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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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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웅은 파저족 출신으로, 후한 시대 무장 이특의 아들이자 성한의 초대 황제이다. 274년에 태어나 이특의 거병 이후 군사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류 사후 대장군과 익주목을 자칭하며 세력을 키웠다. 나상을 물리치고 성도를 점령한 후 304년 성도왕에 즉위, 건흥 연호를 사용하며 성한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306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성으로 변경하고, 334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웅은 관대한 정치와 간소한 법률로 30년간 평화를 유지했으나, 후계자 문제로 인해 사후 성한은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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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웅
기본 정보
이름이웅
한자 표기李雄
로마자 표기Lǐ Xióng
시대성한
출생274년
사망334년
묘호태종 (太宗)
시호무황제 (武皇帝, "무력적인")
능묘안도릉 (安都陵)
재위
즉위303년
퇴위334년
연호건흥 (建興): 304년–306년
안평 (晏平): 306년–311년
옥형 (玉衡): 311년–334년
재위 중 직함대장군, 대도독, 익주 목 (大將軍大都督益州牧, 303년–304년)
성도 왕 (成都王, 304년–306년)
대성 황제 (大成皇帝, 306년–334년)
가계
아버지이특
배우자비 (첩)
자녀불명
주요 경력
즉위 전대장군
대도독
익주목
즉위 후성도왕
황제
이미지
촉주 이웅
촉주 이웅

2. 생애

이웅은 파저족(巴氐族) 출신의 무장 이특의 셋째 아들로, 274년에 태어났다.[2] 301년, 이특이 거병하자 이웅은 그 휘하에서 활약하였다.[2] 303년 2월, 이특이 전사하자, 뒤를 이은 이류의 밑에서 활약하였다.[2] 서진익주자사 나상(羅尙)의 군대가 맹공을 가해 이류는 항복하려 하였으나, 이웅이 반대하여 항복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군대를 이끌고 분투하여 나상의 군대를 압도하게 되었다. 9월에 이류가 병사하자 뒤를 이어 대장군·익주목을 자칭하였다.

12월, 이웅은 나상을 물리치고 성도를 점령하였으며, 이후 익주 지역을 장악하였다. 익주의 현자 범장생(范長生)을 영입하려 하였으나 범장생이 거절하여 실패하였다. 304년 10월, 이웅은 여러 부하들의 추대로 성도왕에 즉위하고 연호를 고쳐 건흥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를 성한이 건국된 기점으로 본다. 306년 3월에는 범장생이 이웅에게 투신하였고, 이웅은 그를 승상으로 삼았다. 6월에 이르러, 이웅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이웅의 치세에는 범장생 등에 의해 을 간소화하고 현명한 정치를 펼쳐 30년 가까운 재위 기간 동안 안정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정실 황후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하여 후궁 소생의 아들 10여 명만 두었으며, 일찍 죽은 형 이탕의 아들인 조카 이반태자로 삼았다. 이로 인해 이웅의 친아들들 사이에 반발이 있었다.

334년에 6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거병

이웅은 파저족 출신의 무장 이특의 셋째 아들로, 274년에 태어났다.[2] 키가 8척 3촌(약 190cm)이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격렬한 기개를 가졌다는 평판이 있었으며, 고향에서는 타인의 뒷바라지를 잘했으므로, 견식이 있는 인사들은 모두 그를 존중했다. 도술사 유화는 이웅을 비범하고 모범이 될 인물이며, 훗날 군주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301년, 이특이 거병하자 이웅은 그 휘하에서 활약하였다.[2] 이특은 익주 자사인 라상과의 대립으로 인해 행진북대장군을 자칭하고, 이웅을 전장군에 임명했다. 302년에는 서진의 하간왕 사마옹의 토벌군을 형 이탕과 함께 격파하고, 적군 대다수를 살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서진 군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듭하여, 303년 1월에는 성도성에 들어가 연호를 건초로 정하고 자립을 선언했다.

303년 2월, 이특이 전사하자, 뒤를 이은 이류의 밑에서 활약하였다.[2] 이특이 전사한 원인은 촉 백성에 대한 공출에 따른 식량 부족으로, 이끌고 온 유민들을 각지의 촌락으로 분산시키기로 한 이특의 결정에 대해 이웅이 숙부 이류와 함께 여러 촌락이 이반할 위험성을 호소하며 경계를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익주 자사 라상이 대군을 파견하여 이특의 진영에 총공격을 가하자, 각 촌락이 일제히 호응했기 때문에, 병력이 적었던 이특은 대패하여 전사했다.

이 대패를 겪은 이웅은 숙부 이류와 형 이탕과 함께 병력을 수습하여 적조로 철수했다. 대장군의 칭호는 이특의 동생이었던 이류가 이어받았다. 그러나 나상의 군대의 추격을 받아 격전 중에 형 이탕이 전사했다. 게다가 서진 조정에서는 형주 자사 종태와 건평군 태수 손부 등이 이끄는 원군이 파견되었고, 의기소침한 숙부 이류는 항복을 결심했지만, 이웅은 이양과 함께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류 몰래 진군을 기습하여 철수하게 만든 이후, 이류는 이웅의 판단을 신뢰하고 따랐다. 303년 9월, 이류는 병이 깊어지자 이웅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다. 여러 장수들은 유언에 따라 이웅을 옹립하여 군주로 삼았다. 이웅은 대도독, 대장군, 익주목을 자칭하고, 비성을 도읍으로 정했다.

2. 2. 성한 건국

이웅은 파저족 출신의 무장 이특의 셋째 아들로, 274년에 태어났다. 이특이 301년에 거병하자 그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303년 2월, 이특이 전사하자, 뒤를 이은 이류의 밑에서 활약하였다. 서진익주자사 나상(羅尙)의 군대가 맹공을 가해 이류는 항복하려 하였으나, 이웅이 반대하여 항복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군대를 이끌고 분투하여 나상의 군대를 압도하게 되었다. 9월에 이류가 병사하자 뒤를 이어 대장군·익주목을 자칭하였다.

12월, 이웅은 나상을 물리치고 성도를 점령하였으며, 이후 익주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웅은 부하 박태에게 위장 투항을 명했고, 박태는 라상에게 "피성을 공격하면 안에서 호응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라상은 이를 믿고 부하 외백에게 명하여 피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웅은 적군이 도착한 것을 보자 박태에게 성 안에서 불을 지르게 하여 신호를 보냈고, 성벽 밖에 사다리를 걸어 외백군을 불러들여 그 부근에 숙부 이상(李驤)의 병사를 매복시켰다. 외백의 병사들은 이를 믿고 사다리에 달려들었지만, 이상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외백이 도주하자 이웅은 이상에게 명하여 외백군을 추격하게 했다. 이상은 성도 소성(成都少城)까지 이르러 만세를 부르며 "피성을 함락했다!"라고 성 안을 향해 외쳤다. 소성의 병사들은 아군이 귀환한 것으로 알고 이상군을 성 안으로 맞이했다. 라상은 이변을 깨닫고 성도 태성(成都太城)으로 철수했지만, 외백은 중상을 입어 생포되었으나 이웅은 이를 용서했다. 그 후 숙부 이상을 검위에 파견하여 라상의 수송로를 끊도록 명했고, 이상은 검위군 태수 습회를 붙잡아 처형했다.

12월, 이웅은 라상이 지키는 성도 태성을 급습했다. 수송로가 끊긴 라상의 군대는 식량이 부족했고, 라상은 아문(牙門) 장라특을 성도 태성에 남겨두고 밤에 틈을 타 도주했다. 장라특은 성문을 열고 이웅에게 투항했고, 이웅은 완전히 성도를 제압했다. 이로 인해 촉(蜀)의 백성들은 흩어졌고, 성도에는 식량이 없었으므로, 이웅은 서현(郪縣)에 병사를 파견하여 야유(野芋) 등을 모아 굶주림을 면했다.

익주의 현자 범장생(范長生)을 영입하려 하였으나 범장생이 거절하여 실패하였다. 당초 이웅은 현지에서 높은 명망을 얻고 있던 도교의 한 분파인 천사도(天師道)의 교조 범장생(范長生)이라는 인물에게 통치를 맡기고 신하가 되려 했으나, 이를 굳게 거절당했다. 304년 10월, 이웅은 여러 부하들의 추대로 성도왕에 즉위하고 연호를 고쳐 건흥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때를 성한이 건국된 기점으로 본다. 건초 2년(304년) 10월, 여러 장수들의 권고를 받아 성도왕을 칭하고 영내에 대사를 내렸으며, 연호를 건흥으로 개원했다.

이웅은 서진의 법을 폐지하고 간략화된 법을 칠장(七章)을 정했다. 숙부 이상을 태부로, 형 이시(李始)를 태보로, 절충장군 이리(李離)를 태위로, 건위장군 이운(李雲)을 사도로, 익군장군 이황(李璜)을 사공으로, 재관장군 이국(李國)을 태재로 삼았고, 그 외의 신하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관작을 수여했다. 증조부 이무를 파군환공(巴郡桓公), 조부 이모를 롱서상왕(隴西襄王), 부친 이특을 성도경왕(成都景王)으로 추존하고, 모친 나씨를 왕태후로 세웠다. 또한 성도에 방문한 범장생을 환영하여 그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고 승상으로 임명하여 "범현(范賢)"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306년 3월에는 범장생이 이웅에게 투신하였고, 이웅은 그를 승상으로 삼았다. 건흥 3년(306년) 6월, 범장생은 이웅에게 존호를 칭할 것을 권했다. 6월에 이르러, 이웅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이웅은 이를 받아들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대사를 내려 안평으로 개원했다. 또한, 국호를 '대성'으로 정했다. 부친 이특을 경제(景帝)로 추존하여 묘호를 시조로 삼았고, 모친 나씨를 황태후로 세웠다. 또한 범장생에게 천지태사의 칭호를 더하고 서산후(西山侯)에 봉하여 그의 사병의 세금을 면제하고, 군정에도 징용하지 않았다.

이 때,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명확한 법식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장수들은 이웅의 총애를 받으려고 서열을 다퉜다. 그리하여 상서령 염식은 한(漢)과 진(晉)의 제도를 참고하여 백관 제도를 정할 것을 권했고, 이웅은 이에 따랐다.

이웅의 치세에는 범장생 등에 의해 을 간소화하고 현명한 정치를 펼쳐 30년 가까운 재위 기간 동안 안정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정실 황후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하여 후궁 소생의 아들 10여 명만 두었으며, 일찍 죽은 형 이탕의 아들인 조카 이반태자로 삼았다. 이로 인해 이웅의 친아들들 사이에 반발이 있었다.

334년에 6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2. 3. 치세와 업적

이웅은 파저족 출신의 무장 이특의 셋째 아들로, 274년에 태어났다. 301년 이특이 거병하자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303년 2월 이특이 전사하자 뒤를 이은 이류 밑에서 활약하였다. 서진익주자사 나상(羅尙)의 군대가 맹공을 가하자 이류는 항복하려 하였으나, 이웅이 반대하여 항복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군대를 이끌고 분투하여 나상의 군대를 압도하였다. 9월 이류가 병사하자 뒤를 이어 대장군·익주목을 자칭하였다.

12월, 이웅은 나상을 물리치고 성도를 점령하였으며, 이후 익주 지역을 장악하였다. 304년 10월, 이웅은 여러 부하들의 추대로 성도왕에 즉위하고 연호건흥으로 고쳤다. 일반적으로 이때를 성한이 건국된 기점으로 본다. 306년 3월에는 범장생이 이웅에게 투신하였고, 이웅은 그를 승상으로 삼았다. 6월, 이웅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성'''(大成)이라 하였다.

이웅의 치세에는 범장생 등에 의해 을 간소화하고 현명한 정치를 펼쳐 30년 가까운 재위 기간 동안 안정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정실 황후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하여 후궁 소생의 아들 10여 명만 두었으며, 일찍 죽은 형 이탕의 아들인 조카 이반태자로 삼았다. 이로 인해 이웅의 친아들들 사이에 반발이 있었다.

334년 6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웅은 즉위 후에도 성(成)에 귀순하지 않던 서진의 남이교위(南夷校尉) 이의를 토벌하기 위한 군대를 파견했다. 안평 2년(307년) 5월, 진주의 유민인 등정과 홍저 등이 서진 토벌군의 파견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자, 이웅은 이리, 이운, 이황에게 2만 명의 병사를 주어 등정을 구원하도록 명령했고, 이들은 파서군 태수 장연이 이끄는 서진군을 격퇴했다. 그 후, 일부 장병들의 배신으로 자통과 파서의 땅은 서진의 익주자사 나상에게 빼앗겼으나, 이웅은 부하 장보에게 자통을 되찾아오라고 명령하여 탈환했다. 안평 5년(310년) 10월, 나상이 병사하자 이웅의 숙부인 이양에 의해 파서의 땅도 탈환되었고, 이웅은 크게 기뻐하며 영내에 대사령을 내려 연호를 옥형으로 개원했다.

옥형 4년(314년) 2월, 양주를 약탈하던 유민 양호가 한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에 항복했다. 게다가 장함 등이 양주에서 거병하여 양주자사를 칭하던 구지의 양난적을 격파하고 양주의 땅을 모두 이웅에게 넘겨주었다. 이웅은 이봉을 양주자사로, 임회를 영주자사로, 이공을 형주자사로 임명했다.

영형 16년(326년), 장준은 사신을 파견하여 이웅에게 존호를 버리고 동진에 칭번할 것을 권했다. 이웅은 답서를 보내 "나는 이전 사대부에게 추대되어 이런 신분이 되었지만, 제왕의 마음은 전혀 없다."라고 말했고, 장준은 이 말을 중히 여겨 이후에도 사신을 왕래시켰다. 이웅은 종종 이러한 일들을 우아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 후 이웅은 중원의 땅이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종종 동진에 조공하여 목제와 천하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옥형 18년(328년), 숙부 이상이 사망하자 아들 이수대장군·서이교위에 임명했다. 옥형 20년(330년) 10월, 이수에게 파동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여 함락시켰다. 옥형 22년(332년), 이웅은 다시 이수에게 명령하여 주제(朱提)를 공격하게 했다. 333년 3월, 영주자사 윤봉이 항복하여 마침내 남중의 땅을 병합했다.

이웅은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현인을 아꼈으며, 그 재능에 맞춰 인재를 등용했다. 성한(成漢)의 형벌과 법령은 관대하고 간결했으며, 학교를 건설하고 사관(史官)을 배치하여 문화 교류에도 힘썼다. 세금은 성인 남자는 1년에 곡식 3석, 성인 여성은 그 절반으로 하였고, 질병자는 본래의 절반으로 정했다. 한 가구당 징수량은 비단이 수 장, 면화도 수 량에 불과했다. 또한, 노동력을 줄였으므로 백성들은 농업에 힘써 저축을 했고, 도적의 발생도 없었다.

2. 4. 후계자 문제와 죽음

이웅은 파저족 출신의 무장 이특의 셋째 아들로, 274년에 태어났다. 301년 이특이 거병하자 그 휘하에서 활약하였으며, 303년 2월 이특이 전사하자, 뒤를 이은 이류의 밑에서 활약하였다. 서진익주자사 나상(羅尙)의 군대가 맹공을 가해 이류는 항복하려 하였으나, 이웅이 반대하여 항복하지 못하게 하였다. 군대를 이끌고 분투하여 나상의 군대를 압도하게 되었다. 9월에 이류가 병사하자 뒤를 이어 대장군·익주목을 자칭하였다.

이웅의 치세에는 범장생 등에 의해 을 간소화하고 현명한 정치를 펼쳐 30년 가까운 재위 기간 동안 안정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정실 황후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하여 후궁 소생의 아들 10여 명만 두었으며, 일찍 죽은 형 이탕의 아들인 조카 이반태자로 삼았다. 이로 인해 이웅의 친아들들 사이에 반발이 있었다.

315년, 이웅은 부인 순씨를 황후로 책봉했다. 순씨는 아들이 없었지만, 이웅은 후궁에게서 10명 이상의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324년에 자신의 조카 이반태자로 책봉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반은 이당의 아들로 순황후가 키웠으며, 이웅은 제국의 기초가 실제로는 이특과 이당에 의해 세워졌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이반의 자애로운 성품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이상과 왕달(王達)은 이 행동이 황위 계승 문제를 야기할 것을 예견하고 반대했지만, 이웅은 그들의 반대를 무시했다.

옥형 14년(324년), 이웅은 이탕의 아들인 이반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이웅에게는 아들이 열 명 남짓 있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은 이웅의 아들을 세울 것을 청했지만, 이웅은 "내가 기병한 것은 다만 화를 털어내기 위함이었고, 본래 제왕의 업을 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천하가 혼란해져 진나라가 유망의 신세가 되었기에, 민중을 고통에서 구하고자 의로운 거사를 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신하들에게 받들여져 왕공 위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본래 사업을 일으킨 것은 선제(이특)의 공적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형은 적장자로 정통을 이을 입장이었고, 덕이 뛰어나고 총명하여 하늘이 선택한 존재였으나, 대사를 이루기 직전에 불행하게도 전사했다. 이반은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성격으로 학문을 좋아하며, 반드시 명군이 될 그릇이다."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이양이 사도 왕달과 함께 간언하며 "적통에 찬탈의 싹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오자는 그의 아들을 버리고 동생을 세운 탓에 전저에 의한 화를 초래했고, 송의 선공은 여이를 세우지 않고 목공을 세운 탓에 송독의 변고를 초래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이 일을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지만, 이웅은 따르지 않고 이반을 태자로 세웠다. 이양은 물러나면서 눈물을 흘리며 "이후 난이 시작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334년 8월,[7] 이웅은 머리 상처가 감염되어 병이 악화되었고, 이로 인해 수년간 앓아온 다른 상처들로 전이되었다. 그의 시신에서 심한 악취가 나서 아들들이 그를 피했지만, 이반은 밤낮으로 그를 간호했다. 옥형 24년(334년) 6월, 이웅은 머리에 종기를 앓았고, 6일 후에 사망했다. 향년 61세였으며, 재위 기간은 30년이었다. 무황제(武皇帝)로 시호되었고, 묘호는 태종, 묘호는 안도릉으로 정해졌다. 그는 8월 13일에 사망했고, 이반이 그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상이 예측했듯이, 이웅의 아들들은 자신이 제쳐진 것에 불만을 품었고, 그 해 말에 그의 아들 이월은 이반을 암살하고 그의 또 다른 아들 이기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기의 통치 하에 성한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3. 가족 관계

이웅은 10명 이상의 아들을 두었다고 전해지지만, 대부분 역사 기록에 언급되지 않았다.


  • 아버지: 이특
  • 어머니: 황태후 뤄씨
  • 황후: 황후 임씨 (315년 책봉)
  • 주요 후궁: 란(蘭) 비 - 이기의 어머니
  • 자녀
  • 이월, 건녕왕 (334년 책봉, 처형)
  • 이패 - 이기 치세에 사망 (독살 추정)
  • 이기 - 후일 황제
  • 이보 - 이기 치세에 사망 (독살 추정)

4. 평가

이웅은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현인을 아꼈으며, 그 재능에 맞춰 인재를 등용했다. 저족(氐族)의 부성(苻成)과 외문/隗文중국어은 한때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켰고, 심지어 이웅의 어머니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다시 항복하자 죄를 용서하고 후하게 대우했다. 이로 인해 이민족과 한족을 가리지 않고 민심이 안정되었고, 그의 위엄은 서토(西土)를 뒤흔들었다고 한다.

성한의 형벌과 법령은 관대하고 간결했으며, 판결이 지연되는 일은 없었다. 학교를 건설하고 사관(史官)을 배치하여 문화 교류에도 힘썼다. 정무에 틈이 나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금은 성인 남자는 1년에 곡식 3석, 성인 여성은 그 절반으로 하였고, 질병자는 본래의 절반으로 정했다. 한 가구당 징수량은 비단이 수 장, 면화도 수 량에 불과했다. 또한, 노동력을 줄였으므로 백성들은 농업에 힘써 저축을 했다. 도적의 발생도 없었다. 이로 인해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자, 이웅은 이에 관대하게 대하도록 명령하고, 귀순한 자들의 노동력과 조세를 면제했다. 이로 인해 익주는 마침내 평안을 되찾았다. 당시 천하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촉(蜀)의 땅만은 평온무사했고, 풍작이 계속되어 치안도 안정되었다.

하지만 성한은 의례와 품위가 정해져 있지 않았고, 작위와 봉록이 명확하지 않았으며, 군자와 소인의 의복에 차이가 없었다. 행군에는 호령이 없었고, 용병에 부대도 없었으며, 승리해도 양보하지 않았고, 패배하면 서로 돕지 않았다. 또한, 성읍을 공략하면 약탈이 우선시되었다고 전해진다.

4. 1. 긍정적 평가

이웅은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현인을 아꼈으며, 그 재능에 맞춰 인재를 등용했다. 저족(氐族)의 부성(苻成)과 외문/隗文중국어은 한때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켰고, 심지어 이웅의 어머니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다시 항복하자 죄를 용서하고 후하게 대우했다. 이로 인해 이민족과 한족을 가리지 않고 민심이 안정되었고, 그의 위엄은 서토(西土)를 뒤흔들었다고 한다.

성한의 형벌과 법령은 관대하고 간결했으며, 판결이 지연되는 일은 없었다. 학교를 건설하고 사관(史官)을 배치하여 문화 교류에도 힘썼다. 정무에 틈이 나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금은 성인 남자는 1년에 곡식 3석, 성인 여성은 그 절반으로 하였고, 질병자는 본래의 절반으로 정했다. 한 가구당 징수량은 비단이 수 장, 면화도 수 량에 불과했다. 또한, 노동력을 줄였으므로 백성들은 농업에 힘써 저축을 했다. 도적의 발생도 없었다. 이로 인해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자, 이웅은 이에 관대하게 대하도록 명령하고, 귀순한 자들의 노동력과 조세를 면제했다. 이로 인해 익주는 마침내 평안을 되찾았다. 당시 천하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촉(蜀)의 땅만은 평온무사했고, 풍작이 계속되어 치안도 안정되었다.

4. 2. 부정적 평가

이웅은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현인을 아꼈으며, 그 재능에 맞춰 인재를 등용했다. 저족(氐族)의 부성(苻成)과 외문(隗文)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다시 항복했지만, 죄를 용서받고 후한 대우를 받았다. 이로 인해 이민족과 한족의 민심이 안정되었다.

하지만 성한(成漢)은 의례와 품위, 작위와 봉록이 명확하지 않았고, 군자와 소인의 의복에도 차이가 없었다. 행군에는 호령이 없었고, 용병에 부대도 없었으며, 승리해도 양보하지 않았고, 패배하면 서로 돕지 않았다. 또한, 성읍을 공략하면 약탈이 우선시되었다고 전해진다.

5. 외부 링크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Zizhi Tongjian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Jin Shu
[8] 서적 十六国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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