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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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정은 고려 말 도첨의정승 양기의 5대손으로, 무예에 능하여 단종 때 수양대군에게 발탁되었다. 그는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정난공신이 되었고, 세조 즉위 후 좌익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주로 북방 변경 지대에서 근무했다. 1466년 세조에게 왕위 선위를 진언했다가 처형되었으며, 그의 발언은 세조의 분노를 샀고, 결국 신숙주의 만류로 사태는 무마되었지만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형당했다.
단종 즉위 초, 한명회, 홍윤성, 권람, 신숙주, 홍달손 등과 모의하여 1453년 수양대군이 당시 집정대신이자 반대파였던 김종서, 황보 인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을 때, 적극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정난에 참여하였다.
다음은 양정을 다룬 드라마 작품들이다.
2. 생애
공조판서, 지중추원사 등 중앙의 주요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함경도·평안도 등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뒤 판경성부사, 중추부판사를 거쳐 1461년(세조 7)에는 함길도 도체찰사와 평안도 도체찰사, 1463년에는 평안도도절제사 겸 영변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는 신숙주가 죽음을 각오하고 양위 사태를 말려서 무마되었다. 그러나 양정은 대간(臺諫)으로부터 말을 함부로 하였다는 규탄을 받았다. 사간원과 승정원에서는 그가 선위(禪位)를 함부로 진언하였다고 탄핵하였고, 의금부의 감옥에 갇혔다가 군기감 앞에서 사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60여 세였다.[1]
2. 1. 초기 생애
고려 말 도첨의정승을 지낸 양기의 5대손으로, 원나라 사람인 양기는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 양기의 아들 양만수의 4대손이며, 양만수의 동생 양지수는 혜빈 양씨의 증조부이다. 혜빈 양씨의 할아버지는 양지수의 아들 호조판서 양첨식이다.[1]
양기는 청주에 정착했고, 그의 아들 양만수는 안악에 정착하여 그의 직계는 안악 양씨로도 불렸다. 양정의 친척 고모인 혜빈 양씨는 세종대왕의 후궁이자 단종의 유모였다. 그는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과 어울리다가 수양대군의 편에 섰다.
양정은 일찍부터 무예가 뛰어나 내금위 무사로 발탁되었으나, 단종 때 수양대군에게 발탁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수양대군은 많은 무사를 불러모았는데, 양정 또한 한명회 등의 천거로 수양대군의 편에 가담하였다.
2. 2.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
고려 도첨의정승을 지낸 양기의 5대손으로, 원나라 사람인 양기는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 양기의 아들 양만수의 4대손으로, 양만수의 동생 양지수는 혜빈 양씨의 증조부가 된다. 양지수의 아들 호조판서 양첨식이 혜빈 양씨의 할아버지이다.[1]
양기는 청주에 정착했고, 아들 양만수가 안악에 정착하면서 그의 직계는 안악 양씨로도 불렸다. 친척 고모인 혜빈 양씨는 세종대왕의 후궁이자 단종의 유모였지만, 양정은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과 어울리며 수양대군 편에 섰다.
양정은 무예가 뛰어나 내금위 무사로 발탁되었고, 단종 때 수양대군에게 발탁되며 유명해졌다. 수양대군은 많은 무사를 불러모았는데, 양정도 한명회 등의 천거로 합류했다. 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 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을 때, 양정은 군사를 이끌고 계유정난에 적극 참여하였다.
계유정난 성공 후, 양정은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고 청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년 세조 즉위 후에는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고 양산군에 봉해졌다.
2. 3. 변방 근무와 불만
일찍부터 무예가 뛰어난 무인으로서 내금위의 무사로 발탁되었으나, 단종대에 수양대군에게 발탁되면서부터 유명해졌다.
계유정난이 성공하자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청원군(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1455년(단종 3년) 세조가 즉위하자 즉위를 도운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양산군(楊山君)에 개봉되었다.
이후 공조판서, 지중추원사 등 중앙의 주요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함경도·평안도 등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뒤 판경성부사, 중추부판사를 거쳐 1461년(세조 7)에는 함길도 도체찰사와 평안도 도체찰사, 1463년에는 평안도도절제사 겸 영변부사 등을 역임하는 등 주로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에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1466년에 임기가 차서 중앙에 소환되면서 그해 9월 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일로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취중에 세조에게 '상감께서도 오랫동안 왕위에 계셨으니 이제 편히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떠냐'며 왕위를 선위(禪位)하라고 진언하였다.[1]
세조는 공신으로서 오랫동안 지방에 나가 있게 한 것이 민망하여 위로의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신면 등의 탄핵을 받아 투옥, 처형되고, 아들들은 성주의 관노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언동이 기록된 《세조실록》에서 당시의 사관은 그가 훈구대신임에도 불구하고 변방에서만 근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평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언동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1]
2. 4. 선위 발언과 죽음
1466년 9월 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양정을 위로하고자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양정은 술에 취해 세조에게 '상감께서도 오랫동안 왕위에 계셨으니 이제 편히 여생을 즐기는 것이 어떠냐'며 왕위를 선위(禪位)하라고 말했다.[1]
세조는 공신을 오랫동안 지방에 나가 있게 한 것이 민망하여 위로 잔치를 베풀었으나, 이 일로 양정은 신면 등의 탄핵을 받아 투옥, 처형되고 아들들은 성주의 관노가 되었다. 《세조실록》의 사관은 양정이 훈구대신임에도 변방에서만 근무한 것에 평소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언동을 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
세조는 크게 화를 내고 승지를 불러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승지들이 강하게 반대하여 기세가 매우 험악해졌다. 결국 신숙주(申叔舟)가 죽음을 각오하고 양위 사태를 막아 무마되었다. 그러나 양정은 대간(臺諫)으로부터 말을 함부로 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간원과 승정원은 양정이 선위(禪位)를 함부로 말했다고 탄핵하였고, 양정은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가 군기감 앞에서 사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여 세였다.[1]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5대조 양기 고조부 양만수 (고려 예조전서) 증조부 양정간 (고려 공조전서) 조부 양지택 아버지 양식 어머니 강진 유씨 (유극기의 딸) 동생 양형(楊泂) 동생 양호(楊浩) 동생 양지(楊沚) 부인 미상 아들 양유원(楊有源) 아들 양득원(楊得源) 아들 양계원(楊繼源) 9촌 고모 혜빈 양씨 (세종의 후궁)
4. 관련 작품
4. 1.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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