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국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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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왜국대란은 2세기 후반 일본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중국 측 기록에 근거하여 146년에서 189년 사이 왜국에서 왕위 다툼으로 인한 혼란이 있었고, 결국 히미코라는 여성이 통치자로 등장하여 혼란이 수습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대란은 야요이 시대와 고분 시대 사이의 전환점으로 여겨지며, 히미코 시대에 중국에 알려진 족장 수가 감소하는 등 정치 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왜국대란의 정확한 시기와 원인,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고고학적 증거와 중국 사서의 기록을 통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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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국 - 왜인
왜인은 고대 중국과 한국에서 일본 열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던 용어로, 어원에 대한 여러 설이 있으며, 기원에 대해서도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고, 현대에는 일본이나 일본인을 멸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 왜국 - 왜5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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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은 고대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일본 열도의 국가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그 어원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으며, 7세기 후반 일본이라는 국호로 변경되기 전까지 고대 한반도 국가들과 교류했다.
왜국대란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전투 이름 | 왜국 대란 |
캠페인 | 해당 없음 |
충돌 | 왜국 대란 |
시기 | 2세기 후반, 영제 재위 기간 |
장소 | 왜국(일본 열도) |
결과 | 히미코 옹립으로 종결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왜면토국?, 야마타이국? |
교전 세력 2 | 각지의 반란 세력 |
지휘관 | |
지휘관 1 | 불명 |
지휘관 2 | 불명 |
전력 | |
전력 1 | 불명 |
전력 2 | 불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불명 |
사상자 2 | 불명 |
2. 역사적 배경
야요이 시대는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금속 기술이 유입되고, 농경 사회로 발전하며, 사회 계층 구조가 확립된 것이 특징이다.[11] 야요이 시대 중반에는 공동체 지도자들이 수입품과 기술 통제에 힘입어 현재의 행정 구역 크기 정도의 소규모 지역에 대한 권위를 확대했다.[12] 이러한 소국들은 1세기경에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상품과 기술의 유입이 증가하거나, 일부 지역 족장들이 중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정치 권력이 더욱 공고해졌다.[12]
2. 1. 야요이 시대의 사회 변화
야요이 시대는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금속 기술이 유입되고, 농경 사회로 발전하며, 사회 계층 구조가 확립된 것이 특징이다.[11] 야요이 시대 중반에는 공동체 지도자들이 수입품과 기술 통제에 힘입어 현재의 행정 구역 크기 정도의 소규모 지역에 대한 권위를 확대했다.[12] 이러한 소국들은 1세기경에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상품과 기술의 유입이 증가하거나, 일부 지역 족장들이 중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정치 권력이 더욱 공고해졌다.[12]2. 2. 중국 및 한반도와의 관계
왜국은 야요이 시대에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벼농사와 금속 기술이 유입되어 농경 사회로 발전하고 사회 계층 구조가 확립되었다.[11] 야요이 시대 중반, 공동체 지도자들은 수입품과 기술을 통제하여 현재의 행정 구역 크기 정도의 소규모 지역에 대한 권위를 확대했다.[12] 이 소국들은 1세기경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고, 상품과 기술 유입이 증가하거나 일부 지역 족장들이 중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정치 권력이 더욱 공고해졌다.[12]3. 중국 측 기록
왜국대란은 일본 선사 시대의 전쟁이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국사서인 ''고지키''와 ''일본서기''는 신대(神代)부터 시작하지만, 그 내용은 대체로 신화적이며, ''일본서기''의 기록은 대략 6세기 후반 이후에야 역사적 신뢰성을 가진다.[3] 중국 왕조사는 6세기 이전 일본 역사의 중요한 문헌 자료이며, 이 2세기 전쟁에 대한 유일한 기록을 담고 있다.[4]
삼국지의 일부인 위지왜인전(297년경)은 왜국대란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을 담고 있다. 이후 이 분쟁을 언급하는 역사서로는 ''후한서''(445년경), ''양서''(635년), ''수서''(636년) 및 ''북사''(7세기 중반) 등이 있으며, 이전 문헌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4]
이들 역사서에 따르면, 왜국은 원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다.[5] 57년에 후한의 수도 낙양에 사신을 보내 한위노왕인을 받은 왜노국왕과 107년에 후한에 사신을 보낸 왜면토국왕 솔승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70~80년이 지나 왜국 내에서 대란이 발생했다.[5] 중국의 정사에서 대란은 천자/황제/왕조의 교체가 있었을 경우에만 사용된다. 쟁란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으며, 후루타 다케히코(古田武彦)에 따르면, "중국정사에서 역년(歷年)이란 평균 8년 ± 수 년"을 의미한다.[5]
''위지왜인전''은 "이 나라는 예전에 한 남자를 통치자로 두었다. 그 후 약 70~80년 동안 소란과 전쟁이 있었다. 이에 백성들은 여자를 통치자로 합의했다. 그녀의 이름은 히미코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5] ''후한서''는 환제(147–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왜국에 큰 혼란과 전쟁이 만연했으며, 수년 동안 통치자가 없었다고 전한다.[6] 그러다 히미코라는 여자가 나타나 마법과 주술로 백성을 미혹하여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6] ''양서''는 178년에서 183년 사이에 "큰 소란"이 있었다고 언급한다.[9]
''수서''는 "환제와 영제의 치세 동안, 그 나라에 큰 혼란이 빠졌고, 그 주민들은 점차 서로 전쟁을 벌였고, 그리하여 수년에 걸쳐 통치자가 없게 되었다. 그곳에는 히미코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영(靈)을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혼란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녀의 동포들이 함께 그녀를 그들의 군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7] ''북사''는 "영제의 치세 동안, 그 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고, 그 주민들은 점차 서로 전쟁을 벌였고, 그리하여 수년에 걸쳐 통치자가 없게 되었다."라고 전한다.[8]
이처럼 여러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146년에서 189년 사이에 왜국에서 왕위 다툼으로 인한 내란이 발생했고, 8년 이상 지속되었다. 결국 비미호라는 여성이 왕으로 옹립되어 혼란이 수습되었다.[25]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왜국대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6]
- 환제(147–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왜국은 큰 혼란과 전쟁, 그리고 모든 면에서 갈등이 만연한 상태였다.[6]
- 수년 동안 통치자가 없었다.[6]
- 히미코라는 여자가 나타나 결혼하지 않고 마법과 주술에 몰두하며 백성을 미혹했다.[6]
- 백성들은 히미코를 왕위에 앉혔다.[6]
중국의 정사인 『후한서』 「동이전」, 『삼국지』(위지왜인전), 『양서』 제이(諸夷) 「동이 제융(東夷諸戎)」 왜(倭) 등에는 왜국 대란(『후한서』 「동이전」) 또는 왜국 란(『삼국지』(위지왜인전), 『양서』 제이(諸夷) 「동이 제융」 왜)으로, 개요가 기술되어 있다.[4]
- 왜국은 원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다.[25]
- 57년에 후한의 수도 낙양에 사신을 보내 한위노왕인을 받은 왜노국왕[25]
- 107년에 후한에 사신을 보낸 왜면토국왕 솔승 등[25]
- 70~80년이 지나 왜국 내에서 대란이 발생했다.[5]
- 중국의 정사에서 대란은 천자/황제/왕조의 교체가 있었을 경우에만 사용된다.
- 쟁란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5]
- 후루타 다케히코(古田武彦) 씨에 따르면, "중국정사에서 역년(歷年)이란 평균 8년 ± 수 년"
- 한 여자를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온 나라가 복종했다. 이름을 비미호라고 한다.[5][6]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환제·영제의 치세 동안(146년 - 189년), 왜국 대란(왜국 왕의 자리를 다투는 내란. 외국 사서가 굳이 기록하는 것은 국왕의 자리에 교체가 있었을 경우뿐), 더욱이 서로 공격하며 싸워 8년 ± 수 년 동안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비미호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지만 시집가지 않았다. 귀신을 섬기는 도(道)를 사용하여 뭇 사람들을 요사스럽게 미혹시켰다. 이에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6]
『수서』 권81 열전 제46 동이전 왜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환(桓)과 영(靈)의 사이에 그 나라에 대란이 일어나 서로 공격하며 싸웠다」[7]
대란이라고 쓰는 것은, 동시대 사서인 후한서와 수서 두 책이다.[7][8]
양서, 수서, 북사 등 다른 중국 사서에도 왜국대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4] 이들 사서는 삼국지의 위지왜인전(297년경)과 후한서(445년경)의 기록을 상당 부분 차용했다.[4]
이후 70~80년이 지나 왜국 내에서 대란이 발생했다.[5] 중국의 정사에서 대란은 천자/황제/왕조의 교체가 있었을 경우에만 사용된다.[25] 쟁란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으며, 후루타 다케히코(古田武彦)에 따르면, "중국정사에서 역년(歷年)이란 평균 8년 ± 수 년"을 의미한다.[25]
환제(147–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왜국은 큰 혼란과 전쟁, 그리고 모든 면에서 갈등이 만연한 상태였다.[6] 수년 동안 통치자가 없다가, 히미코라는 여자가 나타나 마법과 주술로 백성을 미혹하여 왕위에 올랐다.[6]
『양서』는 178년에서 183년 사이에 "큰 소란"이 있었다고 언급한다.[9]
『후한서』 「동이전」, 『삼국지』(위지왜인전), 『양서』 제이(諸夷) 「동이 제융(東夷諸戎)」 왜(倭) 등에는 왜국 대란(『후한서』 「동이전」) 또는 왜국 란(『삼국지』(위지왜인전), 『양서』 제이(諸夷) 「동이 제융」 왜)으로 기록되어 있다.[25]
『수서』와 『북사』에도 "환(桓)과 영(靈)의 사이에 그 나라에 대란이 일어나 서로 공격하며 싸웠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7][8] 대란이라고 쓰는 것은, 동시대 사서인 후한서와 수서 두 책이다.
3. 1. 삼국지 위지왜인전
왜국대란은 일본 선사 시대의 전쟁이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국사서인 ''고지키''와 ''일본서기''는 신대(神代)부터 시작하지만, 그 내용은 대체로 신화적이며, ''일본서기''의 기록은 대략 6세기 후반 이후에야 역사적 신뢰성을 가진다.[3] 중국 왕조사는 6세기 이전 일본 역사의 중요한 문헌 자료이며, 이 2세기 전쟁에 대한 유일한 기록을 담고 있다.[4]삼국지의 일부인 위지왜인전(297년경)은 왜국대란에 대한 가장 초기의 언급을 담고 있다. 이후 이 분쟁을 언급하는 역사서로는 ''후한서''(445년경), ''양서''(635년), ''수서''(636년) 및 ''북사''(7세기 중반) 등이 있으며, 이전 문헌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다.[4]
이들 역사서에 따르면, 왜국은 원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다.[5] 57년에 후한의 수도 낙양에 사신을 보내 한위노왕인을 받은 왜노국왕과 107년에 후한에 사신을 보낸 왜면토국왕 솔승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70~80년이 지나 왜국 내에서 대란이 발생했다.[5] 중국의 정사에서 대란은 천자/황제/왕조의 교체가 있었을 경우에만 사용된다. 쟁란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으며, 후루타 다케히코(古田武彦)에 따르면, "중국정사에서 역년(歷年)이란 평균 8년 ± 수 년"을 의미한다.[5]
''위지왜인전''은 "이 나라는 예전에 한 남자를 통치자로 두었다. 그 후 약 70~80년 동안 소란과 전쟁이 있었다. 이에 백성들은 여자를 통치자로 합의했다. 그녀의 이름은 히미코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5] ''후한서''는 환제(147–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왜국에 큰 혼란과 전쟁이 만연했으며, 수년 동안 통치자가 없었다고 전한다.[6] 그러다 히미코라는 여자가 나타나 마법과 주술로 백성을 미혹하여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6] ''양서''는 178년에서 183년 사이에 "큰 소란"이 있었다고 언급한다.[9]
''수서''는 "환제와 영제의 치세 동안, 그 나라에 큰 혼란이 빠졌고, 그 주민들은 점차 서로 전쟁을 벌였고, 그리하여 수년에 걸쳐 통치자가 없게 되었다. 그곳에는 히미코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영(靈)을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혼란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녀의 동포들이 함께 그녀를 그들의 군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7] ''북사''는 "영제의 치세 동안, 그 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고, 그 주민들은 점차 서로 전쟁을 벌였고, 그리하여 수년에 걸쳐 통치자가 없게 되었다."라고 전한다.[8]
이처럼 여러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146년에서 189년 사이에 왜국에서 왕위 다툼으로 인한 내란이 발생했고, 8년 이상 지속되었다. 결국 비미호라는 여성이 왕으로 옹립되어 혼란이 수습되었다.[25]
3. 2. 후한서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왜국대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6]- 환제(147–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왜국은 큰 혼란과 전쟁, 그리고 모든 면에서 갈등이 만연한 상태였다.[6]
- 수년 동안 통치자가 없었다.[6]
- 히미코라는 여자가 나타나 결혼하지 않고 마법과 주술에 몰두하며 백성을 미혹했다.[6]
- 백성들은 히미코를 왕위에 앉혔다.[6]
중국의 정사인 『후한서』 「동이전」, 『삼국지』(위지왜인전), 『양서』 제이(諸夷) 「동이 제융(東夷諸戎)」 왜(倭) 등에는 왜국 대란(『후한서』 「동이전」) 또는 왜국 란(『삼국지』(위지왜인전), 『양서』 제이(諸夷) 「동이 제융」 왜)으로, 개요가 기술되어 있다.[4]
- 왜국은 원래 남자를 왕으로 삼았다.[25]
- * 57년에 후한의 수도 낙양에 사신을 보내 한위노왕인을 받은 왜노국왕[25]
- * 107년에 후한에 사신을 보낸 왜면토국왕 솔승 등[25]
- 70~80년이 지나 왜국 내에서 대란이 발생했다.[5]
- * 중국의 정사에서 대란은 천자/황제/왕조의 교체가 있었을 경우에만 사용된다.
- 쟁란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5]
- * 후루타 다케히코(古田武彦) 씨에 따르면, "중국정사에서 역년(歷年)이란 평균 8년 ± 수 년"
- 한 여자를 왕으로 옹립함으로써 온 나라가 복종했다. 이름을 비미호라고 한다.[5][6]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환제·영제의 치세 동안(146년 - 189년), 왜국 대란(왜국 왕의 자리를 다투는 내란. 외국 사서가 굳이 기록하는 것은 국왕의 자리에 교체가 있었을 경우뿐), 더욱이 서로 공격하며 싸워 8년 ± 수 년 동안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비미호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지만 시집가지 않았다. 귀신을 섬기는 도(道)를 사용하여 뭇 사람들을 요사스럽게 미혹시켰다. 이에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6]
『수서』 권81 열전 제46 동이전 왜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환(桓)과 영(靈)의 사이에 그 나라에 대란이 일어나 서로 공격하며 싸웠다」[7]
대란이라고 쓰는 것은, 동시대 사서인 후한서와 수서 두 책이다.[7][8]
3. 3. 기타 중국 사서
양서, 수서, 북사 등 다른 중국 사서에도 왜국대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4] 이들 사서는 삼국지의 위지왜인전(297년경)과 후한서(445년경)의 기록을 상당 부분 차용했다.[4]이후 70~80년이 지나 왜국 내에서 대란이 발생했다.[5] 중국의 정사에서 대란은 천자/황제/왕조의 교체가 있었을 경우에만 사용된다.[25] 쟁란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으며, 후루타 다케히코(古田武彦)에 따르면, "중국정사에서 역년(歷年)이란 평균 8년 ± 수 년"을 의미한다.[25]
환제(147–168)와 영제(168–189)의 통치 기간 동안 왜국은 큰 혼란과 전쟁, 그리고 모든 면에서 갈등이 만연한 상태였다.[6] 수년 동안 통치자가 없다가, 히미코라는 여자가 나타나 마법과 주술로 백성을 미혹하여 왕위에 올랐다.[6]
『양서』는 178년에서 183년 사이에 "큰 소란"이 있었다고 언급한다.[9]
『후한서』 「동이전」, 『삼국지』(위지왜인전), 『양서』 제이(諸夷) 「동이 제융(東夷諸戎)」 왜(倭) 등에는 왜국 대란(『후한서』 「동이전」) 또는 왜국 란(『삼국지』(위지왜인전), 『양서』 제이(諸夷) 「동이 제융」 왜)으로 기록되어 있다.[25]
『수서』와 『북사』에도 "환(桓)과 영(靈)의 사이에 그 나라에 대란이 일어나 서로 공격하며 싸웠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7][8] 대란이라고 쓰는 것은, 동시대 사서인 후한서와 수서 두 책이다.
4. 일본 측 기록 및 고고학적 증거
내전의 직접적인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특히 세토 내해에서 긴키 지방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된 석기나 금속 무기, 방어 시설을 갖춘 촌락의 고고학적 발견은 야요이 시대에 전투가 있었음을 뒷받침한다.[10]
4. 1. 고고학적 발견
세토 내해에서 긴키 지방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된 석기나 금속 무기, 방어 시설을 갖춘 촌락의 고고학적 발견은 야요이 시대에 전투가 있었음을 뒷받침한다.[10]4. 2. 고지성 취락
세토 내해에서 긴키 지방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된 석기나 금속 무기, 방어 시설을 갖춘 촌락의 고고학적 발견은 야요이 시대에 전투가 있었음을 뒷받침한다.[10]5. 논쟁
위의 두 서적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그 해석을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남자왕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영초(永初) 원년(107년)에 왜왕(倭王) 사승(帥升)이 후한(後漢)에 사자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승 이전에는 왜왕의 존재가 사서에 보이지 않으므로, 중국 왕조가 공인한 최초의 왜왕은 사승이었다고 보며,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의 기술은 사승으로 시작된 왜왕의 계통이 70~80년 존속했음을 나타낸다는 논의가 있다. 이에 따르면, 107년경부터 사승의 왕통이 시작되어 70~80년 후인 180년~190년경에 왕통이 단절된 셈이 된다. 다만, 위지왜인전에 보이는 남자왕을 사승과 동일시하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또한 환제(桓帝)·령제(靈帝)(146년~189년)의 왜의 대란에서 역산하면 66년경에는 왜왕이 있었다는 것이 되어, 사승이 최초의 왜왕이었다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
;원인
환제·령제(146년~189년)의 왜국 대란은 기기(記紀)에 대입하면 성무 천황에서 주아이 천황의 통치 시기에 해당한다.
규슈(九州)에서는 구마소(熊襲)가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게이코 천황과 그 아들 야마토타케루의 정벌이 일본에서는 유명하다. 이것이 전전(戦前)에는 일본에서의 왜국 대란이라고 생각되었다.
전후(戦後)에는 대란의 원인으로 먼저 상정되는 것은, 왜왕위의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며, 야요이 시대(弥生時代)의 왜국은, 많은 정치 세력(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왜왕은 정치 세력 간의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 놓여 있었다고 추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해 조정을 담당할 수 있는 인물의 부재 또는 조정 불가능할 정도의 이해 대립의 발생 등으로 인해, 왜왕위를 둘러싼 대란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후한서』의 "몇 년 동안 주인이 없었다"라는 기술은, 위의 논의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야마타이국(邪馬台国) 이전에 "왜왕" 아래에서의 정치적 통합이 있었다는 설에는 이견도 많다. 『후한서』 동이전에 나오는 사승에 대해서도, 왜국의 통일적인 왕이 아니라, 한 지방 정권의 왕에 지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대란의 원인으로는, 왜국의 왕위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라기보다는, 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지구 규모의 한랭화의 영향을 받은 토지 수탈 싸움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십년(193년) 육월 왜인대기(六月倭人大饑). 내구식자천여인(来求食者千余人)"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본에서 한반도로 1천여 명이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어느 쪽이든, 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 걸쳐, 긴키(近畿)에서 세토 내해 일대에 걸쳐 광역으로 출현한 고지성 취락이 "왜국 대란"과 어떻게 관련되는가가, 대란의 성격을 아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또한, 야요이계 도래 집단이 규슈에서 기나이(畿内)로의 확대 과정에서 각지에 선주하고 있던 조몬계 재래 집단과의 마찰, 즉 왜국 대란이 일어나, 도래계 집단은 재래 집단이 있는 각지에서 방어를 위해 환호취락이나 고지성 취락을 만들었다는 설(히미코의 나라: 토미카와 미츠오 등)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야요이계 도래 집단이 긴키 지방에까지 도달했을 때 양 집단이 협정하여 왜국 연합 정권을 만들고, 히미코 야마타이국 여왕을 그 연합 정권의 왕으로 추대하여 왜국 대란은 진정되었다고 한다.
;시기
위지왜인전은, 남자왕의 계통이 70~80년 경과한 후에 쟁란이 일어났다고 하고 있지만, 『후한서』는, 환제·령제의 사이(146년~189년)에 대란이 일어났다고 하고 있다. 양자의 시기가 일치하는가 여부는, 위지왜인전에서 남자왕의 시작 시기가 언제쯤으로 상정되어 있는가에 따른다. 위의 "남자왕"에서 보이는 것처럼, 남자왕의 계통이 사승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대란 발생 시기가 180~190년경이 되어, 『후한서』의 시기와 중복된다. 또한, 후세의 『양서』에는, "영제(靈帝) 광화(光和) 연중"(178년~184년)이라고 보다 한정적인 기술도 있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히미코가 즉위한 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규모
왜국 대란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갈리고 있다. 규슈의 요시노가리 유적을 비롯한 복수의 야요이 유적에서는 화살촉이 박힌 채의 인골이나 목에서 위가 없는 인골이 들어 있는 옹관이 발굴되었고, 산인의 아오타니카미지 유적에서 칼자국이 있는 인골 등이 발굴되었다. 그러한 상처가 나라 간의 전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인간을 살상하는 행위 그 자체는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로부터 왜국 대란은 북규슈 만 또는 이즈모(出雲)와 기나이 만, 또는 북규슈에서 기나이 산인에 걸쳐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세토 내해 지역에서 2세기 후반경의 고지성 취락 유적 (산정 등에서 운영된 요새적인 취락의 유적)이 수 개 있는 것을 근거로, 북규슈에서 기나이 산인뿐만 아니라 세토 내해 연안도 그러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의미
왜국 대란의 역사적 의의로서, 히미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체제가 재편성된 것을 들 수 있다. 긴키 지방·주고쿠 지방 등에서 2세기까지 성행했던 동탁이 3세기가 되면서 급속히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으며, 왜국 대란과 3세기 전반의 히미코에 의한 신 정치 체제는 문화면에서도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5. 1. 위치
왜국대란은 히미코가 통치하게 된 수장국인 야마타이국 주변에서 일어난 것으로 여겨진다.[13] 그러나 일본 내 야마타이국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고대 일본 역사에서 주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규슈 북부 또는 기나이 지역을 선호하는데,[13] 기나이 지역은 후일 야마토국과 가깝고, 규슈 지역은 야마토와 가까운데, 이름도 공유할 수 있다.[14][15]5. 2. 시기
역사 자료들은 왜국대란이 2세기 후반에 발생하여 180년대에 종료되었다는 점에 일치한다.[16] 그러나 분쟁 기간은 자료에 따라 5년에서 80년 사이로 다양하게 나타난다.[17]『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영초(永初) 원년(107년)에 왜왕(倭王) 사승(帥升)이 후한(後漢)에 사자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사승 이전에는 왜왕의 존재가 사서에 보이지 않으므로, 중국 왕조가 공인한 최초의 왜왕은 사승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의 기술은 사승으로 시작된 왜왕의 계통이 70~80년 존속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107년경부터 사승의 왕통이 시작되어 70~80년 후인 180년~190년경에 왕통이 단절된 셈이 된다. 다만, 위지왜인전에 보이는 남자왕을 사승과 동일시하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또한 환제(桓帝)·령제(靈帝)(146년~189년)의 왜의 대란에서 역산하면 66년경에는 왜왕이 있었다는 것이 되어, 사승이 최초의 왜왕이었다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
위지왜인전은 남자왕의 계통이 70~80년 경과한 후에 쟁란이 일어났다고 하고 있지만, 『후한서』는 환제·령제의 사이(146년~189년)에 대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양자의 시기가 일치하는지 여부는 위지왜인전에서 남자왕의 시작 시기가 언제쯤으로 상정되어 있는가에 따른다. 남자왕의 계통이 사승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대란 발생 시기가 180~190년경이 되어, 『후한서』의 시기와 중복된다. 『양서』에는 "영제(靈帝) 광화(光和) 연중"(178년~184년)이라고 더 한정적인 기술도 있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히미코가 즉위한 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5. 3. 원인
왜국대란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2세기 중반 무렵 왜 왕국들 간의 권력 투쟁이나 정치적 긴장 상태가 원인으로 언급되기도 한다.[18][19]『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107년에 왜왕(倭王) 사승(帥升)이 후한(後漢)에 사자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사승을 중국 왕조가 공인한 최초의 왜왕으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180년~190년경에 사승의 왕통이 단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승을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에 등장하는 남자왕과 동일시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으며, 146년~189년의 환제(桓帝)·영제(靈帝) 시기의 왜의 대란을 역산하면 66년경에도 왜왕이 존재했다는 계산이 나오므로, 사승이 최초의 왜왕이라는 점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왜국대란은 성무천황(成務天皇)에서 추애천황(仲哀天皇)의 통치 시기에 해당하며, 게이코 천황과 야마토타케루의 구마소 정벌이 그 배경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전후(戦後)에는 왜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주요 원인으로 상정된다. 야요이 시대(弥生時代)의 왜국은 여러 정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고, 왜왕은 이들 간의 이해 조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정 기능이 마비되거나 이해 대립이 심화되면서 왜왕위를 둘러싼 대란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서』는 "몇 년 동안 주인이 없었다"라고 기록하여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야마타이국(邪馬台国) 이전에 "왜왕" 아래의 정치적 통합이 있었다는 설에는 이견이 많다. 사승에 대해서도 왜국 전체를 통일한 왕이 아니라 한 지방 정권의 왕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있다.
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지구 규모의 한랭화로 인한 토지 쟁탈전이 대란의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193년 6월에 왜인들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신라로 건너와 식량을 구걸한 사람이 1천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야요이계 도래 집단과 조몬계 재래 집단 간의 갈등, 즉 도래계 집단이 각지에서 환호취락이나 고지성 취락을 건설하게 된 배경이 왜국대란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야요이계 도래 집단과 조몬계 재래 집단이 협정을 맺어 왜국 연합 정권을 수립하고, 히미코 야마타이국 여왕을 연합 정권의 왕으로 추대하여 왜국대란이 진정되었다고 한다.
위지왜인전은 남자왕의 계통이 70~80년 경과한 후에 쟁란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후한서』는 146년~189년 사이에 대란이 발생했다고 기록하여 시기상 차이를 보인다. 『양서』에는 178년~184년으로 더욱 한정적인 기록이 있는데, 이는 히미코의 즉위 연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왜국대란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요시노가리 유적을 비롯한 복수의 야요이 유적에서 화살촉이 박힌 인골이나 목 위가 없는 인골이 들어 있는 옹관이 발굴되었고, 아오타니카미지 유적에서는 칼자국이 있는 인골 등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북규슈, 이즈모(出雲), 기나이, 세토 내해 연안 등 넓은 지역에서 전투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왜국대란의 결과, 히미코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 체제가 재편되었다. 긴키 지방·주고쿠 지방 등에서 3세기에 동탁이 급격히 만들어지지 않게 된 것은 왜국대란과 히미코의 신 정치 체제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5. 4. 규모
왜국대란의 규모와 영향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갈리고 있다. 규슈의 요시노가리 유적을 비롯한 복수의 야요이 유적에서는 화살촉이 박힌 채의 인골이나 목에서 위가 없는 인골이 들어 있는 옹관이 발굴되었고, 산인의 아오타니카미지 유적에서 칼자국이 있는 인골 등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상처가 나라 간의 전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인간을 살상하는 행위 그 자체는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러한 예로부터 왜국 대란은 북규슈 만 또는 이즈모(出雲)와 기나이 만, 또는 북규슈에서 기나이 산인에 걸쳐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세토 내해 지역에서 2세기 후반경의 고지성 취락 유적 (산정 등에서 운영된 요새적인 취락의 유적)이 수 개 있는 것을 근거로, 북규슈에서 기나이 산인뿐만 아니라 세토 내해 연안도 그러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왜국 대란의 역사적 의의로서, 히미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체제가 재편성된 것을 들 수 있다. 긴키 지방·주고쿠 지방 등에서 2세기까지 성행했던 동탁이 3세기가 되면서 급속히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으며, 왜국 대란과 3세기 전반의 히미코에 의한 신 정치 체제는 문화면에서도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5. 5. 결과
중국에 알려진 족장들의 수는 왜국대란 전 100개 이상에서 히미코 시대에는 약 30개로 줄었다.[20][21][18][22][23] 이 반란은 또한 히미코 통치하의 초기 정치체의 형성을 이끌었고, 이로 인해 야요이 시대와 고분 시대 사이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24][9]위의 두 서적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그 해석을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남자왕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영초(永初) 원년(107년), 왜왕(倭王) 사승(帥升)이 후한(後漢)에 사자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승 이전에는 왜왕의 존재가 사서에 보이지 않으므로, 중국 왕조가 공인한 최초의 왜왕은 사승이었다고 보며,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의 기술은 사승으로 시작된 왜왕의 계통이 70~80년 존속했음을 나타낸다는 논의가 있다. 이에 따르면, 107년경부터 사승의 왕통이 시작되어 70~80년 후인 180년~190년경에 왕통이 단절된 셈이 된다. 다만, 위지왜인전에 보이는 남자왕을 사승과 동일시하는 것에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또한 환제(桓帝)·령제(靈帝)(146년~189년)의 왜의 대란에서 역산하면 66년경에는 왜왕이 있었다는 것이 되어, 사승이 최초의 왜왕이었다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
;원인
:환제·령제(146년~189년)의 왜국 대란은 기기(記紀)에 대입하면 성무천황(成務天皇)에서 추애천황(仲哀天皇)의 통치 시기에 해당한다.
: 규슈(九州)에서는 곰소(熊襲)가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게이코 천황(景行天皇)과 그 아들 야마토타케루(ヤマトタケル)의 정벌이 일본에서는 유명하다. 이것이 전전(戦前)에는 일본에서의 왜국 대란이라고 생각되었다.
: 전후(戦後)에는 대란의 원인으로 먼저 상정되는 것은, 왜왕위의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며, 야요이 시대(弥生時代)의 왜국은, 많은 정치 세력(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왜왕은 정치 세력 간의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 놓여 있었다고 추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해 조정을 담당할 수 있는 인물의 부재 또는 조정 불가능할 정도의 이해 대립의 발생 등으로 인해, 왜왕위를 둘러싼 대란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후한서』의 "몇 년 동안 주인이 없었다"라는 기술은, 위의 논의를 뒷받침하고 있다.
: 그러나 야마타이국(邪馬台国) 이전에 "왜왕" 아래에서의 정치적 통합이 있었다는 설에는 이견도 많다. 『후한서』 동이전에 나오는 사승에 대해서도, 왜국의 통일적인 왕이 아니라, 한 지방 정권의 왕에 지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대란의 원인으로는, 왜국의 왕위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라기보다는, 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지구 규모의 한랭화의 영향을 받은 토지 수탈 싸움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십년(193년) 육월 왜인대기(六月倭人大饑). 내구식자천여인(来求食者千余人)"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본에서 한반도로 1천여 명이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어느 쪽이든, 2세기 후반부터 3세기에 걸쳐, 긴키(近畿)에서 세토 내해(瀬戸内海) 일대에 걸쳐 광역으로 출현한 고지성 취락이 "왜국 대란"과 어떻게 관련되는가가, 대란의 성격을 아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 또한, 야요이계 도래 집단이 규슈에서 기나이로의 확대 과정에서 각지에 선주하고 있던 조몬계 재래 집단과의 마찰, 즉 왜국 대란이 일어나, 도래계 집단은 재래 집단이 있는 각지에서 방어를 위해 환호취락이나 고지성 취락을 만들었다는 설(히미코의 나라: 토미카와 미츠오 등)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야요이계 도래 집단이 긴키 지방에까지 도달했을 때 양 집단이 협정하여 왜국 연합 정권을 만들고, 히미코 야마타이국 여왕을 그 연합 정권의 왕으로 추대하여 왜국 대란은 진정되었다고 한다.
;시기
: 위지왜인전은, 남자왕의 계통이 70~80년 경과한 후에 쟁란이 일어났다고 하고 있지만, 『후한서』는, 환제·령제의 사이(146년~189년)에 대란이 일어났다고 하고 있다. 양자의 시기가 일치하는가 여부는, 위지왜인전에서 남자왕의 시작 시기가 언제쯤으로 상정되어 있는가에 따른다. 위의 "남자왕"에서 보이는 것처럼, 남자왕의 계통이 사승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대란 발생 시기가 180~190년경이 되어, 『후한서』의 시기와 중복된다. 또한, 후세의 『양서』에는, "영제(靈帝) 광화(光和) 연중"(178년~184년)이라고 보다 한정적인 기술도 있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히미코가 즉위한 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다.
;규모
: 왜국 대란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갈리고 있다. 규슈의 요시노가리 유적을 비롯한 복수의 야요이 유적에서는 화살촉이 박힌 채의 인골이나 목에서 위가 없는 인골이 들어 있는 옹관이 발굴되었고, 산인의 아오타니카미지 유적에서 칼자국이 있는 인골 등이 발굴되었다. 그러한 상처가 나라 간의 전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인간을 살상하는 행위 그 자체는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로부터 왜국 대란은 북규슈 만 또는 이즈모(出雲)와 기나이 만, 또는 북규슈에서 기나이 산인에 걸쳐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세토 내해 지역에서 2세기 후반경의 고지성 취락 유적 (산정 등에서 운영된 요새적인 취락의 유적)이 수 개 있는 것을 근거로, 북규슈에서 기나이 산인뿐만 아니라 세토 내해 연안도 그러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의미
: 왜국 대란의 역사적 의의로서, 히미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체제가 재편성된 것을 들 수 있다. 긴키 지방·주고쿠 지방 등에서 2세기까지 성행했던 동탁이 3세기가 되면서 급속히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으며, 왜국 대란과 3세기 전반의 히미코에 의한 신 정치 체제는 문화면에서도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5. 5. 1. 히미코의 등장
중국에 알려진 족장들의 수는 전쟁 전 100개 이상에서 히미코 시대에는 약 30개로 줄었다.[20][21][18][22][23] 이 반란은 또한 히미코 통치하의 초기 정치체의 형성을 이끌었고, 이로 인해 야요이 시대와 고분 시대 사이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24][9]5. 5. 2. 정치 체제 변화
중국에 알려진 족장들의 수는 왜국대란 전 100개 이상에서 히미코 시대에는 약 30개로 줄었다.[20][21][18][22][23] 이 반란은 또한 히미코 통치하의 초기 정치체의 형성을 이끌었고, 이로 인해 야요이 시대와 고분 시대 사이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24][9]5. 5. 3. 사회 문화적 영향
중국에 알려진 족장들의 수는 왜국대란 이전 100개 이상에서 히미코 시대에는 약 30개로 감소했다.[20][21][18][22][23] 이 반란은 히미코 통치하의 초기 정치체의 형성을 이끌었으며, 이는 야요이 시대와 고분 시대 사이의 전환점으로 여겨진다.[24][9]6. 현대적 해석과 의의
6. 1. 한일 관계에 대한 시사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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