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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태펀 피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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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서 태펀 피어슨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미국의 목사이자, 작가, 선교 운동가로, 근대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이론가였다. 그는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이라는 표어를 만들었으며, '세계선교논평'의 편집장과 '선교의 위기'의 저자로 활동했다. 또한, 학생자원운동을 창시하여 한국의 언더우드 등 많은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평택대학교의 전신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설립에도 기여했다. 피어슨은 베이컨의 귀납법을 활용한 독특한 신학 방법론을 제시했으며, 노예제 폐지, 노동자 권익 보호 등 사회 개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근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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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태펀 피어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서 태펀 피어선
이름아서 태펀 피어선
원어 이름Arthur Tappan Pierson
출생일1837년 3월 6일
출생지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
사망일1911년 6월 3일
사망지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
국적미국
직업선교사, 신학자, 목회자
종교개신교(장로회)
배우자세라 프랜시스 베네딕트 피어슨(Sarah Frances Benedict Pierson)
자녀7명
학력
학사해밀턴 대학교
신학 석사유니온 신학교
신학 박사낙스 대학교
활동 기간
활동 기간1859년 ~ 1911년

2. 생애

아서 태펀 피어슨은 근대 복음주의 선교 운동 이론가이자, 「세계선교논평」지(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의 편집장, 「선교의 위기」(The Crisis of Mission)의 저자였다. 무디와 함께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하며 1886년 미국 노스필드에서 학생자원운동(SVM) 단체를 창설하였다. 19세기 선교운동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인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이라는 어구를 만들었으며, 이 기치 아래 미국과 유럽 청년들에게 선교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였다.

언더우드, 로버트 엘리엇 스피어, 사무엘 M. 즈웨머, 존 모트, 제임스 게일 등 수많은 선교사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1887년 새문안교회 설립 당시 언더우드와 깊은 교제를 시작했으며, 이후 언더우드는 피어슨이 편집장으로 있던 《세계선교평론》의 조선 거주 편집 통신원으로 활동했다.

피어슨 박사 부부는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으며, 그의 일곱 자녀들은 모두 선교, 교육, 사회 봉사자가 되었다.


  • 장녀 헬렌: 프레드릭 커티스와 결혼하여 일본에서 40년간 선교활동
  • 차녀 로라: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상대로 선교활동
  • 안나와 에디스: 뉴욕시와 필라델피아에서 여성정착 사업에 종사, 훗날 안나는 파푸아뉴기니에서 1년간 선교활동
  • 장남 델라반 피어선: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과 함께 「세계선교논평」지에서 일함
  • 차남 패런드: 의사로서 중남미에서 선교활동 중 건강 악화로 중단
  • 막내딸 루이스: 인도에서 선교활동 중 1903년 장티푸스로 사망. 뉴욕주 포킵시와 매사추세츠주 로웰의 YMCA에서 비서로 일하다 여성연합선교회 자원봉사자로 인도 빈민층 여성과 소녀들을 위해 일함. 가족들은 그녀를 기념하여 인도 중부 누공에 기념 예배당을 설립.


1910년 12월, 73세의 나이로 일본을 거쳐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성경 공부를 인도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1911년 1월 조선을 떠났다. 이후 일본, 미국 LA를 거쳐 뉴욕으로 돌아간 후 1911년 6월 3일 74세로 소천하였다. 그는 조선에 성경 학교를 세우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유언에 따라 1912년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이 설립되었다.[1] 피어슨의 묘비에는 열린 성경 그림과 함께 요한1서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과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두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아서 태펀 피어슨은 기독교와 노예제 폐지 운동에 깊이 관여한 스티븐과 샐리 피어슨 부부의 아홉 번째 자녀였다. 그는 뉴욕 시에서 태어났으며, 저명한 뉴욕 노예제 폐지 운동가인 아서 태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850년, 13세의 나이에 감리교 부흥회에 참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1857년에는 해밀턴 칼리지를, 1869년에는 유니언 신학대학교를 졸업했다.

1860년, 사라 프랜시스 베네딕트와 결혼했다.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 15세 이전에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이후 선교사, 목사,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했다.

2. 2. 목회 활동

피어선은 북장로교 목사로서 빙엄턴, 워터포드, 디트로이트, 인디애나폴리스, 필라델피아 등 주요 도시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또한 런던 최대의 침례교회였던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의 담임목사인 찰스 스펄전 목사가 병중에 있을 때, 그의 후계자로서 설교목사로 이 교회에서 2년간 설교하였다. 그러나 이후 침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장로교회에서 제적당하기도 하였다.[1]

그는 60여권에 이르는 저술과 수많은 논문 및 팸플릿을 기록하였으며 13,000편에 달하는 설교와 강의를 하였다. 동시에 회중교회와 장로교, 침례교와 성공회를 넘나들며 사역한 초교파주의자였다. 1910년 목회 50주년이 되던 해 허드슨 테일러의 초청으로 일본, 한국, 중국, 인도, 이집트 등의 극동지역 선교여행을 하였고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질병으로 고통스러워 하였다. 한국에 와서(1910. 12. ~ 1911. 1.) 선교사들을 위한 성경강해를 하였으며, 매우 열악한 여건에서도 성경을 공부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 받아서 성경학교 설립을 약속하였는데 질병이 심해져 고국에 돌아간 뒤에 곧 소천하게 되었다. 유족과 친구들, 후원자들이 피어선 박사의 유언을 따라 조선에 초교파적 성경학교를 설립한 것이 1912년 서울 서대문구 협성신학교 내에서 시작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다. 이 성경학원을 전신으로 하여 1980년 조기흥 선생에 의해 대학설립인가를 받았고 1981년 평택으로 학교를 옮겨 피어선성서신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90년 12월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여 피어선대학으로 개명하였으며 1996년에 근거지명을 따라 평택대학교로 재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의 목회 활동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기간교회
1859년, 1869년 여름코네티컷주 윈스테드 회중교회
1860년 ~ 1863년뉴욕주 빙엄턴 회중교회
1863년 ~ 1869년뉴욕주 워터포드 장로교회
1869년 ~ 1882년미시간주 디트로이트 포트 스트리트 장로교회
1882년 ~ 1883년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애나폴리스 제2 장로교회
1883년, 1889년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베다니 장로교회
1891년 ~ 1893년런던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



2004년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

2. 3. 선교 운동과 저술 활동

피어슨은 근대 복음주의 선교 운동 이론가였다. 그는 13,000개 이상의 설교문과 연설을 집필하였고 60권 이상의 책을 썼다.[1] 특히 한국의 언더우드,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이자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회사가 로버트 엘리엇 스피어(R.E.Speer) 교수, 이슬람 선교의 개척자 사무엘 M. 즈웨머(Samuel Zwemer)[https://en.wikipedia.org/wiki/Samuel_Zwemer], 기독교청년회(YMCA) 운동과 에큐메니컬 운동의 지도자로 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존 모트(John R. Mott), 한국의 선교사였던 제임스 게일(J. S. Gale) 박사 [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90134/http://www.koreatimes.net/?mid=Kt_Article_new&comment_srl=64713&category=58526&document_srl=1182048] 등 수많은 선교사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887년 새문안교회가 시작된 해에 언더우드는 피어슨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예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편지를 보내며 깊은 교제를 시작하였고, 그 후 피어슨이 편집장으로 있던 세계선교평론의 조선 거주 편집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 후에 언더우드는 피어선성경기념학원의 초대 이사장으로서 학교 설립을 주도하였고 초대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피어슨은 친구인 무디와 함께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하며 1886년 미국 노스필드에서 학생자원운동(SVM) 단체를 창설하여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 존 모트(John R. Mott), 헨리 윈터스 루스(Henry Winters Luce, 타임지 잡지 창설자 Henry R. Luce [https://en.wikipedia.org/wiki/Henry_Luce] 의 아버지 [http://www.randomhouse.com/acmart/catalog/display.pperl?isbn=9780307592910&view=printexcerpt])와 같은 수많은 대학 청년들에게 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었고, 이에 고무된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과 중국으로 떠났다.[https://web.archive.org/web/20160914224514/http://www.bdcconline.net/en/stories/l/luce-henry-winters.php]

1910년 12월 73세로 노쇠한 상태에서 일본을 거쳐서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성경 공부를 인도하기도 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1911년 1월 조선을 떠나 일본, 미국 LA를 거쳐 뉴욕으로 돌아간 후 1911년 6월 3일 74세로 소천하였다. 그는 조선에 성경학교를 세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A.T. 피어선 박사 홀


평택대학교에 있는 피어선 박사 부부 동상


피어슨은 「세계선교논평」지(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의 편집장이자 「선교의 위기」(The Crisis of Mission)의 저자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창시자로 19세기 선교운동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인 “이 세대 안에 세계 복음화를(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이라는 어구를 만들었으며 이 기치 아래 미국과 유럽 청년들에게 선교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였다. 그는 북장로교 목사로서 빙엄턴, 워터포드, 디트로이트, 인디애나폴리스, 필라델피아 등 주요 도시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또한 런던 최대의 침례교회였던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의 담임목사인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목사가 병중에 있을 때, 그의 후계자로서 설교 목사로 이 교회에서 2년간 설교하였다. 그러나 이후 침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장로교회에서 제적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당대의 저명인사인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Moody), 존 와너메이커(John Wannamaker),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아도니람 저드슨 고든(A. J. Gordon), 조지 윌리엄스(Sir George Williams) 및 조지 뮐러(George Muller) 등과 교제하였고 전후 미국의 여러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60여 권에 이르는 저술과 수많은 논문 및 팸플릿을 기록하였으며 13,000편에 달하는 설교와 강의를 하였다. 동시에 회중교회와 장로교, 침례교와 성공회를 넘나들며 사역한 초교파주의자였다. 1910년 목회 50주년이 되던 해 허드슨 테일러의 초청으로 일본, 한국, 중국, 인도, 이집트 등의 극동 지역 선교 여행을 하였고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였다. 한국에 와서(1910. 12. ~ 1911. 1.) 선교사들을 위한 성경 강해를 하였으며, 매우 열악한 여건에서도 성경을 공부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받아서 성경학교 설립을 약속하였는데 질병이 심해져 고국에 돌아간 뒤에 곧 소천하게 되었다. 유족과 친구들, 후원자들이 피어선 박사의 유언을 따라 조선에 초교파적 성경학교를 설립한 것이 1912년 서울 서대문구 협성신학교 내에서 시작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다. 이 성경학원을 전신으로 하여 1980년 조기흥 선생에 의해 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고 1981년 평택으로 학교를 옮겨 피어선성서신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90년 12월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여 피어선대학으로 개명하였으며 1996년에 근거지명을 따라 평택대학교로 재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피어슨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선교의 위기''(The Crisis of Missions, 뉴욕, 1886)
  • ''수많은 확실한 증거: 기독교 증거에 관한 장''(Many Infallible Proofs: Chapters on the Evidences of Christianity, 1886)
  • ''원리와 실제에서의 전도 활동''(Evangelistic Work in Principle and Practise, 1887)
  • ''말씀의 열쇠: 또는 성경 연구의 도움''(Keys to the Word: or, Helps to Bible Study, 1887)
  • ''하나의 복음 또는 네 복음서의 이야기의 조합''(The One Gospel or, The Combination of the Narratives of the Four Evangelists, 1889)
  • ''선교의 신성한 사업''(The Divine Enterprise of Missions, 1891)
  • ''선교의 기적''(Miracles of Missions, 4권, 1891–1901)
  • ''설교의 신성한 기술''(The Divine Art of Preaching, 1892)
  • ''설교단에서 종려나무 가지까지: 찰스 H. 스펄전 기념''(From the Pulpit to the Palm-Branch: Memorial of Charles H. Spurgeon, 1892)
  • ''복음의 핵심''(설교집, The Heart of the Gospel, 1892)
  • ''사도행전의 새로운 행적''(New Acts of the Apostles, 1894)
  • ''생명의 힘: 또는 인격 함양 및 행동''(LifePower: or, Character Culture, and Conduct, 1895)
  • ''기도 학교의 교훈''(Lessons in the School of Prayer, 1895)
  • ''성령의 행적''(Acts of the Holy Spirit, 1895)
  • ''주의 오심''(The Coming of the Lord, 1896)
  • ''우리가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Shall we continue in Sin?, 1897)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는 신자의 삶의 영역''(In Christ Jesus: or, The Sphere of the Believer's Life, 1898)
  • ''시에나의 카타리나, 고대 평신도 설교자''(Catharine of Siena, an ancient Lay Preacher, 1898)
  • ''브리스톨의 조지 뮬러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증언''(George Muller of Bristol and his Witness to a Prayer-Hearing God, 1899)
  • ''지난 반세기의 진전된 운동''(Forward Movements of the last half Century, 1900)
  • ''대중 연설자를 위한 씨앗 생각''(Seed Thoughts for Public Speakers, 1900)
  • ''신적 역사의 한 주기 관점에서 본 현대 선교의 세기''(The Modern Mission Century viewed as a Cycle of Divine Working, 1901)
  • ''고르디우스 매듭: 또는 불신앙이 좌절되는 문제''(The Gordian Knot: or, The Problem which baffles Infidelity, 1902)
  • ''교훈과 실제에서의 케직 운동''(The Keswick Movement in Precept and Practice, 1903)
  • ''하나님의 살아있는 신탁''(God's Living Oracles, 1904)
  • ''성경과 영적 비평''(The Bible and Spiritual Criticism, 1906)
  • ''성경과 영적 삶''(The Bible and Spiritual Life, 1908)
  • ''경건한 자제력''(Godly Self-control, 1909)

2. 4. 한국과의 관계

피어슨은 언더우드와 깊은 교제를 나누었으며, 1887년 새문안교회가 시작된 해에 언더우드는 피어슨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예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 후 피어슨이 편집장으로 있던 《세계선교평론》의 조선 거주 편집 통신원으로 활동하였다.[1] 언더우드는 피어선성경기념학원의 초대 이사장으로서 학교 설립을 주도하였고 초대 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10년 12월, 73세의 노쇠한 상태에서 일본을 거쳐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성경 공부를 인도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1911년 1월 조선을 떠났다. 그는 조선에 성경 학교를 세우라는 유언을 남겼다.[1] 그의 유언에 따라 1912년 10월 15일에 피어슨 기념 연합 성경 학교(현재의 평택대학교)가 설립되었다. 1910년 한국을 방문하여 몇몇 교회(남대문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쳤으며, 많은 목회자와 학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3. 신학 및 사상

피어슨은 베이컨의 귀납법을 성경 연구에 적용하여 자신만의 신학 방법론을 구축하였다. 그는 성경을 정확하게 연구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 [2]

그는 은혜를 베풀고 섬김과 봉사를 실천하며,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문화관을 강조했다. 전천년주의에 입각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현실 속에서 문화 변혁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비판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근본주의 신학을 옹호한 피어슨은 기독교 신앙 변호 글을 발표하고, ''근본주의'' 소책자 발간에 참여하여 근본주의-근대주의 논쟁을 촉발시켰다. "근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1]

연대 창조설을 지지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1898)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이 신약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밝혔다.[1]

3. 1. 신학 방법론

피어선 박사는 베이컨의 귀납법적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자신의 신학적 방법으로서 신학적 철학을 만들었다. 피어선은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는 것을 자기의 신학 연구에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신학을 올바르게 탐구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논리적 체계를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베이컨의 경험주의적 귀납법적 논증 방법이었다. 베이컨이 주장한 관찰과 분석, 그리고 입증을 통하여 이론을 유출하듯 피어선 역시 이런 방식을 통하여 신학적 철학이라는 그의 독특한 신학 연구 방법론을 만들었다. 이런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신학의 목적이었다. 철학적 신학이란 성경 그 자체가(ipso facto) 진리를 증거하고 모든 것들을 성경에 맞추어서 검증하여 성경적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성경신학적 방법이다. 신학의 탐구는 성경을 왜곡하지 않고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오류가 없는 성경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참된 성경의 진리를 증거하는 목적에 도전을 주었다. 성경의 하나님을 왜곡 없이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증거하는 그의 신학적 철학과 성경신학적 방법이야말로 피어선의 신학을 가장 가치 있는 공헌으로 볼 수 있다.[2]

3. 2. 문화관

그는 베푸는 은혜, 섬김과 봉사, 교회와 사회에 대한 철저한 변혁을 추구하는 문화관을 주장하였다. 특히 피어선은 전천년주의에 근거하여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가운데, 그의 삶의 현장에서 변혁적 문화사역에 충실하였다. 그는 당시 교회의 잘못된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지정좌석제를 폐지하고, 설교와 예배 의식을 단순하게 하여 교회의 문턱을 낮추었다. 사회적으로는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며, 여성들의 사회 활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비록 이러한 기독교 문화 사역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복음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그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인 문화관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3. 3. 근본주의 신학

아서 태펀 피어슨은 자유주의 신학이 주류 교단을 휩쓸기 시작했을 때,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기독교 비판에 대응하기 위한 소책자인 "근본주의"를 출판했다.[1] 피어슨은 변증 능력으로 인해 주요 기사 5편을 쓰도록 초청받았고, 이 소책자들은 미국 전역의 목사들에게 무료로 배포되었다.[1] 이는 미국 교회에서 근본주의-근대주의 논쟁의 시작을 알렸다.[1] 시간이 지나면서 소책자들은 12권 세트의 책으로 묶였고, 오늘날에는 5권 세트로 구할 수 있다.[1] 이러한 공헌으로 피어슨은 종종 "근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1]

피어슨은 연대 창조설을 옹호했다. 그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1898)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이 신약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결론 내렸다.[1]

4. 유산 및 평가

피어선은 「세계선교논평」(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의 편집장이자 「선교의 위기」(The Crisis of Mission)의 저자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창시자였다. 그는 19세기 선교운동의 유명한 구호인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이라는 말을 만들어, 미국과 유럽 청년들에게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1] 그는 북장로교 목사로서 빙엄턴, 워터포드, 디트로이트, 인디애나폴리스, 필라델피아 등 주요 도시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또한 런던 최대의 침례교회였던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의 담임목사인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목사가 병중에 있을 때, 그의 후계자로서 설교목사로 이 교회에서 2년간 설교하였다. 그러나 이후 침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장로교회에서 제적당하기도 하였다.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Moody), 존 와너메이커(John Wannamaker),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아도니람 저드슨 고든(A. J. Gordon), 조지 윌리엄스(Sir George Williams), 조지 뮐러(George Muller)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교류하였고, 전후 미국의 여러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60여 권에 이르는 저술과 수많은 논문 및 팸플릿을 기록하였으며, 13,000편에 달하는 설교와 강의를 하였다. 회중교회와 장로교, 침례교와 성공회를 넘나들며 사역한 초교파주의자였다. 1910년 목회 50주년이 되던 해 허드슨 테일러의 초청으로 일본, 한국, 중국, 인도, 이집트 등 극동지역 선교여행을 하였고,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질병으로 고통스러워 하였다. 한국에 와서(1910. 12. ~ 1911. 1.) 선교사들을 위한 성경강해를 하였으며, 매우 열악한 여건에서도 성경을 공부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받아 성경학교 설립을 약속하였으나, 질병이 심해져 고국에 돌아간 뒤에 곧 소천하게 되었다. 유족과 친구들, 후원자들이 피어선 박사의 유언을 따라 조선에 초교파적 성경학교를 설립한 것이 1912년 서울 서대문구 협성신학교 내에서 시작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다. 이 성경학원을 전신으로 하여 1980년 조기흥 선생에 의해 대학설립인가를 받았고, 1981년 평택으로 학교를 옮겨 피어선성서신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90년 12월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여 피어선대학으로 개명하였으며, 1996년에 근거지명을 따라 평택대학교로 재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D. L. 무디와 노스필드 컨퍼런스에서 대화했고, 거룩한 경건을 장려하는 케즈윅 컨벤션의 연사이기도 했다. 조지 뮬러와 다른 사람들은 피어슨의 종말론전천년설에서 후천년설로 바꾸는 데 도움을 주었다. 로버트 엘리엇 스피어, 사무엘 즈웨머,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존 R. 모트 등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선교 강사로서 A. T. 피어슨에게 영향을 받아 자신의 삶을 선교에 바치게 되었다.

선교에 대한 공헌 외에도, 피어슨의 가장 주목할 만한 영향력은 정통성에 대한 헌신이었다. 자유주의가 주류 교단을 휩쓸기 시작했을 때, 피어슨은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기독교 비판자들에게 답하기 위해 고안된 "근본주의"라는 일련의 소책자를 출판했다. 변증 능력으로 인해 피어슨은 주요 기사 5편을 쓰도록 초청받았다. 각 소책자는 미국 전역의 목사들에게 무료로 배포되었다. 이것은 미국 교회에서 근본주의-근대주의 논쟁의 시작을 알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책자들은 12권 세트의 책으로 결합되었고, 오늘날 5권 세트로 구할 수 있다. 그 이후로, 피어슨은 "근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1898)인데, 그는 이 짧은 구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치사와 고유 명사가 결합된 것이 전체 신약을 이해하는 핵심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피어슨은 연대 창조설의 옹호자였다.

은퇴 후에도 국내외 교회와 컨퍼런스에서 계속 설교했다. 1910년 한국을 방문하여 몇몇 교회(남대문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쳤으며, 1911년에 사망했다. 아서 태펀 피어슨 박사의 유언에 따라 1912년 10월 15일에 피어슨 기념 연합 성경학교(현재의 평택대학교)가 설립되었고, 많은 목회자와 학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피어슨의 묘비에는 열린 성경 그림이 있었고, 요한1서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과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두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Reformed Reader article on Arthur T. Pierson http://www.reformedr[...]
[2] 웹사이트 안명준, A.T. 피어선 박사의 신학방법론 https://www.kci.g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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