光儲) | 판도판서 |
김극세(金克稅) | 공부시랑 |
김중원(金重源) | 형부시랑 |
김현(金峴) | 문하시랑 |
김순(金順) | 호조 판서 |
4. 2. 조선
- 김문기 : 조선 세조 때 관직이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나,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20세기에 와서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 김준(金遵) : 자는 응원(應遠), 호는 만지당(晩池堂)이다. 김운의 아들이며 시조 김시흥의 대종손이다. 세종 때 병조판서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 돈녕부영사에 이르렀다. 전라남도 고흥군 과역면 가산리에 정주하고 못을 파 연꽃을 심어 고기를 기르며 호를 만지당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 관직이 영돈녕부사에 이르렀으나 사종숙인 백촌 김문기가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자, 서울 필동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고흥군 과역면 가산리에 내려와 세속을 끊고 지냈다. 단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월악산에 올라 통곡하며 충신의 예를 다하였다. 세조가 좌의정 벼슬을 권유하였으나 고사하고 구치잠과 계자서를 지어 지역 유림과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 김도현 : 김문기의 15대손으로, 자는 명옥(鳴玉), 호는 벽산(碧山)이다. 조선 말기 의병장이다.
- 김병조 : 독립운동가.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다.
4. 3. 대한민국
5. 과거 급제자
문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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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덕 |
김진영 |
6. 집성촌
지역 | 세부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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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 북구 노곡동 |
경상남도 | 진주시 진성면 하촌리, 미천면 향양리, 미천면 반지리, 고성군 삼산면 미룡리, 의령군 궁유면 평촌리, 합천군 쌍백면 삼리,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
경상북도 |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경주시 양남면 나산리, 김천시 대덕면 덕산리, 감문면 금라리, 상주시 초산동,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 군위군 부계면 명산리, 영덕군 병곡면 삽읍리 |
경기도 | 광명시 노온사동,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화성시 송산면 용포리 |
강원도 | 삼척시 도계읍 대기리, 평창군 진부면 동사리 |
전라북도 | 순창군 금과면 대성리, 금과면 청룡리,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 |
전라남도 | 담양군 대전면, 여수시 화양면, 고흥군 과역면 석촌리, 점암면 화계리, 무안군 해제면 학송리 |
충청남도 | 논산시 은진면 방축리 |
충청북도 |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 영동군 황간면, 영동군 영동읍 예전리 |
황해도 | 신계군 다미면 중산리 |
세종특별자치시 | 보람동(구 충청남도 연기군 호탄리) |
7. 인구
연도 | 가구 | 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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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 102,901가구 | 424,336명 |
2000년 | 162,204가구 | 513,015명 |
2015년 | 김녕 김씨 290,092명 + 금녕 김씨 287,701명 = 577,79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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