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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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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역은 군주를 살해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고대에는 종교적 의미를 지녔으나 중세 이후에는 왕권신수설로 인해 극도로 금기시되었다. 서양에서는 1200/1300년 이전 국왕 시해가 빈번했으나, 명확한 왕위 계승 규칙 확립으로 감소했다. 근대 시민 혁명 시기에는 찰스 1세, 루이 16세 등이 시해되었고, 국왕 시해와 국가의 영토 유지 능력 사이에는 음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씨혁명 사상에 따라 군주가 교체되기도 했으며, 일본에서는 소가노 우마코에 의한 스슌 천황 암살 사례가 있다. 현대에도 시역은 드물게 발생하며, 20세기 이후 이탈리아, 세르비아, 포르투갈, 러시아, 유고슬라비아, 태국,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에티오피아, 네팔 등에서 국왕 또는 왕족 살해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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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역
개요
설명군주를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행위. 다른 표현으로는 "국왕 살해", "국왕 살해", 또는 "국왕 弑逆(자)"가 있다.
영어 표기Regicide
분류
관련 범죄살인, 암살, 반역, 폭정
형태정치적 암살
권력 투쟁
혁명
역사적 관점
고대왕은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왕살해는 드물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다.
중세봉건적 관계와 왕권 신수설로 인해 왕살해는 심각한 죄악이자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근대왕권에 대한 도전이 증가하면서 왕살해는 혁명적 행동이나 정치적 투쟁의 수단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현대군주제가 감소함에 따라 왕살해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거나,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주요 사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고대 로마의 독재관으로,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 암살이집트의 여왕으로, 로마와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자살했다.
잉글랜드 내전찰스 1세 처형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군주제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다.
프랑스 혁명루이 16세 처형혁명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군주제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가져왔다.
러시아 혁명 중 니콜라이 2세 처형러시아 제국의 몰락과 공산주의 정권 수립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나폴레옹 1세황제가 되었으나 2번의 폐위와 유배를 겪었다.
법률적 관점
처벌대부분의 국가에서 왕살해는 반역죄로 간주되어 가장 심각한 처벌을 받는다.
적용현대 법률에서는 왕이 존재하지 않거나 상징적인 존재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 왕살해라는 용어는 역사적 맥락에서 주로 사용된다.
문화적 관점
문학왕살해는 비극, 권력 투쟁, 정의 구현 등 다양한 주제로 문학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영화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왕살해를 다룬 영화들이 제작된다.
상징성왕살해는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변혁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2. 역사적 배경

국왕 시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서구 기독교에서는 1200/1300년 이전에 국왕 시해가 빈번했다.[1] 600년에서 1200년 사이에는 군주 중 21.8%가 백성에게 살해당했을 정도다.[1] 그러나 중세 봉건 사회가 되면서 왕권신수설이 널리 퍼져 국왕 시해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왕을 암살하려 한 자는 극심한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 암살범이나 루이 15세 암살 미수범은 사지 분시형을 당했다.

1200년에서 1800년 사이에는 왕위 계승 규칙이 명확해지면서 국왕 시해가 줄었다.[1] 연구에 따르면 국왕 시해와 국가의 영토 유지 및 확장 능력은 반비례 관계를 보인다.[3]

시민혁명 시대에는 종교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사회계약에 따른 시민의 권리 의식이 커지면서, 혁명 세력은 국왕 시해를 구체제와 단절하는 상징으로 활용했다. 청교도 혁명에서는 올리버 크롬웰 등이 찰스 1세를 재판에 넘겨 처형했다. 프랑스 혁명에서도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시민혁명 이후에도 여러 군주제 국가에서는 국왕 시해를 중대한 범죄로 규정했다.

동아시아에서도 왕조 교체기에 국왕이 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은 그 사례를 정리한 표이다.

시대국가군주 등살해자
기원전 11세기은나라제신무왕 (목야의 싸움)
기원전 207년호해조고
기원전 206년자영항우
146년후한질제양기
190년후한소제변동탁
260년조모사마소의 부하 성제
385년전진부견요창
419년동진안제유유
421년동진공제
453년송 (남조)문제유소
551년양 (남조)간문제후경
552년동위효정제고양
535년북위효무제우문태
554년서위폐제
557년서위공제우문호
북주효민제
560년북주명제
581년북주정제양견
592년일본숭준 천황소가노 우마코의 부하 히가시한구마
618년양제우문화급, 우문지급
904년조종주전충
908년애제
912년후량주전충주우규
1413년류큐 남산왕국왕응조달벌기
1662년남명영력제오삼계의 부하 오국귀
1908년광서제서태후 혹은 원세개


2. 1. 서양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는 1200년/1300년 이전에 국왕 시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1] 600년에서 1200년 사이에는 군주의 21.8%가 백성에게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1] 중세 봉건 사회에서는 왕권신수설이 대두되면서 국왕 시해는 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왕의 암살을 기도한 혐의를 받은 자는 최대의 고통을 주기 위한 고문 처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서는 앙리 4세 암살범이나 루이 15세 암살 미수범에게 사지 분시형을 집행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1200년에서 1800년 사이에는 국왕 시해가 감소했는데, 이는 명확한 왕위 계승 규칙 확립으로 인한 것으로 분석된다.[1] 국왕 시해와 국가의 영토 유지/확장 능력 사이에는 음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3]

시민혁명 시대에는 종교의 속박이 느슨해지고 사회계약에 기반한 시민의 권리 의식이 향상되었기에, “왕살이”가 혁명파에 의해 구체제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상징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청교도 혁명에서는 올리버 크롬웰 등이 주도하여 찰스 1세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참수되었다. 프랑스 혁명에서도 국왕 루이 16세가 재판에 회부되어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시민혁명 이후에도 군주제를 채택한 국가 중에는 왕살이를 국가에 큰 타격을 주는 중대한 범죄로 법제화한 예가 많았다.

2. 1. 1. 영국

튜더 시대 이전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이 투옥 중 살해되거나(예: 에드워드 2세, 에드워드 5세) 전투 중 사망하는 경우(예: 리처드 3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일반적으로 왕살해로 간주되지 않는다.[4]

'왕살해(regicide)'라는 용어는 1587년 메리 스튜어트 여왕을 처형한 엘리자베스 1세를 "왕을 죽인 여왕"이라고 규정하며 교황 식스토 5세가 파문 교황령을 갱신했을 때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4] 메리 1세 통치 이후 잉글랜드를 개신교로 개종시켰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교황 비오 5세에 의해 파문당했었다.

잉글랜드 내전 이후, 찰스 1세의회파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의회파는 타협을 시도했지만,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고수하며 비밀리에 군대를 모으려 했다. 의회 지도자들은 그와 타협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형을 결정했다. 1649년 1월 20일 찰스는 재판에서 "어떤 권한으로 내가 여기로 불려왔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했다.[7] 찰스는 의회가 사법 권한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며 답변을 거부했고, 당시 잉글랜드 법에 따라 유죄를 인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649년 1월 27일 찰스 1세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59명의 위원이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했다.
찰스 1세의 참수를 묘사한 당시 판화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화이트홀 궁전 연회장 창문을 통해 야외 단두대로 호송되어 참수되었다.[9]

복고 이후,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한 59명의 위원 중 31명이 살아 있었다. 찰스 2세는 관용과 망각 법령을 통해 내전과 공화국 시대 범죄자들에게 사면을 부여했지만, 국왕 살해자들은 제외되었다. 많은 이들이 도망쳤고, 체포된 이들은 재판을 받았다. 토마스 해리슨, 존 존스 등 6명은 교수형, 능지처참을 당했다.[12]

1760년부터 1850년까지 영국에서 재위 중인 군주를 해치려다 처벌받은 사람들 중 일부는 실제 국왕 살해 의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효과 없는 청원 과정에 대한 극심한 좌절감을 경험한 후 물리적인 항의를 하는 것에 더 가깝다."

2. 1. 2. 프랑스

1836년 6월 25일, 알리보(Alibaud)라는 프랑스인이 루이 필리프 1세 국왕을 저격하여 암살을 시도했다.[1] 재판에서 알리보는 자신의 가족의 경제적 파탄에 대한 책임을 국왕에게 돌리며, 자신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비유하며 "왕정 시해는 스스로 정의를 취할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이다."라고 말했다.[1] 그는 단두대로 처형되었다.[2]

프랑스 혁명에서도 국왕 루이 16세는 재판에 회부되어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제정에서는 나폴레옹 1세가 즉위 이전부터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자신이 제정한 형법에 역적죄(Le régicide|프랑스어 발음프랑스어)를 두고 사형을 유일한 형벌로 규정했다.

2. 1. 3. 멕시코

멕시코 제1제국이 폐지된 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망명길에 올랐다. 1823년 5월 11일, 전 황제는 가족, 하인들과 함께 영국 배 롤린스호에 승선하여 이탈리아 리보르노로 향했다. 멕시코 보수파의 설득으로 귀국한 그는, 자신을 겨냥한 법의 결과를 알지 못한 채 체포되어 1824년 7월 19일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1] 그의 처형 이후 멕시코의 군주제 지지자들은 분노했다. 처형에 경악한 사람들의 감정은 소설가 엔리케 데 올라바리아 이 페라리의 "엘 카달소 데 파딜라"에 "어둠의 범죄가 끝났지만, 우리는 분명 근친살해자로 불릴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었다.[1]

이후 멕시코 제2제국이 몰락한 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막시밀리안 1세는 베니토 후아레스의 공화파에 의해 체포되어 1867년 6월 19일 처형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누에바 에스파냐로서 멕시코를 통치했던 가문의 일원이었다.[2] 체포에는 미국의 지원과 미구엘 로페스 대령의 방해 공작이 있었다.[2] 막시밀리안 황제의 마지막 말은 "...내가 흘리려는 피가 나의 새로운 조국에서 경험한 유혈 사태를 끝내게 하소서. 멕시코 만세! 멕시코의 독립 만세!"였다.[2]

2. 1. 4. 포르투갈

1908년 포르투갈에서는 카를루스 1세와 그의 아들 루이스 필리페가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리스본 왕정 살해 사건)[1]

2. 1. 5. 이탈리아

1900년 이탈리아움베르토 1세가에타노 브레시에 의해 암살당했다.[13] 브레시는 바바 베카리스 학살 과정에서 밀라노에서 살해된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암살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2. 1. 6. 이라크

1958년 7월 14일, 압둘 살람 아리프가 지휘하는 민족주의 장교 조직 혁명가들이 이라크 왕국의 통치 가문인 하시미트 가문 구성원 최소 4명(국왕과 왕세자 포함)을 살해했다.

2. 2. 동아시아

동아시아에서는 왕조가 바뀔 때 국왕이 살해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시대국가군주 등살해자
기원전 11세기은나라제신무왕 (목야의 싸움)
기원전 207년호해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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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1. 중국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황제 암살은 주 무왕이 은나라의 탕왕을 멸망시킨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왕조 교체, 즉 이씨혁명에 비유된다. 오행사상 등에서 이씨혁명은 혈통을 중시하지 않고, 혈통의 단절이 아닌 덕의 단절을 근거로 하며, 유가맹자는 이씨혁명에서 젠양과 무력에 의한 황위찬탈의 허용도 인정했다.[1]

시대국가군주 등살해자
기원전 11세기은나라제신무왕 (목야의 싸움)[1]
기원전 207년호해환관 조고[1]
기원전 206년자영초왕 항우[1]
146년후한질제대장군 양기[1]
190년후한소제변태사 동탁[1]
260년조모진왕 사마소의 부하 성제[1]
385년전진부견진왕 요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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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주효민제
560년북주명제
581년북주정제대승상 양견[1]
618년양제장군 우문화급, 우문지급[1]
904년조종량왕 주전충[1]
908년애제
912년후량주전충황자 주우규[1]
1662년남명영력제평서왕 오삼계의 부하 오국귀[1]
1908년광서제서태후 혹은 원세개[1]


2. 2. 2. 일본

일본에서는 소가노 우마코가 동한구마를 이용하여 스슌 천황을 살해한 사례가 있다.[17] 592년 10월 4일, 소가노 우마코스슌 천황이 돼지를 가리키며 "언젠가 이 돼지의 목을 베는 것처럼, 내가 싫어하는 자를 베고 싶다"라고 말한 것에 위협을 느껴 천황 암살을 결심했다고 한다.

역사학자 사토 나가토는 천황 암살 후에도 특별한 동요가 없었던 점을 들어, 소가노 우마코 개인의 행동이 아닌 여러 황족·대신들의 동의를 얻은 “궁정 쿠데타”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8]

이 외에, 유배 중 급사한 준닌 천황, 독살 의혹이 있는 고메이 천황의 사례가 있으나 불확실하다.

3. 왕위 찬탈

신권왕권 하에서 국왕 시해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14] 왕위 찬탈은 국왕 시해의 주요 동기 중 하나였다.[1] 성경의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의 목숨을 노렸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에 해치지 않았다.[14] 이는 신성한 왕권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프랑스에서는 국왕 살해범에게 극형을 가했는데, 이는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반역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15] 라발리아크와 다미앵 사건에서, 법원 문서는 범죄자를 국왕 살해자(regicide)가 아닌 아버지 살해자(patricide)로 언급하는데, 이는 신권에 의해 왕이 "국부(Father of the country)"로도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4. 현대의 국왕 시해

현대에도 국왕 시해는 드물게 발생하고 있다.

국가군주 등살해자시기
이탈리아 왕국움베르토 1세아나키스트 정치가 가에타노 브레시1900년
세르비아알렉산다르 1세 부부1903년
포르투갈카를루스 1세와
그의 아들 루이스 필리페
공화주의자 알프레도 코스타와,
마누엘 부이사 등
1908년
광서제서태후 혹은 원세개에 의한 독살1908년
그리스게오르기오스 1세알렉산드로스 수히나스1913년
이라크페이살 2세7월 14일 혁명 쿠데타 부대1958년


4. 1. 러시아

1918년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은 체카에 의해 살해되었다.

4. 2. 유고슬라비아

1934년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는 블라도 체르노젬스키에 의해 암살당했다.

4. 3. 태국

1946년 태국의 라마 8세는 의문사했다.

4. 4. 요르단

1951년 요르단압둘라 1세는 극렬파 팔레스타인인 무스타파 슈크리 아슈에 의해 암살당했다.

4. 5. 사우디아라비아

السعودية|사우디아라비아ar의 페이살 왕은 1975년에 조카인 페이살 빈 무사이드 왕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4. 6.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혁명 이후,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감금 중 암살당했다.

4. 7. 네팔

2001년 네팔 왕족 살해 사건에서 비렌드라 국왕을 포함한 다수의 왕족이 디펜드라 왕세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5. 결론

국왕 시해는 단순한 살인을 넘어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역사적으로 국왕 시해는 왕조 교체, 권력 투쟁, 종교적 갈등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했으며, 각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녔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왕 시해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으며, 이는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는 직접적인 국왕 시해 사례는 드물지만, 왕위 쟁탈전이나 반정 과정에서 왕족이 살해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이는 한국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17]

참조

[1] 논문 The Decline of Regicide and the Rise of European Monarchy from the Carolingians to the Early Modern Period https://www.degruyte[...] 2019
[2] 서적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The Decline of Violence in History and its Causes Penguin UK
[3] 논문 Territorial State Capacity and Elite Violence from the 6th to the 19th century
[4] 서적 The Life of Saint Francis of Assisi and a Sketch of the Franciscan Order https://books.google[...] P. O'Shea 1867
[5] 웹사이트 Mary, Queen of Scots (r. 1542–1567) https://www.royal.uk[...] 2020-08-25
[6] 문서
[7] 문서
[8] 서적 Killers of the King: The Men Who Dared to Execute Charles I https://books.google[...] A&C Black 2014-09-11
[9] 서적 The English Atlantic in an Age of Revolution, 1640–1661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10] 문서
[11] 문서
[12] 간행물 History Today 2014-02
[13] 서적 A History of Terrorism Transaction Publishers
[14] 서적 Life of St Columba Penguin books
[15] 웹사이트 The Mikado by W. S. Gilbert and Arthur Sullivan http://gsarchive.net[...] 2018-04-29
[16] 웹사이트 弑逆(しいぎゃく) の意味 - goo国語辞書 https://dictionary.g[...] 2021-04-06
[17] 서적 (제목 없음)
[18] 논문 七世紀における倭王権の展開過程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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