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낏 왕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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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리낏 왕태후는 1932년 태국에서 태어났으며, 프라차티뽁 왕으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았다. 1950년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1956년 국왕이 승려가 되었을 때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태국 적십자사 명예 회장으로서 자선 활동을 펼쳤고, 문화 및 환경 보존에도 기여했으며, 1976년에는 생일이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2012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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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낏 왕태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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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태국 왕태후 |
![]() | |
이름 | 시리낏 |
로마자 표기 | Sirikit |
태국어 | สิริกิติ์ |
출생명 | 시리낏 끼띠야꼰 |
출생일 | 1932년 8월 12일 |
출생지 | 방콕, 시암 |
종교 | 테라바다 불교 |
왕실 | |
가문 | 끼띠야꼰 가문 (출생) / 마히돌 가문 (결혼) (짜끄리 왕조) |
아버지 | 나카뜨라 망갈라 |
어머니 | 부아 스니드봉 |
배우자 | 푸미폰 아둔야뎃 (라마 9세) (1950년 4월 28일 결혼 - 2016년 10월 13일 사망) |
통치 | |
왕비 즉위 | 1950년 4월 28일 |
퇴위 | 2016년 10월 13일 |
대관식 | 1950년 5월 5일 |
대관식 형식 | 대관식 |
이전 직책 | 태국 왕비 |
자녀 | |
자녀 상세 | 우본 라타나 / 와치랄롱꼰 (라마 10세) / 시린톤 공주 / 쭐라폰 공주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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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
경칭 |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Mother, สมเด็จพระบรมราชชนนีพันปีหลว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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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정보 | |
관련 항목 | 시리완나와리나리랏 왕녀 시리파쥬타폰 왕녀 아티따야톤키티쿤 왕녀 스뜨타나리나트 여공 솜사왈리 비 |
직책 | 태국 적십자 총재 |
2. 생애
시리낏 왕비는 교육, 자선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46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시리낏의 아버지는 영국 대사로 임명되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당시 시리낏은 13세로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영국에서 시리낏은 피아노, 영어, 프랑스어를 배웠다. 이후 가족은 덴마크, 프랑스 등지로 이주했고,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스라파툼 궁전에서 열린 결혼식은 스리 사와린디라 왕대비가 주관했다. 국왕과 시리낏은 결혼 증명서 11행에 서명했고, 당시 18세가 되지 않았던 시리낏을 위해 부모님도 12행에 서명했다. 이후 시리낏은 차크리 왕실 훈장을 받고 왕비가 되었다. 대관식은 1950년 5월 5일에 거행되었으며, 두 사람은 학업을 위해 스위스로 돌아갔다가 1952년 방콕으로 돌아왔다.
1956년 푸미폰 국왕이 불교 승려로서 수행하는 동안, 시리낏 왕비는 섭정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8]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6년 12월 5일, 국왕은 그녀에게 '쏨뎃 프라 낭 차오 시리낏 프라 보롬마라치니낫'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으며, 이는 태국 역사상 두 번째로 시암 섭정에게 주어진 칭호였다.
시리낏 왕태후는 1956년부터 태국 적십자사의 명예 회장을 맡는 등 자선 활동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2004년 12월 태국 남부 쓰나미 재해 이후 구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캄보디아와 미얀마 난민들을 위한 지원 활동도 펼쳤다.
태국에는 시리낏 왕태후의 이름을 딴 다음과 같은 시설 및 행사가 있다.
- 시리낏 왕태후 국립 아동 건강 연구소 (아동 병원)
- 시리낏 왕태후 의학 센터 건물 (라마티보디 병원)
- 시리낏 왕태후 유방암 센터 (방콕 소재 10층 규모 병원)
- 시리낏 왕비 국립 컨벤션 센터 (방콕)
- 시리낏 왕비 공원 (방콕)
- 시리낏 댐 (난 강, 우타라딧 주)
- 시리낏 왕비 식물원 (치앙마이 주)
- 시리낏 왕비 수목원 (파툼타니 주)
- 시리낏 왕비 컵 (아시아 태평양 골프 행사)
- 시리낏 왕비 게 (''Thaiphusa sirikit'')
- 시리낏 왕비 장미
- 여왕 컵 (축구 대회)
시리낏 왕태후는 태국 영화 ''수리요타이의 전설'' 제작을 주도하는 등 태국 문화와 역사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영화는 태국 영화 역사상 가장 호화롭고 제작비가 많이 든 작품 중 하나이다.
2012년 7월 21일 새벽, 시리낏 왕태후는 시리랏 병원에서 운동 중 허혈성 뇌졸중 진단을 받았다.[9] 이후 치료를 받으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10] 2016년 11월 29일, 왕실 발표에 따르면 건강을 회복하여 치뜨라라다 왕궁으로 돌아갔다.[11]
2. 1. 어린 시절과 가족
시리낏은 1932년 외할아버지인 웡사누쁘라판의 집에서 셋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은 짠타부리의 왕자인 끼띠야꼰 보라룩사나 왕자와 몸루앙 부아사니웡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프라차티뽁 왕이 하사했으며, "끼띠야꼰의 위대함"을 뜻했다.[2]그녀의 가족으로는 두 오빠와 여동생이 있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
몸라차웡 깐야나낏 끼띠야꼰 | 1929년 9월 20일 | 1987년 5월 15일 |
몸라차웡 아둔야낏 끼띠야꼰 | 1930년 11월 2일 | 2004년 5월 5일 |
몸라차웡 붓바 끼띠야꼰 | 1934년 8월 2일 |
시리낏이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그녀를 외할아버지에게 보내 1년간 기르게 했다. 아버지 끼띠야꼰 보라룩사나 왕자는 미국 워싱턴 D.C.로 가서 왕실 대사관 대사로 일했고, 어머니는 시리낏을 낳은 후 3개월 후에 남편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1933년에 그녀는 몸짜오 압손사만 테와꾼과 왕의 송클라 행차를 따라 여행을 했다.[4]
1년 후 부모는 태국으로 돌아왔고, 시리낏은 가족들과 함께 짜오프라야강 근처의 데베스 궁에 살게 되었다.[3]
4세 때, 시리낏은 라치니 스쿨의 유치원에 들어갔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방콕이 폭격당하자 교통이 불안해져서 궁에서 가까운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 컨벤트 스쿨로 옮겨가게 되었다.[23]
2. 2. 교육
시리낏은 4세 때 라치니 스쿨 유치원에 입학하여 초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다. 태평양 전쟁으로 방콕이 폭격을 당하자, 궁에서 가까운 성 프란시스 하비에르 컨벤트 스쿨(Convent School)로 옮겨 2학년부터 중학교 초반까지 다녔다.[5][6]1946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아버지가 영국 대사로 임명되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가서 중등 교육을 마쳤다. 영국에서 피아노, 영어, 프랑스어를 배웠다. 이후 가족은 덴마크, 프랑스 등지로 이주했고,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음악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2. 3. 푸미폰 국왕과의 만남과 결혼
프랑스에서 시리낏은 푸미폰 아둔야뎃을 만났다. 당시 푸미폰은 이미 왕위를 계승한 상태였고 스위스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시리낏은 푸미폰을 환영하며 여러 관광지를 함께 여행했다. 이들은 파리의 태국 대사관에서 함께 머물면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교제를 시작했다.1948년 10월 4일, 푸미폰은 제네바와 로잔 사이의 도로를 운전하다가 로잔 외곽 10km 지점에서 트럭과 추돌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푸미폰은 척추를 다치고 얼굴에 찰과상을 입었으며, 오른쪽 눈을 실명하여 의안을 착용하게 되었다.[7] 푸미폰이 로잔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시리낏은 자주 방문하여 그를 간호했다. 시리낏은 푸미폰의 어머니를 만나 푸미폰 곁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부탁했고, 푸미폰은 그녀를 위해 로잔의 학교에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1949년 7월 19일 조용한 약혼식이 치러졌고,[7] 1950년 4월 28일, 푸미폰의 즉위식 일주일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3. 왕비로서의 활동
1949년 7월 19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의 약혼이 발표되었고, 1950년 스라파툼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스리 사와린디라 왕대비가 결혼식을 주관했으며, 국왕과 시리낏 모두 결혼 증명서에 서명했다. 당시 18세가 되지 않았던 시리낏을 위해 부모님도 증명서에 서명했다. 결혼 후 시리낏은 차크리 왕실 훈장을 수여받고 왕비가 되었다. 1950년 5월 5일 대관식 이후 두 사람은 학업을 위해 스위스로 돌아갔다가 1952년 방콕으로 돌아왔다.[8]
1954년 이래 태국 적십자 총재를 맡고 있으며, 푸미폰 국왕의 지방 시찰에도 적극적으로 동행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격의 없이 행동하는 왕비의 모습에 국민들의 인기는 높았다. 시리낏 왕비의 생일인 8월 12일은 태국에서 공휴일이자 "어머니의 날"이다.
일본과도 관계가 깊어, 1963년 5월 푸미폰 국왕과 함께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이 외에도 1981년 5월, 1993년 4월, 1997년 9월에 일본을 비공식 방문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국왕과 함께 2600만엔을 기부했는데, 이는 수마트라섬 지진으로 사망한 왕비의 손자 푸미 젠센의 복구 지원에 힘쓴 일본에 대한 보답의 의미였다.
다음은 시리낏 왕비의 초상이 사용된 기념 지폐이다.
- 1992년 - 1000 바트 (생일 60주년)
- 2000년 - 50바트·50만 바트 (결혼 50주년)
- 2004년 - 100바트 (생일 72주년)
- 2012년 - 80바트 (생일 80주년)
- 2016년 - 500바트 (생일 84주년)
2016년 4월 16일, 2016년 구마모토 지진이 발생했을 때, 국왕과 왕비는 아키히토 일왕에게 위로의 서신을 보냈다.[1] 2016년 10월 13일, 푸미폰 국왕 서거 후 아키히토 일왕은 시리낏 왕비와 태국 정부에 조전을 보냈다.[1]
3. 1. 섭정
1956년 국왕이 전통적인 불교 승려 기간을 가졌을 때, 시리낏 왕비는 섭정 역할을 했다.[8] 그녀는 직무를 매우 훌륭하게 수행하여 공식적으로 태국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며, 국왕은 그녀의 생일인 1956년 12월 5일에 '쏨뎃 프라 낭 차오 시리낏 프라 보롬마라치니낫'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녀는 태국 역사상 두 번째 시암 섭정이었다. 첫 번째는 남편인 쭐라롱꼰 국왕이 유럽으로 여행을 갔을 때 섭정을 지낸 사오바 파옹스리 시암 왕비였으며, 이후 스리 파차린드라 왕비가 되었다.1954년 푸미폰 국왕이 불교에 출가하여 일시적으로 공무에서 물러나면서 시리낏 왕비가 섭정이 되었다.
3. 2. 자선 활동과 사회 공헌
시리낏 왕비는 자선 사업으로도 유명하며, 1956년부터 적십자 총재로 재직하였다. 2004년 12월 쓰나미 이후에도 이 역할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또한 태국으로 망명한 캄보디아나 미얀마 난민 구호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태국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시설 및 행사가 많다.
이름 | 종류 | 위치 |
---|---|---|
시리낏 왕태후 국립 아동 건강 연구소 | 아동 병원 | |
시리낏 왕비 의학센터 빌딩 | 라마티보디 병원 | |
시리낏 왕비 유방암 센터 | 병원 | 방콕 |
시리낏 왕비 국립 컨벤션 센터 | 컨벤션 센터 | 방콕 |
시리낏 왕비 공원 | 공원 | 방콕 |
시리낏 댐 | 댐 | 우따라딧 주 난 강 |
시리낏 왕비 식물원 | 식물원 | 치앙마이 주 |
시리낏 왕비 수목원 | 수목원 | 빠툼타니 주 |
시리낏 왕비 컵 | 골프 행사 | |
시리낏 왕비 게 (타이푸사 시리낏) | 게 | |
시리낏 왕비 장미 | 장미 | |
여왕 컵 | 축구 대회 |
시리낏 왕비의 생일은 국왕의 생일과 마찬가지로 국경일이며, 태국의 어머니의 날이기도 하다. 그녀는 군주제를 신성시하는 전통적인 지역에서 특히 존경받고 있다. 파타니, 얄라, 나라티왓 등 최남단 지방에 거주하는 무슬림 소수 민족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높이는 활동으로 태국 무슬림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높다. 왕비는 태국 남부와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에는 매년 무슬림이 다수인 지방에서 몇 달을 보냈다. 그녀는 비교적 조용한 외교관으로 여겨진다.
시리낏 왕태후는 태국 문화와 역사 홍보에도 적극적이며, 그녀가 제작을 주도한 태국 영화 ''수리요타이의 전설''은 태국 영화 역사상 가장 호화롭고 제작비가 많이 든 작품 중 하나이다.
3. 3. 문화 및 환경 보존
시리낏 왕태후는 자선 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6년부터 태국 적십자사의 명예 회장을 맡고 있다. 그녀는 2004년 12월 태국 남부의 쓰나미 재해 이후 이 역할에서 새로운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태국 내 캄보디아와 미얀마에서 온 많은 난민들을 위한 구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태국에는 왕태후의 이름을 딴 많은 것들이 있다.[1]
이름 | 종류 | 위치 |
---|---|---|
시리낏 왕태후 국립 아동 건강 연구소 | 아동 병원 | |
시리낏 왕태후 의학 센터 건물 | 라마티보디 병원 | |
시리낏 왕태후 유방암 센터 | 10층 규모 병원 | 방콕 |
시리낏 왕비 국립 컨벤션 센터 | 컨벤션 센터 | 방콕 |
시리낏 왕비 공원 | 공원 | 방콕 |
시리낏 댐 | 댐 | 난 강, 우타라딧 주 |
시리낏 왕비 식물원 | 식물원 | 치앙마이 주 |
시리낏 왕비 수목원 | 수목원 | 파툼타니 주 |
시리낏 왕비 컵 | 연례 아시아 태평양 골프 행사 | |
시리낏 왕비 게 (Thaiphusa sirikit) | 게 | |
시리낏 왕비 장미 | 장미 | |
여왕 컵 | 연례 축구 대회 |
왕태후는 또한 태국 문화와 역사를 홍보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는 그녀가 제작을 주도한 태국 영화 ''수리요타이의 전설''을 통해 나타났는데, 이 영화는 태국 영화 역사상 가장 호화롭고 비용이 많이 든 작품 중 하나이다.[1]
3. 4. 건강 문제
2012년 7월 21일 새벽, 시리낏 왕태후는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머물고 있던 시리랏 병원에서 운동을 하던 중 몸에 이상을 느껴 휘청거렸다. 자기 공명 영상 촬영을 한 의료진은 왕태후가 허혈성 뇌졸중을 겪었다고 진단했다.[9]왕태후는 치료를 받았으며, 이후 공식 석상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2년 12월 5일 아난다 사마콤 궁전에서 열린 국왕의 85세 생일 기념 대면 행사에도 불참했다.[10]
2016년 11월 29일, 왕실은 왕태후가 건강을 회복하여 병원에서 퇴원, 치뜨라라다 왕궁으로 돌아갔다고 발표했다.[11]
2012년 7월 21일 아침, 왕태후는 궁궐 내에서 산책하던 중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껴 정밀 검사를 받았다. 진단 결과는 뇌 혈류 부전이었으며, 의식은 뚜렷하고 언어 장애도 없었지만, 당분간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3주 후 왕태후 80세 생일 기념식과, 같은 해 12월 5일 푸미폰 국왕 85세 생일 기념식에도 불참했다.
2014년 3월에는 왼쪽 눈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2015년 5월부터 방콕의 태국 국립 시리랏 병원에 입원했다.
2016년 7월, 왕태후는 폐렴과 혈액 감염으로 방콕의 국립 쭐라롱꼰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2016년 11월 29일, 왕실 당국은 폐렴으로 입원했던 왕태후가 퇴원하여 궁궐로 돌아갔다고 발표했다.
최근에는 입원 상태가 계속되어 국민들 앞에 모습을 보이는 일은 거의 없다.
4. 자녀
(첫째, 장녀)
자녀: 1남 2녀 (3명)
(둘째, 장남)
1977년에 쏨사왈리와 결혼. 1991년에 이혼.
1994년에 수차리니와 재혼. 1996년에 이혼.
2001년에 시라트와 재혼. 2014년에 이혼.
2019년에 수티다와 재혼.
자녀: 5남 2녀 (7명)
(셋째, 차녀)
자녀: 없음
(넷째, 삼녀)
1982년에 위라윳 디트야사린과 결혼. 1994년에 이혼.
자녀: 2녀 (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