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예르몰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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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1777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러시아의 군인으로, 코시치우슈코 봉기, 나폴레옹 전쟁, 코카서스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1816년에는 조지아 주둔 러시아군 사령관 겸 독립 조지아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코카서스 지역을 통치했다. 코카서스 전쟁에서 잔혹한 정책으로 악명을 떨쳤으며, 1827년 해임된 후 국가 평의회 의원으로 복귀했다. 그는 군사적 기량으로 칭송받았으나, 코카서스 지역에서는 그의 잔혹한 통치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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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예르몰로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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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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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예르몰로프 |
로마자 표기 | Aleksey Petrovich Yermolov |
러시아어 표기 | Алексе́й Петро́вич Ермо́лов |
러시아어 발음 | jɪrˈmoləf |
출생일 | 1777년 6월 4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
사망일 | 1861년 4월 23일 |
사망지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
매장지 | 알 수 없음 |
소속 | 러시아 제국 |
군 종류 | 러시아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787년–1827년 |
최종 계급 | 보병대장 |
소속 부대 |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 연대 |
모교 |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 |
주요 전투 | |
서훈 | |
훈장 | 성 안드레 훈장 성 게오르기 훈장 성 블라디미르 훈장 성 안나 훈장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 백수리 훈장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1777년 6월 4일 (구력 5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오룔 현 출신의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3]예르몰로프/Ермо́ловru의 아버지 표트르 알렉세예비치는 오룔 현 므첸스크 군에 작은 영지를 소유한 지주였다.[3] 어린 나이에 프레오브라젠스키 생명 근위 연대에 입대했으며,[4] 1784년부터 1791년까지 모스크바 대학교 기숙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791년 중위로 진급하여 니즈니 노브고로드 용기병 연대로 전출되었고, 대위 계급을 받았다. 1793년에는 포병 및 공병 사관 후보생 학교에서 잠시 교관으로 복무했다.[2]
1794년 코시치우슈코 봉기에 참전하여 프라가 전투에서 공을 세워 1795년 1월 12일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을 받았다.[2] 1796년에는 1796년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1799년 1월 7일, 차르 파벨 1세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코스트로마로 추방되어 2년간 망명 생활을 했으며, 이 기간 동안 라틴어를 독학했다.[4]
1801년 알렉산드르 1세 즉위 후 사면되어 군에 복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저서를 연구하며 그의 제자를 자처했다. 1801년 5월 13일 제8 포병 연대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 21일 기마 포병 중대로 전출되었다.[4]
2. 1. 출생 및 가문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예르몰로프는 1777년 6월 4일(구력 5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오룔 현 출신의 러시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예르몰로프는 오룔 현 므첸스크 군에 작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3] 어린 시절 예르몰로프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생명 근위 연대에 입대했으며,[4] 1784년부터 1791년까지 모스크바 대학교의 기숙 학교에서 교육받았다.[2] 1791년 중위로 진급하여 니즈니 노브고로드 용기병 연대로 전출되었고, 대위 계급을 받았다. 1793년에는 포병 및 공병 사관 후보생 학교에서 잠시 교관으로 복무했다.[2]1794년 코시치우슈코 봉기 진압에 참여하여 프라가 전투에서 공을 세워 1795년 1월 12일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을 받았다.[2] 1796년에는 1796년 페르시아 원정에 참전했다.[2] 1799년 1월 7일, 차르 파벨 1세에 대한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코스트로마로 추방되어 2년간 망명 생활을 했으며, 이 기간 동안 라틴어를 독학했다.[4]
1801년 알렉산드르 1세 즉위 후 사면되어 군에 복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저서를 연구하며 그의 제자를 자처했다.[4] 1801년 5월 13일 제8 포병 연대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6월 21일 기마 포병 중대로 전출되었다.[4]
2. 2. 교육 및 초기 군 복무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1777년 6월 4일 (구력 5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오룔 현 출신의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3] 어린 나이에 프레오브라젠스키 생명 근위 연대에 입대했으며,[4] 1784년부터 1791년까지 모스크바 대학교 기숙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791년 중위로 진급하여 니즈니 노브고로드 용기병 연대로 전출되었고, 대위 계급을 받았다. 1793년에는 포병 및 공병 사관 후보생 학교에서 잠시 교관으로 복무했다.[2] 1794년 코시치우슈코 봉기에 참전하여 프라가 전투에서 공을 세워 1795년 1월 12일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을 받았다.[2] 1796년에는 1796년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1799년 1월 7일, 차르 파벨 1세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코스트로마로 추방되어 2년간 망명 생활을 했으며, 이 기간 동안 라틴어를 독학했다.[4] 1801년 파벨 1세가 암살된 후, 알렉산드르 1세는 예르몰로프를 사면했고, 그는 군에 복귀하여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저서를 연구하며 자신을 그의 제자로 여겼다. 1801년 5월 13일 제8 포병 연대에 임명되었고, 1801년 6월 21일 기마 포병 중대로 전출되었다.[4]3. 나폴레옹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예르몰로프는 후방과 선봉 부대에서 복무했으며, 암슈테텐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1806년 7월 16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 1807년 폴란드 전역에서는 표트르 바그라티온 공의 선봉대에서 복무하며 란츠베르크 (동프로이센)로의 퇴각 중 후위 부대 작전과 아일라우 전투에서 포병 중대를 지휘했다. 구트슈타트-데펜 전투, 하일스베르크 전투, 프리드란트 전투에서 기병 포병 중대를 지휘하여 성 게오르기 훈장 (3급, 1807년 9월 7일)을 받았다. 1808년 3월 28일 소장으로 진급했다.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레이 드 톨리와 바그라티온 장군 사이의 갈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바클레이의 전략에 반대하여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그를 바그라티온으로 교체할 것을 요청했다. 스몰렌스크 전투와 루비노 전투에서 공을 세워 1812년 11월 12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요새를 탈환하는 반격을 지휘하다 경미한 부상을 입었으며, 이 용맹함으로 성 안나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원정 기간 동안 예르몰로프는 러시아 주력군의 사령부에서 근무 장교로 복무했으며,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에서 전투를 치렀다. 1812년 10월~11월에는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밀로라도비치 휘하 선봉대에서 복무하며 뱌즈마 전투와 크라스니 전투에 참전했다. 11월 말에는 로젠 장군 휘하 선봉대 분견대를 지휘하여 베레지나 전투에 참여했다. 12월 3일, 주 사령부로 소환되어 러시아군 참모장이 되었고, 3주 후에는 러시아군 포병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1813년과 1814년 유럽 원정 당시 연합군의 포병 군단을 지휘했다. 1813년 뤼첸 전투에 참전했으며, 바우첸 전투에서는 퇴각 중 러시아 후위 부대를 지휘했다. 쿨름 전투에서 그의 유능한 지휘는 전투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 프로이센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814년에는 파리 주변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1814년 4월 7일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3. 1.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예르몰로프는 후방과 선봉 부대에서 복무했으며, 암슈테텐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1806년 7월 16일 대령으로 진급했다.3. 2. 폴란드 전역 (1807년)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후방 및 선봉 부대에서 복무하며 암슈테텐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활약하여 1806년 7월 16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1807년 폴란드 전역에서는 표트르 바그라티온 공의 선봉대에서 복무하며 란츠베르크 (동프로이센)로의 퇴각 중 후위 부대 작전과 아일라우 전투에서 포병 중대를 지휘했다. 구트슈타트-데펜 전투, 하일스베르크 전투, 프리드란트 전투에서 기병 포병 중대를 지휘하여 성 게오르기 훈장 (3급, 1807년 9월 7일)을 받았다. 1808년 3월 28일 소장으로 진급했다.3. 3. 러시아 원정 (1812년)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미하일 안드레아스 바클레이 드 톨리와 바그라티온 장군 사이의 갈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바클레이의 전략에 반대하여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그를 바그라티온으로 교체할 것을 요청했다. 스몰렌스크 전투와 루비노 전투에서 공을 세워 1812년 11월 12일 중장으로 진급했다. 보로디노 전투에서는 요새를 탈환하는 반격을 지휘하다 경미한 부상을 입었으며, 이 용맹함으로 성 안나 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원정 기간 동안 예르몰로프는 러시아 주력군의 사령부에서 근무 장교로 복무했으며, 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에서 전투를 치렀다. 1812년 10월~11월에는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밀로라도비치 휘하 선봉대에서 복무하며 뱌즈마 전투와 크라스니 전투에 참전했다. 11월 말에는 로젠 장군 휘하 선봉대 분견대를 지휘하여 베레지나 전투에 참여했다. 12월 3일, 주 사령부로 소환되어 러시아군 참모장이 되었고, 3주 후에는 러시아군 포병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3. 4. 유럽 원정 (1813-1814년)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1813년과 1814년 유럽 원정 당시 연합군의 포병 군단을 지휘했다. 1813년 뤼첸 전투에 참전했으며, 바우첸 전투에서는 퇴각 중 러시아 후위 부대를 지휘했다. 쿨름 전투에서 그의 유능한 지휘는 전투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 프로이센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814년에는 파리 주변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1814년 4월 7일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4. 코카서스 전쟁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1816년 조지아 주둔 러시아군 사령관 겸 독립 조지아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7] 그는 코카서스 산맥을 점령하고 이슬람 부족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골레스탄 조약에서 러시아가 획득한 영토 일부를 반환하겠다는 알렉산드르 1세의 약속을 피하는 임무도 맡았다.[5]
예르몰로프는 코카서스 전쟁에서 잔혹한 정책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나는 내 이름의 공포가 쇠사슬이나 요새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국경을 지키기를 바란다."라고 알렉산드르 1세에게 보고했다.[6] 그는 유능한 행정가로서 1818년 페르시아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그 공로로 같은 해 보병 대장으로 진급했다.[7] 1817년 순자 강에 요새를 건설하고, 이듬해 그로즈니 요새를 건설했다.[1] 또한 퍄티고르스크, 키슬로보츠크와 같은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하고, 트빌리시를 유럽식으로 재건하는 등 기존 도시들을 개선하고, 조지아 군사 도로를 비롯한 통신로를 개선, 건설했다.[1]
그는 10년 동안 조지아 군 사령관이자 페르시아 제국 대사를 겸임했다. 그는 고지대 사람들의 공격을 격퇴하고 징벌적인 습격을 감행하여 많은 동맹 부족의 충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의 독립적인 성격은 전쟁부와의 갈등을 야기했고, 여러 차례의 봉기를 막지 못했다. 1825년에는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에게 데카브리스트 반란 관련 혐의로 체포될 예정임을 경고하여 체포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8]
1827년, 예르몰로프의 경력은 갑작스럽게 끝났는데, 니콜라이 1세는 그를 이반 파스케비치로 교체했다.[9] 정확한 해임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니콜라이 1세의 미움을 받았고 부족을 통제하지 못한 혐의를 받았다.[9] 모셰 가머는 그의 활동이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증오를 격화시키고 저항을 강화했으며, 낙쉬반디 ''타리카''(수피 형제단)의 확산 형태로 이슬람의 역할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10] 예르몰로프는 1827년 12월 7일 전액 연금으로 해임되었다.[9]
그러나 4년 후인 1831년, 니콜라이 1세는 예르몰로프를 복귀시켜 국가 평의회 의원으로 임명했다.[9] 예르몰로프의 보병 장군 계급은 1833년에 확인되었다.
4. 1. 코카서스 총독 임명 및 초기 활동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1816년 조지아 주둔 러시아군 사령관 겸 독립 조지아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7] 그는 코카서스 산맥을 점령하고 이슬람 부족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골레스탄 조약에서 러시아가 획득한 영토 일부를 반환하겠다는 알렉산드르 1세의 약속을 피하는 임무도 맡았다.[5]예르몰로프는 코카서스 전쟁에서 잔혹한 정책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나는 내 이름의 공포가 쇠사슬이나 요새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국경을 지키기를 바란다."라고 알렉산드르 1세에게 보고했다.[6] 그는 유능한 행정가로서 1818년 페르시아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그 공로로 같은 해 보병 대장으로 진급했다.[7] 1817년 순자 강에 요새를 건설하고, 이듬해 그로즈니 요새를 건설했다.[1] 또한 퍄티고르스크, 키슬로보츠크와 같은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하고, 트빌리시를 유럽식으로 재건하는 등 기존 도시들을 개선하고, 조지아 군사 도로를 비롯한 통신로를 개선, 건설했다.[1]
그는 10년 동안 조지아 군 사령관이자 페르시아 제국 대사를 겸임했다. 그는 고지대 사람들의 공격을 격퇴하고 징벌적인 습격을 감행하여 많은 동맹 부족의 충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의 독립적인 성격은 전쟁부와의 갈등을 야기했고, 여러 차례의 봉기를 막지 못했다. 1825년에는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에게 데카브리스트 반란 관련 혐의로 체포될 예정임을 경고하여 체포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8]
4. 2. 강경 진압 정책
예르몰로프는 코카서스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잔혹한 코카서스의 러시아 군사 정책을 펼쳤다. 그는 "나는 내 이름의 공포가 쇠사슬이나 요새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국경을 지키기를 바란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 진압 정책을 고수했다.[6] 1817년, 그는 순자 강에 요새를 건설하고 이듬해 그로즈니 요새를 건설했다.[1] 또한, 고지대 사람들의 공격을 격퇴한 후 징벌적인 습격을 감행하여 많은 동맹 부족의 충성을 확보했다.[1]그러나 이러한 강경책은 오히려 현지인들의 저항을 강화하고 이슬람의 역할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10] 결국 예르몰로프는 1827년 니콜라이 1세에 의해 해임되고 이반 파스케비치로 교체되었다.[9]
4. 3. 데카브리스트 반란 연루 의혹
1825년 예르몰로프는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가 데카브리스트 반란과 관련된 혐의로 체포될 예정임을 알게 되자 그에게 이를 경고했다.[8] 그리보예도프는 이 경고 덕분에 유죄 증거 서류를 파기하고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8]4. 4. 해임 및 복귀
예르몰로프는 10년 동안 조지아 군 사령관이자 페르시아 제국 대사를 겸임했다. 그의 독립적인 성격은 종종 전쟁부와 갈등을 일으켰고, 전쟁부 구성원 중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적대감으로 악화되었다.[9] 그는 병사들에게 숭배받았고, 종종 그들과 친목을 다졌으며, 다게스탄의 고지대 사람들과 싸우는 데 일반적으로 성공했지만 여러 차례의 봉기를 막는 데 실패했다.[9] 1825년 예르몰로프는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가 데카브리스트 반란과 관련된 혐의로 체포될 예정임을 알게 되자 그에게 이를 경고하여 그리보예도프가 몇몇 유죄 증거 서류를 파기하고 체포를 피할 수 있도록 했다.[8]1827년, 예르몰로프의 경력은 갑작스럽게 끝났는데, 니콜라이 1세는 그를 이반 파스케비치로 교체했다.[9] 정확한 해임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니콜라이 1세의 미움을 받았고 부족을 통제하지 못한 혐의를 받았다.[9] 모셰 가머는 그의 활동이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증오를 격화시키고 저항을 강화했으며, 낙쉬반디 ''타리카''(수피 형제단)의 확산 형태로 이슬람의 역할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10] 예르몰로프는 1827년 12월 7일 전액 연금으로 해임되었다.[9]
그러나 4년 후인 1831년, 니콜라이 1세는 예르몰로프를 복귀시켜 국가 평의회 의원으로 임명했다.[9] 예르몰로프의 보병 장군 계급은 1833년에 확인되었다.
5. 은퇴 이후
예르몰로프는 말년 30년 동안 오룔 근처의 저택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크림 전쟁 중 농민 민병대를 이끌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거절했다. 그는 1861년 4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으며 오룔의 트리니티 교회에 묻혔다. 그는 1796년부터 1816년까지의 복무에 대한 회고록을 남겼다. 그의 ''자피스키''(회고록)는 그의 초기 경력, 나폴레옹 전쟁, 그리고 코카서스에서의 복무를 다루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회고록은 사후에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
6. 평가 및 유산
러시아에서 그는 군사적 기량, 용맹함, 그리고 전략으로 유명했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제국 군대 지휘는 낭만주의 시대의 알렉산드르 푸시킨, 바실리 주콥스키 등의 시인들에 의해 미화되었다.
그러나 코카서스 지역에서는(오세티야 제외) 예르몰로프는 그가 저지른 잔학 행위로 악명이 높다.[11][12][13][14][15] 역사학자 찰스 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르몰로프는 전형적인 변경 정복자였다. 그는 코카서스 고지 정복을 위한 포괄적인 전략을 최초로 사용했으며, 그의 잔혹한 방법은 차르 시대, 볼셰비키, 그리고 21세기까지 러시아 장군들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사용되었다. 예르몰로프는 코카서스 전역에서 가장 칭송받는 동시에 가장 미움을 받는 러시아 사령관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사회에서 그는 훌륭한 라틴어를 인용하는 고위 장교였다. 수 세대에 걸친 토착 산악인들에게 그는 마을을 파괴하고 가족을 학살한 무서운 "야르물"이었다. 그는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지만, 또 다른 차르 니콜라이 1세에게는 의심을 받았다. 그는 당시 암울한 코카서스 변경을 문명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환영받았지만 오늘날에는 국가 주도 테러리즘이라고 불릴 만한 일련의 정책을 시행했다."[16]
존 F. 배들리는 1908년에 저서 ''코카서스에 대한 러시아의 정복'' (제6장, 1908)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람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예르몰로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도록 태어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거대한 체격과 비범한 신체적 힘을 지녔으며, 굵은 머리카락으로 틀이 잡힌 둥근 머리는 웅장한 어깨 위에 놓여 있었고, 그의 전반적인 외모에는 사자 같은 면모가 있었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기와 결합되어 그의 부하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반야만적인 적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부패하지 않을 정도로 정직하고, 단순하며, 심지어 그의 습관에 있어서 거칠고 스파르타식의 강인함을 지녔으며, 그의 칼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고, 도시에서도 야영지에서도 그는 군용 망토만 두르고 잠을 잤으며, 해와 함께 일어났다."
2000년 이후, 칼라치나도누에는 1812년 조국 전쟁의 영웅의 이름을 딴 KC-104-02 프로젝트의 다목적 선박 "예르몰로프 장군"이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국민의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는 무형 유산의 대상이다.[17]
6. 1. 긍정적 평가 (러시아 중심)
러시아에서 그는 군사적 기량, 용맹함, 그리고 전략으로 유명했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제국 군대 지휘는 낭만주의 시대의 알렉산드르 푸시킨, 바실리 주콥스키 등의 시인들에 의해 미화되었다. 존 F. 배들리는 1908년에 저서 ''코카서스에 대한 러시아의 정복''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람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예르몰로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도록 태어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거대한 체격과 비범한 신체적 힘을 지녔으며, 굵은 머리카락으로 틀이 잡힌 둥근 머리는 웅장한 어깨 위에 놓여 있었고, 그의 전반적인 외모에는 사자 같은 면모가 있었다. 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기와 결합되어 그의 부하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반야만적인 적들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부패하지 않을 정도로 정직하고, 단순하며, 심지어 그의 습관에 있어서 거칠고 스파르타식의 강인함을 지녔으며, 그의 칼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고, 도시에서도 야영지에서도 그는 군용 망토만 두르고 잠을 잤으며, 해와 함께 일어났다."[17] 2000년 이후, 칼라치나도누에는 1812년 조국 전쟁의 영웅의 이름을 딴 KC-104-02 프로젝트의 다목적 선박 "예르몰로프 장군"이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국민의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는 무형 유산의 대상이다.6. 2. 부정적 평가 (코카서스 및 국제사회, 특히 대한민국)
러시아에서 예르몰로프는 군사적 기량, 용맹함, 전략으로 유명했다.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제국 군대 지휘는 낭만주의 시대의 알렉산드르 푸시킨, 바실리 주콥스키 등의 시인들에 의해 미화되었다.그러나 코카서스 지역에서는(오세티야 제외) 예르몰로프는 그가 저지른 잔학 행위로 악명이 높다.[11][12][13][14][15] 역사학자 찰스 킹은 예르몰로프가 코카서스 고지 정복을 위한 포괄적인 전략을 최초로 사용했으며, 그의 잔혹한 방법은 차르 시대, 볼셰비키, 그리고 21세기까지 러시아 장군들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사용되었다고 평가한다. 예르몰로프는 코카서스 전역에서 가장 칭송받는 동시에 가장 미움을 받는 러시아 사령관이었으며, 오늘날에는 국가 주도 테러리즘이라고 불릴 만한 정책을 시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6]
존 F. 배들리는 1908년에 저서 ''코카서스에 대한 러시아의 정복''에서 예르몰로프가 거대한 체격과 비범한 신체적 힘을 지녔으며, 그의 전반적인 외모에는 사자 같은 면모가 있었다고 묘사했다. 또한 부패하지 않을 정도로 정직하고, 단순하며, 심지어 그의 습관에 있어서 거칠고 스파르타식의 강인함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2000년 이후, 칼라치나도누에는 1812년 조국 전쟁의 영웅의 이름을 딴 KC-104-02 프로젝트의 다목적 선박 "예르몰로프 장군"이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국민의 역사적 기억을 보존하는 무형 유산의 대상이다.[17]
7. 수상 내역
알렉세이 예르몰로프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성 안드레아 최초 소환 훈장, 성 블라디미르 훈장 (1등급),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 백색 독수리 훈장, 성 안나 훈장 (1등급)을 수여받았다. 프로이센의 적색 독수리 훈장 (1등급)과 푸르 르 메리트 훈장,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3등급), 바덴 카를 프리드리히 훈장, 페르시아의 사자 및 태양 훈장 등 외국 훈장도 받았다. 이외에도 다이아몬드가 박힌 검을 포함하여 용기에 대한 두 개의 금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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