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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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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윤성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세조 즉위에 기여한 공신이다. 1453년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난공신 2등에 서훈되었으며, 이후 예조 참의,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했다. 1460년에는 여진족을 토벌하여 인산군에 봉해졌고, 1471년에는 성종 즉위를 지지하여 좌리공신 1등에 녹훈되어 인산부원군이 되었다. 그는 권력을 남용하고 백성을 억압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부여로 낙향하여 1475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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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성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홍윤성
한자 표기洪允成
로마자 표기Hong Yunseong
출생1425년
사망1475년 10월 7일 (50세)
국적조선
관직 정보
영의정임기 시작: 1469년 9월 27일
임기 종료: 1470년 5월 6일
이전: 한명회
이후: 윤자운
좌의정임기 시작: 1469년 3월 23일
임기 종료: 1470년 5월 6일
이전: 김질
이후: 윤자운
우의정임기 시작: 1467년 6월 21일
임기 종료: 1467년 10월 17일
이전: 최항
이후: 강순
기타 정보
초명홍우성 (洪禹成)
수옹 (守翁)
영해 (領海), 경해 (傾海), 경음당 (鯨飮堂)
시호위평 (威平)
본관회인 홍씨
종교유교(성리학)
학력1450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
홍제년
배우자초배: 남씨 부인
계배: 정경부인 고령 김씨
측실: 1명
자녀홍진(아들)
형제홍대성(형)
친인척홍용 (조부)
홍연보 (증조부)
남육 (장인)
김자모 (장인)

2. 생애

홍윤성은 1425년 충청도 평택현에서 홍제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회인이며, 증조부는 홍연보, 할아버지는 홍용이다. 초명은 우성이었고 자는 수옹이었으나, 뒤에 윤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전설에 따르면 세종 때 군관이 되어 공주감영의 토포군관까지 승진했다. 형수 설씨가 형을 독살하자, 그는 형의 죽음이 독살임을 밝혀내고 복수한다. 이후 양산으로 유배형을 받았으며, 양산군 통도사의 괴승 청월을 처단하고, 밀양에서 양인 노인의 딸을 구해주었다는 전설도 있다.

1453년 계유정난황보인, 김종서 등을 암살하고 세조 즉위에 기여하여 정난공신 2등관에 책봉되었고, 1455년에는 단종의 양위를 주도하여 좌익공신 3등관에 책봉되었다.[4] 예조 참의, 예조참판, 도진무,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460년 신숙주의 부장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여 '''인산군'''(仁山君)에 봉해졌다.[4]

1467년 우의정, 1468년 좌의정, 1469년 영의정을 역임했다. 1471년 성종 즉위 지지 공로로 좌리공신 1등관이 되어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에 봉해졌다.[5]

그는 홀로 사는 노파의 땅을 빼앗고, 이를 돌려달라는 노파를 죽였다.[7] 이조 판서 시절에는 숙부에게 벼슬을 대가로 뇌물을 요구하고, 이에 항의하는 숙부를 살해하고 암매장했다.[7] 이 외에도 자신의 집 근처에서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죽이는 등 횡포를 부렸다.[7] 세조는 분노했으나 공신이란 이유로 그를 벌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대신 처벌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신숙주, 정인지, 한명회 등과 함께 원상으로서 정사를 처리하였다.[8] 1469년 예종이 병사하자 영의정으로서 다시 원상이 되어 혼란을 수습하고, 자을산군 혈을 왕위에 올렸다.[8]

홍윤성은 여러 훈적(勳籍)에 참가하고 영의정에 이르러 세력이 막강해졌으나, 왕족 오산군은 그에게 굴욕을 주기 위해 비 오는 날 그의 관복을 흠뻑 젖게 하였다.[8]

만년에 충청도 부여로 낙향하여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근처에 자리잡았다. 그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하마하지 않거나 거만한 기색을 보이는 자에게는 불이익을 주었고, 이웃 사람이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많은 재물을 상으로 주는 등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1475년 병으로 죽었다.

2. 1. 젊은 시절

홍윤성은 1425년 충청도 평택현에서 홍제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회인이며, 증조부는 홍연보, 할아버지는 홍용이다. 초명은 우성이었고 자는 수옹이었으나, 뒤에 윤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홍윤성의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설에 따르면 세종 때 충청도 회인에 살던 그는 형 대성(大成)이 주점을 하는 설패두의 데릴사위가 되고, 자신은 군관이 되어 공주감영으로 가 토포군관(討捕軍官)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태만석에게 유혹당한 형수 설씨가 병든 형을 독약으로 독살하자, 그는 형의 죽음이 독살임을 밝혀내고 태만석과 설씨를 처단하여 복수한다. 이후 충청도관찰사부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사형은 면하고 양산으로 유배형을 받았으며, 추풍령에서 태만석의 아우 태만흥에게 습격받기도 했다.

또한 이춘달의 술청을 부수고, 양산군 통도사의 괴승 청월을 처단했으며, 밀양에서 이춘달에게 재취로 팔려갈 뻔한 양인 노인의 딸을 구해주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 뒤 경상북도 청도와 밀양을 거쳐 충청북도 황간의 당숙 집에 갔으나, 당숙모가 원수 태만석의 누이임이 밝혀져 영동 마니산으로 떠났다고 한다. 1925년 소설가 이해조는 이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홍장군전을 썼다.

2. 1. 1. 출생과 가계

홍윤성은 1425년 충청도 평택현에서 홍제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회인이다. 증조부는 홍연보, 할아버지는 홍용이며, 아버지는 홍제년이다. 초명은 우성이고 자는 수옹이며 뒤에 윤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2. 1. 2. 청년 시절

홍윤성의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설에 의하면 세종 때 충청도 회인에 살던 그는 형 대성(大成)은 주점을 하는 설패두의 데릴사위가 되고, 자신은 군관이 되어 공주감영으로 갔고, 공주감영의 토포군관(討捕軍官)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태만석의 유혹에 넘어간 형수 설씨가 병든 그의 형 홍대성을 독약으로 독살하자 그가 돌아와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독살이며 형수 설씨와 태만석이 살해했음을 밝혀내고 태만석과 설씨를 죽여 복수한다. 곧 충청도관찰사부에까지 올라가 심문 끝에 사형은 면하여 양산으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추풍령에 이르러 태만석의 아우 태만흥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춘달의 술청을 부수었으며 백성들의 민심을 현혹하던 양산군 통도사의 괴승 청월을 처단하고, 밀양의 어느 양인 노인의 딸을 재취로 데려다 주막집 시킨다는 이춘달을 살해하고 풀어주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뒤 경상북도 청도에 있다가 밀양을 거쳐 충청북도 황간의 당숙의 집에까지 갔으나 공교롭게 당숙모가 원수 태만석의 누이임이 밝혀져 영동 마니산으로 다시 떠났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근거로 1925년 소설가 이해조(李海朝)는 홍장군전을 쓰기도 했다.

2. 2.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1453년 계유정난 때 군사를 이끌고 황보인, 김종서 등을 암살하고 궁궐을 장악하여 세조 즉위 후 정난공신 2등관에 책봉되었고, 예조 참의가 되었다.[4] 1455년에는 단종의 양위를 주도한 공로로 좌익공신 3등관에 책봉되었다. 이후 예조참판, 도진무,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460년 신숙주의 부장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고 돌아와 '''인산군'''(仁山君)에 봉해졌다.[4]

1467년 우의정, 1468년 좌의정, 1469년 영의정을 역임했다. 1471년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 1등관이 되어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에 봉해졌다.[5]

2. 2. 1. 관료 생활 초반

세종 때 음보로 출사하여 군관이 되었다. 일찍이 한강 제주정(濟州亭)에서 수양대군과 활쏘기를 겨루다가 그와 가까워졌다. 수양대군은 널리 인재를 찾아서 심복에 두었고, 제주정에서 활쏘기를 겨루다가 그를 만나서 자신의 측근으로 두게 되었다.

그 뒤 공주 토포군관을 거쳐 교도(敎導)로 재직 중 1450년(세종 3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무인의 기질이 있어 사복시(司僕寺) 직을 겸하였으며 사복시주부에 올랐다. 1450년 승문원 정자, 사복시 주부, 한성부 참군, 통례문 봉례 등을 역임했다.

1451년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郎)에 임명되었다. 수양대군이 문종의 명을 받아 《진서 陣書》를 찬술할 때 좌랑으로서 참여하였으며,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에게 임금이 나이가 어리다며 집권을 건의하였다. 그는 단종의 나이가 어리고 나라가 위태하니 정국(政局)을 바로잡을 큰 일을 일으켜야 된다고 진언(進言)하고는 권람(權擥)을 모사(謀士)로 천거하였다. 그의 권고를 받아들인 수양대군은 권람을 통해 다시 신숙주, 정인지를 얻게 된다.

2. 2. 2.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

1453년 수양 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김종서를 제거하는 데 동참하였고,[7] 황보인, 김종서 등 원로대신을 살해하는 데 공을 세워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2등관(輸忠衛社協贊 靖難功臣 二等管)이 되었다. 이후 사복시판관, 사헌부장령을 거쳐 1455년 초 판사복시사가 되었다.

1455년(단종 3년)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세조 즉위 직후 성주군 월항에 있는 세종의 왕자들의 태실비 중 세조의 태봉비문을 지어 비석으로 세웠다. 그러나 이 비석은 후대에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세조 즉위 초반, 홍윤성의 종들이 횡포를 부리자 포도청 사졸 전림(田霖)이 밤에 홍윤성의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그의 종들을 묶어서 체포한 뒤 엄히 다스리고, 아침에 홍윤성의 집으로 데리고 가 항의했다. 홍윤성은 처음에는 화를 냈으나 나중에 전림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전림은 많은 음식을 단 번에 먹어 치웠다고 한다. 전림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는데, 그의 재주를 본 홍윤성은 전림을 칭찬하고 왕에게 선전관으로 추천하였으며, 이때부터 전림은 홍윤성의 측근이 되어 수시로 홍윤성의 집을 출입했다 한다. 한번은 홍윤성이 화를 참지 못하고 종을 나무에 묶은 뒤 활로 쏘려 하자, 전림이 청하여 죽이지 말고 자신의 첩으로 달라고 하여 평생을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1453년 계유정난에 군사를 이끌고 황보인, 김종서 등을 암살하고 궁궐을 장악하여 세조 즉위 후 정난공신 2등관에 책봉되었고, 1455년에는 단종의 양위를 주도한 공로로 좌익공신 3등관에 책봉되었다.[4]

2. 2. 3. 외교, 군사 활동

1457년과 1459년에 사신의 수행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4]

1460년 모린위(毛憐衛) 여진족이 국경지대를 침입하자 대장(大將) 신숙주의 부장(副將)으로 출정, 이를 토벌하고 숭정대부로 승진했으며 인산군(仁山君)에 봉군되었다.[4]

2. 2. 4. 권력 남용

그는 홀로 사는 한 노파의 전 재산인 논밭을 빼앗았는데, 노파가 울면서 땅을 돌려달라고 호소하자 홍윤성은 그 노파를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 돌로 때려 죽인 후 시신을 길가에 버려두었다.[7] 이조 판서로 있을 때 홍윤성의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하자 그는 논 20두락을 요구했다. 숙부가 '그대가 옛날 어렵게 살 때 내게 의탁한 지 30년이 지났는데 이제 재상이 되었다고 이럴 수 있는가'라고 따지자 홍윤성은 숙부를 타살한 후 후원에 암매장했다.[7] 숙모가 고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는 접수받기를 꺼려했으며 사헌부에서도 듣지 않았다 한다.[7]

세조온양의 온궁으로 행차한다는 소식을 들은 홍윤성의 숙모는 세조가 도착하기 전날 밤부터 버드나무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어가가 나타나자 나무 위에서 길게 호곡했다.[7] 세조가 관리를 시켜 묻자 그의 숙모는 '공신에 관계된 것이므로 한 걸음 사이에도 그 말이 변할 것이니 감히 말할 수 없다'라고 하여 세조가 직접 어가를 멈추고 말하라고 하자 그때서야 홍윤성의 만행을 호소했다.[7] 또한 자기 집 앞을 흐르는 한강변에 말을 목욕시키면 쫓아가서 쳐 죽였고, 자신의 집 근처에서 하마하지 않고 말을 타고 지나가도 역시 죽여버렸다. 세조는 분노했으나 공신이란 이유로 치죄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베는 것으로 대신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세조는 그의 행동들에 크게 불쾌해하고 노하였으나 지난날의 공로가 크다 하여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용모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재물을 탐하고 횡포한 성질이 있어 온양(溫陽)에 땅을 많이 장만하고 종을 많이 부리면서 심히 학대하고 함부로 죽이므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세조가 듣고 크게 노했으나 역시 지난날 그의 공이 크다 하여 윤성의 부하 두목들과 집 노비 등 10여 명을 대신 국문,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2. 3. 생애 후반

1467년 우의정이 되고,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軍功三等)에 녹훈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신숙주, 정인지, 한명회 등과 함께 원상의 한 사람으로서 정사를 처리하였다.[8] 1469년 (예종 2) 의정부 좌의정이 되고, 그해 명나라사은사로 파견되어 연경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곧 영의정이 되었다.

1469년 예종이 병사하자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와 함께 원상으로서 혼란을 수습하고 정무를 처결하였다. 이때 왕위 계승 후보자로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 혈을 지지하였다.[8]

홍윤성은 여러 훈적(勳籍)에 참가하고 영의정에 이르러 세력이 막강해지자, 조정에서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왕족 오산군이 비 오는 날 조정에 나가는 홍윤성의 관복을 흠뻑 젖게 하여 굴욕을 주기도 하였다.[8] 1471년 성종 즉위 지지 공로로 좌리공신 1등관이 되어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작위를 받았다.[5]

만년에 충청도 부여로 낙향하여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근처에 자리잡았다. 그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하마하지 않거나 거만한 기색을 보이는 자에게는 불이익을 주었고, 이웃 사람이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많은 재물을 상으로 주는 등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용모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재물을 밝히고 성격이 횡포하여 백성의 원성이 높았다. 그러나 세조, 예종, 성종의 비호를 받아 아무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1475년 병으로 죽었다.

2. 3. 1. 예종, 성종 즉위 전후

1467년 우의정이 되고,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軍功三等)에 녹훈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신숙주, 정인지, 한명회 등과 함께 원상의 한 사람으로 서정(庶政)을 처리하고 정사를 수습하였다.[8] 1469년 (예종 2) 의정부 좌의정이 되고, 그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연경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곧 영의정이 되었다.

1469년 예종이 병사하자 영의정으로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와 함께 다시 원상의 한사람이 되어 혼란을 수습하고 정무를 처결하였다. 이때 왕위 계승자 후보자를 낙점할 때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 혈을 지지하였다.[8]

홍윤성은 여러 차례 훈적(勳籍)에 참가하였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러 세력이 막강해지자, 조정에서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심히 불쾌하게 여긴 왕족 오산군이 그의 기세를 꺾기 위하여 비오는 날 조정에 나가는 홍윤성에게 비에 관복이 흠뻑 젖어 관복을 갈아 입도록 하는 굴욕을 안겨줌으로써 욕을 보이기도 하였다.[8] 1471년에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 1등관이 되어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의 작위를 받았다.[5]

2. 3. 2. 최후

만년에 충청도 부여로 낙향,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근처에 자리잡았다.

그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하마하지 않거나 거만한 기색을 보이는 자는 반드시 불이익을 가했다. 한편 이웃 사람이 좋은 이야기를 들러주면 홍윤성은 많은 재물을 아끼지 않고 상으로 주는 등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고도 한다.

1471년 (성종 2년) 성종을 지지하고 구성군(龜城君)을 숙청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의 호를 받고,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용모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재물을 밝히고, 성격은 횡포하여 백성의 원성이 높았으나 세조, 예종, 성종의 비호를 받았으므로 아무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1475년에 병으로 죽었다.

3. 사후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정수터(현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산56-1 경수터)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위평(威平)이다. 계실 고령 김씨는 그의 묘소 앞에 매장되었다. 신도비문은 김수온이 지었다.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그는 포악무도한 인물이며 권력 남용을 했다는 이유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탄받았다. 그의 저서와 작품들은 성주군 세조대왕태실비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유실, 실전되었다. 묘소는 방치되었고, 묘비문과 신도비는 마멸되어 해석이 불가능하며, 부인의 묘비는 깨져 있었다. 후에 신도비와 묘비, 부인의 묘비 등을 다시 세웠다.

홍윤성의 묘소와 부인 묘소, 그의 신도비를 포함한 묘역은 후일 대한민국에 와서 부여군 향토유적 제49호로 지정되었다.

2003년에는 홍윤성의 묘소 앞 장명등이 도난되는 수난도 있었다.[9]

4. 작품


  • 성주 세조대왕태실비문[1]
  • 성주 세조 대왕자 태실 비문[2]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홍연보(洪延甫)
조부홍용(洪容)
숙부미상
부친홍제년(洪齊年)
모친미상
홍대성
배우자남씨
배우자정경부인 고령 김씨
아들홍진
측실미상, 양주군 좌수의 딸
장인남륙(南陸)
장인김자모(金子謀)


6. 대중문화에 나타난 홍윤성


  • 2013년 영화 관상에서 유상재가 홍윤성을 연기했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 ~조선왕조를 이끈 천재 책사~에서 김형일이 홍윤성을 연기했다.
  • 1998년~2000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김형일이 홍윤성을 연기했다.

6. 1. 드라마

방영 연도방송사드라마 제목배역
1984년MBC설중매이대근
1990년KBS파천무백인철
1994년KBS한명회김형일
1994년KBS한명회 ~조선왕조를 이끈 천재 책사~김형일
1998년~2000년KBS왕과 비김형일
2012년~2013년JTBC인수대비박정학


6. 2. 영화

6. 3. 문학


  • 홍윤성전 - 조선시대 역사소설로 작가와 시대는 미상이다.
  • 홍윤성전 - 1925년, 이해조가 썼다.
  • 한명회 ~조선왕조를 이끈 천재 책사~ (1994년, KBS. 김형일 연기)
  • 왕과 비 (1998년 - 2000년, KBS. 김형일 연기)

7. 연보


  • 음서로 출사하여 군관, 공주 토포관, 교도 등을 역임했다.
  • 1450년(세종 32년) 교도 재직 중 문과에 급제했다.
  • 1450년 승문원 정자가 되었다.
  • 사복시 주부·한성부 참군·통례문 봉례 등을 역임했다.
  •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수양대군(세조)을 도와 김종서, 황보인을 척살했다.
  • 1453년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 2등(靖難功臣 二等)이 되었다.
  • 사헌부장령을 거쳐 판사복시사에 올랐다.
  • 1455년(단종 3) 세조가 즉위하자 예조 참의가 되었다.
  • 1455년 좌익공신 3등으로 책록되고 참판에 승진, 인산군에 봉군되었다.
  • 예조 판서, 경상우도 절제사를 역임했다.
  • 1460년(세조 5) 신숙주의 부장이 되어 모련위 여진족의 반란을 토벌했다.
  • 1460년 숭정대부로 승진, 다시 인산군에 봉군되었다.
  • 1467년(세조 12) 의정부 우의정에 승진했다.
  • 1469년(예종 2) 좌의정이 되었다.
  • 1469년 영의정이 되었다.
  • 1470년(성종 1) 좌리공신 1등에 녹훈되고 인산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참조

[1] 백과사전 홍윤성 洪允成 http://100.daum.net/[...] 2012-10-10
[2] 백과사전 홍윤성 https://web.archiv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05-11-30
[3] 웹사이트 홍윤성(洪允成) http://encykorea.aks[...] 2022-08-16
[4] 웹사이트 洪允成 http://people.aks.ac[...]
[5] 웹사이트 洪允成 http://100.daum.net/[...]
[6] 웹사이트 성종실록 59권, 성종 6년 9월 8일 갑인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7] 뉴스 조선을 망친 것은 공신들이었다 http://www2.donga.co[...] 동아일보역사산책 - 이덕일
[8] 웹인용 오산군 https://web.archive.[...] 2012-10-08
[9] 웹사이트 문화재청 홍윤성의 묘 장명등 도난 공지사항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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