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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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으며, 이후 유럽 의회 의원과 국제 범유럽 연합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반공주의, 유럽 통합을 지지하며 나치즘에 저항했다. 191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1916년 황태자가 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망명 생활을 했다. 1979년부터 1999년까지 유럽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2011년 독일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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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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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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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미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
이름 | 오토 폰 합스부르크 |
출생일 | 1912년 11월 20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니더외스터라이히주, 라이헤나우안데어락스, 바르트홀츠 성 |
사망일 | 2011년 7월 4일 |
사망지 | 독일, 바이에른주, 푀킹 |
안장 위치 | 황실 납골당 (시신), 판논할마 대수도원 (심장) |
국적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912–1918) 헝가리 (1912–2011) 오스트리아 (1918–1938; 1965년부터) 나치 독일 (1938–1941) 무국적 (1941–1946) 모나코 (1946–1965) 서독 (1978–1990) 독일 (1990년부터) 크로아티아 (1990년부터) |
배우자 | 작센마이닝겐의 레기나 공주 (1951년 5월 10일 결혼, 2010년 2월 3일 사망) |
자녀 | 안드레아 폰 합스부르크 모니카 폰 합스부르크 미카엘라 폰 합스부르크 가브리엘라 폰 합스부르크 발부르가 폰 합스부르크 카를 폰 합스부르크 게오르크 폰 합스부르크 |
가문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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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
유럽 의회 의원 | 1979년 7월 17일 – 1999년 7월 20일 |
선거구 | 독일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수장 | 1922년 4월 1일 – 2007년 1월 1일 |
이전 수장 | 카를 1세 |
다음 수장 | 카를 폰 합스부르크 |
소속 정당 | |
정당 |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 연합 |
종교 | |
종교 | 기독교, 가톨릭교회 |
2. 생애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통치 기간 중 라이헤나우 안 데어 락스의 빌라 바르톨츠에서 태어났다. 1916년 11월, 아버지 카를 대공이 왕위에 오르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가 되었다.[81][82] 그러나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군주제가 폐지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헝가리 민주 공화국이 그 자리에 세워졌으며, 그의 가족은 마데이라로 망명해야 했다.[5] 헝가리는 다시 왕국이 되었지만 카를은 왕위를 되찾지 못했고, 미클로시 호르티가 1944년까지 섭정으로 통치했다.
오토는 독일어,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말년에 그는 독일어, 헝가리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약 40권의 책을 저술했다.[11]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언젠가 많은 나라를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많은 언어를 배우게 했다.[12][13]
아스터 혁명 동안 괴될뢰 왕궁에 있었지만, 공화주의적 정서가 높아지자 헝가리를 탈출했다.[14] 오토의 가족은 이후 수년간 스위스와 마데이라 포르투갈 섬에서 보냈고, 1922년 카를 1세가 34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9살의 오토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임종 직전, 어머니 치타 황후는 오토에게 "너의 아버지는 이제 영원한 잠에 들었다. 너는 이제 황제이자 왕이다"라고 말했다.[15] 가족은 결국 스페인 그란데 40명이 별장을 사준 바스크 자치 지방의 레케티오 마을로 이주했다.
한편, 오스트리아 의회는 1919년 4월 3일 합스부르크 법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를 공식적으로 추방하고 모든 공식 재산을 몰수했다. 카를은 다시는 오스트리아로 돌아오는 것이 금지되었고, 오토와 다른 남성 구성원은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사생활 시민의 지위를 받아들일 경우에만 돌아올 수 있었다.
1935년, 그는 벨기에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정치 및 사회 과학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은 "오스트리아의 관습과 농민 상속법에서 비롯된 농지 소유의 불가분성에 대한 권리"였다.[16]
오토는 오스트리아에서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1931년부터 1938년까지 1,603개의 오스트리아 자치 단체가 그를 명예 시민으로 임명했다.[18]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나치즘을 비난하며 안슐루스에 강력하게 반대했고, 1938년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에게 나치 독일에 저항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국제적 개입을 지지했으며[6] 망명에서 돌아와 나치를 격퇴하기 위해 정부를 이끌겠다고 제안했다.[20]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오토는 나치 정권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 루돌프 헤스는 오토가 체포될 경우 즉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2][23][24]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그의 개인 재산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 재산은 전쟁 후 반환되지 않았다.[25] 오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수천 명의 오스트리아 유대인을 포함하여 약 15,000명의 오스트리아인[26]이 국외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16][27]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 가족은 프랑스를 떠나 포르투갈로 도망쳤다. 오토는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워싱턴 D.C.에서 살았다. 1941년, 히틀러는 오토와 그의 가족의 시민권을 박탈했고, 이들은 무국적자가 되었다.[30]
오토는 나치의 특별 수색 목록에 등재되었으며, 중부 유럽의 수많은 저항 단체의 비공식적인 수장이었다.
미국 망명 기간 동안 오토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과 연방 정부와 직접 접촉했다. 그는 윈스턴 처칠로부터 보수적인 "다뉴브 연방",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복원에 대한 지지를 얻었지만, 요제프 스탈린이 이러한 계획을 종식시켰다.[20]
전쟁이 끝나자 오토는 유럽으로 돌아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수년간 살았다. 여권이 없어 사실상 무국적 상태였기에 1946년 샤를 드골의 중재로 모나코 공국의 여권을 받았다.[39] 몰타 기사단 역시 그에게 외교 여권을 발급했다. 이후 스페인 외교 여권도 발급받았다.[40]
1956년 오토는 오스트리아 노이에 오스트리아 주 정부에 의해 오스트리아 시민으로 인정받았다.[41] 1961년 5월 31일, 오토는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로 오스트리아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자신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라고 선언했다.[43] 1963년 5월 24일, 오스트리아 행정 법원은 오토의 진술이 법적으로 충분하다고 판결했다.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후, 그와 그의 아내는 1965년 7월 20일 시민권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사회당 등 일부 정치 세력은 그의 귀환에 반대하며 "합스부르크 위기"로 알려진 정치적 암투와 내란을 일으켰다.[45] 1966년 6월 1일, 오스트리아 국민당 단독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오토는 오스트리아 여권을 발급받고 48년 만인 1966년 10월 31일에 고국을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46][47][48][49][50][51]
유럽 통합을 초기에 지지했던 오토는 1973년부터 2004년까지 국제 범유럽 연합의 회장을 역임했다. 1979년부터 1999년까지 바이에른 기독 사회 연합 (CSU) 당 소속으로 유럽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유럽 의회 최고참 의원이 되었다. 몽 페르랭 협회 회원이기도 했다.[52] 그는 유럽 연합 확대를 지지했으며, 특히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가입을 지지했다. 유럽 의회 재임 기간 동안, 이안 페이즐리와 충돌하기도 했다.
1989년 8월 19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열린 범유럽 피크닉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 이 행사는 유럽 공산주의 독재 붕괴의 이정표로 여겨진다.[53]
2002년, 그는 최초의 유럽 인민당 그룹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58]
레기나가 2010년 2월 3일 사망한 후, 오토는 더 이상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2011년 7월 4일, 독일 푀킹에 있는 자택에서 9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대변인은 그가 "평화롭게 고통 없이 잠들었다"고 보고했다.[2][5]
2. 1. 황족 시대


카를이 오스트리아 황제,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오토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황태자''' 칭호를 얻었다.[81][82]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중제국이 해체되면서 이 칭호는 사라졌다.[5]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오스트리아의 오토 대공'''이라 불렀고, 유럽의 다른 왕가에서도 그에게 오스트리아 황제 대우를 해주기도 하였다.
오토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시민권을 가졌으며, 국제범유럽연맹 명예회장이었다. 독일에서는 '''오토 폰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에서는 '''오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헝가리에서는 '''합스부르그 오토'''로 불렸다.
오토는 독일어,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11] 말년에 독일어, 헝가리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약 40권의 책을 저술했다.[11] 어머니는 그가 언젠가 많은 나라를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여러 언어를 배우게 했다.[12][13]
1918년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헝가리 민주 공화국이 세워지자 가족은 마데이라로 망명했다.[5] 헝가리는 다시 왕국이 되었지만 카를은 왕위를 되찾지 못했고, 미클로시 호르티가 1944년까지 섭정으로 통치했다.
2. 1. 1. 탄생

오토는 1912년 11월 20일 오전 2시 45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라이헤나우 안 데어 락스에 있는 Villa Wartholz|빌라 바르톨츠de에서 카를 오스트리아 대공과 치타 대공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0] 몸무게는 약 4000그램이었고, 탄생 당시 황위 계승 순위는 3위였다.
오토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동생 카를 루드비히 대공의 증손이었지만, 황제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는 이미 사망했고, 황위 계승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귀천상혼으로 인해 그 자손에게는 황위 계승권이 없었다. 따라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다음으로 그의 동생 오토 프란츠 대공(1906년 사망)의 장남인 아버지 카를 대공이 황위를 계승하고, 그 장남인 오토 역시 미래의 황제가 될 것으로 주목받았다.
오토 탄생 당시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순위 | 인물 | 비고 |
---|---|---|
1위 | 프란츠 페르디난트 | 황위 계승자 |
2위 | 카를 | |
3위 | 오토 | |
4위 | 막시밀리안 오이겐 | |
5위 | 루트비히 빅토르 |
탄생 며칠 후, 오스트리아의 Neue Freie Presse|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스영어는 "1970년대에는 탄생한 신 대공이 합스부르크가의 정점에 서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실었다.
1912년 11월 25일, 빈 대주교인 Franz Xaver Nagl|프란츠 자비에르 나글영어 추기경은 빌라 바르톨츠에서 오토에게 "프란츠 요제프 오토 로베르트 마리아 안톤 카를 막스 하인리히 식스투스 자버 펠릭스 레나투스 루트비히 가에탄 피우스 이그나티우스"라는 세례명을 주었다.[10] 이는 그가 미래에 "프란츠 요제프 2세"로 즉위하는 것을 염두에 둔 이름이었다. 그의 대부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였으며, 대모는 할머니인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안토니아였다.[10]
1916년 11월, 오토는 아버지 카를 대공이 왕위에 오르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가 되었다.[81][82]
2. 1. 2. 세례
오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통치 기간 중 라이헤나우 안 데어 락스의 Villa Wartholz|빌라 바르톨츠de에서 태어났다. 1912년 11월 25일 빈 대주교인 Franz Xaver Nagl|프란츠 자비에르 나글영어 추기경에 의해 프란츠 요제프 오토 로베르트 마리아 안톤 카를 막스 하인리히 식스투스 자버 펠릭스 레나투스 루트비히 가에탄 피우스 이그나티우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10] 이 이름은 그가 미래에 "프란츠 요제프 2세"로 통치할 수 있도록 선택되었다. 그의 대부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였으며, 대모는 할머니인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안토니아였다.[10]
세례식은 1912년 11월 25일, 빌라 바르톨츠의 예배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세례식을 위해 쇤브룬 궁전에서 많은 나무가 이식되었고, 빌라 바르톨츠는 아름답게 정돈되었다고 한다. 세례식의 대부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대모는 어머니 쪽 조모인 마리아 안토니아 데 포르투갈로, 출생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황제의 대리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출생 보고를 받았을 때 그는 부다페스트에 있었다. 즉시 제국의 수도 빈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찍 세례식을 거행하고 싶어하는 교회의 의도와는 달리, 출생에서 세례식 거행까지 5일이 소요되었다.
Archbishop of Vienna|빈 대주교영어인 Franz Xaver Nagl|프란츠 자비에르 나글영어 추기경 밑에서, "프란츠 요제프 오토・로베르토・마리아・안톤・카를・막스・하인리히・식스투스・크사버・펠릭스・레투스・루트비히・가에탄・피우스・이그나티우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것은 장래 "프란츠 요제프 2세"로 즉위하는 것을 염두에 둔 명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 대한 배려 때문인지, 어머니 치타로부터는 "프란츠 요제프"가 아닌 "오토"로 불렸다.
2. 2. 망명 생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제국 해체 후 여러 국가를 전전하며 망명 생활을 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의 황태자 직함은 사라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오스트리아의 오토 대공'이라 칭했고, 유럽 왕가에서도 그에게 황제 대우를 해주었다.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시민권을 가졌으며, 국제범유럽연맹 명예회장과 유럽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열렬한 반공주의자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20년간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2011년 바이에른 푀킹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식은 빈과 푀킹에서 거행되었다. 스웨덴 국왕 부부, 룩셈부르크 앙리 대공, 리히텐슈타인의 한스 아담 2세 등 유럽 왕족들과 오스트리아 대통령 하인츠 피셔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장례식은 오스트리아 방송에서 생중계되었다.[107][108]
오토는 오스트리아에서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1931년부터 1938년까지 1,603개의 오스트리아 자치 단체가 그를 명예 시민으로 임명했다.[18] 그러나 존 건터는 1936년에 "오토가 돌아온다고 그의 어머니도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복원은 훨씬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라고 언급하며, 치타 황후의 복귀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는 합스부르크 왕가 복원에 반대했다.[18]
1937년 오토는 "오스트리아 인구의 압도적인 대다수가...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인 평화 황제의 유산을 빨리 물려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오스트리아] 사람들은...1918년과 1919년의 혁명가들의 뻔뻔함에 놀라 침묵을 지켰다...신의 뜻에 따라, 공작과 백성 사이의 재회 시간이 곧 올 것이다." 라며 복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17]
2. 2. 1. 1922년, 마데이라 섬에서의 황위 계승
아스터 혁명 동안 오토는 괴될뢰 왕궁에 있었지만, 공화주의적 정서가 높아지자 헝가리를 탈출했다.[14] 오토의 가족은 수년간 스위스와 마데이라 포르투갈 섬에서 보냈고, 1922년 아버지 카를 1세가 34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9살의 오토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임종 직전, 어머니 치타 황후는 오토에게 "너의 아버지는 이제 영원한 잠에 드셨다. 너는 이제 황제이자 왕이다"라고 말했다.[15]오토는 형제 중 유일하게 아버지의 중병을 알고 있었고, 카를 1세의 임종을 지켰다.[90] 이날 오후부터 오토는 "'폐하'"라고 불렸지만, 큰 소리로 울면서 "아빠의 시신이 운반된 후에 그렇게 불러줘!"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90]
2. 2. 2. 스페인에서의 생활 (1922-1928)
아스터 혁명 이후 헝가리를 떠난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가족은 스위스와 마데이라를 거쳐 스페인 바스크 자치 지방의 레케티오 마을에 정착했다.[14] 1922년 아버지 카를 1세가 사망하면서 9살의 오토는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5] 어머니 치타 황후는 오토에게 "너는 이제 황제이자 왕이다"라고 말했다.[15]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원하여 엘 파르도 궁전을 제공했지만, 기후 문제로 레케리티오의 우리바렌 궁전으로 이주했다. 지역 주민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지원했다. 소유자 문제로 우리바렌 궁전을 떠나 산 세바스티안의 호텔에서 잠시 머물렀지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귀족들의 도움으로 다시 레케리티오로 돌아왔다. 1923년 6월 6일 레케리티오로 돌아온 일가는 "치타", "오토" 현수막과 불꽃놀이로 환영받았다. 이후 1929년까지 우리바렌 궁전에서 거주했다.
오토는 어머니 치타가 엄선한 교사들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알폰소 13세의 마드리드 학교 제안은 거절했다. 오토는 독일어,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다.
2. 2. 3. 벨기에 이주
오토의 가족은 스페인 그란데 40명이 별장을 사준 바스크 자치 지방의 레케이티오 마을로 이주했다.[14]한편, 오스트리아 의회는 1919년 4월 3일 합스부르크 법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를 공식적으로 추방하고 모든 공식 재산을 몰수했다. 카를은 다시는 오스트리아로 돌아오는 것이 금지되었고, 오토와 다른 남성 구성원은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사생활 시민의 지위를 받아들일 경우에만 돌아올 수 있었다.[14]
1935년, 그는 벨기에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정치 및 사회 과학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은 "오스트리아의 관습과 농민 상속법에서 비롯된 농지 소유의 불가분성에 대한 권리"였다.[16]
2. 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나치즘에 대해 "오스트리아를 위한 [나치] 파시즘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오스트리아 국민은 우리의 아름다운 조국이 착취당하는 식민지가 되고, 오스트리아인이 2등 시민이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강하게 비판했다.[19] 그는 안슐루스에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1938년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에게 나치 독일에 저항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국제적 개입을 지지했으며[6] 망명에서 돌아와 나치를 격퇴하기 위해 정부를 이끌겠다고 제안했다.[20]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오토는 나치 정권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 루돌프 헤스는 오토가 체포될 경우 즉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2][23][24]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그의 개인 재산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재산이 몰수되었고, 이 재산은 전쟁 후 반환되지 않았다.[25] 오스트리아 정통주의 운동 지도자들은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대부분 처형되었고, 오토의 사촌 호엔베르크 공작 막스와 호엔베르크 공자 에른스트는 빈에서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오토는 중부 유럽의 수많은 저항 단체의 비공식적인 수장이었다. 이들은 "함께 살고 함께 살게 하라"는 합스부르크 원칙을 옹호하며 히틀러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31] 이들 중 많은 수가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카를 부리안은 게슈타포 본부 폭파를 계획했고, 하인리히 마이어 박사는 V-2 로켓, 타이거 전차, 메서슈미트 Bf 109 항공기의 설계도와 생산 시설을 연합군에 넘겨주었다.[32][33][34][35][36]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 가족은 프랑스를 떠나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워싱턴 D.C.에서 살았다. 1941년, 히틀러는 오토와 그의 가족의 시민권을 박탈했고, 이들은 무국적자가 되었다.[30]
2. 3. 1. 유럽에서의 활동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나치즘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되는 것(안슐루스)에 반대했다.[19] 그는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에게 독일에 저항할 것을 요청했고, 국제적 개입을 지지하며 망명에서 돌아와 정부를 이끌겠다고 제안했다.[6][20] 당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복귀를 지지했는데, 이는 왕조가 독일에 맞설 결의를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21]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나치 정권은 오토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22][23][24][25] 오토의 지지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그의 사촌들인 막시밀리안과 호엔베르크 공자 에른스트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오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수천 명의 오스트리아인들이 국외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16][26][27]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 오토 가족은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28][29] 1941년에는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시민권을 박탈당해 무국적자가 되었다.[30]
전쟁 중 오토는 미국에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과 접촉하며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미국 육군에 "오스트리아 대대"를 창설하려 했으나 실패했지만, 오스트리아 도시들에 대한 폭격을 중단하거나 제한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26] 그는 윈스턴 처칠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복원에 대한 지지를 얻었으나, 요제프 스탈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0]
2. 3. 2. 미국에서의 활동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나치즘에 강력히 반대하며 안슐루스에 반대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에게 나치 독일에 저항할 것을 요청했고, 국제적 개입을 지지하며 망명에서 돌아와 정부를 이끌겠다고 제안했다.[6][20]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복귀를 지지했는데, 이는 왕조가 제3제국에 맞설 결의를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21]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오토는 나치 정권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 루돌프 헤스는 오토가 체포될 경우 즉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2][23][24]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그의 재산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재산이 몰수되었고, 이는 전쟁 후에도 반환되지 않았다.[25] 오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수천 명의 오스트리아 유대인을 포함하여 약 15,000명의 오스트리아인이 국외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16][27][26]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 가족은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워싱턴 D.C.에서 살았다. 1941년, 히틀러는 오토와 그의 가족의 시민권을 박탈했고, 이들은 무국적자가 되었다.[30]
오토는 나치의 특별 수색 목록에 등재되었으며, 중부 유럽의 수많은 저항 단체의 비공식적인 수장이었다. 이들은 "함께 살고 함께 살게 하라"는 합스부르크 원칙을 옹호하며 히틀러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31] 이들 중 많은 수가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카를 부리안은 게슈타포 본부 폭파를 계획했고, 하인리히 마이어 박사는 V-2 로켓, 타이거 전차, 메서슈미트 Bf 109 항공기의 설계도와 생산 시설을 연합군에 넘겨주었다.[32][33][34][35][36]
미국 망명 기간 동안 오토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과 연방 정부와 직접 접촉했다. 그는 미국 육군에 "오스트리아 대대"를 창설하려 했으나, 이는 지연 끝에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오스트리아 도시, 특히 빈에 대한 폭격을 중단하거나 제한하도록 성공적으로 설득했다.[26] 그는 오스트리아가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민주적인 국가가 되기를 원했으며, 전후 소련 위성 국가가 될 위험을 우려했다. 오토는 점령지 시리즈 우표를 발행하여 오스트리아와 이웃 국가들을 미국인들에게 알리려 했다.
그는 윈스턴 처칠로부터 "다뉴브 연방" 복원에 대한 지지를 얻었지만, 요제프 스탈린이 이를 반대했다.[20] 오토는 망명 중인 오스트리아 정부의 승인, 남티롤의 독일어 사용 인구의 권리, 보헤미아와 동유럽의 독일어 사용 거주민 추방 반대, 그리고 스탈린의 동유럽 지배를 막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37][38]
2. 4. 냉전 시기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열렬한 반공주의자이자 가톨릭 신자로, 유럽 의회 의원으로 20년간 활동하는 등 정치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유럽으로 돌아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수년간 살았다.[107]여권이 없어 사실상 무국적 상태였던 그는 1946년 샤를 드골의 중재로 모나코 공국 여권을 받았다.[39] 몰타 기사단과 스페인에서도 외교 여권을 발급받았다.[40]
1956년 노이에 오스트리아 주 정부에 의해 오스트리아 시민으로 인정받았고,[41] 1961년에는 오스트리아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자신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라고 선언했다.[43] 그러나 오스트리아 사회당 등 일부 정치 세력은 "합스부르크 위기"로 알려진 정치적 암투와 내란을 일으키며 그의 귀환에 반대했다.[45]
1963년 오스트리아 행정 법원은 그의 선언을 인정했고, 1965년 시민권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1966년 오스트리아 국민당 단독 정부가 들어선 후에야 오스트리아 여권을 발급받고 48년 만에 고국을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46][47][48][49][50][51]
2. 4. 1. 오스트리아 독립에 관하여
1955년 5월 15일, 오스트리아와 연합국 간에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합스부르크가의 복귀를 금지하는 조항도 포함되었다.[45] 이는 소련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였다. 조약 체결로 오스트리아는 독립을 회복했지만, 오토를 비롯한 합스부르크가 사람들은 다시 국외로 추방되는 신세가 되었다.전후 오스트리아는 연합국의 점령 통치를 받았으며, 그 중심에는 빈을 점령 구역으로 둔 소련이 있었다. 소련은 카를 렌너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기정사실화하여 서방 국가에 승인시켰다. 이 시기 오토는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렌너 정부가 소련의 괴뢰라고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45] 렌너 정부는 상당수의 공산주의자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방 국가들은 렌너 정부를 "국민적 정부의 대표가 아니다"라고 하며 5개월 동안 승인하지 않았다.[45]
1956년, 오토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주 정부에 의해 오스트리아 시민으로 인정받았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유효한" 오스트리아 여권을 받았다.[41]
한편, 헝가리에서도 소련의 영향력이 강해져 대전 당시의 호르티 정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가의 복위 검토는 흐지부지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에서 합스부르크가는 현실 정치에서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게 되었다.
2. 4. 2. 1961년, 합스부르크 위기
1960년대 초 오스트리아에서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귀환 문제는 정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문제였다.[45]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국내에 큰 소란을 일으킨 논쟁은 오토의 귀환 문제 단 하나였으며, 이는 "합스부르크 위기(Die Habsburg-Krise)"로 불렸다. 오토의 귀환 여부를 둘러싸고 최종적으로는 대연립 정권이 붕괴하게 된다.1958년 2월, 오토는 "오스트리아 국가 시민으로서 오스트리아의 현행 법률을 승인하고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 되겠다"고 선언했다.[43] 그러나 당시 총리였던 율리우스 라브 (오스트리아 국민당)는 오토의 귀환으로 인해 좌파가 급진화되고 오스트리아 국민당이 분열될 것을 우려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인간이라는 것과 그에 따른 지배권 요구를 포기한다는 점이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다"는 구실로 오토의 선언을 기각했다.
1961년 7월, 오토는 변호사를 통해 오스트리아 제위 청구권의 포기를 선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내각 평의회에서는 찬반 의견이 거의 동등하게 갈려 결론을 내지 못했다. 1963년 5월 24일, 행정 법원은 오토의 선언을 인정했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오스트리아 자유당은 오토의 귀환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표명했다. 1963년 7월 오스트리아 내무성은 오토가 스페인 외교관 여권만을 소지하고 오스트리아 여권은 소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입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통지를 공안 감독국과 연방 경찰에 보냈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사회당의 압력이 있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왕당파를 지지층 중 하나로 삼고 있는 오스트리아 국민당과 오스트리아 사회당에 의한 대연립 정권은 붕괴했다.[45] 오토는 국민당에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그 문제를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기로 국민당과 합의했다. 1966년 6월 1일, 오토는 마침내 정식 오스트리아 여권을 입수했다. 같은 해 10월 31일, 오토는 인스브루크를 단기간 방문했지만 이는 사회주의계 신문에는 "8월 방문에 대한 반응을 보며 시험 삼아 해보는 작전"이라고 보도되었다. 사회당은 대부분의 국민이 오토의 입국을 바라지 않고 이러한 위험을 초래한 것은 국민당 정부의 책임이라고 비난했다. 오토는 1967년에 오스트리아 입국을 달성했지만, 그 때는 국민당 단독 정권이었다. 이후에도 오토에 대한 좌파 진영의 반발은 계속되어 계란을 던지거나 암살을 예고받기도 했다.
1997년, 오토는 자신의 선언에 대해 "자신은 협박을 받았지만 나의 서명은 유효하다. 나는 지배권이나 재산 요구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 5. 유럽 의회 의원
유럽 통합을 초기에 지지했던 오토는 1973년부터 2004년까지 국제 범유럽 연합의 회장을 역임했다. 1979년부터 1999년까지 바이에른 기독 사회 연합 (CSU) 당 소속으로 유럽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유럽 의회 최고참 의원이 되었다. 몽 페르랭 협회의 회원이기도 했다.[52] 그는 처음부터 유럽 연합의 확대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특히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가입을 지지했다.유럽 의회 재임 기간 동안, 북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통합주의 개신교 목사이자 동료 유럽 의회 의원인 이안 페이즐리와 충돌했다.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의회에서 연설을 시작하려 할 때, 격렬한 반 가톨릭주의자인 이안 페이즐리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적그리스도다"라고 외치며 포스터를 들었다. 다른 의원들이 페이즐리에게 종이와 다른 물건들을 던지는 동안, 오토는 페이즐리의 현수막을 빼앗아 다른 유럽 의회 의원들과 경호원들과 함께 그를 거칠게 다루고, 주먹질을 하고, 셔츠를 찢고, 넥타이를 잡아당겨 그를 머리부터 의회 밖으로 내쫓았다. 교황은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5]
1989년 8월 19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열린 범유럽 피크닉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이 행사는 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붕괴의 이정표로 여겨진다.[53]
2002년, 최초의 유럽 인민당 그룹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58]
2. 6. 만년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제범유럽연맹의 명예회장이었다. 독일에서는 '''오토 폰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에서는 '''오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헝가리에서는 '''합스부르그 오토'''로 불렸다. 1922년부터 84년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자리를 맡았으나, 2006년 말 고령으로 인해 장남 카를에게 물려주었다. 2009년 자택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이후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96]2. 6. 1. 유럽 의회 은퇴 후
1999년에 유럽 의회 의원을 사임한 후에도 정력적으로 정치 활동을 계속했다. 2004년 오토는 "유럽의 미래는 키예프와 리비우에서 결정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96] 프랑스와 비슷한 면적을 가지고 인구 5천만 명을 보유한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공산주의 체제였던 여러 국가에 민주 정치를 확대할 수 있을지 시험하려 했다.[96]1922년부터 84년간 맡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자리를 고령으로 인해 2006년 말에 장남에게 물려주고, 2007년부터 카를이 합스부르크 가문 수장이 되었다. 그 후에도 한동안 건강한 모습을 주변에 보여주었지만, 2009년에 자택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이후로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96]
2. 6. 2. 사망과 장례
열렬한 반공주의자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유럽의회 의원으로 20년간 활동하는 등 정치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2011년 7월 4일 독일 바이에른의 푀킹 자택에서 잠을 자던 중 별세했다.[107] 2010년 2월 3일 아내 레기나가 사망한 후, 오토는 더 이상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대변인은 그가 "평화롭게 고통 없이 잠들었다"고 보고했다.[2][5]
7월 5일, 그의 시신은 바이에른 푀킹에 있는 그의 집 근처 성 울리히 교회에 안치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여러 국가에서 13일간의 대규모 애도 기간이 시작되었다.[78] 오토의 관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문장 외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제국-왕실 문장으로 장식된 합스부르크 깃발로 덮였다.
7월 17일 푀킹과 빈에서 그의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스웨덴 국왕 부부와 룩셈부르크 앙리 대공, 리히텐슈타인의 한스 아담 2세를 비롯하여 스페인, 벨기에의 왕족들이 참석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인 하인츠 피셔를 비롯한 정계 인물들도 참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오스트리아 방송에서 생중계되었다.[108] 7월 16일, 고국 오스트리아 빈의 슈테판 대성당에서 빈 대주교 크리스토프 쇤보른의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유럽 의회 의장 예지 부제크, 하인츠 피셔 대통령과 베르너 파이만 총리 등 오스트리아 공화국 수뇌, 그리고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 리히텐슈타인 공 한스아담 2세, 불가리아 전 국왕이자 전 총리인 시메온 2세, 루마니아 전 국왕 미하이 1세 등 각국 군주 및 전 군주, 영국, 스페인, 벨기에, 요르단, 바티칸 등에서도 국왕이나 로마 교황의 대리인이 참석했으며, 제국 시대의 전통 의상을 입은 시민 등 약 1만 명이 조문했다.[101]
제국 시대의 국가인 『신이여, 황제 프란츠를 보호하소서』 제창으로 장례식은 마무리되었다. 미사와 관의 행진은 공영 방송사인 오스트리아 방송 협회가 중계 방송을 진행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에 따라 오토의 유해는 같은 도시의 카푸친 납골당에 안치되었으며, 심장은 헝가리 북서부의 판논할마 대수도원에 다음날 17일에 안치되었다.
오스트리아 시민들 사이에서는 제국 시대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한편, 이미 민간인이 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례식을 공화국 정부가 지원한 것에 비판적인 목소리도 나왔다.[102]
3. 정치 활동과 업적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으로 돌아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살았다. 무국적 상태였던 그는 1946년 샤를 드골의 중재로 모나코 공국 여권을 받았고, 몰타 기사단과 스페인으로부터 외교 여권도 발급받았다.[39][40] 1956년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얻었으나,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했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국가에서만 유효한 여권을 받았다.[41][42]
1961년 오스트리아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공화국의 시민임을 선언했지만,[43] 오스트리아 내 정치적 반대에 부딪혔다. 1963년 법원이 그의 선언을 인정하고, 1965년 시민권을 받았지만, "합스부르크 위기"라 불리는 정치적 논란이 일어났다.[45] 1966년 오스트리아 국민당 집권 후에야 오스트리아 여권을 받고 귀국할 수 있었다.[46][47][48][49][50][51]
그는 유럽 통합의 초기 지지자로서, 1973년부터 2004년까지 국제 범유럽 연합 회장을 역임했다. 1979년부터 1999년까지 바이에른 기독 사회 연합 소속 유럽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유럽 연합 확장에 기여했다. 특히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가입을 지지했다. 유럽 의회에서 이안 페이즐리와 충돌하기도 했다.[5] 1989년에는 범유럽 피크닉을 조직하여 유럽 공산주의 붕괴에 기여했다.[2][53]
2006년에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위험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54] 그는 난민과 실향민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프란츠 베르펠 인권상 심사위원이었다.[55][56]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옹호하기도 했다.[57] 2002년 유럽 인민당 그룹 명예 회원이 되었고,[58]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판했다.[59][60][61]
3. 1. 반나치즘 및 반공주의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은 열렬한 반(反)나치주의 및 반(反)공산주의자였다. 그는 나치즘을 강하게 비난하며, 안슐루스(오스트리아 병합)에 반대하고 1938년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에게 나치 독일에 저항할 것을 요청했다.[6] 그는 국제적 개입을 지지했으며,[20] 망명에서 돌아와 나치에 맞서 정부를 이끌겠다고 제안했다.[21]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오토는 나치 정권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22][23][24] 루돌프 헤스는 오토가 체포될 경우 즉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5]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그의 개인 재산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재산이 몰수되었고, 이는 전쟁 후에도 반환되지 않았다. 나치는 이전에 폐지되었던 "합스부르크 법"을 다시 도입했다. 오토의 지지자들, 즉 오스트리아 정통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대부분 처형되었다.[19] 오토의 사촌 호엔베르크 공작 막스와 호엔베르크 공자 에른스트는 빈에서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오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수천 명의 오스트리아 유대인을 포함하여 약 15,000명의 오스트리아인이 국외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16][26][27]
오토는 나치의 존더파훈둥스리스테 G.B.("특별 수색 목록 영국")에 등재되었으며, 중부 유럽의 수많은 저항 단체의 비공식적인 수장이었다. 이들은 나치 이데올로기를 혐오했으며, 다뉴브 연방의 부활을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작은 국가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았다. 이들은 "함께 살고 함께 살게 하라"는 합스부르크 원칙을 옹호했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저항 단체들은 히틀러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31] 이들 중 많은 수가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되었다.[32][33][34][35][36] 하인리히 마이어 박사는 V-2 로켓, 타이거 전차, 메서슈미트 Bf 109 항공기의 설계도와 생산 시설을 연합군에 넘겨주기도 했다.
1940년 5월 9일은 어머니 치타의 48번째 생일이었고, 가족끼리 축하 행사를 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5월 10일, 독일은 벨기에 침공을 시작했다. 그날 오토는 동생 카를 루드비히와 함께 볼일이 있어서 시내에 나갔는데, 두 사람이 탄 차 바로 뒤에 폭탄이 떨어졌다고 한다.
프랑스 침공 이후, 가족은 프랑스 수도를 떠나 포르투갈로 도망쳤다. 6월 12일, 포르투갈 통치자 안토니오 살라자르는 프랑스 주재 포르투갈 영사관에 지시하여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에게 포르투갈 여권을 발급하도록 지시했다. 독일 당국이 살라자르에게 오토의 포르투갈 인도를 요구하자, 살라자르는 오토를 보호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친구로서 그에게 나라를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오토는 미국으로 건너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워싱턴 D.C.에서 살았다. 1941년, 히틀러는 오토,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형제자매들의 시민권을 개인적으로 박탈했고, 황실 가족은 무국적이 되었다.[30]
미국에서의 망명 기간 동안, 오토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 및 연방 정부와 직접 접촉했다. 그는 미국 육군에 "오스트리아 대대"를 창설하려 했으나 지연되었고 실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오스트리아 도시, 특히 빈에 대한 폭격을 중단하거나 제한하도록 성공적으로 설득했다.[26] 오토는 오스트리아가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민주적이 되기를 원했으며, 전쟁 후 소련 위성 국가가 될 위험을 우려했다.
그는 윈스턴 처칠로부터 보수적인 "다뉴브 연방"(오스트리아-헝가리 복원)에 대한 지지를 얻었지만, 요제프 스탈린이 이러한 계획을 종식시켰다.[20] 오토는 망명 중인 오스트리아 정부의 승인, 남티롤의 독일어 사용 인구의 권리, 보헤미아와 동유럽의 독일어 사용 거주민 추방 반대, 그리고 스탈린이 동유럽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37][38]
유럽 통합을 초기에 지지했던 오토는 1973년부터 2004년까지 국제 범유럽 연합의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979년부터 1999년까지 바이에른 기독 사회 연합 (CSU) 소속으로 유럽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유럽 의회 최고참 의원이 되었다. 그는 유럽 연합의 확대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유럽 의회 재임 기간 동안, 북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통합주의 개신교 목사이자 동료 의원인 이안 페이즐리와 충돌했다.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의회에서 연설을 시작하려 할 때, 반 가톨릭주의자인 페이즐리가 "교황은 적그리스도다"라고 외치며 포스터를 들자, 오토는 페이즐리의 현수막을 빼앗아 다른 의원들과 경호원들과 함께 그를 거칠게 다루고 의회 밖으로 내쫓았다.[5]
그는 1989년 8월 19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열린 범유럽 피크닉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이 행사는 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붕괴의 이정표로 여겨진다.[53]
2002년, 그는 유럽 인민당 그룹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58]
3. 2. 유럽 통합 운동
유럽 통합 초기 지지자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1973년부터 2004년까지 국제 범유럽 연합의 회장을 역임했다. 1979년부터 1999년까지는 바이에른 기독 사회 연합 (CSU) 소속으로 유럽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유럽 의회 최고참 의원이었다. 몽 페르랭 협회 회원이기도 했다.[52] 그는 유럽 연합 확대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특히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가입을 지지했다. 유럽 의회 재임 기간 중 북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통합주의 개신교 목사이자 유럽 의회 의원인 이안 페이즐리와 충돌했다.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의회에서 연설을 시작할 때, 반 가톨릭주의자인 이안 페이즐리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적그리스도다"라고 외치며 포스터를 들자, 오토는 페이즐리의 현수막을 빼앗아 다른 의원들과 경호원들과 함께 그를 거칠게 다루고 의회 밖으로 내쫓았다. 교황은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5]1989년 8월 19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열린 범유럽 피크닉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이 행사는 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붕괴의 이정표로 여겨진다.[53]
2006년 12월, 그는 "2001년 9월 11일의 참사는 미국을 우리 중 누구보다 더 깊이 강타했으며, 그로 인해 상호 이해의 부족이 있었다. 그 전까지 미국은 어떤 적이라도 폭격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느꼈고, 누구도 반격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위험을 처음으로 본능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54] 그는 유럽의 난민과 실향민, 특히 한때 그가 황태자였던 보헤미아에서 쫓겨난 독일계 민족의 권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55] 프란츠 베르펠 인권상의 심사위원이었다.[56] 그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높이 평가하며 난민을 도운 그를 "아돌프 히틀러나 이오시프 스탈린과 같은 전체주의자가 아닌 남아메리카식 독재자"라고 칭찬했다.[57]
2002년, 유럽 인민당 그룹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58]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한 초기 비판자였다. 2002년 신문 인터뷰[59]와 2003년과 2005년의 두 번의 연설[60]에서 그는 푸틴을 "잔혹하고 억압적인" "냉철한 기술관료"이며 "국제적인 위협"이라고 경고했다.[61]
3. 3. 인권 옹호
오토는 유럽 통합의 초기 지지자였으며, 1973년부터 2004년까지 국제 범유럽 연합의 회장을 역임했다.[2] 1979년부터 1999년까지는 바이에른 기독 사회 연합 (CSU) 소속으로 유럽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결국 유럽 의회 최고참 의원이 되었다. 그는 유럽 연합 확대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특히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가입을 옹호했다.[52]
유럽 의회 재임 기간 동안, 북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통합주의 개신교 목사이자 동료 의원인 이안 페이즐리와 충돌한 사건이 있었다.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의회에서 연설을 시작하려 할 때, 반 가톨릭주의자인 이안 페이즐리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적그리스도다"라고 외치며 포스터를 들었다. 이에 오토는 페이즐리의 현수막을 빼앗고 다른 의원들과 경호원들과 함께 그를 거칠게 다루고, 주먹질을 하고, 셔츠를 찢고, 넥타이를 잡아당겨 그를 의회 밖으로 내쫓았다. 교황은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5]
1989년 8월 19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열린 범유럽 피크닉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 이 행사는 유럽의 공산주의 독재 붕괴의 이정표로 여겨진다.[53]
2006년 12월, 그는 "2001년 9월 11일의 참사는 미국을 우리 중 누구보다 더 깊이 강타했으며, 그로 인해 상호 이해의 부족이 있었다. [...]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위험을 처음으로 본능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54]
그는 유럽의 난민과 실향민, 특히 보헤미아에서 쫓겨난 독일계 민족의 권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55] 프란츠 베르펠 인권상의 심사위원이었다.[56] 그는 또한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높이 평가하며 난민을 돕는 그를 "아돌프 히틀러나 이오시프 스탈린과 같은 전체주의자가 아닌 남아메리카식 독재자"라고 칭찬했다.[57]
2002년, 그는 최초의 유럽 인민당 그룹 명예 회원이 되었다.[58]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에 대한 초기 비판자였다. 2002년 신문 인터뷰[59]와 2003년과 2005년의 두 번의 연설[60]에서 그는 푸틴을 "잔혹하고 억압적인" "냉철한 기술관료"이며 "국제적인 위협"이라고 경고했다.[61]
4. 비판과 논란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생전에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1988년 유럽 의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연설할 때, 개신교 목사이자 유럽 의회 의원인 이안 페이즐리가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외치며 소란을 피웠다. 이때 오토는 페이즐리를 제지하고 의회 밖으로 쫓아내는 과정에서 물리력을 행사하여 논란이 되었다.[5]
1998년, 오토의 아들 카를 합스부르크가 월드 비전 기부금을 횡령한 사건과 관련하여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언급하며 "카를은 노란 별,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격받는다"라고 발언하여 비판을 받았다.[62]
오토는 우익 성향의 주간지 융에 프라이하이트(Junge Freiheit)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인터뷰를 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받았다.[64] 2002년에는 이 신문이 "우익 극단주의"로 분류된 것에 반대했고, 2006년에는 라이프치히 도서 박람회에서 초청받지 못한 것에 반대했다.
2002년, 융에 프라이하이트와의 인터뷰에서 오토는 미국 국방부가 "유대인으로 가득 차 있다"고 언급하고, 콜린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가 미국 국무부를 "점령"했다고 발언하여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켰다.[65]
2007년에는 엥겔베르트 돌푸스의 쿠데타를 옹호하며 "돌푸스를 무한히 존경했다"고 발언하고, 의회 해산 및 정당과 노동 조합 금지에 대해 "국가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해 논란이 되었다.[66]
2008년,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기념일에 오토는 "유럽에서 나치의 희생자라고 주장할 자격이 있는 나라는 오스트리아보다 더 나은 곳은 없다"고 발언하여 대중의 항의와 정치권의 비판을 받았다.[72]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국방부 장관 노르베르트 다라보스는 이 발언을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75] 반면 오스트리아 국민당 군사 대변인 발터 무라우어는 오토의 발언을 옹호하며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나치에 의해 살해된 유일한 정부 수반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76]
5. 가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통치 기간 중 태어난 오토는 1951년 로렌의 수도인 프랑스 낭시에 있는 생 프랑수아 데 코르들리에 교회에서 작센마이닝겐의 레지나 공주와 결혼했다.[79] 레지나는 작센-마이닝겐 공가의 당주 게오르크 공작의 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2남 5녀(모니카와 미하엘라는 쌍둥이 자매)가 태어났다. 합스부르크 가의 다산 전통을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오토와 레지나 부부는 호엔로에랑엔부르크의 카를 루드비히 공과 그의 아내 졸름스바루트의 아말리에 헨리에테 백작 부인의 후손이었으므로 4촌 관계였다. 결혼식에는 그의 어머니 치타 황후가 참석했다. 그는 2001년에 아내와 함께 금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을 다시 방문했다. 오토는 독일 바이에른주 슈타른베르크 근처 푁킹에 있는 빌라 오스트리아에서 은퇴 생활을 했으며, 슈타른베르크 호수, 상부 바이에른에 위치해 있다. 2010년 레기나가 사망한 후, 오토는 더 이상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1년 사망 당시, 부부는 슬하에 7명의 자녀, 22명의 손자녀 및 2명의 증손자녀를 두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안드레아 마리아 | 1953년 - | 1977년, 나이페르크 백작 카를 오이겐과 결혼, 3남 2녀 |
모니카 마리아 로베르타 안토니아 라파엘라 | 1954년 - | 1980년, 제5대 산탄젤로 공작 루이스 마리아 곤사가 데 카사노바-카르데나스 이 바론과 결혼, 4남 |
미하엘라 마리아 마들렌 킬리아나 | 1954년 - | 1984년에 에릭 알바 테란 도 앤틴과 결혼 (1994년 이혼), 1994년에 후베르투스 폰 카게넥 백작과 재혼 (1998년 이혼), 2남 1녀 |
가브리엘라 마리아 샤를로테 펠리치타스 엘리자베트 안토니아 | 1956년 - | 1978년, 크리스티안 마이스터와 결혼, 오토의 자녀 중 유일하게 왕족, 귀족 이외의 상대와 결혼 (1997년 이혼), 1남 2녀 |
발부르가 마리아 프란치스카 헬레네 엘리자베트 | 1958년 - | 1992년, 아르치발드 도글라스 백작과 결혼, 1남 |
카를 토마스 로베르트 마리아 프란치스쿠스 게오르크 바넘 | 1961년 - |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 수장 (1961년 - ), 프란체스카 티센보르네미차와 결혼 후 이혼, 1남 2녀, 크리스티안 니콜라우 데 알메이다 리드와 혼인 |
파울 게오르크 마리아 요제프 도미니쿠스 | 1964년 - | 1997년, 올덴부르크의 에일리카 여대공과 결혼, 1남 2녀 |
6. 칭호 및 영예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아버지 카를 1세가 오스트리아 황제,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황태자''' 칭호를 얻었으나, 이중제국 해체로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오스트리아의 오토 대공'''이라 칭했고, 유럽 왕가에서도 그에게 오스트리아 황제 대우를 했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시민권을 가졌으며, 유럽 의회 의원, 국제범유럽연맹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다음과 같은 훈장과 영예를 받았다.
국가 | 훈장 | 등급 | 수여 년도 |
---|---|---|---|
바이에른 | 바이에른 공로 훈장 | 수훈자 | 1978 |
크로아티아 | 드미타르 즈보니미르 대왕 훈장 | 대십자장 | 1996 |
에스토니아 | 테라 마리아나 십자 훈장 | 1급 | 1996 |
프랑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그랑크루아 | 2009[104][105] |
독일 | 독일 연방 공로 훈장 | 대십자장 | 1987 |
바티칸 |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훈장 | 대십자장 | 1980 |
바티칸 | 성 실베스테르 교황 훈장 | 대십자장 | |
헝가리 | 헝가리 공화국 공로 훈장 | 대십자장 | 1999 |
코소보 | 자유 훈장 | 금장 | |
라트비아 | 세 개의 별 훈장 | 사령관 | |
리투아니아 |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 훈장 | 사령관 | |
룩셈부르크 | 나사우 왕가의 금사자 훈장 | 기사 | |
북마케도니아 | 공로 훈장 | ||
로디지아 | 명예 군사 대사령관 | ||
산마리노 | 성 아가타 훈장 | 대십자장 | 2002 |
스페인 | 카를로스 3세 훈장 | 대십자장 | 1951 |
스페인 | 아프리카 훈장 | 대십자장 | |
남티롤 | 대공로 훈장 | 수훈자 |
- 금모양 기사단(오스트리아 지류) 기사단장 (1922–2000), 기사 (1916)
- 성 슈테판 훈장 대십자장
- 레오폴트 훈장 대십자장
- 티롤 귀족 레지스터 배지
- 범유럽 연합 독일 유럽 메달 특별 훈장
- 주데텐 독일인 협회 유럽 카를 상
- 프랑스 학사원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 메달
- 모로코 왕립 아카데미 메달
- 포르투갈 문화 아카데미 메달
- 왕립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 메달
- 콜롬비아 보고타 대학교 명예 교수
-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명예 펠로우
- 포르투갈 해군 연구소 명예 회원
- 슬로베니아 마리보르 대학교 명예 상원 의원
-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대학교 명예 박사
- 프랑스 로렌 지방 낭시 대학교 명예 박사
- 핀란드 투르쿠 대학교 명예 박사
-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교, 페치 대학교, 베스프렘 대학교 명예 박사
-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명예 박사
- 이탈리아 페라라 대학교 명예 박사
- 마케도니아 스코페 대학교 명예 박사
-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 위스콘신-밀워키 대학교, 탬파 대학교 명예 박사
- 이탈리아 스튜디오, 카살레 델 몬페라토 아카데미 학술 회원
6. 1. 칭호
Otto von HabsburgdeHabsburg Ottóhu
Oto von Habsburghr
- 1912년 11월 20일 – 1916년 11월 21일: ''전하''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자 황태자 오토, 헝가리,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의 왕자[81]
- 1916년 11월 21일 – 2011년 7월 4일: ''전하''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및 크로아티아의 황태자[81][82]
- 1916년 11월 21일 – 1918년 10월 29일: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슬라보니아의 왕세자 전하[81][82]
- 1957년 2월 8일 – 2011년 7월 4일: 오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박사[81]
- 1978년 - 2011년 7월 4일: 오토 폰 합스부르크 (독일 연방 공화국 시민권 취득 후 공식 명칭)
- 1990년 – 2011년 7월 4일: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 (크로아티아 공화국 시민권 취득 후 공식 명칭)[83]
수상 내역
국가 | 훈장 | 등급 | 수여 년도 |
---|---|---|---|
바이에른 | 바이에른 공로 훈장 | 수훈자 | 1978 |
크로아티아 | 드미타르 즈보니미르 대왕 훈장 | 대십자장 | 1996 |
에스토니아 | 테라 마리아나 십자 훈장 | 1급 | 1996 |
프랑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그랑크루아 | 2009[104][105] |
독일 | 독일 연방 공로 훈장 | 대십자장 | 1987 |
바티칸 |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훈장 | 대십자장 | 1980 |
바티칸 | 성 실베스테르 교황 훈장 | 대십자장 | |
헝가리 | 헝가리 공화국 공로 훈장 | 대십자장 | 1999 |
코소보 | 자유 훈장 | 금장 | |
라트비아 | 세 개의 별 훈장 | 사령관 | |
리투아니아 |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 훈장 | 사령관 | |
룩셈부르크 | 나사우 왕가의 금사자 훈장 | 기사 | |
북마케도니아 | 공로 훈장 | ||
로디지아 | 명예 군사 대사령관 | ||
산마리노 | 성 아가타 훈장 | 대십자장 | 2002 |
스페인 | 카를로스 3세 훈장 | 대십자장 | 1951 |
스페인 | 아프리카 훈장 | 대십자장 | |
남티롤 | 대공로 훈장 | 수훈자 |
6. 2. 영예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다양한 국가 및 단체로부터 수많은 영예를 받았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
- * 오스트리아 제국 및 왕립 금모리스 기사단 기사, ''1916년''[84], 국가원수, ''1922년''[85]
- * 헝가리 왕립 성 이슈트반 기사단 국가원수[85]
- * 제국 및 왕립 레오폴트 훈장 국가원수[85]
국가 | 훈장 | 수여 년도 |
---|---|---|
크로아티아 | 드미타르 즈보니미르 대공 훈장 대십자 훈장[85][83] | |
에스토니아 | 테라 마리아나 십자 훈장 대십자 훈장[85] | |
프랑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 훈장[85][86][87] | 2008년 10월 31일 |
독일 |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훈장[85] | |
바이에른 | 공로 장식 회원[85] | |
헝가리 | 헝가리 공화국 공로 훈장 대십자 훈장[88] | |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가 | 왕립 지극히 성스러운 천사 기념 훈장 기사 대훈장[85] | |
두 시칠리아 왕가 | 성 야누아리우스 왕립 훈장 칼라와 함께 기사 대십자 훈장[85] | |
두 시칠리아 왕립 성 게오르기우스 군사 콘스탄티누스 훈장 칼라와 함께 재판관 기사 대십자 훈장[85] | ||
파르마 공작 왕가 | 파르마 왕립 성 게오르기우스 군사 콘스탄티누스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85] | |
코소보 | [http://www.medals.org.uk/kosovo/kosovo002.htm 자유 훈장, 특별 등급][85] | |
라트비아 | 세 개의 별 훈장 사령관[85] | |
리투아니아 | 게디미나스 대공 훈장 사령관[85] | |
룩셈부르크 | 나사우 왕가 금사자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85] | |
모로코 | 군사 공로 훈장 기사[85] | |
네덜란드 | 오렌지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85] | |
북마케도니아 | [https://web.archive.org/web/20150925105735/http://pretsedatel.gov.mk/en/media-centre/speeches/364.html 공로 훈장] 대십자 훈장[85] | |
파키스탄 | 위대한 지도자 훈장 대훈장[85] | |
포르투갈 왕가 | 왕립 빌라 비초사 무염시태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85] | |
로디지아 | 공로 훈장 대십자 훈장[85] | |
산마리노 | 성 아가타 훈장 대십자 훈장[85] | |
몰타 기사단 | 몰타 기사단 복종 2등급 재판관 기사 대십자 훈장[85][89] | |
스페인 | 카를로스 3세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85] | |
아프리카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85] | ||
바티칸 시국 | 튜튼 기사단 명예 기사 대사령관[85] | |
교황청 | 성 그레고리오 대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85] | |
성 실베스테르 훈장 기사 대십자 훈장[85] |
- 티롤 귀족 등록(Tyrolean Nobility Register) 배지
- 범유럽 연합: 범유럽 연합 독일 유럽 메달 특별 훈장
- 주데텐 독일인 협회: 주데텐 독일인 협회 유럽 카를 상
- 프랑스 학사원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메달, 프랑스 파리
- 모로코 왕립 아카데미 메달, 모로코
- 포르투갈 문화 아카데미(Academia da Cultura Portuguesa) 메달, 포르투갈 리스본
- 왕립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Real Academia de Ciencias Morales y Políticas) 메달, 스페인 마드리드
- 명예 교수 콜롬비아 보고타 대학교
- 명예 펠로우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 명예 회원 포르투갈 해군 연구소(Instituto de Estudos da Marinha)
- 명예 상원 의원 슬로베니아 마리보르 대학교
- 명예 박사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대학교
- 프랑스 로렌 지방 낭시 대학교 명예 박사
- 핀란드 투르쿠 대학교 명예 박사
-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교 명예 박사
- 헝가리 페치 대학교 명예 박사
- 헝가리 베스프렘 대학교 명예 박사
-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명예 박사
- 이탈리아 페라라 대학교 명예 박사
- 마케도니아 스코페 대학교 명예 박사
-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신시내티 대학교 명예 박사
-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 위스콘신-밀워키 대학교 명예 박사
-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 탬파 대학교 명예 박사
- 이탈리아 스튜디오, 카살레 델 몬페라토 아카데미(Studium, Accademia di Casale e del Monferrato per l'Arte, la Letteratura, la Storia, le Scienze e le Varie Umanità) 학술 회원
- : 대공로훈장 수훈[85]
7. 가계도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 가계도 | ||
---|---|---|
1.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 | ||
2. 오스트리아의 카를 1세 | ||
3. 파르마의 지타 공주 | ||
4. 오스트리아의 오토 대공 | ||
5.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공주 | ||
6.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 | ||
7.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 인판타 | ||
8. 오스트리아의 카를 루드비히 대공 | ||
9.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눈치아타 공주 | ||
10. 작센의 게오르크 | ||
11. 포르투갈의 마리아 아나 인판타 | ||
12. 파르마 공작 카를 3세 | ||
13. 아르투아의 루이즈 공주 | ||
14. 포르투갈의 미겔 1세 | ||
15. 뢰벤슈타인의 아델라이데 공주 |
8. 일화
오토는 독일어,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말년에 그는 독일어, 헝가리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약 40권의 책을 저술했다.[11]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언젠가 많은 나라를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여러 언어를 배우게 했다.[12][13]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유럽 의회에서 연설을 시작하려 할 때, 북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통합주의 개신교 목사이자 유럽 의회 의원인 이안 페이즐리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적그리스도다"라고 외치며 포스터를 들었다. 오토는 다른 의원들이 페이즐리에게 종이와 다른 물건들을 던지는 동안, 페이즐리의 현수막을 빼앗아 다른 유럽 의회 의원들과 경호원들과 함께 그를 거칠게 다루고, 주먹질을 하고, 셔츠를 찢고, 넥타이를 잡아당겨 그를 머리부터 의회 밖으로 내쫓았다. 교황은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5]
참조
[2]
뉴스
Otto von Hapsburg, a Would-Be Monarch, Dies at 98
https://www.nytimes.[...]
2011-07-04
[3]
뉴스
Habsburg: Last heir to Austro-Hungarian empire dies
https://www.bbc.co.u[...]
2011-07-05
[4]
뉴스
Die vielen Pflichten des Adels
http://www.wienerzei[...]
2011-07-11
[5]
뉴스
Death of former 'kaiser in exile' and last heir to Austro-Hungarian throne
https://www.irishtim[...]
2011-07-05
[6]
뉴스
Kaiser-Sohn Otto von Habsburg gestorben
http://www.dw-world.[...]
Deutsche Welle
2011-07-04
[7]
웹사이트
Die beliebtesten Irrtümer zur Monarchie
http://www.wienerzei[...]
Wienerzeitung.at
2011-07-16
[8]
웹사이트
The Budapest Times – Hungary's leading English Language source for daily news
http://www.budapestt[...]
Budapesttimes.hu
2011-07-09
[9]
웹사이트
Trauer um Otto von Habsburg
http://www.kathweb.a[...]
Kathweb.at
2011-07-08
[10]
뉴스
Wiener Zeitung
1912-11-26
[11]
웹사이트
Otto von Habsburg, heir to Austria's last emperor, dies at 98
http://www.thelocal.[...]
2011-07-05
[12]
간행물
Habsburg Empire: Clown Prince
http://www.time.com/[...]
2011-07-05
[13]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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