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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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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흠은 전한 시대의 학자이자 관료로, 양웅에게 학문을 배우고 사서오경에 통달했다. 그는 아버지 유향과 함께 황실 도서관의 서적을 정리하고, 서적 목록인 칠략을 편찬했으며, 삼통력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고문경을 옹호하고 좌전의 보급에 기여했으며, 왕망의 신나라에서 국사로 임명되어 도량형 개혁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왕망의 몰락을 앞두고 모반을 꾀하다 자살했으며, 그의 학문적 업적은 후대에 경학, 목록학, 역법 및 도량형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고문경 위조 및 왕망의 조력자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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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흠
기본 정보
본명劉歆 (류흠)
子駿 (자준)
생년기원전 46년경
몰년23년
국적중국
시대전한 말 ~ 신
직업학자, 정치가
로마자 표기
중국어 병음Liú Xīn
웨이드-자일스 표기Liu2 Hsin1
광동어 예일 표기Lau4 Jam1

2. 생애

양웅(楊雄)에게 배워 오경(五經)에 널리 통달하였다. 그러나 부친 대악령(大樂令)의 영향으로 가극을 좋아하여 예의에 얽매이지 않고 자주 학자들을 비난했다.[2] 왕망(王莽)의 신나라에서는 벼슬하지 않고, 후한 광무제 때 의랑급사중(議郞給事中)이 되었다.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며, 법제 통일 등 정치개혁에 관한 의견을 황제에게 상신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당시 국가 권력의 어용학문이며 황제의 신임을 받던 도참(圖讖)의 미신을 대담하게 공격하여 황제의 분노를 사서 참수될 뻔했으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2]

지황 4년(23년) 7월, 왕망에게 아들이 살해당한 것을 원망하던 유흠 등은 모반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자살했다. 개명의 동기에 대해, 『한서』 유흠전 주에 인용된 응소의 설에 따르면, "유수가 천하를 얻는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망 멸망 후 천하를 얻은 광무제의 이름이 유수였다. [2]

2. 1. 초기 생애와 학문적 배경

양웅(楊雄)에게 배워 오경(五經)에 널리 통달하였다. 그러나 부친이 대악령(大樂令)이었던 영향으로 가극을 좋아하여 예의에 구애되지 않고 자주 학자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2] 젊은 시절, 유흠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 황실 도서관의 장서 목록을 정리하는 일을 도왔고, 유력한 대신인 왕망(王莽)과의 친분으로 인해 한나라 애제 치세에서 시중 봉차도위(侍中奉車都尉)의 직위에 오르며 권력과 보상을 받았다.[4]

성제 때 황문랑이 되었으며, 아버지 유향과 함께 비서(궁중의 도서)를 교정했다. 아버지 사후 그 업을 이어 애제 때 모든 서적의 교정을 마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적 목록인 『칠략』을 만들어 올렸다. 또한 고문 경전인 『춘추좌씨전』, 『모시』, 『일례』, 『고문상서』를 학관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지만, 금문 학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평제 원시 5년(5년), 율력의 고정을 시도하여 삼통력을 만들었다.

2. 2. 관직 진출과 왕망과의 관계

양웅(楊雄)에게 배워 오경(五經)에 널리 통달하였다. 그러나 부친이 대악령(大樂令)이었던 영향으로 가극을 좋아하여 예의에 구애되지 않고 자주 학자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왕망(王莽)의 신나라에서는 벼슬하지 않고, 후한 광무제 때에 의랑급사중(議郞給事中)이 되었다.[2] 젊은 시절, 유흠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 황실 도서관의 장서 목록을 정리하는 일을 도왔고, 유력한 대신인 왕망과의 친분으로 인해 한나라 애제 치세에서 시중 봉차도위(侍中奉車都尉)의 직위에 오르며 권력과 보상을 받았다.[4]

성제 때 황문랑이 되었으며, 아버지 유향과 함께 비서(궁중의 도서)를 교정했다. 아버지 사후 그 업을 이어 애제 때 모든 서적의 교정을 마치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적 목록인 『칠략』을 만들어 올렸다. 또한 고문 경전인 『춘추좌씨전』, 『모시』, 『일례』, 『고문상서』를 학관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지만, 금문 학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평제 원시 5년(5년)에 율력의 고정을 시도하여 삼통력을 만들었다. 왕망의 신나라에서는 고문 경전을 학관으로 세우고, 유흠을 "국사"로 임명했다. 이때 도량형의 개정에도 관여하여 자신의 이론에 따라 표준기인 "가량"을 설계했다.

지황 4년(23년) 7월, 왕망에게 아들이 살해당한 것을 원망하던 유흠 등은 모반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자살했다. 개명의 동기에 대해, 『한서』 유흠전 주에 인용된 응소의 설에 따르면, "유수가 천하를 얻는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망 멸망 후 천하를 얻은 광무제의 이름이 유수였다.

2. 3. 신나라 시기와 몰락

양웅(楊雄)에게서 배워 오경(五經)에 널리 통달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영향으로 가극을 좋아하여 예의에 얽매이지 않고 자주 학자들을 비난하였다. 왕망(王莽)의 신나라에서는 벼슬하지 않고, 후한 광무제 때에 의랑급사중(議郞給事中)이 되었다. 농업을 중히 여기고 상업을 억제하며, 법제의 통일을 추구하는 등 정치개혁에 관한 의견을 황제에게 상신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당시 국가 권력의 어용학문이자 황제의 신임을 받던 도참(圖讖)의 미신을 대담하게 공격하여 황제의 분노를 사서 참수될 뻔하였으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2]

왕망의 군대가 지황 4년(23년) 7월 곤양 전투에서 패배한 후, 유흠은 왕망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발각되어 자살하였다.[4]

3. 사상

유흠의 《신론(新論)》 29편은 육가의 《신어(新語)》, 가의의 《신서(新書)》의 정신을 이어 과거의 사실을 서술하여 시국을 비판한 정치적·사상적 의견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남송 때에 없어졌다. 지금은 청나라 엄가균(嚴可均)의 《전후한문(全後漢文)》에 집록(集錄)되어 있다. 현존하는 문장을 보면 그는 당시의 천인감응사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천(天)의 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치의 잘잘못과 사람의 행불행은 천명이 아닌 인위에 의한다고 했다. 또 정신과 육체를 촛불에 비유하여 육체의 사망은 정신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신선방술의 신비적인 방법에 의한 장수법을 부정하였다. 이 무신론은 이어서 왕충의 유물사상과 반참위설(反讖緯說)에 영향을 주어 마침내 한대 지배계급의 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격렬한 비판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그가 천문학상에서 혼천설을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3. 1. 고문경학 옹호

유흠은 오경 모두를 공부하여, 이전의 한 경전만 전수하는 흐름에 대해 여러 경전을 두루 공부하는 것(박학)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또한,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되었던 고문경의 관학화를 시도하여 고문학을 일으켰으며, 이는 후한 이후 고문학 융성의 기반이 되었다. 청나라 창저우 학파의 캉유웨이 등은 유흠이 고문경을 위조했다고 주장했으며, 구제강, 코다 로한 등도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유흠이 경전 위조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는 경서는 다음과 같다.

경서내용
춘추좌씨전코다 로한은 유흠 또는 그의 제자들이 사기를 고쳐서 본래 춘추의 주석서가 아니었던 좌씨춘추를 춘추좌씨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주석서처럼 보이게 했다고 의심했다. 구제강은 국어를 바탕으로 유흠이 춘추좌씨전을 창작했다고 주장했다. 춘추좌씨전 본문에 자주 등장하여 역사적 사실에 대해 논평하는 "군자"라는 인물이 유흠이라는 설도 있다.
주역캉유웨이주역의 주석인 십익 중 계사전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유흠의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캉유웨이는 유흠이 주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내용을 고쳐 주나라 문왕, 주공단과 연결하고, "허베이 여자"라는 인물이 "진시황의 분서를 피한 주역을 발견했다"는 창작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3. 2. 천인감응설 비판과 무신론적 경향

육가의 《신어》, 가의의 《신서》의 정신을 이어 과거의 사실을 서술하여 시국을 비판한 정치적·사상적 의견을 모은 유흠의 저서 《신론》 29편은 남송 때에 없어졌다. 지금은 청나라 엄가균의 《전후한문》에 집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문장을 보면 유흠은 당시의 천인감응사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천(天)의 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치의 잘잘못과 사람의 행불행은 천명이 아닌 인위에 의한다고 했다. 또 정신과 육체를 촛불에 비유하여 육체의 사망은 정신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신선방술의 신비적인 방법에 의한 장수법을 부정하였다. 이 무신론은 이어서 왕충의 유물사상과 반참위설에 영향을 주어 마침내 한대 지배계급의 신학적 해석학에 대한 격렬한 비판의 바탕이 되었다.

4. 학문적 업적

유흠은 제국 도서관의 관리자로서 최초로 도서 분류 시스템과 도서 표기 시스템을 구축했다.[3] 황실 사서로서 고대 텍스트를 목록화하고 주석을 달거나 편집하여 중국 철학과 역사의 여러 정통 규범에 대한 결정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냈다.

유흠은 천체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더 정확한 새로운 천문학 모델인 삼통력( 三統歷|삼통력중국어)을 개발했다.[1] 태초력을 보완하여 만든 삼통력은 단순하게 날짜를 배정하는 달력을 넘어, 태양, , 행성의 운행까지 계산하는 천체력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중국력의 틀을 만들었다.[2]

왕망의 ''가량''(jialiang). 유흠이 과학적 측정에 사용했으며,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유흠은 원주율을 개선된 근사값 π ≈ 3.1547로 제시한 최초의 중국 연구원이었다.[12] 그가 설계하여 측정에 사용한 원래의 ''가량'' 표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신나라 황제 왕망은 유흠을 사부(國師, "교수")로 임명했는데, 이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고귀한 대신 중 하나였다. 유흠은 액체 부피의 척도와 악기의 조화로운 주파수를 표준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삼통력』에 있는 도량형 이론인 황종거서설은 이후 중국의 도량형을 규정하게 되었다. 길이, 용량, 무게의 단위는 다음과 같다.

단위 종류단위
길이(도)분·치(10분)·척(10치)·장(10척)·인(10장)
용량(량)약·합(2약)·승(10합)·두(10승)·곡(10두)
무게(권)수·냥(24수)·근(16냥)·균(30근)·석(4균)



길이의 단위(도)는 거서(흑기장) 한 알의 폭을 1분으로 하고, 90분으로 하면 황종의 음률을 내는 의 길이(9치)에 해당한다고 했다. 용량의 단위(량)는 거서 1200알이 들어가는 황종 관의 용적(810세제곱분)을 1약으로 했다. 무게의 단위(권)는 1약에 들어가는 거서 1200알의 무게를 12수라고 했다. 신에서 도량형 개정 시 배포된 됫박 모양의 표준기 "가량"은 이 이론을 실천한 것이며, 그 우수성으로 인해 신이 멸망한 후에도 참고 자료로 청조 멸망 시까지 조정 내에서 보존되었다.

4. 1. 도서 목록 정리 및 칠략 편찬

유흠은 제국 도서관의 관리자로서 최초로 도서 분류 시스템과 도서 표기 시스템을 구축했다. 당시 도서 목록은 고운 비단 두루마리에 작성되어 비단 주머니에 보관되었다.[3] 유흠의 《칠략》(七略중국어; "일곱 가지 개요")은 현존하지 않지만, 이는 이후 한서 《예문지》(藝文志중국어; "예술과 문학에 관한 논문")의 기초가 되었으며,[4] 제국 서지학의 모델이 되었다.

황실 사서로서 유흠은 고대 텍스트를 목록화하고 주석을 달거나 편집했다. 이러한 그의 프로젝트는 중국 철학과 역사의 여러 정통 규범에 대한 결정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냈다.

목록학도 참조

유향은 궁중의 도서를 정리할 때, 책 한 권 한 권에 해제를 붙여 『별록』을 만들었지만, 유흠은 그것을 정리하여 중국 현존 최고(最古)의 『칠략』이라는 서적 목록을 만들었다. 이것이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 수록되었고, 그 이후의 도서 분류, 더 나아가 학문의 카테고리의 규범이 되었다.

4. 2. 삼통력 편찬

유흠은 천체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해 더 정확한 새로운 천문학 모델인 삼통력(三統歷|삼통력중국어)을 개발했다.[1] 태초력을 보완하여 만든 삼통력은 단순하게 날짜를 배정하는 달력을 넘어, 태양, , 행성의 운행까지 계산하는 천체력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중국력의 틀을 만들었다.[2] 또한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공화 원년(기원전 841년) 이전의 기년이 명확하지 않지만, 유흠은 『삼통력』의 초진기년법을 통해 고전 속 천문 현상 기사를 토대로 연대를 추산하여 기년을 실시했다.[2] 20세기 후반에 화성의 크레이터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

4. 3. 가량 제작과 도량형 통일



수 세기 동안 왕망의 찬탈(재위 9–23) 이전부터, 중국인들은 원의 둘레와 지름의 비율인 원주율에 대한 계산에 3의 값을 사용했다.[11] 서기 1년에서 5년 사이, 유흠은 개선된 근사값 π ≈ 3.1547을 암시하는 기하학적 수치를 제시한 최초의 중국 연구원이었다.[12] 하지만, 그가 이 수치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 정확한 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13] 유흠이 설계하여 측정에 사용한 원래의 ''가량'' 표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후 장형(78–139)과 유휘(3세기 활동)와 같은 초기 중국 수학자들은 유흠의 원주율 계산을 개선했고,[14] 조충지(429–500)에 의해 다시 개선되었다.

신나라의 황제 왕망은 고대 성군들의 잃어버린 방식을 따르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질서와 평화의 전설적인 황금기였다. 이러한 야심의 실천적인 부분을 돕는 인물 중 한 명이 유흠이었다. 왕망은 즉위 후 유흠을 사부(國師, "교수")로 임명했는데, 이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고귀한 대신인 사보(四輔, 별자리에 대한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 중 하나인 새롭게 만들어진 직책이었다. 정부 전반에 걸쳐 시행된 브랜드 변경 계획의 일환으로 유흠은 "신신공"(嘉新公)이라는 고귀한 칭호를 얻었다. 그는 액체 부피의 척도와 악기의 조화로운 주파수를 표준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파이(π)를 계산하는 데 사용된 '가량호(jialiang hu)'는 법령에 의해 규정된 액체 부피의 다섯 가지 척도의 표준으로 설계되었으며, 각 척도에 대한 별도의 구획으로 구성되었다.

그의 과학 연구 과정에서 유흠은 한서에 남아 있는 논문을 저술했는데, 이는 '율력지'(律曆志, "표준 및 역법에 관한 논문")이다. 이 텍스트는 한나라의 수학, 길이와 부피의 척도, 음향, 무게와 균형, 그리고 오행 이론을 통한 달력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삼통력』에 있는 도량형 이론인 황종거서설은 이후 중국의 도량형을 규정하게 되었다. 길이, 용량, 무게의 단위는 다음과 같다.

단위 종류단위
길이(도)분·치(10분)·척(10치)·장(10척)·인(10장)
용량(량)약·합(2약)·승(10합)·두(10승)·곡(10두)
무게(권)수·냥(24수)·근(16냥)·균(30근)·석(4균)



길이의 단위(도)는 거서(흑기장) 한 알의 폭을 1분으로 하고, 90분으로 하면 황종의 음률을 내는 의 길이(9치)에 해당한다고 했다. 용량의 단위(량)는 거서 1200알이 들어가는 황종 관의 용적(810세제곱분)을 1약으로 했다. 무게의 단위(권)는 1약에 들어가는 거서 1200알의 무게를 12수라고 했다. 신에서 도량형 개정 시 배포된 됫박 모양의 표준기 "가량"은 이 이론을 실천한 것이며, 그 우수성으로 인해 신이 멸망한 후에도 참고 자료로 청조 멸망 시까지 조정 내에서 보존되었다.

5. 후대에 미친 영향

유흠은 경학, 목록학, 역법, 도량형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경을 모두 공부하여 여러 경전을 두루 공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고문경의 관학화를 통해 고문학 융성의 기반을 다졌다. 왕망의 정치적 동맹자로서 황실 서고 관리자로 활동하며 고대 텍스트를 정리하고 편집하여 중국 철학과 역사의 여러 정통 규범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좌전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도서 분류 시스템과 도서 표기 시스템을 구축하여 목록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원주율을 3.1547로 계산하여 이전의 3이라는 값보다 더 정확한 근사값을 제시했으며, 삼통력을 만들어 중국력의 틀을 만들었다. 또한, 황종거서설을 통해 도량형을 규정하는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고, 신나라의 표준기 "가량" 제작에 참여했다.

분 · 치(10분) · 척(10치) · 장(10척) · 인(10장)
약 · 합(2약) · 승(10합) · 두(10승) · 곡(10두)
수 · 냥(24수) · 근(16냥) · 균(30근) · 석(4균)



그러나 유흠은 왕망을 도와 신나라 건국에 기여하고, 오행 이론에 따라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청나라 창저우 학파의 캉유웨이를 비롯한 고대 의심 학파는 유흠이 춘추좌씨전, 주역 등 고문경을 위조했다고 주장했다.

5. 1. 경학에 미친 영향

강유위를 시작으로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은 유흠이 역사적 텍스트를 위조했다고 비난했다.[6] 이러한 비판은 고대 의심 학파 역사가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분석되었다. 치앤무가 1930년에 처음으로 명확히 밝힌 바와 같이,[7] 유흠은 정치적 목적으로 고대 텍스트, 특히 ''주례'', ''좌전'',[8] 그리고 ''시경''의 모씨(毛氏) 주석을 편집했다는 것이다. 17세기 말 옌뤄취는 전해져 내려오는 ''서경''이 대부분 4세기에 만들어진 위조물임을 입증했는데, 이 또한 유흠의 위조 혐의에 대한 정당한 선례가 되었다.

유흠은 왕망의 정치적 동맹자였으며, 왕망은 서기 1세기에 신나라를 건국하여 잠시 한나라 왕조를 찬탈했다. 황실 서고 관리자였던 유흠은 고대 텍스트의 최종 교정을 확립하고 다른 버전을 삭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비난자들에 따르면, 유흠은 고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을 위조했고,[9] 고대 통치자들의 전설적인 계보에 인물이나 관계를 삽입하여 오행 이론을 만족시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위조된 기록은 한나라와 신나라의 통치를 오행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두 왕조의 조상 사이의 계승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유흠의 위조 가능성은 중국의 합리주의적 과거를 찾는 고대 의심 학파에게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10] 그들은 유흠이 편집한 텍스트와 이전 또는 동시대 텍스트 간의 불일치에서 증거를 찾았다. 예를 들어, 유흠의 편집본에 나타나는 인물이나 사건이 이전 또는 동시대 텍스트에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조 이론은 대부분 신뢰를 잃었다.[8]

유흠은 오경 모두를 공부하여, 이전의 한 가지 경전만 전수하는 흐름에 대해 여러 경전을 두루 공부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또한, 그동안 소홀하게 취급되었던 고문경의 관학화를 꾀하여 고문학을 일으켜 후한 이후 고문학 융성의 기반을 다졌다. 의 창저우 학파 캉유웨이 등은 유흠이 고문경을 위작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구제강, 코다 로한 등도 그와 비슷한 설을 발표하고 있다.

유흠이 경전 위조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는 경서는 다음과 같다.

경서내용
춘추좌씨전코다 로한은 유흠 또는 그 일문이 『사기』를 고쳐서 본래 『춘추』의 주석서가 아니었던 『좌씨춘추』를 『춘추좌씨전』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주석서처럼 보이게 했다고 의심한다. 구제강은 『국어』에서 유흠이 『춘추좌씨전』을 창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춘추좌씨전』 본문에 종종 등장하여 역사 사실에 논평하는 "군자"라는 자의 정체는 유흠이라는 설도 있다.
주역캉유웨이는 『주역』의 주석인 십익은 계사전을 제외하고 모두 유흠이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캉유웨이는 유흠이 주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내용을 고쳐 주나라의 문왕과 주공단에 연관시키고, "허베이 여자"가 진시황제의 분서를 피한 『주역』을 발견했다는 창작 실화까지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5. 2. 목록학에 미친 영향

제국 도서관의 관리자로서 유흠은 최초로 도서 분류 시스템과 최초의 도서 표기 시스템을 구축했다. 당시 도서 목록은 고운 비단 두루마리에 작성되어 비단 주머니에 보관되었다.[3] 유흠의 《칠략》(七略중국어; "일곱 가지 개요")은 현존하지 않지만, 이는 이후의 서지학 논문인 《한서》의 《예문지》(藝文志중국어; "예술과 문학에 관한 논문")의 기초가 되었으며,[4] 이는 이후의 제국 서지학의 모델이 되었다.

황실 사서로서 유흠은 고대 텍스트를 목록화하고 주석을 달거나 편집했다. 이러한 그의 프로젝트는 중국 철학과 역사의 여러 정통 규범에 대한 결정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냈다.

유흠은 《좌전》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문학 학자였던 그는 《좌전》의 초기 그래픽 형식에 매료되었는데, 이는 경쟁 관계에 있는 《춘추》 주석 전통에서 발견되는 복합적인 주석을 방해했다. 유흠은 은함(尹咸중국어)의 도움을 받아 《좌전》을 편집하면서 《공양전》과 《곡량전》 주석과 같이 《춘추》 연대기에 더 깔끔하게 매핑하기 위해 자료를 연대순으로 재정렬했다. 그는 황실 학자를 이 작업에 배정하여 공식적인 정통성에서 정경으로의 중요한 관료적 단계를 밟고자 했다.

유흠의 《좌전》 옹호는 그의 시대에 논란이 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그 혈통과 이전 평판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그 상황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 때문이었다. 이러한 학문적 논쟁은 때때로 변형된 스크립트로 작성된 고전 텍스트에 대한 더 큰 논쟁의 증거로 여겨진다.

유향은 궁중의 도서를 정리할 때, 책 한 권 한 권에 해제를 붙여 『별록』을 만들었지만, 유흠은 그것을 정리하여 중국 현존 최고(最古)의 『칠략』이라는 서적 목록을 만들었다. 이것이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 수록되었고, 그 이후의 도서 분류, 더 나아가 학문의 카테고리의 규범이 되었다.

5. 3. 역법과 도량형에 미친 영향



왕망을 건국하기 전(재위 9–23) 수 세기 동안, 중국인들은 원의 둘레와 지름의 비율인 원주율을 3으로 계산했다.[11] 서기 1년에서 5년 사이, 유흠은 π ≈ 3.1547이라는 개선된 근사값을 제시한 최초의 중국 연구자였다.[12] 하지만 그가 이 수치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한 정확한 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13] 유흠이 설계하여 측정에 사용한 ''가량'' 표준은 여전히 남아있다. 중국학조지프 니덤은 베이징에서 이를 검토하고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표준화된 ''가량 호''(chia liang hu)는 각 변이 1척(chhih, 피트) 길이의 정사각형과 그 바깥의 원을 가지고 있다. 정사각형의 각 모서리에서 원까지의 거리(''thiao phang'')는 9리 5호이다. 원의 면적(''무'')은 162제곱촌(tshun, 인치)이고, 깊이는 1척(피트)이며, 부피(전체)는 1620세제곱촌(인치)이다.[13]

이후 장형(78–139)과 유휘(3세기 활동)와 같은 초기 중국 수학자들은 유흠의 원주율 계산을 개선했고,[14] 조충지(429–500)에 의해 다시 개선되었다.

왕망은 고대 성군들의 방식을 따라 질서와 평화의 황금기를 재현하고자 했다. 유흠은 왕망을 도와 이러한 야심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왕망은 유흠을 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고귀한 대신인 사보(四輔, 별자리에서 유래) 중 하나인 국사(國師, "교수")로 임명했다. 유흠은 정부 개혁의 일환으로 "신신공"(嘉新公)이라는 칭호를 받고, 액체 부피와 악기 음높이의 표준화에 기여했다. '가량호(jialiang hu)'는 법령에 의해 규정된 액체 부피의 다섯 가지 척도의 표준으로 설계되었으며, 각 척도에 대한 별도의 구획으로 구성되었다.

유흠은 한서에 '율력지'(律曆志, "표준 및 역법에 관한 논문")를 저술하여 한나라의 수학, 도량형, 음향, 무게, 균형, 오행 이론을 통한 달력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기록했다.

유흠은 태초력을 보완하여 삼통력을 만들었다. 삼통력은 태양, , 행성의 운행까지 계산하는 천체력으로서, 중국력의 틀을 만들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공화 원년(기원전 841년) 이전의 기년이 명확하지 않지만, 유흠은 『삼통력』의 초진기년법을 통해 고전 속 천문 현상 기사를 토대로 연대를 추산하여 기년을 실시했다.

『삼통력』의 황종거서설은 이후 중국 도량형을 규정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 길이(도)는 거서(검은 기장) 한 알의 폭을 1분, 90분을 황종률관 길이(9치)로 정의했다.
  • 용량(량)은 거서 1200알이 들어가는 황종률관 용적(810세제곱분)을 1약으로 정의했다.
  • 무게(권)는 1약에 들어가는 거서 1200알의 무게를 12수로 정의했다.


신나라에서 도량형 개정 시 배포된 표준기 "가량"은 이 이론을 실천한 것이며, 신나라 멸망 후에도 청나라 멸망 시까지 참고 자료로 보존되었다.

분 · 치(10분) · 척(10치) · 장(10척) · 인(10장)
약 · 합(2약) · 승(10합) · 두(10승) · 곡(10두)
수 · 냥(24수) · 근(16냥) · 균(30근) · 석(4균)


5. 4. 경전 위조 의혹

서한 시대 말기, 공안국이 발견한 "고문"으로 쓰여진 필사본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이 고문은 동주 시대 진나라의 보수적인 문자에서 분화된 것이었다. 진나라 통일 이후 표준이 되었지만, 다양한 형태로 인해 한나라 학자들은 해독에 어려움을 겪었다.[5]

19세기부터 20세기 초, 강유위를 시작으로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은 유흠이 역사적 텍스트를 위조했다고 비난했다.[6] 고대 의심 학파 역사가들은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했는데, 치앤무가 1930년에 처음 명확히 밝힌 바와 같이,[7] 유흠이 정치적 목적으로 ''주례'', ''좌전'',[8] ''시경''의 모씨(毛氏) 주석을 편집했다는 것이다.[9] 17세기 말 옌뤄취는 전해져 내려오는 ''서경''이 4세기에 만들어진 위조물임을 입증했는데, 이는 유흠의 위조 혐의에 대한 선례가 되었다.

유흠은 왕망의 정치적 동맹자였으며, 왕망은 신나라를 세워 한나라를 찬탈했다. 유흠은 황실 서고 관리자로서 고대 텍스트의 최종 교정을 확립하고 다른 버전을 삭제할 권한을 가졌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유흠은 고대 역사 기록을 위조하고,[9] 전설적인 계보에 인물을 삽입하여 오행 이론에 맞추어 한나라와 신나라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했다.

유흠의 위조 가능성은 중국 합리주의적 과거를 찾는 고대 의심 학파에게 중요한 질문이었다.[10] 그러나 이러한 위조 이론은 대부분 신뢰를 잃었다.[8]

청나라 창저우 학파의 캉유웨이 등은 유흠이 고문경을 위작했다고 생각했으며, 구제강, 코다 로한 등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유흠이 위조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는 경전은 다음과 같다.

경전내용
춘추좌씨전코다 로한은 유흠 또는 그 일문이 『사기』를 고쳐 『좌씨춘추』를 『춘추좌씨전』으로 보이게 했다고 의심했다. 구제강은 『국어』를 바탕으로 유흠이 『춘추좌씨전』을 창작했다고 주장했다.
주역캉유웨이는 십익(계사전 제외)이 유흠의 위조라고 주장했다. 캉유웨이는 유흠이 주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내용을 고쳐 주나라 문왕과 주공단과 연결하고, "허베이 여자"가 진시황의 분서를 피한 『주역』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주장했다.


5. 5. 왕망의 조력자라는 비판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강유위를 시작으로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은 유흠이 역사적 텍스트를 위조할 정도로 과도한 편집을 했다고 비난했다.[6] 이러한 비판은 고대 의심 학파 역사가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분석되었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치앤무가 1930년에 처음으로 명확히 밝힌 바와 같이,[7] 유흠은 정치적 목적으로 고대 텍스트, 특히 ''주례'', ''좌전'',[8] 그리고 ''시경''의 모씨(毛氏) 주석을 편집했다. 17세기 말 옌뤄취는 전해져 내려오는 ''서경''이 대부분 4세기에 만들어진 위조물임을 입증했는데, 이러한 위조 혐의에는 정당한 선례가 있었다.

유흠은 왕망의 정치적 동맹자였으며, 왕망은 서기 1세기에 신나라로 알려진 짧은 기간 동안 한나라 왕조를 찬탈하였다. 황실 서고 관리자로서 유흠은 고대 텍스트의 최종 교정을 확립하고 다른 버전을 삭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비난자들에 따르면, 유흠은 고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을 위조했고,[9] 고대 통치자들의 전설적인 계보에 발명되었거나 별개의 전설에서 차용한 인물이나 관계를 삽입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각 통치자 및/또는 왕조가 다섯 가지 전통적인 중국 요소(''오행'') 중 하나를 나타내고, 그 사이에서 천명이 회전하는 "오행" 이론을 만족시키는 고대 통치자와 연속적인 왕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위조된 기록은 한나라와 신나라의 통치를 그들이 나타낸다고 하는 오행의 관점에서 만족스럽게 설명해주었으며, 위조 이론에 따르면 유흠이 편집한 기록은 한씨와 신씨의 다양한 조상 사이의 일련의 계승을 편리하게 보여주었다.

유흠의 위조 가능성은 중국의 합리주의적 과거를 찾는 고대 의심 학파에게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10] 그들은 유흠이 편집한 텍스트와 이전 또는 동시대 텍스트 간의 불일치에서 증거를 찾았다. 예를 들어, 유흠의 편집본에 나타나는 인물이나 사건은 이전 또는 동시대 텍스트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위조 이론은 대부분 신뢰를 잃었다.[8]

참조

[1]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the Qin, Former Han and Xin Periods (221 BC - AD 24) Brill
[2] 서적 The Songs of the South Penguin Classics 1985
[3] 간행물 Epistemic foundation of bibliographic classification in early China: A ''Ru'' classicist perspective 2012
[4] 간행물 The "Yiwen zhi" 藝文志 (Treatise on Arts and Letters) Bibliography in Its Own Context 2018
[5] 간행물 Purposes and Bibliographic Objectives of a Pioneer Library Catalog in Chin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04
[6] 서적 Statecraft and Classical Learning: The ''Rituals of Zhou'' in East Asian History Brill 2010
[7] 간행물 1930
[8]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ese Literature. ''Volume 1: To 137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9] 서적 China: A Cultural and Historical Dictionary Routledge 2013
[10] 간행물 The Old Text/New Text Controversy. Has the 20th Century Got It Wrong? Brill 1994
[11] 문헌
[12] 서적 https://books.google[...] Taiwan Commercial Printing House 1991
[13] 문헌
[14] 문헌
[15] 문헌
[16] 간행물 Review: ''Cosmology and Political Culture in Early China''. Cambridge Studies in Chinese History, Literature and Institutions, vol. 20 by Aihe Wang 2001
[17] 뉴스 No planet named George https://www.nytimes.[...] 1976-03-07
[18] 문서 『古今偽書考巻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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