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역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일랜드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고대, 기독교 전파, 바이킹과 노르만의 침략, 잉글랜드의 식민 지배와 저항, 독립 전쟁을 거쳐 아일랜드 공화국 수립과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를 포함한다. 고대 시대에는 켈트 문화가 형성되었고, 기원후 400년경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드루이드교가 쇠퇴했다. 800년경부터 바이킹의 침략이 시작되었고, 12세기에는 노르만족이 아일랜드를 침략하여 지배력을 확대했다. 16세기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재정복하고 종교개혁을 통해 가톨릭과 갈등을 겪었으며, 이후 잉글랜드의 식민 지배가 강화되었다. 19세기에는 독립 운동이 시작되어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었고, 1949년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북아일랜드는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에 따라 분리되어 연합주의자 정부가 통치했으며, 이후 북아일랜드 문제로 분쟁이 지속되었다. 현재 아일랜드는 경제 발전을 이루었지만, 과거 종교적 갈등과 분단의 역사를 안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일랜드의 역사 -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은 1858년 제임스 스티븐스와 존 오마호니가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창설한 비밀 결사 조직으로,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 페니언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여러 사건에 연루되고 부활절 봉기를 주도, 아일랜드 독립 전쟁에도 참여했으나 앵글로-아일랜드 조약 체결 후 분열되어 1924년 해산되었다. - 아일랜드의 역사 - 아일랜드의 연합주의
아일랜드의 연합주의는 아일랜드가 영국과의 연합을 유지해야 한다는 정치적 이념으로, 1800년 연합법 이후 아일랜드 의회 폐지로부터 시작되어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며 변화해왔으며, 특히 얼스터 지역을 중심으로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고, 북아일랜드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했으나 현재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역사 | |
---|---|
지도 | |
역사 | |
위치 | 아일랜드 섬 |
역사적 시대 | 선사 시대, 중세, 근세, 근대 |
주요 사건 | 신석기 혁명 켈트족 이주 기독교 전파 바이킹 침공 노르만 침공 잉글랜드의 지배 아일랜드 독립 전쟁 북아일랜드 분쟁 |
선사 시대 | |
시기 | 기원전 10500년경 - 기원전 4세기 |
주요 유적 | 뉴그레인지 다운패트릭 헤드 브루나보인 |
초기 역사 (원사 시대) | |
시기 | 기원전 4세기 - 5세기 |
특징 | 켈트 문화 발달 부족 국가 시대 드루이드교 성행 |
중세 시대 | |
시기 | 5세기 - 15세기 |
주요 사건 | 기독교 전파 바이킹 침공 노르만 침공 잉글랜드의 지배 시작 |
근세 시대 | |
시기 | 16세기 - 18세기 |
주요 사건 | 종교 개혁 영향 아일랜드 반란 윌리엄 전쟁 |
근대 시대 | |
시기 | 19세기 - 현재 |
주요 사건 | 아일랜드 대기근 아일랜드 독립 운동 아일랜드 독립 전쟁 아일랜드 공화국 건국 북아일랜드 분쟁 |
주요 인물 | |
종교 | 성 파트리치오 성 콜룸바 |
정치가/군인 | 브라이언 보루 로리 오툴 휴 오닐 마이클 콜린스 에이먼 데 발레라 |
기타 | |
관련 주제 | 아일랜드의 정치 아일랜드의 문화 아일랜드의 경제 |
2. 고대와 기독교 전파 (기원전 8000년 - 기원후 800년)
이 넬 왕조의 군주 니얼 노이기얼러흐(450년 또는 455년 사망)는 아일랜드 서부, 북부, 중부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700년대까지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했으며, 수많은 부족과 왕국이 합병되어 사라졌다. 아일랜드 해적들은 브리튼섬 서부 해안 전역에서 약탈을 자행했고, 훗날 바이킹에게 아일랜드 해안 전역을 약탈당했다. 이들 중 일부는 픽틀랜드, 웨일스, 콘월 등지에 새로운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렌스터 남부의 아타코티족은 300년대 후반까지 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고용되었다.[98]
브리튼섬과 갈리아 지역에서 노획한 재화와 노예를 통해 기독교 신앙이 아일랜드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파트리치오 이전에 이미 여러 선교사들이 아일랜드에서 활동했다는 초기 자료도 있다.[99] 전통적으로 423년 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퀴타니아의 프로스페르는 431년 교황이 팔라디우스를 "아일랜드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최초의 주교"로 파견했다고 기록했다. 이는 당시 아일랜드에 이미 상당수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라디우스는 주로 렌스터의 미데 왕국에서 활동했고, 본격적인 기독교화는 성 파트리치오에 의해 시작되었다.
성 파트리치오는 아일랜드 부족들을 개종시키고, 기독교 교리에 따르도록 했으며, 로마자를 도입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켈트족 구전 문학을 로마자로 기록했다. 그러나 성 파트리치오와 아일랜드 기독교 전파 사이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학자들은 성 파트리치오 사후 수세기에 걸쳐 관련 전설들이 형성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99]
기독교 확산으로 드루이드교는 붕괴되었다.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 대한 기독교 전파의 중심지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했고, 많은 수도사들이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기 위해 아일랜드 수도원을 방문했다.
684년 노섬브리아 왕국의 에그프리스가 최초로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군대는 곧 물러갔으며, 1169년 노르만 왕조의 침공 전까지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2. 1. 초기 정착과 신석기 문화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2000년)
기원전 8000년경, 중석기 시대 사람들이 아일랜드에 정착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들은 수렵 채집인 생활을 하였으며, 당시 아일랜드와 그레이트 브리튼을 연결하는 육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14,000년경에는 이미 두 섬이 분리되었다고 한다.[9] 기원전 4000년경까지 수렵 채집 생활이 지속되다가, 농업의 시작과 함께 신석기 시대 문화가 형성되었다.신석기 시대에는 도자기, 갈아서 만든 석기, 직사각형 나무집, 거석 무덤이 등장하였고, 가축화된 양과 소가 나타났다.[10] 뉴그레인지와 같은 통로 무덤은 천문학적으로 정렬되어 있으며, 아일랜드 거석 무덤은 돌멘, 코트 카르(court cairn), 통로 무덤, 쐐기형 갤러리 무덤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10] 레인스터와 먼스터에서는 성인 남성을 시스트에 매장하고 장식 도자기를 함께 부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석기 시대 말기에는 원형 제방 울타리와 목재, 석재, 기둥 및 구덩이 원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기념물이 개발되었다.
메이요주 북부 해안에 있는 Céide Fields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광범위한 신석기 시대 유적지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작지를 포함하고 있다.[11][12][13] 이 유적지는 약 5,500년 전(기원전 3500년경)에 만들어졌다.[16]
2. 2. 청동기 시대와 켈트족의 도래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600년)
기원전 2000년경부터 아일랜드에는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과 청동으로 된 장식품, 무기, 도구 등이 제작되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금, 청동으로 만든 장식품을 많이 만들었으며, 이러한 유물들이 현재까지 남아있다.[94]청동기 시대 초기에는 죽은 사람을 작은 석조 시스트나 단순한 구덩이에 매장하고, 그 위에 묘지나 고분(barrow) 또는 카르(cairn)라고 불리는 원형의 흙 또는 석조 무덤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매장 대신 화장이 이루어졌고, 중기 청동기 시대에는 유해를 큰 매장 항아리 아래에 안치하는 풍습이 생겼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저장된 무기가 증가했는데, 이는 전쟁이 더 많아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 이 시기에는 늪에서 시신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늪 시신은 철기 시대까지 이어진다.[17]
기원전 600년경부터는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17세기 이후 언어학자들은 아일랜드의 언어를 켈트어 계통인 고이델어로 분류하였다. 청동기 시대 이후 형성된 켈트 문화는 오늘날까지 아일랜드의 주요 문화적 특성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최근의 유전학적 조사에서는 켈트 문화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점차 흡수되었다는 가설이 지지를 받고 있다.[94]
2. 3. 철기 시대와 고대 왕국 (기원전 600년 - 기원후 400년)
아일랜드의 선사시대 및 기독교 전파 이전의 고대 시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고대 로마의 단편적인 서술이나 신화, 현존하는 몇몇 유적으로 그 모습을 추정할 뿐이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인류 생활의 흔적은 기원전 8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일랜드에 살았던 사람들은 중석기를 사용하였다. 기원전 4000년경 신석기 문화가 아일랜드의 남서쪽에 유입되었다. 당시 형성된 석묘가 뉴그레인지 등에 남아있다.
기원전 2000년경부터 청동기를 사용하였고 철기 시대는 기원전 6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철기 시대에 이르러 역사 기록에 아일랜드의 고대 왕국들이 등장하며 다수의 고대 왕국들이 아일랜드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일랜드 고대 왕국의 지배 계급은 전사와 드루이드를 포함한 지도자들이었다.
17세기 이후 언어학자들은 아일랜드의 언어를 켈트어 계통인 고이델어로 분류하였다. 청동기 시대 이후 형성된 켈트 문화는 오늘날까지 아일랜드의 주요 문화적 특성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2. 4. 기독교의 전파 (기원후 400년 - 기원후 800년)
아일랜드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된 초기 경로는 확실하지 않으나, 부유한 용병, 상인, 또는 브리튼이나 갈리아에서 잡혀온 노예들을 통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자료에 따르면 성 파트리치오 이전에 이미 아일랜드 남부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이 있었다.[99] 전통적으로 432년 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도착하여 기독교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 파트리치오의 자서전 ''고백''은 초기 아일랜드 역사 문서 중 하나로, 성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30]
그러나 아퀴타니아의 프로스페르의 기록에 따르면, 431년 교황은 팔라디우스를 "그리스도를 믿는 아일랜드인들의 첫 번째 주교"로 파견하였다.[99] 이는 이미 아일랜드에 기독교인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팔라디우스는 레인스터와 미스 왕국에서 주교로 활동한 반면, 파트리치오는 얼스터와 코노트의 이교도들에게 선교사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성 파트리치오는 아일랜드의 법을 보존하고 성문화했으며, 기독교 관습과 충돌하는 법만 변경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로마자를 도입하여 아일랜드 수도승들이 구전 문학을 기록할 수 있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99]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파트리치오와 이러한 업적을 직접 연결하는 증거는 부족하다. 파트리치오에 대한 신화는 그가 죽은 후 몇 세기에 걸쳐 발전했다.[31]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드루이드교는 쇠퇴하였다. 아일랜드 수도원은 라틴어 학습과 기독교 신학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일랜드 선교사들은 잉글랜드와 유럽 대륙에 학습의 개화를 알렸다. 많은 학자들이 아일랜드 수도원을 방문하여 학문을 배웠다. 이들 수도원의 고립성은 중세 초 라틴어 학습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도서 미술 시대에는 채색 필사본, 금속 세공, 조각 등이 번성하여 켈스의 서, 아르다 칼리크, 고대 십자가와 같은 예술 작품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도서 양식은 서유럽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중세 시대: 바이킹과 노르만의 침략 (800년 - 1536년)
8세기 말부터 노르웨이를 근거지로 한 바이킹의 침입이 시작되어 약 200년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의 초기 기독교 문화 발전은 중단되었고, 아일랜드는 전쟁에 시달렸다. 바이킹은 롱십을 타고 항해하며 840년대 초부터 아일랜드 해안에 겨울을 나기 위한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더블린을 포함한 주요 정착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일랜드인들과 섞이게 되었다.
1014년 클론타프 전투에서 아일랜드 군대는 바이킹을 격퇴했지만, 바이킹이 건설한 해안 항구들은 주요 교역로로 남았다. 12세기까지 아일랜드는 여러 소왕국과 대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권력은 지역 왕조의 수장들에 의해 행사되었다. 레인스터의 왕 디어머트 맥 머처다는 코넛의 왕 루아드리 막 타르델바흐 우아 콘코바르에 의해 추방되었고, 헨리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노르만 기사들을 모집했다. 1167년 최초의 노르만 기사들이 아일랜드에 상륙했고, 이후 노르만인, 웨일스인, 플랑드르인 주력이 뒤따랐다.
디어머트는 자신의 왕국을 되찾고 사위인 리처드 드 클레어를 상속자로 지명했지만, 헨리 2세는 경쟁 노르만 국가 수립을 우려하여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했다. 1177년 존 래클랜드 왕자는 옥스퍼드 의회에서 아일랜드 영주로 임명되었다.[40] 아드리안 4세의 교황 칙서 라우다빌리터에 따라 헨리 2세는 1171년 워터포드에 상륙하여 아일랜드 땅을 밟은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헨리는 아들 존에게 '도미누스 히베르니아'(아일랜드 영주) 칭호를 수여했고, 존이 잉글랜드 왕이 되자 아일랜드 영주는 잉글랜드 왕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1261년 칼란 전투에서 피닌 맥카시가 이끄는 켈트족 군대가 노르만 군대를 격파하면서 노르만족의 약세가 뚜렷해졌다.[1] 이후 약 100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고, 지역 아일랜드 영주들은 잃었던 토지를 되찾았다.[1] 1315년 스코틀랜드의 에드워드 브루스가 아일랜드 왕으로 추대되어 침공했지만 패퇴했다.[4]
1348년 흑사병이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도시에 거주하던 잉글랜드인과 노르만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2] 흑사병 이후 아일랜드어와 아일랜드 토착 문화가 다시 세력을 얻었고, 잉글랜드의 통제 영토는 더블린 주변의 페일 지역으로 축소되었다.[5] 15세기 말 장미 전쟁으로 잉글랜드의 중앙 권위는 거의 사라졌고, 아일랜드 영주는 킬데어 백작 피츠제럴드의 손에 넘어갔다.[3]

3. 1. 바이킹의 침략과 정착 (800년 - 1169년)

795년 노르웨이를 본거지로 한 바이킹의 침입이 기록된 이래, 아일랜드에서는 2백여 년에 걸쳐 간헐적인 바이킹의 침입이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 초기 기독교 문화의 발전은 중단되었고 아일랜드는 전쟁에 시달렸다.
바이킹은 롱십을 타고 항해하였으며 840년대 초 아일랜드 해안에 겨울을 나기 위한 정착지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바이킹의 정착지 중 유명한 곳으로는 더블린이 있다. 852년 바이킹은 더블린 만에 상륙하여 요새를 건축하였다. 수세기 후 이들은 아일랜드인과 섞이게 되었다.
한편, 아일랜드의 국왕들은 바이킹에 대항하였으며 이로 인해 바이킹은 아일랜드 전역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1014년 클론타프 전투에서 바이킹은 패퇴하였다. 그러나, 바이킹이 건설한 해안의 항구들은 이후에도 주요 교역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3. 2. 노르만 지배기 (1169년 - 1300년)
12세기경 아일랜드는 여러 왕국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각 왕국의 왕들은 아르드리 칭호를 두고 서로 대립하였다. 코노트의 왕 루어드리 우어 콘코바르가 새로운 아일랜드 대왕이 되면서 렌스터의 왕 디어마이트 맥무로를 추방하였다. 디어마이트는 아키텐으로 도피하여 헨리 2세에게 노르만 기사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1167년 노르만 기사들이 아일랜드에 상륙하였고, 리처드 드 클레어가 이끄는 노르만 기사들은 여러 왕국을 복속시켰다. 헨리 2세는 노르만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아일랜드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다.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칙서 '라우다빌리테르'를 통해 아일랜드를 잉글랜드에 귀속시킨다고 선언하였다. 1171년 헨리 2세는 잉글랜드의 군주로서는 최초로 워터포드에 상륙하여 아들을 존에게 아일랜드 군주(Dominus Hiberniae) 지위를 주어 상속시켰다. 존이 잉글랜드 왕이 되자 아일랜드의 군주 지위는 잉글랜드에 복속되었다.
잉글랜드의 군주의 통치력이 아일랜드 전역에 미치지는 못했다. 존 왕은 얼스터 백작 신설 전까지 얼스터의 왕으로서 군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13세기까지 여러 소국들이 존재하였다. 아일랜드에 정착한 노르만족은 켈트 사회에 둘러싸여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12세기 무렵 아일랜드는 여러 소왕국과 대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레인스터의 왕 디어머트 맥 머처다는 코넛의 왕 루아드리 막 타르델바흐 우아 콘코바르에 의해 추방되었다. 아키텐으로 도망친 디어머트는 헨리 2세에게 노르만 기사들을 모집할 수 있게 허가를 받았다. 1167년 최초의 노르만 기사들이 아일랜드에 상륙했고, 노르만인, 웨일스인, 플랑드르인 주력이 뒤따랐다. 여러 주가 디어머트의 통제하에 복귀했고, 그는 자신의 사위인 리처드 드 클레어를 상속자로 지명했다. 헨리 왕은 아일랜드에 경쟁 노르만 국가가 수립될까 두려워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했다. 1177년 존 래클랜드 왕자는 옥스퍼드 의회에서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 의해 아일랜드 영주로 임명되었다.[40]
아드리안 4세의 교황 칙서 라우다빌리터의 권위로, 헨리는 1171년 워터포드에 상륙하여 아일랜드 땅을 밟은 최초의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헨리는 자신의 아일랜드 영토를 막내아들 존에게 '도미누스 히베르니아'(Dominus Hiberniae, "아일랜드 영주")라는 칭호와 함께 수여했다. 존이 잉글랜드의 존 왕이 되자 "아일랜드 영주"는 잉글랜드 왕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노르만족은 워터포드에서 동부 얼스터에 이르는 동해안 전체를 장악했으며, 상당한 거리의 내륙까지 진출했다. 여러 작은 왕들이 각 카운티를 다스렸다. 초대 아일랜드 영주는 존 왕이었는데, 1185년과 1210년에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노르만족이 통제하는 지역을 통합하는 데 기여했고, 많은 아일랜드 왕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13세기 내내, 잉글랜드 왕들의 정책은 아일랜드의 노르만 영주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존 왕은 휴 드 레이시가 얼스터 영주를 불안정하게 하고 전복하도록 부추긴 후 그를 초대 얼스터 백작으로 임명했다. 아일랜드계 노르만 공동체는 정착과 권력의 확산을 멈추게 한 일련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었다. 게일 아일랜드의 정치와 사건들은 정착민들을 아일랜드의 영역으로 더 깊이 끌어들였다.
게다가 앵글로-노르만족과 달리 게일 왕들은 상세한 재산 목록과 회계를 보관하지 않았다. 이에 반하는 고고학적 증거의 부재와 함께, 이것은 중세 서부 아일랜드의 많은 학자들이 12세기의 역사가 제럴더스 캄브렌시스와 동의하게 만들었는데, 그는 게일 왕들이 성을 짓지 않았다고 주장했다.[41]
1261년이 되자 노르만족의 약세가 뚜렷해졌는데, 피닌 맥카르티가 칼란 전투에서 노르만 군대를 격파했기 때문이다. 전쟁은 약 100년 동안 여러 영주와 백작 사이에서 계속되었고, 특히 더블린 주변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지역 아일랜드 영주들은 정복 이후 가족이 잃었던 광대한 토지를 되찾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소유했다.
흑사병은 1348년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잉글랜드인과 노르만인들은 도시와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흑사병은 더 분산된 농촌 정착지에 살았던 토착 아일랜드인들보다 그들에게 훨씬 더 큰 타격을 주었다. 흑사병이 지나간 후, 게일 아일랜드어와 관습이 다시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 잉글랜드가 통제하는 영토는 더블린 주변의 요새 지역(페일)으로 축소되었고, 그 지배자들은 (페일 밖) 실제로 거의 권한이 없었다.
15세기 말까지 아일랜드의 잉글랜드 중앙 정부의 권위는 거의 사라졌다. 잉글랜드는 장미 전쟁으로 인해 관심을 돌렸다. 아일랜드 영주는 강력한 피츠제럴드 킬데어 백작의 손에 넘어갔고, 그는 군사력과 아일랜드 영주 및 클랜과의 동맹을 통해 이 나라를 지배했다. 전국에서 지역 게일족과 게일화된 영주들은 더블린의 잉글랜드 정부를 희생시키면서 그들의 권력을 확장했지만, 더블린 정부의 권력은 1494년 포이닝스 법의 도입으로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아일랜드 의회는 기본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3. 3. 켈트족의 저항과 흑사병 (1300년 - 1536년)
1261년 피닌 맥카시가 이끄는 켈트족 군대는 칼란 전투에서 노르만족을 물리쳐 아일랜드에서 노르만족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1] 이후 100여 년 동안 아일랜드의 켈트족 군주들은 노르만족과 싸웠으며, 특히 더블린 지역에서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졌다.[1] 이러한 혼란 속에서 켈트족 군주들은 많은 지역을 자신의 세력 아래 둘 수 있었다.[1]1315년 스코틀랜드의 에드워드 브루스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의 동생)가 게일인의 반 잉글랜드 귀족들을 끌어들여 아일랜드 왕으로 추대되어 아일랜드에 침공했다.[4] 에드워드가 패퇴하기 전까지 더블린을 중심으로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이 전란을 이용하여 아일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점령으로 빼앗긴 토지를 많이 되찾았다.[4]
1348년 흑사병이 아일랜드를 강타하였다.[2] 당시 노르만족은 도시에 몰려 있어 아일랜드인들보다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2] 이로 인하여 노르만의 세력은 더블린 인근으로 축소되었다.[2] 킬케니의 수도원에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흑사병은 “인류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의 시작”이라고 쓰여 있다.[5] 흑사병이 지나간 후, 아일랜드어와 아일랜드 토착 문화가 일시적으로 세력을 되찾았다.[5]
15세기 말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중심지에서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3] 장미 전쟁이 발발하자 잉글랜드는 자신들의 문제로 인해 전력을 거두어야 했다.[3] 아일랜드의 군주 지위는 킬데어 백작 피츠제럴드에게 돌아갔고, 잉글랜드가 직접 통치할 수 있는 곳은 더블린뿐이었다.[3] 1494년 포이닝 법에 의해 더블린의 아일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의회에 합병되었다.[3]
페일 이외의 아일랜드에서 히베르노-노르만 귀족들은 아일랜드어와 그 풍속을 받아들였다.[6] 그들은 '''올드 잉글리시'''라고 불렸으며, "원래의 아일랜드인보다 더욱 아일랜드적이다"라고 불렸다.[6][1]
4. 근대: 잉글랜드의 식민 지배와 저항 (1536년 - 1912년)
1536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에 의해 교황권이 부정되자 그 영향은 아일랜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헨리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 시대에 잉글랜드 교회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으나, 아일랜드는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였다. 이후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재점령과 식민지화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17세기는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대였다. 아일랜드 동맹 전쟁(1641년 - 1653년), 크롬웰의 아일랜드 침략(1649년 - 1653년), 윌리엄 왕 전쟁(1689년 - 1691년)으로 인해 인구가 격감했으며, 가톨릭에 대한 형벌법(Penal Laws)으로 인해 가톨릭 지주 계급이 몰락하고 차별이 고착화되었다.
thumb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테스탄트 특권 계급 사이에서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을 겪으면서 영국은 아일랜드에 대한 강경책을 펼치기 어려워졌다. 헨리 그라탄은 영국과의 무역 불균형 개선과 아일랜드 의회 존중을 호소하며 입법권을 회복하는 등 의회 지위를 향상시켰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아일랜드에서도 급진적인 개혁을 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791년 울프 톤은 영국 지배로부터의 독립을 내세운 연합 아일랜드인을 설립했고, 1798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800년 연합법이 가결되면서 1801년 아일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구성국이 되어 영국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 해방 공약은 유보되었다.
1801년 연합법에 따라 아일랜드는 영국에 병합되었으나, 약속되었던 가톨릭교도와 장로교에 대한 정치적 차별 해소는 실현되지 않았다. 다니엘 오코넬 등의 노력으로 1829년 가톨릭교도 해방법이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아일랜드 성공회에 대한 십일조 납부 의무는 남아있었다.
1845년부터 1849년까지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해 아일랜드 인구는 급감했고, 이는 영국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 열망을 키웠다. 19세기에는 아일랜드어 사용이 급격히 감소하고 영어가 대신 사용되었으며, 아일랜드 영어는 영국 문학계에 영향을 주었다.
1870년경 찰스 스튜어트 파넬은 아일랜드 자치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자치법 도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한편, 1858년에 설립된 피니언단(아일랜드 공화주의 동맹, IRB)과 같은 단체들은 무장 투쟁을 통한 독립을 추구했고, 이는 이후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의 전신이 된다.
19세기 후반에는 아일랜드의 토지 개혁이 시도되었고, 농촌 상황은 개선되었지만 더블린에서는 빈부 격차가 심화되었다.
4. 1.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정복 (1536년 - 1691년)
튜더 왕조의 아일랜드 정복1536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재정복하여 왕실의 통제하에 두기로 결정했다.[43] 15세기에 아일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킬데어 백작의 피츠제럴드 왕조는 튜더 왕가의 신뢰할 수 없는 동맹이 되었다. 그들은 1487년 요크 왕가의 사칭자 램버트 시므넬을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시키기 위해 부르고뉴 군대를 더블린으로 초청했다. 1536년, 피츠제럴드 가문의 실켄 토마스는 왕실에 대한 공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을 진압한 헨리 8세는 아일랜드가 미래의 반란이나 잉글랜드에 대한 외세의 침략 기지가 되지 않도록 아일랜드를 잉글랜드 정부의 통제하에 두기로 결심했다.
1542년,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영지에서 정식 왕국으로 격상시키고, 그 해 아일랜드 의회 회의에서 아일랜드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는 게일 아일랜드의 족장들과 히베르노-노르만 귀족들이 참석한 최초의 아일랜드 의회 회의였다. 정부 기관이 정비되자, 다음 단계는 잉글랜드 아일랜드 왕국의 통치를 주장하는 모든 영토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는 거의 한 세기가 걸렸으며, 다양한 잉글랜드 행정부들이 독립적인 아일랜드 및 올드 잉글리시 영주들과 협상하거나 싸웠다.
재정복은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통치 기간에 완료되었다(자세한 내용은 데스몬드 반란, 1569-73 및 1579-83, 그리고 9년 전쟁, 1594-1603 참조). 이 시점 이후, 더블린의 잉글랜드 당국은 아일랜드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를 처음으로 확립하여 섬 전체에 중앙 집권적 정부를 수립하고, 토착 영주들의 무장을 성공적으로 해제했다. 1614년, 아일랜드 의회의 가톨릭 다수는 새로운 정착민들이 지배하는 수많은 새로운 자치구를 창설하여 전복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가톨릭 아일랜드인을 개신교로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잉글랜드의 통제하에 국가를 두기 위해 왕실 당국이 사용한 잔혹한 방법(예: 계엄령에 의존하는 것 포함)은 잉글랜드 통치에 대한 분노를 심화시켰다.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왕실 정부는 식민지화라고 알려진 토지 몰수 및 식민지화 정책을 수행했다. 스코틀랜드 및 잉글랜드 개신교 식민지 개척민들이 먼스터, 얼스터 주, 그리고 라오이스와 오팔리 카운티로 보내졌다. 이 개신교 정착민들은 토지에서 쫓겨난 아일랜드 가톨릭 지주를 대체했고, 미래의 영국이 임명한 아일랜드 행정부의 지배 계급을 형성했다. 가톨릭, 침례교, 장로교를 대상으로 하는 여러 형벌법이 제정되어 확립된 (성공회) 아일랜드 교회로의 개종을 장려했다.
4. 2. 내전과 형벌법 (1641년 - 1691년)
17세기에 들어서자 아일랜드에는 전례 없는 잔혹한 사건이 잇달았다. 1641-53년과 1689-91년 두 차례에 걸친 잉글랜드 내전에서 아일랜드의 로마 가톨릭 지주 계급은 많은 수가 생명을 잃었고 남은 사람들은 페널 법에 예속되었다.[46]1641년 아일랜드 반란 이후 잉글랜드 내전과 세 왕국 전쟁으로 계속된 전쟁에서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도들은 잉글랜드와 개신교에 저항하여 싸웠으나 결국 잉글랜드 내전의 승자가 된 올리버 크롬웰에게 패배하였다. 올리버 크롬웰은 1649년에서 1653년에 걸쳐 아일랜드를 재정복하여, 아일랜드를 잉글랜드 연방의 통치 아래에 두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였으며 아일랜드인의 삼분의 일이 전쟁 와중에 죽거나 추방당하였다.[46] 또한 올리버 크롬웰은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지주의 토지 대부분을 몰수하여 잉글랜드에서 이민한 장로교회 정착민에게 주었다. 토지를 몰수당한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지주들은 코넉스트로 강제 이주되었다.[46]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자 아일랜드는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제임스 2세와 오랜지공 윌리엄은 아일랜드 왕국의 군주 지위를 놓고 윌리어미트 전쟁을 벌였다. 아일랜드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인 제임스 2세를 지원하여 개신교도들로부터 빼앗긴 토지와 페널 법에 의한 불평등한 지위 회복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1690년 보인 전투에서 패퇴한 후 결국 추방 당하게 되었고 오렌지공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새로운 군주로 즉위하였다. 제임스 2세를 지지한 재커바이트의 반란 역시 1691년 어흐림 전투에서 패배한 뒤 종결되었다.[46] 잉글랜드 왕정복고 이후 페널 법은 느슨해졌다. 그러나 새롭게 아일랜드의 지주 계급으로 성장한 장로교 정착민들은 아일랜드 로마 가톨릭 지주들이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아일랜드인의 요직 진출을 금지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가톨릭 교도는 아일랜드 의회와 같은 요직에 진출이 금지되었다.[46]
4. 3. 18세기 아일랜드: 프로테스탄트 지배와 경제 (1691년 - 1800년)
1691년 오그림 전투 이후 아일랜드 내 자코바이트 저항은 종식되었다. 복위 (1660) 이후 완화되었던 형벌법 (아일랜드)은 다시 강화되어, 앵글로-아일랜드계 개신교도(프로테스탄트) 지배층은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없도록 억압했다. 아일랜드 성공회에 속한 5%의 개신교도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경제, 농지, 법률, 지방 정부를 통제하고 아일랜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했다.[48] 이들은 얼스터의 장로교인들을 불신하고 가톨릭교도들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런던 정부가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취급했기 때문에 완전한 정치적 통제는 어려웠다. 1770년대 미국 식민지들의 반란 이후, 개신교 지배층은 권력 강화를 위해 여러 양보를 얻어냈다. 이들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영국군에 의존했기에 독립을 추구하지는 않았다.[48]18세기 아일랜드의 경제 상황은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감을 악화시켰다. 일부 부재 지주들은 토지를 비효율적으로 관리했고, 식량은 국내 소비보다 수출을 위해 생산되었다.[100] 소빙하기 말 두 번의 혹독한 겨울로 인해 1740년과 1741년 사이에 아일랜드 대기근 (1740-1741)이 발생하여 40만 명이 사망하고 15만 명 이상이 아일랜드를 떠났다.[103] 항해법으로 인해 아일랜드 상품에는 관세가 부과되었지만, 잉글랜드 상품은 면제되어 아일랜드 수출이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대부분은 비교적 평화로웠고 인구는 4백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18세기 앵글로-아일랜드 지배 계급은 아일랜드를 모국으로 여기게 되었다. 헨리 그라탄이 이끄는 의회 파벌은 영국과의 유리한 무역 관계와 아일랜드 의회의 입법 독립을 추구했다. 그러나 가톨릭 해방을 향한 급진적인 제안으로 인해 개혁은 정체되었다. 1793년 가톨릭 해방이 부분적으로 가능해졌지만, 가톨릭교도들은 여전히 의회 의원이나 정부 관리가 될 수 없었다. 일부는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매료되었다.
장로교인과 비국교도들도 박해를 받았으며, 1791년 이들 중 일부는 아일랜드 연합인 협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의회 개혁, 가톨릭 해방, 정치에서 종교 제거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상 실현이 어려워지자 영국 통치를 전복하고 비종파적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이들의 활동은 1798년 아일랜드 반란으로 이어졌으나 유혈 사태로 진압되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조지 3세가 통치하는 별도의 왕국이었고, 국왕은 아일랜드 부총독을 임명하여 정책을 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총독들이 잉글랜드에 거주했고, 섬의 업무는 "하청업자"로 알려진 아일랜드 개신교 엘리트 집단에 의해 통제되었다. 1767년 잉글랜드 정치인 조지 타운센드가 임명되어 강력한 총독이 되면서 이 시스템은 바뀌었다. 그는 더블린 성에 거주하며 런던의 지원을 받아 주요 결정을 내렸다. 개신교 지배층은 불만을 제기했고, 1780년대에 아일랜드 의회가 영국 의회로부터 독립적이 되도록 하는 법률을 얻었지만, 여전히 국왕과 추밀원의 감독을 받았다.
1798년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1800년 연합법 조항에 의해 아일랜드 자치는 완전히 종식되었다.[49]
4. 4. 독립 운동의 시작 (1801년 - 1912년)
1801년 연합법에 의해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은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합병되었다.[108] 그러나 합병의 대가로 약속되었던 가톨릭 교도와 장로교 교도에 대한 차별 철회는 조지 3세의 반대로 파기되었다."해방자"로 널리 알려진 가톨릭교도 법조인 다니엘 오코넬은 1823년부터 가톨릭교도에 대한 정치적 차별 철폐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829년 가톨릭교도 해방령이 공표되어 가톨릭 교도에 대한 정치적 차별(공직진출제한)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 신도들에게는 여전히 아일랜드 성공회에 대한 십일조 납부 의무가 부과되어, 1831-38년에 걸쳐 십일조 전쟁이 일어났다.[50] 오코넬은 무효 협회를 창립하고 1801년 연합법 무효화 운동을 펼쳤다.

1845-52년에 발생한 아일랜드 대기근은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고 독립 열망을 증가시켰다.[108] 대기근의 심각한 피해 원인 중 하나는 영국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차별 정책에도 있었다.[51] 민족주의 사상이 확산되었으며, 초등학교 역할을 한 국민학교가 설립되어 영어보다 아일랜드어 사용자가 많아졌다.
민족주의 흐름과 함께 공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도 전개되었다. 로버트 에멧이 이끈 아일랜드 청년당은 1848년 반란을 일으켰고, 토머스 프란시스 매거가 이끈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당은 1867년 페니언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모두 실패했지만, 아일랜드인들의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 추진에 큰 영향을 주었다.
5. 독립 전쟁과 아일랜드 자유국 (1912년 - 1922년)
1910년 존 에드먼드 레드먼드가 이끄는 아일랜드 의회당이 영국 하원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면서 자치 정부가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1912년 세 번째 자치법안이 제출되었고, 아일랜드 의회당은 자치 청원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카슨의 지도 하에 얼스터 의용군이 결성되면서 영국과의 합병 유지를 지지하는 유니언주의자들의 반발이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이에 맞서 자치를 지지하는 아일랜드 의용군이 결성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9월 영국 하원은 아일랜드의 자치를 골자로 하는 1914년 아일랜드 정부법을 의결하였으나, 이 법의 실시는 전쟁 이후로 연기되었다. 레드먼드는 영국 정부의 약속을 믿고 연합국에 가담하여 동맹국과 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이러한 결정에 따라 아일랜드 의용군에서 이름을 바꾼 국민의용군의 10사단과 16사단에서 연대를 파병하였으나, 아일랜드 의용군의 핵심 세력은 레드먼드의 결정에 반대하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의 자치를 위한 조약 이행을 위해 1917년-1918년에 걸쳐 아일랜드 연석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연석회의는 얼스터 포함 여부에 대한 연합파와 민족주의파 간의 이견으로 무산되었다.[1]
1916년 부활절 봉기 이후 1918년 아일랜드 총선에서 신 페인이 아일랜드 전체 의석의 4분의 3을 차지했으며, 1919년 1월 21일 더블린에 모여 32개 카운티의 아일랜드 공화국 의회를 구성하고, 아일랜드 전체에 대한 주권을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최초의 다일 에이렌을 결성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완전한 독립 외에는 영국과의 어떤 합의도 협상하려 하지 않았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게릴라전을 벌였다.[1]
1920년 아일랜드 자치법은 자치 정부를 시행하는 동시에 섬을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로 분리했다. 1921년 7월, 아일랜드와 영국 정부는 휴전에 합의했고, 1921년 12월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아일랜드 대표단이 협상에 참여했다. 이 조약으로 아일랜드 공화국은 폐지되고,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영연방의 자치령인 아일랜드 자유국이 창설되었다. 조약에 따라 북아일랜드는 자유국에서 탈퇴하여 영국에 남을 수 있었고, 즉시 그렇게 했다. 1922년 양국 의회는 조약을 비준하여 26개 카운티의 아일랜드 자유국 독립을 공식화했으며(1937년 ''아일랜드''로 변경, 1949년 공화국 선언), 6개 카운티의 북아일랜드는 자치 정부를 얻고 영국에 남았다.[2]
5. 1. 부활절 봉기 (1916년)
1916년 4월 부활절 기간 동안 아일랜드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부활절 봉기가 일어났다. 페트릭 피어즈가 이끄는 아일랜드 의용군과 제임스 코놀리가 이끄는 아일랜드 시민군은 4월 24일부터 30일까지 봉기를 주도하였다. 부활절 봉기는 더블린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영국 정부는 부활절 봉기를 신페인이 주도하였다고 의심하였고, 그 결과 신페인은 아일랜드인 사이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신페인은 1918년 아일랜드 총선에서 다수당을 차지했다.[1] 봉기자에 대한 지지는 미미했지만,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폭력은 영국 통치에 대한 분노를 유발했고, 반란군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1]
5. 2. 아일랜드 독립 전쟁 (1919년 - 1921년)
1918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신 페인은 영국 의회 출석을 거부하고 아일랜드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영국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를 주둔시켰다. 아일랜드 의용대가 발전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은 1919년 1월 21일 보안대원 두 명을 살해하였고, 이는 전국적인 독립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영국군은 아일랜드 공화국군 색출을 위해 민간인에게 무차별적인 가혹행위를 벌였다. 이는 오히려 아일랜드인의 독립전쟁 지지를 높이는 원인이 되었으며 대규모 시위가 잇달았다.[1]마이클 콜린스 등이 이끄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대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영국군과의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영국 의회는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을 제정하였으나 이 법의 시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21년 12월 6일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영국과 아일랜드는 휴전하였으며 아일랜드는 자치를 인정받았다.[1]
5. 3. 아일랜드 자유국 (1922년)
1914년 9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영국 의회는 아일랜드 자치법을 통과시켰지만,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되어 시행이 일시 중단되었다. 영국 정부는 대전이 종결될 때까지 두 번에 걸쳐 법률 시행을 시도했지만, 아일랜드에서는 민족주의자와 연합주의자(유니언주의자) 모두 얼스터 지방의 분리에 반대했다.1916년에는 독일의 지원을 받은 아일랜드 의용군에 의해 부활절 봉기가 계획되었다. 더블린 시내에서 일어난 봉기는 영국군에 의해 즉시 진압되었지만, 주모자들이 영국군의 군법 회의를 통해 즉각 처형되면서 봉기를 획책한 민족주의자들에게 동정 여론이 형성되었다. 징병 도입이 검토되면서 민족주의자에 대한 지지는 더욱 증가했다. 1918년 12월, 전후 치러진 아일랜드 총선에서는 부활절 봉기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신 페인이 의석의 4분의 3을 획득했다. 이듬해인 1919년 1월 21일, 아일랜드 공화국 의회(도일 에이렌)는 아일랜드 섬 전체에 대한 주권을 선언했다.[1]

국제법상으로는 여전히 영국 통치하에 있었기에, 이에 불만을 품은 민족주의자들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아일랜드 독립 전쟁 (영아 전쟁)을 통해 아일랜드 주둔 영국군에 대한 게릴라 공격을 감행했다. 1921년, 아일랜드 측 대표와 영국 정부는 휴전에 합의했고, 12월에는 영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 등은 독립 전쟁의 영웅으로, 이 협상에 참여했다. 조약에 따라 남아일랜드에는 영국 연방 아래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되었지만, 얼스터 지방 6개 주는 북아일랜드로 남아 영국 직할 통치가 유지되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북아일랜드의 귀속 문제는 이 조약에서 비롯되었다.[2]
6. 아일랜드 공화국 (1922년 - 현재)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아일랜드 자유국이 영연방의 일원으로 자치를 보장받게 되자, 독립 운동 세력은 조약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었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양측은 아일랜드 내전을 벌였다. 이 분열은 피아나 페일과 피네 게일로 이어져 현대 아일랜드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37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국가는 "아일랜드"(아일랜드어로 "Éire")로 재설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아일랜드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으나(''비상 사태'' 참조), 수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영국군에 자원했다. D-데이 날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대서양 폭풍에 대한 비밀 기상 정보를 제공하는 등 연합국에 비공식적으로 협력했다.[55]
1949년 아일랜드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영국 연방에서 탈퇴했다.[55] 1960년대에 이르러 세안 레마스 대통령은 주력 산업 육성을 중심으로 하는 대대적인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고, 1968년에는 중등 무상 교육이 도입되었다.
아일랜드는 1973년 영국과 함께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였다. 1970년대에 경제 위기를 겪었으나, 1980년대 경제 개혁 이후 꾸준한 발전을 이루었다. 1993년 아일랜드는 켈트 호랑이라고 불릴 만큼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이 시기 아일랜드 사회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혼이 합법화되었고, 동성애가 비범죄화되었으며, X 사건 법원 판결에 따라 제한적인 경우에 낙태도 허용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적 및 재정적 스캔들이 발생하면서 종교적 관행은 감소하였다.
6. 1. 아일랜드 내전 (1922년 - 1923년)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아일랜드 자유국을 영연방의 일원으로 하여 자치를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독립 운동 세력을 분열시켰고, 결국 아일랜드 내전 (1922년-1923년)으로 이어졌다.[54] 조약 찬성파는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향한 첫 단계로 자유국을 받아들였지만, 반대파는 아일랜드 공화국을 달성할 때까지 계속 싸우기를 원했다.새로운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다수의 처형을 통해 반조약파 잔당인 아일랜드 공화군을 격파했다. 이 분열은 오늘날까지도 아일랜드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아일랜드의 두 주요 정당인 피아나 페일과 피네 게일 사이에서 나타난다.
6. 2. 아일랜드 자유국과 경제 발전 (1923년 - 1949년)
1922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아일랜드 자유국이 영연방의 일원으로 자치를 보장받게 되자, 독립 운동 세력은 조약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었다. 양측은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아일랜드 내전을 벌였으며, 이 분열은 현재 아일랜드의 양대 정당인 피아나 페일과 피네 게일로 이어져 현대 아일랜드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1929년 대공황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되는 상황에서도 아일랜드 자유국은 민주주의를 유지했다. 1932년 총선에서는 내전에서 패배한 에이먼 데 발레라의 피아나 페일이 승리하여 평화롭게 정권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높은 실업률과 이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인한 보수적인 사회 정책 (이혼, 피임, 낙태, 음란물 금지, 검열)은 지속되었다. 1922년 아일랜드 분단 당시 자유국 인구의 92.6%가 가톨릭 신자였고 7.4%가 개신교 신자였는데,[54] 1960년대에는 개신교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 이는 경제적 기회 부족과 더불어, 가톨릭과 민족주의가 지배적인 국가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 내전 기간 동안 개신교인들의 집에 대한 방화, 스스로를 영국인으로 여겼기 때문 등 여러 이유로 개신교인들의 이민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가 네 테메레 칙령을 통해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 사이의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가톨릭 신자로 키우도록 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1937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국가는 "아일랜드"("Éire")로 재설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아일랜드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유지했으나(''비상 사태'' 참조), 수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영국군에 자원했다. 표면적으로는 중립이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D-데이 날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대서양 폭풍에 대한 비밀 기상 정보를 제공하는 등 연합국에 깊이 관여했다.[55] 한편, 에오인 오더피가 이끄는 청셔츠대의 친축 세력도 성행하여 스페인 내전에서는 프랑코 등의 반란군에 의용병으로 참여했다.
1949년 아일랜드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영국 연방에서 탈퇴했다.[55]
6. 3. 아일랜드 공화국 선포와 현대사 (1949년 - 현재)
1949년 아일랜드 공화국법에 따라 아일랜드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영국 연방에서 탈퇴하였다.[55] 1960년대에 이르러 세안 레마스 대통령은 주력 산업 육성을 중심으로 하는 대대적인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1968년에는 중등 무상 교육이 도입되었다.아일랜드는 1960년대부터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을 고려해 왔으나, 당시 아일랜드 수출의 90%가 영국 시장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류되었다. 결국 아일랜드는 1973년 영국과 함께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였다. 1970년대에 아일랜드는 경제 위기를 겪었으나, 1980년대 경제 개혁 이후 꾸준한 발전을 이루었다. 1993년 아일랜드는 켈트 호랑이라고 불릴 만큼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56]
이 시기 아일랜드 사회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혼이 합법화되었고, 동성애가 비범죄화되었으며, X 사건 법원 판결에 따라 제한적인 경우에 낙태도 허용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적 및 재정적 스캔들이 발생하면서 종교적 관행은 감소하였고, 로마 가톨릭 미사 주간 출석률은 20년 만에 절반으로 줄었다.
7. 북아일랜드 (1921년 - 현재)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아일랜드 섬 남부 및 서부 26개 주는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분리 독립하였고, 북아일랜드 6개 주는 영국에 남게 되었다. 이후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내셔널리스트)와 영국과의 연합주의자인 프로테스탄트(유니오니스트)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1960년대부터 '''분쟁'''(북아일랜드 문제)이라 불리는 갈등이 30년 동안 지속되었지만, 1998년 벨파스트 협정 체결 이후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초대 총리 제임스 크레이그는 북아일랜드를 "개신교도에 의한 개신교 국가"라고 언급했다.[60] 가톨릭교도는 취업, 주거, 정치 등에서 차별을 받았으며, 이는 1960년대 미국 시민권 운동의 영향으로 차별 철폐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가톨릭교도의 시위는 왕립 얼스터 경찰(RUC)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고, 피의 일요일 사건, 피의 금요일 사건 등으로 분쟁이 격화되었다.
북아일랜드 의회는 1972년 해산되었고, 이후 27년간 북아일랜드 담당 장관에 의한 직접 통치가 이루어졌다.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 헌법법, 서닝데일 협정 등 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70년대 영국 정부는 '얼스터화' 방침으로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에 강경 대응했으나, 장기적으로는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1980년대 IRA는 리비아에서 무기를 조달해 공세를 강화하려 했으나 MI5의 첩보 활동으로 실패했고, 이후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게 되었다.
1986년 영-아일랜드 협정 체결, 1998년 벨파스트 협정 체결 등으로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민주연합당과 신 페인당 등 급진 정당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7. 1. 프로테스탄트 국가 (1921년 - 1972년)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에 따라 런던데리, 타론, 페르마나, 안트림, 다운, 아르마 6개 북동부 자치주로 구성된 북아일랜드가 탄생했다.[59] 1921년부터 1972년까지 북아일랜드는 동 벨파스트의 스토몬트에 기반을 둔 연합주의자 정부에 의해 통치되었다. 연합주의 지도자이자 초대 총리인 제임스 크레이그는 "개신교인을 위한 개신교 국가"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크레이그의 목표는 새로운 국가에서 개신교 세력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연합주의자 다수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926년에는 해당 주 인구의 대다수가 장로교와 성공회 신자였고, 크레이그의 개신교 정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얼스터 연합당은 1972년까지 모든 정부를 구성했다.[60]소수 가톨릭 공동체는 고용 및 주택 차별과 다수결 선거 제도로 인한 정치 권력에서 배제되었는데, 이는 1960년대 후반, 미국의 마틴 루터 킹의 시민권 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의 출현을 가져왔다.[61] 북아일랜드 개신교 및 북아일랜드 가톨릭 (IRA)의 군대는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 행위로 돌아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두 경쟁 국가가 내전을 일으킬 것이 분명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토몬트 내의 결속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경제적 압력 증가, 가톨릭의 단결 강화, 영국의 개입은 스토몬트의 붕괴를 초래했다. 미국의 시민권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면서 가톨릭은 유사한 사회 정치적 인정을 얻기 위해 함께 뭉쳤다. 1967년 북아일랜드 시민권 협회(NICRA)와 1964년 사회 정의 캠페인(CSJ)과 같은 다양한 조직이 결성되었다.[62]
비폭력 시위는 가톨릭의 공감과 여론을 동원하는 데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IRA와 같은 적극적인 폭력 단체보다 더 효과적으로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폭력 시위는 북아일랜드 총리 테렌스 오닐 (1963)에게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는 그가 북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들 역시 개신교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에 속해 있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오닐의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연합주의자 모두 사이에서 불만이 커져갔다. 1968년 10월 데리에서 평화적인 시민권 행진이 경찰의 시위대 폭행으로 폭력적으로 변질되었다. 이 폭동은 국제 언론에 의해 방송되었고, 널리 알려져 아일랜드의 사회 정치적 혼란을 더욱 확인시켜주었다.[63] 보수적인 연합주의자들의 폭력적인 반작용은 보그사이드 전투와 1969년 8월 북아일랜드 폭동으로 이어지는 시민 소요 사태로 이어졌다.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그 당시 영국군은 북아일랜드 거리에 배치되었다.
1960년대 후반의 폭력 사태는 IRA와 같은 군사 단체를 격려하고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데, 이들은 경찰과 민간인 폭력에 취약한 노동자 계급의 가톨릭 신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동안 거리와 민간인 폭력이 악화되면서 IRA 조직으로의 가입이 급증했다. 영국군의 개입은 폭력을 진압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고, IRA의 군사적 중요성이 커졌다.[64] 1972년 1월 30일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최악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낙하산 부대는 데리에서 시민권 시위대에 발포하여 13명의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했다. 피의 금요일, 피의 일요일, 그리고 1970년대 초반의 다른 폭력 행위는 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스토몬트 의회는 1972년에 해산되었고 1973년에 폐지되었다. IRA 내의 분열에서 비롯된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 공식 IRA, 아일랜드 민족 해방군과 같은 준군사 사조직은 얼스터 방위 연대와 얼스터 자원군에 맞서 싸웠다. 영국군과 (대부분 개신교인) 왕립 얼스터 경찰 (RUC) 또한 혼란에 참여했다.
7. 2. 직접 통치 (1972년 - 1999년)
1921년부터 1971년까지 북아일랜드는 동벨파스트에 기반을 둔 얼스터 연합당 정부에 의해 통치되었다. 창설자인 James Craig, 1st Viscount Craigavon|label=제임스 크레이그영어는 북아일랜드를 "개신교도에 의한 개신교 국가"라고 언급했다.가톨릭교도가 겪었던 취업, 주거, 정치상의 차별은 다수결 선거 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1960년대 미국에서의 시민권 운동의 활성화로 인해 차별 철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가톨릭교도의 시위가 우익 유니오니스트의 영향 하에 있는 왕립 얼스터 경찰(RUC)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면서 사회 불안이 증가했다. 소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영국군 부대가 북아일랜드에 파견되어 현지 경찰을 대신하여 도시를 경비하게 되었다.
분쟁은 피의 일요일 사건과 피의 금요일 사건이 발생한 1970년대 초반에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북아일랜드 문제는 영어로 간단히 '''The Troubles'''라고 불린다. 분쟁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던 스토몬트 의회는 1972년에 폐회되었고, 이듬해 정식으로 폐지되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IRA 임시파, IRA, INLA, 얼스터 방위 연합, 얼스터 의용군, RUC와 영국군이 서로 공격 및 테러를 반복했으며, 이러한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3,000명에 달한다. 테러는 북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영국, 아일랜드에도 확산되었다.
이후 27년 동안 북아일랜드는 영국 정부에 설치된 북아일랜드 담당 장관의 직접 통치 하에 놓였다. 이 통치에 필요한 주요 법률은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하원에서 가결, 성립되었지만, 많은 세부적인 사항은 의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 추밀원령에 의해 발포되었다. 영국 정부는 지방 분권을 지향했지만, 북아일랜드 헌법법과 서닝데일 협정, 1975년의 북아일랜드 헌정 협의회 등 북아일랜드 문제 해결 시도는 모두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1970년대 영국 정부는 '''얼스터화''' 방침 하에 IRA에 대한 대결 자세를 유지했다. IRA와의 대립의 최전선에는 RUC 및 영국군 예비역인 얼스터 방위대가 있었다. 정부의 강경 자세로 인해 IRA의 테러는 감소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느 쪽의 승리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IRA의 테러 활동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도 존재했지만, 차별 조치를 철폐하지 않는 북아일랜드 정부에 대해 그들이 호의적일 수는 없었다. 1980년대가 되자 IRA는 리비아에서 대량의 무기를 조달하여 공세를 펼치려 했다. IRA에 침투했던 MI5의 첩보 활동으로 이 계획이 실패하자, IRA는 그 목표를 준군사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IRA의 "휴전"은 이러한 움직임의 일부였다. 1986년에는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가 영-아일랜드 협정을 체결하고 정치적인 해결을 모색했다. 장기간에 걸친 분쟁으로 북아일랜드는 높은 실업률에 시달렸고, 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이루어진 영국 정부의 지원에 따른 공공 서비스의 현대화도 지지부진했다. 90년대에 들어서자 영국, 아일랜드 양국의 경제가 호전되어 분쟁도 진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최근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4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7. 3. 자치와 직접 통치 (1999년 - 현재)
1998년 4월 10일 벨파스트 협정(성금요일 협정 또는 굿 프라이데이 협정이라고도 함)으로 1999년 12월 2일 북아일랜드에 일정 수준의 자치권이 주어졌고, 연합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모두에게 제한적인 정부 통제권이 부여되었다.[67] 그러나 권력 분점 행정부와 선출된 의회는 정당 간 신뢰 붕괴로 인해 2000년 1월부터 5월까지, 그리고 2002년 10월부터 2007년 4월까지 중단되었는데, 여기에는 무장 단체의 무기 폐기, 경찰 개혁, 영국 육군 기지 철수 등의 문제가 포함되었다.[67] 2003년 총선에서 온건파인 얼스터 연합당과 (민족주의) 사회민주노동당은 강경파인 민주연합당과 (민족주의) 신 페인에 밀려났다.[67] 2005년 7월 28일, 임시 IRA는 무장 투쟁 종료를 선언했고, 2005년 9월 25일 국제 무기 사찰단이 PIRA 무기 대부분을 해체하는 과정을 감독했다. 2007년 4월, 자치권이 회복되었다.[67]2022년 2월 3일, 폴 기번이 제1장관직에서 사임하면서 미셸 오닐도 부 제1장관직에서 자동 사임하여 북아일랜드 행정부가 붕괴되었다.[67] 2024년 1월 30일, 민주연합당 대표 제프리 도널드슨은 영국 하원에서 새로운 법안이 통과되면 민주연합당이 행정부를 복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68]
8. 현대 아일랜드
아일랜드 경제는 이전보다 더욱 다양하고 정교해졌으며, 유럽 경제 공동체(EEC), 유럽 공동체(EC) 및 유럽 연합(EU)의 전신에 영국과 동시에 가입하여 세계 경제에 통합되었다. 1990년대 초, 아일랜드는 현대적인 산업 경제로 변모하여 국가 전체에 이익이 되는 상당한 국민 소득을 창출했다. 농업 의존도가 여전히 높았지만, 아일랜드의 산업 경제는 국제 경쟁에 필적하는 정교한 상품을 생산했다. 1990년대 아일랜드의 국제적인 경제 호황은 켈트 호랑이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가톨릭 교회는 아일랜드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아일랜드 주교들은 더 이상 대중에게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고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현대 아일랜드에서 교회가 평범한 삶과 단절된 것은 젊은 세대의 교회 교리에 대한 무관심 증가와 교회 대표들의 의심스러운 도덕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1992년, 골웨이 주교 에이먼 케이시가 미국 여성과의 불륜과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갑작스럽게 사임한 사건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소아성애 및 아동 학대 사제와 관련된 추가적인 논란과 스캔들이 발생했다. 그 결과, 많은 아일랜드 대중들은 가톨릭 교회의 신뢰성과 효능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69] 2011년 아일랜드는 바티칸에 있는 자국 대사관을 폐쇄했는데, 이는 이러한 증가하는 추세의 명백한 결과였다.[70]
9. 아일랜드의 깃발
아일랜드의 국기는 녹색, 흰색, 주황색의 삼색기이다. 이 국기는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를 상징하는 녹색, 아일랜드 개신교도를 상징하는 주황색, 그리고 그들 사이의 평화를 염원하는 흰색을 담고 있으며,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71] 청년 아일랜드의 토머스 프랜시스 미허는 이 삼색기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게양하면서 국기의 상징을 통해 "가운데 흰색은 '오렌지'와 '녹색' 사이의 영구적인 휴전을 의미하며, 나는 그 깃발 아래에서 아일랜드 개신교도와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의 손이 관대하고 영웅적인 형제애로 굳게 잡히기를 바란다"라는 자신의 비전을 설명했다. 동료 민족주의자 존 미첼은 "나는 언젠가 저 깃발이 우리의 국기로 펄럭이는 것을 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16년 부활절 봉기에서 사용된 후, 이 깃발은 민족주의자들에게 국기로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아일랜드 공화국 (1919–21)과 아일랜드 자유국 (1922–37)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1937년 아일랜드 헌법이 도입되었을 때, 삼색기는 공식적으로 국기로 확정되었다. "국기는 녹색, 흰색, 주황색의 삼색기이다." 오늘날 삼색기는 아일랜드의 공식 국기이지만, 북아일랜드에서는 공식적인 국기가 아니며 때때로 비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북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유일한 공식 국기는 유니언 기이지만, 그 사용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72] 얼스터 배너는 때때로 북아일랜드의 사실상 지역 깃발로 비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분단 이후, 섬 전체를 대표하는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국기는 없다. 특정 스포츠 경기에서 임시 방편으로 4개 지방의 국기가 어느 정도 일반적인 수용과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여러 국기가 사용되었다.
- 성 파트리치오의 기 (성 파트리치오의 염자, 성 파트리치오의 십자)는 연합법 이후 유니언 기에서 아일랜드를 대표했다.
- 하프가 있는 녹색 깃발 (19세기에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사용했으며, 레인스터의 깃발이기도 하다.)
- 하프가 있는 파란색 깃발은 18세기부터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사용했으며 (현재 아일랜드 대통령의 기)
- 아일랜드 삼색기.
성 파트리치오의 염자는 이전에 섬 전체의 아일랜드 럭비 풋볼 연합 (IRFU)에서 사용되었으며, 4개 지방 깃발이 채택되기 전이었다. 게일 운동 협회 (GAA)는 섬 전체를 대표하기 위해 삼색기를 사용한다.
참조
[1]
웹사이트
Reindeer bone found in north Cork to alter understanding of Irish human history
https://www.irishexa[...]
2021-04-18
[2]
뉴스
What have the Vikings ever done for us?
https://www.irishtim[...]
[3]
논문
The Resurgence of Gaelic power in Ireland and Scotland and its wider impact, c.1350-1513
https://cora.ucc.ie/[...]
University College Cork
2018-12-18
[4]
서적
Early Ireland: an introduction to Irish pre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웹사이트
Earliest evidence of humans in Ireland
https://www.bbc.co.u[...]
2016-03-21
[6]
간행물
Relative sea-level change in and around the Younger Dryas inferred from late Quaternary incised valley fills along the Japan sea
2010-10-14
[7]
웹사이트
The Mesolithic and Mesolithic-Neolithic transition in Ireland
http://lithicsirelan[...]
[8]
서적
A New History of Ireland: Prehistoric and early Ireland
Clarendon Press
[9]
문서
The Island of Ireland: Drowning the Myth of an Irish Land-bridge?
2008
[10]
서적
Landscapes of Neolithic Ireland
Routledge
2000
[11]
웹사이트
Achaidh Chéide
http://www.logainm.i[...]
2010-09-10
[12]
웹사이트
A Pompeii in Slow Motion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10-09-10
[13]
웹사이트
Céide, "a hill level at top"
http://www.logainm.i[...]
Placenames Database of Ireland
2010-09-10
[14]
웹사이트
Where To Go in Ireland | Cities in Ireland | Visit Ireland | Discover Ireland
https://www.discover[...]
2019-11-09
[15]
웹사이트
Céide Fields Visitor Centre
http://www.museumsof[...]
Museums of Mayo
2009-02-03
[16]
웹사이트
Ceide Fields Visitor Centre, Ballycastle, County Mayo, West of Ireland
http://www.museumsof[...]
[17]
웹사이트
The Irish Bronze Age {{!}} National Museum of Ireland {{!}} Bronze Age Handling Box
https://microsites.m[...]
2020-05-05
[18]
서적
A History of Ulster
[19]
서적
Ireland History of a Nation
[20]
서적
Treasures of the National Museum of Ireland: Irish Antiquities
[21]
서적
Oxford Companion to Irish History
[22]
서적
A Concise History of Ireland
[23]
웹사이트
Myths of British Ancestry
http://www.prospect-[...]
Prospect Magazine
2011-06-30
[24]
웹사이트
DNA Research Links Scots, Irish And Welsh To North-western Spain
http://hnn.us/roundu[...]
George Mason University History News Network
2011-06-30
[25]
웹사이트
A Y Chromosne Census of the British Isles (pdf)
http://www.familytre[...]
2018-01-15
[26]
웹사이트
Romans in Ireland? - Archaeology Magazine Archive
https://archive.arch[...]
[27]
뉴스
What did the Romans ever do for Ireland?
https://www.irishtim[...]
[28]
웹사이트
Yes, the Romans did invade Ireland
http://www.britarch.[...]
British Archaeology
[29]
문서
Attacotti, Déisi and Magnus Maximus: the Case for Irish Federates in Late Roman Britain
[30]
서적
Irish History
Parragon Books Ltd.
[31]
문서
In Search of Ancient Ireland
Ivan R Dee
[32]
문서
[33]
간행물
Tribes and Tribalism in Early Ireland
[34]
웹사이트
AU 902.2
http://www.ucc.ie/ce[...]
[35]
간행물
Chronicles the history of the world from the deluge
[36]
논문
Cogad Gáedel re Gallaib
[37]
논문
Muircherteach Ua Briain, politics and naval activity in the Irish Sea 1075 to 1119
https://www.academia[...]
1988-01
[38]
서적
The tribes of Galway = na tuatha Gaillimhe
The author
2001
[39]
서적
The Norman invasion of Ireland
Anvil Books
1995
[40]
서적
The Oxford Companion to Irish History
Oxford Univ. Press
2007
[41]
간행물
Inside a Medieval Gaelic Castle
2020-03
[42]
웹사이트
Théâtre de tous les peuples et nations de la terre avec leurs habits et ornemens divers, tant anciens que modernes, diligemment depeints au naturel par Luc Dheere peintre et sculpteur Gantois[manuscript]
https://lib.ugent.be[...]
2020-08-25
[43]
웹사이트
'The Wild Irish are Barbarous and Most Filthy in their Diet'
http://www.bbc.co.uk[...]
2012-03-01
[44]
논문
"Subjects Without an Empire: The Irish in the Early Modern Caribbean"
2011
[45]
논문
"A 'riotous and unruly lot': Irish Indentured Servants and Freemen in the English West Indies, 1644-1713"
https://www.jstor.or[...]
2018-11-08
[46]
서적
The historical encyclopedia of world slavery. 1. A – K
https://archive.org/[...]
ABC-CLIO
2012-11-19
[47]
서적
Eighteenth-Century Ireland: The Isle of Slaves - The Protestant Ascendancy in Ireland
New Gill History of Ireland
2009
[48]
논문
Why did the American Revolution not spread to Ireland?
2012
[49]
서적
Ireland in the age of imperialism and revolution, 1760–1801
1979
[50]
서적
The Green Flag
London, Weidenfeld & Nicolson
1972
[51]
서적
The Great Hunger
Harmondsworth: Penguin
1991
[52]
서적
Ireland and the Land Question 1800-1922
https://www.questia.[...]
2018-06-22
[53]
논문
The Limits to Land Reform: The Land Acts in Ireland, 1870–1909*
https://www.princeto[...]
2015-11-17
[54]
서적
Ireland 1868–1966
1993
[55]
웹사이트
Today marks 70 years since Ireland became a republic
https://www.thejourn[...]
2019-04-18
[56]
웹사이트
Central Statistics Office Ireland Key short-term economic indicators:Gross Domestic Product (GDP)
http://www.cso.ie/in[...]
2018-01-15
[57]
웹사이트
CSO figures reveal unemployment levels
http://insideireland[...]
2012-03-08
[58]
뉴스
Ireland is a spending nation once again as Celtic Phoenix rises
http://www.independe[...]
2014-08-24
[59]
서적
Modern Ireland: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60]
서적
Modern Ireland: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61]
서적
Black and Green: The Fight for Civil Rights in Northern Ireland & Black America
Pluto Press
1998
[62]
서적
Modern Ireland: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63]
서적
Modern Ireland: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64]
서적
Modern Ireland: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65]
서적
Modern Ireland: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66]
서적
Modern Ireland: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67]
웹사이트
DUP's Paul Givan resigns as Northern Ireland first minister, as Taoiseach brands it 'very damaging move'
https://www.independ[...]
2024-01-30
[68]
뉴스
DUP executive endorses deal to restore devolution at Stormont
https://www.bbc.com/[...]
2024-01-30
[69]
서적
Modern Ireland: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70]
뉴스
Closure of Vatican embassy has wide-ranging implications
http://www.irishtime[...]
2012-02-18
[71]
웹사이트
National Flag
https://www.taoiseac[...]
[72]
웹사이트
Flags and symbols
https://www.bbc.co.u[...]
2018-01-15
[73]
서적
The Princeton History of Modern Ireland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74]
서적
Interpreting Irish history: the debate on historical revisionism, 1938-1994
Irish Academic Press
[75]
논문
"Revisionisms and the Story of Ireland: From Sean O'Faolain to Roy Foster,"
https://www.questia.[...]
[76]
논문
"Nationalist historiography and the English and Gaelic worlds in the late middle ages."
http://vmserver14.nu[...]
[77]
논문
"Nationalism and historical scholarship in modern Ireland."
https://www.jstor.or[...]
[78]
웹사이트
"Reflecting on a Decade of War and Revolution in Ireland 1912 - 1923: The Road to War" (2014)
https://web.archive.[...]
2018-01-15
[79]
서적
Ireland and the British Empire
[80]
서적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the British Empire
[81]
서적
Ireland and empire: colonial legacies in Irish history and culture
[82]
서적
Kingdom and Colony: Ireland in the Atlantic World, 1560-1800
[83]
서적
The Irish Diaspora
[84]
논문
"Networks of Empire: Linkage and Reciprocity in Nineteenth‐Century Irish and Indian History."
[85]
논문
"Amongst Empires: A Short History of Ireland and Empire Studies in International Context,"
[86]
서적
"Women and Gender in Modern Ireland,"
https://books.google[...]
[87]
논문
"Postcolonial Ireland: Posing the Question."
[88]
서적
Ireland and postcolonial theory
[89]
서적
Empire, the national and postcolonial, 1890-1920: Resistance in Interaction
[90]
논문
"The writing of Irish economic and social history since 1968."
https://www.jstor.or[...]
[91]
논문
"Interdisciplinary perspectives on Irish economic and demographic history."
[92]
웹사이트
Eupedia1
http://www.eupedia.c[...]
[93]
웹사이트
Eupedia2
http://www.eupedia.c[...]
[94]
웹사이트
Eupedia
http://www.eupedia.c[...]
[95]
간행물
フィニアン運動史の諸問題ー1858-1873年
[96]
서적
The Course of Irish History
Roberts Rinehart
[97]
뉴스
스페인과 아일랜드 신석기 문화의 유사성
http://hnn.us/roundu[...]
History News Network
[98]
논문
‘Attacotti, Déisi and Magnus Maximus: the Case for Irish Federates in Late Roman Britain’
[99]
서적
In Search of Ancient Ireland
Ivan R Dee
[100]
서적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세종서적
[101]
서적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세종서적
[102]
서적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까치
[103]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아일랜드 문명과 기후 -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지구과학산책, 반기성)'
https://terms.naver.[...]
[104]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아일랜드 문명과 기후 - 문명의 성쇠에 영향을 준 기후 이야기 (지구과학산책, 반기성)'
https://terms.naver.[...]
[105]
서적
Ireland: History of a Nation
Geddes & Grosset
[106]
서적
아일랜드역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2019
[107]
서적
진짜 세계사, 음식이 만든 역사
월간쿠캔(주)베스트홈
2008
[108]
웹사이트
'[다음백과] 아일랜드 대기근 Irish Famine (김명환 교수, 역사용어사전)'
https://100.daum.ne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