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케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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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타케부네는 중세부터 근세 일본에서 사용된 대형 군선으로, 16세기 중엽부터 등장했다. 초기에는 세토 내해 서부 지역에서 처음 확인되었으며, '바다 위의 성'으로 비유될 만큼 튼튼한 방어 구조와 2~4층의 누각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돛과 노를 모두 사용했지만, 전투 시에는 노만 사용하여 기동성을 확보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오다 노부나가 등이 철갑선으로 개량하여 사용했으며,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의 판옥선에 비해 화력과 기동력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쇠퇴하여, 1682년 아타케마루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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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케부네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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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군선 |
사용 국가 | 일본 |
사용 시기 | 16세기 ~ 17세기 |
주요 특징 | 크고 무거운 목재 갑판, 여러 개의 대포 탑재 가능 |
역사 | |
개발 배경 | 센고쿠 시대의 해상 전투 필요성 증가 |
주요 용도 | 해상 봉쇄, 수송, 함대 기함 |
관련 인물 |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
구조 및 특징 | |
선체 재료 | 목재 (주로 삼나무) |
갑판 | 두껍고 튼튼한 목재 갑판 |
무장 | 대포, 활, 화살 |
크기 | 대형 (다른 일본 선박보다 큼) |
추진 방식 | 노, 돛 |
역할 | |
전투 | 해상 전투에서 주요 전력으로 활용 |
수송 | 병력 및 물자 수송 |
지휘 | 함대의 기함 역할 |
몰락 | |
원인 | 해상 전투 방식 변화, 대형 선박 유지 비용 부담 |
대체 | 세키부네 등 다른 종류의 군선으로 대체 |
기타 | |
참고 문헌 | "조선해양사" (ISBN:978-89-93989-02-1) |
2. 명칭
아타케부네(安宅船)라는 이름은 安宅、 阿武로도 표기되며, 중세에서 근세에 걸친 일본의 군선 가운데서도 대형급을 가리킨다. 큰 것으로는 길이 50m 이상、폭 10m 이상의 거체를 자랑하며 오오아타케(大安宅, おおあたけ)로도 불렸다. 사료상으로 아타케부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16세기 중엽 덴분(天文) 연간 무렵이다.[6] 고노 씨(河野氏)가 지배하던 이요(伊予) 즉 당시 일본 수군(水軍)의 선진지역이었던 세토내해 서부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초기에는 "아부(阿武)" 또는 가나자이로 표기되었고, 16세기 말에 "안택(安宅)"으로 변화되었다.[6]
아타케부네는 중국의 명나라로 가는 왜명무역(遣明船)으로도 사용되었던 후타나리부네(二形船)나 이세부네(伊勢船) 등 대형 화선(和船, 일본 전통 선박)을 군용으로 개량한 것으로 작은 것은 5백 석 들이(1석들이는 약 150kg)에서 큰 것은 1천 석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였다.
「아타케부네」(安宅船)라 불리게 된 유래는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 않으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아와지(淡路) 인근을 근거로 하고 있던 아타케 씨(安宅氏)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설, 거대하고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는 배라는 데에서 「아타케」(安宅)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 「난폭하다」(暴れる)는 의미가 있는 「아타케루/あたける일본어」라는 일본어 동사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호쿠리쿠도(北陸道)의 지명 아타카(安宅, 오늘날의 일본 이시카와현(石川県) 고마쓰시(小松市))와 관계가 있다는 설, 무쓰(陸奥)의 아부쿠마강(阿武隈川) 유역을 가리키는 옛 지명인 아타케(阿武)와 관계가 있다는 설 등이 있다. 이름에 관한 결정적인 설은 없으나 일본의 배의 종류별 명칭으로써는 히젠(肥前) 마쓰라(松浦)의 마쓰라부네(松浦船), 구마노나다(熊野灘)의 마쿠마노부네(真熊野船)의 사례처럼 그 배가 건조되어 사용되거나 한 지명을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많다. 히젠 마쓰라와 구마노는 이요와 마찬가지로 모두 헤이안 시대 이전부터 수군의 거점으로 이름이 높았다. 에도 시대의 설에는 "적의 대포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거주한다는 의미"라는 설과, 『맹자』의 "인자는 사람의 안식처이다(仁者之人之安宅也)"라는 구절이나, "날뛰다"라는 의미의 "아타케루(あたける)"라는 단어가 유래라는 설이 있다.[6] 메이지 시대 이후의 설에는 기슈(紀州)의 안택(安宅)(단, 이 경우 발음은 "아타기(アタギ)"이다)설이나, 시마(志摩)의 아타케(阿竹)씨 설이 있다.[7]
3. 구조
모두 뱃머리 윗부분이 모난 형태를 하고 있고 야쿠라(矢倉)라고 불리는 갑판상의 상부 구조물도 각진 모양의 상자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상부 구조물은 선체의 전체 길이에 가깝기에 소야구라(総矢倉)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형태에 따라 확보된 넓은 선체 위에 목제 순판(楯板)을 좌우현과 앞뒤에 붙여서 화살과 탄환으로부터 선원들을 보호하였다. 원래 속도가 나지 않는 대형 선박으로 속도를 희생시킨 대신 방어력을 높인 것이다. 순판에는 하자마(狭間)라 불리는 총안이 설치되어 그 틈새로부터 활이나 총을 쏘아서 적선을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접근전을 하기 위해서 적선과 배를 붙일 때는 이 순판을 떼어서 일종의 널다리로 사용할 수 있었고, 순판으로 둘러싸인 소야구라 위쪽에는 지붕이 씌워져 있어서 겉보기에 성곽 시설과도 흡사하였다. 특히 큰 아타케부네의 경우 2층에서 4층까지 누각이 세워지기도 하였고, 그 구조와 중후함으로 인해 아타케부네는 으레 '바다 위의 성'에 비유되고는 하였다.
당시의 화선과 공통된 선체 구조로써 판자들을 누이쿠기(縫い釘)라는 못과 가스가이(かすがい)라는 걸쇠로 엮어서 건조하였으며 남만(서양)이나 중국의 선박에 비해 골격으로의 용골은 없다. 경량은 구조선이나 같은 구조의 여러 배들처럼 충돌이나 좌초 등의 충격으로 수밀이 낮아져서 물이 새는 것에 약하다는 약점도 있다. 이는 군용선으로서는 충각(래밍)을 통한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군선으로써 큰 결점이다. 또한 서양의 갤리선과 달리 국내에서의 연안 전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외양으로 나가는 능력에는 제한이 있었다.
배를 나아가게 하는 데에는 돛도 사용되었으나 전투 때에는 돛대를 접고 노만 사용해서 항해하였다. 노의 수는 적게는 50채 정도에서 많은 것은 150채 이상에 달하였으며, 50명에서 2백 명 정도의 고기테(漕ぎ手, 노잡이)가 탑승하였다. 오오아타케의 경우 두 사람이 붙어서 젓는 대형 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투원은 노기테와 분리되어 탑승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정도가 탑승하였다.
후기에 들어서 대형화와 중무장화가 함께 진행되어 특히 화기(火器)를 사용한 전투에 대응하여 순판에 얇은 철판을 대기도 하였다고 한다. 무장도 육상의 운반에 부적합한 대포와 대포가 배치돼 강력한 화력으로 타함을 압도하였으나, 16세기 후반 조선의 판옥선에 비하여 배의 사면에 모두 화포를 배치하지는 못하는 등 적재할 수 있는 화포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3. 1. 방어 구조
아타케부네는 뱃머리 윗부분이 모난 형태를 하고 있고 야쿠라(矢倉)라고 불리는 갑판상의 상부 구조물도 각진 모양의 상자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상부 구조물은 선체의 전체 길이에 가깝기에 소야구라(総矢倉)라고도 불린다.[8] 이러한 형태에 따라 확보된 넓은 선체 위에 목제 순판(楯板)을 좌우현과 앞뒤에 붙여서 화살과 탄환으로부터 선원들을 보호하였다. 원래 속도가 나지 않는 대형 선박으로 속도를 희생시킨 대신 방어력을 높인 것이다. 순판에는 하자마(狭間)라 불리는 총안이 설치되어 그 틈새로부터 활이나 총포를 쏘아서 적선을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접근전을 하기 위해서 적선과 배를 붙일 때는 이 순판을 떼어서 일종의 널다리로 사용할 수 있었고, 순판으로 둘러싸인 소야구라 위쪽에는 지붕이 씌워져 있어서 겉보기에 성곽 시설과도 흡사하였다. 특히 큰 아타케부네의 경우 2층에서 4층까지 누각이 세워지기도 하였고, 그 구조와 중후함으로 인해 아타케부네는 으레 '바다 위의 성'에 비유되고는 하였다.[8]
당시의 화선과 공통된 선체 구조로써 판자들을 누이쿠기(縫い釘)라는 못과 가스가이(かすがい)라는 걸쇠로 엮어서 건조하였으며 남만(서양)이나 중국의 선박에 비해 골격으로의 용골은 없다. 경량은 구조선이나 같은 구조의 여러 배들처럼 충돌이나 좌초 등의 충격으로 수밀이 낮아져서 물이 새는 것에 약하다는 약점도 있다. 이는 군용선으로서는 충각(래밍)을 통한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군선으로써 큰 결점이다. 또한 서양의 갤리선과 달리 국내에서의 연안 전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외양으로 나가는 능력에는 제한이 있었다.[8]
후기에 들어서 대형화와 중무장화가 함께 진행되어 특히 화기(火器)를 사용한 전투에 대응하여 순판에 얇은 철판을 대기도 하였다고 한다. 무장도 육상의 운반에 부적합한 대포와 대포가 배치돼 강력한 화력으로 타함을 압도하였으나, 16세기 후반 조선의 판옥선에 비하여 배의 사면에 모두 화포를 배치하지는 못하는 등 적재할 수 있는 화포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8]
3. 2. 추진 방식
안택선은 추진 방식으로 돛과 노를 모두 사용했지만, 전투 시에는 돛대를 쓰러뜨리고 노만으로 항해했다. 노의 수는 적게는 50개에서 많게는 150개 이상이었으며, 50명에서 200명 정도의 노 젓는 사람이 탑승했다. 대형 안택선에서는 2인 1조로 큰 노를 젓는 경우도 있었다. 전투원은 노 젓는 사람과 별도로 승선했으며,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달했다.
판재를 못으로 연결하여 건조하는 일본 배의 선체 구조는 경량 구조이지만, 충돌이나 좌초 등의 충격에 약하고 누수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는 군함으로서 돌격이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큰 결점이었다.
3. 3. 무장
아타케부네는 대형 화선(和船, 일본 전통 선박)을 군용으로 개량한 것으로, 5백 석에서 1천 석 이상의 규모였다. 뱃머리 윗부분과 갑판상의 상부 구조물(야쿠라)은 각진 모양을 하고 있었고, 상부 구조물은 선체 전체 길이에 가까워 소야구라(총야구라)라고도 불렸다.
넓은 선체에는 목제 순판(楯板)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였으며, 순판에는 하자마(狭間)라는 총안을 설치하여 활이나 총을 쏘았다. 적선에 옮겨 탈 때는 순판을 떼어 널다리로 사용했고, 소야구라 위쪽에는 지붕을 씌워 성곽 시설과 흡사한 모습을 갖추었다. 큰 아타케부네는 2층에서 4층까지 누각을 세우기도 하여 '바다 위의 성'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선체 구조는 판자를 누이쿠기(縫い釘)라는 못과 가스가이(かすがい)라는 걸쇠로 엮어 건조하였으며, 용골은 없었다. 이는 충돌에 약하고 충각(래밍)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외양 항해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배는 돛과 노를 사용하여 추진되었는데, 전투 시에는 돛대를 접고 노만 사용하였다. 노의 수는 50채에서 150채 이상이었고, 50명에서 2백 명 정도의 고기테(漕ぎ手, 노잡이)가 탑승하였다. 오오아타케의 경우 두 사람이 붙어서 젓는 대형 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투원은 노기테와 분리되어 탑승하였으며,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탑승하였다.
후기에는 대형화와 중무장화가 진행되어 순판에 얇은 철판을 대기도 하였다. 무장으로는 대포와 대포가 배치되어 강력한 화력을 갖추었으나, 16세기 후반 조선의 판옥선에 비하여 배의 사면에 모두 화포를 배치하지는 못하는 등 적재할 수 있는 화포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3. 4. 한계
안택선(安宅船)은 일본 배(和船)에 공통적인 선체 구조를 가지고 있어, 판재를 못과 못으로 연결하여 건조되었으며, 서양이나 중국의 배처럼 골격으로서의 용골은 없다.[8] 경량 구조의 선박이지만, 충돌이나 좌초 등의 충격으로 수밀성이 저하되어 누수에 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다.[8] 이는 군함으로서 돌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큰 결함이었다.[8] 또한 서양의 항해선과 달리 국내 연안 전투를 목적으로 건조되었기 때문에 외양으로 나가는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4. 역사
일본에서는 고대에 모로타부네(諸手船)라 불리는 소형 노젓는 배가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후대의 아타케부네(安宅船) 등 군선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중세 전반에는 해상에서 활동하는 군사 세력이 활약했지만, 수군 전용으로 건조된 군선은 없었고, 어선이나 상선을 육전에서 사용되는 방패판으로 임시로 무장한 것을 사용하였다.
본격적인 군선의 등장은 무로마치 시대 중기 이후의 일이며, 전국 시대(戦国時代)에 들어서면서 전국 다이묘(戦国大名)에 의한 수군의 조직화가 진행됨에 따라 모리씨(毛利氏), 다케다씨(武田氏), 고호조씨(後北条氏) 등의 유력한 다이묘는 소수이지만, 배하의 수군에 아타케(安宅)라 불리는 대형 군선을 건조하게 되었다.
1573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자신의 영지인 내해가 된 비와호(琵琶湖)에서 길이 30간(약 55m), 100척(挺) 규모의 대형 선박을 건조하였다. 같은 해, 이 대형 선박은 사카모토(坂本)에서 후쿠오카(湖北)의 다카시마군(高島郡)(시가현) 고시마(高嶋)로 출진하여 기도성(木戸城), 다나카성(田中城)을 함락시켰다.[9]
16세기 중후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일본에서는 막부 지배자들이 패권을 다투면서 수백 척에 달하는 대규모 해군을 건설하는 등 해군력 증강에 힘썼다.[1] 이 시기 건조된 가장 크고 위협적인 함선이 바로 아타케부네(安宅船)였다. 아타케부네는 순수한 군함이라기보다는 연안 작전에 주로 사용되는 부유하는 요새와 같았다.[1] 돛을 이용한 풍력 추진이 어려워 주로 노를 저어 추진력을 얻었다.
당시 다이묘(大名)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78년에 6척의 대형 철피 아타케부네를 건조했다는 기록이 다몬이(多聞院) 주지의 일기에 남아있다.[1] 이 배들은 "철갑선(鉄甲船, Tekkōsen)"이라고 불렸는데, 대포와 화살 공격을 막기 위해 상부 구조물을 철판으로 강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는 이 배들을 직접 목격하고도 철제 외판에 대한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1]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구키 수군(九鬼水軍)을 이끌던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는 1578년에 검은 대형 선박 6척을 건조했으며,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는 흰 대형 선박 1척을 건조했다.[10] 흥복사(興福寺) 승려의 기록(『다문원일기』(多聞院日記))에 따르면 이 배들은 가로 7칸(약 12.6m), 세로 12~13칸(약 24m) 크기였다고 한다.[11] 그러나 『신장공기』(信長公記)의 손경각문고(尊経閣文庫) 소장본(겉표제 『안토일기』(安土日記))에는 구키 요리타카가 건조한 6척이 "길이 18칸, 폭 6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10] 길이와 폭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 배들은 모리씨(毛利氏) 수군의 화기 공격에 대비하여 철판으로 장식되었으며, 이는 당시 군선으로서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였다.[12] 이것이 바로 노부나가의 유명한 "철갑선"이다.[12] 구네키 솔디 오르간티노(グネッキ・ソルディ・オルガンティノ) 선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 배들은 각각 3문의 대포와 다수의 대철포를 장착하고 있었다.[10] 이 배들은 1578년 기즈가와구치 전투(木津川口の戦い)에서 모리 수군(毛利水軍)을 격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10](제2차 기즈가와구치 전투(第二次木津川口の戦い))
반면, 1593년 선교사 조앙 로드리게스(João Rodrigues)가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에게 보낸 편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건조한, 철제 외판으로 완전히 덮인 아타케부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2]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壬辰倭乱) 당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이 배들을 건조했으며, 상부 구조물 전체를 철판으로 덮었다고 한다.[2]
아타케부네는 대포의 반동을 견딜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대 4문(소형 후장식 소형 회전포가 2문 있다면 6문)의 대포와 다수의 대구경 소총으로 무장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8년 기즈가와구치 전투에서 이 배들을 활용하여 모리 씨의 함대를 성공적으로 봉쇄하고 격파했다. 당시 일본 해전은 함선 간의 전투보다는 승무원 간의 백병전을 중시했기 때문에, 아타케부네는 일본 해전 전술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보였다.
임진왜란(壬辰倭乱)에서 아타케부네의 약점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3][4] 조선 수군의 판옥선(板屋船)은 아타케부네보다 견고한 구조를 바탕으로 더 많은 대포를 탑재할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해 원거리에서 일본 함선을 공격하여 아타케부네의 접근 전술을 무력화시켰다.
1584년 카니에 성 전투(蟹江城合戦)에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는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의 병사 3천 명을 이세 시라코우라(伊勢白子浦)에서 카니에우라(蟹江浦)에 상륙시켰으나, 해전에서 패배하여 대형 선박을 버리고 작은 배로 도망쳤다. 이때 요시타카의 대형 선박은 "다이묘마루"(大宮丸)[13], "일본마루"(日本丸)[14]라고 불렸다.
1591년에 시작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출병(문록·경장의 역(文禄・慶長の役))에서는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송하고 병참을 유지하기 위해 서국의 다이묘(大名)에 의해 대량의 수송선이 건조되었다. 이러한 수송선 외에도, 초전기에 조선 수군의 습격으로 피해가 발생하자 일본 측도 수상 전투용으로 수군의 집중과 정비를 시작하여, 『태합기(太閤記)』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석고 10만 석당 대형 선박(안택선) 2척을 준비시켰다고 한다. 그 결과, 경장의 역에서는 일본 수군이 활약하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를 위해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건조한 "귀숙"(鬼宿)은 길이 100척(약 30m), 누각 100개로, 노 젓는 사람과 전투원을 합쳐 180명이 탑승할 수 있었던 거대한 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명으로 "일본마루"로 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안골포 해전(安骨浦海戦)에서는 적의 습격을 강력한 선체로 막고 탈출에 성공하였다(크기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다). 또한,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선박 길이 18칸(약 32m), 폭 6칸(약 11m)"으로 규정된 군선의 건조를 명령하고 있다.
무카이 쇼겐 타다카츠(向井将監忠勝)가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와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를 위해 건조한 대형 아타케부네인 "아타케마루(安宅丸, Atakemaru)"는 구리판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5]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도 시대 초기에는 일본 각지에서 거대한 성이 잇따라 축성되는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를 반영하여 구키씨를 비롯한 서국의 여러 다이묘들이 일본마루를 능가하는 거대한 함선을 잇따라 건조하면서 아타케부네의 발전은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1609년 에도 막부는 서국 다이묘의 수군력 억제를 위해 500석 이상의 군선을 몰수했다(대선건조금지).
1615년 오사카 전투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아타케부네의 군사적 필요성은 낮아졌고, 속도가 느리고 해상 단속에 효용성이 낮은 아타케부네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대신 각 번의 선수조(수군)는 속도가 빠른 세키센을 대형화하여 군선의 주력으로 삼게 되었다. 1635년에는 무가제법도에 따라 전국의 다이묘에게 500석 이상의 군선 보유가 금지되었다.
에도 막부는 500석 이상의 군선 보유를 금지한 것과 같은 해에 길이 30견(약 55m)에 3중의 누각을 세우고 200척의 큰 노를 400명의 수부가 젓는 역사상 최대의 아타케부네인 아타케마루를 완성했다. 그러나 아타케마루는 거대한 크기 때문에 항해에 어려움이 따랐고, 스미다가와 강어귀에 거의 계류된 채 방치된 끝에 1682년에 해체되어 일본 배 마지막 거선이 되었다.
4. 1. 무로마치 시대 이전
일본에서는 고대에 모로타부네(諸手船)라 불리는 소형 노젓는 배가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후대의 아타케부네(安宅船) 등 군선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중세 전반에는 해상에서 활동하는 군사 세력이 활약했지만, 수군 전용으로 건조된 군선은 없었고, 어선이나 상선을 육전에서 사용되는 방패판으로 임시로 무장한 것을 사용하였다.본격적인 군선의 등장은 무로마치 시대 중기 이후의 일이며, 전국 시대(戦国時代)에 들어서면서 전국 다이묘(戦国大名)에 의한 수군의 조직화가 진행됨에 따라 모리씨(毛利氏), 다케다씨(武田氏), 고호조씨(後北条氏) 등의 유력한 다이묘는 소수이지만, 배하의 수군에 아타케(安宅)라 불리는 대형 군선을 건조하게 되었다.
1573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자신의 영지인 내해가 된 비와호(琵琶湖)에서 길이 30간(약 55m), 100척(挺) 규모의 대형 선박을 건조하였다. 같은 해, 이 대형 선박은 사카모토(坂本)에서 후쿠오카(湖北)의 다카시마군(高島郡)(시가현) 고시마(高嶋)로 출진하여 기도성(木戸城), 다나카성(田中城)을 함락시켰다.[9]
4. 2. 센고쿠 시대 (전국 시대)
16세기 중후반,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일본에서는 막부 지배자들이 패권을 다투면서 수백 척에 달하는 대규모 해군을 건설하는 등 해군력 증강에 힘썼다.[1] 이 시기 건조된 가장 크고 위협적인 함선이 바로 아타케부네(安宅船)였다. 아타케부네는 순수한 군함이라기보다는 연안 작전에 주로 사용되는 부유하는 요새와 같았다.[1] 돛을 이용한 풍력 추진이 어려워 주로 노를 저어 추진력을 얻었다.당시 다이묘(大名)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78년에 6척의 대형 철피 아타케부네를 건조했다는 기록이 다몬이(多聞院) 주지의 일기에 남아있다.[1] 이 배들은 "철갑선(鉄甲船, Tekkōsen)"이라고 불렸는데, 대포와 화살 공격을 막기 위해 상부 구조물을 철판으로 강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는 이 배들을 직접 목격하고도 철제 외판에 대한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1]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구키 수군(九鬼水軍)을 이끌던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는 1578년에 검은 대형 선박 6척을 건조했으며,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는 흰 대형 선박 1척을 건조했다.[10] 흥복사(興福寺) 승려의 기록(『다문원일기』(多聞院日記))에 따르면 이 배들은 가로 7칸(약 12.6m), 세로 12~13칸(약 24m) 크기였다고 한다.[11] 그러나 『신장공기』(信長公記)의 손경각문고(尊経閣文庫) 소장본(겉표제 『안토일기』(安土日記))에는 구키 요리타카가 건조한 6척이 "길이 18칸, 폭 6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10] 길이와 폭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 배들은 모리씨(毛利氏) 수군의 화기 공격에 대비하여 철판으로 장식되었으며, 이는 당시 군선으로서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였다.[12] 이것이 바로 노부나가의 유명한 "철갑선"이다.[12] 구네키 솔디 오르간티노(グネッキ・ソルディ・オルガンティノ) 선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 배들은 각각 3문의 대포와 다수의 대철포를 장착하고 있었다.[10] 이 배들은 1578년 기즈가와구치 전투(木津川口の戦い)에서 모리 수군(毛利水軍)을 격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10](제2차 기즈가와구치 전투(第二次木津川口の戦い))
반면, 1593년 선교사 조앙 로드리게스(João Rodrigues)가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에게 보낸 편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건조한, 철제 외판으로 완전히 덮인 아타케부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2]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壬辰倭乱) 당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이 배들을 건조했으며, 상부 구조물 전체를 철판으로 덮었다고 한다.[2]
아타케부네는 대포의 반동을 견딜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대 4문(소형 후장식 소형 회전포가 2문 있다면 6문)의 대포와 다수의 대구경 소총으로 무장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8년 기즈가와구치 전투에서 이 배들을 활용하여 모리 씨의 함대를 성공적으로 봉쇄하고 격파했다. 당시 일본 해전은 함선 간의 전투보다는 승무원 간의 백병전을 중시했기 때문에, 아타케부네는 일본 해전 전술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보였다.
임진왜란(壬辰倭乱)에서 아타케부네의 약점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3][4] 조선 수군의 판옥선(板屋船)은 아타케부네보다 견고한 구조를 바탕으로 더 많은 대포를 탑재할 수 있었고, 이를 이용해 원거리에서 일본 함선을 공격하여 아타케부네의 접근 전술을 무력화시켰다.
1584년 카니에 성 전투(蟹江城合戦)에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는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의 병사 3천 명을 이세 시라코우라(伊勢白子浦)에서 카니에우라(蟹江浦)에 상륙시켰으나, 해전에서 패배하여 대형 선박을 버리고 작은 배로 도망쳤다. 이때 요시타카의 대형 선박은 "다이묘마루"(大宮丸)[13], "일본마루"(日本丸)[14]라고 불렸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출병(문록·경장의 역(文禄・慶長の役)) 당시, 서국 다이묘(大名)들은 군수물자와 병력 수송을 위해 대량의 수송선을 건조했다. 초기에는 조선 수군의 습격으로 피해가 컸지만, 일본 측도 수군을 정비하면서 대형 선박(안택선)을 준비했다. 『태합기(太閤記)』에 따르면 석고 10만 석당 대형 선박 2척을 준비시켰다고 한다.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건조한 "귀숙"(鬼宿)은 안골포 해전(安骨浦海戦)에서 강력한 선체 덕분에 탈출에 성공했으며, 이후 "일본마루"로 개명되었다.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에게 보낸 편지에는 "선박 길이 18칸(약 32m), 폭 6칸(약 11m)"으로 규정된 군선 건조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무카이 쇼겐 타다카츠(向井将監忠勝)가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와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를 위해 건조한 대형 아타케부네인 "아타케마루(安宅丸, Atakemaru)"는 구리판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5]
4. 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임진왜란(壬辰倭乱)에서 아타케부네의 단점이 두드러졌다. 더욱 견고한 구조로 훨씬 더 많은 대포를 탑재할 수 있었던 조선 수군의 판옥선(板屋船)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3][4] 조선 수군은 이러한 이점을 적극 활용하여 다수의 대포로 장거리에서 일본 함선을 공격하여 아타케부네 기반 일본 해군의 접근 전술을 무력화시켰다.1591년에 시작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출병(문록·경장의 역(文禄・慶長の役))에서는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송하고 병참을 유지하기 위해 서국의 다이묘(大名)에 의해 대량의 수송선이 건조되었다. 이러한 수송선 외에도, 초전기에 조선 수군의 습격으로 피해가 발생하자 일본 측도 수상 전투용으로 수군의 집중과 정비를 시작하여, 『태합기(太閤記)』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석고 10만 석당 대형 선박(아타케부네) 2척을 준비시켰다고 한다. 그 결과, 경장의 역에서는 일본 수군이 활약하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를 위해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건조한 "귀숙"(鬼宿)은 길이 100척(약 30m), 누각 100개로, 노 젓는 사람과 전투원을 합쳐 180명이 탑승할 수 있었던 거대한 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명으로 "일본마루"로 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안골포 해전(安骨浦海戦)에서는 적의 습격을 강력한 선체로 막고 탈출에 성공하였다(크기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다). 또한, 야마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선박 길이 18칸(약 32m), 폭 6칸(약 11m)"으로 규정된 군선의 건조를 명령하고 있다.
4. 3. 1. 임진왜란(壬辰倭乱)과 아타케부네
임진왜란(壬辰倭乱)에서 아타케부네의 단점이 두드러졌다. 더욱 견고한 구조로 훨씬 더 많은 대포를 탑재할 수 있었던 조선 수군의 판옥선(板屋船)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3][4] 조선 수군은 이러한 이점을 적극 활용하여 다수의 대포로 장거리에서 일본 함선을 공격하여 아타케부네 기반 일본 해군의 접근 전술을 무력화시켰다.1591년에 시작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출병(문록·경장의 역(文禄・慶長の役))에서는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송하고 병참을 유지하기 위해 서국의 다이묘(大名)에 의해 대량의 수송선이 건조되었다. 이러한 수송선 외에도, 초전기에 조선 수군의 습격으로 피해가 발생하자 일본 측도 수상 전투용으로 수군의 집중과 정비를 시작하여, 『태합기(太閤記)』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석고 10만 석당 대형 선박(안택선) 2척을 준비시켰다고 한다. 그 결과, 경장의 역에서는 일본 수군이 활약하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를 위해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건조한 "귀숙"(鬼宿)은 길이 100척(약 30m), 누각 100개로, 노 젓는 사람과 전투원을 합쳐 180명이 탑승할 수 있었던 거대한 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명으로 "일본마루"로 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안골포 해전(安骨浦海戦)에서는 적의 습격을 강력한 선체로 막고 탈출에 성공하였다(크기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다). 또한, 야마우치 카즈토요(山内一豊)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선박 길이 18칸(약 32m), 폭 6칸(약 11m)"으로 규정된 군선의 건조를 명령하고 있다.
4. 4. 에도 시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도 시대 초기에는 일본 각지에서 거대한 성이 잇따라 축성되는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를 반영하여 구키씨를 비롯한 서국의 여러 다이묘들이 일본마루를 능가하는 거대한 함선을 잇따라 건조하면서 아타케부네의 발전은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1609년 에도 막부는 서국 다이묘의 수군력 억제를 위해 500석 이상의 군선을 몰수했다(대선건조금지).1615년 오사카 전투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아타케부네의 군사적 필요성은 낮아졌고, 속도가 느리고 해상 단속에 효용성이 낮은 아타케부네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대신 각 번의 선수조(수군)는 속도가 빠른 세키센을 대형화하여 군선의 주력으로 삼게 되었다. 1635년에는 무가제법도에 따라 전국의 다이묘에게 500석 이상의 군선 보유가 금지되었다.
에도 막부는 500석 이상의 군선 보유를 금지한 것과 같은 해에 길이 30견(약 55m)에 3중의 누각을 세우고 200척의 큰 노를 400명의 수부가 젓는 역사상 최대의 아타케부네인 아타케마루를 완성했다. 그러나 아타케마루는 거대한 크기 때문에 항해에 어려움이 따랐고, 스미다가와 강어귀에 거의 계류된 채 방치된 끝에 1682년에 해체되어 일본 배 마지막 거선이 되었다. 아타케부네가 사라진 후 막부와 각 번이 순행이나 참근교대에 사용하는 오자부네를 비롯한 세키센이 주력인 시대가 막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막말에는 서양식 해군 건설이 추진되면서 기존의 군선 시대는 끝나고, 아타케부네는 다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5. 유명한 아타케부네
참조
[1]
서적
Samurai Warfare
Cassell & Co
1996
[2]
서적
Historia de Japam
https://books.google[...]
Biblioteca Nacional Portugal
1981
[3]
서적
Fighting Techniques of the Oriental World, AD 1200-1860: Equipment, Combat Skills, and Tactics
https://books.google[...]
St. Martin's Press
2008
[4]
서적
Samurai Invasion: Japan's Korean War, 1592-1598
https://books.google[...]
Cassell & Co
2002
[5]
문서
安宅御船仕様帖・安宅御船諸色注文帖
1711
[6]
서적
和船II
[7]
서적
和船II
[8]
웹사이트
木製軍船ひな形
https://bunkazai.met[...]
[9]
서적
信長公記
[10]
서적
信長公記
[11]
문서
다문원일기
[12]
문서
다문원일기,オルガンティノの記録
[13]
서적
武家事記
[14]
서적
常山紀談・武功雑記
[15]
서적
기술, 배, 정치 - 기술, 배, 정치는 세계패권을 어떻게 바꿨는가?
http://book.naver.co[...]
부경대 환경해양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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