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미네 가나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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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나미네 가나메는 일본계 미국인 2세로, 미식축구 선수와 일본 프로 야구 선수, 그리고 지도자로 활동했다.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야구로 전향하여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약했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3번의 수위 타자, 1번의 MVP를 수상하며 제2기 요미우리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으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으며, 1994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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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미네 가나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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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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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월러스 가나메 요나미네 |
출생일 | 1925년 6월 24일 |
사망일 | 2011년 2월 28일 |
출생지 | 하와이주 마우이섬 올로왈루 |
사망지 | 호놀룰루, 하와이 |
포지션 | 외야수 |
타석 | 좌타 |
투구 | -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일본 프로 야구 (NPB) |
데뷔일 | 1951년 6월 19일 |
데뷔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최종일 | 1962년 10월 12일 |
최종팀 | 주니치 드래곤스 |
팀 | 선수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1년–1960년) 주니치 드래곤스 (1961년–1962년) 감독 주니치 드래곤스 (1972년–1977년) |
통산 성적 (NPB) | 타율: .311 홈런: 82 안타: 1,337 타점: 482 |
수상 | 4x 일본 시리즈 우승: 1951년, 1952년, 1953년, 1955년 CL MVP (1957년) 8× NPB 올스타 (1952년-1959년) 7× 베스트 나인 (1952년-1958년) |
명예의 전당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94년) |
미식축구 경력 | |
포지션 | 러닝백 |
고등학교 | 패링턴 고등학교 (호놀룰루, 하와이) |
신장 | 5 피트 9 인치 (175 cm) |
체중 | 180 파운드 (82 kg) |
드래프트 | 미지명 |
과거 팀 |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1947년) |
통산 성적 | 러싱 야드: 74 리시빙 야드: 40 터치다운: 0 |
2. 초기 생애 및 미식축구 선수 시절
패링턴 고등학교 재학 시절 빠른 발을 인정받아[60][2], 1947년 미식축구 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 러닝백으로 입단했다.[60] 이는 일본계 미국인 최초의 프로 미식축구 선수 기록이었다.[4] 당시 포티나이너스는 NFL이 아닌 AAFC 소속이었다.[60] 그러나 선수 시절 겪은 부상으로 인해 미식축구 선수 생활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야구로 전향하게 되었다.[60][1] 이후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AAA팀인 샌프란시스코 실스 산하 C급 팀 솔트레이크 시티 비즈에 입단하며 야구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60]
2. 1. 하와이 유년 시절
일본계 미국인 2세로, 하와이 마우이섬 올로왈루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마쓰사이(1890년 9월 1일 ~ 1988년 7월 31일)로 우치난츄 이민자였고, 어머니는 키쿠에(1901년 2월 14일 ~ 1999년 2월 26일)로 히로시마 출신이었다.[1] 요나미네는 라하이나루나 고등학교와 월러스 라이더 패링턴 고등학교에 다녔다.[2] 그의 별명은 원래 고등학교 이름에서 따온 '월러스'였으나, 곧 '왈리'로 바뀌었고,[3] 이는 나중에 그의 법적 이름이 되었다.[1]초등학교 시절에는 여름 방학마다 아버지가 일하던 제당 회사 파이오니아 밀의 사탕수수 밭에서 수확을 도왔다. 이 경험이 "강한 다리 힘을 길러주었다"고 전해진다.[13] 패링턴 고등학교에서는 미식축구, 농구, 야구 등 여러 종목에서 뛰어난 만능 선수였다.[14]
1947년, 빠른 발을 인정받아 당시 NFL과는 별개 리그였던 AAFC 소속의 미식축구 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 계약금 1.4만달러로 입단했다. 하프백으로 활약했으나, 같은 해 오프 시즌에 하와이로 돌아가 야구를 하던 중 왼손목 골절상을 입어 포티나이너스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하와이안 워리어스에서 뛰었지만, 2년 차에 왼쪽 어깨 탈구 부상을 당하면서 미식축구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어렵게 되었다.[15]
1950년에 야구로 전향하여[16] 마이너 리그 AAA급 팀인 샌프란시스코 실스 산하의 C급 팀 솔트레이크시티 비스(Salt Lake City Bees)에 입단했다. 그해 타율 .335를 기록하며 리그 5위에 올랐고, 다음 해 2A 리그 승격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오프 시즌에 호놀룰루에서 열린 하와이 선발팀 대 퍼시픽 리그 선발팀 경기에 출전했을 때, 일본 프로 야구 선수들의 좋은 대우를 알게 되면서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15]
2. 2.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펠린턴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 농구, 야구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선수였다[14]. 특히 빠른 발을 인정받아 1947년 미식축구 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 입단했다. 당시 포티나이너스는 NFL이 아닌 AAFC 소속이었으며, 요나미네는 계약금 14000USD를 받고 입단했다[15]. 그는 하프백(러닝백)으로 뛰며[15] 일본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프로 미식축구 선수가 되었다[4](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는 월터 아치우였다). 1947년 한 시즌 동안 19번의 캐리로 약 67.67m, 3번의 패스로 약 36.58m를 기록했다[1].그러나 그의 미식축구 경력은 길지 않았다. 1947년 시즌이 끝난 후 하와이에서 야구를 하다가 왼손목 골절 부상을 당했고[1][15], 이로 인해 포티나이너스를 퇴단해야 했다[15]. 이후 하와이안 워리어스 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2년 차에 왼쪽 어깨 탈구 부상을 입으면서 결국 미식축구 선수 생활을 완전히 접게 되었다[15]. 이후 야구 선수로 전향했다[16].
3.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51년 시즌 중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며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60] 이후 주니치 드래곤스에서도 활약하며 1962년 은퇴할 때까지, 다재다능한 외야수로서 타격 스타일의 유연함과 주루 플레이의 적극성으로 명성을 떨쳤다. 통산 수위 타자 3회, MVP 1회(1957년 센트럴 리그), 베스트 나인 7회(1952–58년 연속), 올스타 11회 선정되었으며, 4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며 요미우리의 제2기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특히 통산 홈 스틸 11회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위 기록이다.
요나미네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일본 야구에 생소했던 미국식 플레이 스타일을 도입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첫 타석의 세이프티 번트, 한 이닝 3도루[60], 병살타를 피하기 위한 홈에서의 격렬한 크로스 플레이[61], 상대 글러브를 노리는 슬라이딩, 포수와의 충돌을 불사하는 홈 쇄도[36], 드래그 번트, 플라이볼에 대한 다이빙 캐치 등[37] 그의 적극적이고 때로는 거친 플레이는 초기에 "지저분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지지 속에[38] 점차 일본 야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가토 료조는 "일본 야구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평했으며[39], 라이벌이었던 가와카미 데쓰하루 역시 그의 주루 기술과 현대 야구 도입에 대한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40] 다만 195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 시리즈 3도루 실패라는 기록도 남겼다.[41]
타격 면에서도 연구를 거듭하여 변화구 대처 능력을 키우고 일본식 타법을 습득했으며[36], 미국 잡지를 통해 MLB의 최신 이론을 익혀 자신에게 적용하고 동료들에게 전수하기도 했다.[42] 미식축구 선수 시절 입은 어깨 부상으로 송구 능력은 약점으로 꼽혔다.
이러한 선수 시절의 업적을 인정받아 1994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
3. 1. 일본 프로 야구 진출 배경
펠린턴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 농구, 야구 등 다양한 종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만능 선수였다.[14]1947년, 그는 빠른 발을 인정받아 당시 NFL과는 다른 리그였던 올 아메리카 풋볼 컨퍼런스(AAFC) 소속 미식축구 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에 계약금 14000USD를 받고 입단했다. 하프백으로 활동했으나, 같은 해 오프 시즌에 고향 하와이에서 야구를 하다가 왼손목 골절 부상을 입어 포티나이너스를 떠나야 했다. 이후 하와이안 워리어스 팀에서 활동했지만, 2년 차에 왼쪽 어깨 탈구 부상을 당하면서 미식축구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어렵게 되었다.[15]
결국 1950년에 야구 선수로 전향하여[16] 마이너 리그 AAA급 팀인 샌프란시스코 실스 산하 C급 팀 Salt Lake City Bees|솔트레이크시티 비스eng에 입단했다. 그해 타율 .335를 기록하며 리그 5위에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다음 해에는 2A 리그 승격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0년 오프 시즌, 호놀룰루에서 열린 하와이 선발팀과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 선발팀 간의 경기에 출전한 것을 계기로 일본 프로 야구 선수들의 좋은 대우를 알게 되었고,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을 희망하게 되었다.[15]
3.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51~1960)
1951년, 전년도 쇼치쿠 로빈스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며 전력 보강이 시급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시즌 중 캐피 하라다의 소개와 레프티 오도울의 추천을 받은 요나미네를 영입했다.[17][36] 6월 2일 일본에 도착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는 첫 미국 국적 선수였기에 구단은 신중한 검토 끝에 6월 19일, 2년 계약 연봉 100만엔으로 입단을 확정했다.[16][18][15] 입단 전까지 요나미네는 도쿄 시내를 달리며 개인 훈련을 했는데, 특히 이른 아침 황거 달리기를 즐겼으며 당시 하와이에서 온 다도 마리노와 함께 달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9]같은 해 6월 19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데뷔했다. 7회말 무사 1, 2루 상황에서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대타를 찾자 요나미네는 "I'll try!"(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자원했고, 첫 타석에서 스기시타 시게루를 상대로 기습적인 3루 세이프티 번트를 성공시켰다.[20] 다음 날인 20일 히로시마 카프전에서는 "7번·좌익수"로 선발 출전해 4타수 2안타를 기록하며 주전 좌익수 자리를 꿰찼고, 8월 말부터는 1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요나미네는 뛰어난 타격 기술 외에도 과감한 주루 플레이로 주목받았다. 9월 12일 국철 스왈로스전에서는 한 이닝 3도루(일본 기록[60])를 기록했고, 병살타를 피하기 위한 홈에서의 격렬한 크로스 플레이 등 본토 야구의 기술을 선보였다.[61][21] 그러나 이러한 격렬한 플레이는 당시 일본 팬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종전 직후의 반미 감정과 맞물려 재일 미국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심한 야유를 받거나 관중이 물건을 던지는 일도 겪었다. 요나미네는 훗날 "1년차는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내 임무라고 다짐했다. 뒤따라올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라고 회상했다. 또한 열악한 이동(3등 열차) 및 숙박(일본식 여관) 환경, 낯선 기후와 식사(특히 날달걀밥)에도 어려움을 겪었지만[22], 일본식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하며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쌓았다. 시즌 후 팀의 리더 격인 치바 시게루는 "당신은 우리와 똑같이 해냈다. 좋은 사람이니 일본에서 계속 뛰어보는 것이 어떻겠나? 우리가 돕겠다"고 격려하기도 했다.[23] 1951년 시즌은 규정 타석에 미달했지만 타율.354, 26도루라는 인상적인 성적을 남겼다.
이듬해 1952년부터 1960년까지 8년 연속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며 제2기 요미우리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1952년에는 리그 2위에 해당하는 타율 .344, 38도루를 기록했고, 리그 최다인 163안타와 104득점을 올렸다. 올스타전에도 처음 출전하여 이후 8년 연속 선정되었다. 이 해 기록한 맹타상 22회는 아오타 노보루를 넘어선 당시 일본 신기록이었다(1972년 하리모토 이사오가 타이기록, 1996년 이치로가 경신). 타율 .312(리그 6위)를 기록한 치바 시게루와 함께 1, 2번 테이블 세터를 이루어, 두 사람 모두 4할이 넘는 높은 출루율(요나미네 .405, 치바 .412)을 자랑하며 당시 야구계 굴지의 1, 2번 콤비로 명성을 떨쳤다.[28]
1953년에는 아오타 노보루의 이적으로 중견수를 맡아 리그 5위인 타율 .307을 기록했다. 1954년에는 와타나베 히로유키, 니시자와 미치오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시즌 막판 .433의 맹타를 휘두르며[24] 자신의 최고 기록인 타율 .361로 생애 첫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는 팀 동료이자 라이벌인 가와카미 데쓰하루(타율 .322)를 넘어선 기록이었다. 또한 172안타, 69사사구, 출루율 .441, 93득점 모두 리그 1위를 기록하며 최고의 리드오프로 활약했다. 1955년에는 9월 부상으로 20경기에 결장하며 타율 .311(리그 4위)에 그쳐 가와카미(타율 .338)에게 수위 타자 자리를 내주었다.
1956년 3월 21일 국철과의 개막전에서는 1회초 선두 타자 홈런을 쳐내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이후 시미즈 다카유키(2003년), 다카하시 요시노부(2007년)가 기록). 이 해 타율 .338로 두 번째 수위 타자 타이틀을 되찾았고, 리그 5위에 해당하는 13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후 연봉은 팀 내 최고액인 600만엔까지 올랐는데, 이로 인해 가와카미가 구단에 요나미네보다 자신의 연봉이 낮은 이유를 따져 물었다는 소문도 돌았다.[25]
1957년에는 감기로 스프링캠프 합류가 늦어졌고 시범경기에서는 22타수 무안타에 그쳤으나[25], 정규시즌 4차전부터 선발 복귀하여 맹활약했다. 시즌 초반 선두를 달리던 가와카미를 6월에 추월한 뒤, 최종 타율 .343으로 2위 타미야 겐지로(.308)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2년 연속이자 통산 3번째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이 활약으로 생애 첫 MVP에도 선정되었다.
1958년부터는 다시 좌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5월 25일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1000안타를 달성했는데, 793경기 만의 달성은 당시 NPB 최단 경기 기록이었다(1989년 부머 웰즈가 781경기로 경신).[52] 1958년에는 타율 .293, 1959년에는 .287로 2년 연속 리그 3위를 기록했다. 요미우리 시절 베스트 나인을 통산 7회(1952~1958년) 수상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의 통산 홈 스틸 11회는 일본 프로야구 역대 1위 기록이다.
35세 시즌이었던 1960년, 타율 .228로 성적이 크게 하락했다. 그해 11월 19일, 라이벌이었던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요나미네는 다음 시즌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다. 성적 하락과 더불어 일본어 실력이 크게 늘지 않았던 점도 이유로 작용했다. 요미우리는 퇴단하는 요나미네에게 공로금으로 은퇴 시 100만엔, 타 구단 이적 시 50만엔을 제시했다. 현역 연장을 원했던 요나미네는 50만엔을 수락했지만, 마침 A급 10년 선수 제도 자격을 얻었기에 이를 활용하여 다른 구단과 협상하기를 원하며 자유 계약 공시를 미뤄달라고 요청했다(권리 유무에 따라 연봉에 4만달러 차이가 난다고 주장). 그러나 요미우리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A급 선수 이적 협상 해금일(12월 16일) 이전인 12월 3일에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했다. 요나미네는 주니치 드래건스와 킨테츠 버팔로의 제안을 받았고, 요미우리와 직접 대결할 수 있다는 이유로 12월 7일 연봉 1.5만달러에 주니치로 이적했다.[26][27]
3. 3.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61~1962)
1960년 오프 시즌에 자유 계약 신분이 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결별한 뒤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했다. 주니치에서 2년 동안 선수로 활약한 뒤 1962년에 은퇴했다.4. 은퇴 이후 지도자 경력
은퇴 후 곧바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1963년 주니치 드래곤스 타격 코치를 시작으로 도쿄 오리온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난카이 호크스, 세이부 라이온스, 닛폰햄 파이터스 등 여러 구단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하며 약 30년에 걸쳐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특히 1974년에는 주니치 감독으로서 팀의 20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60] 외국 태생임에도 오랜 기간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풍부한 경험과 야구계의 두터운 신망 덕분이었다.
1988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장을 떠나 미국으로 귀국했다. 이후 아내 제인과 함께 도쿄 롯폰기에서 "와일리 요나미네 펄스"라는 진주 상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했으며, 자녀들이 운영하는 캘리포니아 지점도 있었다.[5] 1998년에는 하와이 고등학교 체육 협회에 20만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62]
고향인 하와이에서 생활하던 중, 2006년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참가를 계기로 18년 만에 일본을 다시 방문했으며,[6] 2008년에는 해당 리그의 나고야 80 D'sers 팀에 코치 겸 파트타임 선수로 합류했다.[6] 2009년에는 오릭스 버펄로스의 초청으로 시구를 하는 등 80세가 넘어서도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립선암과의 오랜 투병 끝에 2011년 2월 28일,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시니어 홈에서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63][2][7] 사망 약 3개월 후 도쿄 롯폰기의 교회에서 열린 '작별의 회'에는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호시노 센이치 등 많은 야구계 인사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추모했다.[64][65]
요나미네의 증손자인 마이카는 201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29라운드로 지명되었다.[8][9]
4. 1. 코치 및 감독 시절
1962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스의 1군 타격 코치를 맡았고, 이후 도쿄 오리온스(1967년~1969년, 1군 타격 코치)를 거쳐 1970년 주니치로 돌아와 1군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1972년에는 주니치의 1군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감독 첫해에는 신인 감독으로서 개막 연승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29] 특히 1974년에는 당시 10년 연속 리그 우승을 노리던 친정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10을 저지하고[60][16], 주니치 구단 역사상 1954년 이후 20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는 요나미네 감독의 지도자 경력 중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1977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주니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여러 구단에서 코치직을 역임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국 태생으로 방송 해설자를 맡는 데 어려움을 느낀 점도 있지만, 약 30년에 걸쳐 지도자 생활을 이어간 것은 이례적인 일로, 일본 야구계에서 그가 얼마나 두터운 신망을 얻었는지 보여준다.
기간 | 소속팀 | 직책 |
---|---|---|
1963년 ~ 1966년 | 주니치 드래곤스 | 1군 타격 코치 |
1967년 ~ 1969년 | 도쿄 오리온스 | 1군 타격 코치 |
1970년 ~ 1971년 | 주니치 드래곤스 | 1군 수석 코치 |
1972년 ~ 1977년 | 주니치 드래곤스 | 1군 감독 |
1978년 ~ 1979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 2군 외야 수비·주루 코치 |
1980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군 타격 코치 |
1981년 | 난카이 호크스 | 1군 타격 코치[30] |
1982년 | 난카이 호크스 | 1군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 |
1983년 | 세이부 라이온스 | 2군 타격 코치 |
1984년 | 세이부 라이온스 | 1군 수비·주루 코치 |
1985년 | 닛폰햄 파이터스 | 1군 수비·주루 코치 |
1986년 | 닛폰햄 파이터스 | 수석 코치 |
1987년 ~ 1988년 | 닛폰햄 파이터스 | 1군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 |
1987년 오프 시즌에는 후지 TV 계열의 《프로 야구 뉴스》 기획 ‘특별 출연 시상식’에 출연하여 도쿄 자택에서 나카이 미호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1988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장을 떠나 미국으로 귀국했다. 부인이 운영하는 진주 전문점 사업 때문에 일본과 하와이를 오가며 생활했다. 1990년에는 호놀룰루에서 은퇴 기념 파티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하와이의 우수 학생에게 연간 5000USD의 장학금을 지급하는 '요나미네 스칼라십' 제도를 발표했다.[31] 1994년에는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6] 1998년에는 하와이 고등학교 체육 협회에 20만달러를 기부하는 등[62][32] 사회 공헌 활동에도 힘썼다.
이후 고향 하와이에서 생활하다가 2006년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참가를 계기로 18년 만에 일본을 다시 방문했다. 2007년에는 혼간지 하와이 별원으로부터 '하와이 인간 주보' 표창을 받았다. 2009년에는 오릭스 버펄로스의 초청으로 시구를 하는 등 건강한 모습을 보였으나, 전립선암 투병 끝에 2011년 2월 28일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시니어 홈에서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63][33]
사망 약 3개월 뒤인 2011년 5월 27일, 생전에 다니던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의 롯폰기 교회에서 ‘작별의 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주니치 감독 시절 제자였던 호시노 센이치 등 약 400명이 참석하여 고인을 추모했다. 오 사다하루는 추도사에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어 야구 인생이 크게 바뀌었다. 요나미네 씨의 가입은 프로 야구 발전의 이정표 중 하나였다"고 말하며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64][34] 당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는 "월리는 살아 있습니다. 제가 ‘월리이즘’으로 라쿠텐을 만들고 있습니다. 반드시 좋은 지반을 쌓아 월리에게 보고하고 싶습니다"라고 다짐하며 참석자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65][35] 이 작별 모임은 당초 3월 22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연기되었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출신지인 하와이주의 다니엘 K. 이노우에 국제공항 내에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 요미우리 선수 시절, 주니치 감독 시절의 유니폼 등이 전시되어 있다.
4. 2. 지도 철학 및 평가
1972년 주니치 드래곤스 1군 감독으로 승격되어 1974년에는 친정 팀인 요미우리의 10년 연속 리그 우승을 저지하고[60] 20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77년까지 감독을 맡은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난카이 호크스, 세이부 라이온스, 닛폰햄 파이터스 등 여러 구단에서 코치를 역임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약 30년에 걸친 지도자 생활은 야구계의 두터운 신망을 보여준다.선수 시절, 미국식 슬라이딩, 태클 등 격렬한 플레이 스타일은 당시 "치마 입은 아가씨 야구"라고 조롱받던 일본 프로 야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슬라이딩 시 발등으로 상대 야수의 글러브를 걷어 올려 공을 떨어뜨린다", "홈 쇄도시 포수의 미트를 쳐내고 어깨로 포수의 왼쪽 어깨를 노려 넘어뜨린다"라는 주루 기술[36]과, 현재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타자의 1루 베이스 러닝의 상식(코너 안쪽을 발로 차고 90도 각도로 빠르게 슬라이드)을 일본 프로 야구계에 보급시켰다. 또한, 희생타 대신 자신이 출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드래그 번트나, 플라이볼에 대한 다이빙 캐치 등 새로운 전술은 요나미네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평가받는다[37].
처음에는 이러한 격렬한 주루가 "지저분한 플레이"로 다른 팀과 관객, 심지어 심판으로부터 비판받았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미즈하라 시게루의 전적인 지지 덕분에 플레이를 계속할 수 있었다[38]. 일본 프로 야구계의 주루 의식을 바꾼 선수로서 대릴 스펜서와 함께 자주 언급되며, 가토 료조는 "일본 야구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전투적인 슬라이딩은 그 한 예이며, 예술적인 타격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라고 말했다[39]. 가와카미 데쓰하루 역시 요나미네의 빠른 발과 머리를 쓰는 주루 기술을 높이 평가하며 "당시 일본 야구는 그저 치고, 던지는 단순한 야구였다. 거기에 그가 미국의 발전된 야구를 들여왔다. 그런 현대 야구에 눈을 뜨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큰 공헌이었다"라고 그 공적을 칭찬했다[40]. 타격 역시 연구에 열심이어서 일본적인 볼을 끌어당겨 허리를 돌려 치는 타법을 마스터했다[36]. 미국 잡지를 통해 MLB 정보에 정통했고, 테드 윌리엄스 등의 이론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팀 동료에게 전수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기여했다[42]. 다만, 미식축구 선수 시절 어깨 부상으로 송구 능력은 약점으로 꼽혔다.
야구에 대한 자세는 엄격했지만, 일상에서는 온화하고 너그러운 성격으로 알려졌다[11]. 호시노 센이치는 "요나미네 씨에게 혼난 적은 한 번도 없다. 속이 깊고, 미국의 합리성과 의리, 인정을 모두 갖추고 있다"라고 평가했다[46]. 타니자와 켄이치는 요나미네 감독 시절, 선수들을 집으로 초대해 부인이 만든 음식을 대접하며 팀의 화합을 도모했던 일화를 전하며 "좀처럼 일본 감독에게서는 볼 수 없는 타입이었다"고 회상했다[45]. 하지만 때로는 엄격한 면모도 보였는데, 1975년 야쿠르트전에서 역전 홈런을 맞은 투수 스즈키 타카마사에게 "네가 안 가면 누가 가겠어"라며 손찌검을 한 뒤 마운드에 다시 올려보냈고, 스즈키는 이후 승리 투수가 되었다. 요나미네는 스즈키에게 "너라면 맞아도 벤치와 관중석 모두가 납득할 거야. 그래서 너를 때려서라도 마운드에 보낸 거야"라고 설명했고, 스즈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 두 대에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48]. 현역 은퇴 후 해설자를 하던 곤도 히로시를 2군 투수 코치로 발탁하여 현장 복귀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47].
가와카미 데쓰하루와는 현역 시절 타격왕 경쟁을 벌였고, 감독으로서도 라이벌 관계였다. 요나미네가 1960년 요미우리를 떠나 주니치로 이적한 것은 가와카미가 감독으로 취임하며 자신을 전력 외로 구상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가와카미에 대한 강한 경쟁심을 드러냈다. 주니치 선수들에게 가와카미를 '테츠'라고 부르게 했고[49], 요미우리전에서는 "테츠에게 지지 마!!"라고 외쳤다고 한다. 1974년 가와카미의 요미우리 V10을 저지하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 "드디어 해냈다, 테츠를 해치웠다"며 기뻐했다. 가와카미는 요나미네의 체력 저하와 일본어 능력을 이유로 전력 외 통보와 코치 유임 불가 방침을 밝혔었다[50]. 1980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해임 시, 가와카미가 관여했다는 설에 반발하여 요미우리 코치직을 사임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요미우리 OB회에는 불참했다.
어린 시절 오 사다하루가 고라쿠엔 구장에서 선수들에게 사인을 받으려 할 때, 다른 선수들이 외면했던 고무공에 유일하게 사인을 해준 이가 요나미네였다[51]. 훗날 요나미네는 "눈이 큰 아이가 연구(공)를 내밀고 있었는데 아무도 사인을 안 해줘서 내가 했던 것은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왕정치는 요나미네 사망 당시 "프로에 입문했을 때, 야구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 은인과 같은 분"이라며 애도했다.
1988년 시즌 후 미국으로 돌아갔고, 1998년 하와이 고등학교 체육 협회에 20만달러를 기부했다[62]. 2011년 2월 28일 전립선암으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3]. 사후 열린 작별 모임에는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호시노 센이치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오 사다하루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어 야구 인생이 크게 바뀌었다. 요나미네의 가입은 프로 야구 발전의 이정표 중 하나였다"[64]고 추모했고, 호시노는 "월리(요나미네의 애칭)는 살아 있습니다. 제가 ‘월리이즘’으로 라쿠텐을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다짐했다[65].
5. 가와카미 데쓰하루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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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 사다하루와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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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회 공헌 및 평가
미국식 슬라이딩, 크로스 플레이 등 격렬한 플레이 스타일은 당시 "치마 입은 아가씨 야구"라고 조롱받던 일본 프로 야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는 "슬라이딩 시 발등으로 상대 야수의 글러브를 걷어 올려 공을 떨어뜨린다", "홈 쇄도시 포수의 미트를 쳐내고 어깨로 포수의 왼쪽 어깨를 노려 넘어뜨린다"와 같은 주루 기술[36]과, 현재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타자의 1루 베이스 러닝 방식(코너 안쪽을 발로 차고 90도 각도로 빠르게 슬라이드)을 일본 프로 야구계에 보급했다. 또한, 희생타 대신 자신이 출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드래그 번트나 플라이볼에 대한 다이빙 캐치 등 새로운 전술도 요나미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받는다[37].
처음에는 그의 격렬한 주루 플레이가 "지저분한 플레이"로 여겨져 다른 팀과 관객, 심지어 심판으로부터도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가 전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응원해 준 덕분에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38].
요나미네는 일본 프로 야구계의 주루 의식을 바꾼 선수로서 대릴 스펜서와 함께 자주 언급된다. 가토 료조는 요나미네에 대해 "일본 야구에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전투적인 슬라이딩은 그 한 예이며, 예술적인 타격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라고 평가했다[39]. 가와카미 데쓰하루 역시 "어쨌든 발이 빨랐다. 빠른 것뿐만 아니라, 그전에는 본 적도 없는 머리를 쓴 주루 기술이 대단했다"고 회상하며, "당시 일본 야구는 그저 치고, 던지는 단순한 야구였다. 거기에 그가 미국의 발전된 야구를 들여왔다. 그런 현대 야구에 눈을 뜨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큰 공헌이었다"라고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40].
다만, 1953년 일본 시리즈에서 난카이 호크스를 상대로 기록한 한 시리즈 3개의 도루 실패는 일본 시리즈 사상 최다 기록이며, 2018년 기준으로 1984년 일본 시리즈의 후쿠모토 유타카(한큐 브레이브스), 2018년 일본 시리즈의 다나카 고스케(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함께 최다 타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41].
타격 면에서도 연구에 열심이어서 외국인 선수들이 어려워하는 변화구 공략법을 빠르게 익혔고, 일본 특유의 볼을 끌어당겨 허리를 회전시켜 치는 타법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36]. 예술적인 타격과 뛰어난 주루 및 수비 능력을 갖췄지만, 미식축구 선수 시절 입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 어깨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통산 홈스틸 11회는 역대 1위 기록이며, 일본에 온 첫해인 1951년에는 시즌 최다인 5회의 홈스틸을 기록했다.
미국의 다양한 잡지를 구독하며 MLB 정보에 밝았다. 테드 윌리엄스 등 당대 유명 선수들의 이론을 자신에게 적용했을 뿐 아니라, 팀 동료들에게도 전수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2].
8. 사망
요나미네는 전립선암과 오랜 기간 투병하다가 2011년 2월 28일,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7]
9. 상세 정보
요나미네의 미국식 슬라이딩, 태클 등 격렬한 플레이 스타일은 당시 "치마 입은 아가씨 야구"라고 불리던 일본 프로 야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는 슬라이딩 시 발등으로 상대 야수의 글러브를 걷어 올려 공을 떨어뜨리거나, 홈으로 쇄도할 때 포수의 미트를 쳐내고 어깨로 포수의 왼쪽 어깨를 노려 넘어뜨리는 등의 주루 기술을 선보였다.[36] 또한, 타자가 1루 베이스 안쪽을 밟고 90도 각도로 빠르게 도는 베이스 러닝, 희생타 대신 자신이 출루하려는 드래그 번트, 플라이볼에 대한 다이빙 캐치 등 당시로서는 새로운 전술을 일본 프로 야구계에 보급한 선수로 평가받는다.[37]
처음에는 이러한 격렬한 주루 플레이가 "지저분한 플레이"로 여겨져 다른 팀과 관객, 심지어 심판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가 그를 전적으로 지지해 준 덕분에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38]
요나미네는 대릴 스펜서와 함께 일본 프로 야구계의 주루 의식을 바꾼 대표적인 외국인 선수로 꼽힌다. 가토 료조는 요나미네에 대해 "일본 야구에 혁명을 가져왔다. 전투적인 슬라이딩은 그 한 예이며, 예술적인 타격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라고 평가했다.[39] 가와카미 데쓰하루 역시 "어쨌든 발이 빨랐다. 단순히 빠른 것뿐만 아니라, 그전에는 본 적 없는 머리를 쓴 주루 기술이 대단했다"고 회상하며, "당시 일본 야구는 그저 치고 던지는 단순한 야구였는데, 그가 미국의 발전된 야구를 들여왔다. 그런 현대 야구에 눈을 뜨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큰 공헌이었다"라고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40] 다만, 1953년 난카이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한 시리즈 3개의 도루 실패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는 후쿠모토 유타카, 다나카 고스케와 함께 시리즈 최다 도루 실패 타이기록이다.[41]
타격 면에서도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외국인 선수들이 어려워하는 변화구 공략법을 빠르게 익혔으며, 일본식으로 공을 끌어들여 허리를 돌려 치는 타법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36]
뛰어난 타격과 주루, 수비 능력을 갖췄지만, 미식축구 선수 시절 입은 어깨 부상의 영향으로 송구 능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통산 홈스틸 11회는 역대 1위 기록이며, 일본에 온 첫해인 1951년에는 시즌 최다 홈스틸인 5회를 기록했다.
미국에서 다양한 잡지를 구독하며 MLB의 최신 정보에 밝았다. 테드 윌리엄스 등 당대 유명 선수들의 이론을 습득하여 자신에게 적용했을 뿐 아니라, 팀 동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전수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2]
9. 1. 출신 학교
라하이나루나 고등학교와 월러스 라이더 패링턴 고등학교에 다녔다.[2]9. 2. 선수 경력
요나미네는 미식축구 선수로 먼저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1947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당시 AAFC 소속)에 계약금 1.4만달러로 입단하여 러닝백(하프백)으로 뛰었다.[4][15] 이로써 그는 프로 미식축구 역사상 최초의 일본계 미국인 선수가 되었다[4]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은 월터 아치우). 한 시즌 동안 19번의 캐리로 74야드, 3번의 패스로 40야드를 기록했다. 그러나 오프 시즌 하와이 아마추어 야구 리그에서 입은 왼손목 골절 부상으로 49ers를 떠나게 되었고[1], 이후 하와이안 워리어스에서 뛰던 중 왼쪽 어깨 탈구 부상을 입어 미식축구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15]1950년 야구로 전향하여[16] 마이너 리그 AAA급 샌프란시스코 실스 산하 C급 Salt Lake City Bees|솔트레이크시티 비스eng에 입단했다. 그해 타율 .335(리그 5위)를 기록하며 다음 해 2A 승격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같은 해 오프 시즌, 호놀룰루에서 열린 하와이 선발 대 퍼시픽 리그 선발 경기에 출전하여 일본 프로 야구 선수들의 좋은 대우를 알게 된 후 일본행을 희망하게 되었다.[15]
미일 양국 구단 간의 가교 역할을 한 캐피 하라다의 소개와[17] 실즈 감독 레프티 오도울의 권유로[36] 1951년 시즌 중반인 6월 2일 일본에 도착했다. 미국 국적 선수가 일본 프로 야구에서 뛰는 것은 종전 후 처음이었기에 신중한 검토 끝에, 6월 19일 2년 계약 연봉 100만엔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16] 그는 종전 후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18][15] 입단 전까지 도쿄 시내에서 달리기를 하며 몸을 만들었는데, 특히 황거 달리기를 즐겼다고 한다.[19]
1951년 6월 19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데뷔했다. 7회말 무사 1, 2루 상황에서 감독 미즈하라 시게루의 지시로 대타로 첫 타석에 들어서[20], 스기시타 시게루를 상대로 기습적인 3루 선상 세이프티 번트를 성공시켰다.[60] 다음 날 히로시마 카프와의 경기에서 "7번·좌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4타수 2안타를 기록하며 주전 자리를 꿰찼고, 8월 말부터는 1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그해 9월 12일 국철 스왈로스전에서는 1이닝 3도루(일본 기록[60])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주루 능력을 선보였다. 병살타를 피하기 위한 홈에서의 격렬한 크로스 플레이 등 미국에서 익힌 주루 기술은 당시 일본 야구에 충격을 주었다.[61][21] 하지만 이러한 격렬한 플레이는 "더러운 플레이"로 여겨져 비판받았고, 종전 직후 재일 미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관중들로부터 심한 야유와 이물질 투척을 당하기도 했다.[21] 또한 이동 시 3등 열차 칸 이용, 일본식 여관 숙박 등 미국 시절과 다른 환경과[22] 무더운 여름 날씨, 식사(특히 날달걀밥)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요나미네는 일본식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했고, 팀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시즌 후 지바 시게루는 그의 노력을 인정하며 일본 잔류를 권유하기도 했다.[23] 1951년 시즌은 규정 타석 미달이었지만 타율 .354, 26도루를 기록했다.
이듬해 1952년부터 1960년까지 8년 연속 규정 타석을 채웠다. 1952년에는 타율 .344(리그 2위), 38도루(리그 2위), 163안타(리그 1위), 104득점(리그 1위)을 기록했고,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하여 이후 8년 연속 선정되었다. 맹타상 22회는 당시 일본 신기록이었다. 이 해부터 지바 시게루와 함께 리그 최고의 1, 2번 타자 콤비를 이루었으며[28], 두 선수 모두 4할이 넘는 출루율을 기록했다(요나미네 .405, 지바 .412).
1953년에는 아오타 노보루의 이적으로 중견수를 맡아 타율 .307(리그 5위)을 기록했다. 1954년에는 와타나베 히로유키, 니시자와 미치오와 치열한 경쟁 끝에 타율 .361로 생애 첫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24] 또한 172안타, 69사사구, 출루율.441, 93득점 모두 리그 1위를 기록하며 최고의 리드오프로 활약했다. 1955년에는 부상으로 20경기에 결장하며 타율 .311(리그 4위)에 그쳤다.
1956년 3월 21일 국철과의 개막전에서 구단 사상 최초로 첫 회 선두 타자 홈런을 기록했다(이후 시미즈 다카유키(2003년), 다카하시 요시노부(2007년)가 기록). 그해 타율 .338로 두 번째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고, 연봉은 팀 내 최고인 600만엔에 달했다.[25] 1957년에는 감기로 스프링 캠프 합류가 늦어졌으나[25], 시즌에 돌입하자 타율 .343으로 2년 연속이자 통산 3번째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고, 생애 첫 MVP로 선정되었다.
1958년부터 다시 좌익수로 뛰었으며, 5월 25일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1000안타를 달성했다. 이는 793경기 만의 기록으로 당시 NPB 최단 경기 기록이었다(1989년 부머 웰즈가 781경기로 경신).[52] 1958년(.293)과 1959년(.287) 모두 리그 3위의 타율을 기록했다.
1960년, 35세 시즌에 타율 .228로 성적이 급락했다. 시즌 후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감독으로 부임하자 요나미네는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다. 성적 하락과 함께 일본어 실력 부족도 이유로 거론되었다. 요미우리는 은퇴 시 공로금 100만엔, 타 구단 이적 시 50만엔를 제시했다. 현역 연장을 원했던 요나미네는 50만엔를 수락했지만, 마침 A급 10년 제도 자격을 얻었기에 이를 활용해 협상하려 했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그의 요청을 무시하고 A급 선수 이적 협상 해금일(12월 16일) 전인 12월 3일에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했다. 요나미네는 주니치 드래건스와 킨테츠 버팔로의 제안을 받았고, 요미우리와 대결할 수 있다는 이유로 12월 7일 연봉 1.5만달러에 주니치 입단을 결정했다.[26][27]
요미우리 시절 베스트 나인 7회 수상 등 뛰어난 활약으로 제2기 요미우리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1번 요나미네, 2번 지바 시게루는 리그 최고의 테이블 세터였으며[28], 4번 타자 가와카미 데쓰하루와는 수위 타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 관계였다.
1961년 주니치 이적 후, 4월 8일 친정팀 요미우리를 상대로 한 개막전에서 9회 결승 홈런을 치는 등 초반 활약했지만, 점차 기량이 쇠퇴하여 7월 하순부터 주전에서 밀려났다. 결국 시즌 홈런은 개막전 1개, 타율 .178에 그쳤다. 1962년에는 단 3안타만을 기록하고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2월 26일 주니치의 코치로 임명되었다.
요나미네는 다재다능한 외야수였으며, 유연한 타격 스타일과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로 명성을 떨쳤다.[1]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4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개인적으로는 1957년 센트럴 리그 MVP, 7년 연속(1952–58) 베스트 나인, 8년 연속 올스타 선정, 3번의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통산 홈 스틸 11회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위 기록이다.
그의 미국식 슬라이딩, 태클 등 격렬한 플레이 스타일은 당시 "치마 입은 아가씨 야구"라 불리던 일본 프로 야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발등으로 야수의 글러브를 쳐 공을 떨어뜨리거나, 홈 쇄도 시 포수의 미트를 쳐내며 충돌하는 주루 기술[36], 타자가 1루 베이스 안쪽을 밟고 빠르게 도는 베이스 러닝, 드래그 번트, 플라이볼에 대한 다이빙 캐치 등은 요나미네를 통해 일본 야구에 보급되었다.[37] 처음에는 거친 플레이로 비판받았지만,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지지 덕분에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38] 가토 료조는 "일본 야구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평가했으며[39],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빠른 발과 영리한 주루 기술로 현대 야구를 일본에 도입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칭찬했다.[40] 다만, 195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 시리즈 3도루 실패라는 불명예 기록도 가지고 있다(2018년 현재 후쿠모토 유타카, 다나카 고스케와 타이 기록).[41]
타격 면에서도 연구를 거듭하여 외국인 선수들이 어려워하는 변화구 대처 능력을 키웠고, 일본식 타격 기술을 습득했다.[36] 미식축구 시절 어깨 부상으로 송구 능력은 약점으로 꼽혔다. 미국 잡지를 통해 MLB의 최신 정보를 습득하고 테드 윌리엄스 등의 이론을 자신에게 적용했으며, 팀 동료들에게도 전수하며 팀 전력 향상에 기여했다.[42]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1994년,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16]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 실패 | 볼넷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51년 | 요미우리 | 54 | 213 | 181 | 47 | 64 | 17 | 5 | 1 | 94 | 26 | 26 | 4 | 28 | 1 | 18 | 3 | .354 | .443 | .519 | .962 |
1952년 | 116 | 533 | 474 | 104 | 163 | 33 | 5 | 10 | 236 | 53 | 38 | 11 | 47 | 2 | 38 | 8 | .344 | .405 | .498 | .903 | |
1953년 | 104 | 437 | 365 | 58 | 112 | 24 | 2 | 6 | 158 | 54 | 13 | 5 | 57 | 3 | 33 | 9 | .307 | .405 | .433 | .838 | |
1954년 | 125 | 564 | 477 | 93 | 172 | 40 | 6 | 10 | 254 | 69 | 20 | 9 | 69 | 2 | 56 | 5 | .361 | .441 | .532 | .974 | |
1955년 | 107 | 487 | 424 | 68 | 132 | 22 | 2 | 13 | 197 | 65 | 10 | 3 | 49 | 1 | 66 | 5 | .311 | .382 | .465 | .846 | |
1956년 | 123 | 529 | 452 | 86 | 153 | 20 | 4 | 13 | 220 | 47 | 25 | 9 | 63 | 2 | 72 | 4 | .338 | .420 | .487 | .907 | |
1957년 | 126 | 515 | 467 | 55 | 160 | 20 | 7 | 12 | 230 | 48 | 10 | 7 | 35 | 2 | 62 | 9 | .343 | .386 | .493 | .879 | |
1958년 | 128 | 532 | 467 | 64 | 137 | 21 | 3 | 8 | 188 | 58 | 8 | 3 | 51 | 0 | 77 | 9 | .293 | .360 | .403 | .763 | |
1959년 | 117 | 490 | 432 | 67 | 124 | 16 | 8 | 3 | 165 | 26 | 6 | 2 | 49 | 3 | 52 | 7 | .287 | .363 | .382 | .745 | |
1960년 | 126 | 454 | 399 | 48 | 91 | 19 | 3 | 5 | 131 | 26 | 6 | 2 | 43 | 3 | 55 | 5 | .228 | .307 | .328 | .635 | |
1961년 | 주니치 | 76 | 184 | 146 | 17 | 26 | 6 | 0 | 1 | 35 | 9 | 1 | 3 | 28 | 1 | 24 | 4 | .178 | .313 | .240 | .552 |
1962년 | 17 | 17 | 14 | 0 | 3 | 0 | 0 | 0 | 3 | 1 | 0 | 0 | 3 | 0 | 0 | 0 | .214 | .353 | .214 | .567 | |
통산:12년 | 1219 | 4955 | 4298 | 707 | 1337 | 238 | 45 | 82 | 1911 | 482 | 163 | 58 | 522 | 20 | 553 | 68 | .311 | .387 | .445 | .831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9.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고, 1967년부터 1969년까지는 도쿄 오리온스의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1970년부터 1971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스 1군 수석 코치를 지내다가 1972년에 1군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감독 재임 중이던 1974년에는 친정 팀인 요미우리의 10년 연속 리그 우승을 저지하고[60], 주니치 드래곤스에 1954년 이후 20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안겼다. 1977년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이후에도 여러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1978년부터 1979년까지는 친정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돌아가 2군 외야 수비·주루 코치를 맡았고, 1980년에는 요미우리 1군 타격 코치를 역임했다. 1981년부터 1982년까지는 난카이 호크스에서 1군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로 활동했으며, 1983년부터 1984년까지는 세이부 라이온스 1군 타격 코치를,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닛폰햄 파이터스의 1군 수석 코치를 맡았다.
약 30년에 걸쳐 여러 구단을 거치며 쌓은 풍부한 지도 경험은 야구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외국 태생이라 방송 해설 활동에는 어려움을 느꼈지만, 오랜 기간 지도자로서 활동하며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이는 일본 야구계에서 이례적인 경우로 평가받는다. 1987년 오프 시즌에는 후지 TV 계열의 《프로 야구 뉴스》 기획 ‘특별 출연 시상식’에 출연하여 나카이 미호에게서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1988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2008년에는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팀인 나고야 80 D'sers에 코치 겸 파트타임 선수로 합류하기도 했다.[6]
9. 4.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수위 타자: 3회 (1954년, 1956년, 1957년) ※ 2년 연속 수상은 센트럴 리그 최초
- 최다 출루수: 3회 (1954년, 1956년, 1957년)
- 최다 안타 (당시 연맹 표창 없음): 3회 (1952년, 1954년, 1957년)
- 센트럴 리그 MVP: 1회 (1957년) ※ 외국인 선수로는 전후 최초 수상
- 베스트 나인: 7회 (외야수 부문: 1952년 ~ 1958년)
- 일본 시리즈 기술상: 1회 (1953년)
- 일본 시리즈 최고 타격상: 1회 (1952년)
- 일본 시리즈 홈런왕상: 1회 (1953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헌액 (1994년) ※ 미국인 최초[16]
- 혼간지 하와이 별원 선정 하와이 인간 주보 (Living Treasures of Hawaiieng) 표창 (2007년)
9. 5. 개인 기록
- 센트럴 리그 MVP: 1회 (1957년)
- 베스트 나인: 7회 (1952년 ~ 1958년) ※ 외야수 부문
- 올스타전 출장: 11회 (1952년 ~ 1961년, 1964년) ※ 1964년은 감독 추천
- 수위 타자: 3회 (1954년, 1956년, 1957년) ※ 2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최초
- 최다 안타 (당시 타이틀은 아님): 3회 (1952년, 1954년, 1957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4년)
- 홈스틸 통산 11회 (역대 1위)
- 시즌 최다 홈스틸: 5회 (1951년)
=== 연도별 타격 성적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 실패 | 희생타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
1951 | 요미우리 자이언츠 | 54 | 213 | 181 | 47 | 64 | 17 | 5 | 1 | 94 | 26 | 26 | 4 | 3 | -- | 28 | -- | 1 | 18 | 3 | .354 | .443 | .519 |
1952 | 116 | 533 | 474 | 104 | 163 | 33 | 5 | 10 | 236 | 53 | 38 | 11 | 8 | -- | 47 | -- | 2 | 38 | 8 | .344 | .405 | .498 | |
1953 | 104 | 437 | 365 | 58 | 112 | 24 | 2 | 6 | 158 | 54 | 13 | 5 | 10 | -- | 57 | -- | 3 | 33 | 9 | .307 | .405 | .433 | |
1954 | 125 | 564 | 477 | 93 | 172 | 40 | 6 | 10 | 254 | 69 | 20 | 9 | 10 | 3 | 69 | -- | 2 | 56 | 5 | .361 | .441 | .532 | |
1955 | 107 | 487 | 424 | 68 | 132 | 22 | 2 | 13 | 197 | 65 | 10 | 3 | 9 | 3 | 49 | 3 | 1 | 66 | 5 | .311 | .382 | .465 | |
1956 | 123 | 529 | 452 | 86 | 153 | 20 | 4 | 13 | 220 | 47 | 25 | 9 | 9 | 2 | 63 | 7 | 2 | 72 | 4 | .338 | .420 | .487 | |
1957 | 126 | 515 | 467 | 55 | 160 | 20 | 7 | 12 | 230 | 48 | 10 | 7 | 3 | 6 | 35 | 3 | 2 | 62 | 9 | .343 | .386 | .493 | |
1958 | 128 | 532 | 467 | 64 | 137 | 21 | 3 | 8 | 188 | 58 | 8 | 3 | 7 | 4 | 51 | 1 | 0 | 77 | 9 | .293 | .360 | .403 | |
1959 | 117 | 490 | 432 | 67 | 124 | 16 | 8 | 3 | 165 | 26 | 6 | 2 | 4 | 1 | 49 | 0 | 3 | 52 | 7 | .287 | .363 | .382 | |
1960 | 126 | 454 | 399 | 48 | 91 | 19 | 3 | 5 | 131 | 26 | 6 | 2 | 8 | 1 | 43 | 4 | 3 | 55 | 5 | .228 | .307 | .328 | |
1961 | 주니치 드래건스 | 76 | 184 | 146 | 17 | 26 | 6 | 0 | 1 | 35 | 9 | 1 | 3 | 8 | 1 | 28 | 1 | 1 | 24 | 4 | .178 | .313 | .240 |
1962 | 17 | 17 | 14 | 0 | 3 | 0 | 0 | 0 | 3 | 1 | 0 | 0 | 0 | 0 | 3 | 0 | 0 | 0 | 0 | .214 | .353 | .214 | |
통산: 12년 | 1219 | 4955 | 4298 | 707 | 1337 | 238 | 45 | 82 | 1911 | 482 | 163 | 58 | 79 | 21 | 522 | 19 | 20 | 553 | 68 | .311 | .387 | .445 |
- 연도 옆의 '''굵은 글씨'''는 해당 연도 리그 최고 기록
=== 감독 시절 연도별 성적 ===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게임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방어율 | 나이 |
---|---|---|---|---|---|---|---|---|---|---|---|---|
1972년 | 주니치 드래건스 | 3위 | 130 | 67 | 59 | 4 | .532 | 7.0 | 123 | .232 | 3.29 | 47세 |
1973년 | 3위 | 130 | 64 | 61 | 5 | .512 | 1.5 | 108 | .242 | 2.98 | 48세 | |
1974년 | 1위 | 130 | 70 | 49 | 11 | .588 | - | 150 | .264 | 3.75 | 49세 | |
1975년 | 2위 | 130 | 69 | 53 | 8 | .566 | 4.5 | 133 | .271 | 3.18 | 50세 | |
1976년 | 4위 | 130 | 54 | 66 | 10 | .450 | 21.5 | 138 | .266 | 4.50 | 51세 | |
1977년 | 3위 | 130 | 64 | 61 | 5 | .512 | 15.5 | 176 | .275 | 4.38 | 52세 | |
통산: 6년 | 780 | 388 | 349 | 43 | .526 | A 클래스 5회, B 클래스 1회 |
※1972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 체제
=== 미식축구 선수 시절 기록 ===
연도 | 팀 | 경기 | 리시빙 | 러싱 | 펌블 | ||||||||||
---|---|---|---|---|---|---|---|---|---|---|---|---|---|---|---|
출장 | 선발 출장 | 캐치 | 야드 | 평균 야드 | 최장 리시빙 | 터치다운 | 시도 | 야드 | 평균 야드 | 최장 러싱 | TD | 펌블 수 | 로스트 | ||
1947 |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 12 | 3 | 3 | 40 | 13.3 | - | 0 | 19 | 74 | 6.2 | - | 0 | 0 | 0 |
NFL: 1년 | 12 | 3 | 3 | 40 | 13.3 | - | 0 | 19 | 74 | 6.2 | - | 0 | 0 | 0 |
- 1947년 시즌 종료 시점 기준
9. 6. 등번호
(작성할 내용 없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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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y Yonamine, 85, Dies; Changed Japanese Base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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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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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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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MING UP TO WALLY : Yonamine, First American to Play in Japan, Was Not an Instant Hit
https://www.la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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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y Yonamine: Sportsman who fought prejudice in two sports and in two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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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sei Jackie Robinson' dies at age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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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eball America 2020 Prospect Handbook Digital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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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ah Yonamine Minor Leagues Statistics &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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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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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세9인! 역대 외국인 감독의 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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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베이스볼ONLINE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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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野球変えた「ウォーリー」与那嶺要氏、死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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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IBM、本格復活へ提案力勝負 社長に与那嶺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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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者たちへのエール、逆境を未来へのチャンスと考えて 安田秀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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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성추락, 일계인 첫 NFL 선수 “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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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첫 외국인 선수, 요나미네 요 씨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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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리」 요나미네 씨 사망 주루에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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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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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기록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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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야구 트레이드 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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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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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구 바꾼 「워리」 요나미네 요 씨,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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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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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 후지모토 감독이 신인 감독 첫 개막 7연승! 야나기타탄의 1점을 센가, 모리가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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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스포츠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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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 매거진 별책 신록호(2023년 5월호:문전박광과 남해 호크스), 펀치 사토의 남자의 등!(75)게스트◎고야나기 히데키[전 남해・다이에], 7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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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베이스볼
201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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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미네 요 씨 사망, 85세=전 거인 외야수, 주니치 감독-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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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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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뢰의 박수로 요나미네 씨와 작별…호시노 감독 「좋은 팀 만들겠습니다」
https://www.sponichi[...]
스포츠 닛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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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노 감독 「워리즘」으로 호랑이 사냥이다
https://www.nikkan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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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プロ野球 歴代名選手名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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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助っ人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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球界に悲しみ…長嶋さん「恩人です」王さん「残念」
https://www.spon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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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上氏 与那嶺氏の死を悼む「寂しい気持ち」
https://www.spon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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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率.143でMVP 鷹・甲斐が盗塁を刺し続け、多くの記録が刻まれた日本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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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球太郎No.053 2024ドラフト総決算&2025大展望号 (バンブームッ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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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코치로 현장 복귀 / 권토 히로시 자서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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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베이스볼]]2024년 12월 16일호, 레전드를 방문하다, 쇼와시대의 유언, 스즈키 타카마사, 65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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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野球変えた「ウォーリー」与那嶺要氏、死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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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ォーリー」与那嶺氏死去 走塁に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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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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与那嶺要氏死去、85歳=元巨人外野手、中日監督-プロ野球
지지 통신
201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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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雷の拍手で与那嶺氏と別れ…星野監督「良いチームつくります」
http://www.sponichi.[...]
스포츠 닛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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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野監督「ウォーリーイズム」で虎狩り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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