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유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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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유찬은 1897년 부산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하와이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재미동포 사회에서 활동했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주미대사를 역임하며,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그는 한일회담 수석대표, 유엔 총회 한국 수석 대표를 지냈으며, 4·19 혁명 이후 사직했다. 이후 특명전권순환대사, 외무부 대기대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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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 - 한덕수
한덕수는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으로, 제47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윤석열 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의사 파업 대응과 의료 개혁을 추진했고, 대통령 탄핵 이후 권한대행을 맡았으나 탄핵소추로 직무가 정지되었다. - 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 - 정일권
정일권은 러시아 출생으로 만주군 장교, 육군 참모총장,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을 역임하며 군인, 외교관,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친일 행적과 정인숙 사건 관련 의혹을 받았다. - 일제강점기의 의사 - 원용덕
원용덕은 일제강점기 만주국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했으며,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여 정치 군인으로 평가받았고, 4·19 혁명 이후 구속되었다가 사면된 인물이다. - 일제강점기의 의사 - 박동균 (1919년)
박동균(1919년)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하여 육군의무감, 육군군의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했으며, 간호장교 제도 창설에 기여했으나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하와이 대학교 동문 - 도정일
도정일은 영문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 경희대학교 교수, 도서관장,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문화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으나, 2016년 학력 위조 논란 이후 이를 인정했고, 저서로는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등이 있다. - 하와이 대학교 동문 - 윤치영
윤치영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며 이승만, 박정희 정부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제헌 국회의원, 초대 내무부 장관, 주프랑스 공사, 서울특별시장, 국회의장 등을 지냈으나, 친일 의혹과 독재 정권 옹호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양유찬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1897년 8월 15일 |
사망 | 1972년 1월 23일 (향년 74세) |
직업 | 외교관, 정치인 |
배우자 |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 |
학력 | |
모교 | 보스턴 대학교 |
학위 | 박사 |
경력 | |
수상 |
2. 생애
1951년부터 1958년까지 유엔 총회 한국 수석 대표를 역임했으며, 1960년에는 주미 대사 겸 브라질 대사를 지냈다. 1965년 9월 7일, 대한민국 국무회의는 양유찬을 특명전권순환대사에 임명하기로 의결했고, 양유찬은 유엔 대표부에 소속되었다.[29] 이후 1972년까지 순회대사로서 각국을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고, 1972년에는 외무부 대기대사를 지냈다.
1960년 6월 28일, 양유찬은 자유당 김상도 의원에게 빌려준 200USD를 받아달라는 편지를 외무부에 보내기도 했다.[30] 1960년 2월 19일, 양유찬 대사의 부인은 워싱턴에서 열린 홈쇼에서 '미세스 가정주부'(워싱턴 주재 외국 외교관 부인 중 선출)로 뽑히기도 했다.[31]
1950년대 외자 도입으로 건설된 충주비료공장은 양유찬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26] 1960년 12월 10일 외무부 장관 정일형은 양유찬이 북한의 선전 공세를 막기 위해 남북 서울 회담을 제의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반대했다.[27] 1960년 12월 24일, 정일형은 "해임되었음에도 귀국하지 않고 타국에서 직장을 구해 거주함으로써 국가 위신을 추락시키고 있는 해외 공관장들"에게 강력한 소환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으며, 양유찬도 여기에 포함되었다.[28]
2. 1. 생애 초반
189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미국에 건너가 1916년 하와이 마킨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부터 하와이 대학교 마노아에서 수학을 공부한 후, 1920년 매사추세츠주보스턴으로 건너갔다. 1923년 보스턴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하와이로 돌아와 병원을 개업하였다. 사회사업으로 한인대학구락부를 만들고 호놀룰루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 이사, 호놀룰루한인기독교재단 회장 등의 일을 맡아보며 재미동포의 단결과 친목에 노력하였다.2. 2. 주미 대사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주미대사를 맡았다. 주미 대사가 되기 전, 양유찬은 하와이에서 의사로서 기반을 닦아, 큰 병원을 경영하며 명성과 재산을 쌓고 있었다.1951년 2월, 김용식 호놀룰루 총영사의 전갈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주미대사직을 제안받았다. 양유찬은 외교 경험 부족과 병원 사업을 이유로 고사했지만, 이승만은 '3천만 백성을 살리는 일'이라며 설득했다. 결국 양유찬은 제안을 수락했고, 이승만은 "내가 젊을 적에 너를 가르쳤다. ... 이제 기회는 왔다."라며 기뻐했다.[8]
1952년 제7차 국제 연합 총회에 변영태(단장), 임병직, 한표욱 등과 함께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9]
1953년 4월 21일 현 상태에서 한국전쟁의 휴전이 이루어진다면 한국군은 유엔군사령부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내용의 비망록을 미국 정부에 전달하였다.[10] 한국전쟁 직후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기여하며 1953년까지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일본과의 교섭에 앞장섰다.

1954년 4월부터 7월까지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의 대표로 참석하였다.[11] 1956년 3월경, 한 담화 기사를 통해 "이승만 박사를 제거하면 누가 이 난국을 극복해 나가겠는가. ... 한국의 투표자들은 만일 이 대통령이 하야하신 경우 미국은 대한원조를 중단하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은 사설을 통해 비판하였다.[12] 1957년 6월 5일, 양유찬은 친선사절로서 서독을 방문하여 콘라트 아데나워와 회담하고 조만간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13]

1959년 12월 31일, 양유찬 대사는 소련 타스 통신의 "한국 해역 밖에서 비무장한 소련의 측량선에 대해 한국 전함이 공격을 가했다"는 보도는 허위조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양 대사는 성명을 통해, "소련은 순전히 대한민국에 대한 육지 및 공중공격을 위한 구실을 조작하고 있다"고 언명하였다.[14] 1960년 1월 21일, 양유찬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극동 방문에 관하여 미국무성 관리들과 회담하였다. 양 대사는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커다란 자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15] 1960년 1월 30일, 양유찬은 서방측이 앞으로 소련과 가지게 될 정상회담과 군축협상은 헛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16]
크리스찬 허터(Christian Herter) 미국무장관은 1960년 3월 16일, 한국의 정부통령선거에 관하여 일어난 폭력사태를 개탄하였다. 허터 미국무장관은 양유찬 대사를 국무성으로 불러 회담하였다. 양대사는 허터 국무장관이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압도적 승리는 유감스러운 여러 사건으로 말미암아 형편없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기에게 알리고 싶어 하였다"고 말하였다.[17]
4·19 혁명 직후에 양유찬은 사직하였다. 과도 국무원은 4월 29일, 사표를 낸 양유찬 대사를 면직하기로 정식 의결하였다.[18] 같은 날, 양유찬은 워싱턴에서 개인사업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였다.[19] 5월 2일, 양유찬은 새로운 한국정부가 이날 그 사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한표욱 공사가 대리대사로 지명되었다.[20]
양유찬의 외교활동은 외무본부의 체계를 무시한 경무대 직통 외교로 비난을 받았다.[21] 양유찬이 이승만 정권의 독선적인 외교를 합리화시키는 데 전력을 경주하였으며 지난 3·15 부정선거에 대하여도, 마산에서의 국민 의거는 공산 오열(五列)의 개입 운운으로 이승만 정권의 부패상을 묵인, 국제 여론을 오도케 하였다.[22] 양유찬은 자택에서 자기와 한(韓) 공사가 이승만의 돈을 스위스 은행에 예금하였다는 모 신문기사에 관하여 펄펄뛰면서 이것은 사실무근이라고 1960년 7월 13일 반박하였다.[23]
1951년 7월 9일, 양유찬 대사는 존 포스터 덜레스와 회담을 가졌다.[3] 회담에서 양유찬 대사는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덜레스는 요구를 거절했다.[3]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일 선전 포고를 했다는 주장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덜레스는 "미국은 한국 임시 정부를 한 번도 승인한 적이 없다"며 부정했다.[3]
1951년 7월 19일, 양유찬 대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초안에 대한 요망서를 미국 정부에 보냈다.[4] 내용은 일본이 포기할 영토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 파랑도를 포함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4] 또한 같은 날 덜레스 국무 장관 특별 고문과의 회담도 갖고, 비슷한 요구를 했다.[5] 그러나 미국 정부는 "해당 섬들은 일본의 영토"라고 판단, 당시 차관보 딘 러스크에 의해 같은 해 8월 10일 러스크 서한으로 각하되었다.
1953년 4월 21일, 양유찬 대사는 한국 전쟁에 관한 각서를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 내용은 현재 상태 그대로 한국 전쟁의 정전이 합의된다면, 한국군은 유엔군 사령부에서 이탈하겠다는 것이었다.[6]
양유찬 대사는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에 힘썼다. 1953년까지 한일 간의 협상에서 한국 측 수석 대표를 맡아 일본과의 협상에서 선두에 섰다. 양유찬 대사는 또한 1951년부터 1958년까지 유엔 총회의 한국 수석 대표를 역임했으며, 1960년에는 주 브라질 대사를 주미 대사와 겸임했다.
2. 3. 대일 외교
1960년 3월 19일, 양유찬은 일본 공동(共同) 통신기자와의 회견에서 한일간의 여러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일문제에 대해 양유찬은 한국과 일본이 1960년 3월에 억류자를 상호석방하기로 한 합의는 양국간의 주요한 여러 가지 문제 해결에 더 한층 진전을 약속해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양유찬은 기타 모든 조건에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논쟁 중인 한일간의 어로 문제의 만족할만한 조정이 회담 석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양유찬은 어로선 문제가 토의되기 전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언명하였다.[24][25]# 제2차 세계 대전 전 또는 대전 중에 일본으로 끌려간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
# 한국으로 송환되는 재일교포(韓僑)들이 재산을 반출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
# 일본에 남아 있기를 희망하는 교포들에게 강제 송환의 공포를 없애기 위한 정당한 거주권의 인정
# 한국 국보의 반환
# 일본에 있는 한국 재산권의 해결
# 일본에 가져간 한국 선박 7만 5천 톤의 반환
# 한일간의 해저 전신에 관한 문제의 해결
양유찬은 이상의 조건 수락으로 평화선 문제는 해결되나 평화선 문제와 영해 문제는 별개의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한국 정부는 해양법 회의에서 미국 안을 지지하도록 대표들에게 훈령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평화선 문제는 영해 문제와는 별도로 한일 양국 사이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유찬은 이상 조건을 일본이 수락한다면 한일 관계는 정상화되고 평화선 문제와 어로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어 허터 미국 국무장관과의 회담은 시종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24][25]
1951년 7월 9일, 양유찬 대사는 존 포스터 덜레스와 회담을 가졌다.[3] 회담에서 양유찬 대사는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덜레스는 대마도는 줄곧 일본의 완전한 영유 하에 있다며 요구를 거절했다.[3]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일 선전 포고를 했다는 주장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덜레스는 "미국은 한국 임시 정부를 한 번도 승인한 적이 없다"며 부정했다.[3]
1951년 7월 19일, 양유찬 대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초안에 대한 요망서를 미국 정부에 보냈다.[4] 내용은 일본이 포기할 영토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 파랑도를 포함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4] 또한 같은 날 덜레스 국무 장관 특별 고문과의 회담도 갖고, 비슷한 요구를 했다.[5] 그러나 미국 정부는 "해당 섬들은 일본의 영토"라고 판단, 당시 차관보 딘 러스크에 의해 같은 해 8월 10일 러스크 서한으로 각하되었다.
1953년까지 한일 간의 협상에서 한국 측 수석 대표를 맡아 일본과의 협상에서 선두에 섰다.
2. 4. 4.19 혁명 이후
1951년∼1958년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 1960년 주미대사 겸 브라질대사를 지냈다. 1965년 9월 7일, 대한민국 국무회의는 양유찬을 특명전권순환대사에 임용키로 의결했다. 양유찬은 유엔대표부에 소속토록 되었다.[29] 이때부터 1972년에 걸쳐 순회대사로 각국 순방의 외교활동에 주력하고 1972년 외무부 대기대사를 지냈다.1960년 6월 28일, 양유찬은 자유당의 김상도 의원에게 꾸어준 돈 200USD를 좀 받아달라는 편지를 외무부로 보냈다. 편지 내용은 "김의원이 작년에 미국을 들렸을 때 여비가 모자란다기에 200USD를 꾸어준 일이 있는데 아직도 갚을 생각을 안하니 꼭 받아달라"는 것이었다.[30] 1960년 2월 19일, 양유찬 대사의 부인이 워싱턴에서 열린 홈쇼에서 미세스 가정주부(워싱턴에 주재하는 외국외교관 부인 가운데서 선출된다)로 지명되었다.[31]
1950년대 외자도입으로 건설된 충주비료공장은 양유찬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26] 양유찬은 이북의 선전공세를 막기 위하여 대이북 서울 회담을 제의하는 것이 어떠냐는 견해를 표명한데 대하여 1960년 12월 10일 외무부장관 정일형은 반대태도를 취하였다.[27] 1960년 12월 24일 상오, 정일형은 "해임되었음에도 귀국하지 않고 타국에서 직장을 구하여 거주함으로써 국가위신을 추락시키고 있는 해외공관장들에게 강력한 소환명령을 발하였다고"고 언명하였다. 소환해당자에는 양유찬도 포함되어 있었다.[28]
3. 저서
- 《Our Common Task영어》(1953년)
- 《The Aspirations of Korea영어》(1954년)
- 《Korea Against Communism영어》(1966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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