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노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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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치다 노부야는 일본의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 1971년에 사망했다. 그는 미쓰이물산에서 근무하다가 독립하여 선박 중개업과 조선업으로 성공을 거두며 '선박 부자'로 불렸다. 이후 정치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 해군 정무 차관, 체신 정무 차관, 철도 대신, 농상무 대신 등을 역임했다. 그는 정우회에서 제명된 후 쇼와회를 결성했으며, 전시에는 조기 종전을 위해 노력했다. 전후 공직 추방을 겪은 후 중의원 의원과 농림 대신을 다시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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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노부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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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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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표기 | 내전 신야 |
출생일 | 1880년 12월 6일 |
출생지 | 일본 이바라키현 나메가타시 아소마치 |
사망일 | 1971년 1월 7일 |
학력 | 도쿄고등상업학교 (현 히토쓰바시대학교) |
칭호 및 훈장 | 훈일등욱일대수장 감수포장 |
소속 정당 | (입헌정우회 →) (쇼와회 →) (익찬정치회 →) 자유당 |
경력 | |
전직 | 실업가 |
제18대 농림대신 | 내각: 제5차 요시다 내각 취임일: 1953년 5월 21일 퇴임일: 1953년 6월 22일 |
귀족원 의원 | 취임일: 1944년 11월 1일 퇴임일: 1946년 3월 13일 |
제2대 농상대신 | 내각: 도조 내각 취임일: 1944년 2월 19일 퇴임일: 1944년 7월 22일 |
관선 제32대 미야기현 지사 | 취임일: 1943년 7월 1일 퇴임일: 1944년 2월 25일 |
제12대 철도 대신 | 내각: 오카다 내각 취임일: 1934년 7월 8일 퇴임일: 1936년 3월 9일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이바라키현 제5구 →) (이바라키현 제1구 →) 구 이바라키 1구 당선 횟수: 9회 취임일: 1924년 5월 10일 - 1943년 7월 1일, 1952년 10월 1일 퇴임일: 1955년 1월 24일 |
2. 생애
히타치 아소번사의 아들로 태어나 도쿄 고등상업학교(현 히토쓰바시 대학)를 졸업했다. 미쓰이물산에서 근무하다가 퇴직 후 고베에서 '''우치다 기선'''을 설립하여 해운업에 뛰어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조선업 호황으로 큰 부를 축적하며 선박 부자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불황을 예측하고 사업을 정리하여 위기를 피했다.
1924년 정우회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해군 및 체신 정무 차관을 거쳐 오카다 내각에서 철도 대신으로 입각했으나, 이로 인해 정우회에서 제명되고 쇼와회 결성에 참여했다. 미야기현 관선 지사를 역임하고 도조 내각에서는 농상무 대신으로 활동했으며,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도 임명되었다. 전쟁 중에는 조기 종전을 모색하는 활동에도 관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직 추방을 당했으나, 해제 후 다시 중의원 의원으로 복귀하여 제5차 요시다 내각에서 농림 대신을 지냈다. 정계 은퇴 후에는 메이지 해운 회장 등을 맡으며 해운업계에서 활동하다 1971년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구히타치 아소번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세이소쿠 중학교와 아자부 중학교를 거쳐 도쿄 고등상업학교(현 히토쓰바시 대학)를 졸업했다. 1905년(메이지 38년) 미쓰이물산에 입사하여, 회사 소유 선박 '아타고야마마루'의 사무장을 맡는 등 해상 근무를 경험하며 용선 주임까지 승진했다.1914년(다이쇼 3년) 미쓰이물산을 퇴직하고, 퇴직금과 형에게서 빌린 돈을 자본 삼아 고베에서 선박 중개업 회사 '우치다 노부야 사무소'를 열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우치다 기선'''을 설립했다[2]. 1917년(다이쇼 6년)에는 요코하마 기계철공소를 사들였고, 이듬해인 1918년(다이쇼 7년) 우치다 조선소로 회사 이름을 바꾸었다[3].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조선업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우치다는 단기간에 주식 배당 60할을 기록하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이로써 야마시타 기선의 야마시타 카메사부로, 가쓰다 기선의 가쓰다 긴지로와 함께 '''선박 부자'''로 불리며 실업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같은 해 12월, 모교인 도쿄 고등상업학교 장학금으로 4만 5000엔을 기부하여 1919년(다이쇼 8년) 11월 11일 곤수포장을 받았다[4].
이 시기에 정계와도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 인맥을 통해 불황의 조짐을 미리 파악한 우치다는 1920년(다이쇼 9년)에 보유 선박을 전부 매각하고, 우치다 조선소를 오사카 철공소(현 히타치 조선)에 무상으로 넘기는 등 사업 대부분을 정리하여 재산을 현금화했다. 덕분에 전후 불황기에 닥칠 수 있었던 몰락을 피할 수 있었다.
2. 2. 사업가로서의 성공
1914년 미쓰이물산을 퇴직하고, 퇴직금과 형에게 빌린 돈을 자본 삼아 고베에서 선박 중개업 회사 '우치다 노부야 사무소'를 열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우치다 기선'''을 설립했다.[2] 1917년에는 요코하마시 야마시타쵸에 있던 요코하마 기계철공소를 사들였고, 1918년에는 이를 우치다 조선소로 이름을 바꾸었다.[3]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선박 건조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우치다는 단기간에 주식 배당 60%를 기록하는 등 막대한 부를 쌓아 억만장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야마시타 기선의 야마시타 카메사부로, 가쓰다 기선의 가쓰다 긴지로와 함께 선박 부자로 불리며 실업계에서 명성을 얻었다. 1918년 12월에는 모교인 도쿄 고등상업학교에 장학금으로 4.5만엔을 기부했고, 이 공로로 1919년 11월 11일 곤수포장을 받았다.[4]
이 시기에 정계와도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불황의 기미를 감지한 우치다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1920년, 보유 선박 대부분을 한꺼번에 매각하고 우치다 조선소는 오사카 철공소(현 히타치 조선)에 무상으로 넘기는 등 사업을 정리하여 재산을 현금화했다. 덕분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닥친 불황 속에서도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었다.
2. 3. 정치 경력
1924년(다이쇼 13년), 정우회 공인으로 제1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오카다 게이스케 해군 대신 아래에서 해군 정무 차관을 지내며 오카다와 가까워졌다. 이누카이 내각에서는 체신 정무 차관으로서 선박 개선 지원 시설 설립에 기여했다.오카다 내각에서는 철도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우회 총재였던 스즈키 키사부로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각했기 때문에, 다카하시 고레키요, 토코나미 타케지로, 야마자키 타츠노스케와 함께 정우회에서 제명당했다. 이후 우치다를 포함한 제명된 의원들과 그들을 따라 탈당한 의원들은 쇼와회를 결성했다.[6]
2·26 사건 직후에는 내대신부 비서관장 키도 코이치에게 "주가가 떨어지니 빨리 새로운 내각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여, 키도가 이러한 비상 시국에 주식 걱정을 하는 상인 출신의 현실 인식에 놀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시기를 거치며 오카다 외에도 고노에 후미마로, 우가키 카즈시게 등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쇼와회가 해산된 후에는 쇼와회 소속이었던 다른 의원들과 국민동맹 소속 의원들과 함께 원내 회파인 제1의원구락부에 속했다. 1939년(쇼와 14년) 정우회가 분열되었을 때, 구 쇼와회 소속 의원 중 정우회 출신 대부분은 나카지마 치쿠헤이가 총재를 맡은 친군적인 정우회 혁신 동맹(혁신파)에 합류했지만, 우치다는 여기에 동조하지 않고 모리야 에이오와 함께 제1의원구락부에 남았다.
이후 미야기현의 관선 지사를 역임하다가, 1944년(쇼와 19년) 2월 19일 도조 내각의 농상무 대신으로 입각했다. 같은 해 11월 1일에는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임명되었다[9](1946년 3월 13일 사임[10]). 도조 내각의 각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시 중에는 오히려 고노에 후미마로 그룹의 일원으로서 요시다 시게루 등 조기 종전파와 교류하며 전쟁의 조기 종결을 모색하기도 했다. 조기 종전을 위해 우가키 카즈시게를 총리로 추대하려 했으나, 우가키가 고노에에게 불신감을 가지고 있어 실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공직 추방을 당했다. 추방이 해제된 후인 1952년(쇼와 27년)에 다시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제5차 요시다 내각에서는 농림 대신을 맡았다. 정계 은퇴 후에는 메이지 해운 이사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해운업계에 영향력을 유지했다. 1971년(쇼와 46년) 1월 7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당일 훈1등 욱일대수장이 추증되었다.[11]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
2. 4. 전쟁 전후 활동
2·26 사건 직후에는 내대신부 비서관장 키도 코이치에게 "주가가 떨어지니 빨리 새로운 내각을 만들어 달라"고 직접 요청하기도 했다. 키도는 이러한 비상 시국에 주식 시장을 걱정하는 우치다의 태도에 놀랐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오카다 게이스케 외에도 고노에 후미마로나 우가키 카즈시게 등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쇼와회가 해산된 후, 우치다는 쇼와회 소속이었던 다른 의원 및 국민동맹 소속 의원들과 함께 원내 회파인 제1의원구락부에 소속되었다. 1939년(쇼와 14년) 정우회가 분열되었을 때, 구 쇼와회 출신 의원 다수가 나카지마 치쿠헤이가 이끄는 친군사적 성향의 정우회 혁신 동맹에 합류했으나, 우치다는 이에 동조하지 않고 모리야 에이오와 함께 제1의원구락부에 남았다.
이후 미야기현의 관선 지사를 역임하였고, 1944년(쇼와 19년) 2월 19일에는 도조 내각의 농상무 대신으로 임명되어 입각했다. 같은 해 11월 1일에는 귀족원 칙선 의원으로 임명되었다[9](1946년 3월 13일 사임[10]).
비록 도조 내각의 각료였으나, 전쟁 중에는 고노에 후미마로 그룹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며 요시다 시게루 등 조기 종전을 주장하는 인물들과 회합을 가졌다.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해 우가키 카즈시게를 총리로 추대하려 시도했으나, 우가키가 고노에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전후에는 공직 추방 처분을 받았으나, 추방이 해제된 후인 1952년(쇼와 27년)에 다시 중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제5차 요시다 내각에서는 농림 대신을 맡았으며, 이후 메이지 해운 이사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해운업계에서도 영향력을 유지했다.
2. 5. 사망
1971년(쇼와 46년) 1월 7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당일 훈1등 욱일대수장이 추서되었다[11].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3. 일화
- 도카이도 본선 다루이역 동쪽의 아이카와 교량에서 열차 전복 사고[12][13]를 당했을 때 "나는 고베의 우치다다. 돈은 얼마든지 내겠으니, 살려주시오."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졸부다운 일화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우치다 본인은 회고에서 "돈은 얼마든지 내겠다"라는 부분은 실제로 말하지 않았다고 밝혔다[14]. 이 사고로 우치다 본인과 어머니는 중상을 입었고, 함께 있던 친형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 사고의 사망자는 우치다의 친형이 유일했다.
- 1935년 철도 대신으로 재직할 당시, 특급 열차에 샤워실 설치를 제안했다. 실제로 특급 '후지' 호의 차량을 개조하여 운영했으나, 이용객이 적어 약 2개월 만에 운영이 중단되었다[15].
- 아타미시의 지정 유형 문화재인 기운카쿠를 자신의 별장으로 건설했다.
- 1917년 구제 미토 고등학교 설립을 위해 100만엔을 기부했다.
- 종교는 선종이며[1], 취미는 운동과 유도였다[1].
- '스마 어전(須磨御殿)'이라 불리는 저택을 짓고 일본 화가 기무라 부잔이 그린 스기토(杉戸, 삼나무 문짝) 그림으로 장식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 당시 저택은 피해를 입었지만, 채색된 스기토 그림은 손상을 면했다. 이 그림들은 이후 이바라키현에 기증되었다[16].
4. 저서
- 『풍설 50년』 風雪五十年일본어, 실업지일본사, 1951년
참조
[1]
서적
第十版 大衆人事録
猪野三郎監修
1934 #昭和9年
[2]
논문
第一次大戦期における船成金の出現―内田信也と山下亀三郎―
https://www.hosei.ac[...]
法政大学イノベーション・マネジメント研究センター
2019-08-04
[3]
웹사이트
地図から消えた幻の島「山瀬町」がかつて新山下にあった?
http://hamarepo.com/[...]
2019-08-04
[4]
간행물
官報
https://dl.ndl.go.jp[...]
1919-11-12
[5]
간행물
官報
https://dl.ndl.go.jp[...]
1925-10-27
[6]
뉴스
中外商業新報
中外商業新報
1935-12-24
[7]
간행물
官報
https://dl.ndl.go.jp[...]
1927-05-06
[8]
간행물
官報
https://dl.ndl.go.jp[...]
1928-08-24
[9]
서적
人事興信録 第14版 下
人事興信所
1943
[10]
간행물
官報
1946-03-15
[11]
간행물
官報
1971-01-14
[12]
뉴스
暗夜垂井駅(東海道線)に演ぜられたる急行列車顛覆の惨事 : 機関車機関車に衝突して構外の田圃の中にケシ飛び客車は粉微塵となって死者一名重傷者八名を出す
http://www.lib.kobe-[...]
大阪毎日新聞
1919-07-31
[13]
사진
歴史写真. 大正8年9月號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1919
[14]
서적
風雪五十年
[15]
뉴스
列車風呂は早々店じまい
東京朝日新聞
1935-09-21
[16]
웹사이트
木村武山 彩色杉戸絵
https://www.modernar[...]
202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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