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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우치 다카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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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지우치 다카노부는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05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최고 구속 156km/h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로 주목받았으나, 프로 입단 후 잦은 부상으로 인해 1군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2013년 은퇴 후에는 여자 프로 야구 지도자와 경비 회사 직원으로 근무하며, 현재는 ALSOK 아키타 지사에서 현금 수송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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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우치 다카노부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선수명쓰지우치 다카노부
원어명lang: ja
value: 辻内 崇伸
로마자 표기Takanobu Tsujiuchi
가나つじうち たかのぶ
한자辻内 崇伸
국적일본
출신지나라현 시키군 가와니시정
생년월일1987년 12월 5일
신장185
체중88
수비 위치투수
투구
타석
클럽 정보
소속 구단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98
프로 입단 연도2005년
드래프트 순위고교생 드래프트 1순위
연봉 (2013년)550만 엔
커리어
선수 경력요미우리 자이언츠 (2006 ~ 2013)
감독/코치 경력이스트 아스트라이아
사이타마 아스트라이아 (2014 - 2015)
도호쿠 레이아 (2016)
사이타마 아스트라이아 (2017 - 2018)
사진 정보
쓰지우치 다카노부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9년 8월 25일, 요코스카 스타디움)

2. 프로 입단 전

나라현 출신[1]으로, 초등학교 1학년 때 1루수로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고리야마 시니어'라는 팀에 소속되어 투수로 전향했다[3]. 이후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2학년 가을부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4].

2. 1. 고시엔 대회 활약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 2학년 가을부터 에이스로 활약했다[4]. 3학년 때인 2005년 여름 고시엔에 출전했다.

1회전 가스가베 교에이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는 5이닝 동안 6실점하며 부진해 강판되었지만, 선두 타자를 상대로 2스트라이크 2볼 상황에서 던진 바깥쪽 속구가 156km/h를 기록하며 주목받았다. 이 기록은 백네트 뒤에서 오릭스 버팔로즈 스카우트가 스피드건으로 측정한 것이며, 고시엔 전광판에는 152km/h로 표시되었다. 당시 이 구속은 데라하라 하야토에 이어 고교 야구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4].

2회전 후지시로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는 당시 대회 타이 기록인 19탈삼진을 잡아냈다. 쓰지우치의 활약에 힘입어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는 1991년 여름 고시엔 이후 처음으로 4강에 진출했다. 쓰지우치 본인은 대회 통산 65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는 반도 에이지의 83탈삼진에 이어 당시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5]. 준결승전에서는 고마자와 대학 부속 도마코마이 고등학교의 다나카 마사히로를 상대로 홈런을 치기도 했다.

2. 2. 청소년 대표팀 활약

같은 해 AAA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이 활약했던 1998년 대회 이후 일본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2. 3. 2005년 드래프트

2005년 고교생 드래프트에서 쓰지우치는 전년도부터 뛰어난 투수로 주목받았다. 거물급 선수로는 드물게 "12개 구단 OK"라는 발언을 하여[25] 처음에는 많은 구단이 지명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어 치열한 경쟁이 펼쳐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점이나, 추첨에서 떨어졌을 경우의 위험 부담을 피하려는 구단들이 지명을 포기하면서, 10월 3일 열린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최종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오릭스 버펄로스 두 구단만이 1순위 지명을 놓고 경합하게 되었다.

추첨 결과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교섭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때 해프닝이 발생했는데, 꽝 추첨권을 뽑은 오릭스의 나카무라 가쓰히로 단장이 당첨 여부와 관계없이 찍혀 있는 NPB의 확인 도장을 보고 자신이 교섭권을 획득했다고 착각하여 승리 포즈를 취한 것이다. 반면 실제 교섭권 획득 문구가 적힌 종이를 뽑은 요미우리의 호리우치 쓰네오 감독은 나카무라 단장의 행동에 의아해하면서도 즉각 항의하지 않았고, 주최 측 역시 확인을 소홀히 하면서 한때 오릭스가 교섭권을 딴 것으로 잘못 발표되기도 했다.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쓰지우치는 굳은 표정으로 "오릭스는 훌륭한 구단"이라며 지명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곧 요미우리가 교섭권을 획득했다는 사실이 정정되어 발표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쓰지우치는 표정이 밝아지며 오른손으로 V자를 그렸고, 이어진 재회견에서는 환한 얼굴로 "어릴 적부터 요미우리를 좋아했기 때문에…"라고 말해 현장의 동급생들과 기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쓰지우치 본인은 "어느 구단이든 영광이며 좋고 싫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동안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이라는 사실을 숨겨왔으며, 그의 부모님조차 이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후에 쓰지우치는 "간사이 지방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25]. 추첨에서 쓰지우치를 놓친 오릭스는 오카다 타카히로(T-오카다)를 1순위로 지명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마쓰이 히데키 이후 처음으로 고교 졸업 선수에게 계약금 1억(추정)을 제시하며 쓰지우치와 계약했고, 12월 9일 입단을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쓰지우치는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 출신 첫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가 되었다. 입단 당시 등번호는 '''15'''번을 받았다.

3. 프로 입단 후

프로 입단 후 큰 기대를 모았으나, 선수 생활 내내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결국 1군 공식 경기 마운드를 밟지 못했다. 입단 초부터 어깨와 팔꿈치 부상이 이어졌고, 2007년에는 토미 존 수술[6][7], 2013년에는 팔꿈치 유리 연골 제거를 위한 관절 클리닝 수술[9]을 받는 등 심각한 부상을 여러 차례 겪었다. 재활과 복귀를 반복했지만, 부상은 계속 재발했고 고질적인 제구 불안도 해결하지 못했다. 2012년 잠시 1군에 등록되기도 했으나 등판 기회는 없었다. 결국 2013년 시즌 종료 후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고[10] 은퇴했다[9][11][12]. 1군 등록 기간은 총 7일에 불과했으며, 부상 악순환과 회복 시기 때문에 '가을의 남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14]. 입단 초반에는 연습 및 생활 태도에 대한 지적도 있었으나, 이후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15].

3. 1. 2006년 ~ 2013년: 부상과의 싸움

2006년에는 스프링 캠프에서 1군 캠프 합류 여부가 주목받았으나, 어깨 통증으로 인해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6월에는 왼쪽 어깨 염증으로 프레시 올스타 게임 출전을 포기해야 했다. 시즌 내내 2군에서 머물며 제구력 향상과 컨디션 조절에 집중했고, 결국 1군 공식전 등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스턴 리그에서는 13경기에 등판하여 3승 4패, 평균자책점 6.04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에는 하와이 윈터 리그(10월 1일 ~ 11월 21일)에 파견되어 '호놀룰루 샤크스' 소속으로 뛰었다. 이곳에서 테이크 백이나 체중 이동이 적은, 이른바 '외국인 폼'을 익히고자 노력했으며, 투구 폭을 넓히기 위해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연마했다. 선발 투수로 8경기에 등판하여 30이닝 동안 1승 2패, 35탈삼진, 평균자책점 2.30의 성적을 남겼다.

2007년,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는 츠지우치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2월 9일 왼쪽 팔꿈치 통증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6]. 정밀 검사 결과 내측 측부 인대 파열 진단을 받아 토미 존 수술을 받게 되었다[7]. 4월 26일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재활에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2군 경기를 포함하여 공식전에는 등판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2008년에는 팜의 연합팀인 퓨처스 경기를 통해 실전에 복귀했고, 최고 구속 150km/h를 기록하며 부활의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2군 공식전 등판은 없었고, 시즌 종료 후 등번호가 '''15'''번에서 '''39'''번으로 변경되었다.

2009년에는 2군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하며 기사누키 히로시에 이어 팀 내 2위인 7승을 기록했고, 규정 투구 이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평균자책점 2.69로 좋은 성적을 거두며 팀의 이스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2006년에 포기했던 프레시 올스타 게임에도 다시 선출되었다. 그러나 49개의 사사구와 7개의 폭투는 팀 내 최다를 기록하며 여전히 제구력에 문제를 드러냈다.

2010년부터는 다시 출전 기회가 줄어들어, 2군에서 단 3경기 등판에 그쳤다. 시즌 종료 후 등번호는 '''39'''번에서 '''98'''번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2011년에는 2군 공식전 등판 기록 없이 시즌을 마쳤다. 시즌 종료 후에는 아사이 히데키 등과 함께 뉴욕 양키스 산하 루키 리그 팀인 카롤리나 자이언츠(Gigantes de Carolina)에 파견되어 푸에르토리코에서 약 50일을 보냈다. 현지 투수 코치는 "단기간에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올바른 투구법을 익히기를 바란다"는 조언을 남겼다[8].

2012년 3월 17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시범 경기에서 프로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1군 마운드에 올랐다. 2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최고 구속 147km/h를 기록했고, 1이닝 동안 2피안타 1실점(실책 관련)을 기록했다. 시즌 중에는 2군에서 구원 투수로 43경기에 등판했으며, 8월 16일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1군에 승격되었다. 하지만 등판 기회를 얻지 못한 채 8월 22일 다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어, 결국 1군 공식전 데뷔는 이루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에는 4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다.

2013년 스프링 캠프는 1군에서 시작했지만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아 2군으로 내려갔다. 불펜 투구 다음 날 왼쪽 팔꿈치에 심한 통증을 느껴 팔을 들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통증의 원인이었던 유리 연골을 내시경으로 제거하는 관절 클리닝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다[9]. 3월 11일 군마현 다테바야시시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재활 후 8월 31일 데이쿄 대학과의 프로-아마 교류전에서 복귀 등판하여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구속은 최고 131km/h에 그쳤다[13]. 이 경기가 시즌 유일한 등판이었고, 이스턴 리그 등판은 없었다. 결국 10월 1일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10]. 츠지우치는 데이쿄 대학과의 경기 약 1주일 전 팔꿈치 통증이 재발했을 때 이미 은퇴를 결심했으며[13], 결국 1군 공식전 등판 기록 없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9][11][12].

현역 시절 1군에 등록된 기간은 총 7일에 불과했으며, 1군 공식전 등판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부상으로 연습을 쉬면 2군 경기 등판 기회조차 얻지 못할까 봐 무리하게 연습을 강행했고, 이는 다시 부상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특히 가을에는 구속이 150km/h까지 회복되었다가 윈터 리그 파견, 자율 훈련을 거쳐 스프링 캠프가 되면 다시 부상이 악화되는 패턴 때문에 "가을의 남자"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14]. 입단 3년차 무렵에는 프로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연습 및 생활 태도가 해이해졌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당시 기숙사장의 엄한 질책 이후 태도를 바로잡았다고 한다[15].

3. 2. 플레이 스타일

고교 시절 최고 구속 156km/h를 기록한 강속구 투수였으나, 프로 입단 후에는 고질적인 제구력 난조와 끊이지 않는 팔꿈치, 어깨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6년 하와이 윈터 리그 파견 당시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시험하고, 테이크 백과 체중 이동이 적은 새로운 투구폼을 익히려 시도하기도 했다.

잦은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는 경우도 잦았다. 2007년에는 왼쪽 팔꿈치 내측 측부 인대 파열로 토미 존 수술을 받았고[7], 2013년에는 팔꿈치 유리 연골 제거를 위한 관절 클리닝 수술을 받았다[9]. 이러한 부상과 수술의 여파로 구속이 크게 떨어져, 2013년 8월 복귀 등판 시에는 직구 최고 구속이 120km/h대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2군에서는 통산 75경기에 등판해 12승 10패, 평균자책점 3.76을 기록했지만, 제구 불안은 선수 생활 내내 해결되지 않았다. 2009년에는 2군에서 7승을 거두며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으나, 49개의 사사구와 7개의 폭투(팀 내 최다)를 기록하는 등 제구력 문제는 여전했다. 결국 1군 공식 경기 등판 없이 은퇴했다[9][11][12].

4. 은퇴 후

은퇴를 결정한 직후에는 부동산 회사 영업직으로 전직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16] 2013년 12월 30일 TBS 계열에서 방송된 『프로 야구 전력 외 통고·해고를 선고받은 남자들』(TBS 제작)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전력 외 통보를 받은 직후부터 부동산 업계로의 이직 활동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 밀착 취재 영상 등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후 일본 여자 프로 야구 기구(JWBL) 관계자의 제안을 받아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여자 프로 야구 지도자 퇴단 후에는 아키타현 아키타시로 이주하여 ALSOK 아키타에 입사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17][21][22]

4. 1. 여자 프로 야구 지도자

일본 여자 프로 야구 기구(JWBL) 관계자는 오랜 기간 부상 재활에 헌신적으로 임해 온 쓰지우치의 자세 등을 높이 평가했다.[17] 쓰지우치는 JWBL로부터 지도자 제안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2014년부터 JWBL 소속 이스트 아스트라이아의 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동시에 여자 프로 야구를 지원하는 와카사 생활의 정사원으로도 채용되었다.[17] 2014년 6월에는 TBS 계열 프로그램에서 코치로서의 업무 모습과 일상생활이 소개되기도 했다.

한때 충수염이 복막 파열로 악화되어 생사를 오갈 뻔한 경험도 했는데, 입원 중에 여자 프로 야구 지도자 제의를 받고 흥미를 느껴 아스트라이아 코치직을 수락하게 되었다고 한다.[18]

2016년에는 미야기현을 연고지로 하는 레이아에서 코치를 맡았으며, 2017년에는 사이타마 아스트라이아의 수석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12월 11일, 다음 시즌부터 사이타마 아스트라이아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19], 2018년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팀을 떠났다.[20] 여자 프로 야구 지도자 시절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드래프트 1순위 출신이라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현역 시절을 아는 이들의 낯선 시선을 받으면서도 선술집 등에서 직접 티켓 영업을 하기도 했다.[18]

4. 2. 경비 회사 직원

여자 프로 야구 지도자에서 퇴단한 후에는 아키타현 아키타시로 거주지를 옮겼다.[21] 2019년부터 ALSOK 아키타에 입사하여, 2023년 현재는 경송대로서 현금 수송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22] 아내와 두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하고 싶다는 생각과 아내의 친가가 있는 아키타시로 이주한 사정이 있었다. 일은 시내의 헬로워크에서 찾았는데, 응모 당시 이력서의 '경력'란에 적힌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이력 때문에 회사 측이 놀라기도 했지만, 곧 회사에 적응했다.[18] ALSOK 아키타에서는 야구부를 결성하여 코치로 취임했지만, 현역 시절의 부상 후유증으로 인해 송구가 어려워 선수로 뛰지는 못한다고 한다.[18]

5. 에피소드


  • 취미는 독서이다. 아키타현으로 이주한 후에는 바다낚시가 새로운 취미가 되었다.[22]
  • 리틀 야구 시절, 다리나 손을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런닝이나 투구 연습을 계속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 본인은 지역의 현립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지만, 소속되어 있던 '코리야마 시니어' 야구팀 감독과 부모님의 설득으로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 진학을 결심했다.[23]
  • 고교 시절 투구 폼이 무너졌을 때, 야구부 감독으로부터 구도 기미야스의 투구 폼 연속 사진을 받아 참고하여 연습했고, 이를 통해 폼 수정에 성공했다. 이 경험으로 쓰지우치는 구도 기미야스를 존경하게 되었다.
  • 고교 시절 학교를 방문했던 OB 출신 이와타 미노루(당시 간사이 대학)로부터 지도를 받은 경험이 있다.
  • 1군 등판 없이 현역 생활을 마감한 것에 대해, 은퇴 후 인터뷰에서 "부상으로 거의 야구를 하지 못했는데, 8년이나 돈을 받으면서 정말 자기 혐오에 빠졌었다"고 심경을 밝혔다. 현역 시절에는 하룻밤 술값으로 최고 40만을 쓴 적도 있지만, 은퇴 후에는 교통비를 포함해 한 달 용돈이 3만 정도라고 한다.[24]

6. 상세 정보

일본의 전 프로 야구 투수이자, 은퇴 후 일본 여자 프로 야구 기구(JWBL)의 지도자이다.[1][17] 나라현 출신으로,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 시절 에이스로 활약하며 제87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최고 구속 156km를 기록하는 등 큰 주목을 받았다.[4] 2005년 고교생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순위로 지명되었으나,[5] 프로 선수 시절 내내 어깨와 팔꿈치 부상에 시달리며 단 한 번도 1군 공식 경기에 등판하지 못하고 2013년 은퇴했다.[9][11][12] 은퇴 후에는 일본 여자 프로 야구 기구 소속 팀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다.[17][19][20]

6. 1. 출신 학교

나라현 출신이다.[1] 초등학교 1학년 때 1루수로 야구를 시작했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고리야마 시니어'에 소속되어 투수로 전향했다.[3]

오사카 도인 고등학교에서는 2학년 가을부터 에이스로 활약했다.[4] 3학년 때 출전한 여름 고시엔에서는 주목받는 선수로 떠올랐다. 1회전 카스가베 쿄에이와의 경기에서는 5회 6실점으로 부진하여 강판되었으나, 최고 구속 156km/h를 기록하며 빠른 공으로 일본 전역의 주목을 받았다(당시 오릭스 버팔로즈 스카우트의 스피드건 측정 기록이며, 고시엔 전광판에는 152km/h로 표시되었다).[4] 2회전 후지시로와의 경기에서는 당시 대회 타이 기록인 19개의 탈삼진을 잡아냈다.[5]

오사카 도인 고등학교는 쓰지우치의 활약에 힘입어 1991년 여름 고시엔 이후 처음으로 4강에 진출했다. 쓰지우치는 이 대회에서 총 65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는 반도 에이지의 83개에 이어 당시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5] 준결승에서는 코마대 토마코마이의 다나카 마사히로를 상대로 홈런을 치기도 했다.[5]

같은 해 AAA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일본 대표로 선발되어, 마츠자카 다이스케 등이 활약했던 1998년 대회 이후 일본의 우승에 기여했다.

2005년 고교생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오릭스 버팔로즈의 지명 경쟁 끝에 추첨을 통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순위로 지명되었다. 입단 당시 등번호는 15번을 받았다. 당시 추첨에서 떨어진 오릭스는 T-오카다를 1순위로 지명했다.

6. 2. 선수 경력

나라현 출신[1]으로, 초등학교 1학년 때 1루수로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고리야마 시니어"에 소속되어 투수로 전향했다[3]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에서는 2학년 가을부터 에이스가 되었고[4], 3학년 때 출전한 여름 고시엔 1회전 카스가베 쿄에이전에서는 5회 6실점으로 부진하여 강판되었지만, 최고 구속 156km를 기록했다(백 네트 뒤의 오릭스 버팔로즈 스카우트의 스피드 건으로 측정, 고시엔 전광판에는 152km로 표시). 이 기록으로 일본 전역의 주목을 받았다.

2회전 후지시로전에서는 당시 대회 타이 기록인 19탈삼진을 기록했다. 오사카 토인 고교는 1991년 여름 고시엔 이후 14년 만에 4강에 진출했고, 쓰지우치 본인도 한 대회 통산 탈삼진 65개를 기록하며 반도 에이지(83개)에 이어 당시 역대 2위에 올랐다[5]。 준결승에서는 코마대 토마코마이의 다나카 마사히로로부터 홈런을 치기도 했다.

같은 해 AAA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마쓰자카 다이스케 등을 보유했던 1998년 대회 이후 7년 만의 우승에 기여했다.

2005년 고교생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오릭스 버팔로즈의 경합 끝에 요미우리가 지명권을 획득하여 1순위로 입단했다. 추첨에서 떨어진 오릭스는 T-오카다를 1순위로 지명했다. 입단 당시 등번호는 '''15'''번이었다.

  • 드래프트 지명 해프닝

2005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쓰지우치는 많은 구단의 관심을 받았으며, 본인도 "12개 구단 OK" 의사를 밝혀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여러 구단이 위험 부담을 피해 지명을 포기하면서 최종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오릭스 버팔로즈 두 구단만 1순위 지명에 참여했다. 추첨 결과 요미우리가 교섭권을 획득했지만, 오릭스의 나카무라 가쓰히로 GM이 꽝 제비에 찍힌 NPB 로고를 보고 당첨으로 착각하여 승리 포즈를 취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요미우리의 호리우치 쓰네오 감독도 나카무라의 행동에 의아해하면서도 항의하지 않았고, 주최 측의 확인 소홀까지 겹쳐 한때 오릭스의 지명 확정으로 잘못 발표되었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쓰지우치는 굳은 표정으로 오릭스 지명을 수락하는 듯한 발언을 했으나, 직후 요미우리가 실제 교섭권을 가진 것으로 정정되었다. 다시 열린 기자회견에서 쓰지우치는 웃으며 "'''어릴 적부터 요미우리가 좋았어요…'''"라고 말해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특정 구단 선호를 밝히지 않았기에, 부모조차 이때 처음 그가 요미우리 팬임을 알았다고 한다. 쓰지우치는 후에 "간사이 지방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이유를 밝혔다[25]。 요미우리는 마쓰이 히데키 이후 처음으로 고졸 선수에게 계약금 1억(추정)을 지급하며 계약했고, 12월 9일 입단 발표를 했다.

  • 프로 시절

2006년: 스프링 캠프는 어깨 통증으로 2군에서 시작했으며, 6월에는 왼쪽 어깨 염증으로 프레쉬 올스타 게임 출전을 포기했다. 이스턴 리그 성적은 13경기 등판, 3승 4패, 평균자책점 6.04였다. 시즌 후 하와이 윈터 리그에 파견되어 "호놀룰루 샤크스" 소속으로 뛰며 투구폼 수정과 슬라이더, 체인지업 습득에 힘썼다. 리그 성적은 선발 투수로 8경기 30이닝, 1승 2패, 35탈삼진, 평균자책점 2.30을 기록했다.

2007년: 하라 타츠노리 감독 등 코칭 스태프의 기대를 받았으나, 2월 9일 왼쪽 팔꿈치 통증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6]。 정밀 검사 결과 내측 측부 인대 파열 진단을 받고 토미 존 수술을 받게 되었다[7]。 4월 26일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재활에 오랜 시간이 걸려 2군 포함 공식전 등판 없이 시즌을 마쳤다.

2008년: 연합팀인 퓨처스에서 실전에 복귀하여 최고 구속 150km를 기록하는 등 회복세를 보였으나, 2군 공식전 등판은 없었다. 시즌 후 등번호를 '''39'''번으로 변경했다.

2009년: 2군에서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아 7승을 거두었고, 규정 투구 이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평균자책점 2.69로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프레쉬 올스타 게임에도 선출되었다. 그러나 사사구 49개와 폭투 7개는 모두 팀 내 최다로, 제구 불안은 여전했다.

2010년: 다시 출전 기회가 줄어들어 2군에서 3경기 등판에 그쳤고, 시즌 후 등번호가 '''98'''번으로 변경되었다.

2011년: 2군 공식전 등판 없이 시즌을 마쳤다. 시즌 후 아사이 히데키 등과 함께 양키스 산하 루키 리그 팀인 히간테스 데 카롤리나에 파견되어 푸에르토리코에서 약 50일간 훈련했다. 현지 코치로부터 투구법 개선에 대한 조언을 받았다[8]

2012년: 3월 17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오픈전에서 1군 경기에 처음 등판하여 최고 구속 147km를 기록했다. 2피안타 1실점(비자책)을 기록했다. 구원 투수로서 2군에서 43경기에 등판했으며, 8월 16일 처음으로 1군에 승격되었지만 등판 기회 없이 8월 22일 등록 말소되었다. 시즌 후 4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다.

2013년: 스프링 캠프는 1군에서 시작했으나 어깨 상태가 좋지 않아 2군으로 합류했다. 불펜 투구 후 왼쪽 팔꿈치에 심한 통증을 느껴 박리성 골연골염 진단을 받고 내시경을 이용한 관절 클리닝 수술을 받기로 결정[9], 3월 11일 수술을 받았다. 8월 31일 데이쿄 대학과의 프로 아마 교류전에서 복귀 등판했지만, 시즌 중 유일한 등판이었다. 결국 10월 1일 전력 외 통보를 받고[10], 1군 공식전 등판 없이 현역에서 은퇴했다[9][11][12]。 데이쿄 대학과의 경기 약 1주일 전 팔꿈치 통증이 재발했을 때 이미 은퇴를 각오했으며, 당시 직구 최고 구속은 131km에 그쳤다고 한다[13]

현역 시절 1군 등록 일수는 총 7일에 불과했고, 1군 공식전 등판은 한 번도 없었다. 잦은 부상으로 인해 연습을 쉬면 등판 기회를 얻지 못할까 봐 무리하게 훈련하다 부상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겪었다. 가을에 구속이 150km까지 회복되었다가 겨울 훈련과 스프링 캠프를 거치며 다시 부상이 악화되는 패턴 때문에 "가을의 남자"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14]。 입단 3년차 무렵에는 연습 및 생활 태도가 해이해졌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당시 기숙사장의 엄한 질책 이후 태도가 진지해졌다고 전해진다[15]

고교 시절 156km의 강속구를 던졌지만, 프로 입단 후에는 제구력 난조와 반복되는 팔꿈치, 어깨 부상에 시달렸다。 2013년 마지막 등판에서는 직구 구속이 120km/h대까지 떨어졌다。 2군 통산 성적은 75경기 등판, 177이닝, 12승 10패, 평균자책점 3.76이었으나, 프로 8년 동안 실질적인 활동 기간은 4년에 불과했다.

6. 3. 지도자 경력

은퇴 직후에는 부동산 회사 영업직으로 전직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16] 2013년 12월 30일 TBS 계열에서 방송된 『프로 야구 전력 외 통고·해고를 선고받은 남자들』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전력 외 통보를 받은 직후부터 부동산 업계로의 이직 활동 과정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일본 여자 프로 야구 기구(JWBL) 관계자는 오랜 기간 부상 재활에 헌신적으로 임해 온 츠지우치의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한편, 츠지우치는 현역 시절 인맥들의 식사 초대에 응하다가 충수염이 복막 파열로 악화되어 입원했는데, 이 입원 기간 동안 여자 프로 야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18] JWBL로부터 지도자 제안을 받은 것을 계기로, 2014년부터 JWBL 소속 이스트 아스트라이아의 코치로 취임함과 동시에 여자 프로 야구를 지원하는 와카사 생활의 정사원이 되었다.[17] 2014년 6월에는 TBS 계열 「나의 무엇이 별로야?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은퇴 후의 인생」에서 코치로서의 업무 모습과 일상생활이 소개되기도 했다.

여자 프로 야구 지도자로 활동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 드래프트 1위 입단자라는 프라이드를 버리고, 선술집에 들어가 티켓 영업을 하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18]

연도소속팀직책
2014년이스트 아스트라이아코치
2016년레이아코치
2017년사이타마 아스트라이아수석 코치
2018년사이타마 아스트라이아감독



2017년 12월 11일, 다음 시즌부터 사이타마 아스트라이아의 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으나[19], 2018년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팀을 떠났다.[20]

6. 4. 등번호


  • '''15''' (2006년 ~ 2008년)
  • '''39''' (2009년 ~ 2010년)
  • '''98''' (2011년 ~ 2013년)
  • '''51''' (2014년 ~ 2016년)
  • '''50''' (2017년 ~ 2018년)

참조

[1] 서적 プロ野球カラー名鑑 2008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 웹사이트 2年間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51 辻内崇伸(コーチ) https://ameblo.jp/ea[...] 埼玉アストライア公式ブログ 2015-12-28
[3] 웹사이트 辻内崇伸、ドラフト1位の肖像――「大阪桐蔭に入学した時、僕は平民以下の存在だった」|第1回 https://www.baseball[...] 2020-04-06
[4] 웹사이트 辻内崇伸、ドラフト1位の肖像――1試合19奪三振を記録した05年夏「ホンマにあれ、奇跡なんですよ」|第2回 https://www.baseball[...] 2020-04-07
[5] 문서
[6] 웹사이트 辻内崇伸、ドラフト1位の肖像――「ドラ1の宿命、自分の扱いは『異常だ』」|第4回 https://www.baseball[...] 2020-04-09
[7] 웹사이트 辻内崇伸、ドラフト1位の肖像――「戦力外通告にほっとした。野球人生に悔いなし」|第5回 https://www.baseball[...] 2020-04-10
[8] 웹사이트 GIANTSニュース http://spe.yomiuri.c[...] モバイルGIANTS
[9] 뉴스 怪物156キロ左腕・辻内、引退 けがに泣いた8年間、1軍登板ないまま http://hochi.yomiuri[...] 2013-10-02
[10] 웹사이트 辻内投手ら5選手を戦力外通告 http://www.giants.jp[...] 読売巨人軍公式サイト 2013-10-01
[11] 뉴스 巨人辻内引退 05年甲子園の剛速球スター https://www.nikkansp[...] 2013-10-02
[12] 뉴스 “剛腕”辻内、引退へ…1軍マウンド1度も立てず https://www.sponichi[...] 2013-10-02
[13] 간행물 元巨人ドラフト1位・辻内崇伸「8年間の悔恨」を語る http://sportiva.shue[...] Sportiva 2013-11-24
[14] 웹사이트 8年間で一軍登板ゼロ、怪我に泣いた巨人ドラフト1位が戦力外通告を受けた日「ホッとしました」「最後のマウンドは投げられる状態じゃなかった」(2/3ページ) https://number.bunsh[...] 2024-05-13
[15] 웹사이트 巨人軍・元寮長が明かす「本気で殴った唯一の選手」 https://www.asagei.c[...] 2012-12-12
[16] 웹사이트 【セカンドチャレンジ(1)】巨人・辻内元投手、営業で家族支える! https://www.sanspo.c[...] 2013-12-10
[17] 뉴스 巨人引退辻内氏 女子プロ野球コーチ就任 https://www.nikkansp[...] 2014-01-12
[18] 웹사이트 「巨人ドラ1」がハローワークで職探し→履歴書の「巨人軍」に社内騒然…「辻内です!買ってください」飛び込み営業も、辻内崇伸の「第二の人生」(佐藤春佳) https://number.bunsh[...]
[19] 웹사이트 2018シーズン新指導者体制発表のお知らせ https://www.jwbl.jp/[...] 2017-12-11
[20] 웹사이트 辻内崇伸監督 退任及び退団のお知らせ https://www.jwbl.jp/[...] 2018-12-13
[21] 웹사이트 31歳、ゼロからやり直す「巨人ドラ1」の進む道 https://toyokeizai.n[...] 2018-12-28
[22] 웹사이트 ALSOK秋田株式会社 {{!}} 辻内崇伸 https://akita.alsok.[...]
[23] 웹사이트 読売ジャイアンツ 辻内崇伸 選手 https://www.hb-nippo[...] 高校野球情報ドットコム 2009-06-30
[24] 웹사이트 元巨人・辻内崇伸氏の今 小遣いは交通費込みで1カ月3万円程度 https://news.livedoo[...] ライブドアニュース 2016-05-21
[25] 웹사이트 辻内崇伸、ドラフト1位の肖像――「ジャイアンツに行きたいというよりも、関西から出たかった」|第3回 https://www.baseball[...] 202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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