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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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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는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을 통치한 유럽의 왕가이다. 1736년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으로 시작되어,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프란츠 2세 등을 거치며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왕국 등을 통치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멸망했다. 주요 분가로는 토스카나 대공 가문, 모데나 공작 가문, 테셴 공작 가문 등이 있으며, 현재는 카를 폰 합스부르크가 가문의 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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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개요
1806년 이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문장
1806년 이후 가계 문장
모가(母家)합스부르크가(여계)
로렌가(부계)
창립1736년
창립자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신성 로마 황제)
현재 수장카를 폰 합스부르크
폐위오스트리아-헝가리: 1918년 (카를 1세 겸 4세)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국정 참여 포기
마지막 통치자오스트리아-헝가리: 카를 1세 겸 4세 (1916년–1918년)
멕시코: 막시밀리아노 1세 (1864년–1867년)
토스카나: 페르디난도 4세 (1859년–1860년)
모데나: 프란체스코 5세 (1846년–1859년)
모토A.E.I.O.U. 및 (힘을 합쳐)
칭호신성 로마 황제 (1745년–1806년)
오스트리아 황제 (1804년–1918년)
멕시코 황제 (1864년–1867년)
로마 왕 (1745년–1806년)
보헤미아 왕 (1740년–1918년)
크로아티아 왕(1740년–1918년)
헝가리 왕 (1740년–1918년)
오스트리아 대공 (1740년–1804년)
헝가리 팔라틴 백작 (1790년–1918년)
토스카나 대공 (1737년–1859년)
모데나 레조 공작(1814년–1859년)
파르마, 피아첸차, 과스탈라 여공작(1814년–1847년) (자세히 보기)
경칭황제 폐하 및 왕족
사도적 폐하
폐하
전하
통치 국가
국가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독일 연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멕시코 제2제국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파르마 공국
분가
분가 목록오스트리아-에스테 가문
합스부르크-토스카나
호엔베르크(비 왕조)

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역사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첫 번째 군주는 요제프 2세였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개혁을 시행했지만, 대부분 성직자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1790년 요제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 레오폴트 2세가 즉위했다. 레오폴트 2세는 1791년 필니츠 선언을 통해 유럽 열강에게 프랑스 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군사적 개입 없이 프랑스 왕가를 도울 것을 요청했으나, 프랑스 제1 공화국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기 며칠 전에 사망했다.

1792년, 레오폴트 2세의 아들 프란츠 2세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다른 유럽 군주들과 함께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혁명 프랑스에 대항했다. 초기에는 동맹군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이탈리아 전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연패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밀라노 공국은 프랑스에 넘어가고, 오스트리아는 베네토, 이스트리아, 달마티아를 얻었다.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후 프란츠 2세는 스스로 오스트리아 황제로 선포하여 제국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라이프치히 전투(1813)와 워털루 전투(1815)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빈 회의가 열려 유럽은 구체제로 복귀했다.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잃었던 영토를 회복했고,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신성 동맹을 결성하여 친프랑스 및 독립 혁명 운동을 진압하려 했다.

이후 프란츠 2세는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조언에 따라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켜 1848년 혁명을 초래했다. 이 혁명으로 메테르니히는 제국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페르디난트 1세는 퇴위했으며, 18세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모두 패배하여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아우스글라이히를 통해 헝가리 왕국에 실질적인 자치를 부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 제국 간 발칸 반도를 둘러싼 긴장은 고조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동맹국에 가담하여 연합국과 맞섰다.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하고 카를 1세가 즉위했으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권력 행사를 포기했다. 1919년 그는 망명길에 올랐고,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여러 독립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새로운 오스트리아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아 망명과 재산 몰수를 당했다. 1961년, 가문의 마지막 수장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군주제와 계승권을 포기하고 망명에서 돌아왔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귀족 칭호를 인정받지 못해 오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박사로 불렸다.

2. 1. 로렌 가문

로렌 가문은 현재 프랑스독일과의 국경 지대인 로렌 지방에 있었던 로렌 공국을 통치한 가문이다. 로렌은 고대 로타링기아에서 유래했으며,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는 프랑크 왕국의 심장부와도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영역은 작았지만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귀속을 둘러싸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15세기에는 부르고뉴의 샤를 용담공이 자신의 영토 사이에 끼인 로렌을 병합하려 했지만, 낭시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신과 부르고뉴 공국의 멸망을 초래했다. 이 전투에서 용담공을 패사시킨 로렌 공 르네 2세는 프란츠 1세 슈테판의 직계 조상이다(참고로 프란츠 1세 슈테판은 샤를 용담공의 혈통도 이어받고 있다). 르네 2세는 모계인 발루아-앙주 가문에서 공위를 계승했지만, 부계인 보데몽 가문은 모계의 할머니 이자벨 여공까지 이어져 온 로렌 가문(샤토누아 가문)의 방계였으며, 이후 프란츠 1세 슈테판까지 역대 로렌 공은 이 가문에서 나왔다. 또한, 르네 2세의 차남 기즈 공 클로드에서 시작되는 분가인 기즈 가문은 발루아 왕조 후기에 프랑스에서 권세를 떨쳤다.

1630년대 이후, 로렌 공국은 여러 차례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침략을 받았고, 로렌 공의 일족은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합스부르크가의 황제를 섬겼으며, 이후에도 합스부르크가와의 관계를 깊게 했다. 14세기 초, 알브레히트 1세의 딸 엘리자베트와 로렌 공 페리 4세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가와 로렌 가문의 관계가 시작되었지만, 그 전까지 로렌 가문은 프랑스 왕가와의 관계가 강했다. 샤를 5세는 재위 기간에 공국을 통치하지 못하고 명목뿐이었던 로렌 공이었지만,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딸 엘레오노레와 결혼하여, 후계자 레오폴트를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낳았다. 레오폴트는 1697년 레위스윅 조약에서 로렌을 일단 반환받았고, 이듬해 1698년에 루이 14세의 조카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와 결혼했다. 프란츠 1세 슈테판은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이다.

프란츠 1세 슈테판은 로렌 가문의 당주였으며,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13세의 증손자이기도 했다. 사촌 여동생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연인 관계였지만, 결혼과 함께 제위 계승자가 되면서 그 국제적 승인을 대가로 로렌을 프랑스 왕 루이 15세에게 양도해야 했다. 루이 15세는 로렌 공위를 장인인 전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주었고, 그가 죽은 후 프랑스 왕령으로 병합했다. 그 대가로 프란츠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위를 계승했다. 프란츠는 부계로는 메디치 가문의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의 장녀 엘레오노라 데 메디치의, 모계로는 여섯째 딸 마리 드 메디시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2. 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는 아들이 없었고, 친족 중에도 후계자가 될 남자가 없었다. 그래서 국사 조칙에 따라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상속인으로 삼아 합스부르크 가문 영지, 보헤미아헝가리의 왕위,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잇게 했다. 그리고 남편인 로렌 공작 프란츠 슈테판을 황제에 앉히기로 결정하고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에게 승인받았다.[1]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자,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 폴란드 국왕 겸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 등이 루이 15세와 동맹을 맺고 이전의 약속을 무시하며 영토와 황위를 요구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카를 알브레히트와 아우구스트 3세는 각각 카를 6세의 형 요제프 1세의 딸(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촌)인 마리아 아말리에와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하여 아내의 상속권을 주장했다.[1]

이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슐레지엔을 빼앗겼고, 카를 알브레히트는 보헤미아를 일시 점령하고 황제 카를 7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반격하여 슐레지엔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보헤미아에서 바이에른을 격퇴했다. 1745년 카를 7세가 짧은 재위 후 사망하자, 프란츠 슈테판이 프란츠 1세로 황위에 올랐다. 이후 신성 로마 황위는 제국 해체까지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손들이 계승했다.[1]

2. 3. 부르봉 가문과의 동맹

프란츠 슈테판의 동생 카를 알렉산더 공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지만(이중 결혼), 형제 부부와는 달리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는 5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차남 카를 요제프는 성인이 되기 전에 요절했고, 장남 요제프 2세와 오남 마크시밀리안 프란츠는 자녀가 없었다. 따라서 삼남 레오폴트 2세와 사남 페르디난트 계통만 가계가 지속되었다. 페르디난트 계통은 19세기에 단절되었으며, 현재 존재하는 계통은 모두 레오폴트 2세의 남계 자손이다.

2. 4. 유럽에서의 왕조 통치 종말

합스부르크가 참조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첫 번째 구성원은 요제프 2세였으며, 그는 계몽주의 시대에 성장한 군주였다. 1790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레오폴트 2세가 뒤를 이었고, 1791년 필니츠 선언을 통해 유럽 열강에게 군사적 개입 없이 프랑스 왕가를 도울 것을 요청했다. 그는 프랑스 제1 공화국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기 며칠 전에 사망했다.

1792년,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인 프란츠 2세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다른 유럽 군주들과 함께 혁명 프랑스에 대항하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동맹은 초반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곧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이탈리아 전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여러 차례 패배했다.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밀라노 공국은 프랑스에 넘어가고, 오스트리아는 베네토, 이스트리아, 달마티아를 얻었다. 프란츠 2세는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해체를 강요받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제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오스트리아 황제로 선포했었다.

라이프치히 전투(1813)와 워털루 전투(1815)에서의 패배 이후,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워털루와 같은 해에 빈 회의가 열렸고, 이를 통해 복고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잃었던 모든 이탈리아, 슬라브, 독일 영토를 회복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간에 신성 동맹이 결성되어 유럽에서 발생할 모든 친 프랑스 또는 독립 혁명 운동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프란츠 2세는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조언에 따라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독립에 대한 새로운 이상이 대두되어 1848년 혁명이 발발했고, 이는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로 인해 메테르니히는 제국 재상직에서 축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18세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았다.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는 유럽에서 정치적 또는 군사적 권위를 가진 마지막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사람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치렀다. 두 전쟁 모두 패배로 끝났고, 이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종식시켰으며, 왕조의 점진적인 쇠퇴를 가속화했다.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아우스글라이히 조항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내 헝가리 왕국에 실질적인 자치를 부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 제국이 발칸 반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러시아 사이에 강한 긴장이 조성되었고,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 제국이탈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불가리아 왕국, 오스만 제국)과 연합국 (대영 제국, 프랑스 제3 공화국, 러시아 등) 사이에서 발발했다.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증손자인 카를 1세가 뒤를 이었다. 카를 1세(마지막 군주)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권력 행사를 포기했지만 퇴위하지는 않았다. 그는 1919년 4월 3일에 망명해야 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독립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새로운 오스트리아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은 망명을 강요당하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1961년, 가문의 마지막 수장이자 전 유럽 의회 의원이었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망명 종료의 대가로 군주제와 그의 후손의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에서 귀족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박사로 알려졌다.

3. 주요 분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는 여러 분가로 나뉘어 유럽 각지를 통치했다. 주요 분가는 다음과 같다.

3. 1. 오스트리아 황제 가문

합스부르크가 참조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첫 번째 구성원은 요제프 2세였으며, 그는 계몽주의 시대에 성장한 군주였다. 1790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레오폴트 2세가 뒤를 이었다. 1792년,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인 프란츠 2세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해체를 강요받았지만, 이미 자신의 제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오스트리아 황제로 선포했었다.

라이프치히 전투(1813)와 워털루 전투(1815)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워털루와 같은 해에 빈 회의가 열렸고, 이를 통해 복고가 시작되었다. 회의는 구체제의 복원을 요구했다.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간에 신성 동맹이 결성되어 유럽에서 발생할 모든 친 프랑스 또는 독립 혁명 운동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프란츠 2세는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조언에 따라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독립에 대한 새로운 이상이 대두되어 1848년 혁명이 발발했고, 이는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로 인해 메테르니히는 제국 재상직에서 축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18세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았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의 종가에 해당한다. 신성 로마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외에 헝가리 왕, 보헤미아 왕도 겸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에 해체되었고, 프란츠 2세는 황제위를 물러났지만, 이에 앞서 1804년부터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를 칭했으며, 이후 이 황제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멸망까지 계승되었다. 이러한 황제위 및 왕위는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로부터 마지막 카를 1세까지 7대에 걸쳐 계승되었지만, 직계 계승된 것은 3번뿐이다.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요제프 2세는 아버지로부터 황제위를, 어머니로부터 오스트리아 대공위 및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위를 계승했지만, 자식이 없어 토스카나 대공위를 계승했던 동생 레오폴트 2세가 대신 황제위 및 왕위에 올랐다. 레오폴트 2세로부터 프란츠 2세/1세, 페르디난트 1세까지는 직계 계승이 이어졌지만, 자식이 없는 페르디난트 1세가 1848년3월 혁명으로 퇴위하자, 동생 프란츠 카를 대공 (황제위 사퇴)의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했다. 또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제국의 황제가 되었지만, 멕시코의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졌다.

프란츠 요제프 1세 치하에서 1867년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으로 재편성된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왕을 겸하는 점은 이전과 같았지만, 군사, 외교, 재정을 제외하고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두 정부가 독자적인 정책을 수행하는 체제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유일한 아들이었던 황태자 루돌프가 죽은 후,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황위 계승자로 삼았지만, 1914년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면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대전 중 프란츠 요제프가 사망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카 카를 1세가 황제위를 계승하지만, 대전 말기인 1918년에 제국은 멸망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성립됨과 동시에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를 시작으로 하는 많은 나라들이 독립했다. 카를 1세는 합스부르크 법을 거부하고 망명하여, 1922년에 병사했다.

6살도 안 되어 황태자 지위를 잃은 카를 1세의 장남 오토는 20세기의 말에 독일에서 선출된 유럽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오토는 2011년에 98세로 사망했지만,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의 당주 자리는 2006년에 고령을 이유로 장남 카를에게 넘겨주었다. 카를도 유럽 의회 의원을 역임했지만,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선출되었다.

3. 2. 토스카나 대공 가문

토스카나 대공국은 메디치 가문이 통치했지만, 1737년에 이 가문이 단절되자 프란츠 슈테판이 대공 프란체스코 2세로 계승했다. 그러나 토스카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과는 독립적으로 통치되었으며(본령을 다스리는 당주가 토스카나 대공을 겸임하지 않음), 프란츠 슈테판에서 차남 레오폴트 2세로, 레오폴트가 황위를 계승한 후에는 그의 차남 페르디난도 3세로 대공위가 계승되었다. 페르디난도 3세를 토스카나 대공가(합스부르크-토스카나 가문)의 시작으로 본다.

역대 대공은 훌륭한 토스카나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리소르지멘토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페르디난도 4세가 1860년에 폐위되었으며, 주민 투표 결과,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어 대공국은 소멸되었다. 대공국의 수도 피렌체통일 이탈리아 정부의 잠정적인 수도가 되었다. 토스카나 대공가는 그 후 오스트리아의 종가를 의지하여 오스트리아 귀족으로 존속했으며, 가계는 제국의 멸망 후에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름재위 기간비고
프란체스코 2세1737년 - 1765년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
레오폴드 1세1765년 - 1790년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드 2세 (황제 즉위 시 대공위 양위)
페르디난도 3세1790년 - 1799년, 1814년 - 1824년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중단: 1799년 - 1814년
레오폴도 2세1824년 - 1859년생전에 대공위 양위
페르디난도 4세1859년 - 1860년폐위


3. 3. 모데나 공작 가문

모데나 공국은 원래 에스테 가문이 통치했지만, 1803년 에르콜레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단절되었다. 에르콜레 3세는 프란츠 슈테판의 넷째 아들인 페르디난트 대공을 상속자로 지명하고, 딸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와 결혼시켰다.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을 칭하고 새로운 모데나 공가로서 오스트리아-에스테 가문을 세웠지만, 나폴레옹 전쟁 중에 공위를 계승하지 못한 채 1806년에 사망했고, 아들 프란체스코 4세가 1814년에 재건된 모데나 공국의 공위에 올랐다. 그러나 모데나 공국도 리소르지멘토 과정에서 1860년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었다.

공국에서 쫓겨난 프란체스코 5세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명목상의 모데나 공위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계승했다. 다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에스테 가문의 혈통을 잇지 않았고, 이 계승은 그것을 근거로 하지 않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된 후에는 조카 카를 1세에게, 카를의 황제 즉위 후에는 차남 로베르트에게 공위가 계승되었다. 카를 1세는 페르디난트 대공과 마리아 베아트리체 부부의 장녀의 현손인 치타와 결혼했기 때문에, 로베르트 이후의 자손은 오스트리아-에스테 가문과의 혈통상 연결이 있다.

현재의 모데나 공,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로렌츠는 로베르트의 아들이지만, 벨기에 공주 아스트리드와 결혼하여 왕실의 일원이 되었으며, 벨기에 왕자의 칭호도 가지고 있다.

모데나 공국의 군주
프란체스코 4세 (1814년 - 1846년)
프란체스코 5세 (1846년 - 1859년)


3. 4. 테셴 공작 가문

실레지아 남동부에 있던 체신 공국(독일어: 테셴 공국)은 피아스트 가문 지파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여공 엘주비에타 루크레치아가 1653년에 사망한 후, 보헤미아 왕으로서 합스부르크가 군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 그러나 황제 카를 6세 시대에 로렌 공작 레오폴트에게 양도되었고, 레오폴트 사후 아들 프란츠 슈테판이 계승했다.[1]

프란츠 슈테판이 황제위에 오르면서 체신 공작위는 다시 황제위와 통합되었지만, 토스카나 대공국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가의 본령과는 별도로 상속되게 되어 프란츠 사후 장남 요제프 2세를 거쳐 그의 여동생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남편 작센 공자알베르트 카지미르와 공동으로 계승했다.[1] 부부에게는 친 자식이 없었기에,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남동생인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셋째 아들 카를 대공을 양자로 삼아 공국을 상속시켰다.[1] 카를은 형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 치세에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으로서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카를을 시조로 하는 가계가 새로운 체신 공가(합스부르크-테셴 가)가 되었다.[1]

이 가문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최고 사령관을 맡았던 프리드리히 대공, 폴란드 국왕 후보가 되기도 했던 카를 슈테판 대공, 양 시칠리아 왕페르디난도 2세의 왕비 마리아 테레지아, 스페인 왕알폰소 12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등이 배출되었다.[1]

체신 공국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제2공화국 사이에서 분할되어 소멸했다.[1] 체신 공가의 혈통은 그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1]

3. 5. 기타 분가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은 1737년에 가문이 단절되자 프란츠 슈테판이 대공 프란체스코 2세로 계승했다. 토스카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과는 독립적으로 통치되었으며, 프란츠 슈테판에서 차남 레오폴트 2세로, 레오폴트가 황위를 계승한 후에는 그의 차남 페르디난도 3세로 대공위가 계승되었다. 페르디난도 3세를 토스카나 대공가(합스부르크-토스카나 가문)의 시작으로 본다.[1]

역대 대공은 훌륭한 토스카나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리소르지멘토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페르디난도 4세가 1860년에 폐위되었으며, 주민 투표 결과,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어 대공국은 소멸되었다. 대공국의 수도 피렌체통일 이탈리아 정부의 잠정적인 수도가 되었다. 토스카나 대공가는 그 후 오스트리아의 종가를 의지하여 오스트리아 귀족으로 존속했으며, 가계는 제국의 멸망 후에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1]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일곱째 아들인 요제프 안톤 대공은 요절한 형 알렉산더 레오폴트 대공을 대신하여 1796년에 헝가리 부왕(Palatine of Hungary영어)의 지위에 올랐다. 이 가문 역시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의 유력한 분가 중 하나가 되었으며, 벨기에 국왕레오폴드 2세의 왕비 마리 앙리에트, 제1차 세계 대전 후 새로운 헝가리 왕국의 국왕으로 잠시 옹립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등이 배출되었다.[1]

주요 가계로는 이 외에도 레오폴트 2세의 열째 아들이자 롬바르도-베네치아 왕국의 부왕이 된 라이너 요제프 대공의 가문이 있으며, 사르데냐 왕국 국왕, 나중에는 초대 이탈리아 왕이 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왕비 마리아 아델라이데 등이 배출되었다.[1]

귀천상혼으로 인해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가문을 허락받지 못한 가계로는 레오폴트 2세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알프스 왕"으로 불린 요한 대공과 평민의 딸 안나 프로플 사이의 아들 가문인 메란 백작가,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백작 영애 조피 호텍 사이의 자녀 가문인 호엔베르크 공작가가 알려져 있다.[1]

4. 현대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마지막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1세(헝가리 왕 카로이 4세)는 2004년에 복자로 인정받았으며, 현대 합스부르크 일족 사이에서 깊이 숭배받고 있다.


1736년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으로 시작된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는 약 300년 동안 5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4][5][6] 일족의 약 절반은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며, 나머지는 유럽, 미국, 아프리카 등지에 흩어져 있다.[6] 가독 상속은 준 살리카법을 따르지만, 구성원이 많고 전 세계에 퍼져 있어 남계 혈통 단절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 구성원들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는다. 게오르크 합스부르크-로트링겐에 따르면, WhatsApp에 일족 그룹이 있으며 280명이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5] 2014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통일된 역사 해석을 작성했고,[6] 2016년에는 300여 명이 바티칸 궁전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를 알현했다.[9][10]

구 제국 영역에는 오스트리아의 슈바르츠-겔베 아리안츠, 체코의 코르나 체스카 등 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을 표방하는 군주주의 조직이 존재하지만, 현재는 미약하다.

4. 1. 가문의 현황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유럽에서 정치적 또는 군사적 권위를 가진 마지막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사람이었다. 그의 통치 초기(1848~1916)에 오스트리아는 중부 유럽의 지배 세력이었고, 은 대륙에서 가장 큰 대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황제는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종식되었고 왕조는 점진적으로 쇠퇴했다.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증손자인 카를 1세가 뒤를 이었다. 카를 1세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권력 행사를 포기했지만 퇴위하지는 않았다. 그는 1919년 4월 3일에 망명해야 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독립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새로운 오스트리아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은 망명을 강요당하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망명 법은 여전히 카를 황제의 후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1961년, 가문의 마지막 수장이자 전 유럽 의회 의원이었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망명 종료의 대가로 군주제와 그의 후손의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에서 귀족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박사로 알려졌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현재 수장은 카를 폰 합스부르크이며, 2007년 부친 오토가 가문의 수장직을 포기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카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의 장손이다.

1736년에 결혼한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를 시조로 하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는 그 후 약 300년 동안 5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4][5][6] 일족의 약 절반은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으며, 나머지는 다른 유럽, 미국, 아프리카에 흩어져 있다.[6] 가독 상속 방법으로 준 살리카법을 채택하고 있지만, 구성원이 많고 전 대륙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남계 혈통이 단절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족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게오르크 합스부르크-로트링겐에 따르면, WhatsApp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일족만의 그룹이 있으며, 280명이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5] 2016년 11월 5일, 일족 약 300명이 바티칸 궁전을 방문하여 교황 프란치스코에게 알현했다.[9][10]

1918년 제정 붕괴 후에도 한동안은 귀천상혼을 엄격하게 금지했지만, 오늘날에는 혼인 기준이 대폭 완화되어 더 이상 상대는 왕후귀족이 아니어도 된다. 당주에게 사전 보고하고, 가톨릭의 전통을 지켜 결혼하는 것만으로 기본적으로는 괜찮다고 한다.

현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특히 헝가리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12] 2017년 여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제안을 받은 헝가리 정부는 마지막 황태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유산을 처리하는 재단을 설립했다.[13] 2019년 12월 현재, 게오르크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헝가리 외교관을, 헝가리 지류 출신의 에두아르트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헝가리 주 바티칸 대사를 맡고 있다.[12]

4. 2. 헝가리와의 관계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아우스글라이히 조항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내 헝가리 왕국에 실질적인 자치를 부여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연합했지만, 내부 정책과 행정 측면에서는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 국가 원수의 칭호는 "오스트리아 황제 겸 헝가리 왕"이 되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로도 불렸다.[3]

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 제국이 발칸 반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러시아 사이에 강한 긴장이 조성되었고,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 제국이탈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현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특히 헝가리에서 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12] 헝가리 인재부 장관 발로그 졸탄은 재임 중에 "우리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애정을 가지고, 오스트리아보다 더 애정을 가지고, 합스부르크가의 유산을 키우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12] 2017년 여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제안을 받은 헝가리 정부는 마지막 황태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유산을 처리하는 오토 합스부르크 재단을 설립했다.[13] 2019년 12월 현재, 게오르크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헝가리 외교관을, 헝가리 지류 출신의 에두아르트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 헝가리 주 바티칸 대사를 맡고 있다.[12]

4. 3. 귀천상혼 문제

1918년 제정 붕괴 후에도 한동안 귀천상혼을 엄격하게 금지하여 귀천상혼을 한 자에게는 다른 가문을 일으키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예: 클레멘스 살바토르의 "알텐부르크 가문")[3] 오늘날에는 혼인 기준이 대폭 완화되어 더 이상 상대는 왕후귀족이 아니어도 된다. 당주에게 사전 보고하고, 가톨릭의 전통을 지켜 결혼하는 것만으로 기본적으로는 괜찮다고 한다.

귀천상혼을 금지하는 규정이 사실상 철폐된 후, 제정 폐지 후에 귀천상혼을 한 일족에 대해 백작위가 주어지거나 동등 결혼으로의 승격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5. 가계도


-- 프란츠 요제프 1세 (1830–1916)
* -- 루돌프 황태자 (1858–1889)
막시밀리안 1세 (1832–1867); 배우자 벨기에의 샤를로트
-- 카를 루트비히 대공 (1833–1896)
*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1863–1914); 귀천상혼 배우자 호엔베르크 공작부인 조피
* -- 오토 프란츠 대공 (1865–1906)
** -- 카를 1세 (1887–1922)
*** -- 오토 황태자 (1912–2011)
'''카를 대공''' (1961년 출생)
* '''(1)''' 페르디난트 대공 (1997년 출생)
'''(2)''' 게오르크 대공 (1964년 출생); 배우자 올덴부르크의 에이리카 공작부인
* '''(3)''' 카를-콘스탄틴 대공 (2004년 출생)
*** -- 로베르트 대공 (1915–1996)
'''(4)''' 로렌츠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1955년 출생); 배우자 벨기에의 아스트리드 공주
* '''(5)''' 아메데오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1986년 출생); 배우자 엘리사베타 마리아 로스보흐 폰 볼켄슈타인
** '''(6)''' 막시밀리안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2019년 출생)
* '''(7)''' 조아킴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1991년 출생)
'''(8)''' 게르하르트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1957년 출생); 배우자 아이리스 얀드라시츠
'''(9)''' 마르틴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1959년 출생); 배우자 이젠부르크의 카타리나 공주
* '''(10)''' 바르톨로메우스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2006년 출생)
* '''(11)''' 엠마누엘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2008년 출생)
* '''(12)''' 루이지 아메데오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2011년 출생)
*** -- 펠릭스 대공 (1916–2011)
'''(13)''' 카를로스 펠리페 대공 (1954년 출생); 1994년 (1) 마르티나 도나트와 결혼 [1997년 이혼 (무효화?)], (2) [시민 결혼 (종교적?)] 애니-클레르 라크람베, 두 아들, 두 결혼에서 각각 한 명 (첫째 아들은 결혼 전에 출생)
* '''(14)''' 루이-다미안 대공 (1998년 출생)
''라이문트 대공 (1958–2008)'', 배우자 베티나 괴츠
* '''(15)''' 펠릭스 대공 (1996년 출생)
'''(16)''' 이슈트반 대공 (1961년 출생), 배우자 파올라 데 테메스바리
* '''(17)''' 안드레아스 대공 (1994년 출생)
* '''(18)''' 팔 대공 (1997년 출생)
*** -- 카를 루트비히 대공 (1918–2007)
'''(19)''' 루돌프 대공 (1950년 출생); 배우자 헬레네 드 빌렌파게 드 보겔상크 남작부인 (결혼은 소급하여 왕조적으로 승인됨)[2]
* '''(20)''' 카를 크리스티안 대공 (1977년 출생); 배우자 에스텔 드 생 로맹
* '''(21)''' 유카리스테인 공동체의 사제인 요하네스 합스부르크-로렌 (1981년 출생)
* '''(22)''' 토마스 대공 (1986년 출생)
* '''(23)''' 프란츠-루드비히 대공 (1988년 출생)
* '''(24)''' 미하엘 대공 (1990년 출생)
* '''(25)''' 요제프 대공 (1991년 출생)
'''(26)''' 카를 크리스티안 대공 (1954년 출생); 배우자 룩셈부르크의 마리 아스트리드 공주
* '''(27)''' 임레 대공 (1985년 출생); 배우자 캐슬린 워커
** '''(28)''' 카를 대공 (2023년 출생)
* '''(29)''' 크리스토프 대공 (1988년 출생), 배우자 아델라이드 드라페-프리쉬
** '''(30)''' 요제프 대공 (2020년 출생)
* '''(31)''' 알렉산더 대공 (1990년 출생); 배우자 나타샤 루미안체프-파슈케비치
*** -- 루돌프 대공 (1919–2010)
'''(32)''' 카를 페터 대공 (1955년 출생); 배우자 부르봉-두 시칠리아의 알렉산드라 공주
* '''(33)''' 로렌츠 대공 (2003년 출생)
'''(34)''' 시메온 대공 (1958년 출생); 배우자 부르봉-두 시칠리아의 마리아 공주
* '''(35)''' 요하네스 대공 (1997년 출생)
* '''(36)''' 루드비히 대공 (1998년 출생)
* '''(37)''' 필리프 대공 (2007년 출생)
** -- 막시밀리안 오이겐 대공 (1895–1952)
*** -- ''페르디난트 대공 (1918–2004)''
'''(38)''' 막시밀리안 대공 (1961년 출생); 배우자 사라 마야 알-아스카리
* '''(39)''' 니콜라우스 대공 (2005년 출생)
* '''(40)''' 콘스탄틴 대공 (2007년 출생)
*** -- ''하인리히 대공 (1925–2014)''
'''(41)''' 필리프 대공 (1962년 출생); 배우자 마야수니 히스
'''(42)''' 페르디난트 대공 (1965년 출생); 배우자 하르덴베르크의 카타리나 백작부인
* '''(43)''' 야콥-막시밀리안 대공 (2002년 출생)
'''(44)''' 콘라드 대공 (1971년 출생); 배우자 아슈미타 고스와미.

  • *
    페르디난트 3세 (1769–1824), 제국의 토스카나 가문의 창시자.
  • ** 레오폴트 2세 (1797–1870)

페르디난트 4세 (1835–1908)
* -- 페터 페르디난트 대공 (1874–1948)
** -- 고트프리트 대공 (1902–1984)
*** ''레오폴트 프란츠 대공 (1942–2021)''
'''(45)''' 시기스문트 대공, 토스카나 대공 (1966년 출생); 배우자 엘리사 에드몬스턴
* '''(46)''' 레오폴트 대공, 토스카나 대공자 (2001년 출생)
* '''(47)''' 막시밀리안 대공 (2004년 출생)
'''(48)''' 군트람 대공 (1967년 출생); 토스카나에서 귀천상혼으로 데보라 데 솔라와 결혼하여 합스부르크 백작부인으로 인정받음[2]
* '''(49)''' 티지아노 레오폴드, 합스부르크 백작 (2004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2]
** -- ''게오르크 대공 (1905–1952)''
*** '''(50)''' 라드보트 대공 (1938년 출생); 귀천상혼으로 캐롤라인 프로스트와 결혼하여 자녀 출산.
*** '''(51)''' 게오르크 대공 (1952년 출생).
-- 카를 살바토르, 토스카나 대공 (1839–1892)
* -- 레오폴트 살바토르, 토스카나 대공 (1863–1931)
** -- 안톤 대공 (1901–1987)
*** '''(52)''' 도미니크 대공 (1937년 출생)
'''(53)''' 잔도르 폰 합스부르크 백작 (1965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
* '''(54)''' 콘스탄틴 폰 합스부르크 백작 (2000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
'''(55)''' 게고르 폰 합스부르크 백작 (1968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
* -- 프란츠 살바토르, 토스카나 대공 (1866–1939)
** -- 후베르트 살바토르 대공 (1894–1971)
*** ''프리드리히 살바토르 대공 (1927–1999)''
'''(56)''' 레오폴트 대공 (1956년 출생)
'''(57)''' 알렉산더 살바토르 대공 (1959년 출생); 배우자 발트슈타인의 마리아-가브리엘레 백작부인
* '''(58)''' 콘스탄틴 살바토르 대공 (2002년 출생)
* '''(59)''' 파울 살바토르 대공 (2003년 출생)
*** '''(60)''' 안드레아스 살바토르 대공 (1936년 출생); (1) [2001년 이혼 (2002년 무효)] 마리아 데 라 피에다드 에스피노사 데 로스 몬테로스 이 로실로 (2) 2001년 (시민 결혼)과 2003년 (종교적 결혼) 발레리 포드스타츠키-리히텐슈타인 백작부인. 두 번째 결혼으로만 자녀 출산.
'''(61)''' 타데우스 살바토르 대공 (2001년 출생)
'''(62)''' 카시미르 살바토르 대공 (2003년 출생)
*** '''(63)''' 마르쿠스 대공 (1946년 출생); 귀천상혼으로 힐데가르트 (힐데) 마리아 융마이어와 결혼하여 자녀 출산.
*** '''(64)''' 요한 대공 (1947년 출생); 귀천상혼으로 안네-마리 슈투머와 결혼하여 자녀 출산.
*** '''(65)''' 미하엘 대공 (1949년 출생); 1992년 에바 안토니아 폰 호프만과 결혼하여 딸 1명 출산.
** -- ''테오도르 살바토르 대공 (1899–1978)''
*** ''카를 살바토르 대공 (1936–2023)''; 배우자 에디트 벤즐 프르 폰 슈테른바흐[2]
''합스부르크의 마티아스 백작 (1971–2024)'',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
* '''(66)''' 합스부르크의 니콜라우스 백작 (2000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2]
* '''(67)''' 합스부르크의 야콥 백작 (2001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2]
* '''(68)''' 합스부르크의 마르틴 백작 (2011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2]
'''(69)''' 합스부르크의 요하네스 백작 (1974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2] 카타리나 리젤로테 리들 에들레 폰 리덴슈타인과 결혼
'''(70)''' 합스부르크의 베른하르트 백작 (1977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2]
'''(71)''' 합스부르크의 베네딕트 백작 (1983년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적 권리 유지.[2]
** -- ''클레멘스 살바토르 대공 (1904–1974)''; 배우자 엘리자베스 그픈 레세기에르 드 미레몽 [결혼은 소급하여 (오스트리아에서만) 왕조적으로 승인됨][2]
*** ''알텐부르크의 클레멘스 공자 (1932–2022)'', 소급하여 왕조에 통합됨;[2] 로렌스 코스타 드 보레가르와 결혼
'''(72)''' 필리프, 알텐부르크 공자 (1966년 출생), 소급하여 왕조에 통합됨.[2]
*** '''(73)''' 게오르크, 알텐부르크 공자 (1933년 출생), 소급하여 왕조에 통합됨.[2]
*** ''페터, 알텐부르크 공자 (1935–2008)'', 소급하여 왕조에 통합됨;[2] 율리아네 그픈 폰 발트슈타인-포르니와 결혼
'''(74)''' 프리드리히, 알텐부르크 공자 (1966년 출생), 소급하여 왕조에 통합됨;[2] 가브리엘레 그픈 폰 발터스키르헨과 결혼
* '''(75)''' 엠마누엘, 알텐부르크 공자 (2002년 출생)
* '''(76)''' 니콜라우스, 알텐부르크 공자 (2008년 출생)
'''(77)''' 레오폴트, 알텐부르크 공자 (1971년 출생), 소급하여 왕조에 통합됨.[2]
*** '''(78)''' 요하네스, 알텐부르크 공자 (1949년 출생), 소급하여 왕조에 통합됨.[2]

  • * -- 요제프 대공 (1776–1847)
  • ** -- 요제프 카를 대공 (1833–1905)

--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1872–1962)
* -- 요제프 프란츠 대공 (1895–1957)
** 요제프 아르파드 대공 (1933–2017)
*** '''(79)''' 요제프 카를 대공 (1960년 출생); 배우자 호엔베르크의 마르가레테 공주
'''(80)''' 요제프 알브레히트 대공 (1994년 출생); 배우자 샤에스베르크의 조피 백작부인
'''(81)''' 파울 레오 대공 (1996년 출생)
*** '''(82)''' 안드레아스-아우구스티누스 대공 (1963년 출생); 배우자 하츠펠트-되너호프의 마리-크리스틴 백작부인
'''(83)''' 프리드리히-키프리안 대공 (1995년 출생)
'''(84)''' 피에르 대공 (1997년 출생)
'''(85)''' 베네딕트-알렉산더 대공 (2005년 출생)
*** '''(86)''' 니콜라우스 대공 (1973년 출생); 배우자 에우헤니아 데 칼로녜 이 구레아
'''(87)''' 니콜라스 대공 (2003년 출생)
'''(88)''' 산티아고 대공 (2006년 출생)
*** '''(89)''' 요하네스 대공 (1975년 출생); 배우자 마리아 가브리엘라 몬테네그로 비야미사르
'''(90)''' 요하네스 대공 (2010년 출생)
'''(91)''' 알레한드로 대공 (2011년 출생)
'''(92)''' 이그나시오 대공 (2013년 출생)
** '''(93)''' 게자 대공 (1940년 출생); (1) [이혼] 모니카 데커와 두 번 귀천상혼, (2) [시민 결혼] 엘리자베스 제인 쿤스타터. 두 결혼 모두에서 자녀 출산.
** '''(94)''' 미하엘 대공 (1942년 출생); 배우자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크리스티아나 공주, 그의 형제의 배우자.
*** '''(95)''' 에두아르트 대공 (1967년 출생); 배우자 구데누스의 마리아 테레지아 남작부인
'''(96)''' 파울 베네딕트 대공 (2000년 출생)
*** '''(97)''' 사제 파울 합스부르크 (1968년 출생), 그리스도의 군단 사제

5. 1. 프란츠 슈테판까지

로렌 가문은 현재 프랑스독일과의 국경 지대인 로렌 지방에 있었던 로렌 공국을 통치한 가문이다. 15세기에는 부르고뉴 공국의 샤를 용담공이 자신의 영토 사이에 끼인 로렌을 병합하려 했지만, 낭시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신과 부르고뉴 공국의 멸망을 초래했다. 이 전투에서 용담공을 패사시킨 로렌 공 르네 2세는 프란츠 1세 슈테판의 직계 조상이다(참고로 프란츠 1세 슈테판은 샤를 용담공의 혈통도 이어받고 있다). 르네 2세는 모계인 발루아-앙주 가문에서 공위를 계승했지만, 부계인 보데몽 가문은 모계의 할머니 이자벨 여공까지 이어져 온 로렌 가문(샤토누아 가문)의 방계였으며, 이후 프란츠 1세 슈테판까지 역대 로렌 공은 이 가문에서 나왔다.

1630년대 이후, 로렌 공국은 여러 차례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침략을 받았고, 로렌 공의 일족은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합스부르크가의 황제를 섬겼으며, 이후에도 합스부르크가와의 관계를 깊게 했다. 14세기 초, 알브레히트 1세의 딸 엘리자베트와 로렌 공 페리 4세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가와 로렌 가문의 관계가 시작되었지만, 그 전까지 로렌 가문은 프랑스 왕가와의 관계가 강했다. 샤를 5세는 재위 기간에 공국을 통치하지 못하고 명목뿐이었던 로렌 공이었지만,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딸 엘레오노레와 결혼하여, 후계자 레오폴트를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낳았다. 레오폴트는 1697년 레위스윅 조약에서 로렌을 일단 반환받았고, 이듬해 1698년에 루이 14세의 조카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와 결혼했다. 프란츠 1세 슈테판은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이다.

프란츠 1세 슈테판은 로렌 가문의 당주였으며,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13세의 증손자이기도 했다. 사촌 여동생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연인 관계였지만, 결혼과 함께 제위 계승자가 되면서 그 국제적 승인을 대가로 로렌을 프랑스 왕 루이 15세에게 양도해야 했다. 루이 15세는 로렌 공위를 장인인 전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에게 주었고, 그가 죽은 후 프랑스 왕령으로 병합했다. 그 대가로 프란츠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대공위를 계승했다. 프란츠는 부계로는 메디치 가문의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의 장녀 엘레오노라 데 메디치의, 모계로는 여섯째 딸 마리 드 메디시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5. 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첫 번째 구성원은 요제프 2세였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에 성장한 군주로, 많은 개혁을 시행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성직자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1790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레오폴트 2세가 뒤를 이었다. 1791년 그는 필니츠 선언을 통해 유럽 열강에게 군사적 개입 없이 프랑스 왕가를 도와 혁명의 이상을 억누르라고 요청했다. 그는 프랑스 제1 공화국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기 며칠 전에 사망했다.[2]

1792년,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인 프란츠 2세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프랑스 군주들의 참수 이후, 그는 다른 유럽 군주들과 함께 혁명 프랑스에 대항하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동맹은 초반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곧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이탈리아 전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여러 차례 패배했다.[2]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밀라노 공국은 프랑스에 넘어가고, 오스트리아는 베네토, 이스트리아, 달마티아를 얻었다. 이 조약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로 축소되었다. 프란츠 2세는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해체를 강요받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제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오스트리아 황제로 선포했었다.[2]

라이프치히 전투(1813)와 워털루 전투(1815)에서의 패배 이후,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워털루와 같은 해에 빈 회의가 열렸고, 이를 통해 복고가 시작되었다. 회의는 구체제의 복원을 요구했다.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잃었던 모든 이탈리아, 슬라브, 독일 영토를 회복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간에 신성 동맹이 결성되어 유럽에서 발생할 모든 친 프랑스 또는 독립 혁명 운동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2]

그 후 몇 년 동안, 프란츠 2세는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조언에 따라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독립에 대한 새로운 이상이 대두되어 1848년 혁명이 발발했고, 이는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로 인해 메테르니히는 제국 재상직에서 축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18세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았다.[2]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는 유럽에서 정치적 또는 군사적 권위를 가진 마지막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사람이었다. 그의 통치 초(1848–1916)에 오스트리아는 중부 유럽의 지배 세력이었고, 빈은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대도시 중 하나로 부상했다. 그러나 황제는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치렀다. 두 전쟁 모두 패배로 끝났고, 이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종식시켰으며, 왕조의 점진적인 쇠퇴를 가속화했다.[2]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아우스글라이히 조항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내 헝가리 왕국에 실질적인 자치를 부여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연합했지만, 내부 정책과 행정 측면에서는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 국가 원수의 칭호는 "오스트리아 황제 겸 헝가리 왕"이 되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로도 불렸다.[2]

오스트리아-헝가리러시아 제국이 발칸 반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러시아 사이에 강한 긴장이 조성되었고,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 제국이탈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2]

1914년, 사라예보 사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불가리아 왕국, 오스만 제국)과 연합국 (대영 제국, 프랑스 제3 공화국, 러시아 등) 사이에서 발발했다.[2]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증손자인 카를 1세가 뒤를 이었다. 카를 1세(마지막 군주)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권력 행사를 포기했지만 퇴위하지는 않았다. 그는 1919년 4월 3일에 망명해야 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독립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새로운 오스트리아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은 망명을 강요당하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망명 법은 여전히 카를 황제의 후손에게 동일한 조건으로 적용된다. 1961년, 가문의 마지막 수장이자 전 유럽 의회 의원이었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망명 종료의 대가로 군주제와 그의 후손의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에서 귀족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토 합스부르크-로트링겐 박사로 알려졌다.[2]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현재 수장은 카를 폰 합스부르크이며, 2007년 부친 오토가 가문의 수장직을 포기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카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의 장손이다.[2]

5. 3. 오스트리아 황제 가문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첫 번째 구성원은 요제프 2세였다. 그의 동생 레오폴트 2세에 이어,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인 프란츠 2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해체를 강요받았지만, 이미 스스로를 오스트리아 황제로 선포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프란츠 2세는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했지만, 1848년 혁명이 발발했다. 이로 인해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18세의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를 대신하여 권력을 잡았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아우스글라이히 조항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내 헝가리 왕국에 실질적인 자치를 부여했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증손자인 카를 1세가 뒤를 이었다. 카를 1세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권력 행사를 포기했지만 퇴위하지는 않았다. 그는 1919년 4월 3일에 망명해야 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독립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새로운 오스트리아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은 망명을 강요당하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1961년, 가문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망명 종료의 대가로 군주제와 그의 후손의 계승권을 포기했다.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의 종가에 해당한다. 신성 로마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외에 헝가리 왕, 보헤미아 왕도 겸했다. 신성 로마 제국1806년에 해체되었고, 프란츠 2세는 황제위를 물러났지만, 이에 앞서 1804년부터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를 칭했으며, 이후 이 황제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멸망까지 계승되었다. 이러한 황제위 및 왕위는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로부터 마지막 카를 1세까지 7대에 걸쳐 계승되었지만, 직계 계승된 것은 3번뿐이다.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요제프 2세는 아버지로부터 황제위를, 어머니로부터 오스트리아 대공위 및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위를 계승했지만, 자식이 없어 토스카나 대공위를 계승했던 동생 레오폴트 2세가 대신 황제위 및 왕위에 올랐다. 레오폴트 2세로부터 프란츠 2세/1세, 페르디난트 1세까지는 직계 계승이 이어졌지만, 자식이 없는 페르디난트 1세가 1848년3월 혁명으로 퇴위하자, 동생 프란츠 카를 대공 (황제위 사퇴)의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했다. 또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제국의 황제가 되었지만, 멕시코의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졌다.

프란츠 요제프 1세 치하에서 1867년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으로 재편성된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왕을 겸하는 점은 이전과 같았지만, 군사 · 외교 · 재정을 제외하고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두 정부가 독자적인 정책을 수행하는 체제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유일한 아들이었던 황태자 루돌프가 죽은 후,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황위 계승자로 삼았지만, 1914년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면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대전 중 프란츠 요제프가 사망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카 카를 1세가 황제위를 계승하지만, 대전 말기인 1918년에 제국은 멸망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성립됨과 동시에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를 시작으로 하는 많은 나라들이 독립했다. 카를 1세는 합스부르크 법을 거부하고 망명하여, 1922년에 병사했다.

6살도 안 되어 황태자 지위를 잃은 카를 1세의 장남 오토는 20세기의 말에 독일에서 선출된 유럽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오토는 2011년에 98세로 사망했지만,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의 당주 자리는 2006년에 고령을 이유로 장남 카를에게 넘겨주었다. 카를도 유럽 의회 의원을 역임했지만,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선출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 가문
이름출생사망재위 기간비고
--프란츠 2세/1세1768년1835년1792년–1835년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1793년1875년1835년–1848년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1830년1916년1848년–1916년오스트리아 황제
--카를 1세1887년1922년1916년–1918년오스트리아 황제


5. 4. 토스카나 대공 가문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1737년 가문이 단절되자 프란츠 슈테판이 대공 프란체스코 2세로 계승했다. 토스카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과는 독립적으로 통치되었으며, 프란츠 슈테판에서 차남 레오폴트 2세로, 레오폴트가 황위를 계승한 후에는 그의 차남 페르디난도 3세로 대공위가 계승되었다. 페르디난도 3세를 토스카나 대공가(합스부르크-토스카나 가문)의 시작으로 본다.

역대 대공은 훌륭한 토스카나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리소르지멘토의 물결을 이겨내지 못하고, 페르디난도 4세가 1860년에 폐위되었으며, 주민 투표 결과,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어 대공국은 소멸되었다. 대공국의 수도 피렌체통일 이탈리아 정부의 잠정적인 수도가 되었다. 토스카나 대공가는 그 후 오스트리아의 종가를 의지하여 오스트리아 귀족으로 존속했으며, 가계는 제국의 멸망 후에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5. 5. 테셴(체신) 공작 가문

테셴 공국(독일어: Herzogtum Teschen, 폴란드어: Księstwo Cieszyńskie)은 1722년 레오폴트 2세 황제의 아들 카를 6세가 테셴 공작 레오폴트에게 공작위를 수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프란츠 슈테판과 그의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의 4번째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상속되면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에 합류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알베르트 카시미르 폰 작센테셴 공작 부부는 자녀를 두지 못하고, 나폴레옹 전쟁에서 활약한 군인인 카를 대공을 입양했다. 테셴 공작 가문은 카를 대공의 상속을 통해 계속 이어졌다.

  • 카를 대공 (1771–1847)
  • 알브레히트 대공 (1817–1895)
  • 프리드리히 대공 (1856–1936)

5. 6. 헝가리 부왕 가문

요제프 카를 대공 (1833–1905)은 요제프 대공 (1776–1847)의 아들이다. 요제프 카를 대공의 아들은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1872–1962)이며,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의 아들은 요제프 프란츠 대공 (1895–1957)이다. 요제프 프란츠 대공의 아들은 서열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순서이름출생-사망
1요제프 아르파드 대공1933년-2017년
2게자 대공1940년 출생
3미하엘 대공1942년 출생


  • '''요제프 아르파드 대공''' (1933–2017)의 가계


이름배우자비고
요제프 카를 대공 (1960년 출생)호엔베르크의 마르가레테 공주
요제프 알브레히트 대공 (1994년 출생)샤에스베르크의 조피 백작부인
파울 레오 대공 (1996년 출생)
안드레아스-아우구스티누스 대공 (1963년 출생)하츠펠트-되너호프의 마리-크리스틴 백작부인
프리드리히-키프리안 대공 (1995년 출생)
피에르 대공 (1997년 출생)
베네딕트-알렉산더 대공 (2005년 출생)
니콜라우스 대공 (1973년 출생)에우헤니아 데 칼로녜 이 구레아
니콜라스 대공 (2003년 출생)
산티아고 대공 (2006년 출생)
요하네스 대공 (1975년 출생)마리아 가브리엘라 몬테네그로 비야미사르
요하네스 대공 (2010년 출생)
알레한드로 대공 (2011년 출생)
이그나시오 대공 (2013년 출생)


  • '''게자 대공''' (1940년 출생)은 모니카 데커와 두 번 귀천상혼, 엘리자베스 제인 쿤스타터와 시민 결혼하였다. 두 결혼 모두에서 자녀를 두었다.

  • '''미하엘 대공''' (1942년 출생)은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젠베르크의 크리스티아나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름배우자비고
에두아르트 대공 (1967년 출생)구데누스의 마리아 테레지아 남작부인
파울 베네딕트 대공 (2000년 출생)
사제 파울 합스부르크 (1968년 출생)그리스도의 군단 사제


5. 7. 라이너 분가

레오폴트 2세의 차남 라이너 요제프 대공을 시조로 하는 분가이다.

6.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군주 및 배우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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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신성 로마 황제오스트리아 황제오스트리아 대공헝가리 국왕보헤미아 국왕기타
프란츠 1세1745년 - 1765년로렌 공작(양위)
토스카나 대공
체신 공작
마리아 테레지아1740년 - 1780년1740년 - 1780년1743년 - 1780년파르마 여공(양위)
요제프 2세1765년 - 1790년1780년 - 1790년1780년 - 1790년1780년 - 1790년
레오폴트 2세1790년 - 1792년1790년 - 1792년1790년 - 1792년1790년 - 1792년토스카나 대공(양위)
프란츠 2세
(프란츠 1세)
1792년 - 1806년1804년 - 1835년1792년 - 1835년1792년 - 1835년1792년 - 1835년
페르디난트 1세1835년 - 1848년1835년 - 1848년1835년 - 1848년1835년 - 1848년
프란츠 요제프 1세1848년 - 1916년1848년 - 1916년1848년 - 1916년1848년 - 1916년
카를 1세1916년 - 1918년1916년 - 1918년1916년 - 1918년1916년 - 1918년


6. 1. 신성 로마 황제



나폴레옹에 의해서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헤센 대공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신성로마제국을 탈퇴하고 라인연방에 가맹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붕괴되었다.

6. 2. 오스트리아 황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의 종가에 해당한다. 신성 로마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외에 헝가리 왕, 보헤미아 왕도 겸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에 해체되었고, 프란츠 2세는 황제위를 물러났지만, 이에 앞서 1804년부터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를 칭했으며, 이후 이 황제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멸망까지 계승되었다. 이러한 황제위 및 왕위는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로부터 마지막 카를 1세까지 7대에 걸쳐 계승되었지만, 직계 계승된 것은 3번뿐이다.

프란츠 슈테판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요제프 2세는 아버지로부터 황제위를, 어머니로부터 오스트리아 대공위 및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위를 계승했지만, 자식이 없어 토스카나 대공위를 계승했던 동생 레오폴트 2세가 대신 황제위 및 왕위에 올랐다. 레오폴트 2세로부터 프란츠 2세/1세, 페르디난트 1세까지는 직계 계승이 이어졌지만, 자식이 없는 페르디난트 1세가 1848년 혁명으로 퇴위하자, 동생 프란츠 카를 대공 (황제위 사퇴)의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했다. 또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제국의 황제가 되었지만, 멕시코의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졌다.

프란츠 요제프 1세 치하에서 1867년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으로 재편성된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왕을 겸하는 점은 이전과 같았지만, 군사 · 외교 · 재정을 제외하고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두 정부가 독자적인 정책을 수행하는 체제였다. 프란츠 요제프는 유일한 아들이었던 황태자 루돌프가 죽은 후,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황위 계승자로 삼았지만, 1914년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면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대전 중 프란츠 요제프가 사망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조카 카를 1세가 황제위를 계승하지만, 대전 말기인 1918년에 제국은 멸망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성립됨과 동시에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를 시작으로 하는 많은 나라들이 독립했다. 카를 1세는 합스부르크 법을 거부하고 망명하여, 1922년에 병사했다.

6살도 안 되어 황태자 지위를 잃은 카를 1세의 장남 오토는 20세기의 말에 독일에서 선출된 유럽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오토는 2011년에 98세로 사망했지만,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의 당주 자리는 2006년에 고령을 이유로 장남 카를에게 넘겨주었다. 카를도 유럽 의회 의원을 역임했지만,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선출되었다.

이름신성 로마 황제오스트리아 황제오스트리아 대공헝가리 국왕보헤미아 국왕기타
프란츠 1세1745년 - 1765년로렌 공작(양위)
토스카나 대공
체신 공작
마리아 테레지아1740년 - 1780년1740년 - 1780년1743년 - 1780년파르마 여공(양위)
요제프 2세1765년 - 1790년1780년 - 1790년1780년 - 1790년1780년 - 1790년
레오폴트 2세1790년 - 1792년1790년 - 1792년1790년 - 1792년1790년 - 1792년토스카나 대공(양위)
프란츠 2세
(오스트리아 황제로는 프란츠 1세)
1792년 - 1806년1804년 - 1835년1792년 - 1835년1792년 - 1835년1792년 - 1835년
페르디난트 1세1835년 - 1848년1835년 - 1848년1835년 - 1848년1835년 - 1848년
프란츠 요제프 1세1848년 - 1916년1848년 - 1916년1848년 - 1916년1848년 - 1916년
카를 1세1916년 - 1918년1916년 - 1918년1916년 - 1918년1916년 - 1918년


6. 3. 헝가리 왕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아우스글라이히 조항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왕국에 실질적인 자치를 부여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연합했지만, 내부 정책과 행정 측면에서는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 국가 원수의 칭호는 "오스트리아 황제 겸 헝가리 왕"이 되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로도 불렸다.[3]

6. 4. 보헤미아 왕

이름재위 기간
프란츠 2세1792년 - 1835년
페르디난트 1세1835년 - 1848년
프란츠 요제프 1세1848년 - 1916년
카를 1세1916년 - 1918년


6. 5.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


6. 6. 토스카나 대공

이름재위 기간
레오폴도 2세1765년 - 1790년
페르디난도 3세1814년 - 1824년
레오폴도 2세1824년 - 1849년, 1849년 - 1859년
페르디난도 4세18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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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 파르마 공작

마리아 루이자 (Maria Luisa|마리아 루이자de, 1814년1847년)

6. 8. 멕시코 황제

6. 9.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수장



카를 폰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의 장손이며, 2007년 부친 오토가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수장직을 포기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1]

6. 10.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의 군주 배우자

7. 문장

1896년 2월 11일 이전 대공 및 대공녀의 문장
1896년 2월 11일 이후 대공 및 대공녀의 문장
토스카나 방계 대공 및 대공녀의 문장
1896년 2월 11일 이전 대공(大公) 및 대공녀(大公女)의 문장1896년 2월 11일 이후 대공(大公) 및 대공녀(大公女)의 문장토스카나 방계 대공(大公) 및 대공녀(大公女)의 문장


참조

[1] 뉴스 Kaiser zu sein, ist kein Job, den man anstrebt https://kurier.at/ku[...] kurier.at 2023-12
[2] 서적 Genealogisches Handbuch des Adels, Fürstliche Häuser 2001
[3] 뉴스 Felavatták IV. Károly szobrát Budapesten https://www.origo.hu[...] Origo.hu 2019-10-05
[4] 뉴스 Karl von Habsburg: "Die Monarchie ist nicht von gestern" https://rp-online.de[...] Rheinische Post 2019-10-05
[5] 뉴스 „Magyar vagyok, nem osztrák” – Habsburg György Európáról, magyarságról, habsburgságról https://mandiner.hu/[...] Mandiner 2019-10-05
[6] 뉴스 100 Jahre Republik: Die neuen Habsburger https://www.trend.at[...] 트렌드 (雑誌) 2019-03-03
[7] 뉴스 Salzkammergut: Hochzeit in der Kaiservilla https://www.diepress[...] Die Presse 2020-02-01
[8] 뉴스 "Bei Kaiser Franz Joseph hat der Narr gefehlt" https://www.news.at/[...] news.at 2020-02-01
[9] 뉴스 “The 21st-century Habsburg mission http://www.catholich[...] The Catholic Herald 2018-11-06
[10] Youtube https://www.youtube.[...]
[11] 뉴스 Kaiser ist kein erstrebenswerter Beruf https://www.bazonlin[...] バーゼル新聞 2019-10-05
[12] 뉴스 Ungarn pflegt habsburgisches Erbe pompöser als Österreich https://www.welt.de/[...] 디・ヴェルト 2019-10-05
[13] 뉴스 A Várba költöztetik Habsburg Ottó hagyatékát https://index.hu/kul[...] Index.hu 2019-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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