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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현대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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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근현대 문학은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시작되어,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며 근대화의 양상을 보였다. 메이지 시대에는 사실주의와 낭만주의가 공존했으며, 20세기 초에는 자연주의 문학이 등장했으나, 나쓰메 소세키와 모리 오가이 등에 의해 반자연주의 문학도 발전했다. 다이쇼 시대에는 탐미주의, 인도주의, 신현실주의 등 다양한 반자연주의 문학이 전개되었고, 프롤레타리아 문학도 등장했다. 쇼와 시대에는 모더니즘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병립했으며, 전시 체제 하에서는 국책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전후에는 전후파 작가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문학을 시도했고, 고도 경제 성장기에는 다양한 소설가들이 활동했다. 헤이세이 시대에는 순수 문학의 위기 속에서 대중 문학이 발전했으며, 미디어 믹스와 하이퍼텍스트의 등장으로 문학의 형태가 변화했다. 현대 일본 문학은 대중 문학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장르가 등장하고, 미디어 믹스를 통해 여러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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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현대문학사

2. 전전(戰前) 문학

일본은 18세기 이후의 유럽 문학의 여러 사조를 추적하여 사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탐미주의, 이상주의, 사회주의 등의 여러 경향을 단기간에 섭취했다. 메이지 시대 초기 20년간은 계몽기로서 구(舊)문학에서 탈피하여 신문학을 모색하는 태동이 시작되었다. 문학의 본격적인 근대화가 추진되는 것은 1890년대에 와서이며 사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를 계기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전전 문학 초기의 커다란 흐름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사회정세를 배경으로 민주주의 풍조가 일어나면서, 민중예술이나 노동문학을 거쳐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융성했다. 한편, 이에 자극을 받아 전위 예술 의식에 뿌리박힌 신감각파나 신흥예술파의 모더니즘 운동이 발생하여 종래의 문학형식 혁신을 시도했다.

전전 문학 말기는 이러한 새로운 두 조류와 기성문학의 3파 정립(鼎立) 형태로 전개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관권의 탄압으로 전향(轉向) 문학의 현상을 낳았고, 예술파 문학도 시대의 동요 속에서 충분한 성장을 보지 못했다. 1935년의 전시하 문화통제는 문학을 질식 상태에 빠뜨렸다.

다이쇼 시대 말기에서 쇼와 시대 초기 가단(歌壇)은 구어가(口語歌) 운동 기관지 <우타토지유(歌와 自由)> 발간, '신단가협회(新短歌協會)' 결성으로 '아라라기'를 중핵으로 하는 기성가단을 비판하고 새로운 경향을 낳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새로운 움직임 중 하나는 좌익적인 프롤레타리아 단가 운동이었는데, 중일 전쟁을 계기로 가단이 국책(國策)에 협력하면서 애국정신을 노래한 단가가 범람하여 문예성(文藝性)을 상실했다.

하이쿠(俳句)에서는 1931년 이후 신흥 하이쿠 운동이 정서 회복, 인간 회복을 목표로 전개되었고, 그 후 무계(無季) 하이쿠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1940년과 1941년 두 차례의 탄압으로 소멸되었으며, 전시 중에는 1940년경 전시사회에서의 자세를 하이쿠에서 추구하려는 '인간탐구파(人間探究派)'가 주목받았다.

2. 1. 메이지 시대 (1868-1912)

메이지 시대(1868년 ~ 1912년)의 문학은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시기로, 서양 문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성격을 형성해 나갔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문명개화를 표방하며 서양의 사상과 문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 시기를 계몽기라고 부르며,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나카에 초민과 같은 계몽사상가들이 활약했다. 이들은 서양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민주주의 이념을 소개하며 일본 사회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메이지 초기에는 문학이 정치, 경제, 과학 등에 비해 경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본격적인 근대 문학은 1887년 전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신수』(1885년)와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구름』(1887년)이 그 시작을 알렸다. 이들은 사실주의 문학을 통해 근대적인 자아의식과 사회 현실을 묘사하고자 했다.

1890년대에는 사실주의와 함께 낭만주의 문학이 등장했다. 모리 오가이는 『무희』(1890년)에서 자아의 각성을 그렸고, 기타무라 도코쿠는 『내부 생명론』(1893년)을 통해 근대적 자아의 내면을 탐구했다. 히구치 이치요는 『다케쿠라베』, 『탁류』(모두 1895년)와 같은 작품으로 주목받았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초, 메이지 시대 말기에는 자연주의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1906년)와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1907년)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들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탐구했다.

그러나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로 반자연주의 문학도 등장했다. 나쓰메 소세키모리 오가이자연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과 사회 현실을 그려냈다.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년)와 『마음』(1914년) 등을 통해 근대 지식인의 고뇌와 인간의 이기심을 탐구했고, 오가이는 『청년』(1910년)과 『시부에 추사이』(1916년) 등을 통해 역사와 인간의 삶을 조명했다.

반자연주의는 탐미파, 백화파, 신현실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나가이 가후,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의 탐미파 작가들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고,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시가 나오야 등의 백화파 작가들은 인도주의적인 이상을 추구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기쿠치 칸 등의 신현실주의 작가들은 이지적으로 현실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시, 단가, 하이쿠와 같은 전통적인 문학 장르도 근대화되었다. 신체시가 등장했고, 모리 오가이는 번역 시집 『어영』(1889년)을 통해 서양 시를 소개했다. 요사노 아키코는 『미다레가미』(1901년)를 통해 여성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했고,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한 줌의 모래』(1910년)를 통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마사오카 시키하이쿠의 혁신을 이끌었다.

2. 1. 1. 계몽기 문학

메이지 시대 초기 20년간은 계몽기로서, 구(舊)문학에서 벗어나 신문학을 모색하는 태동이 시작되었다. 문화개화를 표방하여 전(前)시대의 봉건체제와 사상의 불합리로부터 정치적·사상적인 해방을 찾고 새로운 시민사회의 형성을 목표로 하였다. 이 시기에는 자유와 합리적 정신의 존중으로 나타나서 공리(功利)주의·실용주의 풍조가 강화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1868년 메이지 시대(1868년 - 1912년)가 시작된 이후, 서양 문명의 수입으로 서양의 사상·문학의 번역과 소개를 중심으로 하는 계몽 시대가 시작되었다. 모리 아리노리의 제창으로 발족한 메이로쿠샤는 계몽 사상을 바탕으로 메이지라는 신사회에서의 실리주의적 주장을 했다. 이는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져,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유』(1872년), 나카무라 마사나오 번역의 『서국입지편』(1871년), 나카에 조민 번역의 『민약역해』(1882년)가 널리 읽혔다.

메이지 유신에서 1885년쓰보우치 쇼요가 일본 최초의 근대 소설론 『소설신수이』를 발표하기까지의 기간의 문학은 희작 문학, 번역 문학, 정치 소설의 3가지로 분류된다.

쓰보우치 쇼요

  • 희작 문학은 에도 시대 후기의 희작의 흐름을 계승하면서, 문명 개화 후의 새로운 풍속을 받아들여 인기를 끌었다. 가나가키 로분은 문명 개화와 계몽 사상가들을 조롱하여, 이를 해학적으로 그린 『서양도중 무릎 굽이』(1870년), 『안구라나베』(1871년)를 발표했다.
  • 번역 문학은 메이지 10년대(1877년 - 1886년)에 서구의 문학 작품이 활발하게 유입되어 널리 퍼졌다. 대표작은 가와시마 다다노스케가 번역한 베르느의 『80일간의 세계 일주』(1878년), 쓰보우치 쇼요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번역한 『자유도 칼날 여파 예봉』(1884년)이다.
  • 정치 소설은 자유민권 운동의 고조와 함께 메이지 10년대(1877년 - 1886년)부터 쓰여지게 된다. 정치적인 사상의 주장·선동·선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야노 류케이의 『경국미담』(1884년), 도카이 산시의 『가인 지기우』(1885년)와 같은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은 웅대한 전개를 가진 구성에 많은 독자들이 매료되었다.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신수이』 발표 후, 그 주장을 받아 사실주의적 요소가 짙어져 스에히로 텟초의 『설중매』(1886년)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2. 1. 2.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후타바테이 시메이


일본의 근대 문학은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신수』(1885년)에 의해 실질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후타바테이 시메이는 『소설총론』(1886년)을 썼다. 쇼요는 『당세서생기질』(1885년)을 썼지만, 희작의 풍정을 많이 남겼다. 이를 극복하고 1887년에 발표된 시메이의 『뜬구름』은 일본 근대 소설의 효시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실주의적인 근대 소설이 충실해지기 시작하는 한편, 정치에서 국수주의적인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이하라 사이카쿠지카마쓰 몬자에몬 등의 고전문학에 대한 재평가가 높아졌다. 1885년, 오자키 고요, 야마다 비묘 등이 겐유샤를 만들어, "가라쿠타 문고"를 발간했다. 의고전주의 아래에서, 고요는 『두 비구니 색참회』(1889년)나 『금색야차』(1897년)를 발표했다. 고다 로한은 『노단단』, 『풍류불』(모두 1889년), 『오중탑』(1891년) 등의 소설 외에도, 평론이나 고전의 해석 등 폭넓게 활약했다. 고요와 로한이 활약한 시기는 "홍로시대"라고 불렸다.

모리 오가이


근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아 의식의 각성은 인간성의 해방을 가져왔고, 개방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낭만주의 문학이 등장한다. 모리 오가이독일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한 『무희』(1890년)를 발표하여, 자아의 각성을 그렸다. 또한 오가이는 안데르센 원작의 『즉흥시인』(1892년)을 번역하여, 전아한 의고 문체로 시정 풍부한 사랑 이야기를 전하여 널리 애독되었다. 기타무라 도코쿠는 근대적 자아의 내면의 충실을 주장한 평론 『내부 생명론』(1893년)을 쓰고, 25세에 자살했다. 히구치 이치요는 대표작 『다케쿠라베』, 『탁류』(모두 1895년)가 오가이·로한의 격찬을 받아 주목받았지만, 2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즈미 교카는 『고야성지』(1900년), 『가등롱』(1910년)과 같은 낭만적인 정서가 깊은 작품을 발표하여, 환상적·신비적인 독자적인 세계를 열었다. 구니키다 돗포는 자연미를 수필적으로 그린 『무사시노』(1898년)를 발표했고, 기독교 인도주의자인 도쿠토미 로카는 사회적 시야를 가진 가정 소설 『부여귀』(1899년)를 발표했다. 돗포는 이윽고 낭만주의에서 자연주의적인 작풍으로 변화해 갔다. 일본의 낭만주의 문학은 서구의 그것에 비해 단명했다.

2. 1. 3. 자연주의와 반자연주의

시마자키 도손


20세기 초(메이지 시대 말기), 에밀 졸라기 드 모파상의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 문학이 일어났다. 유럽의 자연주의는 당시 유전학·사회학 등의 지견을 도입하여 객관적인 묘사를 추구했지만, 일본에서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1906년)로 시작된 일본 자연주의 문학은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1907년)에 의해 방향성이 결정되었다고 여겨진다. 가타이의 소설은 사소설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이후 일본 소설의 주류가 되었다. 다른 자연주의 작가로는 구니키다 돗포, 도쿠다 슈세이, 마사무네 하쿠초 등이 있다. 슈세이는 『신세대』(1908년)를, 하쿠초는 『어디로』(1908년)를, 가타이는 『시골 교사』(1909년)를, 도손은 『집』(1910년), 『신생』(1918년)을 발표했다.

나쓰메 소세키


이러한 자연주의의 흐름에 대항하는 형태로 반자연주의 문학 조류가 존재했다. 나쓰메 소세키모리 오가이, 이후 탐미파, 백화파, 신현실주의가 반자연주의로 분류된다.

소세키와 오가이는 일본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서 종종 함께 언급되며, 각각 여유파, 고답파로 불린다(소세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후기의 오가이는 여유파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 사생문이나 한시, 하이쿠를 저술했던 소세키는 다카하마 교시의 권유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년)를 집필하여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도련님』, 『풀 베개』(둘 다 1906년) 등의 작품에서 자연주의 문학과 다른 작풍을 보였고, 전기 3부작 『산시로』(1908년), 『그 후』(1909년), 『』(1910년)에서 근대 지식인의 내면을 그렸다. 수선사의 대환 이후 『마음』(1914년), 『명암』(1916년)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추구했다. 오가이도 소세키의 왕성한 집필 활동에 자극받아 창작 활동을 재개하여 『청년』(1910년), 『안』(1911년) 등의 현대 소설을 썼고, 이후 『시부에 추사이』(1916년) 등 사전·역사 소설로 전환했다.

2. 1. 4. 시, 단가, 하이쿠의 근대화

도야마 마사카즈, 야타베 료키치, 이노우에 데쓰지로에 의해 『신체시초』(1882년/메이지 15년)가 간행되어 신체시가 성행하였다.

독일에서 귀국한 모리 오가이는 번역 시집 『어영』(1889년/메이지 22년)을, 기타무라 도코쿠는 『초수지시』(1889년/메이지 22년), 『봉래곡』(1891년/메이지 24년)을 출판했다. 도코쿠의 문학계에 참가했던 시마자키 도손은 『와카나집』(1897년/메이지 30년)을, 도손과 함께 불린 도이 반스이는 『천지유정』(1899년/메이지 32년)을 간행했다. 이러한 낭만주의적인 시는 낭만시라고 불린다. 분고에서는 가와이 스이메이, 요코세 야우, 이라코 세이하쿠가 활동했다.

상징시에서는 우스다 킨킨, 가바라 아키명이 활약했고, 그 뒤를 이어 기타하라 하쿠슈, 미키 로후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백로의 시대'라고 불렸다. 우스다 킨킨이나 가바라 아키명의 상징시에는 우에다 빈의 번역 시집 『해조음』(1905년/메이지 38년)의 영향이 보이지만, 『해조음』 자체가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명시집으로서의 평가가 정착된 것은 우에다의 사후인 다이쇼 시대의 일이다.

요사노 아키코


이시카와 다쿠보쿠


낭만주의 중 단가에서는 요사노 데칸이 묘조를 창간했고, 요사노 아키코는 『미다레가미』(1901년/메이지 34년)를 발표했다. 이 일파였던 이시카와 다쿠보쿠, 구보다 고보도 활약을 보였지만, 특히 다쿠보쿠는 자연주의로 전향하여 『한 줌의 모래』(1910년/메이지 43년)와 『슬픈 장난감』(1912년/메이지 45년)을 간행했다. 또한 다쿠보쿠와 마찬가지로 자연주의의 영향 하에 와카야마 보쿠스이의 『별리』(1910년/메이지 43년)나 토키 아이카의 『NAKIWARAI』(1910년/메이지 43년) 등도 탄생했다. 다케카시회를 주최한 사사키 노부츠나는 고코로노 하나를 창간했다. 마사오카 시키는 『가요미에게 주는 서』(1898년/메이지 31년)를 발표하고 네기시 단가회를 열었으며, 이토 사치오, 나가츠카 세쓰 등이 참가했다. 기타하라 하쿠슈, 요시이 이사무 등은 빵의 회를 일으켜 탐미파로 이어지는 노래를 지었다.

하이쿠에서는 마사오카 시키와 호토토기스를 중심으로 다카하마 쿄시, 가와히가시 헤키고토, 나이토 메이세츠 등이 배출되었다.

2. 2. 다이쇼 시대 (1912-1926)

메이지 시대 말기에 발생한 구어 자유시 운동과 상징시 운동은 다이쇼 시대의 과제였다. 당시의 휴머니즘을 비롯한 여러 사조에 따라 시정신과 시 표현의 변혁을 도모하고, 시의 사상성과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1] 1908년 시마무라 호게츠의 <구어시 문제>, 다음 해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구라후베키시> 등의 논문에서 구어시의 의의가 강조되었다.[1] 이는 표현뿐만 아니라 표현을 규제하는 정신의 변혁도 의도하는 것으로, 낭만적 심정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현실에 입각한 시정신을 확립하고 정조 중심의 서정시에 사상성을 부여하여 새로운 근대시의 방향을 목표로 했다.[1]

이러한 운동은 다이쇼 시대에 들어와 다카무라 고타로,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업으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민중시파 시인의 활약으로 구어 자유시 운동은 급속히 발전했다.[1] 기타하라 하쿠슈, 미키 로후 등은 메이지 말기의 상징시 운동을 계승하여 신풍을 보였다.[1] 기타하라는 신낭만주의의 탐미적 경향을 대표하여 이국 취미의 환상적, 관능적인 정서시풍을 수립했고, 미키는 음영과 함축성 있는 명상적인 정조시풍을 완성시켰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데모크라시 사조의 영향으로 민중의 생활감정과 이상을 노래하려는 민중시 운동이 발생했다.[1] 무로 사이세이, 야마무라 보초는 하기와라 사쿠타로와 함께 잡지 <간조(感情)>에 의한 서정시 운동에서 출발하였다.[1] 무로는 초기에는 야성적인 생활감정과 예리한 감수성을 보였으나, <아이노시슈(사랑의 詩集)>에서는 강한 인도주의적 경향으로 서민적인 감정과 사랑의 정신을 노래했다.[1] 야마무라도 인도주의 사상을 노래했고, 동양적인 범신론적 시경으로 나아갔다.[1] 센케 모토마로는 <지분와미타(나는 보았다)>에서 자연의 미와 생명력을 찬양하고 인간애의 정신을 노래하였다.[1]

민중시 운동은 시의 대중화와 구어시 보급에 공헌했지만, 시상이나 용어의 단조로움과 계급의식이 결여된 사상적 한계가 비판받아 영향력을 잃었다.[1] 다이쇼 말기에는 다다이즘이나 아나키즘에 의한 기존 시에 대한 부정의 움직임이 강화되어 프롤레타리아 시나 모더니즘의 시 운동이 발생하여 쇼와 시대의 신풍으로 옮겨졌다.[1]

2. 2. 1. 반자연주의 문학의 다양화

자연주의 문학이 문단의 주류를 차지하는 가운데, 20세기 초(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나쓰메 소세키모리 오가이와 같은 반자연주의 문학 운동이 일어났다.

나가이 가후는 유럽에서 귀국 후 『프랑스 이야기』(1909년/메이지 42년)를 발표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문신』(1910년/메이지 43년)이나 『바보의 사랑』(1924년/다이쇼 13년) 등을 쓰고, 후기 낭만주의라고도 불리는 탐미파가 생겨났다. 이들은 「스바루」, 「미타 문학」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 외에 사토 하루오, 쿠보타 만타로 등이 대표적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에 반해 자유·민주주의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시라카바」에서 활동한 시라카바파 사람들은 인도주의를 주장했다. 무샤노코지 사네아쓰는 『축복받은 사람』(1911년/메이지 44년) ,『우정』(1919년/다이쇼 8년)을 썼다. 시가 나오야는 『화해』, 『성의 앞바다에서』(모두 1917년/다이쇼 6년)를 썼다. 아리시마 다케오는 『어떤 여자』(1919년/다이쇼 8년)를 썼고, 사토미 톤은 『다정불심』(1922년/다이쇼 11년)을 썼다. 특히 시가 나오야의 사소설·심경소설은 순문학의 규범으로서 동시대 젊은 소설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이쇼 시대(1912년/다이쇼 원년 - 1926년/다이쇼 15년) 중기부터는 도쿄 제국대학 계통의 「신사조」에서 활동하는 신현실주의가 소세키와 오가이의 영향 아래 나타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나 기쿠치 칸, 야마모토 유조, 구메 마사오 등의 활동이 있었다. 아쿠타가와는 『코』(1916년/다이쇼 5년)로 등장하여 고전에 소재한 수많은 단편 등으로 다이쇼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극작가로 알려진 기쿠치 칸은 역사 소설이나 통속 소설을, 야마모토 유조는 건강한 교양 소설을 썼다. 아쿠타가와는 1927년/쇼와 2년, 『갓파』와 『톱니바퀴』라는 걸작을 쓴 후에 자살했다. 아쿠타가와의 자살은 시대에 대한 불안을 보여주는 것으로, 지식인이나 소설가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야기성을 중시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해, 아쿠타가와는 "이야기의 재미"만이 소설의 가치는 아니다"라며 예술 지상주의를 옹호했고, 문학 논쟁이 있은 직후의 죽음이었다.

기적파(신 와세다파)라고 불리는 히로쓰 가즈로나 가사이 젠조, 우노 고지, 카무라 이소타 등에 의해 사소설이 쓰여졌다. 인간 내부 심리의 현실을 깊이 응시하는 것으로, 인생의 어두움이 그려졌다.

2. 2. 2. 민중 예술론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등장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사회정세를 배경으로 일어난 데모크라시 풍조는 민중예술이나 노동문학을 거쳐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서 융성했다.[1] 한편, 이에 자극을 받아 전위 예술 의식에 뿌리박힌 신감각파나 신흥예술파의 모더니즘 운동이 발생하여 종래의 문학형식 혁신을 시도했다.[1]

2. 2. 3. 대중 소설의 흥륭

메이지 시대에 오자키 코요의 『금색 야차』(1897년/메이지 30년) 등 풍속 소설이 발전했고, 무라카미 로로쿠, 츠카하라 시부시엔의 땋은머리물(하츠빈물), 오시카와 슌로의 모험 소설 등 통속적인 소설이 쓰여 대중 소설의 선구가 되었다.[1]

1913년/다이쇼 2년에 나카자토 카이잔은 "대승 소설"이라고 칭하는 대작 『대보살 고개』의 연재를 시작했다. 인간의 업을 그리려고 한 시대 소설로, 미완으로 끝났지만 그 영향은 커서 대중 소설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1] 1925년/다이쇼 14년에 간행된 ""에는 당시 인기 소설가가 앞다투어 집필했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 요시카와 에이지가 높은 인기를 얻어, 『나루토 비첩』(1933년/쇼와 8년), 『미야모토 무사시』(1939년/쇼와 14년) 등으로 국민 소설가의 칭호를 받았다. 이 외에도 강담이나 요미혼의 흐름을 잇는 시대 소설에서는 다이부츠 지로, 시라이 쿄지 등이 활약했다.[1]

요시카와 에이지


탐정 소설은 쿠로이와 루이코의 번안 소설 등으로 소개되었다. 이 장르에서는 "신청년"에 『2전 동전』(1923년/다이쇼 12년)으로 데뷔한 에도가와 란포가 다수 집필하여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코가 사부로, 요코미조 세이시 외에도 에도 시대를 무대로 한 "포물장"이라고 불리는 시대물이 쓰여졌다.[1]

2. 2. 4. 시, 단가, 하이쿠의 발전

메이지 시대가 되자 와카·하이쿠·한시 등의 전통적 시 형식에 만족할 수 없는 정신적 요구에서, 서양시의 형식을 모방한 일종의 신체(新體)의 시 형식이 창안되었고, 이것이 근대시의 원류가 되어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양 시가 처음 소개되어 신체시가 연구된 것은 1882년에 도야마 마사카즈 등이 간행한 <신타이시쇼(新體詩抄)>에 의한 것인데 예술적 가치는 작았으나 계몽적 의의는 컸다. 신체시 운동의 가능성을 확립한 것은 낭만주의 운동에서의 서정시(抒情詩)의 개화인데 그 초기 담당자는 기타무라 도코쿠, 시마자키 도손 등의 청년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뿌리깊이 남아 있던 봉건사상에 항거하여 인간성의 해방, 자아의 각성을 찾고 청춘의 낭만적 감정을 소리높여 노래했다.

메이지 30년(1897)대의 시단의 중진은 요사노 뎃칸, 요사노 아키코 부부를 중심으로 한 '묘죠(明星)'(1900 창간)파의 시인들이다. 요사노 뎃칸은 처음 남성적인 기개를 보인 작품을 많이 썼으나 차츰 공상적인 시경(詩境)에 현실생활을 미화시키는 경향으로 옮겨, 이른바 '묘죠'파의 화려한 시풍을 수립했다. '묘조'파에서는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타하라 하쿠슈 등의 수재들이 배출되었다.

1905년에 우에다 빈의 번역시집 <가이초온(海潮音)>이 간행되었는데, 주로 프랑스 상징파의 시풍을 소개하여 그 영향으로 상징시 운동이 촉구되었다. 상징파의 시인으로서 재빨리 유현(幽玄)의 신풍을 개척한 사람은 간바라 아리아케와 스스키다 큐킨 등이다. 간바라는 고아한 상징시체를 완성했고, 스스키다 큐킨 또한 고대의 품위 있는 풍취를 회고한 작품으로 고전적인 아름다운 시풍을 보였다.

메이지 초기의 가단(歌壇)은 게이엔파(桂園派)를 중심으로 한 구(舊)가단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1882년 <신타이시쇼>에서의 단가 부정의 자극 등에 의해 시대에 눈뜬 사람들에 의하여 와카 개량론(和歌改良論)이 제창되었다.

요사노 뎃칸은 1895년 가론(歌論) <보코쿠노온(亡國의 音)>을 발표하여 여성적 유약성을 갖는 노래를 비난하고 남성적 가조를 주장하였으며, 1899년 '도쿄신시샤(東京新詩社)'를 결성하고 다음해 기관지 <묘죠(明星)>를 창간했다. 그는 차츰 연애·정열을 중핵으로 한 낭만적인 가풍으로 이행하였는데, 요사노 아키코(뎃칸의 아내)의 출현에 의해서 단가의 근대화의 실현을 성취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미다레 가미(흐트러진 머리)>에서 본능적인 인간해방과 관능을 구가했다. 이 한 권은 메이지 낭만주의의 정화로 간주된다.

한편 '신시샤(新詩社)'와 더불어 단가의 혁신운동을 추진한 것은 마사오카 시키였다. 그에 의한 혁신의 방향은 전통 단가의 본질을 심화시킴으로써 근대화를 이룩하려는 것으로 일종의 의고주의(擬古主義)적인 경향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구파(舊派)에서 나와 차츰 신풍으로 향한 사사키 노부쓰나의 지쿠하쿠카이(竹柏會)가 있다. 그는 온화하고 절충적 입장을 취하여 새로운 가풍의 보급에 노력했다. 이와 같이 메이지 말기는 단가사상(短歌史上) 재능 있는 가인이 배출되어 그 특색을 발휘한 풍요한 시대였다. 또한 근대 하이쿠에 있어서는 첫째로 마사오카 시키에 의한 혁신을 들 수 있는데, 하이카이(俳諧)의 훗구(發句)였던 명칭을 하이쿠(俳句)라는 이름으로 보급시킨 것도 그였다.

2. 3. 쇼와 시대 (1926-194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사회정세를 배경으로 민주주의 풍조가 일어나면서, 민중예술이나 노동문학을 거쳐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융성했다. 한편, 이에 자극을 받아 전위 예술 의식에 뿌리박힌 신감각파나 신흥예술파의 모더니즘 운동이 발생하여 종래의 문학형식 혁신을 시도했다.

전전 문학 말기는 이러한 새로운 두 조류와 기성문학의 3파 정립(鼎立) 형태로 전개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관권의 탄압으로 전향(轉向) 문학의 현상을 낳았고, 예술파 문학도 시대의 동요 속에서 충분한 성장을 보지 못했다. 1935년의 전시하 문화통제는 문학을 질식 상태에 빠뜨렸다.

다이쇼 말기에서 쇼와 초기 가단(歌壇)은 구어가(口語歌) 운동 기관지 <우타토지유(歌와 自由)> 발간, '신단가협회(新短歌協會)' 결성으로 '아라라기'를 중핵으로 하는 기성가단을 비판하고 새로운 경향을 낳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새로운 움직임 중 하나는 좌익적인 프롤레타리아 단가 운동이었는데, 중일전쟁을 계기로 가단이 국책(國策)에 협력하면서 애국정신을 노래한 단가가 범람하여 문예성(文藝性)을 상실했다.

하이쿠(俳句)에서는 1931년 이후 신흥 하이쿠(新興俳句)가 정서 회복, 인간 회복을 목표로 전개되었고, 그 후 무계(無季) 하이쿠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1940년과 1941년 두 차례의 탄압으로 소멸되었으며, 전시 중에는 1940년경 전시사회에서의 자세를 하이쿠에서 추구하려는 '인간탐구파(人間探究派)'가 주목받았다.

2. 3. 1. 모더니즘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

1920년대 중반부터 1935년/쇼와 10년경까지는 모더니즘 문학프롤레타리아 문학이 함께 발전한 시기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다다이즘, 미래파, 표현주의 등의 기법이 일본에 그대로 수입되었고, 일본 소설가들은 기존의 평판한 사실주의예술지상주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요코미츠 리이치와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은 기성 문단과 개인주의 리얼리즘을 비판하며 신감각파를 일으켰다. 요코미츠의 『파리』(1923년/다이쇼 12년)는 영화 기법의 영향을 받았으며, 『순수 소설론』(1935년/쇼와 10년)에서는 '자신을 보는 자신'의 필요성에서 '제4인칭 시점' 설정을 시도했다. 1935년/쇼와 10년, 가와바타는 『설국』을 쓰기 시작해 독자적인 미의식을 완전히 꽃피웠다. 비정함과 허무가 바탕을 이루는 가와바타의 미의식은 『최후의 눈』(1933년/쇼와 8년)에 잘 나타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신흥 예술파로 불리는 소설가들 중에서도 개성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작가들이 나타났다. 사소설의 전통을 이은 『레몬』(1925년/다이쇼 14년)의 카지이 모토지로와 머리만 커진 지식인을 풍자한 『도롱뇽』(1929년/쇼와 4년)의 이부세 마스지가 대표적이다.

이부세 마스지


신감각파의 흐름을 이어받아 신흥 예술파 클럽 해체 후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은 호리 타츠오와 이토 세이의 신심리주의이다. 이들은 조이스프루스트심리주의 영향을 받아 정신 분석과 심층 심리의 예술 표현을 시도했다. 이 시대에는 고바야시 히데오가 『다양한 의장』(1929년/쇼와 4년)으로 등장하여 근대 비평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1921년/다이쇼 10년에 코마키 치카에 등이 잡지 「씨 뿌리는 사람」을 창간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흐름이 생겨났다. 『바다에 사는 사람들』(1926년/다이쇼 15년/쇼와 원년)의 하야마 요시키, 『게잡이 배』(1929년/쇼와 4년)의 고바야시 다키지, 『태양이 없는 거리』(1929년/쇼와 4년)의 도쿠나가 나오, 『카라멜 공장으로부터』(1928년/쇼와 3년)의 사타 이네코 외에 미야모토 유리코, 나카노 시게하루, 구로시마 덴지, 쓰보이 사카에 등의 작품이 나왔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만주 사변 이후 군국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발전했다. 구라하라 유이토, 미야모토 켄지 등의 문예 평론도 지식층에 영향을 주었다.

혁명 운동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 지지 입장을 보인 '동반자 문학' 작가들도 있었다. 『카이진마루』(1922년/다이쇼 11년), 『마치코』(1928년/쇼와 3년) 등을 쓴 노가미 야에코, 『파도』(1928년/쇼와 3년)의 야마모토 유조, 『바람과 비 강할지어다』(1933년/쇼와 8년)의 히로츠 카즈로, 세리자와 코지로 등이 작품을 발표했다.

2. 3. 2. 전시하의 문학

1920년대 중반부터 1935년/쇼와 10년경까지는 모더니즘 문학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병립한 시기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다다이즘, 미래파, 표현주의 등의 기교가 그대로 일본에 수입되었고, 일본 소설가들은 기존의 평판한 사실주의예술지상주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요코미츠 리이치나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은 기성 문단과 개인주의 리얼리즘을 비판하며 신감각파를 일으켰다. 요코미츠 리이치의 『파리』(1923년/다이쇼 12년)는 영화 수법의 영향을 받았으며, 『순수 소설론』(1935년/쇼와 10년)에서는 "자신을 보는 자신"의 필요성에서 "제4인칭 시점" 설정을 시도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5년/쇼와 10년에 『설국』을 쓰기 시작하여 독자적인 미의식을 완전히 개화시켰다. 비정함과 허무가 저류를 이루는 그의 미의식은 『최후의 눈』(1933년/쇼와 8년)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신흥 예술파로 불린 소설가들 또한 모더니즘 문학의 한 흐름이었지만, 오히려 그 방류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개성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작가가 나타났다. 사소설의 전통을 계승한 『레몬』(1925년/다이쇼 14년)의 카지이 모토지로와 머리만 비대해진 지식인을 희화화한 『도롱뇽』(1929년/쇼와 4년)의 이부세 마스지가 대표적이다.

신감각파의 흐름을 이어받아 신흥 예술파 클럽 해체 후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은 호리 타츠오와 이토 세이의 신심리주의이다. 이들은 제임스 조이스마르셀 프루스트심리주의 영향을 받아 정신 분석과 심층 심리의 예술 표현을 시도했다. 이 시대에는 고바야시 히데오가 『다양한 의장』(1929년/쇼와 4년)으로 등장하여 근대 비평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1921년/다이쇼 10년, 코마키 치카에 등이 잡지 「씨 뿌리는 사람」을 창간하며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조류가 생겨났다. 『바다에 사는 사람들』(1926년/다이쇼 15년/쇼와 원년)의 하야마 요시키, 『게잡이 배』(1929년/쇼와 4년)의 고바야시 다키지, 『태양이 없는 거리』(1929년/쇼와 4년)의 도쿠나가 나오, 『카라멜 공장으로부터』(1928년/쇼와 3년)의 사타 이네코 외에 미야모토 유리코, 나카노 시게하루, 구로시마 덴지, 쓰보이 사카에 등의 작품이 나왔다. 만주 사변 이후 군국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은 발전해갔고, 구라하라 유이토, 미야모토 켄지 등의 문예 평론이 지식층에 영향을 주었다.

"동반자 문학" 작가들은 혁명적 운동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 조직 밖에 있으면서 지지 입장·주장이 가까웠다. 『카이진마루』(1922년/다이쇼 11년), 『마치코』(1928년/쇼와 3년) 등을 쓴 노가미 야에코, 『파도』(1928년/쇼와 3년)의 야마모토 유조, 『바람과 비 강할지어다』(1933년/쇼와 8년)의 히로츠 카즈로, 세리자와 코지로 등이 작품을 발표했다.

나카하라 주야


다이쇼 시대 말기(1920년대)부터 이전 시 형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시를 창출하려는 실험 정신이 싹텄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니시와키 준자부로,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은 다카하시 신키치, 요시유키 에이스케, 아나키즘 시에서 발전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시 분야에서는 나카노 시게하루, 쓰보이 시게지, 오노 주조, 하기하라 교지로 등이 활약했고, 구성주의에 이르렀다. 안자이 후유에, 기타가와 후유히코, 미요시 타츠지 등은 신 산문시 운동(단시 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는 여러 예술 운동이나 인도주의, 농본주의 등 다양한 운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다. 무라노 시로, 기타조노 가쓰에 등은 모더니즘 운동 속에서 활동했고, 오구마 히데오, 가네코 미쓰하루, 야마노구치 바쿠, 다나카 후유지 등의 시인도 활동했다.

다카무라 고타로


중일 전쟁으로 모더니즘 운동이 퇴조하면서 시의 세계도 변화했다. 호리 다쓰오 등이 주재하는 잡지 '사계'에서는 다치하라 미치조, 쓰무라 노부오, 마루야마 가오루 외 '사계파' 시인들이 서정시의 아성을 구축했고, 일본 낭만파에서는 이토 시즈오가 활약했다. 구사노 신페이, 나카하라 주야 등도 독특한 발자취를 남겼다.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미요시 타츠지의 『측량선』(1930년), 니시와키 준자부로의 『Ambarvalia』(1933년), 나카하라 주야의 『염소의 노래』(1934년), 나카노 시게하루의 『나카노 시게하루 시집』(1935년), 다카무라 고타로의 『지혜코 초』(1941년) 등이 있으며, 가집으로는 시마키 아카히코의 『가킨집』(1926년), 아이즈 야이치의 『녹명집』(1940년), 구집으로는 미즈하라 슈오시의 『갓쇼』(1931년), 나카무라 소탄오의 『장자』(1936년) 등이 있다. 쓰치야 분메이도 뛰어난 단가를 남겼다.

연극에서는 기시다 구니오의 『종이 풍선』(1925년), 구보 사카에의 『화산회지』(1937년), 다나카 지카오의 『어머니』(1933년),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희곡으로 무라야마 도모요시의 『폭력단기』(1930년)가 평가받았다.

2. 3. 3. 시, 단가, 하이쿠의 동향

다이쇼 시대(1912-1926) 단가의 주요 작가들은 메이지 후기에 등장하여 자연주의의 영향과 그에 대한 대응 속에서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며 다채롭고 풍요로운 시기를 이끌었다.

다이쇼 가단(歌壇)을 대표하는 세력은 1917년경 '아라라기'파였으며, 이후 가단은 이들의 전성시대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마키 아카히코(1876-1926), 사이토 모키치(1882-1953), 나카무라 켄키치(1889-1934), 쓰치야 분메이(1890- ? ), 샤쿠 초쿠(1887-1953) 등이 있다.

하이단(俳壇)에서는 마쓰오 가시키의 혁신 정신을 계승한 가와히가시 헤키고토(1873-1937)가 자연주의 시대에 신경향 하이쿠를 주창했고, 하기와라 세이센스이(1884- ? ) 등이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다이쇼 시대에는 무라카미 기죠(1865-1938), 이이다 다코쓰(1885-1962) 등 뛰어난 작가들에 의해 '호토토기스(두견새)' 하이단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다이쇼 시대 단가하이쿠는 모두 마쓰오 가시키 유파의 사생파(寫生派)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각자 고유한 길을 걸으며 높은 결정성(結晶性)을 보였다.

3. 전후(戰後) 문학

전후 단가와 하이쿠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재건되었다. 단가는 전시 중의 반성과 평화 건설에 대한 의지를 담아, 일본적 민주주의 단가 형성을 목표로 했다. 이때 단가 형식의 정형과 자유율의 공존을 인정했는데, 이는 1930년대의 단가 운동을 거친 반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이쿠는 전쟁 중 자연을 소재로 풍영하는 것으로 저항하는 미약한 문예성 옹호의 흐름을 보였으나, 대세는 전시 협력의 안이한 작풍이었다. 전후 이에 대한 반성과 탄압으로 중단되었던 하이쿠 운동을 재발족시키는 것에서 출발했다.

3. 1. 전후 문학의 재출발

전쟁이 끝나고 문예 잡지가 잇따라 복간·창간되면서, 전쟁 말기 작품 발표가 어려웠던 기존 작가들이 활동을 재개했다. 시가 나오야는 파괴된 도쿄를 배경으로 『잿빛 달』(1946년)을 썼고,[1] 나가이 가후는 『부침』(1946년), 『무희』(1946년) 등을,[1]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세설』(1948년) 완성 후 『소장 시게모토의 어머니』(1949년)를 썼다.[1] 우노 코지는 『생각의 강』(1946년), 무샤노코지 사네아쓰는 『진리 선생님』(1949년)을 썼고,[1]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설국』을 완결(1948년)하고 『천 마리 학』(1949년), 『산의 소리』(1949년 - 1954년) 등을,[1] 이부세 마스지는 『오늘 휴진』(1949년), 『요배 대장』(1950년) 등을,[1] 마사무네 하쿠초는 『일본 탈출』(1949년 - 1953년) 등을 썼다.[1] 노가미 야에코는 『미로』를 개작·완성(1956년)했고,[1] 나가요 요시로, 히로쓰 가즈로 등도 활발히 활동했다.[1]

한편, 히노 아시헤이, 하야시 후사오, 오자키 시로, 기쿠치 칸,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기시다 구니오, 도쿠토미 소호 등 많은 문학가들이 전쟁 협력을 이유로 공직 추방 지정을 받았다.[1]

프롤레타리아 문학나카노 시게하루, 미야모토 유리코 등은 신일본문학회를 창립, 민주주의 문학 운동을 목표로 재출발했다.[1] 미야모토 유리코는 『반슈 평야』(1946년), 『두 개의 정원』(1947년), 도쿠나가 나오는 『아내여 잠들어라』(1946년), 사타 이네코는 『나의 도쿄 지도』(1946년), 나카노 시게하루는 『무라기모』(1949년), 『배꽃』(1957년)을 썼다.[1] 쓰보이 사카에의 『스무 개의 눈동자』(1952년)는 영화화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신일본문학회는 이념 대립으로 분열·후퇴했다.[1]

3. 1. 1. 전후파 작가와 제3의 신인

오카 쇼헤이


종전 직후, 전쟁 체험과 패전 후의 현실 속에서 기성 가치관과 윤리관이 붕괴되는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인간 인식을 바탕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새로운 작가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들은 등장 시기에 따라 제1차 전후파·제2차 전후파로 불렸다. 『어두운 그림』 (1946년/쇼와 21년)으로 전후파의 기수로 불린 노마 히로시를 시작으로, 『심야의 주연』 (1947년/쇼와 22년) 등의 시이나 린조, 『독사의 핏줄』 (1947년/쇼와 22년) 등의 다케다 타이준, 『사령』 (1945년/쇼와 20년) - 미완)의 하니야 유타카, 『사쿠라지마』 (1946년/쇼와 21년) 등의 우메자키 하루오, 『여름의 꽃』 (1947년/쇼와 22년)의 하라 타미키, 『죽음의 그림자 아래』 (1947년/쇼와 22년) 등의 나카무라 신이치로, 『가면의 고백』 (1949년/쇼와 24년) 등의 미시마 유키오 등이다. 그 후에도, 『포로기』 (1949년/쇼와 24년), 『들불』 (1952년/쇼와 27년) 등의 오카 쇼헤이나, 『광장의 고독』 (1951년/쇼와 26년) 등의 호리타 요시이에, 시마오 토시오, 『벽』 (1951년/쇼와 26년) 등의 아베 코보 등이 등장하여 다채로운 문학 활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전후 특유의 작가로서 『아시즈리 곶』 (1949년/쇼와 24년), 『그림책』 (1950년/쇼와 25년) 등의 타미야 토라히코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다무라 타이지로의 이른바 "육체 문학"도 큰 주목을 받았다.

전후파 중 시마오 토시오와 우메자키 하루오의 경향은 "제3의 신인"으로 불리는 야스오카 쇼타로, 요시유키 준노스케, 엔도 슈사쿠, 고지마 노부오, 쇼노 준조, 아카가와 히로유키 등에 이어졌다. 제1차 전후파 작가, 제2차 전후파 작가 다음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은 "제3차 전후파 작가"라는 의미의 "제3의 신인"으로 불린다. 제3의 신인 이후, 1956년/쇼와 31년에 이시하라 신타로가 『태양의 계절』 (1955년/쇼와 30년)로 "전후 최초의 선언"으로서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아쿠타가와 상의 존재가 단숨에 유명해졌다. 그 후, 오에 겐자부로, 카이코 켄, 에토 준, 키타 모리오 등 유력한 신인이 등장한다.

3. 1. 2. 고도 경제 성장기의 문학

타니자키 준이치로는 『열쇠』(1956년), 『치매 노인 일기』(1962년)를, 무로 사이세이는 『살구』(1956년)를,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잠자는 미녀』(1961년), 『고도』(1962년)를, 이부세 마스지는 『검은 비』(1966년)를 발표하며 문단의 원로로서 존재감을 나타냈다. 노가미 야에코도 1985년 사망할 때까지 오랫동안 활동했다.

현대 문학의 중심에서 아베 코보는 『모래의 여자』(1962년), 『타인의 얼굴』(1964년), 『불타 버린 지도』(1967년)를, 오에 겐자부로는 『개인적인 체험』(1964년), 『만연 원년의 풋볼』(1967년) 등 대표작을 발표했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덴표의 지붕』(1957년), 『둔황』(1959년) 등으로 역사 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2년 후인 1970년에는 미시마 유키오자위대이치가야 주둔지에서 할복 자살했다.(미시마 사건) 그의 4부작 『풍요의 바다』 마지막 회 원고에는 이 날짜(1970년 11월 25일)가 적혀 있었다.

1967년, 산실된 근대 문학 관련 자료를 수집·보존하기 위해 문단·학계·매스컴 관계 유지들이 도쿄 메구로, 코마바 공원 내에 "일본 근대 문학관"을 재단 법인 운영으로 개관했다(초대 이사장: 타카미 쥰). 전후파 소설가들이 장편에 본령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시마오 토시오는 『죽음의 가시』(1960년), 우메자키 하루오는 『환화』(1965년), 엔도 슈사쿠는 『침묵』(1966년), 시이나 린조는 『징역인의 고발』(1969년), 타케다 타이준은 『후지산』(1971년), 오오카 쇼헤이는 『레이테 전선』(1971년), 후쿠나가 타케히코는 『죽음의 섬』(1971년), 나카무라 신이치로는 『라이 잔요와 그 시대』(1971년), 노마 히로시는 『청년의 고리』(1971년), 호리타 요시에는 『방장기 사기』(1971년), 카토 슈이치는 『일본 문학사 서설』(1975년)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노우에 야스시


1970년 전후에는 미시마 유키오가와바타 야스나리 외에, 히로츠 카즈로, 이토 세이, 시가 나오야, 타카하시 카즈미 등이 사망했다. 그들을 대신하여 "내향의 세대"라고 불리는 심리 묘사의 깊이를 추구하는 소설가들이 나타났다. 후루이 요시키치, 고토 아키오, 쿠로이 센지, 히노 케이조 등이 그 대표이다. 1970년에 미나마타병을 고발한 『고계정토』로 이시무레 미치코가, 1975년에는 원폭을 주제로 하는 『축제의 장』으로 하야시 쿄코가 등장하여 이후 조용히 심각한 문제를 작품화해갔다. 1972년, 근대 일본 문학의 문예 비평을 확립한 문예 평론가인 고바야시 히데오는 대작 『모토오리 노리나가』를 완성했다. 이듬해 에토 준이 츠지 쿠니오, 카가 오토히코, 오가와 쿠니오, 마루야 사이이치 등을 "포니"(가짜·통속이라는 의미)라고 부르며 논쟁을 벌였다("포니 논쟁").

대중 문학에서는, 전전부터 코모자와 칸과 카와구치 마츠타로, 야마모토 슈고로, 카이온지 쵸고로, 야마테 쥬이치로, 야마오카 소하치 등의 베테랑 작가가 활약하여, 각각 후에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발표했다. 요시카와 에이지오사라기 지로, 토미타 츠네오 등도 굳건한 인기를 유지했다. 1955년 - 1964년에 들어서면서 고미 야스스케나 시바타 렌자부로 등의 검호 소설이 유행했다. 더욱이 이노우에 야스시시바 료타로 등이 역사 소설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다수의 독자를 확보했다. 그 외 이케나미 쇼타로, 스기모토 소엔, 나가이 미치코, 친쑨신, 사사자와 사호, 난조 노리오 등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현대물에서는, 전전 전후부터 높은 인기를 얻었던 이시카와 타츠조나 니와 후미오, 이시자카 요지로우, 후나바시 세이이치 등이 여전히 베스트셀러를 연발했다. 특히 이시자카 요지로는 『양지 바른 언덕길』(1956년 - 1957년)나 『그 녀석과 나』(1961년)를 비롯하여, 그 작품은 매년 영화화되어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시카와 타츠조는 『48세의 저항』(1956년)나 『인간의 벽』(1959년) 등의 화제작을 발표하여 서명은 유행어가 되었다. 한편, 신진 작가도 대두되었다. 겐지 케이타는 『3등 중역』(1952년) 등으로 인기를 모았고, 그 후에도 시로야마 사부로의 『총회꾼 킨조』(1959년), 야마구치 히토미의 『에분리 만 씨의 우아한 생활』(1963년) 등 후의 경제 소설로 이어지는 샐러리맨 소설의 분야가 나타났다. 『안녕 모스크바 불량배』(1966년)나 『창백한 말을 보라』(1967년) 등으로 등장한 이츠키 히로유키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붐을 일으켰다. 소각지 암시장파를 자칭한 노사카 아키유키는 『반딧불의 묘』(1967년) 등 독자적인 전쟁 소설을 써서 호평을 받았고, 닛타 지로는 산악 소설로 다수의 독자를 얻었다. 연대기물이나 역사물로 주목을 받은 아리요시 사와코나, 이시카와 타츠조의 사회 소설의 계보를 잇는 야마자키 토요코 등도 인기를 얻어, 후에 베스트셀러를 연발하게 된다. 그 외, 추리 소설에서 순수 문학으로 지향하기 시작했던 미즈카미 츠토무의 작품이나, 카지야마 토시유키의 경제 소설, 카와카미 소운의 관능 소설, 또한, 『만가』(1956년)의 하라다 야스코나 『빙점』(1965년)의 미우라 아야코, 더 나아가 히라이와 유미에, 타치하라 마사아키, 타나베 세이코 등에 의한 현대물, 연애물 등도 인기를 얻었다.

탐정·추리 소설에서는, 니키 에츠코나 『점과 선』(1958년) 등의 마츠모토 세이초 등이 사회파 추리 소설의 분야를 개척했고, 미즈카미 츠토무나 쿠로이와 쥬고 등과 함께 활약하여 붐을 일으켰다. 모험 소설이나 전기 소설에서는 한무라 료나 츠즈키 미치오 등이 활약했다. SF 삼가라고 불리는 호시 신이치, 코마츠 사쿄, 츠츠이 야스타카 등이 등장한 것도 1955년 - 1964년이었다.

3. 1. 3. 쇼와 시대 후기의 문학

1970년대 중반부터 단카이 세대 작가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나카가미 겐지는 전후 출생으로 처음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출신지인 기슈에 집착한 기슈 3부작 『곶』(1975년), 『고목탄(枯木灘)』(1977년), 『지의 과테 지상의 때(地の果て 至上の時)』(1983년)에서 토착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차녀인 쓰시마 유코는 작품들로 높이 평가받아, 1979년에 『빛의 영토』로 제1회 노마 문예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수부』, 『묵시』 등의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나카가미, 쓰시마와 대조적으로, 도시적이고 경쾌한 문체와 게임 같은 이야기 구성으로 1980년대에 들어 인기를 모은 것이, 1979년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양을 둘러싼 모험』(1982년) 등 미국 문학의 영향을 받은 작풍으로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유력 신인으로 주목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주목받은 무라카미 류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1976년)에서 헤로인과 난교에 빠지는 젊은이를 그려 아쿠타가와상을 수상, 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외, 나카가미, 쓰시마와 무라카미 하루키 사이에 위치하는 작가로, 전후 오사카의 서민의 모습을 그린 『반딧불이 강』, 『진흙 강』(1977년)의 미야모토 테루가 언급되었고, 다테마쓰 와헤이, 아오노 사토시, 다카하시 미치쓰나 등이 등장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다나카 야스오는 『왠지 크리스탈』(1980년)을 써서 큰 화제를 모았지만, 문학적 평가는 칭찬과 비판이 다양했다.

하지만, 이들 신인들이 이 시대 문학 전체를 대표했던 것은 아니며, 기존 작가들이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이시카와 준은 『광풍기』(1971년 - 1980년)를, 후카자와 시치로는 『미치노쿠의 인형들』(1980년)을, 후지이에 시즈오는 『타가미 유라쿠』(1981년)를 써서 높이 평가받았다. 와다 요시에와 가와사키 조타로, 노구치 후지오 등이 부활하여 원숙함을 보여준 외에, 문단의 거장이 된 니와 후미오는 『친란』 전 5권(1965년 - 1969년)에 이어 『렌뇨』 전 8권(1971년 - 1981년)을 완결하여 자신의 불교 문학을 완성했다. 문단 최고령의 노가미 야에코는 마지막 대작 『숲』(1972년 - 1985년)에 착수, 99세로 사망할 때까지 집필을 이어 현역을 관철했다. 1984년에 문예계가 일제히 행한 노가미의 백수 축하는 하나의 문단적 사건이었다.

전후파 작가들도 여전히 건재했다. 호리타 요시에는 『고야』 전 4권(1974년 - 1982년)을, 오니시 교진은 『신성 희극』 전 5권(1960년 - 1980년)을, 나카무라 신이치로는 『사계』 4부작(1975년 - 1984년)을 각각 완결했다. 아베 코보는 『상자 남자』(1973년), 『밀회』(1977년)를, 단 가즈오는 『불택의 사람』(1975년)을, 야스오카 쇼타로는 『유리담』(1976년)을, 요시유키 준노스케는 『저녁까지』(1978년)을, 고지마 노부오는 『헤어지는 이유』(1973년 - 1981년)를, 후루이 요시키치는 『접시꽃』(1983년)을, 구로이 지쓰기는 『군서』(1984년)를 발표했다.

오에 겐자부로는 『홍수는 내 영혼에 미치고』(1973년), 『동시대 게임』(1979년) 후, 대표작 중 하나인 『새로운 사람아 눈을 떠라』(1983년)를 저술하여 현대 문학의 최첨단을 계속 달렸다. 가이코 다케시와 이노우에 미쓰하루, 마루야 사이이치, 쓰지 구니오, 다카이 유이치, 다쿠보 히데오, 미즈카미 쓰토무, 다치하라 마사아키, 이키 히로유키 등 중견 작가들도 각각 대표작이 될 작품을 발표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시바 료타로


쇼와 40년대(1965년 - 1974년) 이후 여성 작가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다채로운 문학 활동을 전개했다. 다카하시 다카코와, 『적혜요혜』(1982년) 등의 오바 미나코, 도미오카 다에코 등이 재능을 보여 주목을 받았다. 고노 다에코와 오하라 후지에, 모리 마리, 하기와라 요코 등 중견 작가들도 활약했고, 미야오 토미코와 다케니시 히로코, 하야시 교코, 가나이 미에코 등도 활발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전전 시대부터의 거장도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노가미 야에코는 대작 『숲』에 착수했다. 엔치 후미코는 『겐지 이야기』의 번역(1967년 - 1973년)을 완결시키고, 문제작 『식탁이 없는 집』(1978년)으로 나아갔다. 사토 이네코도 꾸준한 문학 활동을 이어가, 『수영』(1973년)와 『때에 서다』(1975년)를 발표했다. 시키기 요시코는 『청자 침』(1972년)과 『스미다강 황혼』(1982년 - 1983년)을, 나카자토 쓰네코는 『가요침』(1973년) 등을 써서 호평을 받았다.

이 시기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신인 작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미야오 토미코, 다케니시 히로코, 하야시 교코 외에, 『플랑드르의 겨울』(1967년)의 가가 오토히코, 『아카시아의 다롄』(1969년)의 기요오카 다쿠유키, 『잔해 속에서』(1970년)의 요시다 겐이치, 『포격의 뒤』(1971년)의 미키 다쿠, 『월산』(1973년)으로 당시 최고령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자가 된 모리 아쓰시, 『포옹』(1977년)의 히노 게이조, 『꿈이 다하지 않은 꿈』(1976년 - 1979년)의 리 후이성, 『수상한 방문 기록』(1977년)의 이로카와 다케다이, 그 외에 사에구사 가즈코, 나카노 고지, 고야마 다카오, 노로 구니노부, 사키 류조 등이 배출되었다.

연극계에서 활약하던 쓰카 코헤이가 『가마타 행진곡』(1981년)으로 나오키상을, 가라 주로가 『사가와 군으로부터의 편지』(1983년)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여 주목을 받았다. 대중 문학에서 활약하던 이노우에 히사시는 『요시리키리인』(1980년)을, SF 출신의 쓰쓰이 야스타카는 『허인들』(1981년)을 발표했다. 문학은 쇼와 40년대(1965년 - 1974년)부터 50년대(1975년 - 1984년)에 걸쳐 다양화·확산되어, 기존의 순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 시기에는, 시바 료타로의 역사 소설, 마쓰모토 세이초의 추리 소설, 호시 신이치의 SF 소설, 이키 히로유키의 대중 소설 등이 널리 읽혔다.

3. 1. 4. 여성 작가들의 활약

1983년 다카키 노부코가 『빛을 안는 친구여』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후, 연애 소설의 수작을 많이 발표했다. 야마다 에이미는 데뷔작 『베드타임 아이즈』(1985년) 등으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고, 『소울 뮤직 러버스 온리』(1987년)로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1987년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차녀 요시모토 바나나가 『키친』으로 데뷔하여 "바나나 현상"을 일으켰다. 그녀는 『거품/생츄어리』(1988년), 『TUGUMI』(1989년) 등으로 고독하고 현대적인 등장인물을 싱싱한 감성으로 그려냈다. 쓰시마 유코는 대표작 중 하나인 『밤의 빛에 쫓겨서』(1986년)를 발표했다.[1]

3. 1. 5. 시, 단가, 하이쿠의 변화

전후의 단가와 하이쿠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재건되었다. 단가는 전시 중의 반성과 평화 건설에 대한 의지를 담아, 일본적 민주주의 단가 형성을 목표로 했다. 이때 단가 형식의 정형과 자유율의 공존을 인정했는데, 이는 1930년대의 단가 운동을 거친 반성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이쿠는 전쟁 중 자연을 소재로 풍영하는 것으로 저항하는 미약한 문예성 옹호의 흐름을 보였으나, 대세는 전시 협력의 안이한 작풍이었다. 전후 이에 대한 반성과 탄압으로 중단되었던 하이쿠 운동을 재발족시키는 것에서 출발했다.

니시와키 준자부로


미요시 타츠지


전후 활약한 시인과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다카무라 코타로, 『전형』(1950년)
  • 카네코 미츠하루, 『낙하산』(1948년)
  • 니시와키 준자부로, 『나그네는 돌아가지 않는다』(1947년)
  • 샤쿠 쵸쿠(오리구치 시노부), 『고대 감애집』(1947년)
  • 미요시 타츠지, 『낙타의 혹에 올라타』(1952년)
  • 타카미 준, 『죽음의 나락에서』(1964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시가 활발해졌는데, 각 시인에 따라 작풍이 크게 달라 공통점이 적은 "분산성"이 현대시의 특징 중 하나였다. 굳이 공통 요소를 꼽자면 사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시지 「황무지」, 「노」를 중심으로 여러 시인들이 활약했다. 이시가키 린, 이바라기 노리코 등 여성 시인도 활약했다.

단가에서는 샤쿠 쵸쿠, 츠치야 분메이, 키마타 오사무, 미야 슈지 등이, 하이쿠에서는 미즈하라 슈오시, 야마구치 세이시, 나카무라 쿠사오, 카토 슈손, 사이토 산키, 카네코 토타, 이다 잣코・류타 등이 활약했다. 1987년에 발표된 타와라 마치의 『샐러드 기념일』은 가집으로서는 이례적인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다.

4. 헤이세이 시대 (1989-2019) 문학

헤이세이 시대(1989년/쇼와 64년 = 헤이세이 원년 - 2019년/헤이세이 31년 = 레이와 원년)의 문학은 이전 시대의 문학적 흐름을 이어받으면서도, 사회 변화와 함께 새로운 특징을 보였다. 전후파 소설가들이 세상을 떠나고 제3의 신인도 창작의 최성기를 지나면서, 특정 문예 사조로 규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작가들이 등장했다. "순수 문학의 위기"가 거론되는 가운데, 문학은 문화의 중심적 지위를 잃어가고 상업성과 예술성의 조화가 어려워지는 경향을 보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순수 문학의 상품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신예 소설가들이 대중문화와의 접점을 강조했다. 잡지 『문예』는 아베 카즈시게, 마치다 코, 호시노 토모유키, 요시다 슈이치 등 1990년대에 등장한 작가들을 J-POP 음악에 빗대어 J 문학이라고 명명했지만[1], 큰 반향을 얻지 못하고 그 명칭은 정착되지 않았다.

2000년대에는 문학상의 저연령화가 화제가 되었고, 2004년(헤이세이 16년)에 최연소로 제130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와타야 리사나 가네하라 히토미 등 10대 작가들이 등장했다.

2008년 히라노 게이치로인터넷 시대의 인간 관계를 다룬 소설 결괴를 발표했다. 2009년 가와카미 미에코는 젖과 알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고, 학교폭력 문제를 그린 헤븐을 발표했다.

출판 불황 속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 오가와 요코, 가와카미 히로미 등의 작품은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순수 문학의 침체는 계속되었다. 헤이세이 시대는 사회와 서점 모두에서 내셔널리즘이 높아진 시기였으며, 『영원의 0』의 햐쿠타 나오키SNS를 활용하여 인지도를 높이고 정치인으로 전향했다.[3]

4. 1. 헤이세이 시대 전기의 문학 (1989-1990년대 후반)

헤이세이 시대(1989년/쇼와 64년 = 헤이세이 원년 - 2019년/헤이세이 31년 = 레이와 원년)에 들어서면서 전후파 소설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제3의 신인도 창작의 최성기를 지나 문학계는 각 세대가 뒤섞여 특정 문예 사조로 통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순수 문학의 위기"가 외쳐지는 가운데, 상업주의와 작가의 예술성의 양립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문학은 문화의 중추적인 지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케자와 나츠키는 시인으로 출발하여 『스틸 라이프』(1987년/쇼와 62년)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고, 신화적 기법을 사용한 『마시아스 기리의 실각』(1993년/헤이세이 5년)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쇼노 요리코는 1981년/쇼와 56년에 『극락』으로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여 『타임 슬립 콤비나토』(1994년/헤이세이 6년)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고, 이후 페미니즘을 축으로 포스트모던 문학을 개척해 나갔다. 독일에 거주하는 다와다 요코는 『개 신랑 맞이』(1992년/헤이세이 4년)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으며, 독일어로도 작품을 발표하며 일본어와의 사이에 새로운 관계성을 발견하면서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이 시기에 주목을 받은 작가로는 『엄지 P의 수행 시대』(1993년/헤이세이 5년)의 마츠우라리에코, 긴 침묵을 거쳐 『소금 항아리의 숟가락』(1992년/헤이세이 4년)이나 『아카메 사십팔 폭포 심중 미수』(1998년/헤이세이 10년) 등의 사소설로 높은 평가를 받은 쿠루마야 초키치, 사소설 작가인 사에키 이치마쿠, 『반짝반짝 빛나다』(1991년/헤이세이 3년) 등으로 젊은 여성에게서 인기를 모은 에쿠니 가오리, 『해협의 빛』(1997년/헤이세이 9년)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고 록 밴드 ECHOES의 보컬이라는 경력도 화제를 모은 츠지 히토나리, 극작가로 주목받은 후 가족의 해체와 재생을 테마로 『풀 하우스』(1996년/헤이세이 8년) 『가족 시네마』(1997년/헤이세이 9년) 등의 소설을 쓴 유 미리, 미국 출신으로 『성조기가 들리지 않는 방』(1992년/헤이세이 4년)을 쓴 리비 히데오, 무라타 키요코, 츠지하라 토오루, 오가와 요코, 호사카 카즈시, 오쿠이즈미 미츠 등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미야베 미유키는 대중 문학 출신 작가로, 『화차』(1992년/헤이세이 4년)를 계기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미스터리에서 시대물, 판타지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아사다 지로도 등장하여, 『철도원』(1997년/헤이세이 9년)은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쥬인 시즈카는 작사가로 지위를 굳힌 후 작가로도 데뷔하여 『달맞이』(1992년/헤이세이 4년)나 『기관차 선생님』(1994년/헤이세이 6년) 등의 대표작을 발표했다.

무라카미 류


이 시기, 이노우에 야스시의 『공자』(1989년/쇼와 64년 = 헤이세이 원년), 츠츠이 야스타카의 『문학부 유이노 교수』(1990년/헤이세이 2년), 코노 타에코의 『미이라 채집 기괴담』(1990년/헤이세이 2년), 카이코 켄의 『주옥』(1990년/헤이세이 2년), 마루야 사이이치의 『여자 전성기』(1992년/헤이세이 4년),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1993년/헤이세이 5년) 등이 화제가 되었다. 야마자키 도요코의 『대지의 아이』(1987년/쇼와 62년 - 1991년/헤이세이 3년)이나 미야오 토미코의 『장』(1993년/헤이세이 5년) 등은 폭넓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츠지이 쿄는 실업가로서의 일선에서 물러난 후 집필 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무지개 곶』(1994년/헤이세이 6년) 등을 발표했다. 나카가미 겐지는 『경멸』(1992년/헤이세이 4년)을 발표했으나 같은 해 사망했다. 그 전후에 오오카 쇼헤이, 이노우에 야스시, 아베 코보, 이부세 마스지, 엔도 슈사쿠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사망했다.

1994년/헤이세이 6년, 오에 겐자부로가 일본인으로서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불타는 녹색 나무』(1995년/헤이세이 7년)를 "마지막 소설"로 삼았지만, 『공중제비』(1999년/헤이세이 11년)로 소설 창작을 재개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 대작 『태엽 감는 새 연대기』(1992년/헤이세이 4년 - 1995년/헤이세이 7년)을 발표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무라카미 류는 『5분 후의 세계』(1994년/헤이세이 6년), 『인 더 미소 수프』(1997년/헤이세이 9년) 등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시마다 마사히코는 『피안 선생님』(1992년/헤이세이 4년), 『잊혀진 제국』(1995년/헤이세이 7년)으로, 야마다 에이미는 『트래시』(1991년/헤이세이 3년), 『애니멀 로직』(1996년/헤이세이 8년)으로 각각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4. 2. 헤이세이 시대 중기의 문학 (1990년대 후반-2000년대)

1990년대 후반부터 순수 문학의 상품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신예 소설가들이 대중문화와의 접점을 강조하며 판매되었다. J-POP 음악에 맞춰 잡지 『문예』가 아베 카즈시게, 마치다 코, 호시노 토모유키, 요시다 슈이치 등 1990년대에 등장한 작가들을 J 문학이라고 명명했지만[1], 큰 반향을 얻지 못하고 그 명칭은 정착되지 않았다.

1998년(헤이세이 10년), 쓰시마 유코는 자신의 문학적 주제를 집대성한 『불의 산 - 산 원숭이 기』를 완성했다. 1999년(헤이세이 11년) 『일식』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히라노 게이치로는 현대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한자어를 많이 사용한 문체를 사용했으며, 교토 대학의 현역 학생이었던 점 때문에 언론에 많이 등장했다. 『뱀을 밟다』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가와카미 히로미는 2001년(헤이세이 13년) 『선생님의 가방』을 발표하여 널리 받아들여졌다. 같은 해,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일본 문학 성쇠사』, 2002년(헤이세이 14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2003년(헤이세이 15년) 아베 카즈시게의 『신세미아』, 2005년(헤이세이 17년) 무라카미 류의 『반도를 떠나다』, 마치다 코의 『고백』과 같은 대작이 발표되었다. 시마다 마사히코는 『무한 카논』 3부작을 발표했다.

시마다 마사히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학상의 저연령화가 화제를 모았고, 2004년(헤이세이 16년)에 최연소로 제130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와타야 리사나 가네하라 히토미 등 10대에 데뷔한 젊은 작가의 활약이 보였다. 이 시기에는 쓰지하라 토오루가 19세기 유럽 소설의 전통을 계승한 작품을, 호리에 토시유키는 수필과 소설의 경계를 무효화하는 듯한 작품을 발표했다.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오에 겐자부로는 '이상한 콤비' 3부작으로 총칭되는 『바꿔치기』(2000년(헤이세이 12년)), 『근심 어린 얼굴의 아이』(2002년(헤이세이 14년)), 『안녕, 나의 책이여!』(2005년(헤이세이 17년))를 발표했다.

다와다 요코


2004년에 서점 대상이 시작되어 새로운 히트작을 잇따라 만들어냈다.

이 시기에는 해외에서 일본 문학의 번역이 활발해지면서 일부 작가는 동시대 해외 문학에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번역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많은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무라카미는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다와다 요코는 일본어와 독일어 양쪽으로 창작을 계속했으며, 그 작품은 국경을 넘어 높이 평가받았다. 오가와 요코도 『박사가 사랑한 수식』(2003년(헤이세이 15년)) 등의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일본 국내에서는 리 비영이나 양일과 같이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일본어로 창작하는 소설가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해외 문학의 번역본은 팔리지 않게 되어 침체기에 들어섰다[2]

2007년(헤이세이 19년)에는 가와카미 미에코, 엔조 토, 이자키 켄이치로, 스와 테츠시 등이 잇따라 데뷔했다.

4. 3. 헤이세이 시대 후기의 문학 (2000년대-2019)

2008년 히라노 게이치로인터넷 시대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위태로움을 다룬 소설 결괴를 발표했다. 같은 해 가와카미 미에코는 젖과 알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에는 학교폭력 문제를 그린 헤븐을 발표했다.

2009년부터 무라카미 하루키1Q84를 발표하여 그 해 문예서적 최다 판매를 기록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년 노벨 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오에 겐자부로는 오에 겐자부로 상을 창설하여 나가시마 아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호시노 토모유키 등 신예 소설가들을 해외에 소개하는 데 힘썼다.
나카무라 후미노리
요시다 슈이치, 나가시마 아리, 이토야마 아키코 등의 작품이 영화화되었으며, 특히 요시다의 악인은 인기를 얻었다. 출판 불황 속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 오가와 요코, 가와카미 히로미 등의 작품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순수 문학의 상업적 침체는 계속되었다. 무라카미 류, 마치다 코, 니시무라 겐타 등은 순수 문학 외에 다른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헤이세이 시대는 사회와 서점 모두에서 내셔널리즘이 높아진 시기였다. 『영원의 0』의 햐쿠타 나오키SNS를 활용하여 인지도를 높였으며, 후에 정치인으로 전향했다.[3]

5. 현대 일본 문학의 특징

하기와라 신이치로


타니카와 슌타로


쇼와 말기부터 현대시 독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타니카와 슌타로, 오오카 마코토, 타카하시 무츠로, 이리사와 야스오, 츠지이 타카시, 츠지 유키오, 요시마스 고조, 아라카와 요지, 이토 히로미 등이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단가는 다와라 마치, 마스노 코이치, 호무라 히로시 등 젊은 세대의 구어 단가가 대중 매체에서 주목받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문어 와카가 주류를 이루어 단가 전체의 큰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헤이세이 시대 후기에 하기와라 신이치로의 단가가 영화화되는 등 단가 붐이 일어났다.[4] 하이쿠는 새로운 인재가 나타나지 않아 쇠퇴하는 듯했으나, 1998년부터 하이쿠 갑자원이 개최되면서 진노 사키 등 젊은 하이쿠 시인들이 등장했다. 고등학생들의 하이쿠 참여가 늘면서 하이쿠계도 젊어지는 추세를 보였다. 나츠이 이츠키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TV 프로그램 프레바토!!의 하이쿠 코너가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세대에서 하이쿠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연극 분야에서는 이노우에 히사시, 베츠야쿠 미노루, 카라 주로, 츠카 코헤이, 노다 히데키, 코가미 쇼지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쿠도 칸쿠로와 같이 헤이세이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작가들도 주목받으며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다.

5. 1. 대중 문학의 발전

쇼와 시대 말기부터 현대시 독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타니카와 슌타로 등 여러 시인들이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단가는 다와라 마치 등 젊은 감각의 구어 단가가 대중 매체에서 주목받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문어 와카가 주류를 이루어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헤이세이 시대 후기에 하기와라 신이치로의 단가가 영화화되는 등 단가 붐이 일어났다.[4] 하이쿠는 새로운 인재가 나타나지 않아 쇠퇴하는 듯했으나, 1998년부터 하이쿠 갑자원이 개최되면서 진노 사키 등 젊은 하이쿠 시인들이 등장했다. 고등학생들의 하이쿠 참여가 늘면서 하이쿠계도 젊어지는 추세를 보였다. 나츠이 이츠키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TV 프로그램 프레바토!!의 하이쿠 코너가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세대에서 하이쿠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연극 분야에서는 이노우에 히사시, 베츠야쿠 미노루, 카라 주로 등 여러 극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쿠도 칸쿠로와 같이 헤이세이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작가들도 주목받으며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다.

예술성을 중시하는 순문학과는 별개로, 오락을 위한 대중 소설(대중 문학)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강담, 요미혼의 전통을 잇는 시대 소설, 전기 소설과 서구에서 도입된 탐정 소설, 과학 소설, 관능 소설 등이 대중 소설에 포함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순문학과 대중 소설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했다. 그러나 전후에는 중간 소설이라 불리는, 순문학 형식을 갖추면서 대중 소설의 오락성을 도입한 소설이 등장했다. 현재는 대중 소설가를 자처하는 소설가는 드물고, 대중 소설은 "엔터테인먼트" 등으로 불리며, 미스터리, 모험 소설(액션 소설이라고도 함), 로맨스 소설, 판타지 소설, 호러 소설, 논픽션 소설, 역사 소설, 경제 소설 등 다양한 장르로 세분화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장르 소설"이라는 용어가 엔터테인먼트 소설을 대신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대중 소설이 순문학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두 분야 모두에서 작품을 발표하는 소설가도 있다. 대중 소설에서 순문학으로 전향하는 작가도 있다. 현재 순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순문학"은 상업성보다는 예술성과 형식에 중점을 둔 소설로서 여전히 존재한다. 현재로서는 작품이 게재되는 잡지에 따라 순문학과 대중 문학을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학 연구 외에 "사회 언어"를 다루는 광고 연구에서는 도쿠토미 소호,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여러 작가의 작품에서 현재와는 다른 의미의 "광고"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것을 지적하며, 순문학과 대중 소설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와 작품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음을 보여준다.

5. 2. 미디어 믹스와 하이퍼텍스트

1980년대 전후부터 일본 만화풍의 표현 기법을 대폭 도입한 엔터테인먼트 소설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주브나일", "영 어덜트", "주니어 노벨" 등으로 불린 이러한 소설 장르는 1990년대 후반에는 라이트 노벨(일본식 영어, 통칭 라노베)이라고 불리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라이트 노벨 전문 레이블에서 간행되며, 만화풍의 일러스트가 표지이고, 삽화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80년대 이후의 소녀 소설도 유사한 특징을 가지며, 1990년대 이후에는 "소녀향 라이트 노벨"로서 이 장르에 편입되었다.

1990년대에는 미즈노 료, 칸자카 하지메, 카토노 코헤이 등이 등장하여 소설을 원작으로 애니메이션화·게임화 등 다른 미디어로 전개하는 미디어 믹스의 일익을 담당했다.

평론가 아즈마 히로키는 "90년대를 대표하는 이야기는 '파이널 판타지'이며 '에반게리온'이며 쿄고쿠 나츠히코이며...라는 것이네요. 결코 순문학은 아니다"[9]라고 평했다. 우노 츠네토모는 "지금 일본에서는 순문학이나 아트 쪽이 그 방식이 몇 가지 패턴으로 고정되어 버려서 상업주의적인 필드 쪽에 이질적인 것, 다양한 것이 넘쳐흐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10]

200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이나 휴대 전화의 보급으로 텍스트의 형태가 급격하게 변화하여 하이퍼텍스트를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게 되면서 문학은 새로운 전개를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종래의 책을 둘러싼 시장은 축소되고 문학의 모습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참조

[1] 뉴스 阿部和重、町田康、赤坂真理……“J文学”とは何だったのか? 90年代後半「Jの字」に託された期待 https://realsound.jp[...] 株式会社blueprint 2020-06-14
[2] 웹사이트 あなたも、ちょっと「内向い」てる? 〜日本は、やや「パラダイス鎖国」化しているのか〜 https://www.takigen.[...] タキゲン 2017-07-22
[3] 웹사이트 『ルポ百田尚樹現象』私たちが知りたかった「社会の見取り図」がここにある! - HONZ https://honz.jp/arti[...]
[4] 뉴스 【モンテーニュとの対話 「随想録」を読みながら】(128)短歌ブームのZ世代に癒やされる https://www.sankei.c[...] 2022-05-28
[5] 논문 [研究ノート] 近現代文芸の中の広告(1) : 明治期以降の文学作品中の言説渉猟 https://cir.nii.ac.j[...] 2014-10-31
[6] 논문 [研究ノート] 近現代文芸の中の広告(2) : 明治期以降の文学作品中の言説渉猟 https://cir.nii.ac.j[...] 2015-10-31
[7] 논문 [研究ノート] 近現代文芸の中の広告(3) : 明治期以降の文学作品中の言説渉猟 https://cir.nii.ac.j[...] 2016-11-15
[8] 웹사이트 「異世界モノ」ライトノベルが、現代の「時代劇」と言えるワケ(大橋 崇行) | 現代ビジネス | 講談社(7/7) https://gendai.media[...]
[9] 웹사이트 新たな時代に向かって http://www.t3.rim.or[...]
[10] 웹사이트 意外と身近にある みんなのメディア芸術 Vol.4『魔法少女まどか☆マギカ』新房昭之(監督)×宇野常寛(批評家)対談 https://www.cinra.ne[...] 202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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