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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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계군은 사도세자의 서손이자 은언군의 아들로, 은전군에게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과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첩에게서 익평군 이희를 얻었다. 그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이후 석방되었으나 사망 장소와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철종 즉위 후 은전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묘소는 실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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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계군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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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이당 (李瑭) |
자 | 백규(伯珪) |
봉호 | 풍계군(豐溪君) |
생몰 기간 | 1783년 ~ 1826년 |
출생지 | 한성부 |
사망지 | 한성부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73-1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은언군 이인 |
어머니 | 전주 이씨 |
부인 | 신천 강씨 남양 홍씨 |
자녀 | 2남 |
아들 | 이최수 이회수 |
기타 | |
신분 | 왕족 |
작위 | 군 |
종실 등급 | 종실 |
조선 왕족 가계도 | |
조부 | 장조대왕 |
조모 | 숙빈 임씨 |
친조부 | 영조 |
외조부 | 강시묵 |
외조모 | 이름 미상 |
2. 생애
1783년 은언군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지만, 1786년 아버지 은언군이 강화도로 유배되면서 강화도로 가서 성장하였다. 그의 유년 시절 행적은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등에는 전하지 않는다. 이당의 생부는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 이인이며, 어머니는 부안 임씨 숙의(淑儀) 임지번의 딸이었다. 그는 후에 사도세자의 또 다른 서자이자 은언군의 이복 동생인 은전군에게 입양되었다.
1786년(정조 10) 형 상계군 이담 추대 사건에 연좌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당시 정조는 20대 후반으로, 후궁에게서 충분히 자녀를 볼 수 있었기에 홍국영이 상계군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추대하려 한 것은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아버지 은언군은 역적으로 몰렸고, 어머니 송씨와 형수 신씨는 가톨릭 신자로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당시 조선의 국법과 국교는 유교성리학이었으므로 반역죄로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다.
1801년 아버지 은언군이 사사된 후에는 천극죄를 받고, 다른 이복형제들과 함께 강화도 내 그의 거주지에 가시울타리가 쳐졌다. 1817년 이복 형 이성득이 형문을 받다가 고문치사하자, 순조는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하려 했다. 1820년에는 은언군의 생존한 아들들을 모두 석방시켜주었다. 이때 이당도 석방되어 한성부로 갔고, 이후 김시채(金時采)의 딸 광산현부인 김씨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강화도로 돌려보내졌고, 1822년에 석방되었다.
그는 대외활동을 자제하였고, 1826년에 별세하였다. 사망지와 사망 원인은 미상이다. 사후 풍계군(豊溪君)에 추봉되었다.[5] 생전에 왕족으로 대우받지 못했고, 사후에 풍계군(豊溪君) 작위가 추서되었으나, 언제 추서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의 부인인 광산 김씨는 소생이 없었다. 그는 첩 전주 이씨에게서 서자 익평군 이희를 얻었고, 이희는 그의 친형인 상계군에게 입양되었다.
2. 1. 어린 시절
1783년 은언군의 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지만, 1786년 아버지 은언군이 강화도로 유배되면서 강화도로 가서 성장하였다.[2] 그의 유년 시절 행적은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등에 전하지 않는다.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가 자녀를 낳지 못하자, 친정오빠 홍국영이 형 상계군 이담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정조는 20대 후반으로 충분히 자녀를 볼 수 있었기에 이는 문제가 되었다. 결국 1786년(정조 10) 형 상계군 이담 추대 사건에 연좌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갔다.2. 2. 강화도 유배와 역모 연루
1786년(정조 10) 형 상계군 이담의 추대 사건에 연좌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2] 한성부에서 태어났지만, 강화도에서 성장하였다. 1801년 6월 아버지 은언군이 사사된 후에는 천극죄를 받고, 다른 이복형제들 (이성득, 이철득, 이광 등)과 함께 강화도 내 그의 거주지에 가시울타리가 쳐졌다.장헌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아들이었으나, 형 상계군 이담이 홍국영에 의해 원빈 홍씨의 양자로 추대되면서 역적으로 몰렸다. 당시 정조는 20대였고 충분히 다른 여성들을 임신시킬 수 있었기에 이는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아버지 은언군은 상계군 이담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렸다. 어머니 송씨와 형수 신씨는 가톨릭 신자로, 청나라 사제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당시 조선의 국법과 국교는 유교성리학이었으므로, 반역죄로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다.
2. 3. 석방과 사망
1817년(순조 17) 11월 30일 이복 형 이성득이 형문을 받다가 고문치사하자, 순조는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하려 했다. 순조는 특별 명령을 내려 이철득과 이쾌득을 임시로 풀어주었고[3], 1820년(순조 20)에는 은언군의 생존한 아들들을 모두 석방시켜주었다. 이때 이당도 석방되어 한성으로 갔다. 이후 김시채(金時采)의 딸 광산현부인 김씨와 결혼하였다.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강화도로 돌려보내졌고, 1822년(순조 22) 2월 석방되었다. 그는 일체의 대외활동은 자제하였고, 1826년(순조 26)에 별세하였다. 사망지와 사망 원인은 미상이다. 사후 풍계군(豐溪君)에 추봉되었다.[5]
2. 4. 사후
시신은 경기도 안산군 군내면 동막동(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사좌(巳坐, 남동쪽 동에서 30도 방향)에 안장되었으며, 훗날 그의 초장지 근처인 안산군 군내면 장상리(현, 안산시 상록구 장상동 산67번지)에는 그의 양자 완평군 이승응과 후손들의 묘가 조성되었다.[1] 그의 묘는 다시 1861년(철종 12년) 10월 5일 경기도 과천군 북면 당정리(현, 경기도 군포시 당정동) 동북쪽 은전군묘 근처로 이장되었으나, 후일 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1]1849년(철종 즉위년) 6월 23일 증 소의대부에 추증되고, 그의 부인인 광산김씨는 광산현부인(光山縣夫人)에 봉작되었다.[1] 1851년(철종 2) 7월 14일 자녀 없이 죽은 그의 이복삼촌 은전군의 봉사손을 정하라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뜻에 따라, 철종은 은전군의 사후양자 후보를 찾다가, 풍계군을 다시 은전군의 양자로 지정했다.[1] 1851년 다시 철종의 명으로 풍계군을 은전군의 양자로 들이고, 선조의 9남 경창군 8대손 이도식(李道植)의 아들인 이승응을 다시 풍계군의 양자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1]
1858년(철종 9) 11월 9일 증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증작(贈爵)되었고,[1] 1860년(철종 11) 11월 4일 경평군 이호(李晧)를 본가로 돌려보내고, 경평군의 작호는 즉시 환수(還收)하라고 명하고, 풍계군(豐溪君)의 입후(立后)를 빨리 다시 택정(擇定)하도록 하여, 선조의 9남 경창군 이주의 8대손 이도식(李道植)의 아들 이승응(李昇應)을 후사(後嗣)로 정하고 완평도정(完平都正)과 완평군(完平君)에 봉작하였다.[1]
3. 가족 관계
항목 | 내용 |
---|---|
아버지 (양부) | 은전군(1759년 8월 14일 ~ 1778년 8월 26일) |
어머니 (양모) | 군부인 조씨(1758년 10월 28일 - 1817년 3월 8일), 평양 조씨 군수 조성(趙峸)의 딸. |
아버지 (생부) | 은언군(1754년 5월 29일 ~ 1801년 6월 26일) |
어머니 (생모) | 상산군부인 송씨(1753년 10월 15일 - 1801년 3월 17일), 천주교세례명 마리아, 진천인 참봉 송낙휴(宋樂休)의 딸. |
형 | 상계군 이담(1769년 - 1786년), 정조에게 출계. |
형수 | 군부인 신씨(1769년 6월 13일 - 1801년 3월 17일), 평산인 통덕랑 신오(申王+奧)의 딸. |
형 | 이창순 |
형 | 이창덕 |
여동생 | 이씨(1796년 8월 4일 ~1872년 4월 4일), 참봉 한각신에게 출가. |
매제 | 한각신(1795년 ~ 1853년) |
어머니 (친서모) | 이름 미상(? - 1821년 12월 16일[6]) |
이복 형 (서형) | 이성득(1775년 ~ 1817년 11월 27일[7]) |
이복 형 (서형) | 이철득(1780년 ~ ?, 1801년 5월, 초 아버지 은언군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 도주하려다 실패.) |
어머니 (친서모) | 전산군부인 이씨(1764년 - 1819년), 전주인 이덕희(李德喜)의 딸. |
이복동생 (서제) | 이름 미상, 요절 |
이복동생 (서제) | 전계대원군 이광(1785년 - 1841년), 철종의 사친. |
부인 | 광산현부인 증 광산군부인 광산김씨(1803년 4월 4일 ~ 1864년 3월 29일), 김시채(金時彩)의 딸. (자녀 없음) |
첩 | 전주이씨(全州李氏, ? - 1850년 이전 사망) |
서자 | 익평군 이희(1824년 - 1863년), 종숙 상계군 이담에게 출계. |
양자 | 경평군 이호(1832년 - 1895년), 원종의 2남 능원대군 8대손이며, 안풍군 이영(安豊君 李𪸠)의 현손. |
양자 | 완평군 이승응(1836년 - 1909년, 선조의 아홉째 서자 경창군 8대손 이도식(李道植)의 아들. |
양 처조부 | 김휘원(金輝源), 본관은 광산, 장인 김시채의 양아버지, 고려 충렬왕때의 문신 양간공 김연(金璉)의 18대손 |
생 처조부 | 김정휘(金正輝), 장인 김시채의 친아버지, 고려 충렬왕때의 문신 양간공 김연(金璉)의 18대손 |
장인 | 김시채(金時彩) |
장모 | 죽산박씨, 박성일(朴聖一)의 딸 |
처남 | 김기석(金箕錫) |
처남 | 김기혁(金箕赫) |
4. 논란
1863년(철종 14년)에 편찬된 《선원보》, 《선원계보기략》에는 그가 은언군의 서자가 아닌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1900년에 편찬된 《선원보》와 《선원계보기략》에는 은언군의 서자로 등재되었으며, 은전군의 양자로 입양된 것으로 기록되었다.[1]
풍계군이라는 작호가 어느 시점에 봉작되거나 추증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1]
참조
[1]
문서
reason of step-cousins is Yi Dang is adopted to half-uncle Prince Eunjeon. Prince Euneon was the original father of Yi Dang and Yi Kwang, Hanor Grand Prince Jeongye so half brothers. Yi Dang's mother was Lady Song of Sangsan, wife of Prince Euneon so Yi Kwang, Hanor Grand Prince Jeongye's mother was Lady Lee of Jeonsan, a concubine of Prince Euneon's
[2]
문서
은전군은 노론 벽파에 의해 택군되었다는 이유로 1778년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3]
뉴스
승정원에서 의계하여 죄인을 옮기면 안된다고 하였으나, 듣지 않다
순조실록
1817-11-30
[4]
웹사이트
顯祿大夫益平君諡狀
http://yoksa.aks.ac.[...]
[5]
문서
어느 시기에 추봉되었는지 추봉년월일은 미상이다.
[6]
간행물
승정원일기
1821-12-17
[7]
뉴스
의금부에서 강화 죄인 성득이 물고되었으니, 금부 도사를 보내 검험하라고 하다
순조실록
18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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