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바야시 다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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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1908년 하와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으로,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 코치, 야구 해설가,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맥킨리 고등학교 시절 야구를 시작하여 호세이 대학에서 활약했으며, 1936년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45세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1939년 다승, 승률,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고, 1944년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MVP를 수상했다.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은퇴 후에는 지도자, 기업인, 해설가로 활동했다. 1964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65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2011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와카바야시 다다시 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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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바야시 다다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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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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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와카바야시 다다시 (若林 忠志) |
영어 표기 | Tadashi Henry Wakabayashi |
출생일 | 1908년 3월 1일 |
출생지 |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 와히아와 |
사망일 | 1965년 3월 5일 |
국적 | 일본 |
신장 | 175cm |
체중 | 78kg |
포지션 | 투수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선수 경력 | |
아마추어 | 구제 혼모쿠 중학교 구제 호세이 대학 콜롬비아 |
프로 | 오사카 타이거스/한신군/오사카 타이거스 (1936년 - 1944년, 1946년 - 1949년) 마이니치 오리온스 (1950년 - 1953년) |
첫 출장 | 1936년 4월 30일 |
마지막 출장 | 1953년 10월 4일 |
감독 및 코치 경력 | |
감독 | 한신/오사카 타이거스 (1942년 - 1944년, 1947년 - 1949년) 마이니치 오리온스 (1953년) 톰보 유니온스 (1955년) 다이요 웨일스 (1961년) 니시테츠 라이온스 (1963년 - 1964년) |
통산 기록 (NPB) | |
승-패 | 237승 144패 |
평균 자책점 | 1.99 |
탈삼진 | 1000 |
수상 경력 | |
일본 시리즈 우승 | 1950년 |
일본 야구 리그 우승 | 1937년 (가을) 1938년 (봄) 1947년 |
일본 야구 리그 MVP | 1944년 1947년 |
명예의 전당 | |
헌액 연도 | 1964년 |
유형 | 경기자 부문 |
2. 어린 시절 및 아마추어 야구 경력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1908년 3월 1일 미국 하와이 준주(Territory of Hawaii, 현: 하와이주)·오아후섬 와히아와에서 9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3][4] 아버지 대에 히로시마현 아시나군 도테촌(현 후쿠야마시)에서 하와이로 이민을 왔으며, 부모 모두 히로시마현 아시나군 출신의 일본인이었다.[5][6] 부모는 일본을 주요 거래 상대로 하는 잡화 무역상을 운영하는 한편, 파인애플 통조림 회사를 경영하는 등 사업에 성공하여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와카바야시는 미국과 일본의 이중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1928년에 일본 국적을 일단 포기했다. 이후 1941년 일본계 외국인에게 퇴거 명령이 내려지자 일본 국적을 회복하고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 당시 그의 애칭은 '''보조'''(BOZO)였는데, 이는 절에 맡겨졌던 삭발 시절의 지주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던 와카바야시의 외관에서 '코 밑의 수염'을 뜻하는 스페인어 'bozo'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맥킨리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식축구에 열심이었지만, 경기 중 머리를 차여 2개월 간의 큰 부상을 입었다. 이후 부모님으로부터 미식축구를 금지당하고, 다음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원래는 포수였지만, 맥킨리 고등학교 1학년 선배인 다나카 요시오에게는 미치지 못해, 다나카로부터 투수 전향을 권유받아, 상단에서 던져 내리는 강속구를 무기로 하는 에이스가 되었다.
2. 1. 하와이 출생 및 성장 배경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1908년 3월 1일 미국 하와이 준주(현 하와이주) 오아후섬 와히아와에서 아홉 남매 중 다섯째, 삼남으로 태어났다.[3][4] 아버지 대에 히로시마현 아시나 군 도데 촌(현재의 후쿠야마시)에서 하와이로 이민을 갔으며, 부모는 모두 히로시마 현 아시나 군 출신의 일본인이었다.[5][6] 부모는 일본을 주요 거래 상대로 하는 잡화 무역상을 운영하고 파인애플 통조림 회사를 경영하는 등 사업에 성공하여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국적은 미국과 일본의 이중 국적이었으나 1928년에 일본 국적을 포기했다. 이후 일본계 외국인에게 퇴거 명령이 내려진 1941년에 일본 국적을 회복하면서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 애칭은 '''보조'''(BOZO)였다. 맥킨리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식축구를 하다가 머리를 다쳐 2개월 간의 큰 부상을 입었고, 이후 부모의 반대로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야구를 시작했다. 원래 포수였으나, 맥킨리 고등학교 1학년 때 다나카 요시오의 권유로 투수로 전향하여 강속구를 던지는 에이스가 되었다.
2. 2. 이중 국적과 '보조'라는 별명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1908년 3월 1일 미국 하와이 준주(현 하와이주) 오아후섬 와히아와에서 9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3][4] 아버지 대에 히로시마현 아시나군 토테촌(현 후쿠야마시)에서 하와이로 이민을 왔으며, 부모 모두 히로시마현 아시나군 출신의 일본인이었다.[5][6] 부모는 일본을 주요 거래 상대로 하는 잡화 무역상을 운영하고 파인애플 통조림 회사를 경영하는 등 사업에 성공하여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와카바야시는 미국과 일본의 이중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1928년에 일본 국적을 일단 포기했다. 이후 1941년 일본계 외국인에게 퇴거 명령이 내려지자 일본 국적을 회복하고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 당시 그의 애칭은 '''보조'''(BOZO)였는데, 이는 절에 맡겨졌던 삭발 시절의 지주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나이에 비해 늙어 보였던 와카바야시의 외관에서 '코 밑의 수염'을 뜻하는 스페인어 'bozo'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원래 포수였으나, 맥킨리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다나카 요시오와 대적해 다나카로부터 투수 전향을 권유받고 상단에서 내리꽂는 강속구를 무기로 하는 에이스로 변신했다.
2. 3. 맥킨리 고등학교 시절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윌리엄 매킨리 고등학교 시절 야구팀의 에이스 투수였다. 1927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실업 팀에 선발되어 일본을 방문,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팀들과 친선 경기를 가졌다.[7] 특히 호세이 대학이 와카바야시 영입에 적극적이었으나,[7] 다른 학교들이 부정 전술 의혹을 제기하여 요코하마의 구제 혼모쿠 중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했다.[8] 1929년 3월 졸업 후, 4월에 호세이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1930년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에서 호세이의 첫 우승을 이끌었지만, 1년차에는 하와이와 일본 야구의 차이로 고전했다.[7] 1931년 가을, 어깨와 팔꿈치 부상으로 사이드암으로 전향하여,[7] 변화구와 코너 워크를 연마했다. 1932년 4월 본과 경제학부에 진학하여 그 해 가을 리그에서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1933년 1월 15일 학생 결혼을 했고, 1934년에는 15경기 전 경기에 등판하여 11승 3패 1무의 성적으로 팀을 세 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7] 리그 통산 87경기에 등판하여 43승(리그 첫 40승 돌파) 28패를 기록했다.[10] 가리타 히사노리에게 숨겨진 공을 가르친 것도 대학 시절이었다.[11]
2. 4. 일본 방문과 호세이 대학 입학
1927년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 실업 팀에 선발되어 친선 경기를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일본에는 아직 프로 야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이 상대를 맡았다. 와카바야시의 존재는 금방 화제가 되어 도쿄 6대학 중 호세이 대학에서 열렬한 구애를 보냈다.[7] 와카바야시는 부모의 모국인 일본에 대해 경애심을 품고 있어 호세이 대학 입학이 결정된 듯 보였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려면 일본의 구제 중학교를 졸업해야 했기 때문에, 1927년 7월 고등학교 졸업을 기다리며 다시 일본을 방문했고 9월 요코하마시의 구제 혼모쿠 중학교(현재의 요코하마 고등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학하게 되었다.[8] AAA의 샌프란시스코 실스에서도 권유가 있었다.[9]1929년 3월에 요코하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호세이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당시 도쿄 6대학 리그는 와세다, 게이오의 2강 체제였고, 호세이는 약팀에 속했다. 와카바야시의 오른팔에 모든 것이 걸려있었지만, 1년째에는 하와이와 일본 야구의 차이에 당황해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었다. 1930년부터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해 추계 리그에서는 호세이 대학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3학년 시절인 1931년 가을, 어깨와 팔꿈치를 다쳐 사이드스로로 전향해야 했다. 그 결과 강속구를 잃고 변화구와 코너 워크를 연마하게 되었다. 1932년 4월 본과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같은 해 가을 리그전에서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1933년 1월 15일, 도호쿠의 부농 혼마가 출신인 아내와 학생 결혼을 하고, 하라주쿠 온다에 거처를 마련했다. 1934년에는 리그 경기 방식이 변경되었고, 호세이는 주력 선수들이 대부분 졸업하며 전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하지만 와카바야시가 15경기 전 경기에 등판해 11승 3패 1무의 개인 성적이 곧 팀 성적이 되는 전무후무한 활약을 보이며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리그 통산 최다인 87경기에 등판해 43승(역대 4위, 리그 첫 40승 고지 돌파)[10] 28패를 기록했다. 가리타 히사노리에게 숨겨진 공을 가르친 것이 대학 시절의 와카바야시였다고 한다.[11] 같은 해, 동교 체육회 미식축구부의 창설에 관여했다.[12]
2. 5. 호세이 대학 야구부 시절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1927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실업 팀에 선발되어 일본을 방문, 도쿄 6대학 야구 연맹 팀들과 친선 경기를 가졌다. 호세이 대학은 와카바야시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려 했으나, 다른 학교들의 반발로 인해 와카바야시는 요코하마시의 구제 혼모쿠 중학교에 편입했다.[8] 1929년 3월 중학교를 졸업하고 4월 호세이 대학 예과에 입학했다.[9]당시 도쿄 6대학 리그는 와세다 대학과 게이오 대학이 강세를 보였고, 호세이는 약팀이었다. 와카바야시는 1년 동안 일본 야구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1930년 추계 리그에서 호세이 대학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1931년 가을, 어깨와 팔꿈치 부상으로 사이드암으로 전향, 변화구와 코너 워크를 연마했다.[11] 1932년 4월 본과 경제학부에 진학하여[12] 추계 리그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1933년 1월 15일, 학생 결혼을 했다.[12] 1934년에는 15경기 전 경기에 등판, 11승 3패 1무의 성적으로 팀을 세 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 리그 통산 87경기(최다 출장), 43승(4위, 리그 첫 40승 달성) 28패를 기록했다.[10] 가리타 히사노리에게 숨겨진 공을 가르친 것도 와카바야시였다.[11]
3. 프로 야구 경력
3. 1. 닛폰 콜롬비아 시절
컬럼비아 뮤직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하여 회사 업무와 회사 야구팀 선수로 활동했다.[1] 1935년 7월, '''도쿄 교진군''' 야구팀이 미국 투어를 마치고 귀국했고, 한신 전기 철도를 포함한 여러 회사가 참여하여 일본 최초의 프로 야구 리그를 창설했다.[1]3. 2. 프로 야구 입단 과정
컬럼비아 뮤직 엔터테인먼트에서 회사원으로 근무하며 야구팀 선수로 활동하던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1935년 7월, 도쿄 교진군의 미국 투어 이후 일본 최초의 프로 야구 리그 창설 움직임에 참여하게 되었다.[1] 여러 회사의 프로팀 입단 제안을 받은 그는 1936년 1월 오사카 타이거스(현 한신 타이거스)와 계약했다.[1]3. 3.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36-1944, 1946-1949)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타이거스 입단 당시 이미 28세로, 45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1리그 시대 기교파 투수의 대표적인 선수였다.[1] '칠색의 변화구'를 던진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직구와 커브를 중심으로 제구력과 완급 조절을 통해 타자를 상대했다.[14] 특히 낮은 곳에서 변화하는 공을 이용해 오랫동안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피홈런이 매우 적었는데, 3557이닝 동안 69개(9이닝당 0.175개)만을 허용했다.1936년 10승, 1937년 17승을 거두었으나, 니시무라 유키오, 미소노오 다카오 등 젊은 투수들에 비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1938년에는 어깨 통증으로 춘계 시즌에 결장했으나, 추계 시즌 막판에 복귀했다. 1939년에는 개인 최다인 28승을 기록하며 승률 및 방어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후 6차례나 20승 이상을 기록하며 빅토르 스타루힌, 노구치 지로와 함께 전쟁 전후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로 활약했다.
1942년부터 선수 겸임 감독을 맡았다. 1944년에는 35경기 중 31경기에 등판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다승, 승률, 방어율 3관왕과 MVP를 수상했다. 한신 팀 승리 27승 중 80%가 넘는 22승을 혼자 책임졌으며, 이는 2위 팀 요미우리의 19승보다 많은 기록이었다. 36세 시즌 다승왕은 2005년 시모야나기 쓰요시와 함께 역대 최고령 타이 기록이다. 또한 14경기 연속 등판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종전 후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수산 회사 사장을 역임하던 중, 프로 야구 재개와 함께 복귀 요청을 받았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후지무라 후미오의 상황에 감동받아 1947년 감독 겸 선수로 복귀했다. 그 해 11월 3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구원승으로 빅토르 스타루힌에 이어 통산 200승을 달성했고, 26승을 올려 팀 우승에 기여하며 두 번째 MVP를 수상했다. 39세에 20승 이상을 기록한 것은 최고령 기록이다.
1948년에는 잡지 '볼 프렌드'를 창간하고 '타이거스 어린이회'를 설립하는 등 소년 야구 발전과 한신 팬 확보에도 힘썼다.[16][17] 1949년에는 41세의 나이로 15승을 기록했다. 한신에서 13년간 501경기에 등판하여 233승을 올렸으며, 이는 현재까지 한신 투수 최다승 기록이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는 조감독, 1942년부터 1944년, 1947년부터 1949년까지 감독을 역임했다.
1950년 2리그 분열에 따라 퍼시픽 리그의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했다. 그는 양대 리그 주의자였고, 프로 야구 재편 문제에서 한신과 마이니치를 중심으로 하는 새 리그 설립을 지지했으나, 한신이 요미우리와 같은 리그에 남기로 하면서 프런트와 대립하여 이적하게 되었다. 벳토 가오루, 도이가키 다케시, 고 쇼세이도 와카바야시와 함께 이적하여 한신은 전력 약화를 겪었고, 와카바야시는 배신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18] 그러나 와카바야시는 2리그 제도의 확립에 기여하고 싶다는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19]
3. 4. 마이니치 오리온스 이적 (1950-1953)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1950년 2리그 분열에 따라 퍼시픽 리그의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했다. 그는 이전부터 양대 리그 주의자였으며, 1949년부터 시작된 프로 야구 재편 문제에서 한신과 마이니치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리그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한신이 마지막에 요미우리와 같은 리그에 소속되는 것으로 선회하면서 프런트와 대립이 심화되었고, 결국 마이니치로 이적하게 되었다. 벳토 가오루, 도이가키 다케시, 고 쇼세이도 와카바야시와 함께 이적하여 한신의 전력 약화를 초래했고, 한신 측에서는 이들을 배신자로 취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와카바야시는 양대 리그 확립에 기여하고 싶다는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이미 42세가 되어 선수로서 풀 시즌을 소화할 여력은 없었지만, 1950년 11월 12일에 열린 긴테쓰 버펄로스 전에서는 당시 최고령 완봉승을 거두었다. 같은 해 열린 제 1회 일본 시리즈에서 1차전에 자원 등판하여 노련한 투구로 승리 투수가 되며 마이니치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6차전에서는 2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그 경기에서 2홈런을 기록했던 이와모토 요시유키를 무사 만루에서 고의 사구로 거르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만루 고의 사구였다.
1951년에는 무승에 그쳤고, 1952년에는 등판 기회가 없어 은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1953년에는 2경기에 등판했는데, 이는 통산 탈삼진 수가 999개였기 때문에 1000개를 채우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1패와 8자책점을 기록하고 1개의 탈삼진을 추가한 뒤 공식적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마이니치 시절에도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지만 1950년부터 1952년에는 총감독인 유아사 요시오가 실제 지휘를 맡고 있었고 와카바야시는 코치에 불과했다. 또한 1952년은 헤이와다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시즌 도중에 2군 감독으로 강등되었다. 1954년에는 마이니치 영업 담당 이사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은퇴하고 다카하시 유니온스의 코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팀은 1년 만에 기록적인 패배를 기록하며 1년 만에 퇴단했다. 이후 일단 프로 야구와 거리를 두며 '일본 펩시'의 사장과 미국의 TV영화 '로하이드' 등을 수입했던 'PCA 재팬' 일본 지사장에게 발탁되었다.
1961년에 다이요 웨일스의 2군 비상군 투수 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1963년에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수석 코치로 취임해 와코 다다오, 하타 다카유키, 이노우에 요시오 등의 계투진이 잘 어우러지는 방법을 구상해 이 시즌 기적의 역전 우승을 이끌어 냈다. 토니 로이, 짐 버마, 조지 윌슨 등 3명의 외국인 선수를 니시테츠에 소개했다.[21] 또한, 다나카 츠토무, 아베 카즈하루, 와카오 타다오 등 젊은 투수진을 지도하여 오랫동안 이나오 카즈히사 한 명에게 의존했던 니시테츠 투수진의 재건을 도모했다.
1964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그러나 11월에 말기 위암이 발견되어 동년을 마지막으로 퇴단했다. 당시에는 부인의 의향으로 부인과 당시 니시테쓰의 감독이었던 나카니시 후토시 이외에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팀 부진의 책임을 와카바야시 한 사람에게만 돌렸다'라며 니시테쓰 구단과 나카니시가 비난을 받았다. 1965년 3월 5일 사망했다.[22] 향년 57세. 프로 야구장이 열렸다. "최후까지 병상에서 현장 복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고 나카니시가 후에 밝히기도 했다.
4. 1. 지도자 경력
마이니치 시절에도 감독을 겸임했지만 1950년부터 1952년에는 총감독인 유아사 요시오가 실제 지휘를 맡았고 와카바야시는 코치에 불과했다.[21] 또한 1952년에는 헤이와다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시즌 도중에 2군 감독으로 강등되었다. 1954년에는 마이니치 영업 담당 이사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은퇴하고 톰보 유니온스의 코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팀은 1년 만에 기록적인 패배를 기록하며 1년 만에 퇴단했다. 이후 프로 야구와 거리를 두며 '일본 펩시'의 사장과 미국의 TV영화 '로하이드' 등을 수입했던 'PCA 재팬' 일본 지사장에게 발탁되었다. 그 곁에서 마이니치 방송(MBS)의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했다.1961년에 다이요 웨일스의 2군 비상군 투수 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21] 1963년에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수석 코치로 취임해 와코 다다오, 하타 다카유키, 이노우에 요시오 등의 계투진이 잘 어우러지는 방법을 구상해 이 시즌 기적의 역전 우승을 이끌어 냈다.[21] 토니 로이, 짐 버마, 조지 윌슨 등 3명의 외국인 선수를 니시테츠에 소개했다. 또한, 다나카 츠토무, 아베 카즈하루등 젊은 투수진을 지도하여 오랫동안 이나오 카즈히사 한 명에게 의존했던 니시테츠 투수진의 재건을 도모했다.
1964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그러나 11월에 말기 위암이 발견되어 동년을 마지막으로 퇴단했다. 당시에는 부인의 의향으로 부인과 당시 니시테쓰의 감독이었던 나카니시 후토시 이외에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팀 부진의 책임을 와카바야시 한 사람에게만 돌렸다'라며 니시테쓰 구단과 나카니시가 비난을 받았다. 1965년 3월 5일 사망했다.[22] 향년 57세. 프로 야구장이 열렸다. "최후까지 병상에서 현장 복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고 나카니시가 후에 밝히기도 했다.
4. 2. 기업인 활동 및 야구 해설가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유아사 요시오 총감독이 실제 지휘를 맡아 와카바야시는 코치에 불과했다. 1952년에는 헤이와다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시즌 도중에 2군 감독으로 강등되었다.[22] 1954년 마이니치 영업 담당 이사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은퇴하고 다카하시 유니온스의 코치로 초빙되었으나, 팀은 기록적인 패배를 기록하며 1년 만에 퇴단했다. 이후 프로 야구와 거리를 두며 '일본 펩시'의 사장과 미국의 TV영화 '로하이드' 등을 수입했던 'PCA 재팬' 일본 지사장을 역임했다.[22] 그 곁에서 마이니치 방송(텔레비전·라디오)의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했다.1961년 다이요 웨일스의 2군 비상군 투수 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21] 1963년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수석 코치로 취임해 와코 다다오, 하타 다카유키, 이노우에 요시오 등의 계투진이 잘 어우러지는 방법을 구상해 이 시즌 기적의 역전 우승을 이끌어 냈다. 토니 로이, 짐 버마, 조지 윌슨 등 3명의 외국인 선수를 니시테츠에 소개했다.[21]
1964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22] 그러나 11월에 말기 위암이 발견되어 동년을 마지막으로 퇴단했다. 당시에는 부인의 의향으로 부인과 당시 니시테쓰의 감독이었던 나카니시 후토시 이외에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팀 부진의 책임을 와카바야시 한 사람에게만 돌렸다'라며 니시테쓰 구단과 나카니시가 비난을 받았다.[22] 1965년 3월 5일 사망했다. 향년 57세. 프로 야구장이 열렸다. "최후까지 병상에서 현장 복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고 나카니시가 후에 밝히기도 했다.[22]
4. 3. 사망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1964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22] 그러나 같은 해 11월에 말기 위암이 발견되어, 그 해를 마지막으로 니시테쓰 라이온스에서 퇴단했다.[22] 당시에는 부인의 의향으로 부인과 당시 니시테쓰 감독이었던 나카니시 후토시 외에는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팀 부진의 책임을 와카바야시 한 사람에게만 돌렸다'라며 니시테쓰 구단과 나카니시가 비난을 받았다.[22]1950년부터 1952년까지는 총감독인 유아사 요시오가 실제 지휘를 맡았고, 와카바야시는 코치에 불과했다. 1952년 헤이와다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시즌 도중에 2군 감독으로 강등되었다. 1954년 마이니치 영업 담당 이사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은퇴하고 다카하시 유니온스의 코치로 초빙되었으나 팀은 1년 만에 기록적인 패배를 기록하며 퇴단했다. 이후 프로 야구와 거리를 두며 '일본 펩시'의 사장과 미국의 TV영화 '로하이드' 등을 수입했던 'PCA 재팬' 일본 지사장을 역임했다. 1961년 다이요 웨일스의 2군 비상군 투수 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1963년에는 니시테쓰의 수석 코치로 취임, 와코 다다오, 하타 다카유키, 이노우에 요시오 등 계투진을 정비, 기적의 역전 우승을 이끌었다.
1965년 3월 5일 사망했다.[22] 향년 57세.[22] 프로 야구장이 열렸다. "최후까지 병상에서 현장 복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고 나카니시가 후에 밝히기도 했다.
5. 와카바야시 다다시 상
2011년 3월 4일 한신 구단은 팀 내에서 우수한 사회 공헌 활동을 벌이는 선수에게 표창하는 '''와카바야시 다다시상'''을 창설하기로 결정하고 2011시즌부터 실시했다.[2] 7월 21일 한신에서 정식으로 발표된 이 상은 매년 11월 우수한 사회 공헌 활동을 한 선수에게 11월 구단 납회에서 기념패와 표창금 100만 엔, 활동 지원금 100만 엔을 각각 수여하며, 한신 고시엔 구장 내 고시엔 역사관에 수상 코너를 설치하여 표창한다.[24] 감독·프런트·코치진에게는 '와카바야시 다다시 특별상'을 수여하는 경우도 있다.[25]
와카바야시는 타이거스 어린이 클럽 창립을 통한 어린이들의 격려 및 영향, 어린이 야구 잡지 출판, 소년원 및 고아원 방문 등 지역 사회에 대한 자원 봉사와 기여를 통해 2011년 와카바야시 다다시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야구장 밖의 MVP"로 여겨진다.[2]
2011년 4월 8일부터 7월 31일까지 고시엔 역사관에서 기획전 '초대 에이스 와카바야시 다다시와 용병 외국인 열전'이 개최되었다.[26]
역대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수상자 | 주요 활동 내용 |
---|---|---|
2011년 | 히야마 신지로 | 현역 시대 10년 동안 모자 생활 지원 시설 아동들을 고시엔 공식 경기에 초대, 아동 복지 시설에 도서 등을 기증 |
2012년 | 후지카와 큐지 | 프리 스쿨 등에 다니는 아동 등을 초대, 팬 서비스 등 사회적 공헌 |
2013년 | 이와타 미노루 | 1형 당뇨병을 앓으면서 프로 야구 선수로 활약, 당뇨병 환아들을 공식 경기에 초대하는 등 당뇨병 사회적 계몽 활동 |
2014년 | 쿠보타 토모유키 | 6년 동안 7천 명 이상의 아이들을 고시엔 공식 경기에 초대 |
2015년 | 토리타니 타카시 | 5년 동안 오키나와의 의료 시설을 방문, 필리핀의 불우한 아이들에게 신발 기증[27] |
2016년 | 노미 아츠시 | 1승당 10만 엔 상당의 장난감을 니시노미야시와 토요오카시의 아동 시설에 기증[28] |
2017년 | 해당 없음 | |
2018년 | 호조 후미야 | 매년 시즌 오프에 장애 아동 입소 시설이나 모자 의료 시설 등을 방문[29] |
2019년 | 니시 유우키 | 오릭스 시절부터 일본 적십자사 및 일본 재단 어린이 지원 프로젝트에 매년 기부[30] |
2020년 | 해당 없음 |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표창 보류[31] |
2021년 | 이와사다 유타 | 구마모토 지진 부흥 지원 및 어린이 야구 진흥을 위해 기부 및 야구 용품 기증[32] |
2022년 | 하라구치 후미히토 | 대장암 투병 경험을 바탕으로 암 조기 발견·치료 계몽 활동, 차일드 케모 하우스 방문 및 기부[33][34] |
2023년 | 치카모토 코지 | 고향인 아와지시 거주자를 치카모토 시트에 초대, 아와지섬과 오키노에라부섬에서 야구 교실·스포츠 교실 개최[35] |
특별상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수상자 | 주요 활동 내용 |
---|---|---|
2011년 | 한신 타이거스 선수회, 한신 타이거스 OB회 | 동일본 대지진 부흥 지원 모금 활동, 에코 캡 활동 |
2017년 | 한신 타이거스 선수회 | 자선 경매 개최를 통한 기부금 모금[36] |
2012년부터 2016년, 2018년에는 특별상 수상자가 없었다.
6. 상세 정보
6. 1. 출신 학교
맥킨리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구제 혼모쿠 중학교(현재의 요코하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호세이 대학을 졸업했다.6. 2. 선수 경력
닛폰 콜롬비아를 거쳐 1936년부터 오사카 타이거스·한신군·오사카 타이거스에서 1944년까지, 그리고 1946년부터 1949년까지 활동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는 마이니치 오리온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6. 3. 지도자 경력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1942년부터 1944년, 그리고 1947년부터 1949년까지 한신군·오사카 타이거스 감독을 맡았다. 1953년에는 마이니치 오리온스 감독을, 1955년에는 톰보우 유니온스 코치를, 1963년부터 1964년까지는 니시테쓰 라이온스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6. 4. 수상·타이틀 경력
- 다승왕 : 1회(1944년)
- 최우수 평균 자책점 : 2회(1939년, 1944년)
- 최고 승률 : 2회(1939년[40], 1944년)
- 최다 선발승 : 1회(1944년 20선발승)
- MVP: 2회(1944년, 1947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1964년)
6. 4. 1. 타이틀
- 다승왕 : 1회(1944년)
- 최우수 평균 자책점 : 2회(1939년, 1944년)
- 최고 승률 : 2회(1939년[40], 1944년)
- 최다 선발승 : 1회(1944년 20선발승)
- 최다승: 1회 (1944년)
- 최우수 방어율: 2회 (1939년, 1944년)
6. 4. 2. 수상
- MVP: 2회(1944년, 1947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1964년)
- 최고 殊勲 선수(MVP): 2회 (1944년, 1947년) ※1947년은 투수로는 1 리그제 마지막 수상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1964년)
6. 5. 개인 기록
시즌 20승 이상은 6회(1939년, 1940년, 1942년 ~ 1944년, 1947년) 달성했다. 이 중 선발로 20승 이상을 기록한 것은 3회(1943년 23승, 1944년 20승, 1947년 25승)이다. 1944년에는 마이크 마샬을 능가하는 세계 기록인 14경기 연속 등판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최고령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했고, 1947년에는 최고령 20승 투수가 되었다. 1950년에는 42세 8개월의 나이로 일본 시리즈 최고령 승리 투수가 되었다.6. 6. 등번호
와카바야시 다다시는 1936년부터 1943년, 1946년에는 등번호 18번을, 1947년부터 1949년, 1963년부터 1964년까지는 30번, 1950년부터 1953년까지는 33번, 1955년에는 50번, 1956년에는 60번을 사용했다.6. 7. 연도별 투수 성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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