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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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동 전투는 1950년 7월 25일부터 8월 1일까지 한국 전쟁 중 안동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북한군의 낙동강 방어선 돌파 시도에 맞서 국군 제1군단이 방어전을 펼쳤으나, 작전 실패로 많은 병력 손실을 입었다. 전투 배경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려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북한군은 안동을 점령하여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전투는 국군의 방어 시도에도 불구하고, 군단 지휘부의 미숙한 작전 수행, 명령 전달 지연, 수도사단 제1연대의 방어 실패 등으로 인해 국군의 철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국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북한군 역시 피해를 입어 남진이 지연되었고,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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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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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교전 명칭 | 안동 전투 |
분쟁 | 한국 전쟁 |
시기 | 1950년 7월 29일 – 8월 1일 |
장소 | 대한민국경상북도안동시 |
결과 | 대한민국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지휘관 1 | 미상 |
지휘관 2 | 미상 |
부대 | |
부대 1 | 8사단 수도사단 |
부대 2 | 12사단 |
병력 규모 | |
병력 규모 1 | 미상 |
병력 규모 2 | 탱크 30대 |
피해 규모 | |
피해 규모 1 | 미상 |
피해 규모 2 | 사망 600명 전차 11대 파괴 |
2. 전투 배경
1950년 8월, 국군과 유엔군은 남지-영덕을 잇는 약 160km, 폭 약 80km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공세에 맞섰다. 낙동강 방어선은 낙정리-영덕, 낙정리-남지, 남지-마산 구간으로 나뉘며, 하천과 고지가 많아 방어에 유리하고 도로망이 발달하여 내선 작전에 유리했다. 洛東江|낙동강중국어은 강폭 약 400~800미터, 수심 1.5미터 이상이었다.
북한군은 안동을 점령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이를 위해 북한군 제12사단(사단장: 최춘국 소장)은 안동을 정면 공격하고, 제8사단(사단장: 오백룡 소장)은 예천을 거쳐 남하하며, 제5사단 일부와 776게릴라부대는 안동을 우회하여 국군 제1군단의 후방을 차단하려 했다.
이에 국군은 제18연대를 예천에 배치시켜 북한군 제8사단을 저지하려고 하였고, 8사단과 수도사단 제1연대를 안동 북쪽에 배치시켰다.
7월 6일, 대한민국 육군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단양군에서 남한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병력과 화력 부족으로 7월 12일 풍기로 철수했다. 이후 V자형 진지를 점령하고 인민군 제8사단을 격파하기도 했다.
인민군은 공격 부대를 제12사단으로 교체하고, 안동 점령 지연에 따라 전차 부대를 증원하여 단양에서 정비 중인 제8사단을 문경시, 예천을 경유하여 영주시 후방으로 진출시켜 한국군을 협공했다. 한국군 제8사단은 풍기, 영주 방어에서 12일간 지연시켰지만, 인민군 2개 사단에 협공당하여 7월 24일 옹천, 안동으로 철수했다.
대한민국 육군 제1군단(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7월 24일부터 제8사단과 수도사단을 예하에 두고, 25일 안동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수도사단은 예하 2개 연대가 다른 사단에 배속되어 제1연대만 남아 안동 서쪽 23km 지점인 예천에 있었다.
인민군 전선 사령부는 대전 전투 이후, 제4차 작전(7월 29일~9월 25일)으로 전환했다. 목표는 영동군, 함창, 안동 지역의 유엔군 방어 집단을 격멸하고 낙동강을 신속하게 도하하는 것이었다. 인민군은 주공 부대가 진행 중인 서부 전선이 아닌, 조공 부대의 작전 지역인 중부 전선에 전력을 집중했다.
3. 전투 경과
7월 25일, 국군 제8사단은 옹천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대치하며 내성천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7월 28일에 돌파당했다. 제8사단은 옹천과 안동에 두 개의 방어선을 설정하고 차례로 지연전을 펼쳤다.
7월 30일, 예천을 점령한 북한군은 국군 제21연대를 정면에 두고 제12사단과 제8사단의 일부 병력을 배치하였다. 좌측에서는 국군 제8사단 10연대와 수도사단 제1연대의 간격으로 침투하였으며, 동측에서는 예안 방면으로 우회 남하한 북한군 일부 병력이 국군 제16연대를 공격하여 3개 방면에서 포위했다. 결국 제16연대가 돌파되면서 국군 제8사단은 토계 텃골 일대로 철수했다.[1]
7월 31일 19시경, 국군 제1군단은 8월 1일 5시까지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 그러나 철수 시기와 방법을 결정하는 군단 참모회의는 8월 1일 2시까지 4시간이나 소요되어 철수가 지연되었다. 제8사단이 철수한 후에 수도사단 제1연대가 엄호하기로 결정되었다.[1]
철수 명령은 유선이나 무선 통신이 아닌 연락장교를 통해 전달되었는데, 명령 전달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일부 부대는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하는 혼란이 발생했다.[1]
8사단 철수 엄호를 맡은 수도사단 1연대는 안동 북쪽 2km 지점에 배치되었다.[1] 그러나 8월 1일 4시에 시작된 북한군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방어선이 뚫려 안동 시내로 철수했다.[1] 아군과 북한군이 뒤섞여 안동 시내로 밀려오는 상황에서, 아군은 8월 1일 7시경 안동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여 북한군의 도하를 막으려 했다.[1]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되면서 철수로가 막힌 국군 잔여 부대는 400m에 달하는 낙동강을 헤엄쳐 건너야 했다.[1] 많은 병력이 급류에 휘말려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1] 그러나 북한군 역시 제12사단장 최춘국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1]
3. 1. 국군의 방어 및 북한군의 공세 (7월 25일 ~ 7월 30일)
7월 25일, 국군 제8사단은 옹천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대치하며 내성천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7월 28일에 돌파당했다. 이에 제8사단은 옹천과 안동에 두 개의 방어선을 설정하고 차례로 지연전을 펼쳤다.
7월 30일, 예천을 점령한 북한군은 중앙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국군 제21연대를 정면에 두고 제12사단과 제8사단의 일부 병력을 배치하였다. 한편, 좌측에서는 국군 제8사단 10연대와 수도사단 제1연대의 간격으로 침투하였으며, 동측 방면에서는 예안 방면으로 우회 남하한 북한군 일부 병력이 국군 제16연대를 공격하여 3개 방면에서 포위했다. 결국 제16연대가 돌파되면서 국군 제8사단은 토계 텃골 일대로 철수했다.[1]
3. 2. 안동 철수작전 (7월 31일 ~ 8월 1일)
7월 31일 19시경, 국군 제1군단은 8월 1일 5시까지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 그러나 철수 시기와 방법을 결정하는 군단 참모회의는 8월 1일 2시까지 4시간이나 소요되어 철수가 지연되었다. 제8사단이 철수한 후에 수도사단 제1연대가 엄호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1]
철수 명령은 유선이나 무선 통신이 아닌 연락장교를 통해 전달되었는데, 명령 전달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일부 부대는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하는 혼란이 발생했다.[1]
8사단 철수 엄호를 맡은 수도사단 1연대는 안동 북쪽 2km 지점에 배치되었다.[1] 그러나 8월 1일 4시에 시작된 북한군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방어선이 뚫려 안동 시내로 철수했다.[1] 아군과 북한군이 뒤섞여 안동 시내로 밀려오는 상황에서, 아군은 8월 1일 7시경 안동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여 북한군의 도하를 막으려 했다.[1]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되면서 철수로가 막힌 국군 잔여 부대는 400m에 달하는 낙동강을 헤엄쳐 건너야 했다.[1] 많은 병력이 급류에 휘말려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1] 그러나 북한군 역시 제12사단장 최춘국(崔春國)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1]
4. 안동 철수작전의 실패 원인
7월 31일 19시경 하달된 철수 명령은 4시간 동안 군단 참모 회의가 열리면서 지연되었다. 유선이나 무선 통신 대신 연락장교를 통해 명령을 전달하면서 일부 부대는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하는 등 전달 체계에 문제가 발생했다.[1]
긴박한 상황에서 철수 명령이 영어로 전달되었고, 오버레이와 군단 지도의 축척이 맞지 않아 군단 작전 참모인 김종갑 대령이 번역 및 대조를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작전 기안이 늦어졌다.[1]
군단 사령부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 참모장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으나, 각 사단이 우선 철수를 주장하며 의견이 대립했다. 군단 참모장 최덕신 대령은 야간 철수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결국 8월 1일 오전 2시경, 김홍일 소장이 "수도사단의 엄호 하에 제8사단이 철수하라"고 결정했지만, 최덕신 대령은 군단 명령에 "자기 사단은 스스로 엄호하면서 후퇴하라"고 덧붙였다.[1]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철수 명령에 "무모하고 무지하며 무능한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격노하며 반발했다. 부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설득했으나, 김석원 준장이 자결을 시도하는 소동까지 벌어져 철수가 더욱 지연되었다.[1]
철수 엄호를 맡은 수도사단 제1연대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안동 북쪽 2킬로미터 선에 방어 진지를 점령했으나, 인민군에 의해 돌파당했다. 이는 중대장, 소대장에게까지 임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군이 모두 철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북한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1]
5. 전투 결과 및 영향
안동을 점령한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은 안동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사단장 최춘국 소장이 전사했고, 후임으로 최인두 소장이 임명되었다.[1]
6. 주요 참전 부대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주요 참전 부대는 다음과 같다.
- 대한민국 국군
- * 제1군단
- * 수도사단
- * 제8사단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 * 제2군단[1]
- ** 제12사단[1]
6. 1. 대한민국 국군
부대 | 지휘관 | 예하 연대 |
---|---|---|
제1군단 | 김홍일 소장 | |
수도사단 | 김석원 준장 | 윤춘근 중령 (제1연대) |
제8사단 | 이성가 대령 | 고근홍 중령 (제10연대) |
문용채 대령, 7월 28일부터 김동수 중령 (제16연대) | ||
김용배 대령 (제21연대) |
6.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7. 안동 전투의 영웅
허봉익 대위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8. 안동 전투에 대한 평가
안동 전투 이후, 국군 제8사단장 이성가 대령과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교체되었다. 후임으로는 각각 최덕신 대령과 백인엽 대령이 임명되었다.[1]
한편, 안동을 점령한 북한군 제12사단은 '안동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사단장 최춘국 소장이 전사했고, 후임으로 최인두 소장이 임명되었다.[1]
참조
[1]
서적
Alexander, p. 116
[2]
서적
Alexander, p.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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