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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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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리건 조약은 미국과 영국 간의 오리건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846년 6월 15일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북위 49도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 간의 경계를 확정했으며, 밴쿠버 섬을 제외한 오리건 컨트리 지역을 미국에 귀속시켰다. 조약 체결 이후, 샌후안 제도 영유권을 둘러싼 돼지 전쟁이 발발하는 등 국경선 획정에 대한 해석 차이로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1872년 중재를 통해 샌후안 제도는 미국에 귀속되었다. 오리건 조약은 현재 미국과 캐나다 간의 국경선 설정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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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조약
조약 정보
이름오리건 조약
정식 명칭영국 폐하와 미합중국 간의 오리건 경계 설정을 위한 조약
미국 내 명칭로키산맥 서쪽 한계에 관한 영국과의 조약
다른 이름뷰캐넌-패켄햄 조약
(다른 관련 없는 조약들과 같은 이름) 워싱턴 조약
유형양자 조약
맥락오리건 경계 분쟁 해결
서명일1846년 6월 15일
서명 장소워싱턴 D.C., 미국
서명 당사자영국
미국 (1846)
언어영어
위키소스오리건 조약 (영문)
지도
분쟁 지역 지도
분쟁 지역 지도
배경
분쟁오리건 컨트리에 대한 영토 분쟁
주요 쟁점북위 49도선
컬럼비아 강 항해권
밴쿠버 섬 소유권
이전 조약1818년 조약: 오리건 컨트리의 공동 점유 설정
내용
경계선북위 49도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후에 캐나다)의 국경 확정
예외밴쿠버 섬 전체는 영국령으로 남음
항해권후안 데 푸카 해협과 컬럼비아 강 남쪽 수로에 대한 영국 선박의 항해권 보장
아메리카 원주민 권리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 및 권리 존중 조항 포함
결과
영토 변화미국: 현재의 오리건 주, 워싱턴 주, 아이다호 주 대부분, 몬태나 주 일부, 와이오밍 주 일부 획득
영국: 밴쿠버 섬 전체 획득, 브리티시컬럼비아 본토 일부 확정
후속 분쟁산 후안 제도의 소유권 분쟁으로 "돼지 전쟁" 발발 (1859년)
조약 비준양국 의회 비준 후 발효
서명자
영국 대표리처드 패켄햄 (주미 영국 공사)
미국 대표제임스 뷰캐넌 (미국 국무장관)

2. 역사적 배경

1818년 조약 이후 미국영국은 로키 산맥 서쪽의 광활한 오리건 컨트리 지역을 공동으로 점유했으나, 이는 잠정적인 합의에 불과했다.[2] 시간이 흐르며 양국 간의 이해관계 충돌로 공동 점유 체제 유지가 어려워졌고, 영유권 분쟁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었다.

미국 내 팽창주의 여론이 확산되면서 오리건 전체 영토 확보 주장이 힘을 얻었다. 영국이 북위 49도선을 경계로 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자, 일부에서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와의 경계인 북위 54°40′ 선까지의 영토 확장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46년 발발한 멕시코-미국 전쟁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에 집중해야 했고, 대영 제국과의 추가적인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자 하면서 오리건 문제에 대한 외교적 타결의 필요성이 커졌다.[3] 이는 결국 양국 간 타협을 통해 오리건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2. 1. 오리건 경계 분쟁

1818년 조약미국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경계를 미네소타에서 당시 "스토니 산맥"이라 불리던 로키 산맥까지 북위 49도선을 따라 설정했다.[2] 로키 산맥 서쪽 지역은 미국인에게는 오리건 컨트리로, 영국인에게는 허드슨 베이 회사의 컬럼비아 부 또는 컬럼비아 지구로 알려졌다. 이 지역에는 뉴 칼레도니아의 남부도 포함되었다. 이 조약은 해당 지역에 대해 10년간 공동 관리를 규정했으며, 양국은 토지를 주장할 수 있었고 자유로운 항해도 보장받았다.

오리건 조약 원본.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보관.


그러나 공동 관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양측 모두에게 점점 더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영국 측이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존 타일러가 제안한 북위 49도선을 경계로 설정하자는 제안을 거부하자,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은 당시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남쪽 경계였던 북위 54°40′ 선까지 오리건 컨트리 전체 지역의 합병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는 러시아 제국과 미국(1824년), 영국(1825년) 간의 조약으로 설정된 경계선이었다.

상황은 1846년 4월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면서 변화를 맞았다.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관심과 군사 자원이 남쪽으로 집중되자, 워싱턴 D.C.에서 진행 중이던 영국과의 협상에서 타협안이 모색되었다. 포크 행정부는 자국 내 강경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영 제국과의 또 다른 전쟁을 피하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타협을 선택했다.[3]

이후 협상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뷰캐넌(훗날 대통령이 됨)과 영국의 미국 특명 전권공사이자 추밀원 의원이었던 리처드 패이컨엄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1846년 6월 15일 오리건 조약이 체결되었다.

오리건 조약은 북미 대륙에서 미국과 영국의 경계를 밴쿠버섬을 제외하고 북위 49도선으로 확정했다. 밴쿠버섬 전체는 영국령이 되었으며, 허드슨 베이 회사는 콜롬비아 강의 이용 권리를 유지했다. 훗날 캐나다가 성립된 후, 이 북위 49도선워싱턴 주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사이의 미국-캐나다 국경이 되었다. 조약에 따라 미국령이 된 지역은 1848년 8월 14일 오리건 준주로 편입되었다.

한편, 조약은 후안 데 푸카 해협의 경계를 '주요 수로'(the main channel)로 정의했는데, 이 수로의 위치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해석 차이로 인해 조지아 해협에 위치한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1859년, 이 불명확한 해상 경계는 산후안 제도를 둘러싼 군사적 대치인 돼지 전쟁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2. 2. 미국의 팽창주의와 54도 40분 슬로건

1818년 조약미국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경계를 미네소타에서 당시 "스토니 산맥"(현재의 로키 산맥)까지 북위 49도를 따라 설정했다.[2] 이 산맥 서쪽 지역은 미국인에게는 오리건 컨트리로, 영국인에게는 허드슨 베이 회사의 컬럼비아 부 또는 컬럼비아 지구로 알려졌으며, 10년 동안 공동 관리가 합의되었다. 양국은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고 자유로운 항해가 보장되었다.[2]

그러나 공동 관리는 양측 모두에게 점차 어려움을 야기하며 긴장을 높였다. 영국 정부는 미국 대통령 존 타일러와 이후 제임스 K. 포크가 제안한 북위 49도를 기준으로 경계를 설정하자는 안을 거부했다. 이에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은 러시아 제국과 미국(1824년) 및 영국(1825년) 간의 조약으로 설정된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남쪽 경계인 북위 54°40′ 선까지 오리건 지역 전체의 합병을 강력히 요구했다.

상황은 1846년 4월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면서 변화했다.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관심과 군사 자원이 남쪽으로 집중되자, 워싱턴 D.C.에서 진행 중이던 영국과의 협상에서 타협안이 모색되었다. 포크 행정부는 자국 내 강경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와의 전쟁 중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대영 제국과 또 다른 전쟁을 벌이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결국 타협을 선택했다.[3]

2. 3. 멕시코-미국 전쟁과 외교적 해결

1818년 조약에 따라 미국영국령 북아메리카는 미네소타에서 로키 산맥까지의 국경을 북위 49도로 설정했지만, 로키 산맥 서쪽 지역에 대해서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2] 이 지역은 미국인들에게는 오리건 컨트리로, 영국인들에게는 허드슨 베이 회사의 컬럼비아 부 또는 컬럼비아 지구로 알려졌으며, 10년간 양국의 공동 관리에 들어갔다. 양측 모두 해당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으며 자유로운 항해가 보장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공동 관리는 양측 모두에게 점점 더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영국 측이 미국 대통령 존 타일러제임스 K. 포크북위 49도를 국경으로 하자는 제안을 거부하자,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은 러시아령 아메리카와의 남쪽 경계였던 북위 54도 40분까지 오리건 컨트리 전체의 합병을 요구하며 "54도 40분 아니면 전쟁 (Fifty-Four Forty or Fight!)"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1846년 4월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미국의 관심과 군사 자원이 멕시코 방면으로 집중되자, 포크 행정부는 대영 제국과의 또 다른 전쟁을 피하기 위해 영국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이는 포크 행정부 내 강경파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3]

결국 워싱턴 D.C.에서 진행 중이던 협상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협상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제임스 뷰캐넌과 영국의 미국 특명 전권공사이자 추밀원 의원이었던 리처드 패이컨엄이 진행했다. 1846년 6월 15일, 마침내 오리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밴쿠버섬 전체를 영국령으로 귀속시키는 것을 제외하고,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국경을 북위 49도선으로 확정했다. 이 경계선은 이후 캐나다가 성립되면서 워싱턴브리티시컬럼비아 사이의 미국-캐나다 국경의 일부가 되었다. 조약에 따라 미국에 귀속된 지역은 1848년 8월 14일 오리건 준주로 편입되었다.

조약에서 후안 데 푸카 해협의 경계를 '주요 수로'(the main channel)로만 정의했기 때문에, 이 수로의 위치와 해석에 대한 양국의 이견은 결국 조지아 해협 내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이어졌고, 1859년 돼지 전쟁이라는 위기를 초래했다. 한편, 조약은 허드슨 베이 회사가 콜롬비아 강을 계속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다.

3. 조약 협상 및 체결

미국과 영국 간의 오리건 컨트리 공동 점유는 양측의 긴장을 꾸준히 높이는 원인이었다. 영국이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가 제안한 북위 49도선을 국경으로 설정하자는 안을 거부하자, 미국 내 영토 확장론자들은 오리건의 북쪽 경계인 북위 54도 40분까지 모든 영역의 통합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멕시코-미국 전쟁 발발로 미국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하면서 영국과의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었다.

조약 협상은 당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뷰캐넌과 영국 특사 리처드 패이컨엄이 진행했다. 조약은 1846년 6월 15일에 최종 서명되어 공동 점유 상태를 공식적으로 종료시켰다.[6]

오리건 조약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국경을 밴쿠버 섬 전체를 영국령으로 하는 예외를 두고 북위 49도선으로 확정했다. 이 조약으로 북위 49도선 남쪽 주민은 미국 시민이, 북쪽 주민은 영국 시민이 되었다.[6] 미국에 귀속된 지역은 1848년 8월 14일 오리건 준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조약은 후안 데 푸카 해협의 경계를 '주요 수로'로 모호하게 정의하여[7] 향후 산후안 제도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돼지 전쟁)의 씨앗을 남겼다.[8] 또한, 조약은 허드슨 베이 회사의 콜롬비아 강 항행권을 보장했다.

3. 1. 협상 과정

1846년 6월 초, 영국은 로키 산맥 서쪽 지역에서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 간의 경계를 협상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해 미국 상원 내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찰스 고든 애서턴과 베닝 웬트워스 제네스와 같은 일부 의원들은 호전적이었으며 영국의 협상 제안을 거부하는 것을 지지했다. 반면, 앨라배마주의 아서 P. 배그비와 딕슨 홀 루이스, 매사추세츠주의 대니얼 웹스터와 존 데이비스 등 다른 의원들은 영국의 제안을 수용하는 것을 지지했다.

상원은 폴크 대통령에게 영국의 협상 제안을 수용할 것을 권고할지 여부에 대해 투표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이 투표가 상원을 통과하기를 바라며 면밀히 지켜보았다. 1846년 6월 12일, 상원은 폴크 대통령에게 이 경계에 대한 영국의 협상 제안을 수용할 것을 권고하는 38 대 12의 투표를 했다. 찬성표에는 민주당원 18명과 휘그당원 20명이 포함되었으며, 반대표에는 민주당원 11명과 휘그당원 1명이 포함되었다. 민주당원 3명과 휘그당원 3명이 기권했다.[4]

조약 협상은 미국의 국무장관이자 미래 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과 미국 주재 영국 특사인 리처드 파켄햄이 맡았다. 영국에서는 외무 장관 애버딘 백작이 의회에서 이 조약을 담당했다.[5] 조약은 1846년 6월 15일에 서명되어 공동 점유가 종료되었고, 북위 49도선 이남의 오리건 거주민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으며, 그 이북의 사람들은 영국 시민이 되었다.[6]

오리건 조약은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경계를 북위 49도선으로 정했으며, 밴쿠버 섬은 예외로 하여 영국이 전부 소유했다. 밴쿠버 섬은 모든 해안 섬들과 함께 1849년에 밴쿠버 섬 식민지로 구성되었다. 미국의 해당 지역은 1848년 8월 15일에 오리건 준주로 조직되었고, 워싱턴 준주는 1853년에 오리건 준주에서 분리되어 형성되었다. 영국령 지역은 1858년까지 미조직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프레이저 협곡 골드 러시와 재차 주장된 미국의 팽창주의적 의도에 대한 우려로 인해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가 설립되었다. 두 영국 식민지는 1866년에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로 통합되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가 1871년에 캐나다에 합류하면서, 오리건 조약에 의해 설정된 북위 49도선 및 해양 경계는 캐나다-미국 국경이 되었다.

영국이 밴쿠버 섬과 남부 걸프 제도를 모두 보유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국경이 그 지역 주변으로 남쪽으로 꺾이기로 합의했다. 샌후안 제도를 포함한 여러 해협 섬의 소유권은 분쟁 상태로 남아 있었다. 1859년 샌후안 제도의 소유권을 두고 돼지 전쟁이라는 유혈 사태 없는 대립이 발생했으며, 이 문제는 1872년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수장으로 하는 3인 중재 위원회에서 중재가 시작되었다.[7] 1872년 10월 21일, 위원회는 미국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고, 샌후안 제도를 미국에 할당했다.[8]

3. 2. 상원 비준

1846년 6월 초, 영국은 로키 산맥 서쪽 지역에서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경계를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찰스 고든 애서턴과 베닝 웬트워스 제네스와 같은 일부 미국 상원 의원들은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영국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앨라배마주 상원 의원인 아서 P. 배그비와 딕슨 홀 루이스, 매사추세츠주 상원 의원인 대니얼 웹스터와 존 데이비스 등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을 지지했다. 상원은 폴크 대통령에게 영국의 협상 제안 수용을 권고할지 여부를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영국은 이 투표 결과에 주목했다. 6월 12일, 상원은 38 대 12로 폴크 대통령에게 영국의 경계 협상 제안을 수용하도록 권고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찬성표는 민주당원 18명과 휘그당원 20명이었고, 반대표는 민주당원 11명과 휘그당원 1명이었다. 민주당원 3명과 휘그당원 3명은 기권했다.[4]

3. 3. 조약 체결 (1846년 6월 15일)

미국과 영국 간의 공동 점유 상태는 양측의 긴장을 꾸준히 높였다. 영국이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가 제안한 북위 49도선을 국경으로 설정하자는 안을 거부하자, 미국 내 영토 확장론자들은 오리건의 북쪽 경계인 북위 54도 40분까지 모든 영역의 통합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관심과 군사 자원이 멕시코 방면으로 집중되자, 영국과의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었다.

조약 협상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으며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뷰캐넌과 미국 주재 영국 특명 전권공사이자 추밀원 의원인 리처드 패이컨엄이 진행했다. 영국 외무장관 애버딘 백작이 영국 의회에서 이 조약을 담당했다.[5] 조약은 1846년 6월 15일에 최종 서명되었으며, 이로써 양국의 공동 점유 상태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6]

오리건 조약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국경을 북위 49도선으로 확정했다. 다만, 밴쿠버 섬 전체는 영국령으로 귀속되는 예외가 적용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북위 49도선 남쪽에 거주하던 오리건 주민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고, 북쪽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영국 시민이 되었다.[6] 미국에 귀속된 지역은 1848년 8월 14일(또는 8월 15일[6]) 오리건 준주로 편제되었으며, 이후 1853년에는 오리건 준주에서 워싱턴 준주가 분리되어 형성되었다.

영국령이 된 지역 중 밴쿠버 섬과 주변 섬들은 1849년 밴쿠버 섬 식민지로 구성되었다. 본토의 영국령 지역은 1858년까지 미조직 상태로 남아 있다가, 프레이저 협곡 골드 러시와 미국의 팽창주의적 의도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가 설립되었다. 두 영국 식민지는 1866년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로 통합되었고, 이 식민지가 1871년 캐나다 연방에 가입하면서 오리건 조약으로 설정된 북위 49도선과 해양 경계는 오늘날의 캐나다-미국 국경의 일부가 되었다.

한편, 조약은 후안 데 푸카 해협의 경계를 '주요 수로'(the main channel)로 정의했는데, 이 수로의 위치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해석 차이는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 분쟁을 야기했다. 영국은 밴쿠버 섬과 남부 걸프 제도를 확보하기 위해 국경선이 해당 지역을 우회하여 남쪽으로 꺾이도록 합의했으나, 산후안 제도의 귀속 문제는 여전히 불명확하게 남았다. 이 문제는 결국 1859년 돼지 전쟁이라는 무력 충돌 없는 대치 상황으로 이어졌고, 1872년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수장으로 하는 3인 중재 위원회의 중재가 이루어졌으며,[7] 1872년 10월 21일 위원회는 미국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산후안 제도를 미국 영토로 결정했다.[8] 또한, 조약은 허드슨 베이 회사가 콜롬비아 강을 계속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다.

4. 조약 내용

영국과의 공동 점유 상태에서 비롯된 긴장은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북위 49도선 국경 제안 거부와 영토 확장론자들의 요구로 고조되었다. 그러나 멕시코-미국 전쟁 발발 가능성으로 인해 타협이 이루어졌다.

조약은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뷰캐넌과 영국 특명 전권공사 리처드 파켄햄의 협상 끝에 1846년 6월 15일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밴쿠버섬을 제외한 북위 49도선을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경계로 확정하는 것이었다. 밴쿠버섬 전체는 영국령으로 남았고, 미국령이 된 지역은 1848년 오리건 준주로 편입되었다.

조약은 후안 데 푸카 해협의 경계를 '주요 수로'로 모호하게 정의하여 훗날 산후안 제도 영유권 분쟁(돼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후안 데 푸카 해협에서의 항해권 및 허드슨 베이 회사영국인의 재산권 보호 조항 등도 포함되었다.[9]

4. 1. 경계 확정

영국과의 공동 점유 상태는 양측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북위 49도선을 국경으로 제안했으나 영국이 이를 거절하자, 미국의 영토 확장론자들은 오리건 지역 전체, 즉 북쪽 경계인 북위 54도 40분까지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멕시코-미국 전쟁 발발 가능성이 커지면서 미국의 관심과 군사적 자원이 남쪽으로 향하게 되자 영국과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으며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뷰캐넌과 미국 주재 영국 특명 전권공사인 리처드 파켄햄 사이의 협상을 통해 마련되었다. 영국 외무장관 애버딘 백작은 영국 의회에서 이 조약의 처리를 담당했다.[5] 조약은 1846년 6월 15일에 서명되었고, 이로써 공동 점유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조약에 따라 북위 49도선 남쪽의 오리건 거주민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고, 북쪽 거주민들은 영국 시민이 되었다.[6]

오리건 조약은 미국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국경선을 북위 49도선으로 확정했다. 단, 밴쿠버 섬은 예외로 하여 섬 전체가 영국령으로 남았다. 밴쿠버 섬과 그 주변의 모든 해안 섬들은 1849년 밴쿠버 섬 식민지로 공식 편성되었다. 미국령이 된 지역은 1848년 8월 14일 오리건 준주로 조직되었으며, 이후 1853년에는 워싱턴 준주가 오리건 준주에서 분리 신설되었다. 영국령 지역은 1858년까지 미조직 상태로 있다가, 프레이저 협곡 골드 러시와 미국의 팽창주의적 의도에 대한 우려로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가 설립되었다. 1866년 두 영국 식민지는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로 통합되었고, 1871년 캐나다 연방에 가입하면서 오리건 조약으로 설정된 북위 49도선 및 해양 경계는 캐나다-미국 국경의 일부가 되었다.

조약은 후안 데 푸카 해협의 국경선을 "대륙과 밴쿠버 섬을 분리하는 해협의 중앙"으로 명시했으나, 여러 해협 중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지아 해협 내 산후안 제도의 소유권을 둘러싼 해석 차이가 발생했고, 이는 1859년 돼지 전쟁이라는 군사적 대치로 이어졌다. 이 영유권 분쟁은 1872년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수장으로 하는 3인 중재위원회의 중재를 통해 해결되었다.[7] 1872년 10월 21일, 위원회는 미국 측 주장을 받아들여 산후안 제도를 미국 영토로 최종 결정했다.[8]

이 외에도 조약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들이 포함되었다.

  • 북위 49도선 남쪽의 해협과 강에서의 항해는 양 당사자에게 자유롭고 개방된다.
  • 허드슨 베이 회사의 자회사인 퍼제트 사운드 농업 회사는 컬럼비아 강 북쪽의 재산을 계속 소유하며, 미국이 양도를 요구할 경우 보상을 받는다.
  • 새로운 경계선 남쪽의 허드슨 베이 회사와 모든 영국인의 재산권은 존중된다.[9]

4. 2. 해상 경계의 모호성과 후안 데 푸카 해협

오리건 조약은 후안 데 푸카 해협의 경계를 '주요 수로'로 정의했다.[9] 구체적으로는 "대륙과 밴쿠버섬을 분리하는 해협의 중앙"을 따라 국경선을 설정하도록 명시했지만, 여러 가능한 해협 중 어느 곳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이러한 모호함 때문에 영국과 미국은 조지아 해협의 주요 항로 위치와 해석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고, 결국 같은 섬(산후안 제도)을 두고 영유권 분쟁으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1859년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돼지 전쟁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9]

조약에는 해상 경계 외에도 다음과 같은 조항들이 포함되었다.[9]

내용상세
항해권북위 49도선 이남의 해협과 해협의 항해는 양측 모두에게 자유롭고 개방된 상태로 유지된다.
Puget's Sound Agricultural Company 재산허드슨 베이 회사의 자회사인 Puget's Sound Agricultural Company는 컬럼비아 강 북쪽의 재산을 계속 소유하며, 미국이 요구할 경우 양도된 재산에 대해 보상을 받는다.
영국인 재산권새로운 경계선 이남에 있는 허드슨 베이 회사와 모든 영국인의 재산권은 존중된다.


4. 3. 기타 조항

오리건 조약에는 국경 설정 외에 다음과 같은 주요 조항들이 포함되었다.

  • 북위 49도선 남쪽의 해협과 수로에서의 항해는 양측 모두에게 자유롭게 개방된다.
  • 허드슨 베이 회사의 자회사인 퓌제 사운드 농업 회사는 컬럼비아 강 북쪽에 소유한 재산을 계속 보유할 수 있으며, 만약 미국 정부가 해당 재산을 요구할 경우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
  • 새롭게 설정된 국경선 남쪽에 위치한 허드슨 베이 회사 및 모든 영국인의 재산권은 존중된다.[9]

5. 조약의 영향

오리건 조약은 미국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국경을 로키 산맥 서쪽에서 태평양까지 북위 49도선으로 확정하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밴쿠버섬 전체는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다. 이 조약은 1846년 6월 15일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뷰캐넌과 영국 특사 리처드 패이컨엄의 협상을 통해 체결되었으며, 양국 간의 오랜 공동 점유 상태를 종식시켰다.

조약 체결로 미국은 북위 49도선 이남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 지역은 1848년 8월 14일 오리건 준주로 공식 편입되었다. 이는 미국의 서부 팽창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한편, 영국은 밴쿠버섬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북위 49도선 이북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여 훗날 캐나다 서부 지역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다. 캐나다 연방 성립 이후, 이 조약으로 설정된 북위 49도선은 워싱턴주브리티시컬럼비아주 사이의 미국-캐나다 국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조약은 모든 문제를 명확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특히 후안 데 푸카 해협의 해상 경계를 '주요 수로'로만 규정하여, 조지아 해협 내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를 낳았다. 이 불명확한 경계 설정은 결국 1859년 미국과 영국 간의 군사적 대치 상황인 돼지 전쟁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조약은 허드슨 베이 회사가 콜롬비아 강을 계속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다.

5. 1. 공동 점유 종료와 영토 확정

1818년 조약 이후 미국영국령 북아메리카는 로키 산맥 서쪽 지역, 즉 미국인에게는 오리건 컨트리, 영국인에게는 허드슨 베이 회사의 컬럼비아 부로 알려진 지역을 공동으로 점유하고 관리했다.[2]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양측 모두에게 공동 관리는 점점 더 불편한 상황이 되었다.

영국 측이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와 그의 전임자 존 타일러가 제안한 북위 49도선을 국경으로 하자는 안을 거부하자,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은 당시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남쪽 경계였던 북위 54°40′까지 오리건 컨트리 전체의 합병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54도 40분 아니면 전쟁(Fifty-four Forty or Fight!)"이라는 구호가 등장할 정도로 여론이 격화되었다.

하지만 1846년 4월,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미국의 관심과 군사 자원이 남쪽으로 집중되자, 포크 행정부는 영국과의 또 다른 전쟁을 피하기 위해 타협을 모색했다. 이는 당시 행정부 내 강경파들에게는 예상 밖의 결정이었으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대영 제국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3]

이에 워싱턴 D.C.에서 협상이 진행되어, 미국의 국무장관이자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뷰캐넌과 미국 주재 영국 특사 리처드 파켄햄이 주도하여 조약을 마련했다. 영국에서는 외무 장관 애버딘 백작이 의회에서 조약 비준을 이끌었다.[5] 1846년 6월 15일, 오리건 조약이 공식적으로 서명되면서 양국의 공동 점유 상태는 종료되었다.[6]

오리건 조약은 밴쿠버 섬 전체를 영국령으로 하는 것을 제외하고,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국경을 북위 49도선으로 확정했다. 이 조약에 따라 북위 49도선 남쪽에 거주하던 오리건 주민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고, 북쪽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영국 시민이 되었다.[6] 조약으로 미국령이 된 지역은 1848년 8월 14일 오리건 준주로 편성되었으며, 이후 1853년에는 워싱턴 준주가 오리건 준주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영국령 지역은 한동안 미조직 상태로 남아있다가, 1858년 프레이저 협곡 골드 러시와 재차 제기된 미국의 팽창주의적 의도에 대한 우려로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가 설립되었다. 밴쿠버 섬은 1849년 밴쿠버 섬 식민지로 별도 구성되었다가, 1866년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와 통합되어 하나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가 되었다. 1871년 브리티시컬럼비아가 캐나다 연방에 가입하면서, 오리건 조약으로 설정된 북위 49도선과 해양 경계는 오늘날의 캐나다-미국 국경의 일부가 되었다.

조약은 후안 데 푸카 해협의 경계를 '주요 수로'(the main channel)로 정의했는데, 이 수로의 위치에 대한 해석 차이로 인해 조지아 해협 내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 문제가 발생했다. 영국은 밴쿠버 섬과 남부 걸프 제도를 확보하기 위해 국경선이 해당 지역을 돌아 남쪽으로 꺾이도록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수로 경계 설정 미비로 분쟁의 소지를 남겼다. 결국 1859년,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미국과 영국 사이에 돼지 전쟁이라 불리는 유혈 사태 없는 대립이 발생했으며, 이 분쟁은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다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수장으로 하는 3인 중재 위원회에 회부되었다.[7] 1872년 10월 21일, 위원회는 미국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산후안 제도를 미국 영토로 최종 결정했다.[8] 조약은 또한 허드슨 베이 회사가 콜롬비아 강을 계속 이용할 권리를 보장했다.

5. 2. 미국-캐나다 국경선의 기초

1818년 조약미국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경계를 미네소타에서 당시 "스토니 산맥"이라 불리던 로키 산맥까지 북위 49도선을 따라 설정했다.[2] 이 산맥 서쪽 지역은 미국인에게는 오리건 컨트리로, 영국인에게는 허드슨 베이 회사의 컬럼비아 부 또는 컬럼비아 지구로 알려졌으며, 이 지역에는 뉴 칼레도니아 모피 지구의 남부도 포함되었다. 해당 조약은 이 지역에 대해 10년간 공동 관리를 규정하여, 양국 모두 토지를 주장할 수 있었고 자유로운 항해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공동 관리는 양측 모두에게 점점 더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영국이 미국 대통령 제임스 K. 포크존 타일러 행정부의 북위 49도선을 경계로 하자는 제안을 거부하자,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남쪽 경계인 북위 54도 40분까지 오리건 컨트리 전체 영역의 합병을 요구하며 "54도 40분 아니면 전쟁" (Fifty-four Forty or Fight!)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하지만 1846년 4월 멕시코-미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의 관심과 군사 자원이 남쪽으로 집중되자, 워싱턴 D.C.에서 진행 중이던 협상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포크 행정부는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르는 상황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대영 제국과의 또 다른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3]

이 조약은 미국의 국무장관이자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뷰캐넌과 미국 주재 영국 특사였던 리처드 파켄햄이 협상했다. 영국 외무 장관 애버딘 백작이 영국 의회에서 조약 처리를 담당했다.[5] 조약은 1846년 6월 15일에 서명되었고, 이로써 공동 점유는 종료되었다. 북위 49도선 이남의 오리건 거주민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고, 그 이북의 거주민들은 영국 시민이 되었다.[6]

오리건 조약은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경계를 북위 49도선으로 확정했지만, 밴쿠버섬 전체는 영국령으로 남게 되었다. 밴쿠버 섬과 그 주변의 모든 해안 섬들은 1849년에 밴쿠버 섬 식민지로 조직되었다. 미국 측의 해당 지역은 1848년 8월 14일에 오리건 준주로 편입되었고, 이후 1853년에는 워싱턴 준주가 오리건 준주에서 분리되어 형성되었다. 영국령 지역은 1858년까지 미조직 상태로 남아 있다가, 프레이저 협곡 골드 러시와 미국의 팽창주의적 의도에 대한 우려가 다시 제기되면서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가 설립되었다. 두 영국 식민지(밴쿠버 섬과 브리티시컬럼비아 본토)는 1866년에 하나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로 통합되었다. 1871년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가 캐나다 연방에 가입하면서, 오리건 조약에 의해 설정된 북위 49도선 및 해양 경계는 현재의 캐나다-미국 국경의 기초가 되었다.

조약은 후안 데 푸카 해협의 해양 경계를 "주요 수로"(the main channel)로 정의했는데, 영국과 미국은 조지아 해협 내 주요 수로의 위치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양국은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을 겪었다. 영국은 로사리오 해협을, 미국은 하로 해협을 주요 수로라고 주장했다. 이 불명확한 경계는 결국 1859년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돼지 전쟁이라는 유혈 사태 없는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 문제는 1872년까지 해결되지 못하다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수장으로 하는 3인 중재 위원회의 중재를 통해 해결되었다.[7] 1872년 10월 21일, 위원회는 미국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하로 해협을 경계로 인정하고 산후안 제도를 미국에 할당하는 판결을 내렸다.[8] 또한 조약은 허드슨 베이 회사가 컬럼비아 강을 계속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다.

5. 3. 오리건 준주와 워싱턴 준주

오리건 조약은 미국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경계를 북위 49도선으로 정했으며, 밴쿠버 섬은 영국이 전부 소유하는 것으로 예외를 두었다.[6] 조약은 1846년 6월 15일에 서명되어 양국의 공동 점유 상태를 끝냈다. 이 조약으로 북위 49도선 이남의 오리건 거주민들은 미국 시민이 되었고, 그 이북의 사람들은 영국 시민이 되었다.[6]

미국령이 된 지역은 1848년 8월 14일 (또는 8월 15일[6])에 오리건 준주로 조직되었다. 이후 1853년에는 워싱턴 준주가 오리건 준주에서 분리되어 새롭게 형성되었다.

한편, 영국령이 된 밴쿠버 섬은 모든 해안 섬들과 함께 1849년에 밴쿠버 섬 식민지로 구성되었다. 영국령 본토 지역은 1858년까지 미조직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프레이저 협곡 골드 러시가 발생하고 미국의 팽창주의적 의도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가 설립되었다. 이 두 영국 식민지는 1866년에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로 통합되었고, 1871년 캐나다 연방에 합류하면서 오리건 조약에 의해 설정된 북위 49도선 및 해양 경계는 캐나다-미국 국경이 되었다.

오리건 조약은 후안 데 푸카 해협의 경계를 '주요 수로'로 정의했는데, 조지아 해협의 주요 항로 위치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해석 차이로 인해 산후안 제도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이 분쟁은 1859년 유혈 사태는 없었지만 군사적 대치까지 이어진 돼지 전쟁을 일으켰다. 이 문제는 1872년까지 해결되지 않다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수장으로 하는 3인 중재 위원회의 중재를 통해 해결되었다.[7] 1872년 10월 21일, 위원회는 미국에 유리한 판결을 내려 산후안 제도를 미국에 할당했다.[8]

5. 4.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

오리건 조약은 미국영국령 북아메리카 사이의 경계를 북위 49도선으로 정했지만, 영국령 지역은 1858년까지 미조직 상태로 남아 있었다.[6] 조약 체결 시 밴쿠버 섬은 예외적으로 영국이 전부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 섬과 주변의 모든 해안 섬들은 1849년에 밴쿠버 섬 식민지로 먼저 구성되었다.

본토의 영국령 지역은 1858년에 이르러서야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로 설립되었다. 이는 프레이저 협곡 골드 러시가 발생하고, 다시금 제기된 미국의 팽창주의적 의도에 대한 우려가 커진 데 따른 조치였다. 이후 1866년, 밴쿠버 섬 식민지와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는 하나의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로 통합되었다. 이 통합된 브리티시컬럼비아 식민지가 1871년 캐나다 연방에 가입하면서, 오리건 조약에 의해 설정된 북위 49도선 및 해양 경계는 현재의 캐나다-미국 국경이 되었다.

한편, 조약에서 밴쿠버 섬 전체를 영국령으로 보장하기 위해 국경선이 후안 데 푸카 해협을 통해 남쪽으로 우회하도록 합의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샌후안 제도를 포함한 여러 섬의 소유권 문제가 명확히 해결되지 않아 분쟁의 소지가 남았다. 결국 1859년 샌후안 제도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돼지 전쟁이라는 유혈 사태 없는 대립이 발생했으며, 이 문제는 1872년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수장으로 하는 3인 중재 위원회의 중재가 이루어졌고,[7] 1872년 10월 21일, 위원회는 미국에 유리한 판결을 내려 샌후안 제도를 미국 영토로 확정했다.[8]

6. 조약 이후 분쟁

오리건 조약으로 북위 49도선이 미국과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주요 국경으로 확정되었으나, 후안 데 푸카 해협 구간의 경계 설정에 대한 모호함은 새로운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조약은 해협 내 경계를 "주요 수로"로 정의했으며,[10] 특히 조지아 해협을 통과하며 "가장 깊은 수로"(deepest channel영어)를 따라 이어지는 경로를 두고 미국영국의 해석이 엇갈렸다.

이러한 불명확한 경계 정의는 1859년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돼지 전쟁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10] 이 분쟁은 이후 국제 중재를 통해 해결되었으며, 상세한 내용은 돼지 전쟁 및 샌환 제도 중재 섹션에서 다룬다.

또한, 북위 49도선을 기준으로 국경을 획정하는 과정에서 워싱턴주 포인트 로버츠가 미국 본토와 지리적으로 분리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는 포인트 로버츠 문제 섹션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6. 1. 돼지 전쟁 (1859년)

오리건 조약에서 후안 데 푸카 해협의 경계를 '가장 깊은 수로'(deepest channel영어)로 정의한 문구의 모호함은 새로운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특히 조지아 해협에서 어떤 수로를 경계로 삼을지에 대한 미국영국의 해석이 달랐고, 이로 인해 양국 모두 산후안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결국 1859년, 이 경계 문제는 산후안 제도에서 돼지 전쟁이라는 이름의 군사적 대치 상황을 일으켰다. 다행히 실제 전투는 거의 없이 10여 년간의 긴장 상태와 군사적 위협이 이어지다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기간 동안 현지의 영국 당국자들이 미국이 남북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퓨젯 사운드 지역 전체를 영국령으로 되찾기 위해 런던에 지속적으로 로비를 했다는 사실이다.[10]

산후안 제도 분쟁은 1871년 체결된 워싱턴 조약에 따라 국제 중재에 회부되었다. 1872년, 독일 제국 빌헬름 1세 황제가 중재를 맡아 최종적으로 미국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영국이 주장한 동쪽의 로사리오 해협이 아닌, 미국이 주장한 서쪽의 하로 해협을 경계로 확정했다.

6. 2. 샌환 제도 중재 (1872년)

미국의 영토 확장; 오리건 준주는 노란색으로 표시


오리건 조약에서 후안 데 푸카 해협을 통과하는 경계선을 "가장 깊은 수로"로 정한 문구의 모호함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1859년 샌환 제도에서 돼지 전쟁이라는 또 다른 경계 분쟁이 일어났다.

이 분쟁은 10년간의 대립과 군사적 위협 끝에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분쟁 기간 동안 현지 영국 당국은 미국 남북 전쟁으로 미국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린 틈을 타 퓨젯 사운드 지역 전체를 되찾기 위해 영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로비를 벌였다.[10] 샌환 제도 분쟁은 1871년 체결된 워싱턴 조약에 따라 1872년 독일 제국빌헬름 1세 황제가 중재하여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빌헬름 1세는 영국이 주장한 제도 동쪽의 로사리오 해협 대신, 미국이 주장한 서쪽의 하로 해협을 통과하는 해상 경계선을 채택했다.

이 조약은 또한 워싱턴주 포인트 로버츠가 의도치 않게 미국 본토와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캐나다에서 남쪽 경계만으로 뻗어 나온 반도가 이 조약에 의해 49번째 위도선 이남의 땅으로 규정되면서, 미국 본토와 지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영토가 되었다.

6. 3. 포인트 로버츠 문제

오리건 조약은 또한 워싱턴주 포인트 로버츠가 국경의 "잘못된" 쪽에 위치하게 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캐나다에서 남쪽으로 경계만으로 뻗어 나가는 반도는 이 조약에 의해 북위 49도선 이남의 땅으로 규정되었고, 이로 인해 포인트 로버츠는 미국의 분리된 영토가 되었다.

7. 조약에 대한 평가

(내용 없음)

7. 1. 영국 내 평가

미국 역사가 토머스 C. 매클린톡에 따르면, 영국 대중은 오리건 조약을 환영했다. 매클린톡은 프레데릭 메르크가 "영국 언론 전체"가 애버딘 경이 제안한 조약에 대한 상원의 비준 소식을 "안도의 한숨"과 "보편적인 만족"으로 맞이했다는 주장이 거의 정확하다고 평가했다. 휘그당, 토리당, 그리고 독립 언론들은 조약에 대한 만족감을 표명하는 데 동의했다. 몇몇 신문에서 약간의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이전에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북동쪽 경계를 결정했던 웹스터-애시버튼 조약을 맞이했을 때와 같은 강력한 비난은 전혀 없었다. 애버딘 경은 오리건 조약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려 노력했고, 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11]

참조

[1] 서적 The Diplomacy of Annexation: Texas, Oregon, and the Mexican War. U of Missouri Press
[2] 웹사이트 Convention of Commerce between His Majesty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Signed at London, 20th October 1818 http://www.lexum.umo[...] Université de Montréal 2006-03-27
[3] 서적 For Honor or Destiny: The Anglo-American Crisis over the Oregon Territory Peter Lang Publishing
[4] 웹사이트 Voteview | Plot Vote: 29th Congress > Senate > 101 https://voteview.com[...]
[5] 서적
[6] 서적 Bear Flag Rising: The Conquest of California, 1846 https://archive.org/[...] Macmillan
[7] 웹사이트 The Pig War http://www.nps.gov/s[...] National Park Service 2020-01-13
[8] 웹사이트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agree on the 49th parallel as the main Pacific Northwest boundary in the Treaty of Oregon on June 15, 1846 https://www.historyl[...] History Link 2013-07-13
[9] 웹사이트 Treaty between Her Majesty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for the Settlement of the Oregon Boundary http://www.lexum.umo[...] Université de Montréal 2007-01-12
[10] 웹사이트 Thwarting Southern Schemes and British Bluster in the Pacific Northwest https://content.ucpr[...]
[11] 뉴스 British newspapers and the Oregon Treaty of 1846 https://link.gale.co[...] Oregon Historical Quarterl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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