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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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승안은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1982년 KBO 리그 출범과 함께 MBC 청룡에 입단했다. 이후 해태 타이거즈, 빙그레 이글스를 거쳐 1991년 은퇴했다. 빙그레 이글스 시절 골든 글러브를 두 차례 수상하고, 1989년에는 타점왕을 차지했다. 은퇴 후 한화 이글스 코치를 거쳐 감독을 역임했으며, 경찰 야구단 감독으로 퓨처스 북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슬하에 두 아들 유원상, 유민상과 딸 유은혜를 두었으며, 전 부인 이금복은 탤런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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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호는 대한민국의 변호사이자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사법고시 합격 후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주요 시국사건의 변호를 맡았고, 정계 입문 후 국회의원, 경기도 정무부지사, 청와대 정무수석,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국토해양위원 등을 역임했다.
유승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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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선수명 | 유승안 |
원어명 | Yoo Seung-An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생년월일 | 1956년 6월 1일 |
신장 | 180cm |
체중 | 86kg |
수비 위치 | 포수, 지명타자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연도 | 1982년 |
드래프트 순위 | 원년 멤버 |
첫 출장 | KBO / 1982년 3월 27일 동대문 대 삼성전 |
마지막 경기 | KBO / 1991년 10월 12일 대전 대 해태전 |
선수 경력 | |
코치 경력 | |
감독 경력 | |
수상 내역 |
2. 선수 시절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단인 한일은행에서 활동했다. 당시 감독은 김응용이었고, 허구연, 강병철, 김용철, 우용득 등이 주축 선수였다. 이후 병역 복무를 위해 육군 경리단에 입대했으며, 전역 후 한일은행에 복귀했다.
1982년 KBO 리그 출범과 함께 MBC 청룡의 원년 멤버로 입단, 호쾌한 타격을 보여주는 공격형 포수였다. 원년 개막전에서 동점 3점 홈런으로 경기 흐름을 바꿨으나, 연장전에서 백인천 감독의 지시를 무시하고 이선희 투수의 유인구를 쳐 3루 주자 김인식을 횡사시켜 백인천의 눈 밖에 났다. 이후 주전 포수 자리를 잡지 못하고 1984년 시즌 전 1500만원에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
1986년 김종윤과 함께 신생 팀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했다. 1987년 지명타자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고, 1989년 4번 타자로 한국프로야구 최다타점상과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1991년 시즌 후 은퇴했다.
2. 1. 아마추어 시절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단인 한일은행에서 활동했다. 선수로 활약할 당시 감독은 김응용이었고, 허구연, 강병철, 김용철, 우용득과 같은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 병역 복무를 위해 입대 후 육군 경리단에서 활동했다. 전역 후 한일은행에 복귀했다.2. 2. MBC 청룡 시절
1982년 KBO 리그가 출범하면서 원년 멤버로 입단하였다. 선수 시절에는 호쾌한 타격을 보여주던 공격형 포수였다. 원년 개막전에서 동점 3점 홈런을 쳐 경기의 흐름을 돌리는 데 한 몫했지만, 연장전에서 선수 겸 감독이었던 백인천의 볼을 기다리라는 지시를 무시한 채 상대 투수 이선희의 유인구를 치는 바람에 3루 주자였던 김인식을 횡사시켜 백인천의 눈 밖에 나게 됐다. 이후 팀 내 주전 포수로 자리잡지 못하게 됐고 1984년 시즌 시작 전 1500만원의 조건으로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2. 3.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6년 팀의 두터운 포수진과 노장이 돼 버린 나이 때문에 김종윤과 함께 당시 신생 팀이었던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했다.2. 4. 빙그레 이글스 시절
1987년에 지명타자로 출전해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고, 1989년에는 4번 타자로서 한국프로야구 최다타점상과 골든 글러브를 동시에 수상했다. 1991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3. 야구선수 은퇴 후
한화 이글스 코치를 맡아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1997년 시즌 도중 배터리 코치로 변경되었고,[2] 1998년 이희수 감독 부임 후 수석 겸 배터리 코치가 되었다. 이희수 감독은 직접 코칭스태프를 구성하길 원했으나, 구단은 이를 무시하고 비북일파인 유승안을 수석 겸 배터리 코치로 임명, 북일고 출신 이상군을 선수로 복귀시켜 갈등이 있었다. 1999년 시즌 후 2군 감독으로 강등되었다가, 2000년 6월 팀이 7연패에 빠지는 등 침체에 빠지자[3] 수석코치로 복귀했다.
부인과 사별 후 두 아들과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받고 귀국했다. 이로 인해 이희수 감독 후임 물망에 올랐으나[4] 좌절되었고, 김성근 삼성 2군 감독에게도 제안이 갔지만 LG 코치로 가면서 무산, 이광환 전 LG 감독이 후임으로 발탁됐다.
2002년 11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한화 이글스 감독을 역임했으나, 세대교체에 의욕을 보였음에도 노장 선수들을 지나치게 외면해[5] 2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 계약 만료 후 김인식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이후 KBO 운영위원을 거쳐 경찰 야구단 감독으로 취임, 2011년 창단 첫 퓨처스 북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12년 시즌 후 차남 유민상이 군 복무를 위해 입단해 같은 팀에서 활동했다.
4. 가족
관계 | 이름 |
---|---|
장남 | 유원상 (kt 위즈 투수) |
며느리 | 김보경 (2022년 7월 29일 사망) |
차남 | 유민상 (KIA 타이거즈 내야수) |
딸 | 유은혜 |
전 부인 | 이금복 (전 탤런트, 1999년 11월 14일 백혈병으로 사망) |
5. 출신 학교
6. 수상
7. 통산 기록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