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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독관계연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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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독관계연방부(Bundesministerium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 BMB)는 1969년 동독을 정식 국가로 인정한 서독이 동독과의 관계를 담당하기 위해 설립한 부처이다. 1949년 서독 정부 수립과 함께 설립된 연방전독일문제부(전독부)가 할슈타인 독트린에 따라 동독을 괴뢰 정부로 규정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BMB는 동서독 간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했으며, 1991년 독일 통일 이후 연방내무부로 통합되었다. 서독은 경제적 지원을 통해 동독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통일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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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독관계연방부
기본 정보
직책연방 장관
소속양독관계부
원어 이름Bundesminister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 (분데스미니스터 퓌어 이너도이체 베치웅엔)
휘장독일 국장
소속내각
보고 대상총리
지위폐지됨
설립1949년 9월 20일
최초 임명야콥 카이저
마지막 임명도로테 빌름스
폐지1989년 11월 9일 (실질적), 1991년 1월 18일 (공식)
계승연방 내무부 장관
역대 장관
1949년 ~ 1957년야콥 카이저 (CDU)
1957년 ~ 1966년에른스트 렘머 (CDU)
1966년 ~ 1969년헤르베르트 베네르 (SPD)
1969년 ~ 1982년에곤 프랑케 (SPD)
1982년 ~ 1987년라이너 바르첼 (CDU)
1987년 ~ 1991년도로테 빌름스 (CDU)

2. 연방전독일문제부 (전독부)

1949년 서독 정부 수립과 동시에 연방전독일문제부(전독부)가 설치되었다. 전독부는 서독만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동독을 소련의 괴뢰정부로 규정한 할슈타인 독트린에 기반하여 동독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초대 장관은 기독교민주연합(CDU) 소속의 야코프 카이저였다.

이후 서독 최초의 좌파 총리인 빌리 브란트가 집권하면서 할슈타인 독트린에 반대하는 동방정책을 실시하였고, 1969년 10월 전독부를 폐지하고 동독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연방양독일관계부(내독부)를 설치했다.

2. 1. 역대 장관

슈미트 1기–2기–3기8--라이너 바르첼1982년 10월 4일1983년 3월 29일176d기민련콜 1기9--하인리히 빈델렌1983년 3월 30일1987년 3월 11일3y 346d기민련콜 2기10--도로테 빌름스1987년 3월 12일1991년 1월 18일3y 312d기민련콜 3기


3. 연방양독일관계부 (BMB)

1969년 10월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전독일부를 폐지하고 연방양독일관계부를 설치했다. 이는 동독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동서독 간의 관계 개선 및 교류,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조치였다.[1] 1991년 1월 18일 독일 통일 이후 해체되었으며, 대부분의 기능은 연방내무부(BMI)로 편입되었다.[1]

연방양독일관계부 장관은 다음과 같다.

초상이름임기정당내각
취임퇴임재임 기간


3. 1. 역대 장관

슈미트 1기–2기–3기8--라이너 바르첼1982년 10월 4일1983년 3월 29일176d기민련콜 1기9--하인리히 빈델렌1983년 3월 30일1987년 3월 11일3y 346d기민련콜 2기10--도로테 빌름스1987년 3월 12일1991년 1월 18일3y 312d기민련콜 3기


4. 동독의 민주화와 통일 과정

1989년 동독 주민들은 처음에는 여행 자유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했지만, 점차 민주화 요구로 발전했고, 결국 통일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로 이어졌다. 1989년 11월 20일 라이프치히 월요 데모에서 시위대는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를 외치며 통일을 요구했다. 동독의 시위 규모는 1989년 10월 9일 7만 명에서 11월 6일 50만 명으로 급증했다.[2]

1989년 12월 19일 드레스덴을 방문한 헬무트 콜 총리에게 드레스덴 시민들은 조기 통일을 요구했다.[3] 당시 서독 1인당 GDP는 동독의 3배, 서독 GDP는 동독의 10배였다. 가난한 동독에서 스스로 대규모의 통일 요구 시위가 발생했기에 서독에 흡수될 수 있었고, 동서독 정부가 이러한 시위를 어떻게 유도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동독에서 사상 최대의 통일 요구 시위가 발생하면서 동서독이 평화 통일에 성공했다.

4. 1. 슈타지의 역할과 한계

소련 KGB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도 받았던 동독 정보부 슈타지는 서독 연방부를 무력화하기 위해 상당한 스파이전을 펼쳤다. 동서독 평화 통일은 서독 연방부가 KGB보다 악랄하다는 슈타지를 무력화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는 남북한 평화 통일을 위해서는 대한민국 통일부가 북한 보위부를 무력화해야 한다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4. 2. 경제적 요인과 통일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양독 관계의 토대가 "현찰을 통한 인권 개선"이라고 말했다. 동독 외무부의 고위 관계자는 "동독의 양독 관계에 대한 관심은 오직 외화 수급 때문"이라고 말했다.[4]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서독 정부는 정치범 석방용 를 포함해 (한화 7조 원)를 공식적으로 제공했다.[4] 그러나 다른 보도에서는 1970년대 중반 이후 통일까지 서독 정부가 매년 평균 23억달러 (2조 5천억 원)를 동독 정부에 제공했다고 한다.[5]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막대한 주민 복지를 전부 정부가 무상 제공했지만, 가난한 동독 국민들의 세금으로는 이러한 복지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이 딜레마를 서독의 마르크화가 해결해 주었으며, 동독 서기장은 서독에서 받은 마르크화로 동독 주민들의 사회주의 복지 문제를 해결해 민심을 안정시켰다. 미국 달러화가 아니라 서독 마르크화 지폐가 동독 정부에 엄청나게 쌓여있었다고 한다.

1991년 동서독 평화 통일 8년 전인 1983년, 동독이 국가부도 위기에 몰리자 서독 정부는 를 긴급 지원했다. 이에 대해 동독 정부는 서독 여행자들의 국경 통과 절차를 개선했고, 국경에 설치된 총기와 지뢰를 제거했다. 즉, 서독 정부는 거액을 지원하고, 대신 동독 정부에 화해, 교류, 개방에 대한 정책을 요구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1989년 11월 10일, 에버하르트 쿠어트 BMB 과장은 동서독이 전쟁 없이 교류와 화해를 거쳐 평화 통일을 이룬 주요 원인이 서독의 막대한 지원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5. 통일 이후의 과제와 시사점

서독 마르크화의 최고액권은 1,000마르크 지폐였으며, 유로 통합 이후 500유로 지폐로 바뀌었는데, 이는 한화 약 50~60만원 정도의 가치이다.[1] 50만원권 고액 지폐 발행에 대한 비판은 이것이 범죄조직으로 흘러들어가는 검은돈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한다. 그러나 서독이 동독에 비공식적으로 막대한 마르크화를 검은돈으로 지원할 때 50만원권이 유용했다는 사실은, 50만원권 발행이 남북한 평화통일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1]

서독이 동독을 국가승인하고 BMB(양독관계연방부)를 창설한 것처럼, 대한민국도 북한을 소련의 괴뢰정부로만 인정하는 현재의 통일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통일부를 창설해야 동서독처럼 남북한도 평화통일에 성공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5. 1. 고액권 문제

서독 마르크화의 최고액권은 1,000마르크 지폐였다. 유로로 통합되면서 500유로 지폐로 바뀌었는데, 이는 한화로 약 50~60만원 정도의 가치이다.[1]

50만원권 고액 지폐 발행에 대한 비판의 핵심 논거는 이것이 범죄조직으로 흘러들어가는 검은돈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독이 동독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비공식적으로 막대한 마르크화를 검은돈으로 지원할 때 50만원권이 매우 유용했다는 사실은, 50만원권 발행이 남북한 평화통일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시사점을 준다.[1]

5. 2. 통일부의 역할 재정립

서독이 동독을 국가승인하여 전독부를 폐지하고 BMB(양독관계연방부)를 창설한 것처럼, 대한민국도 북한을 소련의 괴뢰정부로만 인정하는 현재의 통일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통일부를 창설해야만 동서독처럼 남북한도 평화통일에 성공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참조

[1] 간행물 Speech held at the party congress of Austrian People's Party in Salzburg, 2 March 1951 Neue Zürcher Zeitung 1952-01-26
[2] 뉴스 양창석의 통일이야기 (4) 동독의 시민혁명 ‘월요데모’ 파이낸셜뉴스 2014-07-13
[3] 뉴스 양창석의 통일이야기 (8) 서독 콜 총리의 통일 결단 파이낸셜뉴스 2014-08-10
[4] 뉴스 "베를린장벽 붕괴, 소련 통제력 약화로 가능했다" 연합뉴스 2016-02-26
[5] 뉴스 "참 좋은 이야기야! 나는 교류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네" 브레이크뉴스 201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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