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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스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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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쑹스룬은 중국의 군인으로,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공산당의 장정에 참여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설 후 인민해방군 중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장진호 전투를 지휘했다. 1953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89년 톈안먼 사건 당시 계엄령에 반대했다. 1991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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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스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5년의 송시륜
본명송시륜
원어 이름宋时轮
로마자 표기Sòng Shílún
출생일1907년 9월 1일
출생지후난성 리링시, 청나라
사망일1991년 9월 17일
사망지상하이, 중국
배우자정샤오춘
소속 정당중국 공산당
모교중화민국 육군군관학교
군 종류[[File:Republic_of_China_Army_Flag.svg|25px]] 국민혁명군
중국 공농 홍군
[[File:Republic_of_China_Army_Flag.svg|25px]] 팔로군
복무 기간1919년–1985년
최종 계급[[File:PLAGeneral r.svg.png|50px]] 상장
참전국민혁명군
중국 공농홍군
팔로군
중국 인민해방군
주요 전투중국 내전
장정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장진호 전투
훈장[[File:FreedomAndIndependence1Ribbon.jpg|40px]] 자유와 독립 훈장 (1급 훈장) (1951년)
[[File:DPRK ribbon bar - Order of National Flag 1st Class.svg|40px]] 국기 훈장 (1급 훈장) (1953년)
[[File:Order of Bayi 1st Class.svg|40px]] 8.1 훈장 (1급 훈장) (1955년)
[[File:Order of Independence and Freedom 1st Class.svg|40px]] 독립 자유 훈장 (1급 훈장) (1955년)
[[File:Order of Liberation 1st Class.svg|40px]] 해방 훈장 (1급 훈장) (1955년)
경력
임기 시작1972년 10월
임기 종료1985년 11월
이전예젠잉

2. 생애

후난성 주저우시 리링시에서 태어난 쑹스룬은 황푸 군관학교 졸업 후 중국공산당의 '장정'에 참가하여 국민당 군대와 싸웠으나, 일본의 대륙 침략으로 항일 활동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마오쩌둥중화인민공화국을 창설하고 인민해방군을 창설하자 중장 계급을 부여받고 창군의 주역이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쩌둥김일성의 지원 요청으로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 일부를 한반도에 투입하였다. 쑹스룬은 '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한 인민해방군 9병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에서 미 10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미 해병대를 상대로는 승리했지만, 후퇴하는 미 육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추격하는 데는 실패했다.[8] 1953년 한국 전쟁이 휴전되자 중국에서 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중공군은 공산주의의 기본 사상인 평등을 내세워 계급 없이 직책으로 지휘했으나, 이후 계급의 필요성을 느껴 계급을 창설했고, 이때 쑹스룬은 대장 계급을 받았다. 1956년까지 북한군의 화기를 보충하는데 협력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쑹스룬은 팔로군 제120사 제358여 제716단 단장, 옌베이 지대 지대장 겸 정치위원, 제4종대 사령원을 역임하였다. 1940년에는 옌안의 중국 공산당 중앙 당교에서 학습하였고, 1941년 10월에는 옌안에서 설립된 황푸 동학 분회의 이사로 추대되었다. 국공 내전에서는 톈푸 전선 지휘부 참모장, 산둥 야전군 참모장, 베이핑 군사 조정 집행부 중공 집행처 처장, 보하이 군구 부사령원 겸 제7사 사단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에는 화둥 야전군 제10종대 사령원, 1949년 2월에는 제3야전군 제9병단 사령원이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에 참가한 쑹스룬은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을 겸임했다. 같은 해 11월 제2차 전역에서 장진호에서 미군 제1해병사단을 포위했지만, 병력 분산 및 기후 등으로 실패했다.[8] 반 년의 휴양 보충 후, 1951년 4월 제5차 전역에 참가, 5월에는 한국군 제3군단을 섬멸했다.[8] 같은 해 여름, 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했다.[8] 1952년 귀국하여 인민해방군 고급 보병 학교 교장 겸 정치위원이 되었다.

1955년 9월 상장을 받았다. 1957년 말, 군사 과학원 부원장 겸 외국군 연구 부장, 계획 지도 부장이 되었다. 1967년 문화 대혁명으로 실각했으나,[8] 1972년 11월 군사 과학원 원장으로 복귀했다. 1977년 중공 중앙 군사 위원이 되었다. 1980년 이후 『중국대백과전서』 총 편집 위원회 부주임 겸 "군사"권 편집 위원회 주임, 『중국 군사 백과 사전』 편찬 위원회 주임을 역임했고, 1984년 2월에는 중앙 군사 위원회 전사·군사 편찬 위원회 부주임 위원이 되었다.

1989년 톈안먼 사건 때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상임위에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노선을 굳힌 덩샤오핑이 계엄령을 실시하고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를 진압하는 데 반대했다. 1991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8]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후난성 주저우시 리링시에서 태어났다.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공산당장정에 참여하여 국민당 군대와 싸웠다. 이후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항일 활동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마오쩌둥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인민해방군을 창설하자 중장 계급을 받고 창군의 주역이 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마오쩌둥김일성의 요청으로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 일부를 한반도에 투입하였다. 쑹스룬은 인민해방군 9병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에서 미 10군과 싸워 승리했다. 그러나 올리버 스미스가 지휘하는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는 데 집중하여, 미 해병대에는 승리했지만 후퇴하는 미 육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추격하지 못했다.[8] 1953년 한국 전쟁이 휴전되자 중국에서 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중공군은 평등을 내세워 계급 없이 직책으로 지휘했으나, 이후 계급의 필요성을 느껴 계급을 만들었다. 쑹스룬은 대장 계급을 받았다. 1956년까지 북한군의 화기 보충을 지원했다.

쑹스룬은 1989년 톈안먼 사건 때 덩샤오핑의 계엄령과 시위대 진압에 반대했다. 1991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그의 초기 군 경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연도내용
1927년황푸 군관학교 제5기 보병과 졸업, 중국 공산당 입당, 광저우에서 체포
1929년출옥 후 홍군 참가, 핑리 변 유격대 대대장 등 역임
1931년홍군 총사령부 교도총대장, 제35군 참모장 역임
1932년독립 제3사 참모장, 동 사단장, 제21군 제61사 사단장, 장시 군구 대리 참모장 역임
1934년장정 참가, 홍군 대학 교원, 대대장 역임
중일 전쟁 발발 후팔로군 제120사 제358여 제716단 단장, 옌베이 지대 지대장 겸 정치위원, 제4종대 사령원 역임
1940년옌안의 중국 공산당 중앙 당교에서 학습
1941년옌안에서 설립된 황푸 동학 분회의 이사로 추대
국공 내전톈푸 전선 지휘부 참모장, 산둥 야전군 참모장, 베이핑 군사 조정 집행부 중공 집행처 처장, 보하이 군구 부사령원 겸 제7사 사단장 역임
1947년화둥 야전군 제10종대 사령원
1949년제3야전군 제9병단 사령원


2. 2. 중일 전쟁 (1937–1945)

쑹스룬은 중일 전쟁 초기에 제8로군 제120사단 제358여단 제716연대를 지휘했다. 1937년 9월, 옌먼관 북쪽 작전에 참여하여 북옌먼 파견대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한 달도 안 되어 여러 마을을 탈환했고, 중요한 철도 요충지인 다퉁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위협했다. 이 작전은 제8로군 최고 사령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1]

1938년 5월, 북옌먼 파견대는 덩화 파견대와 합쳐 제4종대를 구성했으며, 쑹스는 5,300명의 병력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이 통제하는 동허베이 자치 정부를 공격하여 옌칭, 용닝, 스하이, 싱룽 도시들을 점령했다. 그는 이어서 현지 민간인들을 동원하여 冀东大暴动|동허베이 봉기중국어를 일으켰고, 그의 지휘 하에 있는 병력은 빠르게 10만 명을 넘어 동허베이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동원된 병력은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반격으로 빠르게 격퇴당해 베이핑 서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 중앙군사위원회는 쑹스의 공로를 치하하며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쑹스와 덩의 종대는 수개월 동안 동허베이 깊숙이 들어가 현지 당 요원들과 협력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해당 지역에 중국 행정을 복원하고, 대중의 도움을 받아 작전 구역을 설립하고, 아군의 영향력을 적 후방 깊숙이 확대하고, 적에게 피해를 입혔다.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2]

1940년 쑹스는 옌안으로 돌아와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에서 추가 훈련을 받았다.

2. 3. 국공 내전 (1945-1949)

쑹스룬은 1945년 9월 천이와 함께 산둥에 합류하여 현지 부대의 참모장을 역임했다. 1946년 1월 예젠잉을 도와 军事调处执行部|군사조정집행부중국어의 작전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국민당 군사 대표들과 협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공산군과 국민당군 간의 여러 소규모 충돌을 성공적으로 해결했으며 암살 시도를 피했다.[3] 제2차 국공 내전 발발 후, 공산당 산둥 야전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했지만, 쓰 현에서 패배한 후 지휘에서 해임되었다.[3] 이후 보하이 군관구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동중국 야전군의 제10종대로 승진하여 동 허난 전투에서 추칭취안을 저지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지난 전투와 화이하이 전역에서 제10종대를 계속 이끌었다. 화이하이 전역에서 류산페이와 함께 제7, 10, 11종대를 지휘하여 황바이타오의 포위를 풀려는 추칭취안과 리미의 시도를 성공적으로 차단하여 황의 부대가 완전히 전멸하도록 했다.

1949년, 동중국 야전군은 제3야전군으로 개편되었고, 쑹스룬은 제9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양쯔강 도하 작전에 참여했으며, 그의 지휘 하에 있던 제27군은 양쯔강을 따라 국민당 방어선을 돌파한 최초의 공산군 부대 중 하나였다. 그 후 랑시 현과 광더 지역에서 7개 국민당 군단을 포위하고 5개를 격멸했다. 1949년 5월, 상하이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후 상하이 주둔군 사령관으로 복무했다.[4]

2. 4. 한국 전쟁 (1950-1953)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쩌둥김일성의 지원 요청으로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 일부를 한반도에 비밀리에 투입하였다. 쑹스룬은 '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한 인민해방군 9병단을 이끌고 참전했다.[5] 장진호 전투에서 미 10군과 교전하여 승리하였으나,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는 데 집중한 나머지 후퇴하는 미 육군과 한국군을 추격하는 데는 실패했다. 1951년 4월에는 제5차 전역에 참가하여 5월에 한국군 제3군단을 섬멸하였고, 같은 해 여름 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하였다.[8]

2. 4. 1. 장진호 전투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쩌둥김일성의 지원 요청으로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의 일부를 한반도로 비밀리에 투입하였다. 쑹스룬은 '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한 인민해방군 9병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에서 미 10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5] 다만 쑹스룬은 성격이 불같았기 때문에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미 해병대를 상대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반면 후퇴하는 미 육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추격하는 데는 실패했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쑹스룬은 중국 인민지원군 제9병단을 지휘했다. 그의 부대는 195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장진호 전투에서 미 육군 제31연대 전투단과 미 해병 제1사단과 교전했다.[5] 이후 쑹스룬과 제9병단은 중국 춘계 공세에 참여했다.

1950년 한국 전쟁에 참가한 쑹스룬은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을 겸임했다. 같은 해 11월, 제2차 전역에서 장진호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을 포위했지만, 병력 분산 및 기후 등으로 실패로 끝났다.[8] 반 년의 휴양 보충 후, 1951년 4월 제5차 전역에 참가, 5월에는 한국군 제3군단을 섬멸하였다.[8] 같은 해 여름, 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하였다.[8]

2. 4. 2. 중공군 춘계 공세

쑹스룬은 한국 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 제9병단을 지휘했다. 195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제9병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미 육군 제31연대 전투단과 미 해병 제1사단과 교전했다.[5] 이후 쑹스룬과 제9병단은 중국 춘계 공세에 참여했고, 1952년 중국으로 돌아갔다.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을 겸임했다. 같은 해 11월, 제2차 전역에서 장진호에서 미군 제1해병사단을 포위했지만, 병력 분산 및 기후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8] 반 년간 휴양 및 보충 후, 1951년 4월 제5차 전역에 참가하여 5월에는 한국군 제3군단을 섬멸했다.[8] 같은 해 여름, 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했다.[8]

2. 4. 3. 휴전과 귀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쩌둥김일성의 지원 요청으로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의 일부를 한반도에 비밀리에 투입하였다. 쑹스룬은 '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한 인민해방군 9병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에서 미 10군과 싸워 승리하였다.[5] 다만 쑹스룬은 성격이 불같았기 때문에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미 해병대를 상대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반면 후퇴하는 미 육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추격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1953년 한국 전쟁이 휴전되자, 중국에서 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중공군은 공산주의의 기본 사상인 평등을 내세워서 군대임에도 불구하고 계급 없이 직책으로 지휘하는 체계였으나 이후 계급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어 중공군은 계급을 창설했다. 중공군이 계급을 창설할 당시에는 직책에 해당되는 계급을 부여했는데 이때 쑹스룬은 대장 계급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1956년까지 북한군의 화기를 보충하는데 협력한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쑹스룬은 중국 인민지원군 제9병단을 지휘하였고, 195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장진호 전투에서 미 육군 제31연대 전투단과 미 해병 제1사단과 교전했다.[5] 1952년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1950년 한국 전쟁에 참가하여 중국 인민지원군 부사령원을 겸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제2차 전역에서 장진호에서 미국군 제1해병사단을 포위했지만, 병력 분산 및 기후 등으로 실패로 끝났다.[8] 반년의 휴양 보충 후, 1951년 4월 제5차 전역에 참가, 5월에는 한국군 제3군단을 섬멸하였다.[8] 같은 해 여름, 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하였다.[8]

1952년 귀국하여 인민해방군 고급 보병 학교 교장 겸 정치위원이 되었다.

2. 5. 한국 전쟁 이후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쩌둥김일성의 지원 요청으로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의 일부를 한반도에 투입하였다. 쑹스룬은 인민해방군 9병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에서 미 10군과 싸웠다. 쑹스룬은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려 했기 때문에 미 해병대를 상대로는 승리했지만, 후퇴하는 미 육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추격하는 데는 실패했다.[8] 1953년 한국 전쟁이 휴전되자, 중국에서 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중공군은 공산주의의 평등 사상을 내세워 군대임에도 계급 없이 직책으로 지휘했으나, 이후 계급의 필요성을 느껴 계급을 창설했다. 쑹스룬은 대장 계급을 부여받았고, 1956년까지 북한군의 화기를 보충하는데 협력했다.

1951년 4월 제5차 전역에 참가, 5월에는 한국군 제3군단을 섬멸했다.[8] 같은 해 여름, 연합군의 반격을 저지했다.[8]

2. 6. 문화 대혁명 시기

1967년, 문화 대혁명으로 실각하였다.[8] 1972년 11월, 군사과학원 원장이 되었다.

2. 7. 문화 대혁명 이후

1967년, 문화 대혁명으로 실각했다.[8] 1972년 11월, 군사 과학원 원장이 되었다. 1977년, 중공 중앙 군사 위원이 되었다. 1980년 이후, 『중국대백과전서』 총 편집 위원회 부주임 겸 "군사"권 편집 위원회 주임, 『중국 군사 백과 사전』 편찬 위원회 주임을 역임했다. 1984년 2월에는 중앙 군사 위원회 전사·군사 편찬 위원회 부주임 위원이 되었다.

2. 8. 톈안문 사건

톈안먼 사건 당시 쑹스룬은 전 국방부장 장아이핑과 함께 5명의 다른 퇴역 장군들과 더불어 베이징에서 군에 의한 계엄령 집행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2. 9. 사망

1991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8]

참조

[1] 서적 邓华将军传 中共中央党校出版社
[2] 간행물 最艰难处显奇才——记宋时轮将军二三事
[3] 웹사이트 某开国上将谈军史奚落粟裕:他打过鲁南战役? http://news.ifeng.co[...] 凤凰网 2014-01-21
[4] 서적 中国人民解放军历史上的200个军区 解放军文艺出版社
[5] 웹사이트 General Song Shilun, Chinese Military Leaders During the Korean War http://www.paulnoll.[...] 2008-07-26
[6] 뉴스 鲜明对照:中外媒体谈赵紫阳葬礼 http://www.voachines[...] 2005-04-02
[7] 뉴스 六四事件:七上将上书反对戒严始末 https://news.creader[...] 2021-06-04
[8] 서적 朝鮮戦争 (下) (歴史群像シリーズ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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