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순 (18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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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경순은 1855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갑신정변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는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갑신정변을 준비했으며, 1883년 일본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갑신정변 당시에는 우정국 습격, 민영익 암살 시도, 윤태준 척살 등에 가담했으나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체포되어 1885년 12월 23일 참수되었다. 사후, 1908년에 죄명이 벗겨졌다.
1855년(철종 6년) 한성부 동부(東部) 동문 밖 홍수동(紅樹洞)에서 윤흥진(尹興鎭)의 손자이자, 윤광운(尹光運)과 한치복(韓致福)의 딸 한조이(韓召史)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일은 미상이다. 5년 연상이었던 그의 누나 윤조이는 부평군 서면에 사는 박사경(朴士京)에게 출가하였다. 형제들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고,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5년 연하의 동생 윤경완(다른 이름은 윤계완)이 있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아버지 윤광운은 딸 윤조이가 사는 곳 근처에서 생활했다.
1907년 11월 18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법부 대신 조중응이 윤경순의 죄명을 벗겨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되었다. 1908년 3월 25일 이완용, 조중응 등이 다시 상주하여 죄명이 벗겨졌다.[1]
[1]
서적
불우지사 김옥균 선생 실기
한국국학진흥원
2. 생애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한성부 동대문 밖에서 장작 장사를 했고, 동생 윤경완은 무청(菁根) 장사를 하였다. 그는 장작 장사를 하면서 박영효와 서재필을 만나 사상에 감화되었다. 이후 박영효, 서재필 등의 집에 드나들면서 서재필, 이인종(李寅鍾), 이규완(李圭完), 황용택(黃龍澤), 최은동(崔恩同), 서재창, 신중모(申重模) 등을 알게 되었으며, 압구정에서 회합하고 1884년 갑신정변에 참가하였다.
1883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과 함께 입학하였다. 1884년 7월 수료하고 귀국, 병조 조련국의 교관이 되어 사관생도를 양성하였다. 갑신정변 거사 직전 서재필의 지휘하에 개화당의 행동대원으로 활동하며 거사를 준비, 모의하였다.
갑신정변 직전 윤경순은 정보 입수를 맡았다. 정변 소문이 퍼지자, 정보 탐색과 무기 구입을 담당했다.[2] 1884년 11월 고종이 김옥균을 부르자 개화파는 긴장했고, 윤경순 등은 정보를 수집하고 무기를 구입하는 데 힘썼다.[2]
12월 2일 박영효의 집에서 거사를 계획했을 때, 윤경순은 이규완, 임은명, 서재필, 홍영식 등과 함께 있었다.[3] 이들은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3]
거사 당일, 윤경순은 이인종의 지휘 아래 이규완, 임은명, 최은룡과 함께 별궁에 방화하는 임무를 맡았다.[3][4] 이들은 서광범의 집에 보관해 둔 화약과 석유를 담은 병(화염병)을 이용하여 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계획했다.[4]
수구파 대신 암살 계획에서 윤경순은 민영익 암살조에 편성되었다. 윤경순은 이은종과 함께 민영익을 담당하기로 했다.[5] 그러나 민영익은 서재창에게 피습되어 한쪽 눈을 찔렸다.[5]
갑신정변 당시 윤경순은 사관생도를 이끌고 우정국 근처에 매복했다가 민영익을 습격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경복궁을 지키던 윤태준을 철퇴로 쳐서 죽였다.[6] 윤태준은 소중문 밖에서 대기하던 이규완과 윤경순에게 죽임을 당했다.[6]
경우궁 뒷문으로 나온 이조연과 한규직은 황용택, 윤경순, 이규완, 고영석에게 살해당했다.[7] 윤경순은 경복궁으로 들어가 민영목, 조영하 등을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밤에 전라도 곡성으로 도피하여 배추장수로 행세하며 신분을 숨겼다.[8] 1885년(고종 22년) 초 누이가 살던 경기도 부평에 왔다가 관원에게 잡혀 의금부에 투옥당했다. 1885년 12월 23일 추국청에서 모반대역부도죄로 참수되었다.
최종 판결 당시 동생 윤계완은 함께 처형당했다. 누나 윤조이(尹召史)는 출가외인이라 하여 목숨을 건졌고, 어머니 한조이(韓召史)는 1886년 초에 사망했다. 아버지 윤광운은 연좌제로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 의금부의 거듭된 탄핵으로 1886년 5월 22일 참수형을 당했다. 연좌제는 할아버지 윤흥진과 외할아버지 한치복에게까지 적용되었으나 이들은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부관참시를 당했다.
2. 1. 초기 활동
1855년(철종 6년) 한성부 동부(東部) 동문 밖 홍수동(紅樹洞)에서 윤흥진(尹興鎭)의 손자이자, 윤광운(尹光運)과 한치복(韓致福)의 딸 한조이(韓召史)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일은 미상이다. 5년 연상이었던 그의 누나 윤조이는 부평군 서면에 사는 박사경(朴士京)에게 출가하였다. 형제들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고,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5년 연하의 동생 윤경완(다른 이름은 윤계완)이 있었다. 그가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도주했을 때 아버지 윤광운은 딸 윤조이가 사는 곳 근처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처음에는 한성부 동대문 밖에서 장작 장사를 했고, 그의 동생 윤경완은 무청(菁根) 장사를 하였다. 그는 장작 장사를 하면서 박영효와 서재필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되어 동지가 되었다. 이후 박영효, 서재필 등의 집에 드나들면서 서재필, 이인종(李寅鍾), 이규완(李圭完), 황용택(黃龍澤), 최은동(崔恩同), 서재창, 신중모(申重模) 등을 만나 알게 되었으며, 압구정에서 회합하고 1884년의 갑신정변에 참가하였다.
1883년 관비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일본으로 유학,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과 함께 입학하였다. 1884년 7월 수료하고 귀국, 병조 조련국의 교관이 되어 사관생도를 양성하였다. 갑신정변 거사 직전 서재필의 지휘하에 있던 개화당의 행동대원으로 활동하며 거사를 준비, 모의하였다.
2. 2. 갑신정변 참여
갑신정변 직전 윤경순은 다른 무사들과 함께 정보 입수를 맡았다. 정변 소문이 퍼지자, 신속하게 정보 탐색과 무기 구입을 담당했다.[2] 1884년 11월 고종이 김옥균을 부르자 개화파는 긴장했고, 윤경순 등은 각 방면의 정보를 수집하고 무기를 구입하는 데 힘썼다.[2]
12월 2일 박영효의 집에 모여 거사를 계획했을 때, 윤경순은 이규완, 임은명, 서재필, 홍영식 등과 함께 있었다.[3] 이들은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3]
거사 당일, 윤경순은 이인종의 지휘 아래 이규완, 임은명, 최은룡과 함께 별궁에 방화하는 임무를 맡았다.[3][4] 이들은 서광범의 집에 보관해 둔 화약과 석유를 담은 병(화염병)을 이용하여 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계획했다.[4]
수구파 대신 암살 계획에서 윤경순은 민영익 암살조에 편성되었다. 윤경순은 이은종과 함께 민영익을 담당하기로 했다.[5] 그러나 민영익은 서재창에게 피습되어 한쪽 눈을 찔렸다.[5]
갑신정변 당시 윤경순은 사관생도를 이끌고 우정국 근처에 매복했다가 민영익을 습격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경복궁을 지키던 윤태준을 철퇴로 쳐서 죽였다.[6] 윤태준은 소중문 밖에서 대기하던 이규완과 윤경순에게 죽임을 당했다.[6]
경우궁 뒷문으로 나온 이조연과 한규직은 황용택, 윤경순, 이규완, 고영석에게 살해당했다.[7] 윤경순은 경복궁으로 들어가 민영목, 조영하 등을 살해하는 데 가담했다.
2. 3. 체포와 최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밤에 전라도 곡성으로 도피하여 은신하였다. 이때 그는 배추장수로 행세하며 신분을 숨겼다.[8] 1885년(고종 22년) 초 누이가 살던 경기도 부평에 왔다가 관원에게 잡혀 의금부에 투옥당했다. 1885년(고종 22년) 12월 23일 추국청에서 모반대역부도죄로 참수되었다.
최종 판결 당시 함께 정변에 가담한 동생 윤계완은 함께 처형당했다. 누나 윤조이(尹召史)는 이미 시집간 지 오래되어 출가외인이라 하여 목숨을 건졌고, 어머니 한조이(韓召史)는 1886년 초에 사망했다. 그때까지 살아있던 아버지 윤광운은 연좌제로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 의금부의 거듭된 탄핵으로 1886년 5월 22일 참수형을 당했다. 연좌제는 할아버지 윤흥진과 외할아버지 한치복에게까지 적용되었으나 이들은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부관참시를 당했다.
3. 사후
4. 가족 관계
관계 이름 출생 사망 할아버지 윤흥진(尹興鎭) 아버지 윤광운(尹光運) 1817년 1886년 5월 22일 어머니 한조이(韓召史) 1886년 누이 윤조이(尹召史) 1850년 매부 박사경(朴士京) 동생 윤경완(尹景完) 또는 윤계완(尹啓完)[9] 1860년 1885년 12월 23일 부인 미상 (연좌제로 노비가 됨) 외할아버지 한치복(韓致福)
참조
[2]
서적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3]
서적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4]
서적
한국사 이야기 18:민중의 함성 동학농민전쟁
한길사
[5]
서적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6]
서적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7]
서적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8]
서적
한국사 이야기 18:민중의 함성 동학농민전쟁
한길사
[9]
문서
승정원일기, 갑신일록(甲申日錄), 서재필박사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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