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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왕실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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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의 왕실 문장은 12세기 윌리엄 1세 때 처음 사용되었으며, 이후 스코틀랜드 군주들의 문장과 프랑스와의 관계, 잉글랜드와의 왕관 통합을 거치며 여러 변화를 겪었다. 현재는 잉글랜드, 아일랜드 문장과 함께 사용되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사자 휘황"으로 알려진 원래의 문장이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문장은 붉은 사자가 붉은 이중 테두리 안에 위치한 형태로, 투구, 크레스트, 지지자, 모토 등 다양한 구성 요소를 포함하며, 스코틀랜드, 영국, 캐나다 등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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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왕실 문장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
스코틀랜드 왕국 왕실 문장
문장사의 타바드와 마갑
문장기, 왕실 깃발 역할
어치브먼트
상세 정보
사용 국가스코틀랜드 왕국
사용 대상스코틀랜드 군주
채택 시기중세 후기
방패금색 바탕에 붉은색 사자가 푸른색 혀와 발톱을 가지고 있으며, 두 겹의 백합 문양 테두리 안에 있음
모토(약칭: ) (내 방어에 하느님이 나를 지키신다)
기타 요소현재 영국 왕실 문장의 두 번째 쿼터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는 현재 영국 왕실 문장의 첫 번째 및 네 번째 쿼터
스코틀랜드 정부 수반에게 군주가 사용 권한을 부여함
스코틀랜드의 상징 중 하나로 인정됨

2. 역사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은 12세기 윌리엄 1세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윌리엄 1세의 인장에서는 사자 문양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의 아들 알렉산더 2세의 인장에는 사자 문양이 뚜렷하게 나타난다.[2] 알렉산더 니즈벳과 같은 학자들은 사자 문양이 페르구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고, 왕실 테두리는 아키우스 시대에 추가되었다고 주장하며, 그 기원이 훨씬 오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문장은 군주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초기에는 사자가 칼을 들거나 왕관을 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왕실 테두리는 ''오를''이나 ''보더''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석공, 직조공, 예술가, 조각가들이 문장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며, 외국 문장 예술가들의 실수나 오해도 영향을 미쳤다.[2]

제임스 1세 이전까지 스코틀랜드 군주들은 지지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제임스 1세는 비밀 인장에 두 마리의 사자 지지자를 도입했고, 다른 곳에서는 유니콘 한 마리를 사용했다. 왕관 연합 이전까지 사자가 계속 사용되었지만, 제임스 5세는 예외적으로 비밀 인장에 두 마리의 유니콘을 사용했다. 메리 여왕은 다시 사자를 사용했지만, 대인장에는 유니콘 두 마리를 사용한 첫 번째 군주였다.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을 상속받으면서 유니콘 한 마리와 사자 한 마리를 지지자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관행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2]

제임스 3세 시대에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실 테두리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제임스 3세는 왕실 테두리를 원래 형태로 복원했다.[3] 1672년 스코틀랜드의 모든 문장 및 휘장의 공적 등록소가 설립되면서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 국왕의 문장을 등록했다.[4]

스털링 성의 왕실 문장과 엉겅퀴 훈장


1558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프랑스의 도팽 프랑수아와 결혼하면서 메리의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은 도팽의 문장과 합쳐졌고, 1559년 프랑수아가 프랑스 왕국의 왕 프랑수아 2세로 즉위하면서 그의 문장과 메리의 문장은 프랑스 국왕과 왕비의 지위를 반영하여 변경되었다.[5][6] 1560년 프랑수아 2세 사후, 메리 여왕은 헨리, 던리 경과 결혼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를 합친 문장을 계속 사용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 사망 이후,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위를 물려받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문장을 결합했다. 이후 찰스 2세 국왕 통치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된 왕실 문장은 엉겅퀴 훈장의 모토인 Nemo me impune lacessit|아무도 나를 처벌 없이 건드리지 못한다la를 포함하도록 보강되었다.[7]

1707년 연합법 이후 영국 왕국에서 사용되는 왕실 문장에는 프랑스 왕국, 아일랜드 왕국, 하노버 선제후국의 문장이 포함되었으며, 1800년 연합법 이후에는 하노버 왕국의 문장이 추가되었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이후 현대의 영국 왕실 문장이 채택되었다.

2. 1. 스코틀랜드 왕국

12세기 윌리엄 1세가 이러한 형태의 문장을 처음 사용했지만, 그의 인장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2세의 인장에서는 사자 문양이 명확하게 나타난다.[2] 알렉산더 니즈벳을 포함한 많은 작가들은 그 기원이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는데, 니즈벳은 사자가 전설적인 페르구스에 의해 처음 개인적인 상징으로 채택되었으며, 왕실의 테슈어는 아키우스 치세에 추가되었다고 주장한다.

알렉산더 2세의 대인장 뒷면, 안장과 방패에 사자 문양을 보여줌


매튜 파리의 ''Historia Anglorum''에 묘사된 알렉산더 2세의 문장


베르니게로데 문장집에 있는 스코틀랜드 국왕의 문장, c. 1475


포르투갈 ''Livro de Armerio-Mor''에 있는 문장, c. 1509


역사를 통틀어 문장은 군주에서 다음 군주로 전해지면서 세부 사항에서 약간의 변화만 있었다. 일부 초기 사례에서는 사자가 칼을 들거나 왕관을 쓰고 있었고, 왕실 테슈어는 때때로 ''오를'' 또는 ''보더''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비교적 사소한 변화는 시대를 통틀어 문장의 복제품을 만들려는 석공, 직조공, 예술가 및 조각가의 개별적인 노력의 결과였으며, 외국 문장 예술가들의 실수와 오해도 있었다.[2]

제임스 1세 (1406–1437) 치세까지 스코틀랜드 군주들은 지지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그의 비밀 인장에 있는 문장 묘사에 두 마리의 사자 지지자를 도입했고 다른 곳에서는 단일 유니콘을 사용했다. 사자는 왕관 연합까지 거의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예외는 그의 비밀 인장에 두 마리의 유니콘을 사용한 제임스 5세였다. 그의 딸 메리 여왕은 사자로 되돌아갔지만, 그녀의 대인장에는 두 마리의 유니콘을 사용했는데, 그렇게 한 첫 번째 군주였다.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을 상속했을 때, 그는 한 마리의 유니콘과 한 마리의 사자 지지자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관행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2]

제임스 3세 치세에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실 테슈어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여 "앞으로 왕은 세 개의 신분들의 조언을 받아 그의 문장 주위에 이중 테슈어를 갖지 않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이 사자의 완전한 문장을 사용할 것"이라고 명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제임스 3세는 곧 왕실 테슈어를 원래 형태로, 처음에는 맨 위가 없는 상태로 복원했다.[3]

1672년 스코틀랜드의 모든 문장 및 휘장의 공적 등록소가 설립되면서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 국왕의 업적을 등록했다.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의 발전 (1214년~1603년)

문장날짜세부 정보
1214년~1249년알렉산더 2세의 대왕실 인장 뒷면, 안장과 방패에 사자 도약을 표시함.
1558년 이전금색 바탕에 두 줄의 왕실 문장 테두리 안의 빨간 사자, 도약 자세.
1558년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프랑스의 왕세자비, 프랑수아, 도팽의 문장을 결합함.[10]
1558년~1559년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프랑스의 왕세자비, 프랑수아, 도팽의 문장을 분할하여 스코틀랜드 국왕 배우자로 사용함.[10]
1559년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도팽, 프랑수아, 스코틀랜드 국왕 배우자의 문장을 분할하여 사용하였으며, 양쪽 모두 잉글랜드 왕위 계승 주장을 포함, 잠시 동안 이루어짐.[11]
1559년~1560년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의 왕비 배우자[10]
1560년~1565년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의 과부 왕비[10]
--1565년~1603년1565년 헨리 스튜어트와 두 번째 결혼 후 메리는 프랑스 문장 사용을 중단하고 스코틀랜드 왕국의 문장으로 되돌아감.[12] 제임스 6세는 1603년 왕관 연합 이전까지 이 문장을 사용한 마지막 스코틀랜드 군주였다.
1603년~1652년, 1660년~1689년제임스 6세는 1603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을 상속받은 후 스코틀랜드 문장을 이들과 결합했다. 이 문장은 1654년부터 1660년까지 스코틀랜드에서 존재했던 잉글랜드 연방 또는 호국경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 기간 동안 군주제가 폐지되었다.
1689년~1694년1689년 제임스 2세가 폐위되고 그의 딸 메리 2세와 그녀의 남편 윌리엄 3세가 공동 군주로 통치했다. 그들은 문장을 결합했는데, 윌리엄은 나사우의 문장을 사용한 것만 제외하고는 동일했다.
1694년~1702년메리 2세 사망 후 윌리엄 3세는 자신의 문장을 단독으로 사용했다.
1702년~1707년앤은 1707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창설될 때까지 1603년 버전의 문장을 사용했다.


2. 2. 프랑스와의 관계



1558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프랑스의 도팽 프랑수아와 결혼하면서 메리의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은 도팽의 문장과 합쳐졌다. 도팽의 문장은 스코틀랜드 문장과 4분할되어 그의 스코틀랜드 왕 배우자로서의 지위를 나타냈다.[5] 1558년 11월 잉글랜드의 메리 1세가 사망하자, 스코틀랜드 여왕은 잠시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스코틀랜드 문장을 잉글랜드 왕실 문장과 4분할했고, 도팽은 잉글랜드 문장을 자신의 문장에 방패 문장으로 추가했지만, 이 주장은 1560년에 철회되어 이후 잉글랜드 문장은 사용되지 않았다.[6] 1559년 프랑수아가 프랑스 왕국의 왕 프랑수아 2세로 즉위하면서 그의 문장은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도록 변경되었고, 메리의 문장 역시 왕비로서의 지위를 반영하여 변경되었다.[5][6]

1560년 프랑수아가 사망한 후, 메리는 1565년 헨리, 던리 경과 결혼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를 합친 문장을 계속 사용했다. (이는 왕비에서 과부 여왕으로 지위가 바뀐 것을 반영하여 문장에 약간의 변경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상징성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도 중요했는데, 잉글랜드 군주는 1340년부터 프랑스 문장을 잉글랜드 문장과 4분할하는 것으로 상징되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역사적인 주장을 수세기 동안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5] 던리와의 결혼 후, 스코틀랜드 문장은 프랑수아와의 결혼 이전의 문장으로 돌아갔다.[5]

2. 3. 왕관 통합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사망하자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잉글랜드의 문장은 스코틀랜드의 문장과 4분되었고, 아일랜드를 위한 분기도 추가되었다. 이때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으므로 잉글랜드 왕국의 문장은 이미 프랑스 왕국의 문장과 4분되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자신의 왕실 문장의 다른 버전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왕실 의전의 차이는 1707년 연합법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오늘날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실 문장은 다른 곳에서 사용되는 문장과 계속 다르다).

찰스 2세 국왕 통치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된 왕실 문장은 라틴어 모토인 엉겅퀴 훈장을 포함하여 보강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가장 높은 기사 훈장이다.[7] 엉겅퀴 훈장의 모토인 Nemo me impune lacessit|아무도 나를 처벌 없이 건드리지 못한다la는 파란색 두루마리에 나타나 있으며 구획을 덮고 있다.[9] (이전에는 엉겅퀴 훈장의 칼라만 문장에 나타났었다).

찰스 국왕이 Nemo me impune lacessit|아무도 나를 처벌 없이 건드리지 못한다la를 추가하면서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된 그의 왕실 문장의 블레이즌은 다른 곳에서 사용된 그의 왕실 문장의 블레이즌과 보완되어 두 개의 모토가 표시되었다. 다른 곳에서 사용된 블레이즌에는 문장의 프랑스 모토인 Dieu et mon droit|나의 신과 나의 권리프랑스어가터 훈장의 옛 프랑스어 모토가 포함되었으며, 이는 잉글랜드 왕국에서 가장 높은 기사 훈장이다. 가터 훈장의 모토인 Honi soit qui mal y pense|악한 생각을 하는 자에게 수치를xno는 방패를 둘러싼 가터의 표현에 나타난다. 이후, 스코틀랜드와 다른 곳에서 사용된 왕실 문장의 버전에는 각각의 왕국의 문장과 관련된 기사단의 모토가 모두 포함되었다.

1603년 스튜어트 왕조가 아일랜드 왕국 왕위에 즉위한 이후, 왕실 문장은 아일랜드의 하프, 또는 클라르세아흐를 세 번째 사분면에 특징으로 했으며, 하프 자체의 스타일은 여러 번 변경되었다. 오이어크타스가 아일랜드 공화국법 1948을 통과하면서 아일랜드 국왕의 지위는 중단되었으며, 1937년 말에 창설된 아일랜드 대통령의 직책이 대외뿐만 아니라 내정 문제에 대해서도 아일랜드 국왕의 직책을 대체했다. 법은 아일랜드 국가가 공화국으로 묘사될 수 있다고 선언했으며, 그 후 새로 창설된 아일랜드 공화국은 영국 연방을 떠났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다른 곳에서 사용되는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현대 왕실 문장과 캐나다 문장은 북아일랜드를 대표하기 위해 아일랜드 하프를 계속 특징으로 한다.

2. 4. 연합 왕국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사망하자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위를 물려받았다. 잉글랜드의 문장은 스코틀랜드의 문장과 4분되었고, 아일랜드를 위한 분기도 추가되었다. 이때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으므로 잉글랜드 왕국의 문장은 이미 프랑스 왕국의 문장과 4분되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자신의 왕실 문장의 다른 버전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왕실 의전의 차이는 1707년 연합법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오늘날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실 문장은 다른 곳에서 사용되는 문장과 계속 다르다).

찰스 2세 국왕 통치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된 왕실 문장은 라틴어 모토인 엉겅퀴 훈장을 포함하여 보강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가장 높은 기사 훈장이다.[7] 엉겅퀴 훈장의 모토인 Nemo me impune lacessitla는 파란색 두루마리에 나타나 있으며 구획을 덮고 있다.[9] (이전에는 엉겅퀴 훈장의 칼라만 문장에 나타났었다).

찰스 국왕이 Nemo me impune lacessitla를 추가하면서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된 그의 왕실 문장의 블레이즌은 다른 곳에서 사용된 그의 왕실 문장의 블레이즌과 보완되어 두 개의 모토가 표시되었다. 다른 곳에서 사용된 블레이즌에는 문장의 프랑스 모토인 Dieu et mon droit프랑스어가터 훈장의 옛 프랑스어 모토가 포함되었으며, 이는 잉글랜드 왕국에서 가장 높은 기사 훈장이다. 가터 훈장의 모토인 Honi soit qui mal y pensexno는 방패를 둘러싼 가터의 표현에 나타난다. 이후, 스코틀랜드와 다른 곳에서 사용된 왕실 문장의 버전에는 각각의 왕국의 문장과 관련된 기사단의 모토가 모두 포함되었다.

1603년 스튜어트 왕조가 아일랜드 왕국 왕위에 즉위한 이후, 왕실 문장은 아일랜드의 하프, 또는 클라르세아흐를 세 번째 사분면에 특징으로 했으며, 하프 자체의 스타일은 여러 번 변경되었다. 오이어크타스가 아일랜드 공화국법 1948을 통과하면서 아일랜드 국왕의 지위는 중단되었으며, 1937년 말에 창설된 아일랜드 대통령의 직책이 대외뿐만 아니라 내정 문제에 대해서도 아일랜드 국왕의 직책을 대체했다. 법은 아일랜드 국가가 공화국으로 묘사될 수 있다고 선언했으며, 그 후 새로 창설된 아일랜드 공화국은 영국 연방을 떠났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다른 곳에서 사용되는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현대 왕실 문장과 캐나다 문장은 북아일랜드를 대표하기 위해 아일랜드 하프를 계속 특징으로 한다.

1603년 왕관 동군 연합 이후부터 1707년 연합법 이전까지,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의 블라존은 다음과 같은 문장 요소들을 포함했다.

포함된 문장
프랑스 왕국 (1603–1707)
잉글랜드 왕국 (1603–1707)
아일랜드 왕국 (1603–1707)



스코틀랜드의 왕 찰스 2세의 통치 이후,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의 블라존은 구획 위에 겹쳐진 파란색 두루마리가터 훈장의 모토인 Nemo me impune lacessitla를 포함하게 되었으며, 추가적으로 오렌지나사우 가문 (1689–1702) 문장이 포함되었다.

1707년 연합법 이후, 영국 왕국에서 사용되는 왕실 문장의 블라존은 다음과 같은 문장 요소들을 포함했다.

포함된 문장
프랑스 왕국 (1707–1800)
아일랜드 왕국 (1707–1800)
하노버 선제후국 (1714–1800)



1800년 연합법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는 대영국 및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왕실 문장의 블라존은 다음과 같은 문장 요소들을 포함했다.

포함된 문장
하노버 선제후국 (1801–1814)
하노버 왕국 (1814–1837)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이후, 현대의 영국 왕실 문장이 채택되었다.

3. 구성 요소

스코틀랜드의 왕실 문장은 여러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 군주들이 사용했던 완전한 문장(문장학에서의 성취)은 투구, 망토, 크레스트, 두 개의 모토, 서포터(문장학에서의 서포터), 구획, 그리고 엉겅퀴 훈장의 칼라를 포함했다.

제임스 1세 (1406–1437) 치세까지 스코틀랜드 군주들은 지지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그의 비밀 인장에 있는 문장 묘사에 두 마리의 사자 지지자를 도입했고 다른 곳에서는 단일 유니콘을 사용했다. 사자는 왕관 연합까지 거의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예외는 그의 비밀 인장에 두 마리의 유니콘을 사용한 제임스 5세였다. 그의 딸 메리 여왕은 사자로 되돌아갔지만, 그녀의 대인장에는 두 마리의 유니콘을 사용했는데, 그렇게 한 첫 번째 군주였다.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을 상속했을 때, 그는 한 마리의 유니콘과 한 마리의 사자 지지자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관행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2]

방패 주변에는 엉겅퀴 훈장의 칼라가 있었다. 구획은 일반적으로 스코틀랜드의 국화인 엉겅퀴를 포함했고, 문장의 후기 버전에는 또한 엉겅퀴 훈장의 모토인 Nemo me impune lacessitla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의 대부분은 왕관 통합 이후 스코틀랜드 문장에 유지되었으며, 대영 제국과 이후 연합 왕국의 문장의 스코틀랜드 버전에도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왼쪽 서포터는 잉글랜드 국기)를 들고 왕관을 쓴 사자로 대체되었고, 오른쪽 서포터는 이제 스코틀랜드 국기를 들고 있으며, 문장은 당시 사용되던 문장을 반영하도록 변경되었다.

1672년 스코틀랜드의 모든 문장 및 휘장의 공적 등록소가 설립되면서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 국왕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등록했다.[4]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의 발전 (1214년~1603년)'''

문장날짜세부 정보
1214년~1249년알렉산더 2세의 대왕실 인장의 뒷면, 안장과 방패에 사자 도약을 표시함.
1558년 이전금색 바탕에 두 줄의 왕실 문장 테두리 안의 빨간 사자, 도약 자세.
1558년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프랑스의 왕세자비, 프랑수아, 도팽의 문장을 결합함.[10]
1558년~1559년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프랑스의 왕세자비, 프랑수아, 도팽의 문장을 분할하여 스코틀랜드 국왕 배우자로 사용함.[10]
1559년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도팽, 프랑수아, 스코틀랜드 국왕 배우자의 문장을 분할하여 사용하였으며, 양쪽 모두 잉글랜드 왕위 계승 주장을 포함, 잠시 동안 이루어짐.[11]
1559년~1560년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의 왕비 배우자[10]
1560년~1565년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의 과부 왕비[10]
--1565년~1603년1565년 헨리 스튜어트와 두 번째 결혼 후 메리는 프랑스 문장 사용을 중단하고 스코틀랜드 왕국의 문장으로 되돌아감.[12] 제임스 6세는 1603년 왕관 연합 이전까지 이 문장을 사용한 마지막 스코틀랜드 군주였다.
1603년~1652년, 1660년~1689년제임스 6세는 1603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을 상속받은 후 스코틀랜드 문장을 이들과 결합했다. 이 문장은 1654년부터 1660년까지 스코틀랜드에서 존재했던 잉글랜드 연방 또는 호국경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 기간 동안 군주제가 폐지되었다.
1689년~1694년1689년 제임스 2세가 폐위되고 그의 딸 메리 2세와 그녀의 남편 윌리엄 3세가 공동 군주로 통치했다. 그들은 문장을 결합했는데, 윌리엄은 나사우의 문장을 사용한 것만 제외하고는 동일했다.
1694년~1702년메리 2세 사망 후 윌리엄 3세는 자신의 문장을 단독으로 사용했다.
1702년~1707년앤은 1707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창설될 때까지 1603년 버전의 문장을 사용했다.


3. 1. 방패

빨간색 사자가 파란색 혀와 발톱을 드러낸 채로 빨간색 이중 테두리 안에 위치해 있으며, 이 테두리는 '''왕실 테두리(tressure)'''라고 알려진 백합 문양(fleurs-de-lis)으로 장식되어 있다. 테두리의 백합 문양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의 "오래된 동맹(auld alliance)"을 상징한다고 전해지지만, 동맹이 시작되기 전인 1295년 이전에 테두리가 사용된 기록이 있어 그럴 가능성은 낮다. 사자가 발돋움하는 모습은 흔한 문장학적 기호이므로 문장을 더 독창적으로 만들기 위해 추가되었을 수 있다.

이 문장은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 군주들이 사용했던 완전한 문장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러한 문장의 형태는 12세기 윌리엄 1세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지만, 그의 인장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알렉산더 2세의 인장에서는 사자 문양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수년 동안 많은 작가들이 그 기원이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주장해 왔으며, 심지어 더 신뢰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의 문장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알렉산더 니즈벳은 사자가 전설적인 페르구스에 의해 처음 개인적인 상징으로 채택되었으며, 왕실의 테슈어는 아키우스 치세에 추가되었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통틀어 문장은 군주에서 다음 군주로 전해지면서 세부 사항에서 약간의 변화만 있었다. 일부 초기 사례에서는 사자가 칼을 들거나 왕관을 쓰고 있었고, 왕실 테슈어는 때때로 ''오를'' 또는 ''보더''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비교적 사소한 변화의 많은 부분은 시대를 통틀어 문장의 복제품을 만들려는 석공, 직조공, 예술가 및 조각가의 개별적인 노력의 결과였으며, 외국 문장 예술가들의 실수와 오해도 있었다.

제임스 3세 치세에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실 테슈어를 제거하려는 기이한 시도를 하여 "앞으로 왕은 세 개의 신분들의 조언을 받아 그의 문장 주위에 이중 테슈어를 갖지 않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이 사자의 완전한 문장을 사용할 것"이라고 명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제임스 3세는 곧 왕실 테슈어를 원래 형태로, 처음에는 맨 위가 없는 상태로 복원했다.[3]

1672년 스코틀랜드의 모든 문장 및 휘장의 공적 등록소가 설립되면서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 국왕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등록했다.

{{llang|en|Golden, a lion rampant gules, armed and langued azure, within a double tressure flory-counter-flory of the second, encircled

3. 2. 투구와 크레스트

투구는 정면을 향하고 있었고, 빗살무늬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망토는 종종 금색에 담비털 안감을 사용했지만, 다른 색상도 사용되었다. 크레스트는 정면을 향한 붉은 사자였으며, 왕관을 쓰고 칼과 을 들고 또 다른 왕관 위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의 명예라고 불리는 스코틀랜드 군주들이 사용했던 실제 왕관, 홀, 칼을 상징하기 위해 종종 양식화되었다. 크레스트 위에는 "In Defens|In Defenssco"라는 슬로건이 있었는데, 이는 "In My Defens God Me Defend|In My Defens God Me Defendsco"의 약자이다.

3. 3. 서포터

스코틀랜드의 왕실 문장의 서포터는 왕관을 쓰고 사슬에 묶인 두 유니콘이었다. 각 유니콘은 배너를 들고 있었는데, 오른쪽 유니콘은 문장 자체를, 왼쪽 유니콘은 스코틀랜드 국기를 들고 있었다.[1]

왕관 통합 이후에도 이 요소들 대부분은 스코틀랜드 문장에 유지되었으며, 대영 제국과 연합 왕국 문장의 스코틀랜드 버전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왼쪽 서포터는 잉글랜드 국기를 든 왕관을 쓴 사자로 대체되었고, 오른쪽 서포터는 스코틀랜드 국기를 들게 되었으며, 문장 자체도 당시 사용되던 문장을 반영하여 변경되었다.[1]

3. 4. 모토

스코틀랜드 군주들의 문장학에서의 문장에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모토가 포함되었다. 크레스트 위에는 "In Defenssco"라는 슬로건이 있었는데, 이는 "In My Defens God Me Defendsco"의 약자이다. 방패 주변에는 엉겅퀴 훈장의 칼라가 있었다. 문장의 후기 버전에는 엉겅퀴 훈장의 모토인 Nemo me impune lacessitla도 포함되었다.[1]

4. 스코틀랜드 버전의 특징

문장은 빨간색 사자(문장학에서의 사자)가 파란색 혀와 발톱을 드러낸 채로 빨간색 이중 테두리 안에 위치해 있으며, 이 테두리는 '''왕실 테두리(tressure)'''라고 알려진 백합 문양(fleurs-de-lis)으로 장식되어 있다. 테두리의 백합 문양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의 "오래된 동맹(auld alliance)"을 상징한다고 전해지지만, 동맹이 시작되기 전인 1295년 이전에 테두리가 사용된 기록이 있어 그럴 가능성은 낮다. 사자가 발돋움하는 모습은 흔한 문장학적 기호(문장학에서의 기호)이므로 문장을 더 독창적으로 만들기 위해 추가되었을 수 있다.[1]

이 문장은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 군주들이 사용했던 완전한 문장(문장학에서의 성취)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 문장의 정확한 형태는 다양했지만, 가장 완전한 버전은 일반적으로 투구, 망토, 크레스트, 두 개의 모토, 서포터(문장학에서의 서포터), 구획, 그리고 엉겅퀴 훈장의 칼라를 포함했다. 투구는 정면을 향하고 있었고, 빗살무늬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망토는 종종 금색에 담비털 안감을 사용했지만, 다른 색상도 사용되었다. 크레스트는 정면을 향한 붉은 사자였으며, 왕관을 쓰고 칼과 을 들고 또 다른 왕관 위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군주들이 사용했던 실제 왕관, 홀, 칼을 상징하기 위해 종종 양식화되었으며, 이들을 통칭하여 스코틀랜드의 명예라고 불렀다. 크레스트 위에는 "In Defenssco"라는 슬로건이 있었는데, 이는 "In My Defens God Me Defendsco"의 약자이며, 방패 주변에는 엉겅퀴 훈장의 칼라가 있었다. 서포터는 두 개의 왕관을 쓰고 사슬에 묶인 유니콘이었으며, 각자 배너를 들고 있었다. 오른쪽 서포터의 배너는 문장 자체였고, 왼쪽 서포터의 배너는 스코틀랜드의 국기였다. 구획은 일반적으로 스코틀랜드의 국화인 엉겅퀴를 포함했고, 문장의 후기 버전에는 또한 엉겅퀴 훈장의 모토인 Nemo me impune lacessitla도 포함되었다.[1]

이러한 요소들의 대부분은 왕관 통합 이후 스코틀랜드 문장에 유지되었으며, 대영 제국과 이후 연합 왕국의 문장의 스코틀랜드 버전에도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왼쪽 서포터는 잉글랜드의 국기를 들고 왕관을 쓴 사자로 대체되었고, 오른쪽 서포터는 이제 스코틀랜드 국기를 들고 있으며, 문장은 당시 사용되던 문장을 반영하도록 변경되었다.[1]

5. 현대적 사용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형성된 이후 스코틀랜드 문장은 잉글랜드, 아일랜드 문장과 함께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자 휘황"이라고도 알려진 스코틀랜드 왕실 기는 스코틀랜드에서 계속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자일스 대성당 내 엉겅퀴 예배당에 있는 왕실 문장


이 깃발은 국왕이 없을 때 왕실 거주지에 게양되며, 수석 장관,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고등 판무관, 리옹 문장관, 지방 장관들이 공식적인 자격으로 사용한다. 비공식적으로 왕실 기는 2차 국가 기로 사용되기도 하며,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과 같이 스코틀랜드 국가 대표팀이 참여하는 스포츠 행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 축구 협회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모두 왕실 문장을 기반으로 한 로고를 사용한다.[13]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는 찰스 3세 국왕의 문장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는 윌리엄, 로스시 공작의 문장노바스코샤 주의 문장메헬렌-브뤼셀 대교구의 문장독일 잘란트의 장크트벤델 시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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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상징적 의미

현재 형태의 왕실 문장은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와 함께 채택되었다. 문장은 방패의 첫 번째와 네 번째 분기에 스코틀랜드 문장을, 두 번째 분기에 잉글랜드 문장을, 세 번째 분기에 아일랜드 문장을 보여준다. 스코트어 모토 In Defenssco는 원래의 문장과 동일하게 나타나며, 엉겅퀴 훈장의 라틴어 모토 Nemo me impune lacessitla도 방패의 칸을 덮는 파란색 두루마리에 나타난다.[13] 스코틀랜드 유니콘과 잉글랜드 사자는 원래 문장에 있던 두 개의 유니콘을 본떠 성 안드레와 성 조지의 깃발을 휘날리는 창을 들고 있다. 유니콘은 오른쪽에 있는 지배적인 위치에 놓여 있으며, 방패는 가터 훈장 대신 엉겅퀴 훈장의 칼라로 둘러싸여 있다.[13]

로스시 공작의 문장은 스코틀랜드 대관리의 문장과 아일스 경의 문장을 분할한다. 중앙에는 내문장에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의 문장, 즉 세 개의 뾰족한 라벨이 있는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이 있다.[13]

지브롤터 정부의 문장은 방패의 두 번째 분기에 스코틀랜드 문장을 특징으로 하고 유니콘을 사악한 지지자로 사용하는 점에서 영국 왕실 문장과 일치하며, 모토 ''Dieu et mon droit'' 아래에 지브롤터 고유의 문장이 있다.[13]

캐나다 왕실 문장은 방패의 두 번째 분기에 스코틀랜드 문장을 특징으로 하고 유니콘을 사악한 지지자로 사용하는 점에서 영국 왕실 문장과 일치한다. 캐나다 버전은 또한 각 지지자가 방패뿐만 아니라 깃발을 표시하는 창도 지지한다는 점에서 스코틀랜드 버전을 반영한다.[13]

노바스코샤의 기와 문장은 스코틀랜드 문장의 요소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캐나다 왕실 문장과 달리 노바스코샤는 유니콘을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황실 관을 쓴 오른손 지지자로 묘사한다. 방패는 스코틀랜드 기의 반전된 표현을 묘사하고 내문장에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을 특징으로 한다. 모토 munit hæc et altera vincitla는 스코틀랜드 문장학 스타일에 따라 문장 위에 나타난다. (노바스코샤 부총독의 기와 방패 모두 내문장에 스코틀랜드 문장을 특징으로 한다.)[13]

왕실 테서(tressure)는 왕실의 은총의 표시로, 문장학에서 명예의 증진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많은 스코틀랜드 가문과 기관의 문장에 나타난다. 눈에 띄는 예로는 스코틀랜드 퍼스와 애버딘 시의 문장이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왕실 테서가 런던 경찰청의 문장에서 발견된다. 2002년, 여왕은 보통의 백합 대신 단풍잎이 있는 왕실 테서를 특징으로 하는 캐나다 군주주의 연맹에 문장을 수여했다. 장미와 엉겅퀴가 있는 왕실 테서는 애버딘 후작의 문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13]

메헬렌 대교구의 문장은 스코틀랜드의 문장과 동일했다. 1961년 브뤼셀 시의 문장과 분할되어 메헬렌-브뤼셀 대교구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문장을 사용하는 이유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한 가지 이론은 메헬렌의 수호성인 메헬렌의 룸볼드가 아일랜드 수도승이었고 중세 시대에 아일랜드 수도승을 스코티(Scotii)라고 불렀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문장이 성인의 문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은 메헬렌의 룸볼드가 스코틀랜드 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문장이 스코틀랜드 문장과 동일하다는 것이다.[13]

잘란트의 장크트벤델 마을의 문장은 스코틀랜드 기와 스코틀랜드 문장의 요소를 결합한다. 스코틀랜드 왕실 문장에서 가져온 파란색 배경의 네 개의 백합은 성 트리어의 벤델린을 연상시킨다. 전설적인 전통은 그를 스코틀랜드 왕의 아들로 묘사한다. 1465년, 장크트벤델 교구는 성 벤델린의 왕족 스코틀랜드 기원에 대한 전설을 조사하기 위해 두 명의 교구민을 스코틀랜드로 보냈다. 긍정적인 확인을 받은 후 스코틀랜드 사자 문장이 장크트벤델 교구의 인장에 사용되었다. 장크트벤델의 파란색-은색/흰색 기는 시 문장의 파란색 배경과 백합의 은색/흰색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기의 색상을 사용한다.[14][15][16][17]


6.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The 9 bizarre laws that still exist in Scotland – and you've probably already broken some https://www.eastloth[...] 2020-09-28
[2] 서적 Heraldry in Scotland: including a recension of 'The law and practice of heraldry in Scotland' by the late George Seton. https://books.google[...] Lulu.com 2012-08-21
[3] 웹사이트 The Royal Arms of Scotland http://www.theherald[...] The Heraldry Society 2018-03
[4] 서적 The Book of Public Arms https://archive.org/[...] 1915
[5] 웹사이트 Scottish Coins https://www.predecim[...]
[6] 웹사이트 Scottish Coins ~ Mary (1542–1567) http://www.scottishm[...] 2010-09-30
[7] 서적 Public Sculpture of Glasgow https://books.google[...] Liverpool University Press 2002-07-14
[8] 웹사이트 British Monarchy web site http://www.royal.gov[...] 2008-08-11
[9] 웹사이트 Heraldry – The Arms of the Earl of Dundee http://www.scrimgeou[...]
[10] 웹사이트 The Franco-Scots Coinage of Mary Stuart and Francis II http://www.niceasso.[...]
[11] 뉴스 Elizabeth and Mary, Royal Cousins, Rival Queens: Curators' Picks https://blogs.bl.uk/[...] British Library 2021-10-08
[12] 웹사이트 Yahoo | Mail, Weather, Search, Politics, News, Finance, Sports & Videos http://www.yahoo.com[...]
[13] 웹사이트 Archdiocese of Mechelen-Brussel - Arms, armoiries, escudo, wappen, crest of Archdiocese of Mechelen-Brussel https://www.heraldry[...] 2019-12-16
[14] 간행물 Die Wappen des Saarlandes, I. Teil, Hrsg.: Historischer Verein für das Saarland e. V. in Zusammenarbeit mit dem Landesarchiv der Regierung des Saarlandes (Zeitschrift für saarländische Heimatkunde, 3. Jg., Heft 1–4) Saarbrücken 1953
[15] 간행물 Wappen des Saarlandes, Landes- und Kommunalwappen Saarbrücken 1981
[16] 웹사이트 Stadt St. Wendel, Webseite: Stadtwappen/-signet https://www.sankt-we[...] 2021-02-17
[17] 간행물 Festschrift für Karl Lohmeyer, im Auftrag des Ministeriums für Kultus, Unterricht und Volksbildung herausgegeben Saarbrücken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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