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군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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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원군 이항은 조선 성종의 서자이자 막내아들이다. 숙의 홍씨의 소생으로, 정국원종일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충의위 조경의 딸과 혼인했으나 사별하고, 유종손의 딸과 재혼했으나 다시 사별하였다. 1535년 시녀를 강제로 범한 사건으로 파직되었으나 얼마 후 직첩을 돌려받았다. 양근군부인 문화 류씨, 첩 학정 등과 가족 관계를 맺었으며, 4남 4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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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군 (성종)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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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작위 | 군(君) |
본명 | 이희 |
출생일 | 1491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551년 (61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군 사저에서 병사 |
배우자 | |
배우자 | 정부인 한양 조씨(초취) |
배우자 | 계부인 문화 류씨(재취) |
양첩 | 학정(측실) |
왕가 | |
왕조 | 조선 왕조 |
종교 | 유교(성리학)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성종 이혈 |
어머니 | 숙의 홍씨(생모) |
어머니 | 정현왕후 윤씨(적모) |
친인척 | 연산군 이융(이복 형) |
친인척 | 완원군 이수(동복 형) |
친인척 | 중종 이역(이복 형) |
친인척 | 상원군 이세령(증손) |
자녀 | 슬하 4남 8녀 |
2. 생애
성종의 16남이자 서14남으로 막내아들이다. 생모는 숙의 홍씨이다.
충의위(忠義衛) 증 찬성(贈贊成) 조경(趙經)의 딸과 혼인했으나 1517년 사별했다.[1] 1535년 시녀(侍女)를 강제로 범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죄를 물었으나, 중종은 엄벌을 내리지 않고 파직만 시켰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직첩을 돌려주었다.[2] 계부인으로 양근군부인 문화 류씨, 첩부인 양첩 학정(鶴貞) 등이 있다.
정국원종일등공신(靖國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2. 1. 초기 생애
이름은 항(𢢝)이며, 자는 미상이다. 성종의 서14남이자 막내아들로, 생모는 숙의 홍씨이다.[1]충의위(忠義衛) 증 찬성(贈贊成) 조경(趙經)의 딸 풍양 조씨와 혼인했으나 1517년 사별했다.[1] 이후 사복정(司僕正) 증(贈) 우찬성(右贊成) 유종손(柳終孫)의 딸 문화 유씨와 재혼했으나, 1527년에 또다시 사별했다.
2. 2. 파직과 복직
1535년(중종 30년) 양원군은 시녀(侍女)를 강제로 범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죄를 물었다. 그러나 중종은 엄벌을 내리지 않고 파직만 시켰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직첩을 돌려주며 복직시켰다.[2] 이 사건은 당시 조선 사회의 윤리 의식과 왕족의 특권 의식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중종의 왕권이 신권에 의해 제약받고 있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2. 3. 공신 책록
정국원종일등공신(靖國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3. 가족 관계
성종의 서자인 양원군은 정실 부인으로 문천군부인 풍양 조씨와 양근군부인 문화 유씨를 두었으나, 이들 사이에서는 자녀를 얻지 못했다. 양원군은 여러 첩을 통해 4남 4녀를 얻었는데, 아들 넷은 모두 양첩 소생으로 서자였으며, 딸 넷은 천첩 소생이었다.
3. 1. 부모와 형제
3. 2. 처와 자녀
안동 권씨 - 감사(監司) 권덕여(權德輿)의 딸양손자 : 영천군 정(靈川君 侹, 1550 ~ ?) → 경명군의 손자, 안남군 수련(安南君 壽鍊)의 3남
손자 : 의창부수 숙(義昌副守 淑, 155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