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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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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관은 각 시대와 문화권에서 왕족이나 귀족 여성의 신변을 보좌하고 궁중 업무를 수행하던 여성 관직이다. 조선에서는 궁녀가 여관에 해당하며, 내명부에 소속되어 품계를 받고 왕과 왕족을 시중들었다.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뇨칸, 묘부 등의 여관이 존재했으며, 황실 여성의 업무를 보조했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후궁 역할을 겸하기도 했으며, 유럽에서는 왕비나 왕녀를 보좌하는 개인적인 보조자 역할을 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여관 제도가 대부분 사라졌지만, 영국 왕실과 일본 궁내청 등 일부 국가에서 그 역할을 계승하는 직책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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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관직)

2. 조선의 여관

조선시대 여관은 각국의 왕조에서 궁궐 내 군주나 후비의 시중을 들게 하는 여성에게 어떤 관직을 부여한 것에서 시초를 찾을 수 있다. 남성이나 환관도 이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남성 출입이 금지된 후궁이나 후비의 사생활 관리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여성 관인이 필요했다.

여관들은 내명부에 소속되어 종9품의 주변궁(奏變宮)부터 정5품의 상궁까지의 품계를 받아 궁중에서 다양한 직무에 종사했다. 국왕의 측실이 된 경우에는 정1품의 빈(嬪)부터 종4품의 숙원(淑媛)까지의 품계가 주어졌다. 그 외, 품계를 받지 않고 궁중의 직무에 종사하는 비자(婢子), 각심, 방자, 의녀 등이 있었으며, 상궁이나 내관, 의관 등을 보조했다.

여관은 원칙적으로 신분, 선조, 건강 등 엄격한 조건에 따라 선발되었지만, 강제적인 선출이 이루어지기도 하여 문제가 되었다. 현종 치세에는 양인(양반, 중인, 상민)에서 여관을 뽑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는 발언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71] 이후 경종 치세에는 양인으로부터 여관 선발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졌으며[72], 영조 치세인 1746년에는 양인 여성을 여관으로 삼은 것이 발각될 경우 60대의 장형과 1년간의 도죄에 처해졌다.[73]

그러나 국왕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의 자서전인 한중록에 따르면, 혜경궁 홍씨가 허가 없이 양인 여성을 여관으로 채용한 것으로 인해 남편 사도세자가 영조로부터 질책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조가 즉위한 1801년에는 관비 제도가 폐지되어 약 3만 7천 명의 관비들이 해방되어 양인으로 편입되었기[74] 때문에 속대전 내의 조항을 보장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고종·순종을 섬겼던 한 상궁은 "여관 중에서도 지밀, 침방, 수방에 대해서는 거의 중인(양인 중에서 양반 다음 계급) 출신이었다"라는 증언을 남겼다.[75]

여관들은 유소년기에 궁중에 들어가 궁정의 격식과 예의범절, 한글, 소학과 대학 등 다양한 교양을 배웠다.

2. 1. 여관의 선발과 교육

여관은 보통 상민 출신의 어린 소녀들과 양반의 사노비 중에서 선발되었다. 이후에는 정부 노비, 귀족 첩의 딸(전직 기생 또는 노비) 등도 후보로 뽑혔다.[35] 왕과 왕비의 내전에 관련된 나인의 임명 과정은 고위 궁녀들이 추천과 연줄을 통해 직접 채용하는 방식이었다. 재봉 및 자수와 같은 특정 기술을 가진 부서의 나인은 중인 출신이었으며, 궁녀의 최하층은 천민 출신이었다.[35]

궁에 들어갈 때 4세 정도일 수 있으며, 궁중 언어와 예절을 배우면 나인으로 승진했다. 15년 이상 궁에 봉사하면 더 높은 직급으로 승진했지만, 상궁의 직급을 얻으려면 최소 35년 이상 근무해야 했다.[35]

2. 2. 여관의 역할과 계급

여관은 지밀, 침방, 수방 등 다양한 부서에서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상궁(정5품)을 최고위로 하는 품계 체계를 가졌다.[35] 시녀는 보통 상민 출신의 어린 소녀나 양반의 사노비 중에서 선발되었다. 이후에는 정부 노비, 귀족의 첩(전직 기생 또는 노비)의 딸 등도 후보가 되었다. 왕과 왕비의 내전에 소속된 나인은 고위 궁녀들의 추천과 연줄로 채용되는 등 선발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재봉, 자수 등 특정 기술이 필요한 부서의 나인은 중인 출신이었고, 궁녀 최하층은 천민 출신이었다. 궁에 들어가는 나이는 4세 정도였으며, 궁중 언어와 예절을 배우면 나인으로 승진했다. 15년 이상 근무하면 상위 직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으나, 상궁이 되려면 최소 35년 이상 근무해야 했다.

궁녀가 왕의 총애를 받으면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은 최고 직급(정5품)으로 승진하여 승은 상궁(총애받는 궁녀)이라 불렸다. 아들을 낳으면 숙원(종4품)으로 승진하여 왕족이 되었으며, 18세기까지는 왕비가 될 수도 있었다(대표적인 예는 조선 숙종의 후궁이자 조선 경종의 어머니인 장옥정이다).

2. 3. 여관의 삶과 애환

여관은 궁궐 안에서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들은 대개 상민 출신의 어린 소녀들이나 양반 가문의 사유 노비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나중에는 정부 노비, 귀족의 첩의 딸(전직 기생 또는 노비) 등도 여관 후보로 뽑혔다.[35]

궁녀들은 궁중 언어와 예절을 배우며 성장했고, 15년 이상 궁에 봉사하면 더 높은 직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최소 35년 이상 근무해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35]

궁녀는 왕의 총애를 받으면 후궁이 될 수 있었는데, 이들을 ''승은 상궁''이라 불렀다. 아들을 낳으면 숙원(종4품)으로 승진하여 왕족의 일원이 되었으며, 18세기까지는 왕비가 될 수도 있었다. 장옥정이 대표적인 예시이다.[35]

궁녀들의 삶은 고독하고 힘들었지만, 전문성을 갖춘 여성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3. 일본의 여관

일본에서 여관은 시대에 따라 그 역할과 명칭이 변화했다. 8세기 율령법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궁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고닌 연간(810년 ~ 824년)에 편찬된 고닌격식과 내리식에 '여관'이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여성 관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61] 유직고실에서는 고위 여관을 "뇨칸(にょかん)", 잡무를 맡은 여관을 "뇨우칸(にょうかん)"이라고 불렀으며, 1869년 이후에는 "죠칸(じょかん)"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62]

헤이안 시대(794–1185)에는 여성이 천황의 업무를 관리하는 등 상당한 책임이 있는 관직을 맡았다.[32] 이들은 궁정 귀족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중국 고전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33]

센고쿠 시대(1467–1603) 시녀의 최고 직위는 '대참의 여성 보좌관'으로 황실의 일상생활을 관리했다.[32] 두 번째 직위는 고토노나이시|일본어로, 천황과 알현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재하고 천황의 뜻을 서면으로 전달했다.[32] 시녀는 황실 비서 역할도 수행하며 공식 궁정 일지에 행사, 방문객, 선물 등을 기록했다.[32]

중국과 달리 일본의 여성 궁궐 수행원은 내시가 아닌 황실 후궁을 관리했으며, 천황의 개인 가계에서 높은 관직을 맡을 수 있었다.[33] 이들은 두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첫 번째는 nyokan일본어으로 불리는 관직을 가진 시녀들이었고, naishi-kami일본어 (shoji일본어), naishi-suke일본어 (tenji일본어), naishi-no-jo일본어 (shoji일본어) 등이 있었다. 두 번째 계급은 myobu일본어, osashi일본어, osue일본어, nyoju일본어 등이었다.[34] 시녀는 천황의 의복, 목욕, 식사, 궁정 의식 등을 보조했다.

3. 1. 헤이안 시대와 에도 시대의 여관

헤이안 시대에는 구로도코로(蔵人所) 설치로 여관이 담당하던 직무를 남성 관인이 수행하게 되었고, 천황이 직접 참여하지 않는 정무와 의례가 늘어나면서 천황을 따라 정무와 의례에 참여하던 여관의 역할도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후궁12사는 기능이 축소되어 최종적으로 내시사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천황의 식사나 사적인 제사는 여관이 담당한다는 생각은 이후에도 남아 여관 제도가 계속 유지된 배경으로 보인다.[63]

후비나 천황을 섬긴 뇨보가 여성 관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뇨보가 모두 여관제목으로 서위임관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으며, 후비와 사적으로 주종 관계를 맺은 여성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난보쿠초 시대 이후에는 천황의 생모를 제외하고는 서위임관을 받는 경우가 없어졌고, 후비를 세우는 일도 없어졌기 때문에 많은 뇨보가 천황의 측실을 겸하고 있었다.

에도 시대에는 여관을 뇨보와 죠츄(女中)로 나누었다. 죠츄 중에서도 나이시노카미/나이시노스케/나이시노죠를 오츠보네(御局), 묘부/뇨쿠로우도(女蔵人)/오사시(御差)를 오시모(御下)라고 불렀다. 오츠보네는 천황과 직접 대화가 가능했고, 오시모는 눈으로 보는 것만 가능했으며, 그보다 하위에 있는 죠츄인 오스에(御末)/뇨쥬(女孺)/고후쿠쇼(御服所)는 천황과 만날 수도 없었다.[64] 같은 시기 센토 고쇼와 뇨인 고쇼에서는 죠로(上臈)/츄로(中臈)/게로(下臈)를 구분했는데, 죠로는 나이시노카미/나이시노스케 상당, 츄로는 나이시노죠 상당, 게로는 오시모 상당으로 여겨졌다.[64] 사쿠라마치 천황 시대에는 여관 제도 개혁이 이루어져 1743년에는 여관에 대한 서위가 부활했다. 나이시노스케는 원칙적으로 서위 대상이었고, 나이시노죠도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서위 대상이 되었다. 이전에도 천황의 생모나 오랜 공로 등으로 개인에게 서위가 이루어졌지만, 여성 서위의 기준이 정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65]

에도 시대에는 여관 전체를 "죠츄(女中)", "뇨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어 실제 사용에는 호환성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무가(쇼군가나 다이묘가)의 오쿠(奥)를 섬기는 여성은 "죠츄"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일본 근세사 학술 용어로는 공가와 무가를 불문하고 오쿠를 섬기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전제로, 조정을 섬기는 여성에 대해서도 "여관" 대신 "죠츄"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죠츄"에는 여관 제도에 포함되지 않는 궁궐이나 원을 섬기는 여성도 포함된다.[66]

3. 2. 메이지 시대 이후의 여관

메이지 시대에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여관 제도가 변화하였다. 메이지 천황쇼켄 황태후를 모시던 쿠제 미치코가 출사했던 1909년 당시 여관 현황은 다음과 같다.[68]

여관장 텐지 타카쿠라 토시코 (1840년 - 1930년). 여관 이름은 신쥬(新樹)). 쇼켄 황태후 입내부터 붕어까지 측근으로 평생 섬겼다.


직책이름비고
여관장 텐지타카쿠라 토시코겐지나: 신쥬(新樹) (1840~1930)
텐지야나기와라 나루코사와라비(早蕨) (다이쇼 천황의 생모. 1855~1943)
곤텐지치구사 코토코키쿄 → 하나마츠(桔梗→花松) (천황과의 사이에서 2명을 낳음. 1855~1944)
곤텐지오구라 후미코히자쿠라(緋桜) (1861~1929)
곤텐지소노 사치코코기쿠(小菊) (천황과의 사이에서 8명을 낳음. 1867~1947)
곤텐지아네노코지 요코후지바카마(藤袴) (아네노코지 킨마에의 딸. 1856~1926)
곤텐지신토쿠이마소노 후미코시라하기(白萩) (메이지 천황의 마음에 들지 않아, 1912년에 자기 사정으로 관직에서 내려옴. 1889~1936)
나이시노죠코이케 미치코야나기(柳) (미토번사의 딸로, 도쿠가와 사다코의 교육담당. 아리스가와노미야가 출사. 1845~1929)
곤나이시노죠야부 카네코모미지(紅葉)
곤나이시노죠츠모리 요시코와카나(若菜)
곤나이시노죠요시다 카타코나데시코(撫子) (1863~1936)
곤나이시노죠아와타구치 아야코히루가오(昼顔) (아와타구치 사다타카의 3녀. 1880~1955)
곤나이시노죠신토쿠→곤나이시노죠히노니시 카오루코사잔카(山茶花) (1879~)
곤나이시노죠 오야토이→곤나이시노죠신토쿠쿠세 미치코사쿠라기(桜木) (후의 야마카와 미사오의 양자 야마카와 시즈카와 결혼. 1892~1965)
고요가카리곤나이시노죠야마카와 미사오프랑스어 통역. 아이즈번사・야마카와 시게카타의 차녀. 야마카와 켄지로, 오오야마 스테마츠의 누나
고요가카리곤나이시노죠키타시마 이토코영어 통역. 나베시마 나오히로의 시녀
고요가카리곤나이시노죠 대우카가와 시호코쿠레타케(呉竹). 영어 통역. 카가와 케이조의 장녀
묘부니시노 니시코칸(菅)
곤묘부이쿠겐지 이사오코즈에(梢). 히요시타이샤 사가 출신
곤묘부히라타 산에츠타(蔦)
곤묘부키노시타 사다에마츠(松)
곤묘부다이토 토요코우스(薄)
곤묘부후지시마 타케코타케(竹)
곤묘부 출사키노시타 마키코마키(槇)
곤묘부 출사이쵸 시즈코하기(萩)



화족 출신 13명, 사족 출신 고등관 대우 10명에게는 천황이 지은 여관 이름(겐지나)이 있었고, 별명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68] 뇨쥬로 불리는 판임여관 (사족 출신)은 30여 명 있었다.[68]

메이지 시대의 여관으로는 그 외에도 하무로 미츠코 (텐지), 하시모토 나츠코 (텐지), 요츠츠지 키요코 (텐지)와 시모다 우타코 (사족 출신의 첫 여관), 사이쇼 아츠코, 나베시마 나가코 (결혼 전), 마츠다이라 노부코 (통역), 미부 히로코 (나이시노죠), 나카가와 에이코 (나이시노죠 대우), 롯카쿠 쇼코 (곤나이시노죠), 호리카와 타케코 (묘부), 요시다 아이 (곤묘부) 등이 있었다.

쇼와 천황 시대에는 여관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져 기혼 여성도 여관이 될 수 있게 되었고, 거주제가 폐지되어 자택에서 통근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4. 중국의 여관

중국에서는 한나라(기원전 202년–서기 220년) 때부터 황제의 후궁을 겸하는 궁녀 제도가 발달했다.[8] 궁녀는 '궁녀', '궁중 여인', '시녀' 등으로 불렸으며, 황제는 이들을 공식적인 첩, 후궁, 심지어 황후의 지위까지 승진시킬 수 있었다.[8]

최소한 송나라(960–1279) 시대에는 궁궐 여인이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황실 여인(후궁과 비빈), 황실 딸(황제의 딸과 누이), 여성 관료 및 보좌관이었다.[9]

명나라(1368–1644) 시대에는 송나라와 거의 같은 세 가지 범주로 궁녀를 분류했지만,[10] 여성 관리와 보좌관은 육국(六局)이라는 여섯 개의 정부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육국은 총무국, 수공국, 의례국, 거실국, 의복국, 식국이다.[11] 이 모든 조직은 여성 관리가 수장으로 있는 내관감(內官監)의 감독을 받았다.[12] 이들은 궁궐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명나라 시대에는 궁중 서비스 산업과 황실 후궁의 하위 계급 사이에 빈번한 이동이 있었다.[17] 황제는 종종 황실 시녀 중에서 소후궁을 선택했지만, 선택된 여성 중 극소수만이 후궁 구조의 상위 계급에 도달하거나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18]

명나라가 진행되면서 궁녀의 생활 및 근무 조건은 악화되기 시작했다.[19]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가혹한 생활 환경과 처벌은 결국 시녀 집단이 가정제를 상대로 암살 시도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21]

청나라(1644–1912) 시대에도 궁녀 제도는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었는데, 이전에는 다른 직책을 맡지 않았던 후궁이나 첩 역할을 하는 황실 여성 계급이 존재했다. 여성 궁정 시녀들 또한 황제에 의해 첩이나 후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26]

5. 유럽의 여관

유럽 궁정에서 여관은 왕비(여왕)나 왕녀 등 고귀한 여성을 섬기고, 신변 용무에 응하는 개인적인 보조자를 말한다. 여관은 보통 주인보다 낮은 계급이지만, 귀족 출신이며 하인은 아니다. 여관의 역할은 궁정에 따라 다양했다.

튜더 왕조 잉글랜드에서는 여관이 4가지 시스템으로 나뉘었다. "그레이트 레이디(great lady)", "레이디 오브 더 프라이비 체임버(lady of privy chamber, 사생활 담당 여관)", "메이드 오브 아너(maid of honour)", "체임버러(chamberer)"이다. 사생활 담당 여관은 왕비(여왕)와 가장 가까웠지만, 대부분의 여관은 메이드 오브 아너였다. 여관은 왕비가 가장 신뢰하는 존재여야 했기에 친척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거릿 리는 앤 불린의 사생활 담당 여관이었고, 엘리자베스 시모어도 제인 시모어의 사생활 담당 여관이었다. 튜더 왕조에서 여관의 역할은 왕족을 상대로 어디서든 왕비를 모시는 것이었다. 튜더 왕조의 왕비는 누가 자신의 여관이 될지에 대해 상당한 발언권을 가졌다.

부르봉 왕가 후기, 여관들은 종종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나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명목상 거리를 둔 동반자 역할을 했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몇몇 총애받는 여관이 있었는데, 특히 폴리냑 백작 부인 등은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막대한 부를 얻었다.

오늘날 영국 왕실에서 여왕 또는 왕비를 보좌하는 시녀는 "레이디 오브 더 베드 체임버(lady of the bedchamber)" 또는 "우먼 오브 더 베드 체임버(women of the bedchamber)"라고 하며, 상급 여관은 "미스트리스 오브 더 로브스(mistress of the robes)"라고 한다. 우먼 오브 더 베드 체임버는 항상 대기하지만, 미스트리스 오브 더 로브스와 레이디 오브 더 베드 체임버는 보통 관혼상제 등의 행사에만 참석한다. 여왕(왕비) 외 왕실 여성 구성원을 시중드는 여관은 레이디 인 웨이팅(lady in waiting)이라고 한다.

6. 현대 사회의 여관

오늘날 영국 왕실에서 여왕 또는 왕비를 보좌하는 시녀는 "침실의 귀부인(Lady of the Bedchamber)" 또는 "침실의 여성(Woman of the Bedchamber)"이라고 하며, 상급 여관은 "의상 담당 귀부인(Mistress of the Robes)"이라고 한다. 침실의 여성은 상시 대기하지만, 의상 담당 귀부인과 침실의 귀부인은 통상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특별한 행사에만 참석을 요청받는다. 여왕(왕비) 외의 왕실 여성 구성원을 수행하는 여관은 "대기 시녀(Lady-in-Waiting)"라고 한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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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웹사이트 高倉寿子 https://kotobank.jp/[...] 20世紀日本人名事典
[68] 서적 女官 講談社学術文庫
[69] 웹사이트 四辻清子 https://kotobank.jp/[...]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
[70] 뉴스 知られざる天皇家の「闇」をあぶり出した、ある女官の手記 https://gendai.media[...] 現代ビジネス
[71] 朝鮮王朝実録 南九萬等啓: "以宮女抄擇、令刑曹依法典、以各司下典、而別監私出閭閻、抄擇良人之弊、昨日仰陳於榻前、而自上以三醫司外、令刑曹抄入事爲敎、臣等欽仰殿下革弊之盛意、而猶惜其不能痛祛起弊之端也。祖宗舊制、只擇各司下典、以充下陳、其時亦未嘗以使令之不足爲患。今殿下、何獨於選宮女、必踰舊制、而延及良人、留作日後之弊哉?請宮人選擇、只以各司下典、罷良人抄入。」
[72] 朝鮮王朝実録 廷臣相與言曰:「…'''停良家女選充宮人之令'''、…。」
[73] 문서 大典会通
[74] 朝鮮王朝実録 乙巳/敎曰:「先朝以內奴婢、寺奴婢、嘗欲革罷、予當繼述、自今一倂革罷。其給代、令壯營擧行。」仍令文任、代撰綸音曉諭。仍命承旨、取內司、各宮房、各司奴婢案、燒火于敦化門外、 合三萬六千九百七十四口、案冊一百六十卷。案冊一千二百九卷。】
[75] 서적 朝鮮朝宮中風俗の研究 法政大学出版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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