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왜인"은 일본 열도에 거주하는 특정 민족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기원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명칭의 유래는 얼굴 문신, 순종적인 마음, 키가 작은 인종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며, 중국 문헌과 한국 문헌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유전학적으로는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혼합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현대에는 멸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왜국 - 왜5왕
왜5왕은 5세기 남조 시대에 남조 왕조들과 교류하며 정치적 영향력 확대 및 왜의 위상 강화를 꾀했던 찬, 진, 제, 흥, 무, 다섯 왜왕을 지칭하며, 이들의 활동은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고 관련 학설과 논쟁이 존재한다. - 왜국 - 왜국대란
왜국대란은 170년경 일본 열도에서 발생한 대규모 내전으로, 야요이 시대 사회 구조 변화, 정치적 긴장, 자연재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야마토 지역의 히미코가 야마타이국을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야요이 시대에서 고분 시대로의 전환을 촉진하고 고대 한국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 일본의 고대 민족 - 에조
에조는 일본 열도 북부 지역에 거주했던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모인'에서 '에미시'를 거쳐 '에조'로 표기가 바뀌었으며, 그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아이누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일본의 고대 민족 - 구마소
구마소는 고대 일본의 문헌에 등장하는 부족 이름으로, 현재의 미야자키현과 가고시마현 지역에 거주하며 야마토 정권에 저항한 세력으로 추정되며, 야마토타케루에 의해 정벌되었다는 전설과 함께 구마모토현 등의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 고대 일본 부족 - 미시하세
미시하세 또는 아시하세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숙신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숙신의 위치와 정체성은 논쟁 중이며, 다양한 지역과 민족과의 관련성이 추정되지만 일본 중심적인 기록이므로 객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 고대 일본 부족 - 에조
에조는 일본 열도 북부 지역에 거주했던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모인'에서 '에미시'를 거쳐 '에조'로 표기가 바뀌었으며, 그 어원은 불분명하지만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아이누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왜인 | |
---|---|
개요 | |
![]() | |
주요 시대 | 야요이 시대 고분 시대 |
주요 거주 지역 | 일본 열도 |
관련 민족 | 일본인 아이누 류큐인 |
역사적 기록 | |
최초 기록 | 기원전 1세기경 |
주요 기록 | 한서 위지 왜인전 후한서 송서 수서 일본서기 |
특징 | |
신체적 특징 | 단두형 왜소한 체구 |
문화적 특징 | 벼농사 청동기 및 철기 사용 고분 축조 |
사회 | |
정치 체제 | 야마타이국 등의 소국 연맹체 |
계급 사회 | 존재 |
주요 인물 | 히미코 |
언어 | |
사용 언어 | 고대 일본어족 언어 |
논쟁 | |
민족 기원 | 다양한 가설 존재 (도래인과의 관계 등) |
야마타이국 위치 | 규슈 vs 기나이 |
현대적 관점 | |
유전적 연구 | 일본인의 기원 연구에 활용 |
역사 교육 | 고대 일본사의 중요한 부분 |
같이 보기 |
2. 명칭의 기원
"왜인(倭人)"이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요 학설은 다음과 같다.
- 순종설: 설문해자에 따르면 왜(倭)는 순종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이치조 가네라는 "왜인의 마음이 순종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10]
- 왜소설: 기노시타 준안은 왜(倭)가 "키가 작은 인종"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 자칭설: 헤이안 시대 초기 『홍인사기』에는 일본인들이 스스로를 "와(わ)"(우리)라고 칭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 집단 명칭설: 이자와 모토히코는 당시 국가 개념이 없었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소속 집단을 '륜(輪)'이라고 답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11]
"왜(委)노국"을 "왜(倭)의 노(奴)의 나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이견도 있다. "노(奴)"라는 글자에 여성에 대한 멸칭의 의미가 있었고, 여왕국인 왜를 "왜노국"이라고 칭한 것은 중화사상에 의한 멸칭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견수사와 견당사 교류를 통해 이러한 멸칭은 점차 사라졌다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설이 있지만, 어느 것이 정확한 기원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2. 1. 순종설
일본 열도에 사는 사람들이 "왜인(倭人)"으로 불리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위나라의 관인 여순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위하는)" 습속을 가지고 있는 것이 왜(倭)의 유래라고 주장했지만, 안사고 등으로부터 왜(倭)와 위(委)의 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정되었다.[5] 헤이안 시대 초기의 『홍인사기』 서문에는 어떤 사람의 설로서, 자칭을 "와(わ)"(와레, 우리)라고 한 데서, 중국 측이 왜(倭)의 나라라고 적었다는 설을 기록하고 있다.또한, 『설문해자』에 왜(倭)의 어의가 순종이라는 의미로 되어 있어, 이치조 가네라가 "왜인의 마음이 순종적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으며(『일본서기찬소』), 후세의 유학자들은 이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10]
2. 2. 왜소설
일본 열도에 사는 사람들이 "왜인(倭人)"으로 불리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위나라의 관인 여순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위하는)" 습속을 가지고 있는 것이 왜(倭)의 유래라고 주장했지만, 신찬과 안사고 등으로부터 왜(倭)와 위(委)의 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정되었다.[5] 헤이안 시대 초기의 『홍인사기』 서문에는 어떤 사람의 설로서, 자칭을 "와(わ)"(와레, 우리)라고 한 데서, 중국 측이 왜(倭)의 나라라고 적었다는 설을 기록하고 있다.또한, 『설문해자』에 왜(倭)의 어의가 순종이라는 의미로 되어 있어, 이치조 가네라가 "왜인의 마음이 순종적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으며(『일본서기찬소』), 후세의 유학자들은 이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왜(倭)"는 "키가 작은 인종"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기노시타 준안도, 키가 작은 사람들(왜인)이기에 왜(倭)라고 불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고사통혹문』에서 "오호쿠니"의 음역이 왜국이라고 했다. 또한 작가 이자와 모토히코는 "대륙의 인간이 그들의 국가명을 들었을 때, 당시 아직 국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들의 귀속 단체명을 답했는데, 그것이 '륜(輪)'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11] 이처럼 많은 설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왜(委)노국"을 "왜(倭)의 노(奴)의 나라"로 해석하는 것에 이견도 있다. 원문의 "위지왜인전"을 해석한 한자 본가의 학자들 중에는, 옛날에는 "노(奴)"라는 글자에 여성에 대한 멸칭의 의미가 있었고, 여왕국인 왜를 "왜노국"이라고 칭한 것은 중화 사상에 의한 책봉 국가, 즉, 아래에 있는 나라였던 왜국에 대한 멸칭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설이 있다. 다만 견수사, 견당사가 행해지면서, 후세의 중화 사상 국가에서도, 그러한 멸칭은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2. 3. 자칭설
일본 열도에 사는 사람들이 "왜인(倭人)"으로 불리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위나라의 관인 여순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위하는)" 습속이 왜(倭)의 유래라고 주장했지만, 신찬과 안사고 등은 왜(倭)와 위(委)의 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정했다.[5] 헤이안 시대 초기 『홍인사기』 서문에는 어떤 사람의 설로서, 자칭을 "와(わ)"(와레, 우리)라고 한 데서 중국 측이 왜(倭)의 나라라고 적었다는 설이 기록되어 있다.또한, 『설문해자』에 왜(倭)의 어의가 순종이라는 의미로 되어 있어, 이치조 가네라는 "왜인의 마음이 순종적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으며(『일본서기찬소』), 후세의 유학자들은 이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왜(倭)"가 "키가 작은 인종"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기노시타 준안은 키가 작은 사람들(왜인)이기에 왜(倭)라고 불렸다고 언급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고사통혹문』에서 "오호쿠니"의 음역이 왜국이라고 했다. 작가 이자와 모토히코는 "대륙의 인간이 그들의 국가명을 들었을 때, 당시 아직 국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들의 귀속 단체명을 답했는데, 그것이 '륜(輪)'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11] 이처럼 많은 설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왜(委)노국"을 "왜(倭)의 노(奴)의 나라"로 해석하는 것에 이견도 있다. 원문의 "위지왜인전"을 해석한 한자 본가의 학자들 중에는, 옛날에는 "노(奴)"라는 글자에 여성에 대한 멸칭의 의미가 있었고, 여왕국인 왜를 "왜노국"이라고 칭한 것은 중화사상에 의한 책봉 국가, 즉, 아래에 있는 나라였던 왜국에 대한 멸칭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설이 있다. 다만 견수사, 견당사가 행해지면서, 후세의 중화 사상 국가에서도 그러한 멸칭은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2. 4. 집단 명칭설
일본 열도에 사는 사람들이 "왜인(倭人)"으로 불리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위나라의 관인 여순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위하는)" 습속을 가지고 있는 것이 왜(倭)의 유래라고 주장했지만, 안사고 등으로부터 왜(倭)와 위(委)의 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정되었다.[10] 헤이안 시대 초기의 『홍인사기』 서문에는 어떤 사람의 설로서, 자칭을 "와(わ)"(와레, 우리)라고 한 데서, 중국 측이 왜(倭)의 나라라고 적었다는 설을 기록하고 있다.또한, 『설문해자』에 왜(倭)의 어의가 순종이라는 의미로 되어 있어, 이치조 가네라가 "왜인의 마음이 순종적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으며(『일본서기찬소』), 후세의 유학자들은 이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왜(倭)"는 "키가 작은 인종"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기노시타 준안도, 키가 작은 사람들(왜인)이기에 왜(倭)라고 불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고사통혹문』에서 "오호쿠니"의 음역이 왜국이라고 했다. 또한 작가 이자와 모토히코는 "대륙의 인간이 그들의 국가명을 들었을 때, 당시 아직 국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은, 자신들의 귀속 단체명을 답했는데, 그것이 '륜(輪)'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11] 이처럼 많은 설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왜(委)노국"을 "왜(倭)의 노(奴)의 나라"로 해석하는 것에 이견도 있다. 원문의 "위지왜인전"을 해석한 한자 본가의 학자들 중에는, 옛날에는 "노(奴)"라는 글자에 여성에 대한 멸칭의 의미가 있었고, 여왕국인 왜를 "왜노국"이라고 칭한 것은 중화 사상에 의한 책봉 국가, 즉, 아래에 있는 나라였던 왜국에 대한 멸칭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설이 있다. 다만 견수사, 견당사가 행해지면서, 후세의 중화 사상 국가에서도, 그러한 멸칭은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3. 역사
삼국사기와 후한서, 삼국지, 송서, 수서, 구당서, 신당서 등 중국 역대 왕조의 사서에 왜인에 관한 기록이 있다.[5] 15세기까지는 일본 열도의 고대인만을 지칭했으나, 일본 통일 후 현대까지 '''왜놈''', '''왜년''' 등 일본에 대한 멸칭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왜인"이라는 개념은 일본 열도의 왜인(Wajin)뿐 아니라 넓은 지역을 포괄한다. 겐자부로[6]는 왜족(Wa-zoku)이 벼농사를 가지고 일본 열도로 건너온 왜인(Wajin)이며, 그 조상은 야요이인과 같다고 보았다.[7] 토리고에는 왜족(Wa-zoku)의 원래 장소가 윈난성이라고 주장했고,[6] 스와 하루오는 왜족을 백월(百越)의 일부로 간주했다.
왜인(Wajin)과 야요이인은 오나라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450년경 전국 시대 규슈 지역에 대규모 논밭 유적이 만들어졌으며, "왜인은 스스로 주(Zhou)의 후손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쯔강 유역의 오나라 사람들이 수경 재배 벼농사 문화를 따랐고, 이는 양쯔강 문명의 상징이기도 한데, 기원전 5세기경 오나라 멸망과 함께 일본 열도로 표류해 왔다는 유력한 설이 있다.
3. 1. 한국 문헌에서의 왜인
삼국사기에 왜인에 관한 기록이 있다. 과거 15세기까지는 단순히 일본 열도의 고대인만을 한정지어 정의했으나, 일본이 통일된 후 현대까지 '''왜놈'''(倭-), '''왜년'''(倭-)등 일본에 대한 멸칭 수준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3. 2. 중국 문헌에서의 왜인
중국에서는 후한서, 삼국지, 송서, 수서, 구당서, 신당서 등 역대 왕조의 사서에 왜인에 관한 기록이 있다.[5]일본 열도에 거주하는 특정 민족이 "왜인"(倭人)이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위의 관리였던 여순(如淳)은 왜(倭)의 기원이 "인면 문신"(人面に入れ墨する(委する))의 관습에 기인한다고 주장했지만, 안사고는 와(倭)와 위(委)의 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부정했다.
초기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에 "일본서기사의"(日本書紀私記|니혼쇼키시키일본어)가 소개되면서, 자칭 "와"(わ)를 특정 인물의 설로 사용하여 중국 측에서 "왜국"(倭の国)이라고 기록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왜국"이라는 단어가 설문해자에서 순종적(従順)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치조 가네요시는 "왜인의 마음이 순종적이기 때문에"(日本書紀纂疏|니혼쇼키산소일본어)라고 읊었고, 많은 후대 유학자들이 이를 따랐다.
"왜"(倭)가 "키가 작은 종족"(背丈の小さい人種)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일본 철학자 기노시타 준안은 왜(倭)라고 불린 이유가 그들이 작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고시츠(古史通或問)에서 "오호쿠니"(オホクニ)의 음역이 "왜국"(倭国)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작가 이자와 모토히코는 "대륙의 사람들이 그들의 국명을 들었을 때, 당시에는 국가의 개념이 존재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조직의 이름을 답했는데, 그것이 '輪'(와 = 고리, 환호 집락의 고리 해자)였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와노나노쿠니"(倭(委)奴国)를 "와의 노의 나라"(倭の奴の国)로 해석하는 데에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원래 위지왜인전(魏志倭人伝|기시와진덴일본어)을 해석한 한자 가문의 학자들 중에는 "노(奴)"라는 단어가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왜(倭)의 여성 왕국(奴国)이 "와노나코쿠"(倭奴国)라고 불렸는데, 이는 중화사상적 위계질서에서 열등한 국가에 대한 비하적인 용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하적인 용어는 일본 정부가 파견한 사절단(견수사 및 견당사)과의 교류로 인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국가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왜인(倭人)"이라는 민족 개념은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며 일본 열도의 왜인(Wajin)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겐자부로의 이론에 따르면,[6] 왜족(Wa-zoku)은 벼농사를 가지고 일본 열도로 건너온 왜인(Wajin)으로, 그 조상은 야요이인과 같다.[7] 토리고에는 왜족(Wa-zoku)의 원래 장소가 윈난성이라고 말한다.[6]
스와 하루오는 왜족(Wa-zoku)을 백월(百越)의 일부로 간주했다.
왜인(Wajin) (그리고 야요이인)은 오나라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450년경, 전국 시대에 규슈 지역에 대규모 논밭 유적이 만들어졌으며, "왜인(Wajin)은 스스로 주(Zhou)의 후손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향력 있는 이론에 따르면, 양쯔강 유역의 오나라 사람들이 수경 재배 벼농사 문화를 따랐는데, 이는 양쯔강 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며, 기원전 5세기경 오나라 멸망과 함께 일본 열도로 표류해 왔다고 한다.
고대에는 전국부터 진・한대에 걸쳐 성립된 『산해경』에 동쪽 바다에 "흑치국"이 있고 그 북쪽에 부상국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왜인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또한 후한대인 1세기경에 쓰여진 『논형』에 "왜", "왜인"에 대한 기술이 보인다. 그러나, 이들 기록과 일본 열도 주민과의 관련성은 불분명하다. 또한 『논어』에도 "구이"가 있으며, 이를 왜인이 사는 나라라고 보는 설도 있다.
왜인에 대한 확실한 최초의 기록은 75년부터 88년에 걸쳐 쓰여진 『한서』지리지이다. 그 후, 280년부터 297년에 걸쳐 진수에 의해 완성된 『삼국지』「위서동이전 왜인조」, 소위 『위지왜인전』에는 왜인의 생활 습관이나 사회의 양태가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생활 양식이나 풍속・관습・언어 등의 문화적 공통성에 의해 "삼한"이나 "예"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5세기 남북조 시대의 남조 송 시대의 432년 (원가 9년)에 범엽이 쓴 『후한서』열전 권85 (동이열전)에는 1세기 중엽의 기록으로 "왜의 노국", "왜국의 극남계", 2세기 초두의 기록으로 "왜왕 수승", "왜국 대란" 등이 있으며, 소국 분립 상태가 이어지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왜국"으로 총칭될 정도의 통일성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조의 사서에는 심약 (441년 - 513년)에 의해 쓰여진 『송서』왜국전에 왜의 오왕에 대해 쓰여 있다.
656년 (현경 원년)에 완성된 『수서』동이전에는 "구이", "왜노국"이라는 기록이 있다.
945년에 쓰여진 『구당서』, 1060년에 쓰여진 『신당서』에도 왜인에 관한 기술이 있다.
전국 시대부터 진, 한 시대에 걸쳐 성립된 『산해경』의 「해내북경」에는 왜인이 중국 동북부에 있었던 연나라에 속해 있었다는 기술이 있는데, 이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 무렵의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책은 전설집 또는 신화집이며 "가공국"이 많이 기술되어 있어, 상세한 내용은 부족하다.
『산해경』 제9권 해외동경에서는 동해 중에 "흑치국"이 있고, 그 북쪽에 부상이 솟아오르는 해가 뜨는 나라가 있다고 한다.
이 흑치국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위지왜인전』)에도 "여왕에서 4천여 리에 또 나국'''흑치국'''이 있고, 다시 그 동남쪽으로 배로 1년이면 갈 수 있다"(여왕 히미코의 나라에서 4000여 리에 나국과 흑치국이 있다. 동남쪽으로 배로 1년이면 도착한다)라고 쓰여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의 이 기술은 『산해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흑치국은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범위 밖에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흑치국에 대해서는 『양서』에도 기술[37]이 있으며 "그 남쪽에 난쟁이 나라가 있는데, 사람의 키는 3~4척이고, 또 남쪽에는 '''흑치국'''과 나국이 있으며, 왜에서 4천여 리 떨어져 있고, 배로 1년이면 도착한다"라고 쓰여 있다. 『양서』도 『산해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왜국"과 "흑치국"은 다른 나라라는 인식으로 쓰여 있으며, 흑치국의 북쪽의 부상이 솟아나는 나라가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또한, 오키나와에서도, 본섬에서도 기혼 여성이 이를 검게 칠하는 풍습(오하구로)은 메이지 말기까지 있었다.
후한대의 1세기 경에 성립된 왕충 저 『논형[38]』에는 "왜인"의 이름이 보인다.
> "주나라 때 천하가 태평하여 '''왜인'''이 와서 창초를 헌상했다"(이허편 제18)
> 주나라 때, 천하가 태평하여 왜인이 와서 창초를 헌상했다
>
> "성왕 때, 월상이 꿩을 헌상하고, '''왜인'''은 창을 바쳤다"(회국편 제58)
> 성왕 때, 월상은 꿩을 헌상하고, 왜인은 창을 바쳤다
>
>"주나라 때 천하가 태평하여 월상이 흰 꿩을 헌상하고, '''왜인'''이 창초를 바쳤다. 흰 꿩을 먹고 창초를 복용해도 흉함을 제거할 수 없었다"(유증편 제26)
> 주나라 때는 천하가 태평하고, 월상은 흰 꿩을 헌상하고, 왜인은 창초를 바쳤다. 흰 꿩을 먹고 창초를 복용해도 흉함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처럼 왜인이 주 왕에게 창초(약초)를 헌상했다는 기술이 있으며, 이르면 무왕기원전 11세기 말경, 기술이 있는 성왕으로 한다면 기원전 10세기경의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39]。월상(월상) 또는 월상(월상)은 베트남 부근에 있던 나라로 여겨진다[40]。
최근의 왜인론에서는 이 창초(창소)를 강황이 아닐까 추정하며, 여기서 기술된 왜인은 일본 열도의 연안 어로민이 아니라 강남이나 화남의 산인(山人)이었다는 설도 있다[41]。
공자의 논어에도 왜(倭)가 아니냐는 설이 있는 "구이(九夷)"에 대한 기록이 있다.
>「子欲居'''九夷'''。或曰陋如之何。子曰。君子居之。何陋之有。 」
>자(子)께서 구이(九夷)에 거(居)하려 하시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추합니다. 어찌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자, 자(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가 거(居)하면, 무슨 누추함이 있으랴."라고 하셨다.
>공자가 (도덕이 쇠퇴한 나라를 싫어하여) 구이에 살고 싶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구이는 누추하다고 하자, 공자는 군자가 있고 군자에게 순종하는 백성이 있는 나라이므로 누추하다고 문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대답했다. - ''논어 자한(子罕) 제9''
또한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子曰。道不行。乘桴浮于海。從我者其由與。子路聞之喜。
>자(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떠나리라. 나를 따르는 자는 그 유(由)일 것이다."라고 하시자, 자로가 듣고 기뻐했다.
>공자가, 도의가 행해지지 않는다. 뗏목을 타고 해외로 가고 싶은데, 〈그때〉 나를 따르는 자는 유(=자로) 정도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자로가 이것을 듣고 (공자가 많은 제자 중에서 특히 자신의 이름을 언급해 준 것을) 기뻐했다. - ''『논어』 공야장 제5''
여기서 해외는, 당시 노(魯)나 오(吳) 등 산둥반도의 남쪽 지역에서 바다로 나가 도항할 수 있는 나라는 당시로서는 『산해경(山海經)』에서 소개되는 동쪽 바다(동중국해)에 있는 흑치국(黑齒國)이나 그 북쪽의 부상(扶桑)이 자라는 나라, 즉 구이(九夷)로 여겨진다.
확실하게 일본 열도 주민에 관해 기록한 가장 오래된 문헌 자료로서 후한 시대 장제 치세(75년 - 88년)에 역사가 반고, 반소에 의해 완성된 『한서』지리지(地理志)가 있다. 연지 조에는 "무릇 낙랑해 중에 '''왜인'''이 있다. 나뉘어 백여 국을 이룬다. 세시(歲時)를 따라 와서 헌견(獻見)한다"는 기재가 있다.
>「그러나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하며 삼방(三方) 밖과 다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만약 바다에 떠다닌다면 구이(九夷)에 거처하려 했다. 연유가 있는 것이다. 낙랑해 중에 '왜인'이 있고, 나뉘어 백여 국을 이루며, 세시를 따라 와서 헌견한다」
>그러나 동이의 천성은 유순하고, 삼방(三方)의 밖에 다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도(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바다에 떠다닌다면 구이에 거처하려 한다. 연유가 있는 것이다. 낙랑해 중에 '왜인'이 있으며, 나뉘어 백여 국을 이루고, 세시를 따라 와서 헌견한다.
또한 오지 조에는 "회계(會稽) 해외에 '''동이인'''이 있다. 나뉘어 20여 국을 이룬다. 세시를 따라 와서 헌견한다"는 기재가 있으나, 동이인과 왜인의 관계는 불명하다. "鯷"(제)는 큰 메기를 의미한다. 타니가와 겐이치는 "우리 열도 안에 '동이인'의 나라를 찾는다면, 아소산의 주변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기록하고 있다[42]。
3세기 말 280년부터 297년까지 진수에 의해 완성된 『삼국지』「위서동이전」에는, 부여・고구려・동옥저・읍루・예・마한・진한・변진・왜인의 9개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왜인조에는 풍속·관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남자는 어른이나 아이나 구분 없이 모두 얼굴과 몸에 문신을 새기고 있다(「고래면문신」). 하 왕조의 소강의 아들이 회계에 봉해졌을 때, 이와 같이 하여 교룡의 해를 막았다. 문신은 거대한 물고기나 물에 사는 괴물을 가까이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나라의 문신은 각각 다르다.
- 예로부터 중국에 조공을 갔으며, 사자들은 모두 스스로를 대부라고 칭했다.
- 그 풍속(사회생활의 의미)은 혼란하지 않다.
- 남자는 모두 머리를 깎고 머리에는 목면을 쓰고, 그 의복은 가로로 길고 그것을 묶어 연결하여 입는 것으로 거의 꿰매지 않았다. 여자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땋아, 의복은 한 장을 덮듯이 그 중앙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내어 입는다.
- 벼, 모시를 재배하고, 뽕나무로 누에를 키워 비단을 짜고, 실이나 천을 만든다.
- 소, 말, 호랑이, 표범, 양, 까치는 없다.
- 병기는 모·방패·나무 활을 사용한다. 나무 활은 아래쪽을 짧게 하고 위쪽을 길게 하며, 대나무 화살대의 화살은 철제나 골제의 화살촉을 사용한다.
- 유무하는 곳은 담이, 주애와 같다.
- 왜지는 온난하다.
- 생으로 음식을 먹는다.
- 사람의 죽음에 임해서는 관은 있어도 곽이 없는, 흙으로 묘를 만든다.
- 사람이 죽으면 10일 남짓, 곡을 하고, 초상(喪)에 들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상주는 격렬하게 곡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매장이 끝나면 물에 들어가 몸을 정화한다.
- 바다를 건너 중국에 조공을 갈 때는 항상 한 사람을 머리는 빗질하지 않고 이가 있는 채로 의복은 더럽혀진 채, 고기는 먹지 않고, 부인을 가까이하지 않고, 상인처럼 한다. 이것의 이름을 지쇠라고 한다. 만약 도중에 좋은 일이 있으면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생구나 재물을 요구할 수 있으며, 만약 질병이 발생하거나 폭력에 휘말리면 지쇠가 삼가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여 이를 죽이려 한다.
- 진주나 청옥을 생산한다.
- 산에는 단이 있다.(식생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 뼈를 구워 길흉을 점친다 (태점).
- 모임이나 앉는 순서에는 부자, 남녀의 구분이 없다.
- 술을 즐긴다.
- 장수하여 백 살이나 아흔 살, 여든 살인 사람도 있다.
- 여자는 신중하다.
- 나라의 어른은 질투하지 않고, 도둑질도 없고, 다툼이나 소송도 적다.
- 법을 어기는 자는 가벼운 자는 처자를 몰수하고, 무거운 자는 문호 및 종족을 몰수한다.
- 존비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고, 대신들은 따르는 것에 납득하고 있다.
- 세금을 수탈한다. 저(높은 사람의 넓은 거주 저택)나 각(높은 사람을 초청하기 위한 높은 건물)과 같은 호화로운 건물이 있다.
- 하호(下戶: 지위가 낮은 자)는 어른과 길에서 마주치면 주저하여 풀 속으로 들어가고, 정중한 말을 들을 때에는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대고 공순함을 보인다.
5세기 남북조 시대 남조 송 시대인 432년 (원가 9년)에 범엽이 쓴 『후한서』 열전 권85(동이열전)에는 1세기 중엽의 기록으로 "왜의 노국", "왜국의 극남계", 2세기 초두의 기록으로 "왜왕 수승", "왜국 대란"이 있으며, 소국 분립 상태는 계속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왜국"으로 총칭될 정도로 묶여 있었고, 또한 그 중 일부 세력은 직접 후한의 황제에게 조공하거나 인장이나 칭호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남조의 사서에는 심약(441년 - 513년)에 의해 쓰여진 『송서』 열전 제57 '이만'에는 림읍국·부남국·사자국·천축·고구려·백제·왜국·형옹주만·예주만과 왜국전이 있으며, 왜의 5왕에 대해 쓰여져 있다.
656년 (현경 원년)에 완성된 『수서』 동이전에는 "구이가 사는 곳으로, 중하(中夏)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천성은 유순하다."(倭は九夷の居るとこである。……その天性は柔順である。)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같은 『수서』 왜국전에는 "안제 때, 또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는데, 이를 왜노국이라 하였다."(安帝時、又遣使朝貢、謂之倭奴國)라고 기록되어 있다.
945년에 완성된 『구당서』 동이전에는 일본 열도에 관해 "왜국전"과 "일본국전" 두 가지가 병립하고 있다.
『구당서』 왜국전에는 "왜국은 옛 왜노국이다"(倭國者、古倭奴國也)라고 되어 있다(노국도 참조).
『구당서』 일본국전[43]에는 ""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併倭國之地)[44]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은 왜국의 별종이며, 왜국이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않아 일본으로 고쳤다는 설과, 작은 나라였던 일본이 왜국을 병합했다는 설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송대 초기의 『태평어람』에도 이와 유사하게 기재되어 있다.) 모리 키미아키는 "일본" 국호 성립 후 첫 번째 견당사였던 702년의 파견 당시 국호 변경 이유에 대해 일본 측에서도 불분명해져, 견당사가 당 측에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한다[45].오바 슈는 "왜국전"과 "일본국전" 사이의 왜국(일본) 관련 기사의 중단 기간에는 백촌강 전투 및 임신 정변이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 중국 측에서는 임신 정변을 통해 "왜국(덴지 정권)"이 멸망하고 "일본국(덴무 정권)"이 성립되었다는 견해가 있었다고 한다.
3. 3. 일본 문헌에서의 왜인
일본 열도에 거주하는 특정 민족이 "왜인"(倭人)이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조위의 관리 루춘(如淳)은 와(倭)의 기원이 "인면 문신"(人面に入れ墨する(委する))의 관습에 기인한다고 주장했지만, 와(倭)와 연(委)의 음이 안사고와 다르기 때문에 이를 부정했다.[5]초기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에 "히로시의 사기"(日本書紀私記|니혼쇼키시키일본어)가 소개되면서, 자칭 "와"(わ)를 특정 인물의 설로 사용하여 중국 측에서 "와코쿠"(倭の国)라고 기록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와코쿠"라는 단어가 "설문해자"에서 순종적(従順)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치조 카네요시는 "왜인의 마음이 순종적이기 때문에"(日本書紀纂疏|니혼쇼키산소일본어)라고 읊었고, 많은 후대 유학자들이 이를 따랐다.
"와"(倭)가 "키가 작은 종족"(背丈の小さい人種)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일본 철학자 키노시타 준안은 왜(倭)라고 불린 이유가 그들이 작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고시츠"(古史通或問)에서 "오호쿠니"(オホクニ)의 음역이 "와코쿠"(倭国)였다고 말했다. 또한 작가 이자와 모토히코는 "대륙의 사람들이 그들의 국명을 들었을 때, 당시에는 국가의 개념이 존재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조직의 이름을 답했는데, 그것이 '輪'(와 = 고리, 환호 집락의 고리 해자)였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와노나노쿠니"(倭(委)奴国)를 "와의 노의 나라"(倭の奴の国)로 해석하는 데에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원래 "위지왜인전"(魏志倭人伝|기시와진덴일본어)을 해석한 한자 가문의 학자들 중에는 "노(奴)"라는 단어가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왜(倭)의 여성 왕국(奴国)이 "와노나코쿠"(倭奴国)라고 불렸는데, 이는 중화주의적 위계질서에서 열등한 국가에 대한 비하적인 용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하적인 용어는 일본 정부가 파견한 사절단(견수사 및 견당사)과의 교류로 인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국가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4. 민족 개념
"왜인(倭人)"이라는 개념은 일본 열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넓은 지역을 포괄한다.[6] 도리고에 겐자부로는 왜족(Wa-zoku)이 벼농사를 지으며 일본 열도로 건너온 왜인(Wajin)으로, 야요이인을 조상으로 본다.[7] 윈난성을 왜족의 기원지로 지목하며,[6] 스와 하루오는 왜족을 백월(百越)의 일부로 간주한다.
오나라는 왜인(Wajin)과 야요이인의 조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기원전 450년경 전국 시대 규슈 지역에 대규모 논 유적이 만들어졌고, "왜인은 주(Zhou)의 후손이라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쯔강 유역의 오나라 사람들이 수경 재배 벼농사 문화를 전파했고, 기원전 5세기경 오나라 멸망과 함께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는 유력한 설이 있다.
4. 1. 장강 유역의 왜족
도리고에 겐자부로에 따르면, 왜족(倭族)은 벼농사를 지으며 일본 열도로 건너온 왜인(倭人)으로, 그 조상은 야요이인과 같다.[7] 그는 왜족의 기원지가 윈난성이라고 주장한다.[6] 스와 하루오는 왜족을 백월(百越)의 일부로 보았다.왜인(倭人)과 야요이인은 오나라의 후손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기원전 450년경 전국 시대에 규슈 지역에 대규모 논 유적이 만들어졌으며, "왜인은 스스로 주(周)의 후손이라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력한 학설에 따르면, 양쯔강 유역의 오나라 사람들이 수경 재배 벼농사 문화를 따랐는데, 이는 양쯔강 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기원전 5세기경 오나라가 멸망하면서 이들이 일본 열도로 표류해 왔다는 것이다.
도리고에 겐자부로는 『논형(論衡)』에서 『구당서(舊唐書)』에 이르는 사서(史書)에 나오는 왜인에 대한 기술을 분석하여, 장강(양쯔강) 상류 유역의 사천, 윈난, 구이저우 각 성에 걸쳐 여러 왜인의 왕국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기(史記)』에 나오는 전(滇), 야랑(구이저우성허장현에 비정되며, 현재는 이족, 먀오족, 바이족, 후이족 등이 거주), 쿤밍, 저란, 사, 쿄토(현재의 양저우시한장구에 비정), 촉, 파(충칭시) 등을 그 예로 들었다.[12][14]
도리고에는 왜족의 기원지를 윈난성의 호수 뎬츠(滇池)로 비정하고, 이들이 수도의 인공 재배에 성공했으며, 왜족의 일부가 일본 열도로 이주하고 다른 왜족과 분기해 나갔다고 주장했다.[12] 그는 이족, 하니족(고대에는 왜이(和夷)로 비정, 태국에서는 아카족[15]), 타이족, 와족[16], 먀오족, 카렌족, 라와족 등을 분기된 민족으로 비정했다.[17] 이들 민족 간에는 고상식 건물, 관두의, 시메나와 등의 풍속이 공통된다고 한다.[12]
이러한 왜족론은 장강 문명을 모체로 한 민족 계통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환경 고고학자 야스다 요시노리의 장강 문명론과도 관점은 다르지만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한편, 약 7300년 전 기카이 칼데라 분화로 인한 재해로 일본에서 한반도를 거쳐 각지로 흘러들어간 난민이 왜인의 원류라는 소수 의견도 있다. 이들은 당시 아열대 기후였던 규슈에서 소규모로 행해지던 수전 벼농사가 난민과 함께 한반도나 대륙으로 건너갔고, 이후 대륙에서 발전된 기술을 가지고 이민자들이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한반도 유적의 공백 기간이 끝나는 시기와 장강 유역에서 수전 벼농사가 번성하는 시기가 이 무렵이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들은 대륙에서 이민족과의 전란으로 인해 쫓겨나 조상의 땅인 일본으로 귀향한 것이 야요이 시대 초기의 이민이라고 주장한다.
4. 2. 백월로서의 왜인
스와 하루오는 왜족을 백월의 일부로 보았다.[18] 백월은 장강(양쯔강) 유역에 사는 여러 종족을 의미하며, 춘추 시대의 오·월도 포함한다(오는 현재의 장쑤성, 월은 현재의 저장성 일대).오카다 히데히로는 왜국의 형성에 대해, 현재의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와 같은 "중국계 이민(화교)과 현지 주민의 하이브리드 상태인 도시 국가의 연합체"라고 보고 있다. 그는 현재의 중국인(한족) 자체도 사용 언어의 공통점만 있을 뿐, 기원은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으므로 "한 왕조 말기의 쇠퇴가 없었다면, 일본 열도도 '중국 문명의 일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오카다는 중국 고대 왕조의 하와 그 후계로 여겨지는 허난성의 위현과 기현 등을 참조하면서, "이(夷)"라고 불린 하인이 장강과 회하 유역의 동남아시아계 원주민이었으며, 우의 묘가 있다고 전해지는 회계산이 월인의 성지이기도 하고, 푸젠성, 광둥성, 광시성에서 베트남에 걸쳐 활동했던 월인이 하인의 후예임을 자칭하고 있으며, 주현왕 36년(기원전 333년, 초위왕 7년) 월국이 초에 멸망하고 월인이 사방으로 흩어진 후 진시황제 28년(기원전 219년)에 랑야를 출발했다고 전해지는 서복의 전승 등을 제시하였다. 그는 후연인이 한반도에 진출하기 전에 이들 월인이 일본 열도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4. 2. 1. 오인으로서의 왜인
"왜인(倭人)"이라는 민족 개념은 일본 열도의 왜인(Wajin)에만 한정되지 않고, 더 넓은 지역을 포괄한다.[6] 도리고에 겐자부로에 따르면, 왜족(Wa-zoku)은 벼농사를 지으며 일본 열도로 건너온 왜인(Wajin)으로, 그 조상은 야요이인과 같다.[7] 그는 왜족(Wa-zoku)의 기원지가 윈난성이라고 주장한다.[6] 스와 하루오는 왜족(Wa-zoku)을 백월(百越)의 일부로 보았다.왜인(Wajin)과 야요이인은 오나라의 후손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기원전 450년경 전국 시대에 규슈 지역에 대규모 논 유적이 만들어졌고, "왜인(Wajin)은 스스로 주(Zhou)의 후손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력한 설에 따르면, 양쯔강 유역의 오나라 사람들이 수경 재배 벼농사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양쯔강 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기원전 5세기경 오나라가 멸망하면서 이들이 일본 열도로 표류해 왔다고 한다.
도리고에 겐자부로는 『논형(論衡)』부터 『구당서(舊唐書)』에 이르는 역사책에 나오는 왜인에 대한 기록을 분석하여, 장강(양쯔강) 상류 유역의 사천, 윈난, 구이저우 등에 걸쳐 여러 왜인의 왕국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왕국들은 『사기(史記)』에 나오는 국명으로 전(滇), 야랑(구이저우성허장현에 비정되며, 현재는 이족, 먀오족, 바이족, 후이족 등이 거주), 쿤밍, 저란, 사, 쿄토(현재의 양저우시한장구에 비정), 촉, 파(충칭시) 등이다.[12][14][12]
도리고에는 왜족의 기원지를 윈난성의 호수 뎬츠 (滇池)로 비정하고, 수도의 인공 재배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는 왜족의 일부가 일본 열도로 이주하고, 다른 왜족과 분리되었다고 주장했다.[12] 분리된 민족으로는 이족, 하니족 (고대에는 왜이(和夷)에 비정. 또한 태국에서는 아카족[15]), 타이족, 와족[16], 먀오족, 카렌족, 라와족 등이 있다.[17] 이들 민족 사이에는 고상식 건물, 관두의, 시메나와 등 공통된 풍습이 있다고 한다.[12]
이러한 왜족론은 장강 문명을 모체로 한 민족 계통론이며, 환경 고고학자 야스다 요시노리의 장강 문명론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소수 의견으로는, 약 7300년 전 귀계 칼데라 분화로 인한 재해로 일본에서 한반도를 거쳐 각지로 피난 간 사람들이 왜인의 원류라는 설이 있다. 이들은 당시 아열대 기후였던 규슈에서 소규모로 벼농사를 짓던 중이었는데, 한반도와 대륙으로 건너가 벼농사를 발전시킨 후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한반도 유적의 공백기가 끝나는 시기와 장강 주변에서 벼농사가 번성하는 시기가 이 무렵과 일치한다. 이후 대륙에서 온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밀려나 조상의 땅인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 야요이 시대 초기의 이민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낯선 땅이 아니라 조상이 일본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일본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기원전 450년경, 즉 춘추 시대 (오월동주로 유명한 오월 전쟁 시대, 오가 멸망한 시기)의 조직적인 대규모 수전 유적이 규슈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왜인은 주의 자손을 자칭했다"라는 기록도 있어, 장강 문명의 상징인 수경 이작 문화의 양자강 일대의 오인이 기원전 5세기경 오나라 멸망과 함께 일본 열도에 표착했다는 설도 유력하다. 춘추 시대의 오인은 백월의 하나이기도 하다.
『송서』 악지에는 「백저무가」라는 것이 있는데, 그 한 구절에 "동쪽 부상에서 자정을 즐기고, 서쪽 곤륜에서 증성을 희롱한다(東造扶桑游紫庭 西至崑崙戲增城)"[19]라는 내용이 있다. 이 「(백)저」는 오에서 생산되는 직물이었다. 율령 제도에서는 월국 (에치고・엣추・노토・카가・에치젠)으로 획정되었다. 「월」은 「고시」「고시」라고도 표기되었다[20]。
「월인」,「오인」은 모두 「백월인」으로 불리며, 장강 문명의 벼농사 문명을 일본에 가져온 야요이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춘추 시대 말기에 「월」에 의해 멸망한 「오」의 해안가 거주자들에게는 문신 문화가 있었는데(장자내편제일소요유편), 이는 위지왜인전 등에 나오는 왜인의 풍습과 유사하여 오인이 해로로 망명하여 표착했다는 설도 유력하다 (아즈미족 참조).
5. 유전학
Y 염색체는 부계를 추적하는 데 적합하며, 1990년대 후반부터 Y 염색체 하플로그룹 연구가 빠르게 진전되었다.[21] 일본 열도에서 조몬 계의 D-Z1500 계통은 일본인 남성의 30%를 차지한다.[21]
5. 1. Y 염색체 하플로그룹
Y 염색체 하플로그룹 연구는 1990년대 후반부터 급속도로 진전되었다.[21] 일본 열도에서 조몬 계의 D-Z1500 계통은 일본인 남성의 30%를 차지하며, 그 중 D-Z1500의 하위 계통인 '''CTS8093'''은 약 2000년 전에 발생했음에도 일본인 남성의 10%를 차지한다. O-CTS11986으로 정의되는 계통은 일본인의 야요이 계 자손이며, D-Z1500 계통 다음으로 많다.M216의 SNP를 가진 C 계통을 합하면 일본인 남성의 80%가 이 중 하나에 속하며, 현재 일본인 남성의 대부분을 차지한다.[22][23] M8의 SNP를 가진 C1a1 계통은 YAP 변이를 가지지 않은 조몬 계이며, 일본 열도에 처음 도달한 계통으로도 여겨진다.[24] M213의 흔적을 가진 C2 계통은 몽골, 여진, 만주 등의 북방 유목 민족과 조상을 같이 하며 역사 시대 이후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한민족에서 유래하는 M122의 SNP를 가진 O-M122 계통은 중국, 조선, 베트남 등에서는 가장 많고, 동남아시아, 인도 북동부나 네팔 등의 남아시아에서도 광범위하게 보이는 O 계통의 최대 하위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D-Z1500, O-M176 양 계통 다음으로 나타난다.[25] O-M122 계통은 현재 일본인의 Y 염색체 하플로그룹 안에 부계의 유력한 클러스터를 남기지 않아, 유전자적으로 보면 분기 계통이 다른 잡다한 집합이므로, 산발적으로 일본 열도에 도래했다고 생각된다.[26]
한국 부산 가덕도의 장항 유적(약 6,300년 전)에서 출토된 "장항 8호 인골(Changhang 8)"의 Y염색체는 '''D1a2a1'''(D-116.1, CTS10441)이다.[27] 홋카이도 레분 섬의 선박 유적(조몬 시대 후기 전엽부터 중엽 (약 3,800-3,500년 전))에서 출토된 인골인 선박 5호의 Y염색체는 '''D1a2a2b'''(D-CTS1824, CTS68)이었다.[30][31][32]
왜인의 시대에 일본 열도에 있었던 Y염색체 하플로그룹 계통은 D-M64.1 및 O-47z였다. 두 계통을 비교하면 D 계통이 유전자 번성에 우세를 보였다. 사키야 미츠루는 F2320 계통 및 O-M176 계통을 장강 문명의 담당자로 보고 있다. 장강 문명의 쇠퇴와 함께 O-F2320 및 일부 O-M176은 남하하여 백월이라 불렸으며, 나머지 O-M176은 서방 및 북방으로 건너가 산둥반도,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고 하며,[33] 이 O-M176 계통이 오나 월과 관련된 O 계통의 왜인으로 여겨진다. 사와다 요타로는 O 계통의 왜인에 대해 중국 강남에서 수전(水田) 벼농사를 가져온 집단이라고 생각하며,[9] 사키야 미츠루도 중국 강남 지역에서 벼농사를 가져온 집단은 Y염색체 하플로그룹 O-M176에 속한다고 추측하며,[34] 왜인은 조몬 계의 D-M64.1 계통에 야요이 계의 O-M176이 더해져 성립된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있다.
5. 2. 미토콘드리아 DNA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 결과, 쓰쿠시 지방(『일본서기』의 "국생")과 오나라 사람들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본인의 계통 참조). 1999년 3월 18일, 도쿄 국립 박물관에서 강남 인골 일중 공동 조사단(야마구치 빈 단장)은 "장쑤성에서 출토된 60구의 두개골, 대퇴골, 치아(28구는 신석기 시대, 17구는 춘추전국 시대, 15구는 전한 시대)"를 조사했다. 특히 치아에서 DNA를 추출하여 조사한 결과, 후쿠오카현과 야마구치현 두 현에서 출토된 도래계 야요이인과 조몬인의 인골과 비교했을 때, 춘추 시대인과 전한 시대인은 야요이인과 매우 유사했다. DNA 분석에서는, 장쑤성 쉬저우 근교의 량왕청 유적(춘추 시대 말)의 인골 치아에서 추출한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 서열 일부가,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의 구마니시 오다 유적의 인골 DNA와 일치한다고 발표되었다.[28][29] (다만, 최근에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부계 유전자를 추적할 수 있는 Y 염색체 하플로그룹과 달리 민족 정보를 갖지 않으며(민족 간 구별이 불가능), 계통 추적에 대한 유용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6. 현대의 용법
현대에는 '왜'라는 표현이 주로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한 멸칭으로 사용된다. 과거 15세기까지는 일본 열도의 고대인만을 지칭했으나, 일본이 통일된 후에는 '왜놈', '왜년' 등과 같이 일본에 대한 멸칭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6. 1. 멸칭으로서의 왜
왜인은 삼국사기에 관련 기록이 있다. 일부 일본인은 '일본'이라는 호칭 대신 '왜'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오족협화에서 "오족이란 한족,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왜족(일본)을 의미한다"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49]6. 1. 1. 한국에서의 멸칭
과거 15세기까지는 단순히 일본 열도의 고대인만을 한정지어 정의했으나, 일본이 통일된 후 현대까지 '''왜놈'''(倭-), '''왜년'''(倭-)등 일본에 대한 멸칭 수준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고려와 이씨 조선 시대의 서적에서 일본은 '왜', '왜노' 등으로 표기되었다.[46] 1419년 응영의 외구 이후 일본에 파견된 문인 송희경은 보고서와 함께 국왕 세종에게 바치기 위해 쓴 시문집인 『노송당일본행록』에서 일본인을 '왜노'라고 기록하고 있다.1763년 조선 통신사의 일원이었던 원중거가 쓴 『화국지』에는 일본어로 '왜'와 '화'는 같은 발음이며, 일본인도 일본을 '화' 혹은 '왜'라고 부르지만, 쓰시마섬 사람만은 '왜'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고 쓰여 있다. 현대에는 중국이나 한국 · 북한 등에서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해 모욕적인 의미를 담아 "왜(倭)"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모욕감을 더하기 위해 한국 · 북한에서는 "왜놈" 등의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으며, 차별 용어이기도 하다.[46]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초등학생용 국어사전에서도 "왜놈"이 실려 있으며 "일본인을 욕하는 말"이라고 주석이 있다.[47] 한국 국회에서는 민주당의 조경태 의원이 "나는 일본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왜인'이라고 부른다"라고 발언했고, 한국 언론은 "정치인의 나쁜 입"이라고 비판적으로 전했지만, 한국 다음상의 조사에서는 이를 "통쾌한 발언"이라고 한 사용자가 다수를 차지했다.[48]
6. 2. 기타 용법
현대에는 중국이나 한국, 북한 등에서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해 모욕적인 의미를 담아 "왜(倭)"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중국에서는 모욕감을 더하기 위해 "왜구"나 "왜귀"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한국과 북한에서는 "왜놈" 등의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 단어들은 차별 용어이기도 하다[46]。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초등학생용 국어사전에서도 "왜놈"이 실려 있으며 "일본인을 욕하는 말"이라고 주석이 달려있다[47]。한국 국회에서는 민주당의 조경태 의원이 "나는 일본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왜인'이라고 부른다"라고 발언했고, 한국 언론은 "정치인의 나쁜 입"이라고 비판적으로 전했지만, 한국 다음상의 조사에서는 이를 "통쾌한 발언"이라고 한 사용자가 다수를 차지했다[48]。
일본인 중에서도 "일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일본을 지칭할 경우, 예를 들어 오족협화에 대해 "오족이란 한족,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왜족(일본)을 의미하는 말이다"라고 "왜"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공적으로 "왜"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은 시대에 대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것이다.[49]
참조
[1]
서적
日本語形成の謎に迫る
新泉社
1999
[2]
문서
魏志倭人伝
1951
[3]
논문
From Koguryo to Tamna: Slowly riding to the South with speakers of Proto-Korean
2013
[4]
논문
RECONSTRUCTING THE LANGUAGE MAP OF PREHISTORICAL NORTHEAST ASIA
2010
[5]
서적
倭国の出現
東京大学出版会
1999
[6]
서적
原弥生人の渡来, 倭族から日本人へ, 古代朝鮮と倭族, 倭族トラジャ, 弥生文化の源流考, 古代中国と倭族, 中国正史倭人・倭国伝全釈
角川書店, 弘文堂, 中公新書, 大修館書店, 中公新書, 中央公論新社
1982, 1985, 1992, 1995, 1998, 2000, 2004
[7]
서적
倭族と古代日本
雄山閣出版
1993
[8]
문서
倭族と古代日本, 諏訪春雄通信100
http://www-cc.gakush[...]
雄山閣出版
1993
[9]
서적
日本語形成の謎に迫る
新泉社
1999
[10]
서적
倭国の出現
東京大学出版会
1999
[11]
서적
逆説の日本史
[12]
서적
原弥生人の渡来, 倭族から日本人へ, 古代朝鮮と倭族, 倭族トラジャ, 弥生文化の源流考, 古代中国と倭族, 中国正史倭人・倭国伝全釈
角川書店, 弘文堂, 中公新書, 大修館書店, 中公新書, 中央公論新社
1982, 1985, 1992, 1995, 1998, 2000, 2004
[13]
서적
倭族と古代日本
雄山閣出版
1993
[14]
웹사이트
三国志地名事典(索引)
http://www.project-i[...]
[15]
서적
古代中国と倭族
中公新書
2000
[16]
서적
弥生文化の源流考
大修館書店
1998
[17]
문서
中国の少数民族, タイの民族
[18]
문서
倭族と古代日本, 諏訪春雄通信100
http://www-cc.gakush[...]
雄山閣出版
1993
[19]
문서
崑崙
[20]
문서
越国
[21]
웹사이트
Y chromosome and Mitochondrial DNA haplogroups
http://www.scs.uiuc.[...]
2005
[22]
문서
Y-DNA Haplogroup distribution in Japan
[23]
웹사이트
Atlas of the Human Journey
https://www3.nationa[...]
2008-04-14
[24]
문서
초기 도착
[25]
논문
A recent bottleneck of Y chromosome diversity coincides with a global change in culture
2015-04
[26]
웹사이트
Y-DNA Haplogroup Tree 2006
http://www.isogg.org[...]
2007
[27]
웹사이트
한국가토쿠섬・장항유적 출토인골의 DNA 분석
https://researchmap.[...]
2019-06
[28]
문서
古代史研究, KBSパノラマ・コリアンイブ(Eve)1編『加徳島!7千年の謎』
[29]
문서
이광호 박사의 해설
中央大学生命科学科
[30]
논문
C6 礼文島船泊縄文人の核ゲノム解析
http://anthrop-meeti[...]
2016
[31]
웹사이트
遺伝子から続々解明される縄文人の起源-高精度縄文人ゲノムの取得に成功-
https://www.kahaku.g[...]
国立科学博物館
2019-05-13
[32]
웹사이트
Y-full D-CTS220
https://www.yfull.co[...]
[33]
서적
DNA・考古・言語の学際研究が示す新・日本列島史
勉誠出版
2009
[34]
서적
DNA・考古・言語の学際研究が示す 新・日本列島史
勉誠出版
2009
[35]
서적
日本人と日本語の起源
毎日新聞社
1991
[36]
서적
日本語の成立
講談社
1978
[37]
문서
梁書 卷五十四 列傳第四十八の「諸夷傳 東夷条 倭」
[38]
서적
論衡
明治書院
2005
[39]
문서
当時の日本列島は縄文時代晩期ないし弥生時代初期である
[40]
서적
日本文化の多重構造−アジア的視野から日本文化を再考する
小学館
1997
[41]
서적
日本文化の多重構造−アジア的視野から日本文化を再考する
小学館
1997
[42]
서적
続・日本の地名
岩波新書
1998
[43]
위키소스
舊唐書/卷199上
[44]
위키소스
舊唐書/卷199上#日本
[45]
논문
大宝度の遣唐使とその意義
吉川弘文館
2005
[46]
웹사이트
ウェノム(倭놈)の項目
https://ko.dict.nave[...]
네이버
[47]
서적
初等学生学習国語辞典
教学社
[48]
뉴스
韓国国会議員が日本人を「倭人」と発言、ネットでは「痛快」が多数
https://web.archive.[...]
サーチナ
2011-08-20
[49]
서적
公文書問題と日本の病理
平凡社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