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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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씨는 헤이안 시대 가와치 겐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후손으로 시작된 일본의 무가 씨족이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는 유력 고케닌으로 성장했으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335년 고다이고 천황을 배신하고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했다. 1392년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아시카가 씨는 15명의 쇼군을 배출했지만, 오닌의 난 이후 세력이 약화되어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했다. 아시카가 씨는 간토 구보, 고가 구보 등 분가를 두었으며,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쇼군 가문의 권위가 약화되고 지방 다이묘의 세력이 커지면서 귀족성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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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씨 | |
---|---|
기본 정보 | |
본성 | 세이와 겐지(미나모토 씨) |
시조 | 미나모토노 요시야스(아시카가 요시야스) |
최종 통치자 | 아시카가 요시아키 |
통치 종료 | 1573년,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아시카가 막부가 폐지됨 |
출신지 | 시모쓰케국 아시카가군 아시카가 장 |
근거지 | 야마시로국 |
가문 | |
주요 가문 | 호소카와 씨 이마가와 씨 하타케야마 씨(복원된 계통) 아사노 씨(아사노 나가마사 이후) 기라 씨 시바 씨 하치스카 씨 기타 |
역사적 역할 | |
주요 역할 | 1333년부터 1573년까지 봉건 일본을 통치한 사무라이 가문, 미나모토 씨의 직계 후손 |
주요 인물 | |
주요 인물 |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다다요시 아시카가 요시미쓰 아시카가 요시모치 아시카가 요시카즈 아시카가 요시노리 아시카가 요시마사 아시카가 요시히사 아시카가 요시테루 아시카가 요시아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요시타네 아시카가 요시하루 아시카가 요시즈미 아시카가 요시히데 아시카가 요시미 아시카가 다다후유 아시카가 하루우지 |
가문 문양 | |
문양 종류 | 오시치노키리(오동나무 문양) |
2. 역사
고다이고 천황이 1333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지만, 그가 만들어낸 혼란을 통제할 수 없었다. 고다이고 천황의 무능한 통치는 그의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 명인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1335년에 그를 배신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교토에 위치한 북쪽의 고다이고의 궁정에 따라 북조가 세워졌다. 고다이고와 아시카가 씨족 간의 갈등은 남북조의 동란(南北朝の動乱)으로 알려져 있다. 1392년, 남조는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항복했다.[3]
2. 1. 출자 및 가마쿠라 시대
헤이안 시대 가와치 겐지의 도료(棟梁)였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넷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쿠니가 시모쓰케국 아시카가 장원[60]을 영지로 다스리며 그곳의 지명을 따 아시카가 씨를 칭했다. 닛타 씨와는 같은 조상을 모시는 관계이다.요시쿠니의 둘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야스는 도바 천황의 북면무사(北面武士)가 되었고, 호겐의 난에 다이라노 기요모리,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와 함께 참전하였다. 아쓰타 신궁의 오미야지(大宮司)였던 후지와라노 스에노리의 딸[61]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할 때 참가하여 가마쿠라 막부의 유력 고케닌(御家人)이 되었다.
아시카가 요시우지 이후 가즈사(上総) ・ 미카와(三河)의 슈고(守護)직을 맡기도 했다. 또한 호소카와 씨, 시바 씨, 하타케야마 씨 등 여러 서류(庶流) 가문으로 분파되었다.
겐지 쇼군가가 멸망한 뒤에도 호조 씨와 혼인, 헨기(偏諱)를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4대 당주 아시카가 야스토키는 무단 출가하고, 6대 당주 아시카가 이에토키는 시모쓰키 소동에 연루되어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제7대 당주 아시카가 사다우지는 가나자와 아키토키의 딸을 정실로 맞아 장남 아시카가 다카요시를 얻었으나 요절, 우에스기 기요코와의 사이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얻었다.[62][63] 다카우지는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거병에 응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쓰러뜨리는 공을 세웠다.
2. 1. 1. 호조 씨와의 관계
아시카가 요시카네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의 동생 호조 도키코와 결혼하면서, 아시카가 가문은 대대로 호조 씨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아시카가 가문의 역대 당주들은 호조 씨 일문의 여성을 정실로 맞이하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적자로 인정되는 관례가 있었다.[69]가마쿠라 시대 아시카가 적류 가문의 역대 당주들은 호조 씨 종가인 도쿠소케(得宗家) 당주의 이름 한 글자를 받아오는 관습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시카가 야스우지는 외할아버지인 호조 야스토키[66], 아시카가 요리우지는 호조 도키요리[66], 아시카가 사다우지는 호조 사다토키[67], 사다우지의 세 아들(다카요시, 다카우지, 다카쿠니)는 호조 다카토키[68]에게서 각각 이름 한 글자를 받았다.[65]
아시카가 이에토키는 서자였음에도 가독을 이었고, 이름에 아시카가 집안의 통자인 '우지'(氏)가 붙여지지 않았다.[66] 이는 정실(호조 도키모리의 딸)이 아들을 낳기 전에 요절했기 때문인데, 대신 사용된 '토키'(時)는 호조 집안의 통자이기도 해서, 호조 집안으로부터 받은 이름자로 추정된다.[70]
아시카가 다카요시의 이름에 '요시'(義)가 쓰인 것은 당시 아시카가 씨와 호조 도쿠소케의 양호한 관계를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65]
2. 2. 남북조 시대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에 참여했으나, 나카센다이의 난을 계기로 겐무 신정에서 이반하고 고묘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교토에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했다.[71]다카우지는 서류(庶流)에 해당하는 여러 집안을 여러 구니의 슈고(守護) 등의 요직에 임명하였다. 이들 중 기라 씨 ・ 시바 씨 ・ 하타케야마 씨 등은 역대 아시카가 종가 당주의 서형(庶兄)을 조상으로 삼고 종가로부터 독립하여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으로 인정받아 임관되었고, 아시카가 씨 종가는 그들에 대하여 아직 적류(嫡流)로서의 지위를 충분히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북조 동란 아래서 급격히 힘을 가지게 된 아시카가 씨 일족은 종가 당주(다카우지-요시아키라 부자)의 의향에 충실하지 않았으며, 종가에 대한 반란이나 남조로의 이반 등이 잇따랐다.[72] 다카우지는 정실 소생으로 요절했던 아시카가 다카요시의 서제(庶弟)로 본래 아시카가 종가의 가독을 이어받을 입장이 아니었다.[73] 이마가와 사다요는 『난태평기』에서 조부 모토우지(이마가와 씨 2대 당주) 이전의 역사는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면서, 막부 성립에도 일족 내에서 다카우지의 계통을 종가 ・ 적류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나 이마가와 씨가 다른 서류와는 달리 종가에 충실한 입장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로마치 막부는 늘 존망의 위기에 서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다카우지의 손자인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시대에 이르러 남북조 합일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지만, 혼란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능한 통치를 하자, 1335년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배신하여 북조를 세웠다. 1392년, 남조는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항복했다.[3]
2. 3. 무로마치 막부 쇼군가(将軍家)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유력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들의 세력을 깎고 중국 명나라로부터 「일본국왕」(日本国王)으로 책봉받아 막부의 안정화와 전성기를 구축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승려 소아와 하카타 상인 고에토미를 파견하여 교역을 추진했다.[5] 요시미쓰 사후 쇼군의 권력은 약화되고 슈고 다이묘들의 대두가 현저해졌다.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쇼군 권력 강화를 꾀했으나 가키쓰의 난으로 암살당했다.[6] 아시카가 요시마사 시대에 오닌의 난이 발생하여 무로마치 막부는 일개 지방 정권으로 전락했다.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에 의해 쇼군에서 쫓겨났다 (메이오 정변).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쇼군 권력 부활을 꾀했으나 미요시 산닌슈 등에 의해 암살되었다 (에이로쿠의 변).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옹립되어 제15대 쇼군이 되었으나, 노부나가와 대립하다 추방되어 무로마치 막부는 종언을 맞이했다.[7] 요시아키의 아들 요시히로 대에 아시카가 쇼군가의 직계는 끊어졌다.3. 간토쿠보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는 간토 지배를 위해 가마쿠라 구보(鎌倉公方)로 파견되었다. 모토우지 사후 그 자손은 교토의 무로마치 막부 쇼군가와 대립, 항쟁했다.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충돌하여 자결 (에이쿄의 난)했고, 가마쿠라 구보 가문은 멸망했다.
요시노리 사후,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제5대 가마쿠라 구보로 부활했으나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씨와 대립, 고가 구보(古河公方)를 칭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동생 아시카가 마사토모에서 비롯된 호리고에 구보가는 호조 소운에 의해 멸망했다. 아시카가 마사우지의 둘째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에서 비롯된 오유미 구보가는 호조 우지쓰나에 의해 멸망했다.
아시카가 구니토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간토 구보로 아시카가 집안 재흥을 허락받고, 기쓰레가와 씨로 개칭하여 에도 시대에 존속했다.
3. 1. 아시카가 씨의 귀족성 상실과 하극상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무로마치 막부 성립 후, 의례 정비 등을 통해 아시카가 씨 일문의 귀족성을 높였다. 오닌의 난 이후, 무로마치 막부는 신분 질서의 벽을 무너뜨리고, 신뢰할 수 있는 자 또는 능력이 있는 자를 발탁하여 막부 재건을 도모했다. 이러한 조치는 아시카가 씨 일문의 귀족성을 잃게 했고, 아시카가 쇼군 가문이나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45][46][47] 고호조 씨의 지배 하에 놓이면서도 의례적인 질서 유지를 인정받은 고가쿠보는, 아시카가 씨의 귀족성이 간토 지방에서 유효했기 때문에 중앙보다 연명할 수 있었다.4. 역대 도료(棟梁,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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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쇼군
아시카가 씨는 1333년부터 1573년까지 15명의 쇼군을 배출했다.[4] 그중에는 다른 쇼군보다 더 강력하거나 두드러진 인물도 있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아시카가 씨의 3대 쇼군이었다. 그는 아시카가 막부를 강력하고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1392년 남조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예술 후원으로도 유명하며, 1397년에 금각사를 건설했다. 요시미쓰는 또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확대했다. 요시미쓰는 1401년 승려 소아와 하카타 상인 고에토미가 이끄는 사절단을 명나라에 파견했다. 그들은 황제에게 화해를 위한 건의서와 말, 부채, 금, 병풍, 종이, 칼, 갑옷, 그리고 벼루 등을 포함한 수많은 선물을 가지고 갔다. 이 임무는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다음 해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명나라 사절단이 소아와 고에토미와 함께 돌아와 요시미쓰에게 공식적인 황제의 중국 달력과 그를 "일본 국왕"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혹은 임명)하는 문서를 전달했다.[5]
요시미쓰가 죽은 후, 아시카가 막부는 권력과 영향력을 잃었다. 1429년,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요시미쓰의 정책을 채택하여 막부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는 군사력을 증강시키려 했지만 반대에 직면했다. 그의 12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4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추진했던 일본과 중국 간의 외교 관계와 무역이 재개되었다.[6]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15대이자 마지막 쇼군이었다. 그는 1568년 장군 오다 노부나가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경쟁 관계가 생겨난 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물리치고 교토에서 추방했다. 이것은 1573년에 아시카가 씨의 통치를 사실상 종식시켰다.[7]
순서 | 이름 |
---|---|
1 | 아시카가 다카우지 |
2 | 아시카가 요시아키라[11] |
3 | 아시카가 요시미쓰[12] |
4 | 아시카가 요시모치[13] |
5 | 아시카가 요시카즈[14] |
6 | 아시카가 요시노리[15] |
7 | 아시카가 요시카쓰[16] |
8 | 아시카가 요시마사[17] |
9 | 아시카가 요시히사[18] |
10 | 아시카가 요시타네[19] |
11 | 아시카가 요시즈미[20] |
12 | 아시카가 요시하루[21] |
13 | 아시카가 요시테루[22] |
14 | 아시카가 요시히데[23] |
15 | 아시카가 요시아키[24] |
6. 계보
모치우지
츠구토시
미츠야기 모치키요?
마사토모
요시유이
나가야마 요시자이?
니시야마 시게유키
혼다 토시히사
요시이
스기 토시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