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마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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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카마츠 씨는 무라카미 겐지의 후손인 미나모토노 스에스에에서 시작된 씨족으로, 가마쿠라 시대에 하리마국 지토직을 얻은 아카마츠 이에노리부터 아카마츠 씨를 칭했다. 겐코의 난에서 고다이고 천황을 지지하며 무로마치 막부 수립에 기여했으나, 가키쓰의 난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센고쿠 시대에는 하리마의 유력한 슈고 다이묘였으나,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패배로 쇠퇴하여 멸망했다. 분가에서는 하타모토, 다이묘를 배출했으며, 남작 가문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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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요도의 씨족 - 벳쇼씨
아카마츠 가신에서 센고쿠 다이묘로 독립한 벳쇼씨는 벳쇼 나리하루 시대에 하리마 8군을 지배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손자 벳쇼 나가하루 대에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멸망당한 후, 벳쇼 시게무네가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어 가문을 잇고 그의 후손은 에도 막부 시대에 야기 번을 다스리거나 하타모토로 활동했다. - 아코군 - 가미고리정
가미고리정은 효고현 남서부에 위치한 자치체로, 하리마 과학 공원 도시의 일부이며 치구사가와를 중심으로 "물의 고향"으로 지정되었고, 아카마쓰 씨의 근거지였으며, 현재는 농업과 경공업을 기반으로 히메지시의 베드타운으로 변화하고 있다. - 아코군 - 시오야촌 (효고현)
시오야촌은 1889년에 발족하여 하리마나다에 접해 있었고 오쓰강이 흐르는 지역이었으며, 1937년에 아코정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아카마츠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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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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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아카마츠 (赤松) |
로마자 표기 | Akamatsu-shi |
본거지 | 하리마국 |
가문 | 미나모토 씨 (무라카미 겐지) |
주요 가문 | 다양함 |
역사 | |
창시자 | 아카마츠 이에노리 |
최종 통치자 | 알 수 없음 |
설립 연도 | 알 수 없음 |
해산 연도 | 알 수 없음 |
통치 종료 시기 | 알 수 없음 |
가문 구성원 | |
주요 인물 | 아카마츠 노리무라 아카마츠 미츠스케 아카마츠 마사노리 |
분가 | 셋츠 아리마 씨 벳쇼 씨 우에즈키 씨 우노 씨 코데라 씨 야마다 씨 신멘 씨 하리마 후쿠하라 씨 이시노 씨 아카기 씨 |
2. 역사
아카마츠 씨는 센고쿠 시대 하리마의 유력한 슈고-다이묘였다.
1366년 아카마츠 엔신이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동맹하여 가마쿠라 막부에 대항하면서 아카마츠 씨족이 설립되었다. 아시카가 막부 시대에 ''사무라이도코로''를 이끌 자격을 얻은 4 가문 중 하나였다.[2] 엔신은 겐코의 난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모리나가 친왕의 영지를 받아 가장 먼저 거병하여 겐무 신정 수립에 큰 공을 세웠다. 닛타 요시사다의 세력을 시라하타성에서 묶어두었고,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승리에 기여하는 등 무로마치 막부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오닌의 난 (1467–1477) 동안, 아카마츠 마사노리는 호소카와 씨족의 주요 장군 중 한 명이었다.[3]
15세기 아카마츠 미쓰마사 등 서류를 우대하고 본가를 냉대하던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1441년 아카마츠 미쓰스케 부자에게 암살당하는 가키쓰의 난이 일어났다. 미쓰스케는 막부군의 추토를 받아 자결하고, 아카마츠 씨의 세력은 약화되었다.[1]
1457년, 아카마츠 씨의 유신이 삼종신기의 신지를 되찾아 아카마츠 마사노리 때 가가 반국의 슈고가 되어 재흥했다. 오닌의 난에서는 호소카와 가쓰모토 편에 서서 하리마·비젠·미마사카 3개국 슈고로 부활했다.[2]
센고쿠 시대에 마사노리가 종삼위(従三位)로 승진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1496년 마사노리가 급사하고 사위 아카마츠 요시무라가 뒤를 이었다. 요시무라는 권력 강화를 도모했지만, 우라가미 무라무네와의 갈등으로 1521년 암살당하고, 아들 아카마츠 하루마사는 무라무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3]
1531년 하루마사는 오모노 붕괴로 무라무네를 쳐부쉈지만, 아마고 하루히사의 침략으로 아와지 국으로 도망쳤다. 이후 막부의 지원으로 영토를 탈환했지만, 1554년 미요시 나가요시의 침공으로 히가시하리마를 빼앗겼다. 1558년에는 아들 아카마츠 요시스케와의 대립에서 패배하여 가독을 빼앗겼다.[4]
요시스케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따르지 않고 저항했지만, 1568년 노부나가가 상락(上洛)한 후 시바타 가쓰이에 등 오다 군에 의해 하리마 국은 노부나가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요시스케는 1576년 사망하고, 아들 아카마츠 노리후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라 하리마 오키시오에 1만 석을 받았다.[5]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리후사의 아들 노리히데는 서군에 가담했기 때문에 자결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아카마쓰 일족인 다지마 다케다 성 성주 사이무라 마사히로는 서군에서 동군으로 전향했지만, 서군에 가담한 미야베 나가후사의 거성 돗토리 성을 공격할 때 너무 심하게 성 아래 마을을 불태운 것을 이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결을 명받았다.[1]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향을 권유한 카메이 코레노리에게 책임을 전가한 억울한 누명이라는 설이 강하다. 서군에서 동군으로 전향한 다이묘 중에서 사형을 당한 것은 사이무라 마사히로 뿐이다.
신멘 씨족은 아카마츠 씨의 분가였다.[4]
2. 1. 가마쿠라 시대 이전
존비분맥 등에 따르면, 아카마츠 씨는 무라카미 겐지·호리카와 대납언사다후사의 손자인 미나모토노 스에스에에서 시작되었으며, 스에스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스에후사(스에카타라고도 함)가 하리마국 사요 장으로 유배된 후, 그 후손인 노리이에가 겐큐 연간에 호조 요시토키의 사위가 된 인연으로 아카마츠 촌 지토 직에 임명된 것에서부터, 자식인 이에노리가 아카마츠 씨를 칭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스에후사에서 노리이에까지 7대나 되므로, 나와 씨와 마찬가지로 신빙성에 대한 찬반이 있다 (다만 모든 서적에 무라카미 겐지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잠시 이 설을 따른다. 또한, 미나모토노 스에후사(1156년 사망)가 미나모토노 스에스에(1188년 출생)의 아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미나모토노 스에후사는 미나모토노 아키후사(1037년 - 1094년)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또한, 미카와국쓰쿠데의 오쿠다이라 씨는 아카마츠 씨의 후예라고 칭했다.2. 2. 가마쿠라 시대 ~ 무로마치 시대
아카마츠 노리무라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동맹하여 1366년 가마쿠라 막부에 대항하면서 아카마츠 씨족을 설립하였다. 아카마츠 씨는 아시카가 막부 시대에 ''사무라이 도코로''를 이끌 자격을 얻은 4 가문 중 하나였다.[2]아카마츠 엔신은 겐코의 난에서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모리나가 친왕 (다이토노미야)의 영지를 받아 가장 먼저 거병하여, 겐무 신정 수립에 큰 공을 세워 하리마국 수호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모리나가 친왕이 황위 찬탈 혐의로 실각하고 하리마국을 몰수당하자, 아시카가 타카우지 편에 섰다.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규슈로 물러나는 동안 닛타 요시사다의 세력을 아코군 시라하타성에서 묶어두었고, 엔겐 원년/겐무 3년 (1336년)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타카우지의 승리에 기여했다.
엔신의 셋째 아들 노리스케는 무로마치 막부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와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보좌했다. 교토가 남조 측에 일시 점령되었을 때, 어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자신의 거성에 피난시켜 보호하는 등 무로마치 막부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그 공으로 사카모토성을 수호소로 하여 하리마 1국의 수호에 임명되었고, 교고쿠 씨, 잇시키 씨, 야마나 씨와 함께 사직 가문 중 하나가 되어 막정에 참여했다.
엔신의 장남 노리스케에게는 셋쓰국, 차남 사다노리에게는 미마사카국, 셋째 아들 노리스케에게는 비젠국 수호직이 주어져 4개국 수호를 담당했다. 다만, 셋쓰 수호는 노리스케의 아들 미쓰노리 대에 소환되어, 이후 노리스케 계통은 서류가 되어 "시치조 아카마츠 가"를 칭했다. 시치조 가는 후손 아카마츠 요시무라가 아카마츠 마사노리의 후계자가 되어 종가로 복귀했다.
오닌의 난 (1467–1477) 동안, 아카마츠 마사노리는 호소카와 씨족의 주요 장군 중 한 명이었다.[3]
2. 3. 가키쓰의 난과 그 이후
15세기에 들어 아카마츠 미쓰마사 등 서류를 우대하고 본가를 냉대하던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1441년 아카마츠 미쓰스케 부자에게 암살당하는 가키쓰의 난이 일어났다. 미쓰스케는 막부군의 추토를 받아 자결하고, 아카마츠 씨의 세력은 약화되었다.[1]1457년, 아카마츠 씨의 유신이 삼종신기의 신지를 되찾아 아카마츠 마사노리 때 가가 반국의 슈고가 되어 재흥했다. 오닌의 난에서는 호소카와 가쓰모토 편에 서서 하리마·비젠·미마사카 3개국 슈고로 부활했다.[2]
센고쿠 시대에 마사노리가 종삼위(従三位)로 승진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1496년 마사노리가 급사하고 사위 아카마츠 요시무라가 뒤를 이었다. 요시무라는 권력 강화를 도모했지만, 우라가미 무라무네와의 갈등으로 1521년 암살당하고, 아들 아카마츠 하루마사는 무라무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3]
1531년, 하루마사는 오모노 붕괴로 무라무네를 쳐부쉈지만, 아마고 하루히사의 침략으로 아와지 국으로 도망쳤다. 이후 막부의 지원으로 영토를 탈환했지만, 1554년 미요시 나가요시의 침공으로 히가시하리마를 빼앗겼다. 1558년에는 아들 아카마츠 요시스케와의 대립에서 패배하여 가독을 빼앗겼다.[4]
요시스케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따르지 않고 저항했지만, 1568년 노부나가가 상락(上洛)한 후 시바타 가쓰이에 등 오다 군에 의해 하리마 국은 노부나가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요시스케는 1576년 사망하고, 아들 아카마츠 노리후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라 하리마 오키시오에 1만 석을 받았다.[5]
2. 4. 센고쿠 시대
센고쿠 시대 아카마츠 씨는 하리마의 유력한 슈고-다이묘였다.[2]15세기에 들어서면서, 에이쿄 원년(1429년)에 하리마의 토호 잇키가 발생하는 등 그 지배력에 점차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 시대에는 아카마츠 미쓰마사나 아카마츠 사다무라와 같은 서류를 우대하고, 본가인 아카마츠 미쓰스케·노리야스 부자를 냉대했다. 가키 원년(1441년), 미쓰스케 부자는 요시노리를 자택에서 암살하고 하리마로 귀국했다. 이 가키의 난으로 야마나 모치토요(소젠)을 중심으로 한 막부군의 추토를 받아 미쓰스케는 성산성에서 자결하고 노리야스도 살해당했다. 삼국의 슈고직은 야마나 씨가 승계했다. 분안 2년(1445년)에 미쓰마사가 소젠에게 토벌당하고, 교토쿠 4년(1455년)에는 아카마츠 노리히사가 거병했지만 소젠에게 패해 자결했다.[3]
초로쿠 원년(1457년), 아카마츠 씨의 유신이 킨케츠의 변 (가키 3년(1443년))에서 고난조에 빼앗긴 삼종의 신기의 신지를 되찾아 남조 황손을 토벌했다(초로쿠의 변). 이로 인해 아카마츠 마사노리 (미쓰스케의 종손) 때 가가 반국의 슈고가 되어 재흥을 이루었다. 오닌의 난에서는 호소카와 가쓰모토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하리마·비젠·미마사카 3개국 슈고로 부활했고, 초쿄 2년(1488년)에는 야마나 씨의 세력을 하리마에서 구축했다. 본거지를 오키시오성으로 옮긴 것도 이때이다.
2. 5. 쇠퇴와 몰락
아카마츠 노리스케의 후손 우지미츠는 이시노 성을 받아 표면적으로 이시노 씨를 칭하고, 벳쇼 나가하루의 부장으로서 하시바 히데요시 휘하의 후루타 시게노리를 미키성 공방전에서 죽이는 등 활약했다. 성이 함락된 후에는 총격 솜씨를 인정받아 히데요시, 마에다 토시이에에게 불려가 3천 석을 받았다.우지미츠의 아들 우지오키는 도쿠가와 가문의 하타모토가 되어 가즈사국에서 2천 석을 얻었고, 노리야스 대(호에이 연간)에 아카마츠 씨로 돌아와 5천 석의 요리아이 하타모토로서 막부 말기까지 존속했다. 우지미츠로부터 10대손인 노리타다는 쇼인반토, 코부쇼 부교, 오소바고요토리츠기, 가이코쿠부교 등을 역임했다. 노리타다의 아들 노리치카는 군함부교를 지냈다. 가즈사국 시모유 강에 진야를 쌓고, 보리사 료진지(시나가와구)에 우지오키의 방이었던 쵸안인이 참근교대 때 개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에도 중기까지 코타이요리아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리후사의 아들 노리히데는 서군에 가담했기 때문에 자결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아카마쓰 일족인 다지마 다케다 성 성주 사이무라 마사히로(아카마쓰 히로히데)는 서군에서 동군으로 전향했지만, 서군에 가담한 미야베 나가후사의 거성 돗토리 성을 공격할 때 너무 심하게 성 아래 마을을 불태운 것을 이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결을 명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향을 권유한 카메이 코레노리에게 책임을 전가한 억울한 누명이라는 설이 강하다. 서군에서 동군으로 전향한 다이묘 중에서 사형을 당한 것은 사이무라 마사히로의 사례뿐이다. 사이무라 마사히로의 자손은 다지마 국에서 대대로 요이다 마을의 촌장을 했으며, 번주로부터 70석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마사히로의 동생인 아카마쓰 스케타카는 형의 죽음 후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후에 오사카 전투 때 낭인으로 오사카 성에 입성하여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는 멸망했다. 스케타카 일당은 하리마로 도망쳐, 마찬가지로 오사카 편이었던 하리마 시마즈 씨의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 등과 함께 다이가쿠지에 농성했지만, 이케다 도시타카의 군에게 공격을 받아 할복했다. 적자는 한다 산에서 귀농하여 향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다이묘로서의 아카마쓰 씨는 멸망했다.
2. 6. 종가 멸망과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리후사의 아들 노리히데는 서군에 가담했기 때문에 자결해야 했다. 아카마츠 일족으로 타지마 타케다성 성주였던 사이무라 마사히로(아카마츠 히로스에)는 서군에서 동군으로 전향했지만, 서군에 가담한 미야베 나가후사의 거성 돗토리성을 공격할 때, 죠카마치(성 아래 마을)를 심하게 불태웠다는 이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자결 명령을 받았다. 이는 카메이 코레노리에게 책임이 전가된 누명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군에서 동군으로 전향한 다이묘 중 사형을 당한 것은 사이무라 마사히로가 유일하다. 사이무라 마사히로의 후손들은 타지마국에서 대대로 소노다무라의 촌장을 지냈으며, 번주로부터 70석을 받았다고 한다.사이무라 마사히로의 동생 아카마츠 스케타카는 형 사후, 전국을 유랑하다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낭인으로서 오사카성에 입성,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으나 도요토미씨는 멸망했다. 아카마츠 스케타카 일당은 하리마로 도망쳐 하리마 시마즈씨의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 등과 함께 다이가쿠지에 틀어박혔다가, 이케다 토시타카 군의 공격을 받고 할복했다. 적남은 한다산에 귀농하여 향장(郷長)이 되었다. 이로써 다이묘로서의 아카마츠 씨는 멸망했다.
2. 6. 1. 하타모토 아카마츠 가
아카마츠 노리스케의 후예 우지미츠는 이시노 성을 부여받아 표면적으로는 이시노 씨(石野氏)를 칭하고, 벳쇼 나가하루의 부장으로서 하시바 히데요시 휘하의 후루타 시게노리(후루타 시게나리의 형)를 미키 성 공방전에서 토벌하는 등 활약을 펼쳤다. 성이 함락된 후, 총격 솜씨를 인정받아 히데요시, 마에다 토시이에에게 불려가 3천 석을 받았다.우지미츠의 아들 우지오키는 도쿠가와 가문의 하타모토가 되어 카즈사국 내에 2천 석을 얻고, 노리야스 대(호에이 연간)에 아카마츠 씨로 돌아와 5천 석의 요리아이 하타모토로서 막부 말기까지 존속했다. 우지미츠로부터 10대손인 노리타다는 쇼인반토, 코부쇼 부교, 오소바고요토리츠기, 가이코쿠부교 등을 역임했다. 노리타다의 아들 노리치카는 군함부교를 지냈다. 카즈사국 시모유 강에 진야를 쌓고, 보리사인 료진지(시나가와 구)에 우지오키의 방이었던 초안인이 참근교대 때 개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에도 중기까지 코타이요리아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 6. 2. 아리마 가
아리마 가일본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던 노리히데가 자결하고, 다지마 다케다 성 성주 사이무라 마사히로(아카마쓰 히로히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자결을 명받아 몰락했다. 사이무라 마사히로의 자손은 다지마 국에서 촌장을 지냈으며, 번주로부터 70석을 받았다고 한다.마사히로의 동생 아카마쓰 스케타카는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으나, 도요토미 씨가 멸망하자 다이가쿠지에 농성하다 할복했다. 이로써 다이묘로서의 아카마쓰 씨는 멸망했다.
아카마츠 요시노리의 서류 후손인 노리요시는 막말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약하며 일본 해군의 아버지로 남작 작위를 받고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2. 6. 3. 아카마츠 남작 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리후사의 아들 노리히데는 서군에 가담했기 때문에 자결해야 했다.[1] 마찬가지로 아카마쓰 일족인 다지마 다케다 성 성주 사이무라 마사히로(아카마쓰 히로히데)는 서군에서 동군으로 전향했지만, 서군에 가담한 미야베 나가후사의 거성 돗토리 성을 공격할 때 너무 심하게 성 아래 마을을 불태운 것을 이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자결을 명받았다.[1] 이 건에 관해서는 전향을 권유한 카메이 코레노리에게 책임을 전가한 억울한 누명이라는 설이 강하다.[1] 서군에서 동군으로 전향한 다이묘 중에서 사형을 당한 것은 사이무라 마사히로의 사례뿐이다.[1] 사이무라 마사히로의 자손은 다지마 국에서 대대로 요이다 마을의 촌장을 했으며, 번주로부터 70석을 받았다고 전해진다.[1]마사히로의 동생인 아카마쓰 스케타카는 형의 죽음 후 전국을 떠돌아다녔다.[1] 후에 오사카 전투 때 낭인으로 오사카 성에 입성하여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섬겼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씨는 멸망했다.[1] 스케타카 일당은 하리마로 도망쳐, 마찬가지로 오사카 편이었던 하리마 시마즈 씨의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 등과 함께 다이가쿠지에 농성했지만, 이케다 도시타카의 군에게 공격을 받아 할복했다.[1] 적자는 한다 산에서 귀농하여 향장이 되었다.[1] 이로 인해 다이묘로서의 아카마쓰 씨는 멸망했다.[1]
3. 역대 당주
- 아카마츠 이에노리
- 아카마츠 히사노리
- 아카마츠 시게노리
- 아카마츠 노리무라 (1277–1350)[5]
- 아카마츠 노리스케
- 아카마츠 노리스케 (1314–1371)[5][6]
- 아카마츠 요시노리
- 아카마츠 미쓰스케 (1381–1441)[7]
- 아카마츠 사다우라[7]
- 아카마츠 마사노리 (1577년 사망)
- 아카마츠 요시무라
- 아카마츠 하루마사
- 아카마츠 요시스케
- 아카마츠 노리후사 (1559–1598)
- 아카마츠 노리히데
- 아카마츠 노리에
아카마츠 노리모토의 후예인 우지만은 이시노성을 받으면서 겉으로는 이시노 씨를 칭하며, 벳쇼 나가하루의 부장으로서 하시바 히데요시 휘하의 후루타 시게노리(후루타 오리베의 형)를 미키성 공방전에서 쳐부수는 등 활약했다. 함락 후 총격 솜씨를 평가받아 히데요시, 마에다 토시이에에게 불려 3000석 이상을 받았다.
우지만의 아들인 우치오키는 도쿠가와 가문의 하타모토가 되어 가즈사국 내에서 2000석 이상을 얻었으며, 노리야스 시대(호에이 연간)에 아카마츠 성으로 복귀하여 5000석 이상의 요리아이 하타모토로서 막말까지 존속했다. 우지만으로부터 10대손에 해당하는 노리타다는 쇼인반두・고부쇼 봉행・오소바고용토리츠기・가이코쿠부교 등을 역임했다. 노리타다의 아들인 노리시즈는 군함 봉행을 맡았다. 가즈사국 시모유에에 진야를 쌓았고, 보리사인 료신지(시나가와구)에 우치오키의 부인이었던 조안인이 산킨코타이 때 개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에도 시대 중기까지 고타이요리아이였다고 추정된다.
4. 아카마츠 가 일족
아카마츠 가문의 일족은 다음과 같다.
- 아카마츠 노리무라(1277–1350).[5]
- 아카마츠 노리스케(1314–1371).[5][6]
- 아카마츠 미쓰스케(1381–1441).[7]
- 아카마츠 사다우라[7]
- 아카마츠 마사노리(1577년 사망)
- 아카마츠 요시스케
- 아카마츠 노리후사(1559–1598)
아카마츠 노리모토의 후예인 우지만은 이시노 성을 받으면서 겉으로는 이시노 씨를 칭하며, 벳쇼 나가하루의 부장으로서 미키성 공방전에서 후루타 시게노리(후루타 오리베의 형)를 쳐부수는 등 활약했다. 함락 후 총격 솜씨를 인정받아 마에다 토시이에에게 불려 3,000석 이상을 받았다.
우지만의 아들인 우치오키는 도쿠가와 가문의 하타모토가 되어 가즈사국 내에서 2,000석 이상을 얻었으며, 노리야스 시대에 아카마츠 성으로 복귀하여 5,000석 이상의 요리아이 하타모토로서 막말까지 존속했다. 우지만으로부터 10대손에 해당하는 노리타다는 쇼인반두・고부쇼 봉행・오소바고용토리츠기・가이코쿠부교 등을 역임했다. 노리타다의 아들인 노리시즈는 군함 봉행을 맡았다. 가즈사국 시모유에에 진야를 쌓았고, 보리사인 료신지(시나가와구)에 우치오키의 부인이었던 조안인이 산킨코타이 때 개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에도 시대 중기까지 고타이요리아이였다고 추정된다.
4. 1. 주요 가신단
주요 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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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가미 노리무네 | 우라가미 무라무네 | 후쿠하라 스케나리 |
고데라 마사모토 | 고데라 노리모토 | 고데라 마사타카 |
벳쇼 나리하루 | 벳쇼 노리하루 | 히라노 타다카츠 |
5. 계보
무라카미 겐지 사다후사의 손자인 미나모토노 스에스에에서 시작되었으며, 스에스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스에후사 (스에카타라고도 함)가 하리마국 사요 장으로 유배된 후, 그 후손인 노리이에가 겐큐 연간에 호조 요시토키의 사위가 된 인연으로 아카마츠 촌 지토 직에 임명된 것에서부터, 자식인 이에노리가 아카마츠 씨를 칭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스에후사에서 노리이에까지 7대나 되므로, 나와 씨와 마찬가지로 신빙성에 대한 찬반이 있다 (다만 모든 서적에 무라카미 겐지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잠시 이 설을 따른다. 또한, 미나모토노 스에후사 (1156년 사망)가 미나모토노 스에스에 (1188년 출생)의 아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미나모토노 스에후사는 미나모토노 아키후사 (1037년 - 1094년)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또한, 미카와국쓰쿠데의 오쿠다이라 씨는 아카마츠 씨의 후예라고 칭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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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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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赤松氏
202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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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君津市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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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兵庫県史
兵庫県
197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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