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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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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은 연창군 안맹담(1415~1462)과 그의 부인 정의공주(?~1477)를 합장한 곳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묘역에는 쌍분 형태의 봉분, 신도비, 묘표 2기, 상석 2기, 문인석 2쌍, 3단 계체석 등의 석물이 있다. 안맹담은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여 서예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다고 전해진다. 묘역에는 안맹담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가 있으며, 이는 조선 초기의 신도비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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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묘역 정보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이름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영문 이름Tombs of An Maeng-dam and Princess Jeongui
종류유형문화재
지정 번호50
지정일1982년 11월 13일
주소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3동 산63-1번지
시대조선시대

2.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이 묘역은 연창군 양효공 안맹담/安孟聃중국어(1415~1462)과 그의 부인 정의공주(?~1477)를 합장한 곳이다. 봉분은 쌍분이고, 신도비, 묘표 2기, 상석 2기, 문인석 2쌍, 3단 계체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양효공의 본관은 죽산으로 함경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의 아들이다. 1428년(세종 10)에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였는데 부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와 낙천정을 하사하였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 묘역의 묘표 2기는 쌍분 앞에 있어 정의공주가 왼쪽에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표의 관석에는 여의 두문과 운문을 새겼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일부 묘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1466년(세조 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다. 정인지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 안빈세가 비문과 전액의 글씨를 썼다. 비는 이수, 비신, 귀부로 되어 있다.

2. 1. 양효공 안맹담

2. 2. 정의공주

3. 묘역의 구성

이 묘역은 연창군 양효공 안맹담(延昌君 良孝公 安孟聃, 1415~1462)과 그의 부인 정의공주(貞懿公主: ?~1477)를 합장한 곳이다. 봉분은 쌍분이고, 신도비, 묘표 2기, 상석 2기, 문인석 2쌍, 3단 계체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1]

양효공의 본관은 죽산으로 함경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의 아들이다. 1428년(세종 10)에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였는데 부부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한다. 세종은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와 낙천정을 하사하였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1] 묘표 2기는 쌍분 앞에 있어 정의공주가 왼쪽에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표의 관석에는 여의 두문과 운문을 새겼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일부 묘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1]

1466년(세조 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다. 정인지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 안빈세가 비문과 전액의 글씨를 썼다. 비는 이수, 비신, 귀부로 되어 있다.[1]

3. 1. 봉분

3. 2. 석물

3. 2. 1. 묘표

묘표는 확인되지 않는다.

3. 2. 2. 신도비

신도비에 대한 정보가 원본 소스에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요약에 따르면 신도비의 건립 시기, 비문 내용, 글씨를 쓴 사람, 귀부의 유래 등을 포함해야 하지만,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관련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주어진 정보로는 신도비를 작성할 수 없습니다.

4. 역사적, 문화적 가치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은 연창군 양효공 안맹담(延昌君 良孝公 安孟聃, 1415~1462)과 그의 부인 정의공주(貞懿公主: ?~1477)를 합장한 곳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묘역에는 봉분(쌍분), 신도비, 묘표 2기, 상석 2기, 문인석 2쌍, 3단 계체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양효공의 본관은 죽산이며, 함경도 도관찰출척사 안망지의 아들이다. 1428년(세종 10) 14세의 나이로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였으며, 부부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해진다. 세종은 한강 가운데에 있는 저자도와 낙천정을 하사하였다. 그는 초서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음악과 의학에도 통달하였다.

묘역의 묘표 2기는 쌍분 앞에 있으며, 정의공주가 왼쪽에 합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표의 관석에는 여의두문과 운문을 새겼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일부 묘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1466년(세조 12) 묘소 동남쪽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다. 정인지가 비문을 지었고, 안맹담의 4남 안빈세가 비문과 전액의 글씨를 썼다. 신도비는 이수, 비신, 귀부로 구성되어 있다.

4. 1. 왕실 묘제 연구

4. 2. 석물 연구

4. 3. 신도비 연구

5. 현지 안내문

5. 1. 한글 안내문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양효공 안맹담(1415~1462)과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1477)의 무덤으로, 서측이 안맹담, 동측이 정의공주 무덤이다. 이들은 1428년에 결혼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안맹담[본관 죽산(竹山)]은 초서를 잘 써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출중했다.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책력과 산술을 잘 이해했다. 세종은 특별히 정의공주를 아껴 저자도(옥수동 동쪽 한강에 있었던 섬)와 낙천정(광진구 자양동에 있었던 정자)을 내려주기도 했다.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양효공(良孝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양(良)’은 온화하고 선량하다는 의미이며, ‘효(孝)’는 어질고 은혜롭게 어버이를 섬겼다는 의미이다.

불심이 깊었던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 『지장보살본원경』(보물 제966호)이라는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무덤 앞에는 안맹담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 석등(石燈), 문관의 형상을 한 문인석(文人石),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인 묘갈(墓碣) 등이 세워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만들어 세웠다. 1466년에 세워진 안맹담의 신도비는 조선 초기의 신도비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신도비의 윗부분에는 양효안공묘비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몸돌에는 안맹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부부와 사돈이기도 한 정인지(1396∼1478)가 지었으며, 글씨는 부부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1445∼1478)가 썼다. 신도비 아랫부분의 거북돌은 경복궁에 한 쌍으로 있던 거북돌 중 하나를 왕명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5. 2. 영문 안내문



Seoul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50

This site includes the tombs of An Maeng-dam (1415-1462) and Princess Jeongui (?-1477) on the left and right, respectively.

An Maeng-dam은 고려 (918-1392) 말과 조선 (1392-1910) 초기의 명문가 출신이다. 1428년, 그는 세종 (재위 1418-1450)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그는 유명한 서예가였으며 활쏘기와 승마에도 능했다. 그가 죽은 후, 왕실은 그에게 “양효(좋고 효성스러움)”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현명했으며 역법과 산술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다. 세종은 똑똑한 딸을 너무나 사랑하여 한강의 저자도라는 섬과 현재 서울 자양동에 있는 낙천정이라는 정자를 하사했다. 그녀는 또한 불교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으며, 1469년에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지장보살본원경 (보물 제966호)을 간행했다.

이곳 입구에는 An Maeng-dam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 서 있다. 이 비석은 1466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조선 초기의 저명한 유학자인 정인지 (1396-1478)가 지었고, 글씨는 부부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 (1445-1478)가 썼다. 비석 몸체는 왕명에 따라 경복궁에서 가져온 거대한 거북 모양 받침대 위에 서 있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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