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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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언찰은 일본 제국이 류큐(현재 오키나와현)를 점령한 후 류큐 민족의 언어인 류큐어를 말살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이다. 학교에서 류큐어를 사용하면 벌칙으로 나무판에 끈을 묶은 방언찰을 목에 걸게 했으며, 다른 학생이 류큐어를 사용하는 것을 찾아야 방언찰을 벗을 수 있었다. 이 제도는 1960년대까지 묵인 속에 지속되었으며, 프랑스와 영국의 유사한 사례와 비교된다. 방언찰은 오키나와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 지역과 일본의 위임통치 지역에서도 시행되었으며, 이에 대한 저항과 반발, 그리고 문화적 영향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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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찰 | |
---|---|
개요 | |
유형 | 징벌적 표식 |
목적 | 비표준 방언 사용자를 처벌하고 표준어 사용을 장려 |
사용 국가 | 일본, 대한민국 |
관련 용어 | 언어적 차별, 언어적 억압 |
일본의 방언찰 | |
명칭 | 방언찰 (方言札, 호겐후다) |
사용 시기 |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 초기 |
목적 | 학생들의 표준어 사용 장려 및 방언 근절 |
형태 | 나무 또는 종이로 만든 패 방언 사용자에게 부과 후 다음 사용자에게 전달 |
내용 | 방언 사용 죄목 기록 조롱 문구 포함 |
사회적 영향 | 방언 사용 억압 및 언어적 차별 심화 지역 방언의 소멸 가속화 |
한국의 방언찰 | |
명칭 | 방언찰 (方언찰) |
사용 시기 | 일제강점기 |
목적 | 한국어 방언 사용자 억압 및 일본어 사용 강요 |
형태 | 불명확 (일본의 방언찰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 |
내용 | 불명확 (일본어 사용 강요 문구 포함 추정) |
사회적 영향 | 한국어 방언 사용 억압 및 언어적 차별 심화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 |
비판 및 논쟁 | |
문제점 | 언어적 권리 침해 및 차별 행위 지역 문화 및 정체성 훼손 언어 다양성 감소 및 소멸 위협 |
현대적 관점 | 언어적 다양성 존중 및 보존 필요 언어적 차별 및 억압에 대한 비판적 인식 지역 방언의 가치 재조명 및 활용 방안 모색 |
2. 역사적 배경
일본 제국은 류큐국을 여러 차례 침략하여 굴복시켰다. 메이지 유신 때, 일본은 주변국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류큐국을 공격하였고, 이후 류큐국은 일본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일본은 류큐국을 오키나와로 개명하고 현으로 삼았으며, 류큐 민족의 민족성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그 중 '''방언찰'''은 류큐 지역의 언어를 말소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3]
일본에 점령된 류큐 지역의 학교에서는 학생이 류큐어를 사용하면 벌칙으로 방언찰을 목에 걸어야 했다. 방언찰은 나무판에 끈을 묶은 형태로, 다른 학생이 일본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찾아내야 벗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방언찰은 1960년대까지 묵인 속에 남아 있었다.[3]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자신의 고향 영지 밖으로 여행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지역별 일본어 방언은 비교적 고립되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유럽의 국민 국가를 모방하여 표준 일본어를 만들고자 했다. 야마노테 지역의 도쿄 방언이 표준어의 모델이 되었으며, 학교, 출판, 라디오 방송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20세기 초, 문부과학성 등은 지역적 차이를 줄이거나 억제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3]
2. 1. 일본의 방언 통제 정책
일본 제국은 류큐국을 여러 차례 침략하여 굴복시켰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류큐국을 오키나와로 개명하고 일본의 현으로 편입시켰다. 류큐 민족의 민족성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로 '''방언찰'''이 시행되었다.[3]일본에 점령된 류류큐 지역의 학교에서는 학생이 류큐어를 사용하면 벌칙으로 방언찰을 목에 걸어야 했다. 방언찰을 벗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일본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찾아내야 했다. 이러한 방언찰은 1960년대까지 묵인 속에 남아 있었다.[3]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 치하에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자신의 고향 영지 밖으로 여행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지역별 일본어 방언은 비교적 고립되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는 유럽의 국민 국가를 모방하여 표준 일본어를 만들고자 했다. 야마노테 지역의 도쿄 방언이 표준어의 모델이 되었으며, 학교, 출판, 라디오 방송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20세기 초, 문부과학성과 다른 당국은 지역적 차이를 줄이거나 억제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3]
프랑스의 방언찰 제도는 일본에도 도입되었으며, 특히 일본 본토와의 언어 차이가 큰 오키나와현의 교육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시행되었다. NHK "일본의 언어" 오키나와현 특집(2001년 4월 1일 방송)에 따르면, 방언찰은 어묵판 정도 크기의 나무 팻말에 끈을 꿰어 만든 것으로, 학교에서 방언을 사용하면 팻말을 목에 걸어야 했으며, 이를 풀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방언을 사용하는 것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방언찰 제도에 반발하는 학생들에 의해 오히려 교내에서 방언 사용이 활발해진 사례도 있었다. 1917년(다이쇼 6년) "방언 단속령"을 내린 오키나와현립 제1중학교장 야마구치 사와노스케를 비꼬는 노래가 교문에 붙여지기도 했다.[9] 타케토미섬의 키호인 수집관에는 타케토미 초등학교에서 사용되던 방언찰이 전시되어 있다.[10]
오키나와현 외에도 도호쿠 지방[9]과 가고시마현[11]에서도 비슷한 표준어 교육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위임통치하던 팔라우의 학교에서도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교내에서 팔라우어를 사용한 학생에게 "나는 팔라우어를 사용했습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목에 걸게 한 일본인 교사도 있었다고 한다.[12]
2. 2. 류큐어 탄압과 방언찰
일본 제국은 류큐국을 침략하여 오키나와로 개명하고 현으로 삼았다. 류큐 민족의 민족성과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 중 하나가 '''방언찰'''이었다. 방언찰은 류큐 지역의 언어를 말소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일본에 점령된 류큐 지역의 학교에서는 학생이 류큐어를 사용하면 벌칙으로 방언찰을 목에 걸어야 했다. 방언찰을 벗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일본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찾아내야 했다. 이러한 방언찰은 196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방언찰의 사용은 도호쿠, 규슈 및 류큐 열도(오키나와 포함)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카리유시 클럽과 같이 류큐어를 일본 정부가 언어로 공식 인정하도록 옹호하는 단체들이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20세기 초에 오키나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이 카드를 사용했지만, 1917년 이후 동화 정책이 강화되면서 의무화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오크어, 프로방스어, 브르타뉴어 등의 지방 언어를 프랑스 표준어에 대한 방언으로 취급하여, 방언을 사용하는 학생에게 방언찰을 걸게 하였다.[7] 영국의 웨일스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로 Welsh Not가 있었다.[8]
프랑스의 방언찰 제도는 일본에도 도입되었으며, 특히 오키나와현의 교육 현장에서 열성적으로 시행되었다. NHK "일본의 언어" 오키나와현 특집에서도 소개되었다. 방언찰은 어묵판 정도 크기의 나무 팻말에 끈을 꿰어 만든 것으로, 학교에서 방언을 사용하면 팻말을 목에 걸어야 했으며, 이를 풀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방언을 사용하는 것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방언찰 제도에 반발하는 학생들에 의해 오히려 교내에서 방언 사용이 활발해진 사례도 있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방언 단속령"을 내린 오키나와현립 제1중학교장 야마구치 사와노스케를 비꼬는 노래가 교문에 붙여진 일화가 있다.[9] 타케토미섬의 키호인 수집관에서는 타케토미 초등학교에서 사용되던 방언찰이 전시되어 있다.[10]
오키나와현 외에도 도호쿠 지방[9]과 가고시마현[11]에서도 비슷한 표준어 교육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위임통치하던 팔라우의 학교에서도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교내에서 팔라우어를 사용한 학생에게 팻말을 목에 걸게 한 일본인 교사도 있었다고 한다.[12]
3. 방언찰의 시행
일본 제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류큐국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오키나와로 개명, 현으로 편입시켰다. 류큐 민족의 민족성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로 '''방언찰'''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류큐 지역의 언어 말살을 목표로 했다.[7]
일본 점령하 류큐 지역 학교에서는 학생이 류큐어를 사용하면 벌칙으로 방언찰을 목에 걸게 했다. 방언찰을 벗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일본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찾아내야 했다. 이러한 방언찰은 1960년대까지 묵인 속에 시행되었다. 방언찰은 도호쿠, 규슈, 류큐 열도(오키나와 포함) 등 도쿄 방언과 지리적, 언어적으로 먼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3. 1. 오키나와에서의 방언찰
일본 제국은 류큐국을 침략하여 오키나와로 개명하고 현으로 삼았다. 류큐 민족의 민족성과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 중 하나가 '''방언찰'''이었다.일본에 점령된 류큐 지역의 학교에서는 학생이 류큐어를 사용하면 벌칙으로 방언찰을 목에 걸어야 했다. 방언찰을 벗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일본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찾아내야 했다. 이러한 방언찰은 1960년대까지 묵인 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7] 카리유시 클럽과 같이 류큐어를 일본 정부가 언어로 공식 인정하도록 옹호하는 단체들이 있을 정도로, 류큐어와 관련하여 방언찰 문제는 두드러진다. 20세기 초 오키나와에서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방언찰을 사용했지만, 1917년 이후 동화 정책이 강화되면서 의무화되었다.
프랑스의 방언찰 제도는 일본에도 도입되었으며,[7] 특히 일본 본토와의 언어 차이가 큰 오키나와현의 교육 현장에서 열성적으로 시행되었다. NHK "일본의 언어" 오키나와현 특집(2001년 4월 1일 방송)에서도 방언찰 실태가 소개되었다. 방언찰은 어묵판 정도 크기의 나무 팻말에 끈을 꿰어 만든 것으로, 학교에서 방언을 사용하면 팻말을 목에 걸어야 했으며, 이를 풀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방언을 사용하는 것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방언찰 제도에 반발하는 학생들에 의해 오히려 교내에서 방언 사용이 활발해진 사례도 있었다. 1917년(다이쇼 6년) "방언 단속령"을 내린 오키나와현립 제1중학교장 야마구치 사와노스케를 비꼬는 노래가 교문에 붙여지기도 했다.[9] 타케토미섬의 키호인 수집관에는 타케토미 초등학교에서 사용되던 방언찰이 전시되어 있다.[10]
3. 2. 다른 지역에서의 시행
도호쿠, 규슈 및 류큐 열도(오키나와 포함)에서 ''방언찰'' 사용이 가장 두드러졌는데, 이는 이들 지역이 지리적, 언어적으로 도쿄 방언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류큐어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지는데, 카리유시 클럽과 같이 류큐어를 일본 정부가 언어(그리고 류큐를 국가)로 공식 인정하도록 옹호하는 단체들이 있을 정도이다. 오키나와에서는 20세기 초에 오키나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이 카드를 사용했지만, 1917년 이후 동화 정책이 강화되면서 의무화되었다.[7]프랑스에서는 오크어, 프로방스어, 브르타뉴어 등의 지방 언어를 프랑스 표준어에 대한 방언으로 취급하여, 방언을 사용하는 학생에게 방언찰을 걸게 하여 본보기로 삼는 일이 행해졌다.[7] 또한 영국의 웨일스에서도 이와 비슷한 예로 Welsh Not가 있었다.[8]
프랑스의 방언찰 제도는 일본에도 도입되었으며, 특히 일본 본토와의 언어 차이가 큰 오키나와현의 교육 현장에서 열성적으로 시행되었다. 오키나와현에서의 방언찰 실태는 2001년 4월 1일 방송된 NHK "일본의 언어" 오키나와현 특집에서도 소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방언찰은 어묵판 정도 크기의 나무 팻말에 끈을 꿰어 만든 것으로, 학교에서 방언을 사용하면 팻말을 목에 걸어야 했으며, 이를 풀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방언을 사용하는 것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방언찰 제도에 반발하는 학생들에 의해 오히려 교내에서 방언 사용이 활발해진 사례도 있었으며, 1917년 (다이쇼 6년)에 "방언 단속령"을 내린 오키나와현립 제1중학교장 야마구치 사와노스케를 비꼬아 "야마토 말 팻말을 떼낼 때마다 생각하네 방언 팻말은 그만둬 사와노스케"라는 반발 노래가 교문에 붙여진 일화가 있다.[9] 타케토미섬의 키호인 수집관에서는 타케토미 초등학교에서 사용되던 방언찰이 전시되어 있다.[10]
오키나와현 외에도 도호쿠 지방[9]과 가고시마현[11]에서도 비슷한 표준어 교육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위임통치하던 팔라우의 학교에서도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교내에서 팔라우어를 사용한 학생에게 "나는 팔라우어를 사용했습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목에 걸게 한 일본인 교사도 있었다고 한다.[12]
3. 3. 일본의 위임통치 지역
일본 제국은 류큐국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메이지 유신 이후 류큐국을 오키나와로 개명하고 현으로 삼았다. 류큐 민족의 민족성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로 '''방언찰'''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류큐 지역의 언어를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7]일본에 점령된 류큐 지역의 학교에서는 학생이 류큐어를 사용하면 벌칙으로 방언찰을 목에 걸어야 했다. 이 방언찰을 벗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일본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찾아내야 했다. 이러한 방언찰은 묵인 속에 1960년대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는 "방언 단속령"을 내린 오키나와현립 제1중학교장 야마구치 사와노스케를 비꼬는 노래가 교문에 붙여지기도 했다.[9] 타케토미섬의 키호인 수집관에는 타케토미 초등학교에서 사용되던 방언찰이 전시되어 있다.[10]
도호쿠 지방[9]과 가고시마현[11]에서도 비슷한 표준어 교육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위임통치하던 팔라우의 학교에서도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었으며, 팔라우어를 사용한 학생에게 벌칙을 준 일본인 교사도 있었다고 한다.[12]
4. 방언찰에 대한 저항과 반발
일본 제국은 류큐 지역을 점령한 후, 학교에서 학생들이 류큐어를 사용하면 벌칙으로 방언찰을 목에 걸게 했다. 이 방언찰을 벗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일본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찾아내야 했으며, 이러한 방언찰은 1960년대까지 묵인 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1]
4. 1. 오키나와에서의 저항
프랑스의 방언찰 제도는 일본에도 도입되었으며, 특히 일본 본토와의 언어 차이가 큰 오키나와현의 교육 현장에서 열성적으로 시행되었다. 오키나와현에서의 방언찰 실태는 2001년 4월 1일 NHK "일본의 언어" 오키나와현 특집에서 소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방언찰은 어묵판 정도 크기의 나무 팻말에 끈을 꿰어 만든 것으로, 학교에서 방언을 사용하면 팻말을 목에 걸어야 했으며, 이를 풀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방언을 사용하는 것을 찾아야 했다.[9] 그러나 방언찰 제도에 반발하는 학생들에 의해 오히려 교내에서 방언 사용이 활발해진 사례도 있었다.[9] 1917년(다이쇼 6년) 오키나와현립 제1중학교장 야마구치 사와노스케는 "방언 단속령"을 내렸는데, "야마토 말 팻말을 떼낼 때마다 생각하네 방언 팻말은 그만둬 사와노스케"라는 반발 노래가 교문에 붙여진 일화가 있다.[9] 타케토미섬의 키호인 수집관에서는 타케토미 초등학교에서 사용되던 방언찰이 전시되어 있다.[10]4. 2. 류큐어/오키나와어 인정 운동
메이지 유신 때, 일본 제국은 주변국들의 반응을 지켜보기 위하여 류큐국을 공격하였고, 류큐국은 이후 일본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이후, 일본은 류큐국을 오키나와로 개명하고 현으로 삼았다. 또한 류큐 민족의 민족성과 문화를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하여 말살시켰다. 그 중 '''방언찰'''은 류큐 지역의 언어를 말소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1]일본에 점령된 류큐 지역의 학교에서는 학생이 류큐어를 사용하면 벌칙으로 목에 끈이 달린 나무판인 방언찰을 걸어야 하였으며, 이 방언찰을 벗기 위해서는 다른 학생이 일본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찾아내야 했다.[1] 이러한 방언찰은 묵인 속에 1960년대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1]
5. 다른 국가와의 비교
프랑스에서는 오크어, 프로방스어, 브르타뉴어 등 지방 언어를 프랑스 표준어에 대한 방언으로 취급하여, 방언을 사용하는 학생에게 방언찰을 걸게 하는 일이 있었다.[7] 영국의 웨일스에서도 이와 비슷한 Welsh Not가 있었다.[8]
일본이 위임통치하던 팔라우의 학교에서도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교내에서 팔라우어를 사용한 학생에게 "나는 팔라우어를 사용했습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목에 걸게 한 일본인 교사도 있었다고 한다.[12]
5. 1. 프랑스의 베르곤
프랑스에서는 오크어, 프로방스어, 브르타뉴어 등의 지방 언어를 프랑스 표준어에 대한 방언으로 취급하여, 방언을 사용하는 학생에게 방언찰을 걸게 하여 본보기로 삼는 일이 행해졌다.[7]5. 2. 영국의 웰시 낫
2024년, 1923년 웨일스 여성 평화 메시지가 오키나와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오키나와 방언 카드와 웨일스의 웰시 낫 정책 사이의 유사성을 고려한 것이다.[4]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오키나와어 재건이 웨일스어 재건에서 참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일본의 한 음악가는 오키나와 방언 카드와 웨일스 낫의 역사적 유사성에서 영감을 받아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6]6. 문화적 영향
오키나와어로 번역된 1923년 웨일스 여성 평화 메시지는 오키나와 방언 카드와 웨일스의 웰시 낫 정책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준다.[4] 아사히 신문은 오키나와어 재건이 웨일스어 재건에서 참고할 수 있다고 보도했고,[5] 한 음악가는 이 둘의 역사적 유사성에서 영감을 얻어 단편 영화를 제작했다.[6]
6. 1. 웨일스 평화 메시지 번역
2024년, 1923년 웨일스 여성 평화 메시지가 오키나와어로 번역되었다. 이는 오키나와 방언 카드와 웨일스의 웰시 낫 정책 사이의 유사성을 고려한 것이다.[4]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오키나와어 재건이 웨일스어 재건에서 참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일본의 한 음악가는 오키나와 방언 카드와 웨일스 낫의 역사적 유사성에서 영감을 받은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6]6. 2. 오키나와어 재건과 웨일스어
2024년, 1923년 웨일스 여성 평화 메시지가 오키나와어로 번역되었다. 이는 오키나와 방언 카드와 웨일스의 웰시 낫 정책 사이의 유사성을 고려한 것이다.[4]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오키나와어 재건이 웨일스어 재건에서 참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일본의 한 음악가는 오키나와 방언 카드와 웨일스 낫의 역사적 유사성에서 영감을 받은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6]6. 3. 문화예술 작품
2024년, 1923년 웨일스 여성 평화 메시지가 오키나와어로 번역되었으며, 이는 오키나와 방언 카드와 웨일스의 웰시 낫 정책 사이의 유사성을 고려한 것이다.[4] 일본의 아사히 신문은 오키나와어 재건이 웨일스어 재건에서 참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 일본의 한 음악가는 오키나와 방언 카드와 웨일스 낫의 역사적 유사성에서 영감을 받은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6]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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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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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Peace and Goodwill Message translated into Uchinaaguchi for firs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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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language subjected to ‘Welsh Not’-style punishment takes inspiration from Cymra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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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singer to shoot video inspired by the Welsh Not in Cardiff
https://nation.cym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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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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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bc.co.uk[...]
20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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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手道詳説(38) 第2章 沖縄史の概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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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30年代の共通語指導における「懲罰」と「奨励」:鹿児島県の方言札・表彰状等を通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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広島大学大学院教育学研究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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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なざしの呪縛 : 日本統治時代パラオにおける「島民」と「沖縄人」をめぐっ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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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人文学国際研究センター
2011-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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