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립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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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립학회는 1660년에 설립된 영국의 학술 기관으로, 자연 지식 증진을 목표로 한다. 초기에는 런던에서 과학자들이 모여 실험과 토론을 진행하는 모임으로 시작하여, 1662년 찰스 2세로부터 칙허장을 받아 정식 발족했다. 학회는 《철학회보》를 창간하여 학술지 발간, 연구 지원, 과학 정책 자문, 대중 참여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며, 회원(FRS)으로 구성된다. 회장은 이사회를 대표하며 학회를 운영하고, 과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상과 메달을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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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학회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런던 왕립 학회 자연 지식 개선을 위한 협회 |
로마자 표기 | The Royal Society of London for Improving Natural Knowledge |
모토 | Nullius in verba |
모토 설명 | 아무의 말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
설립일 | 1660년 11월 28일 |
본부 | 런던, , 영국 |
조직 | |
후원자 | 찰스 3세 |
회장 | 에이드리언 스미스 경 |
외무 서기관 | 마크 월포트, 앨리슨 노블 (공동) |
재무 | 조너선 키팅 |
주요 조직 | 평의회 |
회원 | ~1,600명의 펠로우 ~225명의 외국인 회원 4명의 왕족 펠로우 |
직원 수 | ~225 |
공식 웹사이트 | 왕립 학회 공식 웹사이트 |
기타 | |
참고 | 왕립학회는 일반적으로 "왕립학회" 또는 "왕립협회"로 번역된다. 왕립학회는 아마추어 과학자 단체로 자발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이후 왕으로부터 특권 법인으로 승인을 받았다. 왕립학회는 국왕이 설립한 것도, 국가가 설립한 것도 아니므로 "왕립"보다는 "왕인"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2. 역사
1645년경, 잉글랜드 내전의 영향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런던으로 연구 장소를 옮긴 수학자 존 월리스 등 약 10명의 토론 그룹에서 왕립학회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학회의 공식 명칭은 The President, Council, and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for Improving Natural Knowledge|자연 지식을 증진하기 위한 런던 왕립 학회영어이다.
'왕립(Royal)'이라는 명칭은 1662년 찰스 2세의 칙허를 받아 법인격을 얻으면서 붙여졌지만, 국왕은 후원자(파트론)의 위치에 있었으며, 프랑스의 왕립 파리 과학 아카데미와는 달리 1850년 정부 보조금을 받기 전까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민간 학회의 성격을 유지했다. 왕족 펠로우, 명예 펠로우, 외국인 펠로우를 포함하여 2016년 기준으로 약 1600명의 펠로우가 있으며, 회원은 "왕립학회 펠로우"라는 명칭과 함께 '''FRS'''(Fellow of the Royal Society영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다.
학회는 초기부터 민간 과학 단체였지만, 영국의 사실상 학사원(아카데미)으로서 영국 과학자 사회의 정점에 위치한다. 또한, 과학평의회(Science Council)의 일원으로서 영국의 과학 정책 및 행정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1782년 창립된 왕립 아일랜드 아카데미(Royal Irish Academy)와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1783년 창립된 에든버러 왕립 학회에든버러 왕립 학회는 1783년에 칙허장을 얻어 설립되었으며, “학문 및 유용한 지식의 발전”을 목적으로 했다.와는 상대적으로 관계가 적다.
17세기 이후 저명한 과학자 대부분이 왕립학회의 창립 회원이거나 펠로우로 활동했다.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과 광학 연구로 근대 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아이작 뉴턴 역시 그 업적을 인정받아 훗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2. 1. 초창기 (17세기)
보이지 않는 대학은 런던 왕립학회의 전신 중 하나로 여겨지며, 로버트 보일을 중심으로 한 여러 자연철학자들로 구성되었다. "보이지 않는 대학"이라는 용어는 17세기 초 독일 로젠크로이츠파의 글에서 언급되었으며, 실험적 조사를 통해 지식을 얻는다는 공통된 주제를 가진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의미했다.[5] 보일은 1646년과 1647년 편지에서 "우리의 보이지 않는 대학" 또는 "우리의 철학 대학"을 언급하며 이러한 연결망의 존재를 시사했다.[7]왕립학회의 직접적인 기원은 1645년경 잉글랜드 내전 시기 런던에서 시작된 모임이다. 존 윌킨스를 중심으로 한 약 10명의 토론 그룹이 그레샴 칼리지 등지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실험을 하고 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의 저서 ''새로운 아틀란티스''에서 제시한 "새로운 과학"에 영향을 받았다.[8] 1648년, 윌킨스가 옥스퍼드 대학교 워덤 칼리지 학장으로 부임하면서 런던의 동료들을 옥스퍼드로 불러들였고, 이곳에서도 "옥스퍼드 철학 클럽"으로 알려진 그룹이 활동했다.[10] 로버트 보일 역시 이 시기 옥스퍼드로 와서 활동했으며, 로버트 훅은 1655년부터 옥스퍼드에서 보일의 조수로 일하며 공기 펌프 제작 등 연구를 도왔다.

잉글랜드 왕정복고 이후인 1660년 11월 28일, 런던 그레샴 칼리지에서 12명의 학자들이 모여 "물리수학 실험 학습 증진을 위한 칼리지" 설립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이 모임에는 크리스토퍼 렌, 로버트 보일, 존 윌킨스, 윌리엄 브로운커, 로버트 모레이 등이 참여했다.[13] 곧이어 로버트 모레이 경은 찰스 2세 국왕이 이 계획을 승인했음을 알렸다.

1662년 7월 15일, 찰스 2세는 "런던 왕립학회" 설립을 위한 첫 번째 왕실 칙허장에 서명했으며, 브로운커 경이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663년 4월 23일에는 두 번째 칙허장이 내려져 학회의 공식 명칭이 "자연 지식 향상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The President, Council, and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for Improving Natural Knowledge)로 확정되었고, 국왕이 설립자임을 명시했다. 헨리 올덴버그가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발족 당시 회원 수는 119명이었다. 1663년 11월에는 로버트 훅이 실험 책임자(Curator of Experiments)로 임명되어 매주 열리는 회의에서 다양한 실험을 시연하며 회원들의 연구 활동을 지원했다. 초기 주요 회원으로는 로버트 보일, 존 에벌린, 로버트 훅, 윌리엄 페티, 존 월리스, 존 윌킨스, 토머스 윌리스, 크리스토퍼 렌 등이 있다.
학회의 모토는 "Nullius in verbala"로, 라틴어로 "아무의 말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Take nobody's word for it)"는 의미이다. 이는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실험과 관찰이라는 증거를 통해 사실을 탐구하겠다는 학회의 핵심 정신을 보여준다.[54]
초기 학회는 주로 그레샴 칼리지에서 모임을 가졌으나,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인해 건물이 다른 용도로 징발되자 아룬델 하우스로 일시적으로 이전했다가 1673년에 다시 그레샴 칼리지로 돌아왔다.[17] 학회는 초기부터 실험을 중시하여, 로버트 훅과 이후 1684년에 임명된 드니 파팽 등이 다양한 주제의 실험을 수행했다.[15] 또한, 1665년에는 학회 최초의 정기 간행물인 《철학적 거래(Philosophical Transactions)》를 창간하여,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유럽 과학계의 중요한 학술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프랑스의 왕립 파리 과학 아카데미와 달리, 왕립학회는 찰스 2세의 칙허를 받아 '왕립(Royal)'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국왕은 후원자일 뿐 운영은 1850년 정부 보조금을 받기 전까지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되는 민간 단체의 성격을 가졌다. 1667년에는 존 에벌린, 에이브러햄 카우리 등의 제안에 따라 영구적인 연구 공간과 시설을 갖춘 '칼리지'를 건립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회원들의 기부 부족 등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18][19][20]
2. 2. 런던 대화재와 뉴턴 시대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

17세기 후반, 왕립학회는 초기 운영의 중요한 축을 마련했다. 1662년 로버트 훅을 실험 책임자(큐레이터)로 고용했으며,[21] 이듬해인 1663년 회원으로 선출했다. 당시 회원 가입비와 주당 회비는 상당한 금액이었으나, 훅은 회비를 면제받고 매주 모임에서 3~4개의 실험을 시연하며 회원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22][23] 학회의 지원으로 훅은 1664년 그레샴 칼리지 강사, 1665년에는 동 칼리지의 기하학 교수가 되어 과학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22] 1666년 런던 대화재 발생 후에는 크리스토퍼 렌과 함께 런던 재건 사업에 참여하여 도시 측량과 건물 설계에 기여하며 공적인 명성을 얻었다.[22][24]

아이작 뉴턴은 찰스 2세에게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헌상했고, 이 망원경이 학회에 전달된 것을 계기로 1672년 29세의 나이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4] 1703년, 로버트 훅이 사망한 해에 뉴턴은 왕립학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1727년 사망할 때까지 24년간 회장직을 역임했다.[22] 이 기간 동안 학회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으며, 1739년까지 펠로우 수는 약 110명에서 300명 정도로 증가했다.[22] 또한 학회의 중요한 간행물인 ''왕립학회 철학적 논문집''(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이 정기적으로 발간되기 시작했다.[23]
뉴턴은 학회 운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회장직의 권력을 남용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특히 미적분학 발명을 둘러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논쟁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위원회를 구성하고, 사실상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위원회 명의로 발표하게 한 점이 지적된다.[22]
한편, 학회는 1705년 기존에 사용하던 그레샴 칼리지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다. 여러 시도 끝에 1710년 10월 26일, 평의회는 플리트 스트리트의 크레인 코트(Crane Court)에 있는 건물을 매입하여 이전했다.[24] 이 시기 학회는 실험 시연, 과학 논문 발표, 새로운 과학 기구 소개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지만,[27] 펠로우들의 회비 납부가 원활하지 않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26]
2. 3. 18세기 ~ 19세기

18세기 동안 왕립학회 초기의 활기는 다소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이전 시대에 비해 과학 분야의 거장이 적었고, 주목할 만한 업적도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후반에는 중요한 과학적 문제에 대해 영국 정부가 학회 평의회에 자문을 구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학회는 초당파적 성격을 지향했지만, 1777년 피뢰침 설치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뾰족한 피뢰침은 1749년 벤자민 프랭클린이 발명했고, 벤자민 윌슨(Benjamin Wilson (painter))은 뭉툭한 피뢰침을 발명했다. 어떤 피뢰침을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프랭클린의 발명품에 반대하는 이들은 지지자들을 영국인이 아닌 미국 동맹국이라고 비난했으며, 이 논쟁은 결국 당시 학회 회장이었던 존 프링글 경(Sir John Pringle)의 사퇴로 이어졌다. 이 시기부터 과학 관련 정부 위원회에 학회 펠로우를 임명하는 관례가 생겼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21]
18세기는 왕립학회가 초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 시기이기도 하다. 1739년까지 펠로우 수는 110명에서 약 300명으로 증가했으며, 1703년부터 1727년 사망할 때까지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이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학회의 명성이 높아졌다.[22] 또한 ''왕립학회 철학적 논문집''(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이 정기적으로 발간되기 시작했다.[23] 뉴턴은 회장 재임 기간 동안 권력을 남용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미적분학 발명을 둘러싼 자신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사이의 분쟁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공정한" 위원회를 임명하고, 결국 위원회 이름으로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22]
1705년, 학회는 더 이상 그레샴 칼리지(Gresham College)를 임대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앤 여왕(Anne, Queen of Great Britain)에게 새로운 건물을 요청했으나 실패했고, 코튼 하우스(Cotton House) 관리인들에게 회의 장소를 요청한 끝에, 평의회는 1710년 10월 26일 플리트 스트리트(Fleet Street)의 크레인 코트(Crane Court)에 있는 두 채의 집을 매입했다.[24] 이곳에는 사무실, 숙소, 그리고 다양한 수집품을 보관할 공간이 마련되었다. 당시 전체 펠로우 중 저명한 과학자의 비율은 높지 않았지만, 평의회에는 존 헤들리(John Hadley),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 (mathematician)), 한스 슬론(Hans Sloane) 등 저명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25] 그러나 펠로우들의 회비 납부가 원활하지 않아 학회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1740년에는 240GBP의 적자를 기록했고, 이는 1741년까지 이어져 회계 담당자가 회비를 내지 않은 펠로우들에게 강경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26]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학회는 실험 시연, 중요한 과학 논문 발표, 새로운 과학 기구 시연, 영국과 유럽의 과학적 문제에 대한 질의응답 등 주요 활동을 지속했다.[27]
일부 최근 연구에서는 18세기 왕립학회가 쇠퇴했다는 기존의 주장에 반박한다. 리처드 소렌슨(Richard Sorrenson)은 학회가 "불명예스럽게 쇠퇴했다기보다는 18세기 내내 상당한 생산성과 성장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며, 쇠퇴론의 근거가 된 자료들이 특정 목적을 가진 이들에 의해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28]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는 영국의 순수 수학이 약하다고 비판하며 그 책임을 학회에 돌렸지만, 응용 수학 분야는 강했으며, 비록 저명한 회원은 적었지만 제임스 브래들리(James Bradley)와 같이 막대한 공헌을 한 인물도 있었다. 브래들리는 20년간의 상세하고 꼼꼼한 천문 관측을 통해 지구 자전축의 장동 현상을 밝혀냈다.[29]
학회 내부 정치적으로 18세기 중반은 소위 "하드위크 서클"(Hardwicke Circle)로 불리는 휘그당(Whigs (British political party)) 성향의 과학자들이 학회의 주요 직책을 장악하며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였다. 하드위크 백작(Philip Yorke, 2nd Earl of Hardwicke)의 이름을 딴 이 그룹에는 다니엘 레이(Daniel Wray)와 토마스 버치(Thomas Birch) 등이 속했으며, 1750년대와 6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은 버치를 서기로 선출하고, 마틴 폴크스(Martin Folkes)의 사임 후 하드위크의 지원을 받아 맥클스필드 백작(George Parker, 2nd Earl of Macclesfield)을 회장으로 선출하는 데 기여했다.[30] 맥클스필드 백작 재임 기간 동안 이 서클은 전성기를 맞았으며, 윌로비 경(Lord Willoughby)과 버치가 각각 부회장과 서기를 맡았다. 이 서클의 영향력은 런던 고고학회(Society of Antiquaries of London) 등 다른 학회에도 미쳤다. 맥클스필드 백작의 은퇴 후, 이 서클은 1764년 모튼 백작(James Douglas, 14th Earl of Morton)과 1772년 존 프링글 경(Sir John Pringle)을 회장으로 선출했다.[31] 그러나 이 시점에 이르러 이전의 휘그 "다수파"는 "파벌"로 축소되었고, 버치와 윌로비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 결국 이 서클은 조지 3세(George III) 치하 영국 정치에서 휘그당이 쇠퇴한 것과 맞물려 1780년대에 와해되었다.[32]
1780년, 학회는 서머싯 하우스(Somerset House)로 다시 이전했다. 이 건물은 영국 정부가 제공한 것으로, 조셉 뱅크스 경(Sir Joseph Banks)이 1778년 11월 회장으로 선출되자마자 이전을 추진했다. 서머싯 하우스는 크레인 코트보다 넓었지만, 펠로우들에게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도서관을 보관할 공간이 부족했고, 숙소 시설도 미흡했으며, 박물관을 위한 공간은 전혀 없었다. 결국 박물관 소장품은 1781년 대영 박물관(British Museum)으로 이관되었고, 도서관은 두 개의 방으로 확장되었는데, 그중 한 방은 평의회 회의실로 사용되었다.[33]
19세기 초,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는 영국 과학, 특히 순수 수학의 발전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학회의 역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영국 과학의 상대적인 쇠퇴를 지적하며 학회의 개혁 필요성을 주장했다.[29]
2. 4. 20세기 이후
COVID-19 백신을 지지하기 위해, 노벨상 수상자인 벵카트라만 라마크리슈난과 어드리언 스미스 경의 지도 아래 왕립학회는 여론 형성에 힘을 보태면서 실험적 의료 개입에 대한 "허위 정보를 생산하고 유포한 자에 대한 법적 조치 및 처벌"을 제안했다. 이는 2020년 1월, 영국 대법원의 퇴임 판사인 로드 섬프션이 "과학은 반대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의견에 맞서면서 발전한다."고 비판하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49] 이 제안은 사회학자 멜린다 밀스가 작성하고 "긴급 상황 과학 태스크포스 – COVID"(Science in Emergencies Tasking – COVID, SET-C)의 동료들이 2020년 10월에 발표한 "COVID-19 백신 배포: 행동, 윤리, 잘못된 정보 및 정책 전략" 보고서에서 승인되었다. SET-C 위원회는 중국, 싱가포르, 한국의 법률을 지지했으며, "예를 들어 싱가포르는 온라인 허위 정보 및 조작 방지법(Protection from Online Falsehoods and Manipulation Act, POFMA)을 가지고 있으며, COVID-19 발생 초기 몇 달 만에 네 건의 주요 (형사) 사건이 발생했다. POFMA는 또한 인터넷 중개자에 대한 모든 면책 조항을 없애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바이두와 같은 소셜 미디어 회사가 플랫폼의 허위 정보 사례를 즉시 수정하도록 법적으로 요구했다."고 밝혔다.[50]3. 주요 인물
왕립학회는 창립 초기부터 17세기의 저명한 과학자 다수를 회원으로 포함했다. 초기 주요 회원으로는 로버트 보일, 로버트 훅, 크리스토퍼 렌, 존 윌킨스, 존 월리스 등이 있으며, 이들은 학회 설립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이작 뉴턴은 1672년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703년부터 1727년까지 회장을 역임하며 학회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22]
18세기 동안 학회는 초기만큼의 활기를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과학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 시기에는 영국 정부가 중요한 과학적 문제에 대해 학회 평의회에 자문을 구하는 관행이 생겼다. 그러나 1777년 피뢰침 설치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논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발명한 뾰족한 피뢰침과 벤자민 윌슨이 발명한 뭉툭한 피뢰침 중 어떤 것을 사용할지를 두고, 프랭클린 지지자들을 미국 동맹국으로 비난하는 등 정치적 갈등으로 번졌고, 결국 당시 회장이었던 존 프링글 경이 사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위원회에 학회 펠로우를 임명하는 관행은 계속 이어졌다.[21]
18세기 중반 학회 내부 정치에서는 휘그당 성향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소위 "하드위크 서클"(하드위크 백작의 이름을 딴)이 주요 직책을 차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그룹에는 다니엘 레이와 토마스 버치 등이 포함되었으며, 마틴 폴크스의 사임 후 맥클스필드 백작의 회장 선출을 지원했다.[30] 맥클스필드 백작 재임 기간 동안 이 서클은 정점에 달했으며, 이후 모튼 백작(1764년)과 존 프링글 경(1772년)을 회장으로 선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31] 그러나 조지 3세 치하에서 휘그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이 서클도 1780년대에 와해되었다.[32]
18세기 후반에는 조셉 뱅크스 경이 1778년부터 1820년까지 장기간 회장을 역임하며 학회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학회를 서머싯 하우스로 이전하는 것을 주도했다.[33]
학회의 핵심 구성원은 펠로우(Fellows)로, 영국과 영연방 국가 출신의 과학자 및 공학자 중 자연 지식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인물들이 선출된다.[55] 펠로우는 종신직이며, 이름 뒤에 FRS(Fellow of the Royal Society)라는 후치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56] 매년 최대 52명의 새로운 펠로우가 선출되며, 2014년 기준으로 약 1,450명의 생존 펠로우가 있었다.[57] J. J. 톰슨(1884년 선출), 스티븐 호킹(1974년 선출) 등이 대표적인 펠로우이다.
초기에는 학회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과학자가 아닌 부유하거나 영향력 있는 인물들도 다수 펠로우로 받아들였다.[61] 1663년에는 펠로우의 3분의 2가 비과학자였고, 이 비율은 1800년에는 71.6%까지 증가했다. 그러나 1847년 연간 선출 인원을 15명으로 제한하고 과학적 업적을 주요 기준으로 삼는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점차 과학자 중심의 학회로 변화했다.[64][63]
학회는 또한 왕실 펠로우(Royal Fellows), 명예 펠로우(Honorary Fellows), 외국인 회원(Foreign Members)을 선출한다. 왕실 펠로우는 영국 왕실 구성원이며, 현재 찰스 3세, 켄트 공작 에드워드, 앤 공주, 웨일스 공 윌리엄이 있다.[57] 외국인 회원은 영연방 외 국가의 뛰어난 과학자로, 매년 8명이 선출된다.[59]
대 | 이름 | 취임년도 | 퇴임년도 | 작위 등 |
---|---|---|---|---|
1 | 윌리엄 브라운커 | 1662 | 1677 | 브라운커 자작 |
2 | 조세프 윌리엄슨 경 | 1677 | 1680 | 기사 |
3 | 크리스토퍼 렌 경 | 1680 | 1682 | 기사 |
4 | 존 호스킨스 경 | 1682 | 1683 | 준남작 |
5 | 시릴 와이치 경 | 1683 | 1684 | 기사 |
6 | 사뮤엘 피프스 | 1684 | 1686 | |
7 | 존 본 | 1686 | 1689 | 카버리 백작 |
8 | 토마스 허버트 | 1689 | 1690 | 펨브로크 백작 |
9 | 로버트 사우스웰 경 | 1690 | 1695 | 기사 |
10 | 찰스 몽태규 | 1695 | 1698 | 핼리팩스 백작 |
11 | 존 서머스 | 1698 | 1703 | 서머스 남작 |
12 | 아이작 뉴턴 경 | 1703 | 1727 | 기사 |
13 | 한스 슬론 경 | 1727 | 1741 | 제1대 준남작 |
14 | 마틴 폴크스 | 1741 | 1752 | |
15 | 조지 파커 | 1752 | 1764 | 맥클스필드 백작 |
16 | 제임스 더글러스 | 1764 | 1768 | 모튼 백작 |
17 | 제임스 버로우 경 | 1768 | 1768 | 기사 |
18 | 제임스 웨스트 | 1768 | 1772 | |
19 | 존 프링글 경 | 1772 | 1778 | 제1대 준남작 |
20 | 조셉 뱅크스 경 | 1778 | 1820 | 제1대 준남작 |
21 |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 | 1820 | 1820 | |
22 | 험프리 데이비 경 | 1820 | 1827 | 제1대 준남작 |
23 | 데이비스 길버트 | 1827 | 1830 | |
24 | 오거스터스 프레더릭 왕자 | 1830 | 1838 | 서식스 공작 |
25 | 스펜서 콤프턴 | 1838 | 1848 | 노샘프턴 후작 |
26 | 윌리엄 파슨스 | 1848 | 1854 | 로스 백작 |
27 | 존 로테슬리 | 1854 | 1858 | 로테슬리 남작 |
28 | 벤자민 콜린스 브로디 경 | 1858 | 1861 | 제1대 준남작 |
29 | 에드워드 세이빈 경 | 1861 | 1871 | 기사 |
30 | 조지 비델 에어리 경 | 1871 | 1873 | 기사 |
31 | 조셉 돌턴 후커 경 | 1873 | 1878 | 기사 |
32 | 윌리엄 스포티스우드 | 1878 | 1883 | |
33 | 토머스 헨리 헉슬리 | 1883 | 1885 | |
34 | 조지 가브리엘 스토크스 경 | 1885 | 1890 | 제1대 준남작 |
35 | 윌리엄 톰슨 | 1890 | 1895 | 켈빈 남작 |
36 | 조셉 리스터 | 1895 | 1900 | 리스터 남작 |
37 | 윌리엄 허긴스 경 | 1900 | 1905 | 기사 |
38 | 존 윌리엄 스트럿 | 1905 | 1908 | 레일리 남작 |
39 | 아치볼드 게이키 경 | 1908 | 1913 | 기사 |
40 | 윌리엄 크룩스 경 | 1913 | 1915 | 기사 |
41 | J. J. 톰슨 경 | 1915 | 1920 | 기사 |
42 | 찰스 스콧 셰링턴 경 | 1920 | 1925 | 기사 |
43 | 어니스트 러더퍼드 | 1925 | 1930 | 러더퍼드 남작 |
44 | 프레더릭 가울랜드 홉킨스 경 | 1930 | 1935 | 기사 |
45 | 윌리엄 헨리 브래그 경 | 1935 | 1940 | 기사 |
46 | 헨리 핼릿 데일 경 | 1940 | 1945 | 기사 |
47 | 로버트 로빈슨 경 | 1945 | 1950 | 기사 |
48 | 에드거 에이드리언 | 1950 | 1955 | 에이드리언 남작 |
49 | 시릴 노먼 힌셜우드 경 | 1955 | 1960 | 기사 |
50 | 하워드 플로리 | 1960 | 1965 | 플로리 남작 |
51 | 패트릭 블래킷 | 1965 | 1970 | 블래킷 남작 |
52 | 앨런 로이드 호지킨 경 | 1970 | 1975 | 기사 |
53 | 알렉산더 토드 | 1975 | 1980 | 토드 남작 |
54 | 앤드루 헉슬리 경 | 1980 | 1985 | 기사 |
55 | 조지 포터 | 1985 | 1990 | 포터 남작 |
56 | 마이클 아티야 경 | 1990 | 1995 | 기사 |
57 | 아론 클루그 경 | 1995 | 2000 | 기사 |
58 | 로버트 메이 | 2000 | 2005 | 메이 남작 |
59 | 마틴 리스 | 2005 | 2010 | 리스 남작 |
60 | 폴 너스 경 | 2010 | 2015 | 기사 |
61 | 벤카트라만 라마크리슈난 경 | 2015 | 2020 | 기사 |
62 | 에이드리언 스미스 경 | 2020 | 현재 | 기사 |
3. 1.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 1627-1691)
로버트 보일은 왕립학회 설립 이전부터 과학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7세기 중반, 왕립학회의 전신 중 하나로 여겨지는 보이지 않는 대학(Invisible College)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646년과 1647년에 쓴 편지에서 보일은 "우리의 보이지 않는 대학" 또는 "우리의 철학 대학"을 언급하며, 실험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5][7] 이 편지들은 당시 과학자들 간의 비공식적이지만 활발했던 지식 교류 네트워크, 즉 '보이지 않는 대학'의 존재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보일은 1658년 옥스퍼드로 거처를 옮겨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1660년 11월 28일, 보일은 크리스토퍼 렌, 존 윌킨스 등 다른 11명의 자연철학자들과 함께 그레샴 칼리지에 모여 왕립학회의 모태가 된 "물리수학 실험 학습 증진을 위한 칼리지" 설립을 결의한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13] 왕립학회가 정식으로 설립된 후, 보일은 1662년 학회의 실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훗날 현미경 연구로 유명해진 로버트 훅의 도움을 받아 공기 펌프를 제작하고 이를 이용한 다양한 실험을 수행했다. 이 실험 연구를 통해 기체의 압력과 부피 사이의 반비례 관계를 설명하는 보일의 법칙을 발견했으며, 이는 왕립학회 초기의 중요한 과학적 성과로 기록되어 그의 명성을 높였다.
3. 2. 로버트 훅 (Robert Hooke, 1635-1703)

로버트 훅은 1653년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1655년부터 의사 토마스 윌리엄스의 조수로 일하며 옥스퍼드의 과학 모임에 참여했다. 이후 로버트 보일의 조수로 고용되어 공기 펌프 제작 등 그의 연구를 도왔다.
1662년, 왕립학회는 훅을 실험 책임자(큐레이터)로 고용했다. 그는 매주 열리는 학회 모임에서 3~4가지 실험을 선보이며 회원들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1663년에는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시 고액이었던 회비를 면제받았다. 1664년에는 학회의 지원으로 그레샴 칼리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의 강사가 되었고, 1665년에는 그레샴 칼리지의 기하학 교수로 임명되어 그곳에 거주하며 과학 연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훅은 탄성 연구를 통해 훅의 법칙을 발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현미경을 이용한 관찰에 뛰어났으며, 관찰 결과를 회원들에게 시연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현미경 관찰 기록과 직접 그린 정밀한 삽화를 모아 1665년에 『미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eng)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코르크의 단면이 수많은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 것을 관찰하고, 이를 작은 방을 의미하는 '셀'(cell)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생물학에서 세포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시초가 되었다.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에는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조수로서 런던 시가지 측량과 재건 사업에 참여하여 많은 건물을 설계했으며, 이를 통해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다.
1677년에는 왕립학회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어 학회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회장은 상징적인 위치에 가까웠기에 훅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는 1679년 드니 파팽이 발명한 증기력 기구(훗날 압력솥의 원리가 됨)를 이용한 실험을 학회에서 시연하도록 지원했으며, 파팽이 학회의 준실험 책임자가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천문학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여, 접안 마이크로미터를 개량하고 망원경을 이용한 정밀 관측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망원경의 조준 정확도 문제를 두고 요하네스 헤벨리우스와 논쟁을 벌였으며, 항성의 연주시차를 검출하려는 시도도 했다. 훅의 정밀한 천체 관측 방법은 그리니치 천문대의 존 플램스티드와 에드먼드 핼리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편, 훅은 에드먼드 핼리와 행성 운동의 원인에 대해 논의하며 거리의 역제곱 법칙에 따른 인력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했다. 이후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을 발표하면서, 훅은 광학 이론과 만유인력의 우선권을 두고 뉴턴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훅이 활동하던 시기의 왕립학회는 실험을 중시하는 분위기였으나, 18세기 뉴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이론 과학 중심으로 변화했다.
3. 3.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1643-1727)
아이작 뉴턴은 만유인력, 광학, 미적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이다.[22] 그는 찰스 2세에게 망원경을 헌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1672년 29세의 나이로 왕립학회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1703년부터 1727년 사망할 때까지 왕립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학회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22] 뉴턴의 회장 재임 기간 동안 학회의 명성이 높아졌으나,[22] 한편으로는 회장으로서의 권력을 남용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특히 라이프니츠와의 미적분학 발명 우선권을 둘러싼 분쟁에서,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공정한" 위원회를 임명하고 결국 위원회 이름으로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발표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켰다.[22]
3. 4. 에드먼드 핼리 (Edmond Halley, 1656-1742)
에드먼드 핼리는 뉴턴에게 이론 출판을 권유하여 『프린키피아』를 집필하게 하고 출판 비용도 부담했다. 핼리 혜성의 발견으로 유명하다.3. 5. 프랜시스 호크스비 (Francis Hauksbee, ? - 1713)
아이작 뉴턴이 회장으로 취임한 후 학회의 분위기가 다소 의례적으로 흐르자, 뉴턴은 과학 애호가들의 참여를 유지하기 위해 매주 회합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보여줄 인물을 찾았다. 이때 발탁된 인물이 옷감 상인이었던 프랜시스 호크스비(Francis Hauksbee|프랜시스 호크스비영어)였다.[54]
호크스비는 로버트 보일의 연구를 이어받아 공기 펌프를 더욱 견고하고 사용하기 쉽게 개량했으며, 이를 활용한 다양한 실험을 고안했다.[8] 그의 이름은 1703년 12월 15일 학회 회의록에 처음 등장하며,[50] 1703년부터 1713년 사망할 때까지 거의 매주 학회 정례 회합에서 실험을 시연했다.[8][54] 1704년에는 "폭풍우 시 기압계 수은주 하강 원인 규명 실험" 결과를 ''왕립학회 철학적 논문집''에 게재했으며, 이후 총 53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다.[55] 그의 연구는 보일의 공기 펌프 연구를 발전시킨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8] 호크스비가 제작한 공기 펌프 중 하나는 현재 런던 과학박물관의 "조지 3세 컬렉션"에 포함되어 보존되고 있다.[55] 뉴턴은 호크스비가 실험을 시연할 때마다 급여를 지급했지만, 로버트 훅과 같이 정식 '실험 책임자'로 고용하지는 않았다.[56] 다만, 1705년 발표된 논문에는 호크스비가 '왕립학회 회원'으로 명시되어 있다.[55]
1706년, 호크스비는 유리 구의 내부를 비우고 수은을 넣은 뒤 외부를 강하게 마찰시키면 빛이 발생하는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학회에 보고했다. 이는 사실상 마찰 발전기의 발명이었으나,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57] 그는 이러한 연구 결과를 모아 1709년 『다양한 물질에 대한 자연철학적·기계적 실험』(Physico-Mechanical Experiments on Various Subjects|피지코-미케니컬 익스페리먼츠 온 배리어스 서브젝츠영어)이라는 책을 출판했다.[57]
호크스비는 1710년과 1712년에 자신의 실험들을 유료로 시연하는 과학 강좌를 열었다.[54] 이는 세계 최초로 실험 장치를 이용한 공개 과학 강좌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참가비를 내면 신분, 학력, 성별,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과학 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했다.[9]
3. 6. 존 테오필러스 데자기에 (John Theophilus Desaguliers, 1683-1744)



1713년 프랜시스 호크스비가 사망하자, 아이작 뉴턴은 존 테오필러스 데자기에(John Theophilus Desaguliers, 1683-1744)를 다음 실험 시연자로 주목했다. 데자기에는 위그노 출신으로, 1713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웨스트민스터 채널 로(Channel Row)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동시에 자택에서 과학 강좌를 열어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1713년 겨울, 뉴턴이 제안한 열 관련 실험을 성공적으로 재현하여 시연한 공로를 인정받아 1714년 초 왕립학회의 실험 책임자(큐레이터)로 임명되었으며, 1744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학회에서 다양한 실험을 선보였는데, 1715년에는 뉴턴의 백색광 분해 실험을 개선하여 시연하기도 했다. 이 실험은 뉴턴이 자신의 저서 『광학』 프랑스어판의 삽화를 수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왕립학회로부터 받는 급여는 자주 연체되거나 삭감되는 등 불안정했지만, 데자기에는 학회의 실험 기구를 적극 활용하여 자신의 과학 강좌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의 강좌는 큰 인기를 끌었으며, 강좌 수입이 학회 연봉의 6배에서 15배에 달할 정도였다. 데자기에는 왕립학회 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52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며 연구 활동도 활발히 수행했다.
데자기에는 과학 지식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1717년에는 강좌 안내서인 『기계적 자연학 강의』(Physico-Mechanical Lectures영어)를 출판했고, 1734년에는 자신의 실험과 강의 내용을 집대성한 『실험철학 강의』(A Course of Experimental Philosophy영어)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약 20년간 121회의 강좌를 열었다고 밝혔다. 그의 강좌는 수학적 배경 지식이 부족한 일반 대중이나 여성들에게도 열려 있었으며, 그는 "과학이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라는 것을 청강자에게 느끼게 하는 것은 발견 이상의 기쁨이 있다"고 말하며 과학 지식 전파에 큰 보람을 느꼈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에서 활동하던 11~12명의 과학 강사 중 8명이 자신의 제자였다고 언급하며, 과학 교육자 양성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했다.
특히 천문학 강좌에서는 '''플라네타리움'''(planetarium)을 적극 활용했다. 그는 호이겐스 등이 제작했던 기존의 천체 모형 구동 장치(오러리)를 당시의 최신 관측 데이터에 기반하여 더욱 정밀하게 천체 운동을 시연할 수 있도록 개량하고 이를 플라네타리움이라 불렀다.
1736년부터는 전기 실험에도 힘써, 인체가 정전기를 띠고 전달하는 현상을 시연했으며, 검전기를 이용해 물질의 전기 전도성, 대전, 공기 중 방전, 습도의 영향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데자기에는 1736년 커피하우스 건물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실험 시연과 강좌를 꾸준히 이어갔으며, 1744년 사망할 때까지 과학 교육과 대중화에 헌신했다.
4. 조직 및 운영
왕립학회 초기의 매주 회합에서는 회원들이 함께 실험을 시연하는 활동이 주를 이루었으나, 1680년대부터 이러한 방식은 점차 사라지고 오늘날의 학회처럼 연구 발표와 토론 중심으로 변화했다. 이로 인해 학회에 함께 거주하는 회원이라도 주로 발표를 듣는 관객의 역할에 머무르게 되었다.
4. 1. 회원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FRS)
17세기 이후 저명한 과학자 대부분은 왕립학회의 창립 회원이거나 펠로우였으며, 이들에게는 '''FRS'''(Fellow of the Royal Society영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 왕립학회의 공식 명칭은 "자연 지식을 증진하기 위한 런던 왕립 학회 회장, 평의회 및 펠로우"(The President, Council, and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for Improving Natural Knowledge영어)이다. 초기 주요 펠로우로는 로버트 보일, J. 이블린, 로버트 훅, 윌리엄 페티, 존 월리스, 존 윌킨스, 토마스 윌리스, 크리스토퍼 렌 등이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 및 광학 연구로 근대 과학에 큰 영향을 미친 아이작 뉴턴은 1672년 펠로우로 선출되었고, 그의 회장 재임 기간(1703~1727) 동안 학회의 명성이 높아졌다.[22]18세기 동안 왕립학회 펠로우 수는 1739년까지 110명에서 약 300명으로 증가했다.[22] 전체 펠로우 중 저명한 과학자는 소수였지만, 대부분의 평의원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존 헤들리, 윌리엄 존스, 한스 슬론 등이 여러 차례 포함되었다.[25] 그러나 펠로우들의 회비 납부가 원활하지 않아 학회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26] 18세기 중반에는 하드위크 백작을 중심으로 한 "하드위크 서클"이 학회 내 주요 직책을 차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30][31][32]
1945년 3월 22일, 학회 규정 개정을 통해 최초로 여성 펠로우들이 선출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회원들의 협조를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편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으며, 336명 찬성, 37명 반대로 가결되었다.[45] 마조리 스테픈슨과 캐슬린 론스데일이 최초의 여성 펠로우로 선출되었다.[45] 1947년에는 메리 카트라이트가 최초의 여성 수학자 펠로우로 선출되었으며,[46][47][48] 왕립학회 이사회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했다.[46]
왕립학회는 회장(회장)이 의장을 맡는 평의회에 의해 운영되며, 평의회 위원, 회장 및 기타 임원은 펠로우 중에서 선출된다. 2016년 기준으로 왕족 펠로우, 명예 펠로우, 외국인 펠로우를 포함하여 약 1600명의 펠로우가 있다. 이들은 학회 운영에 참여하고 과학 발전에 기여한다.
4. 2. 이사회 (Council)
왕립학회는 학회 규정 및 상임 규칙에 따라, 회장이 의장을 맡는 이사회(Council, 평의회)에 의해 운영된다. 이사회 구성원, 회장 및 기타 임원은 학회 회원(펠로우) 중에서 선출된다.이사회는 학회의 전반적인 정책을 지휘하고 학회 운영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관리하며, 학회 규정의 개정, 제정, 폐지 권한을 가진다. 또한 학회의 재산과 부동산에 대한 수탁자 역할도 수행한다.
이사회는 20명에서 24명의 펠로우로 구성된다.[65] 여기에는 임원(회장, 재무, 물리 과학 분야 서기 1명, 생명 과학 분야 서기 1명, 외교 서기 1명)[66], 각 분과 위원회를 대표하는 펠로우 1명, 그리고 그 외 펠로우 7명이 포함된다.[67] 이사들은 매년 우편 투표를 통해 선출되며, 규정에 따라 매년 최소 10명의 이사가 교체되어야 한다.[68]
이사회는 필요에 따라 다양한 위원회를 설립하여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68], 이 위원회에는 학회 펠로우뿐만 아니라 외부 과학자도 참여할 수 있다.[67] 메리 카트라이트(Mary Cartwright)는 1947년 여성 수학자로는 처음으로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46][47][48], 학회 이사회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46]
학회 헌장에 따라 회장, 서기 2명(물리 과학, 생명 과학), 재무는 학회의 임원을 구성한다.[69] 현재 임원(소스 문서 작성 시점 기준)은 다음과 같다.[70]
직책 | 이름 |
---|---|
회장 | 애드리언 스미스 |
재무 | 조나단 키팅 |
생물학 분야 서기 | 린다 파트리지 |
물리학 분야 서기 | 쉴라 로완 |
외교 서기 | 마크 월포트 및 앨리슨 노블 (공동) |
4. 3. 회장 (President of the Royal Society, PRS)
왕립학회는 학회 규정 및 상임 규칙에 따라 평의회에 의해 운영되며, 회장(President of the Royal Society, PRS)이 평의회의 의장을 맡는다. 평의회 위원, 회장 및 기타 임원은 회원들 중에서 선출된다.왕립학회 회장은 학회와 평의회의 수장이다. 회장직에 대한 세부 사항은 두 번째 헌장에 명시되었으며, 초기에는 회장의 임기 제한이 없었다. 아이작 뉴턴은 1703년부터 1727년까지 24년 동안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학회 규정에 따라 임기는 5년이다.[71]
현직 회장은 에이드리언 스미스이며, 2020년 11월 30일 벤키 라마크리슈난으로부터 직을 이어받았다.[72] 역사적으로 회장의 직무는 공식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모두였다. 1876년 동물 학대 방지법에 따라 회장은 동물 실험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과학 문제에 대한 정부의 비공식적 자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저명한 외국 손님과 과학자들을 접대하는 임무도 맡았다.[73]
18세기에는 회장직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 관계가 나타나기도 했다. 피뢰침 설계 방식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적으로 비화되면서 회장이었던 존 프링글 경이 사임하는 일이 있었다.[21] 또한 이 시기 중반에는 "하드위크 서클"이라 불리는 휘그당 성향의 인사들이 학회 내 주요 직책을 차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맥클스필드 백작, 모턴 백작, 존 프링글 경 등을 회장으로 선출하는 데 기여했다.[30][31] 아이작 뉴턴은 회장 재임 중 학회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미적분학 발견 우선권 논쟁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편파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도 받는다.[22] 조셉 뱅크스 경은 1778년 회장으로 선출된 직후 학회의 서머싯 하우스 이전을 추진했다.[33]
초기 왕립학회 회장에는 학자 외에도 정치인이나 군인 등 다양한 직업의 인물이 선출되었으나, 최근에는 노벨상이나 필즈상 수상자 등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가 취임하는 경우가 많다. 왕립학회 회장에게는 '''PRS'''(The president of the Royal Society)라는 칭호가 붙는다.
대 | 이름 | 취임년도 | 퇴임년도 | 작위 등 |
---|---|---|---|---|
1 | 윌리엄 브라운커 | 1662 | 1677 | 브라운커 자작 |
2 | 조지프 윌리엄슨 | 1677 | 1680 | |
3 | 크리스토퍼 렌 | 1680 | 1682 | |
4 | 존 호스킨스 | 1682 | 1683 | 준남작 |
5 | 시릴 와이치 | 1683 | 1684 | |
6 | 사뮈엘 피프스 | 1684 | 1686 | |
7 | 존 본 | 1686 | 1689 | 카베리 백작 |
8 | 토머스 허버트 | 1689 | 1690 | 펨브로크 백작 |
9 | 로버트 사우스웰 | 1690 | 1695 | |
10 | 찰스 몬태규 | 1695 | 1698 | 핼리팩스 백작 |
11 | 존 소머스 | 1698 | 1703 | 소머스 남작 |
12 | 아이작 뉴턴 | 1703 | 1727 | |
13 | 한스 슬론 | 1727 | 1741 | 준남작 |
14 | 마틴 폴크스 | 1741 | 1752 | |
15 | 조지 파커 | 1752 | 1764 | 매클즈필드 백작 |
16 | 제임스 더글러스 | 1764 | 1768 | 모턴 백작 |
17 | 제임스 버로 | 1768 | 1768 | |
18 | 제임스 웨스트 | 1768 | 1772 | |
19 | 존 프링글 경 | 1772 | 1778 | 준남작 |
20 | 조셉 뱅크스 | 1778 | 1820 | 준남작 |
21 |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 | 1820 | 1820 | |
22 | 험프리 데이비 | 1820 | 1827 | 준남작 |
23 | 데이비스 길버트 | 1827 | 1830 | |
24 | 오거스터스 프레더릭 | 1830 | 1838 | 서식스 공작 |
25 | 스펜서 콤프턴 | 1838 | 1848 | 노샘프턴 후작 |
26 | 윌리엄 파슨스 | 1848 | 1854 | 로스 백작 |
27 | 존 로테슬리 | 1854 | 1858 | 로테슬리 남작 |
28 | 벤저민 콜린스 브로디 | 1858 | 1861 | 준남작 |
29 | 에드워드 세이빈 | 1861 | 1871 | |
30 | 조지 비델 에어리 | 1871 | 1873 | |
31 | 조지프 돌턴 후커 | 1873 | 1878 | |
32 | 윌리엄 스포티스우드 | 1878 | 1883 | |
33 | 토머스 헨리 헉슬리 | 1883 | 1885 | |
34 | 조지 가브리엘 스토크스 | 1885 | 1890 | 준남작 |
35 | 윌리엄 톰슨 | 1890 | 1895 | 켈빈 남작 |
36 | 조지프 리스터 | 1895 | 1900 | 리스터 남작 |
37 | 윌리엄 허긴스 | 1900 | 1905 | |
38 | 존 윌리엄 스트럿 | 1905 | 1908 | 제3대 레일리 남작 |
39 | 아치볼드 게이키 | 1908 | 1913 | |
40 | 윌리엄 크룩스 | 1913 | 1915 | |
41 | J. J. 톰슨 | 1915 | 1920 | |
42 | 찰스 스콧 셰링턴 | 1920 | 1925 | |
43 | 어니스트 러더퍼드 | 1925 | 1930 | 러더퍼드오브넬슨 남작 |
44 | 프레더릭 가울랜드 홉킨스 | 1930 | 1935 | |
45 | 윌리엄 헨리 브래그 | 1935 | 1940 | |
46 | 헨리 핼릿 데일 | 1940 | 1945 | |
47 | 로버트 로빈슨 | 1945 | 1950 | |
48 | 에드거 에이드리언 | 1950 | 1955 | 에이드리언 남작 |
49 | 시릴 노먼 힌셜우드 | 1955 | 1960 | |
50 | 하워드 플로리 | 1960 | 1965 | 플로리 남작 |
51 | 패트릭 블래킷 | 1965 | 1970 | 블래킷 남작 |
52 | 앨런 로이드 호지킨 | 1970 | 1975 | |
53 | 알렉산더 토드 | 1975 | 1980 | 토드 남작 |
54 | 앤드루 헉슬리 | 1980 | 1985 | |
55 | 조지 포터 | 1985 | 1990 | 포터 남작 |
56 | 마이클 아티야 | 1990 | 1995 | |
57 | 에런 클루그 | 1995 | 2000 | |
58 | 로버트 메이 | 2000 | 2005 | 메이 남작 |
59 | 마틴 리스 | 2005 | 2010 | 리스 남작 |
60 | 폴 너스 | 2010 | 2015 | |
61 | 벤카트라만 라마크리슈난 | 2015 | 2020 | |
62 | 에이드리언 스미스 | 2020 | 현재 |
4. 4. 직원 (Permanent staff)
학회 운영은 다수의 상근 직원이 지원한다. 초기 헌장에는 실험 운영자 2명 이상과 서기 2명 이상을 두도록 규정했다. 학회 소장 도서가 늘어나면서 큐레이터를 고용할 필요도 생겼다. 학회의 재정 상황이 나아지면서 직원 수도 늘어났다. 직원은 주로 외부 인력으로 채용되었고, 일부 과학자는 펠로우십을 포기하고 직원으로 합류하기도 했다.[74] 현재 사무총장은 줄리 맥스턴 여사(Julie Maxton)이다.[75]5. 활동
왕립학회는 과학 발전을 촉진하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요 활동 영역은 다음과 같다.
- 연구 지원: 다양한 연구 펠로우십과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초기 경력부터 후기 경력까지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한다.
- 출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 학술지인 ''왕립학회 철학회보''를 비롯하여 다수의 권위 있는 학술지를 발행하여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과학 지식의 확산에 기여한다.
- 과학 정책 자문: 과학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정부 및 공공기관에 정책 자문을 제공하며, 사회적 현안에 대한 과학적 해결책 모색에 참여한다.
- 대중 참여: 강연, 전시, 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과학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힘쓰고 있다. 초기 학회부터 실험 시연 등을 통해 대중의 과학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자 노력해왔다.
5. 1. 연구 지원

왕립학회는 다양한 연구 펠로우십과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지원한다. 약 1,000개의 연구 펠로우십에 1억파운드가 넘는 자금을 지원하여 초기 경력 및 후기 경력 과학자들을 돕고 있으며, 혁신, 이동성 및 연구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금도 제공한다.[76] 학회에서 수여하는 상, 시상 강연 및 메달 역시 연구 자금 지원을 위한 상금과 함께 주어진다.[77] 또한, 연구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어 기술 교육 과정도 제공한다.[78]
이러한 연구 지원 활동의 상당 부분은 기업, 혁신 및 기술부의 지원금으로 이루어지며, 특히 대학 연구 펠로우십(URF)에 많은 지원이 집중된다.[41] 2008년에는 새로운 과학 기술 기반 회사에 투자하고 재정적 자립을 목표로 하는 왕립학회 기업 기금을 설립했다. 이 기금은 학회 창립 350주년 기념 초기 기부금 이후 투자 수익으로 운영된다.[79]
5. 2. 출판

왕립학회 출판부(Royal Society Publishing)를 통해 학회는 다음과 같은 학술지들을 발행하고 있다.[90]
- ''왕립학회 철학회보 A'' (수학 및 물리 과학)
- ''왕립학회 철학회보 B'' (생물 과학)
- ''왕립학회 회보 A''
- ''왕립학회 회보 B''
- ''생물학 레터''
- ''오픈 바이올로지''
- ''왕립학회 오픈 사이언스''
- ''왕립학회 인터페이스 저널''
- ''인터페이스 포커스''
- ''노트 앤 레코드''
- ''왕립학회 회원전기''
학회는 1665년 세계 최초의 과학 전문 학술지인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를 발간하여, 현재 과학 학술지에 널리 퍼져있는 동료 심사 과정을 시작했다. 초대 편집장은 학회의 초대 서기였던 헨리 올덴버그로, 그는 과학자들 간의 정보 교류를 위해 개인 비용으로 이 잡지를 창간했다.[91][92]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 학술지로 남아 있다. 현재 특정 주제에 대한 테마별 논문을 출판하고 있으며, 1886년부터[93] 수학 및 물리 과학을 다루는 A편과[94] 생물 과학을 다루는 B편으로 나뉘어 발행된다.[95]
''왕립학회 회보''(''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는 자유롭게 제출된 연구 논문으로 구성되며, 마찬가지로 A편과 B편으로 나뉜다.[96] ''생물학 레터''(''Biology Letters'')는 모든 생물학 분야에 대한 짧은 연구 논문과 의견을 발표하며, 2005년에 출범했다.[97] ''왕립학회 인터페이스 저널''(''Journal of the Royal Society Interface'')은 물리 과학과 생명 과학의 경계에서 학제 간 연구를 발표하며,[98] ''인터페이스 포커스''(''Interface Focus'')[99]는 같은 분야에서 테마별 논문을 발표한다. ''노트 앤 레코드''(''Notes and Records'')는 학회의 과학사 저널이다.[100] ''회원전기''(''Biographical Memoirs of Fellows of the Royal Society'')는 연 2회 발행되며, 고인이 된 회원들의 자세한 부고가 수록되어 있다.[101] ''오픈 바이올로지''(''Open Biology'')는 분자 및 세포 수준에서 생물학을 다루는 오픈 액세스 저널이다. ''왕립학회 오픈 사이언스''(''Royal Society Open Science'')는 객관적인 동료 심사를 기반으로 과학 전 분야에 걸쳐 고품질의 독창적인 연구를 발표하는 오픈 액세스 저널이다.[102] 학회의 모든 학술지는 동료 심사를 거친다.
2021년 5월, 학회는 4개의 하이브리드 연구 저널을 오픈 액세스로 전환할 계획을 발표했다.[103]
5. 3. 과학 정책 자문
왕립학회는 COVID-19 백신을 지지하며, 당시 회장이었던 노벨상 수상자 벵카트라만 라마크리슈난과 후임 회장 어드리언 스미스 경의 주도 하에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학회는 실험적인 의료 개입에 대한 "허위 정보를 생산하고 유포한 자에 대한 법적 조치 및 처벌"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안은 2020년 1월, 영국 대법원의 퇴임 판사였던 로드 섬프션으로부터 "과학은 반대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의견에 맞서면서 발전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주목받았다.[49]이 제안은 사회학자 멜린다 밀스가 주도하고 "긴급 상황 과학 태스크포스 – COVID"(Science in Emergencies Tasking – COVID, SET-C) 동료들이 2020년 10월 발표한 "COVID-19 백신 배포: 행동, 윤리, 잘못된 정보 및 정책 전략" 보고서에서 구체화되었다. SET-C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싱가포르의 Protection from Online Falsehoods and Manipulation Act|온라인 허위 정보 및 조작 방지법영어(POFMA)과 같은 강력한 법적 대응 사례를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보고서는 "싱가포르는 POFMA를 통해 COVID-19 발생 초기 몇 달 만에 네 건의 주요 (형사) 사건을 처리했으며, 이 법은 인터넷 중개자에 대한 면책 조항을 없애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바이두와 같은 소셜 미디어 회사가 플랫폼의 허위 정보 사례를 즉시 수정하도록 법적으로 요구했다"고 설명하며 유사한 조치의 필요성을 시사했다.[50]
5. 4. 대중 참여
사뮤엘 핍스는 왕립학회의 제6대 회장이었으나 과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유명한 『핍스의 일기』는 1660년부터 1669년까지 10년간 당시 런던 시민의 생활과 정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6] 핍스는 학회에서 실험을 관람하거나 참여하고, 실험 기구를 구입해 아내에게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즐겼다.[7] 그는 새로운 볼거리를 찾고,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같은 취미를 가진 명사들과 어울리고 싶어 했다. 또한, 과학과 학회 관련 소식을 주제로 커피하우스에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7] 당시 런던에는 약 200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정치뿐만 아니라 과학적 주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술을 팔지 않아 취객 없이 건전한 논의가 가능했다.[7] 핍스에게 왕립학회 회비를 내고 실험을 보러 가는 것은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었으며, 당시 런던에서 과학은 일종의 오락으로 여겨졌다.[7]아이작 뉴턴이 회장으로 취임한 후 학회의 분위기가 다소 엄숙해지자, 그는 과학 애호가들의 참여를 유지하기 위해 매주 흥미로운 실험을 시연할 인물을 물색했다. 이때 주목받은 인물이 옷감 상인 출신의 프랜시스 호크스비였다.[54] 호크스비는 보일의 연구를 이어받아 공기 펌프를 더 튼튼하고 사용하기 쉽게 개량했으며, 이를 활용한 새로운 실험들을 고안했다.[8] 1703년부터 1713년까지 약 10년간, 호크스비는 거의 매주 학회 정례 회의에서 다양한 실험을 선보였다.[8] 그의 이름이 학회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03년 12월 15일 회의였다.[50] 1704년에는 "폭풍우 시 기압계의 수은주가 하강하는 원인을 보여주는 실험"을 시연했고, 이 내용은 같은 해 여름 학회보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게재되었다. 호크스비는 총 53편 이상의 논문을 학회보에 발표했으며,[55] 그의 연구는 보일의 공기 펌프 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었다.[8] 1705년 논문부터 저자 직함에 "왕립학회 회원"이라고 명기되었다. 그가 개량한 공기 펌프 중 하나는 "조지 3세 컬렉션"의 일부로 현재 런던 과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55] 뉴턴은 호크스비가 실험을 시연할 때마다 '실험 책임자'로 임명하여 급여를 지급했지만, 훅처럼 학회에 정식으로 고용된 것은 아니었다.[56]
호크스비는 1706년 학회보에 "안쪽에 밀랍을 바른 유리 구의 바깥 면을 마찰하면 빛이 발생하는 실험"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유리 구 내부의 공기를 빼고 수은을 넣은 뒤 세게 마찰하면 빛이 발생하는 현상을 발견한 것으로, 이는 '마찰 발전기'의 초기 형태였으나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57] 그는 이러한 실험들을 1709년 『다양한 물질에 대한 자연철학적·기계적 실험』이라는 책으로 정리했다.[57]
1710년과 1712년, 호크스비는 자신의 실험들을 유료로 시연하는 강좌 광고를 냈다.[54] 이는 호크스비와 동료들이 실험 장치를 이용해 세계 최초로 시작한 공개 과학 강좌였다. 이 강좌는 참가비만 내면 신분, 학력, 성별,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과학 실험을 관람하고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여, 당시 왕립학회 주변에 존재했던 신분의 장벽을 허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9]
1713년 호크스비가 병으로 사망하자, 뉴턴은 존 테오필러스 데자귀리에(John Theophilus Desaguliers, 1682-1744)를 다음 실험 시연자로 지목했다.[60] 데자귀리에는 1713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웨스트민스터 채널 로(Channel Row) 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며,[61] 자택에서 과학 강좌를 열어 곧 명성을 얻었다. 1713년 겨울, 뉴턴이 제안한 열에 관한 실험을 성공적으로 재현하여 왕립학회에서 시연했고, 이 공로로 1714년 초 왕립학회의 정식 실험 책임자로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61] 1715년에는 뉴턴이 발견한 "백색광은 여러 색의 혼합"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험을 개선하여 학회에서 선보였고, 뉴턴은 이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저서 『광학』 프랑스어판의 그림을 수정하기도 했다.[61] 왕립학회에서 받는 급여는 종종 지연되거나 삭감되었지만, 데자귀리에는 학회의 실험 기구를 자신의 강좌에 활용하여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의 자택 강좌는 큰 인기를 얻어 강좌 수입이 학회 연봉의 6배에서 15배에 달하기도 했다.[62]
데자귀리에는 왕립학회 회보에 52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1717년에는 80쪽 분량의 강좌 안내서 『기계적 자연학 강의』를 출판했다. 그의 강의는 다음과 같은 주제로 구성되었다.
분야 | 강의 수 | 주요 내용 |
---|---|---|
역학 | 8강 | 물질, 힘의 평형, 운동의 제1법칙, 운동의 제2법칙, 구의 그림자·달의 위상·조수, 사면·진자·자석, 충돌 |
정역학 | 7강 | 물·유체, 비중, 펌프, 증기, 잠수종, 공기의 탄성, 공기총 |
광학 | 6강 | 빛의 본성·입자설, 빛의 매질·렌즈, 눈의 구조(암상자), 렌즈 종류와 초점(종이 태우기 실험), 현미경·망원경·안경, 기타 실험 |
1734년, 데자귀리에는 자신의 실험들을 상세히 정리한 『실험철학 강의』를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약 20년 동안 121회의 강좌를 열었다"고 밝혔다.[75] 그의 강좌에는 수학에 익숙하지 않은 청중이 많았고, 여성 수강생도 적지 않았다. 데자귀리에는 "수학적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힘들지만, 그만큼 기쁨도 크다"고 말했으며, "과학의 발견자는 자신의 발견이 유용하다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만, 과학이 인간에게 유용하다는 것을 청중이 느끼게 하는 것은 발견 이상의 기쁨"이라고 강조했다.[75] 그는 당시 잉글랜드에서 자택 과학 강좌를 개설한 사람이 11~12명 있었으며, 그중 8명이 자신의 제자라고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데자귀리에는 1734년 광고에서 천문학 강좌에 '''플라네타리움'''을 활용한다고 밝혔다.[77] 그는 이전까지 오러리(orrery)라고 불리던 기어 장치 천체 모형 기계를 '플라네타리움'으로 부르기 시작했다.[77] 이러한 기계는 하위헌스가 1682년에 제작한 바 있으나, 데자귀리에는 당시의 최신 천체 관측 데이터를 반영하여 천체의 움직임을 더욱 정밀하게 재현하도록 기계를 개량했다.
또한 데자귀리에는 1736년부터 전기 실험에도 힘썼다. 그는 사람이 공중에 매달린 채로 대전되어 전기를 띠고, 이를 다른 물체에 전달하는 시연을 선보였다.[86] 실 조각을 검전기로 사용하여 물질의 대전 및 전도성, 공기 중 전하 손실, 습도의 영향 등을 측정하는 실험도 수행했다.[86] 1736년 커피하우스 건물로 이사한 후에도 그곳에서 실험 시연을 계속했으며, 1744년 사망할 때까지 강좌를 이어갔다.[86]
6. 시상 제도
왕립학회는 과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상, 강연, 메달을 수여한다.[77] 가장 오래된 것은 크루언 강연(Croonian Lecture)으로, 1701년 왕립학회 창립 회원 중 한 명인 윌리엄 크루언(William Croone)의 부인이 남편을 기리기 위해 요청하여 만들어졌다. 크루언 강연은 오늘날에도 매년 열리며 생물 과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왕립학회 상으로 평가받는다.[104] 크루언 강연이 1701년에 제정되었지만, 실제 수여는 코플리 메달(Copley Medal)보다 7년 후인 1738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코플리 메달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가장 오래된 왕립학회 메달이며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주어진다.[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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