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아 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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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멜리아 벤세는 191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아르헨티나의 배우이다. 1933년 영화에 데뷔하여 80년이 넘는 경력 동안 다양한 영화, 연극, 텔레비전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 《라 게라 가우차》(1942)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1950년 배우 알베르토 클로사스와 결혼했다. 2016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2011년 자서전 《임계점의 소녀: 아멜리아 벤세: 회고록》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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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아 벤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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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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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리아 아멜리아 바트비니크 |
출생일 | 1914년 11월 13일 |
출생지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사망일 | 2016년 2월 8일 |
사망지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국적 | 아르헨티나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33년 - 2010년 |
경력 | |
데뷔 | 1933년 영화 데뷔 |
마지막 작품 | 2010년 연극 출연 |
기타 | |
별칭 | 아르헨티나 영화의 여왕 |
2. 생애
마리아 아멜리아 바트비니크는 1914년 11월 13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벨라루스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민스크 출신의 하이메 바트비니크, 어머니는 핀스크 출신의 아나 자게르였으며, 7남매 중 막내였다.
어릴 때부터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보였던 벤세는 이웃 아이들과 함께 집 뜰에서 공연을 하곤 했다. 이웃이었던 파울리나 싱어만은 벤세의 어머니에게 테아트로 콜론 산하 라바르덴 어린이 극단에 등록할 것을 권유했다. 벤세는 5세 때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의 작품 "후아니타"에서 파울리나 싱어만과 베르타 싱어만 자매의 도움으로 정식 데뷔했다.[3]
벤세는 에스쿠엘라 헤네랄 로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폰토바 음악원에서 언니 에스테르와 함께 피아노를 배웠다. 10세 때부터는 Gath & Chaves에서 엘리베이터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벤 몰라르의 형제 페드로 알레안드로가 이끄는 연기 그룹에서 활동하며 훌리오 산체스 가르델의 연극 ''라스 캄파나스''에 출연했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벤세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연기 공부를 계속했다. 국립 공연 예술원에 자리가 없자 메차 킨타나에게서 국립 음악 및 스피치 음악원에서 클래식 무용을 배웠다. 킨타나는 벤세에게 아르만도와 엔리케 디세폴로 형제가 출연하는 뮤지컬 코미디 오페라 극장 "분더 바"(1933)의 발레 배역을 주선해 주었다.[4]
루이스 호세 모글리아 바르트 감독의 댄싱(1933)에 페드로 콰르투치와 함께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콰르투치는 벤세에게 "아멜리아 벤세"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5] 그러나 이 영화는 실패했고, 제작 음질도 좋지 않아 관객들의 평가도 좋지 않았다.
이후 벤세는 극장으로 돌아가 엔리케 수시니의 지도 아래 오데온 극장에서 그의 극단에서 일하며 뮤지컬 코미디와 보드빌 쇼에 출연했다. "Baile en el Savoy"에서 벤세는 병에 걸린 스타 아만다 바렐라를 대신해 플로렌시오 파라비치니와 함께 무대에 섰다.[5]
투쿠만 주에서 엘 마테로(1939)를 촬영한 후, 아구스틴 이루스타 배역과 사랑에 빠지는 "폰테주엘라"를 연기한 벤세는 연기에 대한 칭찬을 받았다.[7][8] 산 미겔 스튜디오와 3년 독점 계약을 맺은 벤세는 노비오스 파라 라스 무차차스(1941)에서 티토 루시아르도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다. 같은 해 카를로스 F. 보르코스케의 라 카사 데 로스 쿠에르보스에 출연하여 프레미오스 수르에서 아르헨티나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9]
1942년 초, 벤세는 루이스 세사르 아마도리가 감독하고 페드로 로페즈 라가르, 실비아 레그란이 공동 출연한 엘 테르세르 베소를 촬영했다.[10] 이 영화는 성공을 거두었고 아르헨티나 영화 비평가 협회에서 실버 콘도르 어워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라 게라 가우차''는 세바스티안 치올라, 앙헬 마가냐, 엔리케 무이뇨, 프란시스코 페트로네가 출연했으며, 19세기 말 아르헨티나 북부를 배경으로 살타 주에서 현지 촬영되었다. 레오폴도 루고네스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7개의 상을 수상했고 벤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시로부터 올해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파라마운트 픽처스로부터 미국으로 와서 할리우드에서 일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라 구에라 가우차''의 성공 이후 벤세는 주연 역할만 맡았다. 1943년, 스페인 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드라마 ''Son cartas de amor''에 출연하여 쿠바 영화 및 연극 편집자 연맹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의 군인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프로그램에 이 메달을 기증했다.[1]
1946년, 벤세는 메차 오르티스와 함께 ''Camino del infierno''에 출연했다. 이후, 카를로스 슐리퍼가 감독한 ''Las tres ratas''(1946)에 출연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6] 1944년 여름, 영화 ''마리아 로사''를 촬영하면서 칠레에서 배우 알베르토 클로사스를 만났고, 그가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7]
1947년, 벤세는 다니엘 티나예르의 살인 드라마 ''A sangre fría''에서 악한 조카에게 학대받는 부유하지만 연약한 숙녀 역할을 맡아 상을 수상했다.[14]
1950년 클로사스와 결혼한 후, 그들은 극단을 결성하여 연극 공연에 더 자주 전념했다. 벤세는 비정치적이었지만, 페론 정권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진술했다.[18]
멕시코의 레포르마 영화사(Reforma Films)와 계약을 맺은 벤세는 ''시에테 무헤레스(Siete Mujeres)'' (1953)로 멕시코 영화에 첫 발을 들였다.[1] 10개월 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클로사스와의 결혼 생활을 정리했다.[1]
1957년, 알폰시나 스토르니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 ''알폰시나(Alfonsina)'' (1957)를 촬영했다. 아르헨티나 영화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1957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아르헨티나 대표작으로 선정되었다.
1959년 마드리드의 콜로세움에서 초연된 범죄 드라마 ''데 에스팔다스 아 라 푸에르타(De espaldas a la puerta)''에 출연하여 최우수 외국 여배우를 위한 키호테 상을 수상했다.[1]
1962년, 인도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여 자바할랄 네루 총리를 만났다.[1] 이후, 영화 ''La cigarra no es un bicho''에 참여하여 매춘부 역을 맡았다.[1]
1964년, 영화 ''La industria del matrimonio''에서 부유한 노처녀 역할을 연기했다.[1] 1968년, 라 플라타와 마르델플라타에서 데뷔했고,[1] 같은 해 말, 남미 여러 도시를 순회했다.[1]
1972년, 뉴욕에서 연극 "La valija"를 공연하여 호평을 받았다.[1] 코네티컷 대학교 등 여러 곳에서 순회 공연을 펼쳤다.[1]
1973년, 첫 컬러 영화 ''Adiós, Alejandra''를 제작했다.[1] 1975년 미국으로 돌아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Doña Rosita, la soltera"를 개봉했고, 캐서린 헵번을 만났다.[1]
1982년 페루에서 공연한 "La loba"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연극 성공작 중 하나였다.[1] 1985년, 페루 텔레노벨라 ''La casa de enfrente''에 출연하여 인기를 높였다.[1]
1989년 라틴 아메리카 신영화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쿠바를 방문하여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1]
벤세의 경력은 1986년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일 제안을 받지 못했다. 1987년 작품 "솔로 80"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연극은 관객을 끌지 못해 막을 내렸다. 1990년, "사랑의 편지"에서 클로사스와 재회하여 함께 연기했다.
1998년, 벤세와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골든 앙헬 "촐로" 페코 상을 받았다.[15]
2003년, 구스타보 몬헤와 함께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작품으로 어린이 연극에 도전했다.[17] 2004년에는 텔레비전에 복귀하여 코미디 시리즈 "두 사람이 없으면 셋도 없다"에 출연했다.[18]
최근 몇 년 동안 벤세는 그녀의 오랜 경력을 인정받아 많은 상을 받았다. 2011년 6월, 아르헨티나 문화의 뛰어난 인물로 선언되었다.[25]
2. 1. 초기 생애
마리아 아멜리아 바트비니크는 1914년 11월 13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벨라루스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민스크 출신의 하이메 바트비니크, 어머니는 핀스크 출신의 아나 자게르였으며, 7남매 중 막내였다.어릴 때부터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보였던 벤세는 이웃 아이들과 함께 집 뜰에서 공연을 하곤 했다. 이웃이었던 파울리나 싱어만은 벤세의 어머니에게 테아트로 콜론 산하 라바르덴 어린이 극단에 등록할 것을 권유했다. 벤세는 5세 때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의 작품 "후아니타"에서 파울리나 싱어만과 베르타 싱어만 자매의 도움으로 정식 데뷔했다. 공연 중 벤세가 우표를 삼키는 실수를 했지만, 스토르니는 벤세의 대처 능력을 칭찬했다고 한다.[3]
벤세는 에스쿠엘라 헤네랄 로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폰토바 음악원에서 언니 에스테르와 함께 피아노를 배웠다. 10세 때부터는 Gath & Chaves에서 엘리베이터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벤 몰라르의 형제 페드로 알레안드로가 이끄는 연기 그룹에서 활동하며 훌리오 산체스 가르델의 연극 ''라스 캄파나스''에 출연했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벤세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연기 공부를 계속했다. 국립 공연 예술원에 자리가 없자 메차 킨타나에게서 국립 음악 및 스피치 음악원에서 클래식 무용을 배웠다. 킨타나는 벤세에게 아르만도와 엔리케 디세폴로 형제가 출연하는 뮤지컬 코미디 오페라 극장 "분더 바"(1933)의 발레 배역을 주선해 주었다.[4] 벤세는 공연 중 한 배우가 아파 대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2. 2. 영화 및 연극 데뷔
루이스 호세 모글리아 바르트 감독의 댄싱(1933)에 페드로 콰르투치와 함께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벤세는 영화계에 데뷔했다. 콰르투치는 벤세에게 "아멜리아 벤세"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5] 그러나 이 영화는 실패했고, 제작 음질도 좋지 않아 관객들의 평가도 좋지 않았다. 벤세는 이 영화를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포함시키는 것을 꺼렸다.이후 벤세는 극장으로 돌아가 엔리케 수시니의 지도 아래 오데온 극장에서 그의 극단에서 일하며 "Tu boca, Superficies", "Los malos tiempos", "Baile en el Savoy"와 같은 뮤지컬 코미디와 보드빌 쇼에 출연했다. "Baile en el Savoy"에서 벤세는 병에 걸린 스타 아만다 바렐라를 대신해 플로렌시오 파라비치니와 함께 무대에 섰다.[5] 이 연극은 100회 이상 공연되며 그녀의 첫 성공작 중 하나가 되었고, 오데온 극장 공연이 끝난 후 Cine Monumental로 옮겨져 몇 주 더 재개봉되었다.
코리엔테스 극장에서 파라비치니와 함께 "Ocho en línea"에도 출연했지만, 평론은 신랄했다. ''엘 문도''는 "쇼가 연습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고 보도했지만, 벤세에 대해서는 "신인 ... 우아하고 효율적으로 해내고 있다"며 칭찬했다. 파라비치니의 건강 문제로 짧게 공연된 "Conde de Chantenay"에서 벤세는 언론으로부터 "정숙하고, 유능하며, 유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레온 사라테가 연출한 "De mí no se ríe nadie"에서는 200번 공연했다.
2. 3. 인정과 "가우초 전쟁"
투쿠만 주에서 엘 마테로(1939)를 촬영한 후, 아구스틴 이루스타 배역과 사랑에 빠지는 "폰테주엘라"를 연기한 벤세는 연기에 대한 칭찬을 받았다.[7][8] 곧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가 될 산 미겔 스튜디오를 설립한 미겔 마치난디아레나와 3년 독점 계약을 맺었다. 벤세는 안토니오 맘플레트의 "Las de Caín"을 각색한 코미디 영화 노비오스 파라 라스 무차차스(1941)에서 티토 루시아르도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다. 같은 해 카를로스 F. 보르코스케의 라 카사 데 로스 쿠에르보스에 출연하여 프레미오스 수르에서 아르헨티나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9]1942년 초, 벤세는 루이스 세사르 아마도리가 감독하고 페드로 로페즈 라가르, 실비아 레그란이 공동 출연한 엘 테르세르 베소를 촬영했다.[10] 벤세는 자신보다 불과 13살 어린 레그란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지만, 영화는 성공을 거두었고 아르헨티나 영화 비평가 협회에서 실버 콘도르 어워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인정을 통해 잡지 표지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고, 아르헨티나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영화 중 하나가 된 ''라 게라 가우차''에 출연 제안을 받았다.
''라 게라 가우차''는 세바스티안 치올라, 앙헬 마가냐, 엔리케 무이뇨, 프란시스코 페트로네가 출연했으며, 19세기 말 아르헨티나 북부를 배경으로 한다. 살타 주에서 현지 촬영되었으며, 작가 레오폴도 루고네스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각본가 오메로 만지와 울리세스 프티 드 무라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가우초들의 스페인 통치에 대한 반란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으로 엮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서부극과는 달리 식민화를 진보로 묘사하거나 원주민에게 초점을 맞추는 대신 가우초의 애국심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는 7개의 상을 수상했고 벤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시로부터 올해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파라마운트 픽처스로부터 미국으로 와서 할리우드에서 일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2. 4. 성공적인 영화 배우
''라 구에라 가우차''의 성공 이후 벤세는 주연 역할만 맡았다. 1943년, 스페인 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드라마 ''Son cartas de amor''에 출연하여 쿠바 영화 및 연극 편집자 연맹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의 군인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프로그램에 이 메달을 기증했다.[1] 1943년 후반, ''Los ojos más lindos del mundo''(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에 출연했다. 이 제목은 벤세의 눈의 보랏빛 녹색 색조를 언급한 것이었고, 그 제목은 그녀와 연관되어 1955년과 1964년 칠레를 방문했을 때 언론 헤드라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 이곳에 왔다"라고 보도할 정도였다.[2] 그녀의 다음 영화인 ''Todo un hombre''(1943)은 프랑스인 피에르 슈날이 감독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벤세는 브라질로의 여행을 연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역으로 교체되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3] 1943년 12월호 ''안테나'' 잡지 표지는 훌리오 사라세니의 ''Nuestra Natacha''가 곧 개봉될 것이라고 발표했다.[4] 이 영화는 알레한드로 카소나의 희곡을 바탕으로 했다. 이 영화는 그녀가 "세실리아" 역할을 맡은 ''24 horas de la vida de una mujer''의 개봉 직후인 1944년 9월에 개봉되었고, ''라 나시온''과 ''안테나''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5]
1946년, 벤세는 메차 오르티스와 함께 삼각관계의 멜로드라마이자 심리 스릴러인 ''Camino del infierno''에 출연했다. 그들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비평가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산 미겔 스튜디오는 다음으로 메차 오르티스, 마리아 듀발과 벤세를 카를로스 슐리퍼가 감독한 ''Las tres ratas''(1946)에 함께 출연시켰고, 이 영화는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6] 1944년 여름, 벤세는 영화 ''마리아 로사''를 촬영하면서 칠레에서 배우 알베르토 클로사스를 만났고, 그가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7] ''마리아 로사''와 칠레에서 제작된 또 다른 영화 ''Lauracha''(1946)는 팜파 영화, 루미톤과 산 미겔 스튜디오 간의 분쟁으로 인해 개봉이 연기되었다. 에르네스토 아란시비아 감독과 영화 회사 간의 법적 분쟁은 해결하는 데 거의 2년이 걸렸다.[8] 개봉이 지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비평가 협회는 벤세에게 실버 콘도르 여우주연상을 수여했고,[9] 할 에릭슨은 ''뉴욕 타임스''에서 그녀의 역할을 "매우 독립적인 젊은 여성"이라고 묘사하며 영화를 "조앤 크로포드 스타일 드라마"에 비유했다.[11] 그녀의 다음 영화인 ''El pecado de Julia''에는 알베르토 클로사스가 출연했고,[10] 그녀는 그와 관계를 시작했으며,[7] 호평과 혹평을 받았다.[13]
1947년, 벤세는 다니엘 티나예르의 살인 드라마 ''A sangre fría''에서 악한 조카에게 학대받는 부유하지만 연약한 숙녀 역할을 맡아 작가 협회 여우주연상과 마드리드의 ''Hispanoamericano de Cinematografía''의 첫 번째 상을 수상했다.[14] 똠플레의 ''La otra y yo''(1949)에서 그녀는 엔리케 알바레스 디오스다도, 페르난도 라마스와 함께 출연했으며, 두 개의 다른 캐릭터인 영화 배우 "도라 넬슨"과 의상 디자이너 "마틸데 가르시아"를 연기하기 위해 금발로 염색했다. 두 캐릭터가 같은 프레임에서 서로 대화하는 장면이 있어서 대중을 즐겁게 하고 놀라게 했다. ''라 오피니온''은 그녀의 연기를 칭찬했고 ''엘 호가르'' 잡지는 그녀가 "대본과 감독을 넘어섰다"고 보도했다.[15] 벤세는 다시 디오스다도와 함께 ''Danza del fuego''에 출연했고,[16] 여기서 그녀는 성공적인 콘서트 피아니스트 엘레나 발데스를 연기했는데, 그녀는 결혼식 날 밤, 집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고, 고문을 당했고, 자신이 범죄에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그녀의 연기는 1949년 작가 협회와 아르헨티나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모두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17]
1950년 클로사스와 결혼한 후, 그들은 극단을 결성하여 연극 공연에 더 자주 전념했다. 벤세는 자서전에서 비정치적이었지만, 페론 정권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진술했다.[18]
멕시코의 레포르마 영화사(Reforma Films)와 계약을 맺은 벤세의 첫 번째 멕시코 영화는 ''시에테 무헤레스(Siete Mujeres)'' (1953)였다.[19] 그녀는 촬영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으며, 영화에 가장 좋은 영상을 제공하기 위한 재촬영이나 선택적 편집이 불가능했다고 회상했다. ''시에테 무헤레스''는 ''라스 트레스 엘레나스(Las tres Elenas)'' (1954)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에서는 개봉되지 않았다.[20]
10개월 후, 벤세는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클로사스와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21] 그녀는 1954년 제1회 마르델플라타 국제 영화제에 참석한 후, 마리오 소피치와 그의 제작팀과 함께 스페인 라리오하로 가서 카를로스 코레스와 함께 ''엘 옴브레 케 데비아 우나 무에르테(El hombre que debía una muerte)''를 촬영했다.[22][23]
1957년, 그녀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쿠르트 랜드의 ''알폰시나(Alfonsina)'' (1957)를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였다. 분장 테스트에도 불구하고, 벤세는 자신의 연기력에만 의존하여 어떤 수정 없이 맨얼굴로 이 역할을 재창조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영화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이 영화는 1957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아르헨티나 대표작으로 선정되었다.
외국 언론의 평론은 그녀의 "해석상의 절제"를 칭찬하며 벤세를 오스트리아 여배우 파울라 베셀리에 비유했다.[24]
벤세가 유럽에서 감독 호세 마리아 포르케를 만나면서 그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오기 직전인 1959년 마드리드의 콜로세움에서 초연된 범죄 드라마 ''데 에스팔다스 아 라 푸에르타(De espaldas a la puerta)''에 출연하게 되었다.[25] 그녀는 이 역할로 최우수 외국 여배우를 위한 키호테 상을 수상했다.
2. 5. 중년
멕시코의 레포르마 영화사(Reforma Films)와 계약을 맺은 벤세는 ''시에테 무헤레스(Siete Mujeres)''(1953)로 멕시코 영화에 첫 발을 들였다.[1] 그녀는 이전과는 다른 촬영 방식에, 재촬영이나 선택적 편집이 불가능하여 영화에 최상의 영상을 담아내기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시에테 무헤레스''는 ''라스 트레스 엘레나스(Las tres Elenas)''(1954)와 함께 아르헨티나에서는 개봉되지 않았다.[1]10개월 후, 벤세는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클로사스와의 결혼 생활을 정리했다.[1] 1954년 제1회 마르델플라타 국제 영화제에 참석한 후, 마리오 소피치와 그의 제작팀과 함께 스페인 라리오하로 가서 카를로스 코레스와 ''엘 옴브레 케 데비아 우나 무에르테(El hombre que debía una muerte)''를 촬영했다.[1]
1955년에는 연극 "페사디야"가 초연되어 우루과이, 코르도바, 멘도사,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사리오를 순회하며 2주 동안 매진을 기록했다. 벤세는 이 연극에서 "메리" 역을 맡았고, 그녀의 연기는 ''라 카피탈(La Capital)''에서 호평을 받았다.[1] 세실리오 마다네스의 격려로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연극 "라 다마 델 트레볼"을 열었다.[1] 그러나 초연 직후 후안 도밍고 페론을 전복시킨 레볼루시온 리베르타도라 또는 1955년 쿠데타가 발생했다.[1] 벤세의 새로운 파트너인 호세 마리아 페르난데스 운사인은 에바 페론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페론 정권 하에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12] 페르난데스의 과거는 극장 내 위협과 벤세의 호텔 밖 시위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칠레 작가 협회의 극장에서 "페사디야", "라 다마 델 트레볼", "에란 트레스"... 그리고 "라 노체"가 취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벤세가 루이스 프렌데스와 함께 라디오 미네리아에서 출연하고 있던 시리즈 "미스 프로타고니스타스"도 중단되었다.[1] 1956년, 그녀는 감독 쿠르트 랜드 아래에서 연극 "페사디야"를 바탕으로 한 영화 ''도스 바수라스(Dos basuras)''를 촬영했는데, 이 영화에서 그녀는 매춘부 역을 맡았다.[1] 이 영화는 아르투로 프론디지 정부 시절인 1958년에 개봉되었다.[1]
1957년, 그녀는 아테네오 극장에서 "테스티고 파라 라 오르카"라는 연극을 시작했고[1]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쿠르트 랜드의 ''알폰시나(Alfonsina)''(1957)를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였다. 분장 테스트에도 불구하고, 벤세는 자신의 연기력에만 의존하여 어떤 수정 없이 맨얼굴로 이 역할을 재창조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영화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이 영화는 1957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아르헨티나 대표작으로 선정되었다.
외국 언론의 평론은 그녀의 "해석상의 절제"를 칭찬하며 벤세를 오스트리아 여배우 파울라 베셀리에 비유했다.[1] 같은 해 그녀는 카날 7의 "테아트로 델 사바도"에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연극을 바탕으로 "테스티고 파라 라 오르카"를 재현한 에피소드에 출연하여 텔레비전에 처음 출연했다.[1] 1957년, 벤세는 카페 샹탕의 선구자 중 한 명이 되었는데, 이는 산타페 갤러리의 지하를 극장으로 개조한 후였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연극 "아셈블레아 데 무헤레스"의 공연은 다양한 논란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1]
벤세가 유럽에서 감독 호세 마리아 포르케를 만나면서 그녀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오기 직전인 1959년 마드리드의 콜로세움에서 초연된 범죄 드라마 ''데 에스팔다스 아 라 푸에르타(De espaldas a la puerta)''에 출연하게 되었다.[1] 그녀는 이 역할로 최우수 외국 여배우를 위한 키호테 상을 수상했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벤세는 세실리오 마다네스의 권유로 루이스 아라타와 에바 프랑코의 극단과 함께 "아시 에스 라 비다"에 출연하게 되었다. 라 프렌사 신문은 그녀에게 좋은 평을 내렸고, 이는 마리아노 페를라의 요청으로 인해 카날 7에서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1] 마다네스를 위한 그녀의 공연과 동시에, 그녀는 오데온 극장에서 "마리벨 이 라 에스트라냐 파밀리아"라는 연극을 시작했고, 그 성공으로 인해 마르델플라타와 같은 다른 도시에서도 공연을 하게 되었다. 흥행 수입은 3개월 만에 200만아르헨티나 페소, 4개월 만에 40만아르헨티나 페소를 기록했다.[1]
1962년, 벤세는 세사르 티엠포, 막시모 베론도, 엔리케 세라노를 포함한 수행원들과 함께 인도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여 외국 예술가들을 위한 공식 리셉션에서 자바할랄 네루 총리를 만났다.[1]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그녀는 우루과이 텔레비전 제작의 ''Maribel y la extraña familia''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Canal 9에서 제작된 ''Nuestra Natacha''에 출연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1] 다니엘 티나이레의 연출 아래, 그녀는 국가 영화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제작된 저예산 영화 ''La cigarra no es un bicho''에 참여했다. 이 영화에는 호메로 카르페나, 바르바라 무히카, 루이스 산드리니 등이 출연했다.[1] 첫 주에 관람객 수가 하루 3,000명을 넘어섰고, 이 영화는 Cine Opera에서 7주, Trocadero Theater에서 11주 동안 상영되었다.[1] 이 영화에서 벤세는 매춘부 역을 맡았고, ''La Nación''은 그녀와 루이스 산드리니의 연기가 빛났다고 보도했다.[1] 얼마 후, 두 사람은 칠레 언론인들로부터 올해 최고의 아르헨티나 예술가로 선정되었다.[1]
1963년 10월부터 12월까지, 그녀는 투쿠만, 바히아 블랑카, 코르도바, 멘도사, 로사리오 및 몬테비데오를 순회했다.[1] 1964년 6월까지, 그녀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칠레에서 "Los millones de Orofino"를 시작했다.[1] 엔리케 카레라스, 루이스 사슬라브스키, 페르난도 아야라가 연출하고, 티타 메렐로와 앙헬 마가냐와 함께 에피소드로 촬영된 영화 ''La industria del matrimonio''에서 그녀는 부유한 노처녀 역할을 연기했다.[1] 벤세는 다음으로 티나이레의 연출 아래 "El proceso de Mary Duggan"에 출연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 제안을 거절하고 말비나 파스토리노로 교체되었다. 두 번째 시즌에서 파스토리노는 제작에서 하차했고 벤세가 공연을 마무리했다. 출연진 중 한 명인 배우 프란시스코 페트론은 시즌 중에 암으로 사망했다.[1] 196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코미디 극단의 일원으로서 그녀는 라 플라타에서 데뷔했고, 동시에 조지 버나드 쇼의 고전 "캔디다"에서 마르델플라타에서 데뷔했으며, 밀라그로스 데 라 베가가 연출했다.[1]
1968년 말, 벤세는 다음 해에 산티아고, 보고타, 칼리, 메데인, 마니살레스를 6개월 동안 순회하기로 결정했다.[1] 콜롬비아에서 그녀는 베네수엘라로 건너가 카라카스의 시립 극장에서 "Cándida", "Un inocente adulterio", "Un dios durmió en casa", "Los amantes"의 네 작품으로 데뷔했다. 그 후 그녀는 도미니카 공화국, 푸에르토리코, 마이애미를 순회하며 좋은 평을 받았다.[1] 이 긴 순회 공연에서 돌아온 그녀는 몇 달 동안 휴식을 취한 후, 로사리오의 코미디 극장에서 후안 카를로스 토리와 함께 "Flor de cactus"를 공연하기로 동의했다. 개막 공연 후, 이 프로젝트는 파라나, 코르도바, 산타페, 투쿠만을 거쳐 시골을 순회했다.[1]
1972년 중반, 그녀는 뉴욕의 스페인 레퍼토리 극단으로부터 "La valija"(여행 가방)를 가지고 그래머시 아트 극장에서 연극 시즌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개봉 후, ''The New York Post''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절망적인 캐릭터의 연극은 핵심을 꿰뚫는다." 벤세는 코네티컷 대학교의 로사리 칼리지 극장, 보스턴, 시카고, 미국 기구의 본부워싱턴 D.C.에서 순회 공연을 펼쳤고, 관객 수는 1,200명이었다. 그녀가 플로리다와 마이애미에서 공연했을 때, ''The New York Times''의 하워드 톰슨은 그의 기사 제목을 "오프 브로드웨이에 미치는 스페인의 영향"이라고 짓고, "강력하고 변덕스러운 자질과 훌륭하게 표현적인 눈을 가진 예술가인 아멜리아 벤세는 장면과 작품을 밝힌다... 그녀는 약간 순진하고 걱정 없는, 부드러운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눈으로 역할을 생생하게 만든다."고 썼다.[1] 그녀의 작품으로, 그녀는 뉴욕의 코모도어 호텔에서 열린 만찬에서 최우수 외국 여배우 부문 라틴 엔터테인먼트 비평가 협회(ACE) 상을 수상했다.[1]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그녀는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살타, 후후이, 코르도바에서 후스토 호세 로하스, 알도 쿠라와 함께 "La valija"를 공연하며 4개월 동안 순회했다.[1] 1973년, 그녀는 영화를 만든 지 거의 40년 만에 첫 컬러 영화 ''Adiós, Alejandra''를 제작했다.[1] 1975년 9월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Doña Rosita, la soltera"를 개봉했고, 4번의 오스카상 수상자인 배우 캐서린 헵번을 개인적으로 만났다.[1] 감독의 요청에 따라, 그녀는 1976년 9월 마이애미에서 이 쇼를 가져갔고 1977년 초까지 머물다가 페루로 가서 마르사노 극장에서 "La esposa constante"를 개봉했다.[1]
1980년대 초, 벤세는 텔레비전에 자주 출연하여 ''Dulce fugitiva'', ''로미나'', ''비앙카'', ''Las 24 horas''의 주요 배역을 맡았다.[1] 1982년 페루에서 공연한 "La loba"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연극 성공작 중 하나였으며, 그녀의 전 파트너 오스발도 카토네가 기획한 같은 이름으로 페루 텔레비전에서도 방영되었다. 1985년, 그녀는 페루 텔레노벨라 ''La casa de enfrente''에 출연하여 그녀의 인기를 높이고 "La loba"의 시청률을 높였다.[1]
2. 6. 해외 활동
1962년, 벤세는 세사르 티엠포, 막시모 베론도, 엔리케 세라노와 함께 인도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여 외국 예술가들을 위한 공식 리셉션에서 자바할랄 네루 총리를 만났다.[12]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후, 우루과이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텔레비전 제작에 참여했다. 다니엘 티나이레의 연출 아래, 저예산 영화 ''La cigarra no es un bicho''에 참여하여 매춘부 역을 맡았고, 라 나시온은 그녀와 루이스 산드리니의 연기가 빛났다고 보도했다.[12]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벤세와 산드리니는 칠레 언론인들로부터 올해 최고의 아르헨티나 예술가로 선정되었다.[12]1963년 10월부터 12월까지 투쿠만, 바히아 블랑카, 코르도바, 멘도사, 로사리오 및 몬테비데오를 순회했다.[12] 1964년 6월, 칠레에서 "Los millones de Orofino"를 시작하여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12] 엔리케 카레라스, 루이스 사슬라브스키, 페르난도 아야라가 연출한 영화 ''La industria del matrimonio''에서 부유한 노처녀 역할을 연기했다.[12]
196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코미디 극단의 일원으로서 라 플라타에서 데뷔했고, 동시에 조지 버나드 쇼의 고전 "캔디다"로 마르델플라타에서 데뷔했다.[12] 같은 해 말, 산티아고, 보고타, 칼리, 메데인, 마니살레스를 6개월 동안 순회했다.[12] 콜롬비아에서 베네수엘라로 건너가 카라카스의 시립 극장에서 네 작품으로 데뷔했다. 그 후 도미니카 공화국, 푸에르토리코, 마이애미를 순회하며 좋은 평을 받았다.[12]
1972년 중반, 뉴욕의 스페인 레퍼토리 극단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그래머시 아트 극장에서 연극 "La valija"(여행 가방)를 공연했다. ''뉴욕 포스트''는 "절망적인 캐릭터의 연극은 핵심을 꿰뚫는다"라고 호평했다. 벤세는 코네티컷 대학교의 로사리 칼리지 극장, 보스턴, 시카고, 미국 기구 본부워싱턴 D.C.에서 순회 공연을 펼쳤다.[12] 플로리다와 마이애미에서 공연했을 때, ''뉴욕 타임스''의 하워드 톰슨은 "강력하고 변덕스러운 자질과 훌륭하게 표현적인 눈을 가진 예술가"라고 칭찬했다.[12] 그녀는 뉴욕에서 최우수 외국 여배우 부문 라틴 엔터테인먼트 비평가 협회(ACE) 상을 수상했다.[12]
1973년, 거의 40년 만에 첫 컬러 영화 ''Adiós, Alejandra''를 제작했다.[12] 1975년 9월 미국으로 돌아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Doña Rosita, la soltera"를 개봉했고, 캐서린 헵번을 만났다.[12] 1976년 마이애미에서 이 쇼를 공연했고, 1977년 초 페루로 가서 "La esposa constante"를 개봉했다.[12]
1982년 페루에서 공연한 "La loba"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연극 성공작 중 하나였다.[12] 1985년, 페루 텔레노벨라 ''La casa de enfrente''에 출연하여 인기를 높였다.[12]
1989년 라틴 아메리카 신영화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쿠바를 방문하여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12]
2. 7. 후기 경력
벤세의 경력은 1986년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일 제안을 받지 못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배우 협회는 회원 중 86%가 실업 상태라고 밝혔다. 1987년 작품 "솔로 80"에서 두 명의 주연 중 한 명으로 고용되었다. 콜린 히긴스의 희곡은 코리엔테스 거리의 블랑카 포데스타 극장에서 공연되었으며, 벤세는 해롤드의 어머니 역할을 연기했다. 이 연극은 좋은 평을 받았지만 관객을 끌지 못해 1988년 2월에 막을 내렸다.벤세는 거의 2년 동안 일 없이 지냈고, 1989년 라틴 아메리카 신영화 국제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쿠바를 방문하여 리셉션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그해 말, 그녀는 사비나 올모스와 함께 평생 공로를 인정받아 실버 콘도르 상을 수상했다. 1992년에는 니니 마셜, 마르가리타 파딘과 함께 평생 공로를 인정받아 파블로 포데스타 상을 수상했다.[14]
1990년, 벤세는 "사랑의 편지"에서 클로사스와 재회하여 함께 연기했다. 그 후 그녀는 생애 가장 긴 순회 공연에 나서 21개월(1992년 11월까지)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사리오, 코르도바, 멘도사, 마르델플라타에서 "오늘 밤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를 순회 공연했다. 1993년에는 텔레노벨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출연하여 카롤리나 파팔레오와 라울 타이보가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루이사 쿨리옥과 헤라르도 로마노와 함께 시리즈 "탱고의 영혼"(1995)에서 조연을 맡았으며, 이 시리즈는 라틴 아메리카와 이탈리아, 이스라엘, 터키와 같은 일부 유럽 국가에서 국제적으로 방영되었다.
1998년, 벤세와 리베르타드 라마르케는 신문 및 잡지 배급업자 협회로부터 골든 앙헬 "촐로" 페코 상을 받았다.[15] 그녀는 1998년 테아트로 데 라 리베라의 일원으로 "오늘의 리허설, 오늘의 공연"에 출연하여 베테랑 배우 엘레나 루세나와 마리아 아우렐리아 비수티와 함께 공연했다.
1990년대 중반 "무죄"와 "알타 코메디아"에 출연한 후, 1999년 제14회 국제 스페인어 연극 페스티벌에서 연극을 하기 위해 고용되었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취소되었다. 그녀는 오스발도 카토네에게 연극 "베네치아"의 연출을 맡겼고, 2002년 리마에서 주연을 맡았다.[16] 2003년, 벤세는 구스타보 몬헤와 함께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작품으로 어린이 연극에 도전했다. 이 연극은 마법, 춤, 음악, 연극을 결합하여 요정의 세계를 재현했다.[17] 2004년에는 텔레비전에 복귀하여 코미디 시리즈 "두 사람이 없으면 셋도 없다"에 파블로 그라나도스와 파추 페냐와 합류했으며, 2005년에는 마르틴 피에로 어워드에서 "픽션 특별 출연"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었다.[18]
최근 몇 년 동안 벤세는 그녀의 오랜 경력을 인정받아 많은 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배우 사회 사업(OSA)에서 표창을 받았고,[19] 2007년에는 자보 로차 연극 아카데미로부터 평생 공로를 인정받아 최초의 자보란디아 상을 수상했다.[20] 2007년 마리아 게레로 어워드 시상식에서 표창장을 받았고,[21] 2008년에는 호르헤 리베라 로페스와 함께 트리니다드 게바라 공로상을 수상했다.[22] 2009년 말에는 아르헨티나 작가 협회 북부 지역에서 그녀를 기리는 헌사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산 이시드로 시장은 시집을 증정하고 벤세의 이름을 딴 홀을 지정했다.[23]
벤세는 14년 동안 엉덩이 골절을 유발한 낙상 사고를 겪기 전까지 그녀의 1인극 "알폰시나"를 공연했다.[13] 2010년 4월에 그녀는 넘어졌고 수술을 받았다.[24] 2011년 6월, 벤세는 후안 파블로 아레나자 의원의 주도로 아르헨티나 문화의 뛰어난 인물로 선언되었다.[25] 그 직후, 라울 에체레트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회고록 ''임계점의 소녀: 아멜리아 벤세: 회고록''(Corregidor 2011)을 출판했다.[26] 2012년에는 2010년에 촬영된 다큐멘터리 "역사를 바꾼 날"이 개봉했다. 그것은 그녀가 40년 만에 출연한 영화였으며 페론 정권 하의 노동 운동에 관한 영화였다.[27]
3. 개인사
그녀의 첫 번째 파트너는 로베르토 페르난데스 베이로였으며, 1941년부터 1944년까지 관계를 유지했다.[4] 페르난데스 베이로가 그녀에게 경력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면서 관계는 끝났다.[4] 2년 후, 영화 ''마리아 로사''(1946)를 촬영하는 동안, 그녀는 스페인 배우 알베르토 클로사스를 만나 1950년에 결혼했다. 그들은 부부이자 예술적 파트너가 되어 영화와 연극을 함께 작업했다. 1953년, 벤세는 해외에서 돌아와 클로사스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했다.[4] 벤세는 클로사스와 평생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심지어 다시 함께 작업하기도 했고, 1994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4]
1950년대 중반, 그녀는 1958년 호세 마리아 페르난데스 운사인이 멕시코로 망명할 때까지 짧은 로맨스를 가졌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그녀는 19살 연하인 오스발도 카토네와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도냐 로시타, 라 솔테라"에서 그녀를 연출했으며, 그녀는 페루에서 여러 차례 그와 함께 작업했다.[28] 그녀의 마지막 남편은 "찰리" 오르티스 바수알도[29]였으며, 1980년부터 1982년까지 그와 함께 살았다.[4] 심각한 고관절 골절을 겪기 전까지, 그녀는 요가를 하며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건강한 식단과 함께 매우 활동적인 삶을 유지했다.[4]
4. 유산
벤세는 80년에 걸쳐 영화 유산을 남겼다.[4] 1973년, 마이애미 시의 열쇠를 받았다. 1981년, 파블로 C. 뒤크로스 히켄 영화 박물관은 "국가 영화의 첫 번째 인물"로서 그녀의 위상을 인정하여 파테 챔버를 헌정했다. 1995년, 아르헨티나 국회 상원은 아르헨티나 문화 기여를 인정하여 문화 외교 훈장을 수여했고, 2년 후, 국립 예술 기금은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2007년 아르헨티나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영화의 얼굴"로 묘사되었으며,[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으로 칭송받았다. 벤세는 폴 뉴먼이 연기로 알려지기 위해 선글라스를 썼다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작품이 더 중요한 유산이라는 데 동의했다.[3] 2010년 11월, 다니엘 고메스 리날디는 ''아멜리아 벤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라는 전기를 출판했다.[32]
5. 작품 목록
아멜리아 벤세는 다양한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영화'''es
연도 | 제목 | 원제 | 비고 |
---|---|---|---|
1933 | 댄싱 | Dancing | |
1937 | 라 푸가 | La fuga | |
1937 | 엘 포라스테로 | El forastero | |
1938 | 아디오스 부에노스 아이레스 | Adiós Buenos Aires | |
1938 | 라 부엘타 알 니도 | La vuelta al nido | |
1938 | 로스 카란초스 데 라 플로리다 | Los caranchos de la Florida | |
1939 | 에르마노스 | Hermanos | |
1939 | 엘 마테로 | El matrero | |
1940 | 엘 아라간 데 라 파밀리아 | El haragán de la familia | |
1941 | 노비오스 파라 라스 무차차스 | Novios para las muchachas | |
1941 | 라 카사 데 로스 쿠에르보스 | La casa de los cuervos | |
1942 | 엘 테르세르 베소 | El tercer beso | |
1942 | 엔 엘 비에호 부에노스 아이레스 | En el viejo Buenos Aires | |
1942 | 크루사 | Cruza | |
1942 | 라 게라 가우차 | La guerra gaucha | |
1943 | 손 카르타스 데 아모르 | Son cartas de amor | |
1943 | 로스 오호스 마스 린도스 델 문도 | Los ojos más lindos del mundo | |
1943 | 토도 운 옴브레 | Todo un hombre | |
1944 | 누에스트라 나타차 | Nuestra Natacha | |
1944 | 베인티콰트로 오라스 엔 라 비다 데 우나 무헤르 | Veinticuatro horas en la vida de una mujer | |
1945 | 카미노 델 인피에르노 | Camino del infierno | |
1946 | 라스 트레스 라타스 | Las tres ratas | |
1946 | 마리아 로사 | María Rosa | |
1946 | 라우라차 | Lauracha | |
1947 | 아 상그레 프리아 | A sangre fría | |
1948 | 엘 페카도 데 훌리아 | El pecado de Julia | |
1949 | 라 오트라 이 요 | La otra y yo | |
1949 | 라 단자 델 푸에고 | La danza del fuego | |
1949 | 라 다마 델 콜라르 | La dama del collar | |
1950 | 로맨스 엔 트레스 노체스 | Romance en tres noches | |
1952 | 미 무헤르 에스타 로카 | Mi mujer está loca | |
1952 | 라 파르다 플로라 | La Parda Flora | |
1953 | 시에테 무헤레스 | Siete Mujeres | |
1954 | 라스 트레스 엘레나스 | Las tres Elenas | |
1955 | 엘 옴브레 케 데비아 우나 무에르테 | El hombre que debía una muerte | |
1957 | 알폰시나 | Alfonsina | |
1958 | 도스 바수라스 | Dos basuras | |
1959 | 데 에스팔다스 아 라 푸에르타 | De espaldas a la puerta | |
1963 | 라 시가라 노 에스 운 비초 | La cigarra no es un bicho | |
1964 | 라 인두스트리아 델 마트리모니오 | La industria del matrimonio | |
1969 | 로스 데부탄테스 엔 엘 아모르 | Los debutantes en el amor | |
1973 | 아디오스, 알레한드라 | Adiós, Alejandra | |
2012 | 역사를 바꾼 날 | El día que cambió la historia | 다큐멘터리 |
'''텔레비전'''es
- 《로스 프레미오스 노벨》 (1958) (미니시리즈)
- 《토파즈》 (1960) (미니시리즈)
- 《에스펙타쿨로 엘렉트리코 에스탠다르》 (1965) (미니시리즈)
- 《둘세 푸기티바》 (1979)
- 《비앙카》 (1980)
- 《로미나》 (1980)
- 《라스 24 오라스》 (1981)
- 《에소스 케 디센 아마르세》 (1993)
- 《손 오 세 아센》 (1997)
- 《노 아이 2 신 3》 (2004)
5. 1. 영화
연도 | 제목 | 원제 | 비고 |
---|---|---|---|
1933 | 댄싱 | Dancing | |
1937 | 라 푸가 | La fuga | |
1937 | 엘 포라스테로 | El forastero | |
1938 | 아디오스 부에노스 아이레스 | Adiós Buenos Aires | |
1938 | 라 부엘타 알 니도 | La vuelta al nido | |
1938 | 로스 카란초스 데 라 플로리다 | Los caranchos de la Florida | |
1939 | 에르마노스 | Hermanos | |
1939 | 엘 마테로 | El matrero | |
1940 | 엘 아라간 데 라 파밀리아 | El haragán de la familia | |
1941 | 노비오스 파라 라스 무차차스 | Novios para las muchachas | |
1941 | 라 카사 데 로스 쿠에르보스 | La casa de los cuervos | |
1942 | 엘 테르세르 베소 | El tercer beso | |
1942 | 엔 엘 비에호 부에노스 아이레스 | En el viejo Buenos Aires | |
1942 | 크루사 | Cruza | |
1942 | 라 게라 가우차 | La guerra gaucha | |
1943 | 손 카르타스 데 아모르 | Son cartas de amor | |
1943 | 로스 오호스 마스 린도스 델 문도 | Los ojos más lindos del mundo | |
1943 | 토도 운 옴브레 | Todo un hombre | |
1944 | 누에스트라 나타차 | Nuestra Natacha | |
1944 | 베인티콰트로 오라스 엔 라 비다 데 우나 무헤르 | Veinticuatro horas en la vida de una mujer | |
1945 | 카미노 델 인피에르노 | Camino del infierno | |
1946 | 라스 트레스 라타스 | Las tres ratas | |
1946 | 마리아 로사 | María Rosa | |
1946 | 라우라차 | Lauracha | |
1947 | 아 상그레 프리아 | A sangre fría | |
1948 | 엘 페카도 데 훌리아 | El pecado de Julia | |
1949 | 라 오트라 이 요 | La otra y yo | |
1949 | 라 단자 델 푸에고 | La danza del fuego | |
1949 | 라 다마 델 콜라르 | La dama del collar | |
1950 | 로맨스 엔 트레스 노체스 | Romance en tres noches | |
1952 | 미 무헤르 에스타 로카 | Mi mujer está loca | |
1952 | 라 파르다 플로라 | La Parda Flora | |
1953 | 시에테 무헤레스 | Siete Mujeres | |
1954 | 라스 트레스 엘레나스 | Las tres Elenas | |
1955 | 엘 옴브레 케 데비아 우나 무에르테 | El hombre que debía una muerte | |
1957 | 알폰시나 | Alfonsina | |
1958 | 도스 바수라스 | Dos basuras | |
1959 | 데 에스팔다스 아 라 푸에르타 | De espaldas a la puerta | |
1963 | 라 시가라 노 에스 운 비초 | La cigarra no es un bicho | |
1964 | 라 인두스트리아 델 마트리모니오 | La industria del matrimonio | |
1969 | 로스 데부탄테스 엔 엘 아모르 | Los debutantes en el amor | |
1973 | 아디오스, 알레한드라 | Adiós, Alejandra | |
2012 | 역사를 바꾼 날 | El día que cambió la historia | 다큐멘터리 |
5. 2. 텔레비전
- 《로스 프레미오스 노벨》 (1958) (미니시리즈)
- 《토파즈》 (1960) (미니시리즈)
- 《에스펙타쿨로 엘렉트리코 에스탠다르》 (1965) (미니시리즈)
- 《둘세 푸기티바》 (1979)
- 《비앙카》 (1980)
- 《로미나》 (1980)
- 《라스 24 오라스》 (1981)
- 《에소스 케 디센 아마르세》 (1993)
- 《손 오 세 아센》 (1997)
- 《노 아이 2 신 3》 (2004)
6. 자서전
La niña del umbral: Amelia Bence: memorias|라 니냐 델 움브랄: 아멜리아 벤세: 메모리아스es는 아멜리아 벤세가 2011년에 직접 쓴 자서전으로, Corregidor|코레히도르es에서 출판되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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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gustaría que me recordaran por mi traba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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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ciclo protagonizado por Pablo Granados, Pachu Peña y Freddy Villareal tiene cuatro nominaciones al Martín Fierro en distintos rub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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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té con masitas y muchas anécdo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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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Academia de Teatro de Javo Ro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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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regaron premios al tea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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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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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Trinidad Guevara ya tienen dueñ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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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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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E Zona Norte presentó antologí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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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Isidro Gobierno Municip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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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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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Legislatura de la Ciudad Autónoma de Buenos Aires sanciona con fuerza de 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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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libro de memorias de Amelia Bence ya está a la ve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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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nacio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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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documental que abarca demasi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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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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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lia Bence: "A mí me gusta el hombre podero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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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ió Amelia Bence, la actriz de los ojos más lindos del mundo
https://web.archive.[...]
20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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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iós a Amelia Bence, la actriz de los ojos más lindos del mu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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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ojos más lindos del mundo" el libro de Daniel Rinal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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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ceinstantes
201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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