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어진영은 일본 천황의 초상 사진을 의미하며, 메이지 시대부터 교육 현장에 배포되어 천황에 대한 존경심을 고취하는 데 사용되었다. 각 학교에 하사된 어진영은 교육칙어와 함께 봉안전에 보관되었으며, 분실이나 훼손 시 학교장의 엄중한 책임을 요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어진영은 회수되었으나, 일부 학교에서 게양 의식이 재개되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사진술 - 유진 스미스
윌리엄 유진 스미스는 미국의 사진가이자 포토저널리스트로, 《라이프》 잡지 종군 기자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기록하고, 《컨트리 닥터》, 《스페인 마을》 등의 사진 에세이, 그리고 대표작 《미나마타》를 통해 환경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 일본의 사진술 - 아돌프 파사리
아돌프 파사리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미국과 일본에서 사업을 확장하여 사진 앨범을 판매하며 일본의 풍경과 문화를 담은 사진으로 명성을 얻었다. - 일본 제국의 문화 - 방언찰
방언찰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표준어 사용 강요를 목적으로 학교, 직장, 군대 등에서 시행된 제도로, 방언 사용 금지와 벌칙 부과를 통해 언어적 다양성 억압 및 지역 문화 훼손을 야기했다. - 일본 제국의 문화 - 일본의 근현대문학사
일본의 근현대 문학은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 문물의 영향으로 시작되어 사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반자연주의 등 다양한 흐름을 거치며 발전했고, 쇼와 시대에는 국책 문학, 전후파 문학을 거쳐 헤이세이 시대에 이르러 대중 문학의 발전과 함께 문학의 형태가 변화했다. - 초상화 - 청양 모덕사 최익현 초상
청양 모덕사 최익현 초상은 채용신이 1909년에 이모한 작품으로, 73세 최익현의 오사모와 단령 차림의 전신좌상이며, 구한말 유학자의 풍모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모덕사에 소장되어 최익현의 삶과 정신을 기리고 채용신의 초상화 기법을 보여준다. - 초상화 - 시녀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그린 "시녀들"은 알카사르 궁전 내 화가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와 시녀들, 그리고 벨라스케스 자신과 왕 부부의 모습을 담아 구도와 원근법, 빛의 활용 등 다각적인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어진영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정의 | 임금의 초상화 |
동의어 | 진영(眞影) 성용(聖容) 수용(殊容) 영정(影幀) |
역사 | |
유래 | 삼국시대부터 시작됨 |
제작 | 조선시대: 도화서 화가들이 제작 왕의 모습을 가장 객관적으로 묘사 |
관리 및 보관 | 특별히 마련된 봉안 시설에 보관 유사시 안전하게 보존 및 관리 |
종류 | |
전신상 | 왕의 전체 모습을 그린 초상화 |
반신상 | 왕의 상반신만 그린 초상화 |
좌상 |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초상화 |
흉상 | 가슴 윗부분을 그린 초상화 |
특징 | |
표현 기법 | 오사모, 강사포 등의 정장 착용 배경 묘사 최소화 왕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데 집중 |
문화적 의미 | 단순한 그림 이상의 의미 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 국가적인 행사나 의례에 사용 |
중요성 | |
역사적 가치 | 당대 문화와 사회상을 반영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 |
예술적 가치 | 뛰어난 묘사력과 표현 기법을 보여주는 예술 작품 |
참고 용어 | |
관련 용어 | 어진 봉안 어진 이안 도화서 영정각 |
2. 역사
1874년부터 어진영을 배급하기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강당 등에 걸어두는 정도였다. 1891년 교육칙어와 함께 어진영을 귀중히 봉안하도록 규정하면서 정중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는 도조(土蔵|도조일본어)나 봉안전에 보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887년 궁내성은 오키나와현 심상사범학교에 어진을 하부하였고,[4] 1889년에는 문부성이 고등소학교에도 어진을 하부한다는 방침을 각 부현에 통지했다.[5]
1928년 쇼와 시대에 들어 처음으로 어진 전달이 이루어졌다. 총 16,338조가 궁내성에서 문부성을 거쳐 전국 초등학교 및 중학교에 하사되었다.[6]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1945년 쇼와 천황이 더글러스 맥아더와 함께 찍은 사진이 일본 신문에 실리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16] 이전까지 천황의 사진이 신문에 실리는 일은 드물었으며, 1950년대까지도 재활용지 사용 문제로 천황 사진 게재는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전쟁 이후 어진영은 회수되었고, 새로운 어진영으로 교체하는 조건이었으나, 실제로 새로운 어진영이 내려온 학교는 1952년 아키타현의 사립 게이아이 학원 고등학교(고쿠가쿠칸 고등학교)뿐이었다.
2. 1. 메이지 시대 (1868년 ~ 1912년)
1873년(메이지 6년) 나라현 지사 시조 타카히라가 현청에 게양하기 위해 천황의 초상 사진 하사를 진언한 것을 계기로, 각 부현에서 잇따라 유사한 청원을 시작했다.[3][1] 1880년대 후반부터 오키나와현 심상사범학교를 시작으로 학교에 어진이 하부되기 시작했다.[4] 1890년대부터 교육 현장에 본격적으로 어진이 하사되기 시작했으며, 어진은 천황과 동일시되어 최대한의 경의를 표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2]1891년 11월 17일, 문부성은 하부된 어진과 교육칙어 등본을 교내의 일정한 장소에 "가장 존중하여 모셔둘 것"을 훈령했다(봉안고 · 봉안전 설치가 시작됨).
1898년 (메이지 31년) 나가노현의 정립 우에다 심상 고등소학교 (현재의 우에다 시립 세이메이 초등학교)에서 화재로 인해 메이지 천황의 어진을 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교장인 구메 요시타로 (소설가 구메 마사오의 아버지)가 책임을 지고 할복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 2. 쇼와 시대 (1926년 ~ 1989년)
1933년(쇼와 8년), 오키나와현 난조시의 제1 오자토 소학교 (현재의 오자토기타 초등학교)에서 화재로 어진이 불에 타 버렸을 때 당시 교장이 할복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8]1935년(쇼와 10년), 후쿠시마현에서는 초등학교 봉안전에서 어진이 도난당해, 범인이 몸값으로 800JPY을 교장에게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불경죄 및 공갈죄 혐의로 체포되었고, 어진은 되찾았다.[9]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에 따라 1945년(쇼와 20년) 12월에 문부성은 학교에서 어진영 회수를 지시했고, 이에 따라 어진영은 도도부현 단위로 회수되어 소각 처분("봉소")되었다.[12] 회수 후 다시 내려줄 예정이었지만, 실제로는 문부성은 소극적이었다.[12]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되어 일본의 점령이 끝난 1952년(쇼와 27년) 6월, 아키타현의 경애학원고등학교가 다시 어진영을 내려줄 것을 신청하여 인정받았다. 1950년대에는 학교에서 어진영을 게양하는 의식을 재개하는 움직임이 일부 있었으나,[12] 아사히 신문은 이를 "복고조", "천황 신격화의 조짐"이라고 비판적으로 보도했다.[13]
3. 어진의 관리와 책임
궁내성에서 각 학교에 어진을 대여했으며, 어진은 교육칙어와 함께 봉안전에 보관되었다. 궁내성에서 '대여'하는 품목이었기 때문에 각별히 신중하게 취급해야 했으며,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학교가 아닌 읍면사무소에 보관하는 경우도 있었다.[7]
1898년(메이지 31년) 나가노현의 정립 우에다 심상 고등소학교(현재의 우에다 시립 세이메이 초등학교)에서 화재로 메이지 천황의 어진이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교장인 구메 요시타로(소설가 구메 마사오의 아버지)가 책임을 지고 할복 자살했다. 1921년(다이쇼 10년) 나가노현 하니시나 군 난조 소학교(현재의 사카키정립 난조 소학교)에서도 화재가 발생했을 때 교장이 어진을 가지고 나가려다 소사했다.[7]
1933년(쇼와 8년) 오키나와현 난조시의 제1 오자토 소학교(현재의 오자토기타 초등학교)에서 화재로 어진이 소실되자 당시 교장이 할복 자살했다.[8]
1935년(쇼와 10년) 후쿠시마현의 한 초등학교 봉안전에서 어진이 도난당하고, 범인이 교장에게 몸값으로 800JPY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범인은 불경죄 및 공갈죄 혐의로 체포되었고, 어진은 되찾았다.[9]
4. 언론 보도와 상업 사진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민간에서 천황 사진 판매가 금지되었으나, 수요가 많아 암암리에 판매되었다. 1891년 황실 초상화 및 사진화 판매가 허용되었고, 1898년에는 황실 사진 판매도 허용되었다.[2]
인쇄 기술 발달과 함께 상업지와 신문사들은 황실 사진 및 그림을 부록으로 제공하며 경쟁했고, 이는 황실 이미지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상업지에 게재된 천황 사진은 교육 현장의 어진(御真影)보다 종류가 많았고, 국민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갔다.[2]
다이쇼 시대에는 "열린 황실" 정책으로 황실 사진 촬영 및 보도가 증가했다.[2] 1921년 황태자(훗날 쇼와 천황)의 유럽 순방 당시 찍힌 양복 차림 등 "평민적"인 모습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며 황실 인기를 높였다.[2] 같은 해 8월, 정부는 언론이 허가를 받으면 황실 스냅 사진을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
그러나 중일 전쟁 및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정부 간섭으로 군 관련 사진이 주를 이루었다.[2]
5. 봉게소
봉게소는 에마나 휘호, 종교와 관련된 물품 등을 게재하는 장소이지만, 전전에는 어진을 게재하는 장소를 의미하기도 했다. 전전의 공공기관이나 학교에는 봉게소(봉안전)가 설치되어 있었다.[14]
전후, 어진을 게재하는 봉게소는 대부분 철거되었지만, 1935년에 건설된 도야마현청[14]이나 1938년에 건설된 와카야마현청사 내부에는 과거의 봉게소 형태를 엿볼 수 있는 호화로운 부조가 남아 있다.[15]
6. 전후 어진의 변화
1945년 9월 27일 쇼와 천황이 더글러스 맥아더를 방문했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 9월 29일 일본 신문에 실리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16] 쇼와 천황이 맥아더 옆에 직립부동 자세로 찍힌 사진이 일반 신문에 실린 것은, 그 때까지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존경하며 비판을 꿈도 꾸지 못했던 일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전후 일본 신문들은 재활용지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재활용지에 천황의 사진을 싣는 것은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이는 어진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참조
[1]
웹사이트
御真影(御写真) | 現代美術用語辞典ver.2.0
http://artscape.jp/a[...]
[2]
논문
「皇室グラビア」と「御真影」 : 戦前期新聞雑誌における皇室写真の通時的分析
https://hdl.handle.n[...]
京都社会学年報 : KJS
2001-12-25
[3]
간행물
「御真影」物語|Webマガジンまなびと|学び!と歴史|
https://www.nichibun[...]
2007-11
[4]
서적
御真影録
宮内庁書陵部
[5]
서적
文部省普通学務局例規類纂1編
同局編
[6]
뉴스
全国の各学校へ宮内省から伝達始まる
東京日日新聞
1928-10-02
[7]
서적
環境史年表 明治・大正編(1868-1926)
河出書房新社
2003-11-30
[8]
서적
「御真影」に殉じた教師たち
大月書店
1989-04
[9]
뉴스
御真影を盗み出し、小学校校長を脅迫
中外商業新報
1935-12-25
[10]
서적
『クラシックカメラ専科No.38、プラクチカマウント』
[11]
서적
『クラシックカメラ専科No.8、スプリングカメラ』
[12]
논문
戦後教育改革期の学校儀式と御真影再下付問題 : 1958年の学習指導要領改訂前後までの経緯を中心に
https://cir.nii.ac.j[...]
教育學雑誌
2011-03-25
[13]
뉴스
各地に天皇神格化への兆し 御写真の前で訓話
朝日新聞
1954-02-15
[14]
문서
富山県庁舎について
2015
[15]
웹사이트
空襲を乗り越え、和歌山県の近代化を支えた文化財建築「和歌山県庁舎本館」
https://www.homes.co[...]
LIFULL HOME'S
2018-09-14
[16]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