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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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숙빈 임씨는 조선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의 후궁으로,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았다. 본관은 부안이며, 이름은 유혜로 전해진다. 1752년 사도세자의 눈에 들어 양제에 봉해졌으며,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후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가 정조 때 양제로 복작되었다. 1899년 고종에 의해 숙빈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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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 임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양제, 빈 |
별칭 | 양제 임씨 (良娣 林氏) |
시호 | 숙빈(肅嬪) |
배우자 | 조선 장조 |
자녀 | 은언군, 은신군 |
왕조 | 조선 왕조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경기도 김포 |
사망지 | 조선 |
사망일 | 1773년 미상 |
매장지 |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이패리 (현,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 해질모루부락 서쪽) 미상 (실전되었음) |
2. 생애
1752년(영조 28년) 사도세자의 후궁이 되어 종2품 양제에 봉해졌다.[3]
1762년(영조 38년)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사망한 후 궁궐 밖으로 쫓겨났고,[4] 작호도 깎였다.[5] 1767년 영조의 명으로 한성에 집이 마련되었는데, 이곳은 훗날 양제궁으로 불렸다. 1776년(정조 즉위년) 음력 8월 3일 정조의 명으로 양제로 복작되었다.[6]
철종 재위 기간 중 시호나 존호 추상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은언군과 은신군 두 아들을 두었다. 은언군은 철종의 할아버지이며, 은신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이전 법통상 증조부이다.[7] 은언군의 직계는 영평군이 친자녀 없이 죽고, 익평군의 서자 경은군은 두 아들을 낳았으나 종적이 모호하여 소식을 알 수 없다. 당대에 자녀 없이 죽은 은신군 역시 직계가 단절되어 양자를 들였기에, 사실상 임씨의 후손은 남아있지 않다.
2. 1. 가계와 배경
본관은 부안이며, 임창주와 김해 김씨의 딸이다.[2] 조선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조(사도세자)의 후궁으로, 《한중록》에 의하면 이름은 '유혜'라고 전해진다.그녀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과 통진면 일대에 그녀의 친정쪽 친족들이 20세기 초까지도 몇몇 거주하고 있었고, 그런 연유로 후일 아들 은언군의 첩들 중 한명인 전산군부인이 김포 양촌면에 묘를 쓰게 되었다.
2. 2. 입궁과 후궁 책봉
부안 임씨로, 임창주와 김해 김씨의 딸이다.[2] 조선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조(사도세자)의 후궁으로, 《한중록》에 의하면 이름은 '유혜'라고 전해진다. 원래 궁인으로 있다가 1752년(영조 28년) 경 사도세자의 눈에 들어 임신을 하고,[3] 종2품 양제에 봉해졌다.그녀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과 통진면 일대에 그녀의 친정쪽 친족들이 20세기 초까지도 몇몇 거주하고 있었고, 그런 연유로 후일 아들 은언군의 첩들 중 한명인 전산군부인이 김포 양촌면에 묘를 쓰게 되었다.
1762년(영조 38년)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후 궁궐 밖으로 쫓겨났으며[4], 한때 그 작호도 깎였다.[5] 1767년 영조의 명으로 그가 살 집을 해조에 분부하여 한성에 자택을 마련해주었는데, 이는 후일 양제궁으로 불렸다. 그녀의 장남 은언군 이인의 처 상산군부인 송씨 등이 한때 이곳에 거주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음력 8월 3일 정조의 명에 의해 양제로 복작되었다.[6]
2. 3. 사도세자 사후
1762년(영조 38년)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후 궁궐 밖으로 쫓겨났으며[4], 한때 그 작호도 깎였다.[5] 1767년 영조의 명으로 그가 살 집을 해조에 분부하여 한성에 자택을 마련해주었다. 이는 후일 양제궁으로 불렸으며 그녀의 장남 은언군 이인의 처 상산군부인 송씨 등이 한때 거주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음력 8월 3일 정조의 명에 의해 양제로 복작되었다.[6]증손자인 철종 재위기간 중 시호나 존호의 추상 여부는 알려져있지 않다.
남편 장조와의 사이에서 은언군(恩彦君)과 은신군(恩信君) 두 아들을 두었다. 은언군은 철종의 할아버지이며, 은신군은 고종이 왕위에 등극하기 이전의 법통상 증조부이다.[7] 은언군의 직계는 영평군이 친자녀가 없이 죽고, 익평군의 서자 경은군은 두 아들을 낳았으나 그 종적이 모호하여 없어 소식을 알 수 없고, 당대에 자녀 없이 죽은 은신군 역시 직계가 단절되어 양자를 들였기에 사실상 임씨의 후손들은 남아있지 않다.
2. 4. 자녀와 후손
숙빈 임씨는 장조(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은언군과 은신군 두 아들을 두었다.[7] 은언군은 철종의 할아버지이며, 은신군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이전 법통상 증조부이다.[7]영평군은 친자녀 없이 사망하고, 익평군의 서자 경은군은 두 아들을 낳았으나 그 종적이 모호하여 소식을 알 수 없어 은언군의 직계는 단절되었다. 은신군 역시 당대에 자녀 없이 사망하여 양자를 들였기에, 사실상 임씨의 후손은 남아있지 않다.
2. 5. 사망과 추증
1779년(정조 3) 제주도에서 죽은 아들 은신군의 묘소가 숙빈 임씨의 묘소 근처에 설치되면서 미금면 이패리 중 숙빈 임씨와 은신군의 묘소가 있던 지역을 왕자궁(王子宮) 부락이라 부르게 되었다. 은신군은 후에 다시 양주군 화도면(후일의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개장되었다. 그러나 숙빈 임씨의 묘소는 실전되었다.1899년(고종 36년) 9월 12일 고종의 명에 따라 내명부 정1품 빈으로 추증되어 숙빈(肅嬪)에 봉해졌다.[8]
3. 가족 관계
항목 | 내용 |
---|---|
아버지 | 임창주 |
어머니 | 김해 김씨(金海金氏) |
남편 | 장조 (사도세자, 1735년 ~ 1762년) |
자녀 | 장남: 은언군 인 (1754년 ~ 1801년) - 철종의 조부 |
차남: 은신군 진 (1755년 ~ 1771년) - 고종의 양증조부 | |
은언군 인의 자녀 | |
손자 | 상계군 이담, 이창순, 이창덕, 풍계군 이당 (은전군 찬의 양자로 입양) |
서손자 | 이성득, 이철득, 요절, 전계대원군 이광 |
참조
[1]
서적
한중록
[2]
웹사이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시대 왕실문화 도해사전 〈철종대왕팔고조도〉항목
http://kyujanggak.sn[...]
[3]
서적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해냄
2007-10-30
[4]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영조 47년(1771) 음력 7월 12일 1번째 기사
[5]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영조 47년(1771) 음력 2월 5일 3번째 기사
[6]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정조 즉위년(1776) 음력 8월 3일 3번째 기사
[7]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 정조 14년(1790년) 음력 11월18일 기사[...又馳送一騎, 以便轎載䄄母, 使相見之, 夜將曙矣。...]
[8]
역사기록
《조선왕조실록》고종 36년(1899) 9월 12일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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