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랴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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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랴쿠지는 788년 사이초에 의해 창건된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으로, 교토 북동쪽 히에이산에 위치한다. 헤이안 시대에 황실과 귀족의 지원을 받아 번성했으나, 내부 갈등과 무사 정권과의 갈등을 겪으며 1571년 오다 노부나가의 공격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재건되었으며,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재는 수행, 삼탑(동탑, 서탑, 요코카와), 문화재, 그리고 여러 논란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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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랴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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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엔랴쿠지 |
로마자 표기 | Enryaku-ji |
원어 이름 | 延暦寺 |
위치 | 오쓰시, 시가현, 일본 |
종교 | 천태종 |
본존 | 약사여래 |
국가 | 일본 |
웹사이트 | 천태종 총본산 히에이 산 엔랴쿠지 |
창건자 | 사이초 |
창건 년도 | 788년 |
재건 완료 년도 | 1642년 |
산호 | 비에이산 |
사격 | 총본산 |
공식 명칭 | 비에이산 엔랴쿠지 |
별칭 | 비에이산, 에이잔 |
성지 순례 | |
신사이코쿠 33개소 | 제18번 (요코가와추도) |
사이고쿠 야쿠시 49개소 | 제49번 |
긴키 36부동존 영장 | 제26번 (무도지) |
비와 호 108 영장 | 제108번 (요코가와추도) |
호넨 상인 25 영장 | 특별 영장 (세이류지) |
세이잔 국사 유적 영장 | 객번 (몬주로) |
신세이 상인 25 영장 | 제2번 (세이류지), 제3번 (조도인) |
반슈 야쿠시 영장 | 특별 찰소 |
도카이 49 야쿠시 영장 | 특별 찰소 |
신불 영장 순례길 | 제150번 (시가 제18번) |
문화재 | |
국보 | 근본중당, 금동경함 외 |
중요문화재 | 근본중당 회랑, 견본채색 천태대사상 외 |
위치 정보 | |
동탑 | 근본중당 |
서탑 | 석가당 |
요코가와 | 요코가와중당 |
상세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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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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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헤이안 시대의 고승 사이초는 807년 간무 천황의 지원을 받아 수백 명의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사이초의 엄격한 사상에 따라 그의 제자들은 12년 동안 명상하며 격리 생활을 해야 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우수한 승려들은 사찰에 남아 수행을 계속하고, 나머지는 정부에 임용되었다. 엔랴쿠지는 사이초의 권위와 함께 명성이 높아져 절정기에는 3,000명에 달하는 하위 사원과 강력한 승병들을 거느렸다.
10세기 경, 천태종 내부에서 엔닌과 엔친 간의 갈등으로 인해 천태종은 엔랴쿠지를 중심으로 하는 산문(山門)과 미이데라를 중심으로 하는 사문(寺門)으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승병을 동원하여 서로 전쟁을 벌였고, 용병을 고용하여 서로를 적대시했다. 심지어 산문과 사문의 지도자들은 승병들을 수도로 내려보내 자신들의 교리를 강제로 시행하려 해 많은 혼란을 초래했다.
1571년 오다 노부나가는 엔랴쿠지를 공격하여 이러한 불교 세력 간의 대립을 종식시켰다. 그는 승려들을 학살하고 사원을 불태웠다.[2] 현재 엔랴쿠지의 건물들은 대부분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 재건된 것이다.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은 루리도로, 외딴 길을 걸어 올라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있다. 복구 과정에서 많은 건물들이 다른 사찰에서 엔랴쿠지로 옮겨졌다.
2. 1. 창건과 발전
788년, 사이초가 히에이산에 일승지관원(一乗止観院)을 건립한 것이 엔랴쿠지의 시초이다.[8] 805년, 사이초는 당나라에서 천태종을 배우고 돌아와 일본 천태종을 개창했다.[14] 823년, 사가 천황이 '엔랴쿠지'라는 이름을 하사하면서 사찰의 위상이 높아졌다.[9]헤이안 시대에는 황실과 귀족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번성하였고, 밀교 수행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엔랴쿠지는 진언종의 도지(東寺)의 밀교(동밀)에 대하여 "대밀"이라 불리며 밀교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엔랴쿠지는 료닌, 호넨, 신란, 도겐, 니치렌 등 일본 불교사의 주요 승려들을 배출하며 '일본 불교의 어머니 산'으로 불렸다.[10] 이들은 젊은 시절 히에이산에서 수행하며, 훗날 일본 불교의 새로운 종파를 개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2. 2. 내부 갈등과 승병
10세기 경, 엔닌과 엔친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천태종은 엔랴쿠지를 중심으로 하는 산문(山門)과 미이데라를 중심으로 하는 사문(寺門)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16] 이들은 승병들을 사용하여 서로 전쟁을 벌였다.정력(正暦) 4년(993년), 엔닌파는 과거 엔친이 머물렀고 엔친파의 근거지였던 천수원(千手院, 산왕원(山王院)) 등의 당사(堂舎)를 파괴하고 엔친파 승려 약 천 명을 추방했다. 그러자 엔친파 승려들은 산을 내려와 엔랴쿠지의 별원이었던 원성사(園城寺)(미이데라(三井寺))에 들어가 엔랴쿠지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엔랴쿠지의 엔닌파는 산문(山門)(산문파)이라 불리고, 원성사의 엔친파는 사문(寺門)(사문파)이라 불리며 대립과 항쟁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항쟁에 참가하여 무장한 법사들 가운데 자연스럽게 승병이 나타났다.
엔랴쿠지에 의한 원성사 공격과 방화는 끔찍하여, 중세 말기까지 원성사는 전소 7회를 포함한 대규모 공격만 10회, 소규모 공격을 포함하면 50회에 달한다고 한다.
엔랴쿠지의 무력은 해를 거듭할수록 강해져, 강대한 권력으로 원정을 행했던 시라카와 법황(시라카와 천황)조차 "가모 강(요도가와 수계)의 물, 주사위, 산법사(山法師)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산'은 당시 일반적으로 히에이산을 가리키며, '산법사'는 엔랴쿠지의 승병을 말한다. 즉, 강대한 권력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유된 것이다. 엔랴쿠지는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 발생하면, 승병들이 진수사(鎮守社)인 히요시샤의 신여(神輿, 당시는 신과 부처가 동일하다는 신불습합 사상)를 받들고, 강소(強訴)라는 수단으로 당시 권력자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또한, 기온칸진인(현 야사카 신사)은 처음에는 고후쿠지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10세기 말의 항쟁으로 엔랴쿠지의 말사가 되었다. 같은 시기, 기타노텐만구(기타노샤)도 엔랴쿠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엔큐 2년(1070년)에는 기온칸진인은 가모 강 서쪽 기슭의 광대한 지역을 '경내'로 인정받고, 조정으로부터 불입권(不入権)을 인정받았다.[17]
이처럼 엔랴쿠지는 그 권위에 따른 무력이 있었고, 또한 물자 유통을 장악함으로써 재력도 보유하여 당시 권력자도 무시할 수 있는 일종의 독립 국가와 같은 상태(최근에는 그 상태를 '사사세력(寺社勢力)'이라고 부른다)였다. 엔랴쿠지의 승병의 힘은 고후쿠지와 함께 일컬어지며, 남도북령(南都北嶺)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엔랴쿠지의 세력은 귀족을 대신하여 힘을 키운 무가 정권도 위협했다. 가마쿠라 막부 창업 공신인 사사키 사다쓰나의 처벌을 조정 및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요구했고, 결국 요리토모가 이에 굴복하여 사다쓰나가 유배되는 사건(겐큐 2년(1191년)의 강소)이 일어나기도 했다.
2. 3. 무사 정권과의 갈등
엔랴쿠지는 막강한 권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개입하며 무사 정권과 갈등을 빚었다.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엔랴쿠지에서는 많은 명승이 배출되었다. 료겐은 엔랴쿠지 중흥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화재로 소실된 당탑가람을 재건하고 사내 규율을 유지하며 학업 발전에 힘썼다. 또한, 『왕생요집』을 저술하고 정토교의 기초를 쌓은 겐신과 융통염불종을 개창한 료닌도 엔랴쿠지 출신이다.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서는 이른바 가마쿠라 불교의 조사들이 히에이잔을 모체로 하여 독자적인 가르침을 열어갔다. 한편, 당시 히에이잔으로서는 호넨의 전수염불사상은 "이단"이었으므로 염불 중지를 요구하는 등 대항 조치와 압력을 가하거나 무력 충돌(가로쿠의 법난)도 발생했다.엔랴쿠지의 무력은 해를 거듭할수록 강해져, 막강한 권력으로 원정을 행했던 시라카와 법황조차 "가모 강의 물, 주사위, 산법사(山法師)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산'은 당시 일반적으로 히에이산을 가리키며, '산법사'는 엔랴쿠지의 승병을 의미한다. 즉, 막강한 권력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엔랴쿠지는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발생하면 승병들이 진수사인 히요시샤의 신여(神輿, 당시에는 신불습합 사상에 따라 신과 부처는 동일시되었다)를 받들고 조정에 강소(強訴)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또한, 기온칸진인(현재 야사카 신사)는 처음에는 고후쿠지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10세기 말의 분쟁으로 엔랴쿠지의 말사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기타노텐만구도 엔랴쿠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070년에는 기온칸진인이 가모 강 서쪽 기슭의 광대한 지역을 '경내'로 인정받고 조정으로부터 불입권(不入権)을 인정받았다.[17]
이처럼 엔랴쿠지는 그 권위에 따른 무력이 있었고, 물자 유통을 장악함으로써 재력도 보유하여 당시 권력자도 무시할 수 있는 일종의 독립 국가와 같은 상태(최근에는 이러한 상태를 '사사 세력(寺社勢力)'이라고 부른다)였다. 엔랴쿠지 승병의 힘은 고후쿠지와 함께 '남북(南都北嶺)'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엔랴쿠지의 세력은 귀족을 대신하여 힘을 키운 무가 정권에도 위협이 되었다. 고시라카와 법황에 의한 평씨 정권 타도 시도로 여겨졌던 시시가타니 음모의 한 원인으로, 고시라카와 법황이 불벌(仏罰)을 두려워하여 주저하는 다이라노 기요모리에게 엔랴쿠지 공격을 명령했기 때문에, 기요모리가 이를 회피하기 위해 명령에 가담한 원근신(院近臣)을 체포했다는 설(下向井龍彦・가와치 쇼스케 설)이 제기되었다. 1191년에는 엔랴쿠지의 대중(大衆)이 가마쿠라 막부 창업 공신인 사사키 사다쓰나의 처벌을 조정 및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요구했고, 결국 요리토모가 이에 굴복하여 사다쓰나가 유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겐큐 2년의 강소).
1571년,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인 오다 노부나가는 엔랴쿠지를 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학살함으로써 이러한 불교의 무력화를 종식시켰다.[2]

현재 엔랴쿠지의 건물들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정권 교체 이후 사찰이 재건될 때 건설된 것이다. 루리도라는 작은 건물 하나만이 살아남았는데, 이 건물은 사이토 단지에서 멀리 떨어진 표지 없는 길 끝에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13세기에 건축되었으며, 혹독한 날씨로 인해 20세기에 두 번 수리되었다.[3] 재건 과정에서 특히 미이데라 등 다른 사찰에서 일부 건물이 옮겨졌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오래되었지만, 항상 이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 4. 근현대
1868년, 메이지 정부는 신불분리 정책을 시행하여 히요시타이샤를 엔랴쿠지에서 분리하는 등, 엔랴쿠지에 시련을 안겨주었다. 이 시기 우에노 전쟁으로 간에이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엔랴쿠지는 다시 천태종 총본산의 지위를 회복하였다.1994년, 엔랴쿠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도 교토의 문화재'의 일부로 등재되었다.
2006년 4월 4일, 엔랴쿠지에서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 전 지도자들을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다.[4] 시가현 경찰은 이 의식이 야마구치구미의 자금 조달과 권력 과시에 이용된다고 판단하여 엔랴쿠지에 의식 중단을 요청했으나, 엔랴쿠지는 이를 거부하고 야마구치구미 상층부 지도자 약 100명의 참석을 허용했다.[4] 아사히 신문과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로 전국적인 스캔들이 발생하자, 엔랴쿠지는 일본 불교 사찰 협회의 비판을 받고, 결국 5월 18일 모든 대표 이사들이 사임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5]
2. 5. 논란
엔랴쿠지는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2006년에는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 관련 의식을 거행하여 전국적인 비난을 받았다.[4] 2004년부터는 묘지 인근 처리장에 건설 토사가 불법 투기되어 오쓰시와 시가현 경찰의 조사를 받았고,[22][23] 2016년에는 엔랴쿠지 회관 부관장이 수행승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건도 발생했다.[26][27] 이러한 사건들은 엔랴쿠지의 명성에 타격을 주었다.2. 5. 1. 범죄 조직과의 연관
2006년 4월 4일, 엔랴쿠지는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 전 지도자들을 위한 의식을 거행했다.[4] 시가 현 경찰은 이 의식이 야마구치구미의 자금 조달 및 세력 과시에 이용될 것을 우려하여 중지를 요청했으나, 엔랴쿠지는 이를 거부하고 의식을 강행했다. 이 의식에는 야마구치구미 고위 간부 100여 명이 참석했다.[4]아사히 신문과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로 이 문제가 알려지자, 엔랴쿠지는 전국적인 비난을 받았다. 7만 5천 개의 사찰을 대표하는 일본 불교 사찰 협회도 엔랴쿠지의 행위를 비판했다.[5] 결국 2006년 5월 18일, 엔랴쿠지 대표 이사 전원이 사퇴하고, 웹사이트와 3,000개의 분사찰에 사과문을 발표했다.[5]
이후 엔랴쿠지는 역대 조직 두목 가족 등 소수 인원의 위패 참배는 허용했지만, 각 지방자치단체의 폭력배 배제 조례 제정 등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2011년 야마구치구미에 참배 중지를 통보했고, 야마구치구미도 이를 승낙했다.[25]
2. 5. 2. 불법 투기 문제
2004년부터 엔랴쿠지 묘지 인근 처리장에 교토의 건설회사인 서일본개발이 건설 토사를 대량으로 반입하기 시작하면서, 총량이 오쓰시 토사 조례에서 정한 9,900㎡를 훨씬 초과하였다. 오쓰시는 2012년 10월 해당 업체에 중지 명령을 내리고 조례 위반으로 이 업체를 시가현경에 고발했지만, 곧바로 처리장 소유주가 변경되면서 불법 투기는 계속되었다. 토사 붕괴도 잇따라 발생하여 부상자까지 나오자 참배객이 위험에 노출될 위험이 높아짐에 따라, 엔랴쿠지와 지역 주민들이 시가현 공해 심사회에 공해 분쟁 처리법에 따른 공해 조정을 신청했다.[22] 이 불법 투기 문제로 시가현경은 법인인 서일본개발과 남성 사장을 오쓰시 토사 조례 위반 혐의로 서류송치했다.[23] 2014년 7월 7일, 오쓰시가 행정대집행 등으로 토사 붕괴 방지 공사를 실시하고, 주변 하천이나 수로의 수질 검사를 2017년도까지 실시하는 등의 내용으로 조정이 성립되었다.[24]2. 5. 3. 승려 폭행 사건
2016년 4월, 엔랴쿠지 회관 부관장인 승려가 20대 수행승 3명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그중 한 명이 왼쪽 귀 고막이 파열되는 등 중상을 입었다. 이 승려는 폭행 동기에 대해 "수행승들의 태도에 화가 나서 욱하여 때렸다"고 진술했다. 엔랴쿠지는 해당 승려를 엄중히 주의 조치했으며, 형사 고발은 하지 않기로 했다. 엔랴쿠지는 "엄중히 받아들이고, 전통의 명예와 신뢰 회복에 힘쓰겠습니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26][27]3. 수행
엔랴쿠지에서는 십이년롱산행과 천일회봉행 등 엄격한 수행이 이루어진다.
3. 1. 십이년롱산행(十二年籠山行)
엔랴쿠지 산내 주지가 되기 위해서는 3년 동안 산에 틀어박혀 수행해야 한다. 3년 롱산의 경우, 1년차에는 정토원에서 최澄 묘소를 돌보는 시진(侍真)의 조수를 맡고, 2년차에는 백일회봉행을, 그리고 3년차에는 상행당(常行堂)이나 법화당(法華堂) 중 한 곳에서 90일간 수행해야 한다. 상행당(常行堂)에서 하는 수행(상행삼매)은 본존인 아미타여래 주변을 계속 걸어 다니는 것으로, 그 사이에는 염불을 외워도 허용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선(禅)의 한 종류이다. 90일 동안 눕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하루에 수 시간 손잡이에 기대어 잠깐씩 눈을 붙이는 것이다. 법화당(法華堂)에서 하는 수행은 상좌삼매라고 하며, 끊임없이 참선을 계속하고, 그 자세 그대로 잠깐씩 눈을 붙인다.12년 롱산행에서는 고상행(好相行)이 의무화되어 있으며, 고상행(好相行)을 만행하지 않으면 12년 롱산의 허가가 내려오지 않는다. 고상행(好相行)이란 정토원의 배전에서 고상(好相)을 얻을 때까지 매일 하루에 3천 번의 오체투지를 하는 것이다. 고상(好相)이란 일종의 신비체험이며, 경전에는 여래가 내려와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오색의 빛이 비치는 것이 보인다는 기록도 있다.
3. 2. 천일회봉행(千日回峰行)
7년 동안 1년에 100일에서 200일, 총 1000일 동안 히에이잔 산내를 순례하는 회봉행이다. 도중에 당입이라는 고행을 행하며, 이를 만행한 자는 살아있는 불동명왕으로 '''당행만아자리'''라 불린다. 1000일을 만행한 자는 '''북령대행만대아자리'''라 불린다.[2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만행한 자는 2017년 현재 14명이다.4. 경내
히에이산 경내는 "동탑(東塔)", "서탑(西塔)", "요카와(横川)"의 세 구역으로 나뉘며, 이를 총칭하여 "삼탑(三塔)"이라고 한다. 각 구역은 다시 여러 곡(谷)으로 세분화되어 "삼탑십육곡이별소(三塔十六谷二別所)"라고 불린다.
구분 | 소속 곡 |
---|---|
동탑(東塔) | 북곡(北谷), 동곡(東谷), 남곡(南谷), 서곡(西谷), 무동사곡(無動寺谷) |
서탑(西塔) | 동곡(東谷), 남곡(南谷), 남미곡(南尾谷), 북미곡(北尾谷), 북곡(北谷) |
요카와(横川) | 향방곡(香芳谷), 해탈곡(解脱谷), 계심곡(戒心谷), 도률곡(都率谷), 반야곡(般若谷), 반실곡(飯室谷) |
별소(別所) | 흑곡(黒谷), 안락곡(安楽谷) |
이 외에도 시가현 쪽 산기슭의 사카모토 지역에는 시가인(滋賀院), "사토보(里坊)"라 불리는 사찰군, 히에이산 신사 등이 있다. 경내에는 역사적인 이유로 다른 종파가 관리하는 당우도 존재한다.
4. 1. 동탑(東塔)
엔랴쿠지의 발상지로, 본당인 根本中堂(곤본추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根本中堂(곤본추도)(국보) - 상세 내용 참조. 사이초가 788년에 건립한 일승지관원(一乗止観院)의 후신으로, 엔랴쿠지의 총본당이다. 현재 건물은 오다 노부나가의 비에이산 야키우치 이후, 1642년에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재건한 것이다. 1953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리모야즈쿠리(入母屋造)로 너비 37.6미터, 깊이 23.9미터, 지붕 높이 24.2미터의 대규모 건축물이다. 토간(土間)의 내진(内陣)은 외진(外陣)보다 바닥이 3미터나 낮은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내부에는 3기의 즈시(厨子)가 놓여 있으며, 중앙의 즈시에는 사이초가 직접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비불(秘仏) 본존·약사여래입상을 안치한다(1988년에 개문된 적이 있다). 본존 즈시 앞의 츠리도로(釣灯籠)에 밝히는 것은 사이초 시대부터 이어지는 「불멸의 법등」이다. 이 법등은 노부나가의 야키우치로 일시적으로 끊겼지만, 야마가타현의 릿샤쿠지에 분등(分灯)되어 있던 것을 옮겨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 중진(中陣) 중앙에는 옥좌(玉座)가 있으며, 그 위에 있는 칙액(勅額) 「전교(傳教)」는 쇼와 천황의 친필이다.
- 회랑(중요문화재)
- 중문(中門)
- 전교대사 동형상(傳教大師童形像)
- 전교대사상(傳教大師像)
- 문수루(중요문화재)[29] - 엔랴쿠지의 산문(山門). 1668년의 화재 후 재건. 2층짜리 문으로, 층 위에는 문수보살을 안치한다. 곤본추도의 정동(正東)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는 자각대사 엔닌이 당나라의 오대산·문수보살당에 본떠 창건한 것이다.
- 십삼중석탑(十三重石塔)
- 문수루종루(文殊楼鐘楼) - 국제연합 평화의 종이라고 불린다.
- 성봉이나리샤 - 제신: 다키니텐(荼枳尼天)
- 총지방(総持坊)
- 렌뇨당 - 정토진종본원사파의 혼간지 8세 렌뇨가 18세 때 여기서 염불 수행을 했다고 한다.
- 팔부원(八部院) - 1991년 재건.
- 등천덴만궁
- 대강당(중요문화재) - 1634년 건립. 원래는 동록(東麓)·사카모토의 도쇼구의 찬불당(讃仏堂)이었던 것을 1964년에 현재 위치로 이축한 것이다. 중요문화재였던 구 대강당은 1642년에 완성된 쇼카이(裳階)가 있는 대당이었지만, 1956년에 방화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본존은 대일여래좌상이다. 본존의 양쪽에는 좌측에 니치렌, 도겐, 에이사이, 엔친, 우측에 호넨, 신란, 료닌, 신세이, 잇펜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 모두 젊은 시절 엔랴쿠지에서 수행했던 승려로, 이러한 초상화는 관계 각 종파로부터 기증된 것이다. 외진에는 석가를 시작으로 불교와 천태종과 관련이 있는 고승(高僧)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 종루(鐘楼) - 개운의 종, 세계 평화의 종이라고 불린다.
- 수운원(瑞雲院)
- 전당원(前唐院) - 자혜대사 료겐(원삼대사(元三大師))의 주방(住房).
- 국보전(国宝殿) - 산내 제당(山内諸堂)의 본존 이외의 불상과 회화, 공예품, 문서 등을 수장 전시한다. 「국보전」이라는 명칭은 최징이 저술한 『산가학생식(山家学生式)』속의 「일각을 비추면 곧 국보이다(一隅を照らす これ則ち国宝なり)」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 진혼塚(鎮魂塚) - 1992년 건립. 1571년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행해진 비에이산 야키우치로 사망한 사람들의 공양탑(供養塔). 그러나, 법요에서는 야키우치로 사망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다 노부나가 등 야키우치를 행한 측의 사람들도 함께 공양하고 있다.
- 계단원(중요문화재) - 1678년 재건. 승려에게 계율을 수여하는 장소이다. 본존의 석가모니불은 1987년에 니시무라 고초가 제작했다.
- 계단원종루(戒壇院鐘楼)
- 아미타당(阿弥陀堂) - 자코덴(寂光殿)이라고도 불린다. 1937년에 야마구치 겐도의 기증으로 건립. 본존은 아미타여래좌상. 선조 회향(回向)이 행해지고 있다.
- 법화총지원동탑(法華総持院東塔) - 1980년 재건. 다보탑 형식의 탑이지만, 일반적인 다보탑과 달리 상층부는 평면 원형이 아니라 정방형이다. 하층에는 태장계 대일여래좌상, 상층에는 불사리와 법화경 1000부를 안치한다. 최징은 일본 전국에 6곳의 보탑(宝塔)·육소보탑(六所宝塔)을 세워 일본을 지키려고 생각했다. 이 동탑은 그 총탑이 되는 탑·오미국 보탑이다.
- 관정당(灌頂堂)
- 아미타당종루(중요문화재)
- 산왕원(山王院) - 지쇼대사 엔친의 주방. 센주인(千手院)이나 고당원(後唐院)이라고도 불린다. 993년에 엔친파(후의 사문파)가 본거지를 온조지로 옮기기 전에는 여기가 본거지였다.
- 정토원 - 종조 최징의 묘(廟)가 있으며, 산내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십이년고산행에 임하는 시진(侍真)이 있으며, 종조 최징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식사를 바치고, 경내 일원을 낙엽 한 장 남기지 않도록 정성껏 청소하고 있다. 서탑지구(西塔地区) 쪽에 세워져 있지만 소속은 동탑이다. 동탑지구에서 걸어가면 약 15분 거리에 있다.
- * 전교대사묘(傳教大師御廟)(중요문화재) - 자각대사 엔닌이 854년 7월에 최징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 안치한 곳.
- * 배전(중요문화재)
- * 고리(庫裏)
- * 당문(중요문화재)
- 만배당(万拝堂) - 일본 전국의 신사불각(神社仏閣)의 제불제보살제천선신(諸仏諸菩薩諸天善神)을 권청(勧請)하고, 함께 세계에 편만하는 신들도 함께 맞이하여 봉안하고, 섬기고 있다.
- 일각회관(一隅会館)
- 사무소(寺務所)
- 대흑당(大黒堂) - 일본의 대흑천 신앙의 발상지이다. 본존은 삼면출세대흑천(三面出世大黒天).
- 산왕사(중요문화재)
- 대서원(국등록유형문화재) - 쇼와 천황의 즉위대전기념(即位大典記念)과 비에이산 개창 1150년 기념사업으로, 1928년에 도쿄아카사카 산왕대(山王台)에 있던 다케다 고이치 설계의 무라이 기치베 저택(邸宅)의 일부를 이축한 것이다. 영빈관(迎賓館)으로 사용되고 있다.
- * 정원 - 가레산스이정원.
- * 정문(庭門)(국 등록 유형문화재)
- 정각원부동(正覚院不動) - 정각원(正覚院)에 섬기던 부동명왕을 섬기는 곳.
- 연락사회관(延暦寺会館) - 숙방. 옛날 관정(灌頂)이 행해지던 정각원의 터에 세워져 있다.
- 호넨당 - 정식 명칭은 금승원(金勝院). 고엔의 주방으로 호넨이 얻도(得度)한 공덕원(功徳院)의 터에 있다. 서산정토종이 관리하고 있다.
- 성존원당(거당)(聖尊院堂(亀堂))
- 천제권현(天梯権現)
- 자각대사 엔닌묘(慈覚大師円仁廟)
- 무동사 명왕당 - 根本中堂(근본중당)에서 남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천일회봉행의 거점이다. 연락사 오대당 중 하나이며, 불동명왕과 변재천을 모시고 있다. 865년, 회봉행의 창시자로 알려진 소오 화상이 창건하였다.
- 법만원
- 호마당
- 보주원
- 대승원
- 옥조원
- 송림원
- 무동사변재천사
- 백룡대명신
- 건립원
- 서존원당 - 사카모토 케이블 케이블 엔랴쿠지 역 근처에 있으며, 히에이잔 드라이브웨이 옆에 있다.
- 소오 화상 묘소
- 기간지의 묘
명칭 | 설명 |
---|---|
-- | 엔랴쿠지의 산문(山門) |
-- | 승려들의 학습 및 토론 장소 |
-- | 엔랴쿠지의 중심 건물 |
-- | 승려들에게 계율을 수여하는 장소 |
-- |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곳 |
-- | 불교 의식인 관정을 행하는 곳 |
-- | 개운의 종, 세계 평화의 종 |
-- | 무동사에 있는 변재천을 모시는 신사 입구 |
-- | 천일회봉행의 거점 |
히에이산 연락사 근본중당의 고슈인 | 근본중당의 참배 증표 |
4. 2. 서탑(西塔)


서탑(西塔)은 제2대 천태좌주(天台座主) 원총(円澄)이 창건한 곳으로, 석가여래(釈迦如来)를 모신 석가당(본당)을 중심으로 상행당, 법화당 등 중요문화재 건물들이 있다. 동탑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져 있다.[7] 석가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원성사(園城寺)의 미륵당을 이전한 것으로, 현존하는 엔랴쿠지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7]
- 석가당(釈迦堂)(중요문화재) - 서탑의 중심 건물. 오다 노부나가의 방화 이후, 1595년 당시 원성사(園城寺)의 미륵당(1347년 건립)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현존하는 엔랴쿠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본존불은 청량사(清凉寺)식 석가여래(釈迦如来)입상(중요문화재)이다. 엔랴쿠지 오대당 중 하나이다.
- 상행당(常行堂)(중요문화재) - 법화당과 함께 똑같이 생긴 두 동의 건물이 좌우로 나란히 있다. 왼쪽이 아미타여래좌상을 본존불로 모시는 상행당이다. 1595년에 재건되었다. 두 당 사이에 놓인 복도의 전체 모양이 지게와 비슷하여 두 당을 합쳐 "니나이도(にない堂)"라고 부른다. 무사시보 벤케이(武蔵坊弁慶)가 짊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 법화당(法華堂)(중요문화재) - 상행당과 함께 똑같이 생긴 두 동의 건물이 좌우로 나란히 있다. 오른쪽이 보현보살(普賢菩薩)좌상을 본존불로 모시는 법화당이다. 1595년에 재건되었다.
- 상륜촉(相輪橖)(중요문화재) - 석가당 북쪽 산림에 있으며, 청동제로 1895년에 재건되었다. 이 탑은 육소보탑 중 산성국(山城国) 보탑이다.
- 미륵석불(弥勒石仏)(오쓰시 지정 유형문화재) - 석가당 북쪽 산림에 있다.
- 유리당(瑠璃堂)(중요문화재) - 오다 노부나가의 방화를 피한 유일한 당이라고 한다. 양식상 무로마치 시대 건축물이다. 엔랴쿠지에서는 드물게 선종양(禅宗様)(당양)으로 지어졌다.
4. 3. 요코카와(横川)
제3대 천태좌주 자각대사 엔닌이 개척한 곳으로, 본당에 해당하는 요카와 중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서탑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다. 850년에 엔닌이 건립한 수릉엄원(首楞厳院)이 그 시초이다.- 요카와 중당(横川中堂) - 1942년 낙뢰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당은 1971년 철근콘크리트로 재건된 것으로, 무대식 건축 양식이다. 신사이국삼십삼소 제18번 찰소이며, 본존은 엔닌 작품으로 전해지는 성관음(중요문화재) 입상이다. 연력사 오대당(延暦寺五大堂) 중 하나이다.[7]
- 근본여법탑(根本如法塔) - 다보탑. 1925년 재건. 엔닌이 법화경을 사경하여 봉안한 탑이 그 시초이다.
- 사계강당(四季講堂)(원삼대사당(元三大師堂), 중요문화재) - 967년 무라카미 천황의 칙명에 따라 사계절에 법화경의 논의가 행해졌기에 사계강당이라 불린다. 원삼대사(자혜대사) 료겐의 주방 터에 있으며, 원삼대사를 모신다. 천태종 및 그 계통을 잇는 사찰에서 수여하는 악귀를 막는 "각대사"(원삼대사가 귀신이 된 것)의 호부 발상지이며, 오미쿠지(제비뽑기) 발상지이기도 하다.
- 에신당(恵心堂) - 현재의 당은 사카모토(坂本) 쇼겐지의 별당 대사당을 이축한 것이다. 에신승도 겐신의 주방 터이며, 이곳에서 『왕생요집』과 『이십오삼매식(二十五三昧式)』이 저술되었다.
- 요카와 종루(横川鐘楼)(중요문화재)
명칭 | 설명 |
---|---|
삼십번신사(三十番神社) | |
류케이케 벤자이텐샤(龍ヶ池弁財天社) | |
류케이케(龍ヶ池) | |
사이국삼십삼소 석불군 | |
적산선원(赤山宮) | |
쿄시의 탑(虚子の塔) | 다카하마 쿄시의 생전 묘소, 1953년 건립 |
히에이산 비보관(比叡山秘宝館) |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
에신묘(恵心廟) | |
쿠리(庫裏) | |
표문(表門) | |
하시즈카 벤자이텐샤(箸塚弁財天社) | |
칸로산노샤(甘露山王社) | |
히에이산 깅인(比叡山行院) | |
요카와 조코인(定光院) | 닛렌의 수행지. 그 경위로 닛렌종이 관리. |
원삼대사 고묘(元三大師御廟) | |
고묘 하이덴(御廟拝殿)(중요문화재) | |
이나리샤(稲荷社) | |
사이토호도 덴쿄다이시 고존조(西塔峰道伝教大師ご尊像) | 서탑과 요카와 사이에 있는 "히에이산 호도 레스토랑" 앞에 위치. 높이 약 12m, 1987년 건립. |
4. 4. 사카모토(坂本)
히에이산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이 은거하기 위해 비와호 동쪽 기슭의 사카모토에 세운 것이 리보(里坊)이다. 중세에는 주로 승병 집단의 주거지가 되었다.현재 사카모토에는 54곳의 리보(里坊)가 있으며, 그 중 일부 사찰의 정원은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명칭 | 비고 |
---|---|
시가인(滋賀院) 문적(門跡) | 총리보(總里坊). ※ |
다이린인(大林院) | |
겐노인(嚴王院) | |
카이코인(戒光院) | |
고보지(弘法寺) | |
젠죠인(禅定院) | |
엔메이인(延命院) | |
다이지인(大慈院) | |
엔죠인(円乗院) | |
신조인(真蔵院) | |
케조인(華蔵院) | |
쿄센인(行泉院) | |
조지츠인(乗実院) | |
간묘인(観明院) | |
무료인(無量院) | |
큐호지(求法寺) | 히에이산 신사(日吉大社) 입구에 위치. |
시칸인(止観院) | |
렌게인(蓮華院) | ※ |
케이코인(恵光院) | |
릿츠인(律院) | ※ |
지츠조보(実蔵坊) | ※ |
주료인(寿量院) | ※ |
야쿠쥬인(薬樹院) | |
쇼겐지(生源寺) | 사이초(最澄)가 태어난 곳에 세워짐. |
별당대사(別当大師)당 | |
니츠조인(日増院) | |
령산인(霊山院) | |
쇼쥬인(松寿院) | |
부츠죠인(仏乗院) | ※ |
묘교인(妙行院) | |
엔쿄인(円教院) | |
스이오인(瑞応院) | |
소겐인(双厳院) | ※ |
세이코인(星光院) | |
킨조인(金蔵院) | |
킨다이인(金台院) | |
류젠인(竜禅院) | |
카이조인(戒蔵院) | |
칸쥬인(観樹院) | |
케이지츠인(恵日院) | 텐카이(天海)의 묘소인 지간도(慈眼堂)가 있음. |
엔톤보(円頓坊) | |
고치인(五智院) | |
규렌인(玉蓮院) | |
류쥬인(竜珠院) | |
호세키인(宝積院) | ※ |
카오인(華王院) | |
리쇼인(理性院) | |
킷쇼인(吉祥院) | |
류오인(竜王院) | |
쥬묘인(十妙院) | |
다이카쿠지(大覚寺) | |
센쥬인(千手院) | |
메이토쿠인(明徳院) | |
신죠인(真乗院) |
- 연력사 사카모토 릿보 정원 (※ 국가 명승 지정)
- * 쌍엄원 정원
- * 보적원 정원
- * 시가인 문적 정원
- * 불승원 정원
- * 구 백호원 정원
- * 구 죽림원 정원
- * 연화원 정원
- * 율원 정원
- * 실장방 정원
- * 수량원 정원
5. 문화재
사이초가 창건한 이래, 고야산 금강봉사와 함께 헤이안 불교의 중심 사찰이었던 엔랴쿠지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엔랴쿠지 경내에는 국보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다양한 건축물과 불교 미술품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5. 1. 국보
- 국보
- * 근본중당
- * 금동경합(金銅経合)
- * 보상화마키에경합(宝相華蒔絵経箱)
- * 칠조자납가사
5. 2. 중요문화재
- 국보인 근본중당과 중요문화재인 회랑이 있다.
- 중요문화재인 몬주로[29]는 엔랴쿠지의 산문(山門)으로, 1668년 화재 후 재건되었다. 2층 문으로, 문수보살을 모시고 있다.
- 중요문화재인 대강당은 1634년 건립되었으며, 원래 사카모토의 니키지 도쇼구 찬불당이었던 것을 1964년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1956년 화재로 소실된 구 대강당은 1642년 완성된 건물이었다. 본존은 대일여래 좌상이며, 닛렌, 도겐 등 엔랴쿠지에서 수행했던 승려들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
- 중요문화재인 상행당과 법화당은 좌우로 나란히 있는 똑같이 생긴 두 건물이다. 1595년 재건되었으며, 두 건물 사이 복도가 지게와 비슷하여 "니나이도"라고 불린다.
- 중요문화재인 전법륜당(석가당)은 엔랴쿠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온조지의 미륵당(금당, 1347년 건립)을 현재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본존불은 비불인 청량사식 석가여래입상(중요문화재)이다.
- 중요문화재인 상륜촉은 석가당 북쪽 산림에 있으며, 청동제로 1895년 재건되었다.
- 중요문화재인 유리당은 서탑 지역에서 구로다니 세이류지로 가는 길에 있으며, 무로마치 시대 건축물이다.
- 중요문화재인 요카와 종루가 있다.
- 중요문화재인 사계강당(원삼대사당)은 967년 무라카미 천황의 칙명에 따라 건립되었으며, 료겐의 주방 터에 있다.
- 중요문화재인 계단원은 1678년 재건되었으며, 승려에게 계율을 수여하는 장소이다. 본존 석가모니불은 1987년 니시무라 고초가 제작했다.
- 중요문화재인 산왕사가 있다.[40]
- 중요문화재인 정토원전교대사묘, 정토원당문, 정토원배전이 있다.[40]
- 중요문화재인 아미타당종루는 1963년 지정되었다.[40]
- 중요문화재인 서탑종루가 있다.
- 중요문화재인 원삼대사묘배전이 있다.[40]
- 오쓰시 사카모토에 있는 중요문화재 자안당이 있다.
명칭 | 지정 연도 | 비고 |
---|---|---|
근본중당 회랑 | 국보는 근본중당 | |
대강당(구 동조궁 본지당) | ||
전법륜당(석가당) | ||
대승계단원당 | ||
유리당 | ||
상륜탑 | ||
상행당 및 법화당(부: 복도) | ||
문수루 | 2014년 | [40] |
산왕사 | 2014년 | [40] |
정토원전교대사묘(부: 동자 1매) | 2014년 | [40] |
정토원당문 | 2014년 | [40] |
정토원배전 | 2014년 | [40] |
아미타당종루 | 1963년 | [40] |
서탑종루 | ||
사계강당(부: 궤 1기, 동자 5매) | 1967년 | |
원삼대사묘배전(부: 묘소수각 1동, 도리이 1기) | 2014년 | [40] |
횡천종루 | ||
자안당(부: 궤 1기) | 2006년 | 오쓰시 사카모토 소재 |
분류:시가현의 중요문화재
분류:엔랴쿠지
6. 교통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 교토역이나 가타다역 등에서 엔랴쿠지 버스센터행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엔랴쿠지 버스센터는 동탑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다.[13]
- '''엔랴쿠지 버스센터''' 정류장
버스 회사 | 노선 번호 | 행선지 | 경유지 |
---|---|---|---|
에가와 교통 | 140계통 | 비에이산 정상행, 가타다역 서구행 | 서탑, 요코가와, 오고토 온천 역 |
에가와 교통 | 141계통 | 비에이산 정상행 | (당 정류장 출발) |
에가와 교통 | 142계통 | 비에이산 정상행, 요코가와행 | |
교토 버스 | 51계통 | 비에이산 정상행, 교토역행 | 데마치야나기역 앞, 산죠 게이한 앞 |
게이한 버스 | 57계통 | 비에이산 정상행, 교토역행 | 게이한 데마치야나기, 산죠 게이한 |
- '''서탑(西塔)''' 정류장
버스 회사 | 노선 번호 | 행선지 |
---|---|---|
에가와 교통 | 140번 | 비에이산정(比叡山頂)행, 가타다역 서쪽 출구(堅田駅西口)행 (요코가와(横川), 오고토온센역(おごと温泉駅) 경유) |
에가와 교통 | 142번 | 비에이산정(比叡山頂)행, 요코가와(横川)행 |
- '''횡천(横川)''' 정류장
버스 회사 | 노선 번호 | 행선지 | |
---|---|---|---|
에가와 교통 | 140번 | 비에이산 정상(比叡山頂)행, 가타다역 서쪽 출구(堅田駅西口)행 (오고토온센역(おごと温泉駅) 경유) | |
에가와 교통 | 142번 | 비에이산 정상(比叡山頂)행 | (이 정류장 출발) |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경우, 사카모토 케이블 케이블 엔랴쿠지역에서 하차 후 도보로 10분 정도 걸으면 동탑 지역에 도착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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残土処分場:大量土砂搬入の建設会社社長ら送検 大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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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津市:残土問題 公害調停成立 延暦寺霊園近隣、市が崩落防止工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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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간행물
昭和41年3月24日文化財保護委員会告示第17号および昭和44年11月4日文化庁告示第9号
문화청, 문화재보호위원회
1966-03-24, 1969-11-04
[46]
웹사이트
文化財目録
https://www.pref.shi[...]
滋賀県教育委員会
2019-09-07
[47]
서적
読売年鑑
読売新聞社
1957 # 추정값, 昭和32년은 1957년임
[48]
웹사이트
新日本風土記「比叡山」
https://www.nhk.or.j[...]
201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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