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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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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규완은 1862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갑신정변에 가담한 개화파 인물로, 이후 일본 유학, 망명 생활, 관료 생활을 거쳤다. 그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야마구치현에서 정착, 결혼했다. 귀국 후에는 통위영 정령관, 경무관 등을 역임하며 갑오개혁에 참여했고, 이후에는 친일 행보를 보이며 강원도, 함경남도 도지사를 지냈다. 이규완은 근검절약, 민족성 개조를 강조하며 황무지 개간과 농업 활동에 헌신했으며, 1946년 사망했다. 그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는 인물로, 박영효는 그를 가장 신뢰하는 동지로 평가했고, 조선총독부에서는 친일적 성향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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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규완, 1930년
이름이규완
한자 표기李圭完
일본어 표기아사다 료 (淺田良), 아사다 료이치 (淺田良一)
출생일1862년 11월 15일
출생지경기도 광주
사망일1946년 12월 15일
사망 원인병사 (중풍, 등창, 노환 등)
사망 장소강원도 춘천부 석사동
국적대한민국
별칭초명은 치규(致圭), 다른 이름은 규관(圭寬) 또는 규완(奎完), 일본식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 아사다 료이치(淺田良一)
직업군인, 무신, 정치인, 농업인
종교유교(성리학) → 기독교
가족아버지 이기혁, 어머니 유씨, 계모 기계유씨
배우자본부인 이름 미상 (이혼), 중촌매자 (일본인)
자녀아들 이각일, 아들 이선길, 아들 이영일, 아들 이재길, 아들 이대길, 딸 이송자, 딸 이춘자, 딸 이부자, 딸 이절자
친척형 이윤필, 사촌 형 이종필, 매부 강성형, 장인 나카무라 이치, 장모 마가렛 고츠, 사돈 김갑순
병역 정보
복무조선 병조, 대한제국 육군
복무 기간1882년 ~ 1884년 12월 7일, 1905년 11월 23일 ~ 1907년 11월
최종 계급조선 육군 하사관, 대한제국 육군 소장
근무병조 조련국, 대한제국 육군
지휘병조 조련국
주요 참전 전투/전쟁갑신정변
경력
주요 이력강원도관찰사, 춘천농립고등학교장, 강원도장관, 함경남도장관, 함경남도지사, 동양척식회사 고문, 강원도지사 고문
학력
학력일본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 졸업

2. 생애

이규완은 1862년 11월 15일 한성부 뚝섬에서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왕족으로서의 신분은 11대 조상에서 끝났다.[1]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의붓어머니에게 길러졌지만 15세 때 의붓어머니마저 사망했다. 이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에 있던 숙부의 집에 살다가 상경하여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다.[7]

1883년 1월, 박영효의 주선으로 청나라 상해에서 기기 조립 기술을 배우고 귀국했다.[7] 같은 해 3월 일본 파견 유학생 선발 시험에서 신분 때문에 배제되었으나, 박영효를 설득하여 4월에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7] 5월 게이오기주쿠에 입학하여 1884년 2월에 수료하고, 육군 도야마 학교에 입학했다.[7] 6월 28일 귀국 직전 별군관으로 임명되어 7월에 귀국, 병조 조련국의 교관으로 활동했다.[7]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에 행동대로 참가하여, 우정국 정문에 숨어 있던 수구파 대신들을 기습 공격했다.[8] 정변 실패 후,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북관왕묘에 숨었다가 인천에 정박해 있던 일본 선박 지토세마루에 승선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8]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양잠업을 하던 나카무라 하지메의 친척이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일하다가, 나카무라 하지메의 딸 나카무라 우메코와 1896년 7월 15일 결혼했다.

1894년 사면받고 귀국했지만, 이듬해 박영효의 쿠데타에 연루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4] 1907년 5월 11일 서북영림창의 부관으로 임명되었고, 7월에는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5] 1908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1910년 일제강점기에도 강원도 관찰사 직책에 다시 임명되었다.[5] 1918년 함경남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7년 후에 사임했다.[5]

만년에는 농업과 황무지 개간, 자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5] 그는 근면과 절약을 중요하게 여기며, 게으름과 나태함을 혐오했다.[5]

2. 1. 초기 활동

이규완은 경기도 광주에서 조선 왕조 왕족이자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 이기혁은 나무꾼이었으며,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가족과 소원했다. 이후 아버지는 재혼했다.

젊은 시절 박영효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1883년 일본 유학을 주선받았다.[2] 1884년 조선으로 돌아와 군직에 임명되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군사 지도자로 참여했다.[3] 정변 실패 후, 일본 야마구치로 탈출, 시모노세키, 후쿠오카혼슈 남동쪽 지역을 방랑했다. 일본 체류 중 나카무라 가문 소유 견직 공장과 정미소에서 일했고, 당시 일본 주재 미국 외교관이었던 나카무라 이치의 딸 나카무라 우메코(中村梅子)와 1896년 7월 15일 결혼했다.

1894년 사면받고 귀국했으나, 이듬해 박영효의 쿠데타에 연루되어 다시 탈출했다.[4]

2. 1. 1. 출생과 초기 활동

1862년(철종 13년) 11월 15일 한성부 뚝섬에서 나무 장수와 장터 행상을 하던 이기혁과 유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이자 족보상 이름은 치규(致圭)이다. 집안은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손으로, 임영대군의 여섯째 아들 오산군 이주(烏山君 李澍)의 14대손이다.[1]

왕족으로써의 예우는 13대조 오산군 이주(烏山君 李澍) 대에서 끝났고, 후손 중 일부가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에 정착하였다. 10대조 이사백(李思白)이 직장을 역임했지만 직계에서는 더이상 벼슬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이기혁은 한성부 뚝섬에서 나무 장수와 행상 등으로 생계를 영위했다. 한성 뚝섬의 나무 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배우지도 못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11] 1905년 무렵 주소지를 강원도 춘천군 부내면 위천리(府內面 渭川里)로 옮겼다.

9살에 어머니 유씨를 잃고 계모 기계유씨(杞溪兪氏) 슬하에서 자랐으나 1876년에 새어머니 기계유씨도 사망하였다. 소년기 때는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의 숙부 집에서 거처하다가 다시 상경, 박영효의 행차 모습을 보고 그의 집을 방문, 초라한 행색을 보고 쫓아내는 박영효집 하인들과 몇번의 실랑이 끝에 박영효 집의 출입을 허락받았다. 이후 박영효 가문에 출입하다가 그의 식객이 되었다.

젊은 시절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다가 박영효 집의 청지기가 되었으며 그의 수하에 들어가면서 개화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무학이었는데, 박영효가 특별히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12] 글을 가르쳐 일본으로 유학까지 보내주었다. 이후로 평생에 걸쳐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한다.

1883년(고종 20년) 1월 청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기기(機器, 기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그해 3월 귀국하였다.[13] 박영효서재필 등의 추천과 후원으로 1883년(고종 20년) 4월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하게 된다. 김옥균에게서 학비를 받은 그는 1883년 4월 서재필, 서재창 등 61명의 관비유학생과 함께 배편으로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이규완은 택견의 명인이었다. 몸놀림이 빠르고 성격이 성실해서 박영효의 호신인 노릇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15]

1883년(고종 20년) 5월 이규완은 서재필 등과 함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학문을 배웠다. 1884년 2월 게이오 의숙을 수료하였다.

2. 1. 2. 일본 유학

1883년(고종 20년) 1월 청나라 북경에 파견되어 기기(機器, 기계)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그해 3월 귀국하였다. 통리교섭통상아문일기에 의하면 "이 해에는 이규완, 김완식(金完植), 김학승(金學升)이 기기를 배우게 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보냈다.[13]"고 하였다. 이때 익힌 기계조립 기술로 이규완은 평소 웬만한 기계와 시계는 자신이 직접 수리, 수선하였다 한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다녀온 그는 다시 일본에 가보고자, 박영효에게 거듭 간청하여 관비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었다.

1883년(고종 20년) 4월 박영효서재필 등의 추천과 후원으로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하게 된다. 박영효서재필은 이규완의 추천장을 써서 조정에 제출하여 그의 일본 유학 자격을 얻어 주었다. 김옥균에게서 학비를 받은 그는 서재필, 서재창 등 61명의 관비유학생과 함께 배편으로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이규완은 각축(脚蹴), 즉 택견의 명인이었다. 몸놀림이 빠르고 성격이 성실해서 박영효의 호신인 노릇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15]

1883년(고종 20년) 5월 서재필 등과 함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학문을 배웠다. 이때 서재필은 정규 교과과정 이외에 조선인 동기생들로부터 무예를 배웠다. 택견의 명수 이규완에게서는 택견의 고난도 품새를, 유도와 씨름에 능한 임은명에게서는 조르기, 누리기 등 유술(柔術) 전반에 대해 배웠다.[16] 한편 노론 명문가의 자제임에도 자신들에게 무예를 배우는 점과 신분과 배경에 연연하지 않는 서재필에 감격하여 그와 친구가 된다. 1884년 2월 게이오 의숙을 수료하였다.

이규완 초상화


1884년(고종 21년) 3월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장을 받고 일본육군 하사관을 교육하는 도야먀 육군하사관학교(戶山陸軍下士官學敎)에 서재필, 정란교, 서재창, 신응희 등과 함께 입학, 사관후보생이 되었다. 후에 개설된 조선 병조 조련국의 사관생도는 이때 일본의 호산(戶山) 학교 등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신복모, 서재필, 이규완, 신응희, 정난교 등을 비롯한 14명이었다.[17] 6월 28일 귀국 직전에 별군관에 임명되었고,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의 교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도야마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김옥균개화파의 영향 아래 있는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기로 하였기 때문이다.[18] 김옥균은 개화파 청년들의 한 부류를 일본 육군 도야마 학교에 입학시켜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청년들은 전공 학교에서 정치, 경찰, 우편, 관세, 재정제도와 관련된 실무지식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하였다. 군 계통의 유학은 1883년 이들이 도야마 학교에 입학한 데서 시작되었지만, 이들 유학생들은 학자금이 점차 바닥이 나 1년 후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8]

1884년 7월 일본 토야마 하사관학교를 수료하고 일본에서 더 유학하며 견문을 익히려 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의 귀국 요청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 무렵에 박영효광주부유수로 있으면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사관생도 신복모,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등을 귀국시켜 신식 군대의 양성에 착수할 계획을 세웠다. 인원은 600여 명이었다.[19]

2. 2. 귀국과 갑신정변

이규완은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왕조 왕족의 후손으로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후손이었다.[1] 그는 젊은 시절 개혁적 정치인인 박영효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1883년 일본 유학을 주선받았다.[2]

1884년 12월, 이규완은 갑신정변의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3] 정변 계획 중 서재필김옥균은 이규완을 신뢰하지 않아 서재필이 이규완을 철저하게 시험하기도 했다. 1884년 12월 4일 오후 8시에 우정국 낙성식을 틈타 이궁에 방화했고, 심야에 우정국 정문에 숨어 있던 수구파 대신들을 기습 공격했다.

정변이 실패하자, 이규완은 서재필, 김옥균, 박영효와 함께 일본 야마구치로 탈출했다. 그는 야마구치, 시모노세키, 후쿠오카혼슈 남동쪽 끝 부근 지역을 오랫동안 방랑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는 대부분 나카무라 가문이 소유한 견직 공장과 정미소의 직원이었다. 나카무라 가문의 일원인 나카무라 이치는 당시 일본 주재 미국 외교관이었다. 견직 공장 주인은 결국 이규완과 나카무라 우메코(中村梅子)를 맺어주었고, 이규완은 1896년 7월 15일에 결혼했다.

2. 2. 1. 귀국 직후

1883년 5월 일본에서 귀국 직후 조련국 교관이 되었고, 박영효의 집에서 나와 독립하였다. 이후 조련국 교관으로 병력 훈련을 맡아보았다. 박영효는 서울에 둔 일부 병력을 골간으로 하고 해산당한 훈련도감군과 지방 청년 1천여 명을 모아 별군영이라는 새로운 군영을 조직하였다.[20] 사관학교 출신인 신복모가 별군영 대장직을, 이규완은 별군영 별동대 대장직을 맡았다.[20] 그는 조련국의 교관으로 별동대장을 겸임하였다. 1884년 8월 남행부장 겸 사관에 임명되었다.

1884년 6월 28일 귀국 직전에 별군관으로 임명되어 7월에 귀국한 후 병조 조련국의 교관으로 활동했다.

2. 2. 2. 갑신정변 참여와 실패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행동대로 참가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입궐하는 민씨 대신들과 친민씨 일파를 살육하였다.[3] 그러나 갑신정변은 명성황후가 끌어들인 청나라군의 내습으로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나고, 이규완을 비롯한 정변 주역들은 북관왕묘에 숨어서 변복하고, 일본 공사관으로 은신했다가 배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12월 7일 청나라군이 덕수궁에 도착하여 왕을 내놓으라 하였다. 양쪽이 충돌하자 왕비 민씨는 청나라군 진지를 통해 이미 북관왕묘로 옮겨갔고, 고종도 뒤따라가려고 했기에 주요 인사들은 할 수 없이 일본군과 함께 이를 호위하여 나가려다 도중에 각자 판단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33] 이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유혁로, 이규완, 정난교, 신응희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 박영교와 사관 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여 청군에 넘겨 주다가 피살되었다.[34] 홍영식, 박영교 및 사관 생도 7명은 고종과 함께 북관왕묘로 향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이규완 등과 나머지 사관 생도는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33] 당시 이규완은 골절과 탈진증세에 있는 서광범을 들쳐 업고, 자신의 짐과 서광범의 짐까지 짊어지고 뛰었다 한다.

국왕을 보낸 후 일본영사관 중대장 무라카미는 대형을 편성했다. 일개 소대를 전위로 해서 다케조에 공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이규완, 유혁로, 정란교, 신응희, 변수 등을 중앙에 세우고 행진하였다.[35]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변수, 유혁로, 이규완, 신응희, 정난교 등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이날 오후 9시경 일본 공사관에 들어갔다.[36] 피신해 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신응희,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변수 등과 몇몇 개화파는 몸에 맞지도 않는 양복을 걸쳤다.[37]

정변 실패 직후 북관왕묘에 숨어서 변복하고 궁궐을 빠져나간 그는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변수 등과 함께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주선으로 일본 공사관에 일시 피신했다가, 제물포항에 정박중인 일본 국적선 지토세마루(千歲丸)에 승선했다. 인천항 언덕에서 다케조에는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등에게 배를 타지 말라고 소리질렀다.[38] 그러나 일행은 급히 배에 탑승하였다. 이때 묄렌도르프가 말을 타고 인천까지 추격하여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다시 일행에게 당장 지토세마루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고, 그는 일행과 함께 자결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지토세마루 선장인 쓰지 가쓰사부로(辻勝三郞)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신의없음을 나무란 뒤, 일행을 석탄 창고에 숨기고 그런 사람은 잠입한적이 없다고 하여 되돌려보냈다.[38]

갑신정변의 핵심 행동대원이었던 이규완은 개화당 지도자들의 나이가 적었던 점, 민중이 무지하여 정변에 호응하지 않고 도리어 '사대당'을 따르는 사람이 많았던 점, '사대당'의 배후에 있는 청나라군이 막강했던 반면 일본군의 세력이 약했던 점 등을 들어 정변의 실패를 미리 짐작했다고 술회했다.[106] 그는 또 당시 일본군의 수가 적었던 점과, 외세를 너무 믿었던 점 역시 정변의 실패 원인이라고 보았다.

2. 3. 망명 생활과 정치 활동

이규완은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3] 야마구치, 시모노세키, 후쿠오카혼슈 남동쪽 끝 부근 지역을 오랫동안 방랑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나카무라 가문이 소유한 견직 공장과 정미소에서 일했으며, 나카무라 가문의 일원인 나카무라 이치는 당시 일본 주재 미국 외교관이었다. 견직 공장 주인은 이규완과 나카무라 우메코(中村梅子)를 맺어주었고, 1896년 7월 15일에 결혼했다.

1894년 사면을 받고 귀국했지만, 이듬해 박영효의 쿠데타에 연루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4] 1907년 5월 11일 일본에 머물면서 고종에 의해 서북영림창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7월 다시 사면받고 귀국하여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2. 3. 1. 1차 망명 생활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행동대로 참가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입궐하는 민씨 대신들과 친민씨 일파를 살육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명성황후가 끌어들인 청나라군의 내습으로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나고, 이규완을 비롯한 정변의 주역들은 북관왕묘에 숨어서 변복하고, 일본 공사관으로 은신했다가 배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묄렌도르프


12월 7일 청나라군이 덕수궁에 도착하여 왕을 내놓으라 하였다. 양쪽이 충돌하자 왕비 민씨는 청나라군 진지를 통해 이미 북묘로 옮겨갔고, 고종도 뒤따라가려고 했기에 주요 인사들은 할 수 없이 일본군과 함께 이를 호위하여 나가려다 도중에 각자 판단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33] 이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유혁로, 이규완, 정난교, 신응희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 박영교와 사관 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여 청군에 넘겨 주다가 피살되었다.[34] 홍영식, 박영교 및 사관 생도 7명은 고종과 함께 북묘로 향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이규완 등과 나머지 사관 생도는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33] 당시 이규완은 골절과 탈진증세에 있는 서광범을 들쳐 업고, 자신의 짐과 서광범의 짐까지 짊어지고 뛰었다 한다.

국왕을 보낸 후 일본영사관 중대장 무라카미는 대형을 편성했다. 일개 소대를 전위로 해서 다케조에 신이치로 공사,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변수 등을 중앙에 세우고 행진하였다.[35]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변수, 유혁로, 이규완, 신응희, 정난교 등은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따라 이날 오후 9시경 일본 공사관에 들어갔다.[36] 피신해 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신응희,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변수 등과 몇몇 개화파는 몸에 맞지도 않는 양복을 걸쳤다.[37]

정변 실패 직후 북관왕묘에 숨어서 변복하고 궁궐을 빠져나간 그는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변수 등과 함께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주선으로 일본 공사관에 일시 피신했다가, 제물포항에 정박중인 일본 국적선 지토세마루에 승선했다. 인천항 언덕에서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등에게 배를 타지 말라고 소리질렀다.[38] 그러나 일행은 급히 배에 탑승하였다. 이때 묄렌도르프가 말을 타고 인천까지 추격하여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다시 일행에게 당장 지토세마루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고, 그는 일행과 함께 자결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지토세마루 선장인 쓰지 가쓰사부로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신의없음을 나무란 뒤, 일행을 석탄 창고에 숨기고 그런 사람은 잠입한적이 없다고 하여 되돌려보냈다.[38]

일본으로 망명 한 이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이규완, 서재필 등 10 여 인이며,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자가 족히 10인에 달 하였다.[39] 이규완은 신분 노출을 피하기 위해 일본식 이름 외에도 규관, 규완, 주완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했다. 일본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에서 양잠업을 하던 나카무라 하지메의 친척이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잠시 일했다. 이때 만난 나카무라 하지메의 딸 나카무라 우메코와 결혼하게 된다. 나카무라 우메코는 나카무라 하지메가 미국 주재 일본 대사관 직원으로 있을 때, 미국 여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사생아였다. 나카무라 하지메가 이미 유부남임을 알게 된 미국 여성은 딸을 나카무라 하지메에게 보냈다. 1886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농장 점원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다 1888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2. 3. 2. 귀국과 2차 망명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행동대로 참가했다. 갑신정변 당시 이규완은 입궐하는 민씨 대신들과 친민씨 일파를 살육하였다.[3] 그러나 갑신정변은 명성황후가 끌어들인 청나라군의 내습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규완을 비롯한 정변 주역들은 북관왕묘에 숨어서 변복하고 일본 공사관으로 은신했다가 배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변수, 유혁로, 이규완, 신응희, 정난교 등은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했다.[33] 당시 이규완은 골절과 탈진 증세에 있던 서광범을 들쳐 업고 자신의 짐과 서광범의 짐까지 짊어지고 뛰었다고 한다.

정변 실패 직후, 이규완은 박영효, 서재필, 김옥균, 변수 등과 함께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주선으로 일본 공사관에 일시 피신했다가, 제물포항에 정박 중인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千歲丸)에 승선했다.[38] 인천항 언덕에서 다케조에는 김옥균, 박영효, 이규완 등에게 배를 타지 말라고 소리 질렀지만, 일행은 급히 배에 탑승하였다.[38] 이때 묄렌도르프가 말을 타고 인천까지 추격하여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다시 일행에게 당장 치토세마루에서 내릴 것을 요구했고, 그는 일행과 함께 자결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천세환 선장인 츠지 가츠사부로(辻勝三郞)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신의 없음을 나무란 뒤, 일행을 석탄 창고에 숨기고 그런 사람은 잠입한 적이 없다고 하여 되돌려보냈다.[38]

일본으로 망명한 이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이규완, 서재필 등 10여 인이었다.[39] 이규완은 신분 노출을 피하기 위해 일본식 이름 외에도 규관, 규완, 주완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했다. 일본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에서 양잠업을 하던 나카무라 하지메의 친척이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잠시 일했다. 이때 만난 나카무라 하지메의 딸 나카무라 우메코와 결혼하게 된다. 나카무라 우메코는 나카무라 하지메가 미국 주재 일본 대사관 직원으로 있을 때, 미국 여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사생아였다. 1886년미국으로 돌아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농장 점원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다 1888년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1894년, 이규완은 사면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듬해 박영효의 쿠데타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4]

2. 3. 3. 고종 축출 기도와 3차 망명

1894년 (고종 31년) 11월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구성되어 갑오경장을 단행하면서 박영효와 함께 10년 만에 귀국했다.[56] 귀국 직후 통위영 정령관(統衛營正領官)이 되고 곧 경무청 경무관(警務廳警務官)으로 발탁되었다. 같은 해 11월 13일 고종은 금릉위 박영효의 직첩을 되돌려주고, 아울러 갑신정변에 관련되었던 대역죄인들도 모두 사면한다고 선언했다.[56] 이미 국내에 잠입해있던 서광범, 이규완, 정란교 등은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56] 12월 10일 3품으로 승진하여 경무관이 되었다.

김학우 암살 사건이 터지자 박영효의 집사 출신 이규완이 체포와 수사를 맡았다.[28] 흥선대원군과 동학군이 손잡고 민씨 정권 타도를 계획하자 그는 이준용을 직접 체포하기도 했다. 1895년 3월 23일 경무관 이규완이 지휘하는 30여 명의 순검은 지체없이 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을 덮쳤다. 대원군은 이규완의 말을 듣고 진노하였다.

이규완은 물러서지 않고, 흥선대원군에게 김학우를 암살하고 개화당을 일망타진하려 한 자가 이준용이라고 대들었다. 이규완은 대원군 부부가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두들겨 패면서 포박했다.[58] 이준용은 체포를 거절하고 거칠게 저항했고, 이규완은 직접 이준용을 구타하여 쓰러뜨렸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호통쳤지만 굴하지 않고, 체포를 거부하는 이준용을 대원군 면전에서 구타했다. 그는 즉시 '대역부도의 죄인이니라, 당장 끌어내어 포박하렸다.[57]'라고 명하였다. 대원군의 격노도 왕명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57] 경무관 이규완의 일갈이 있자 순검들은 지체없이 이준용을 끌어내어 포박했다.[57] 궁내부 대신인 이재면은 끌려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봤다. 그는 이준용에게 김학우 암살 혐의와 개화파 암살 미수 혐의를 말하고 체포해갔다. 4월 1일 경무관 칙임관 2등에 임명되었다.

1894년, 그는 사면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듬해 그는 박영효의 쿠데타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졌다. 둘 다 탈출했다.[4]

2. 4. 관료 생활

이규완은 제1차 갑오 개혁 당시 박영효, 서광범 계열의 개혁 관료로서 활약하였다.[59] 그는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의 왼쪽 귀 하나를 일본도로 쳐서 끊어냈던 것으로 검술 실력을 인정받아 경무청 순사로 채용되었고, 곧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1895년 5월 14일 경무관에서 면직되었으나, 청일전쟁 직후 주조선일본공사로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는 그를 후원하여 5월 15일 특별히 경무청 경무부사로 발탁되었다.

송병준이완용에게 "불알 잘 간수하시오. 저 검은 옷 입은 저 순사가 누군지 아시오"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는 이규완이 민영익의 한쪽 귀를 칼로 벤 것과 한규직을 몽둥이로 타살한 것이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고관들은 그를 배척하거나 꺼렸다.

1895년 7월 6일 춘생문 사건 직후 내부대신 박영효는 국왕의 명령으로 해임되었으며, 경무사 이윤용은 경무관 이규완, 최진한과 더불어 내부의 제청으로 해직되었다.[60] 그해 7월 박영효명성황후를 암살하려 했다가 유길준에 의해 폭로된 박영효 반역사건으로 망명하자, 이규완도 친러파의 거듭된 탄핵을 받다가 1895년 말 일본으로 다시 망명했다.

1894년 사면을 받고 귀국했지만, 이듬해 박영효의 쿠데타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다시 일본으로 탈출했다.[4] 1907년 5월 11일, 일본에 머물면서 고종에 의해 서북영림창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다시 사면을 받고 귀국하여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2. 4. 1. 강원도, 함경남도 도지사 재직

1908년, 이규완은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5] 1910년 일제강점기 하에서 다시 그 직책에 임명되었고, 1918년 함경남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7년 후에 사임했다.[5]

2. 4. 2. 황무지 개간, 농업 활동

이규완은 만년에 농업과 황무지 개간, 자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5] 그는 근면과 절약을 중요하게 여기며, 게으름과 나태함을 혐오했다. 특히 실업 상태에 있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매우 싫어했다.[5]

2. 5. 생애 후반

1894년, 이규완은 사면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듬해 박영효의 쿠데타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다시 일본으로 탈출했다.[4] 1907년 5월 11일, 일본에 머물면서 고종에게 서북영림창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7월, 다시 사면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1908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기에도 강원도 관찰사 직책에 다시 임명되었고, 1918년에는 함경남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7년 후에 사임했다. 만년에는 농업과 황무지 개간, 자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근면과 절약을 중요하게 여기며, 게으름과 나태함을 혐오했다. 특히 실업 상태에 있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매우 싫어했다.[5]

2. 5. 1. 최후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그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평소 '게으른 본성'을 가진 조선 민족에게 독립될 자격이 없다고 확신했던 그는[86], 한일 합방을 조선인의 게으름과 탐욕, 부패함이 불러낸 당연한 결과물로 인식하였다. 1910년 10월 1일 한일 합방 조약 체결과 동시에 그는 조선총독부고등관에 임용되고 강원도도장관으로 발령되었다. 그는 도장관에 임명되자, 학식의 짧음을 들어 사양하였으나 행정 실무는 실무 관원들이 처리하고 결제만 하면 된다 하여 애써 만류하였다. 한일 합방 직후부터 조선총독부 내무부와 지방행정국에 강원도 철도 개설을 직접 건의하였으나 번번히 무산되었다.

3. 사상과 신념

이규완은 며느리에게 가래질을 시켜 근검, 협동 정신을 가르쳤고, 철저한 보상주의 실행으로 노동의 가치를 깨우쳤다. 몸에 밴 검약 정신으로 자신도 신발을 직접 꿰매 신었다고 한다.[82] 매일 아침 세수 후 거울 앞에서 늘 참되자, 진실되자, 하루를 살더라도 솔직하자고 외쳤다. 취침 전에는 자신에게 참되었는지, 자신과 가족을 속이지는 않았는지 자문했다. 자신을 속이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도 거짓을 남발한다며 자신에게 솔직한 인간이 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천사와 악마, 사후세계가 있다면 게으름, 탐욕, 음란함이 악마의 유혹일 것이라고 했다. 지옥은 게으름, 담배,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범죄가 횡행하는 곳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3. 1. 가난, 게으름에 대한 비판

이규완은 가난함과 게으름을 악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2천만 명의 조선 사람 가운데 겨우 10만 명이 일하고 나머지 1,990만 명은 놀고 있다.[101]"며 한탄하였다. 그는 조선을 멸망시킨 것은 조선 백성들의 게으름과 태만함, 나태함이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백성들의 안일함과 게으름이 곧 국력을 약화시켰고, 급기야는 조선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은 동정받을 것이 아니라며,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의지력 부족, 근성 부족이야말로 최고의 악덕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2천만 명의 조선 사람 가운데 겨우 10만 명이 일하고 나머지 1,990만 명은 놀고 있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래서 거지가 밥을 얻으러 오면 밥을 먹여 주고, 그 대가로 밭갈이 노동량을 정해 주고는 그 일을 마치지 않으면 내보내주지 않았다.[101] 그는 가난한 것은 선량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고 하였다.

3. 2. 민족성 개조론

이규완은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체결 직후부터 조선인의 참정권과 자치권 허용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했다면 조선 백성들 역시 차별하지 말고, 동등한 일본 국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려면, 세금 납부 등 동일한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규완은 특혜는 부당하며, 동등한 의무 이행을 통해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민원식, 김명준, 박중양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으로 일부 지식인들은 1919년 3.1 만세 운동 이후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 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일본 정부에 조선인의 국민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1916년 4월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그는 "조선인의 부력(富力)이 내지인과 필적하게 납세 및 기타 국민된 의무를 행하게 된다면, 어찌 내지인과 똑같이 동등한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겠는가. 참정권을 획득함은 물론이고, 비록 국무대신이나 주외(駐外)의 외교사신을 조선인이라고 못할 자가 없다고 믿는다"라고 답하며, 조선인에게 참정권과 국민의 권리를 부여해야 함을 촉구했다.

이규완은 총독부에 꾸준히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 내지인과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총독부의 묵살에도 그는 조선인도 일본인과 같은 국민으로 인정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는 조선인들에게도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으려면, 일본 국민으로서 동등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규완은 조선인들의 게으름과 배관열이 나라를 망쳤다고 보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일본인미국 노동자들을 보고 조선인들의 게으름과 비열함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게으른 본성'을 가진 조선민족에게 독립될 자격이 없다고 확신하고, 그 ‘본성’을 개량하자는 의미에서 도 장관이 되어서도 작업복 차림으로 짚신을 만드는 등 ‘노동의 신성’을 실천했다.[86] 그는 조선 멸망의 원인으로 사농공상, 문존무비, 노동 천시 풍조를 지적했다.

이규완은 사회 진보와 문명화를 위해서는 나태한 민족성을 고치고, 식산흥업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근대화, 자본주의화를 위해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필수적이지만, 일제의 지배와 지도 하에 이를 이루려 했다.[102] 춘천에서 도 장관직을 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몸소 거름통을 메고 농장 일을 했고, 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어 관개용으로 양어장을 활용했다. 그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드넓은 과수원을 운영했고, 자신과 가족 모두 밭농사에 참여시켰다.

그는 노동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글읽기만 좋아하는 민족성을 개탄했다. 일본의 군사력 보다도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는 양반들부터 백정까지의 인간들이 대한제국, 조선을 망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들에게 글공부만 가르쳐 입신양명을 기대하는 부모들의 풍조를 비판하며,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자녀들과 조카들에게 실용적인 기술을 익히게 했고, 아들 이선길유도를, 다른 아들들에게는 기술, 농업 등을 익히게 했다. 이규완 스스로도 양잠업, 축산업, 농사일, 목공 기술, 기계 수리, 어망짜기, 물레재봉틀로 실 잣기 등을 익혔다.

그는 미국에서 생활하며 '빈자는 세계의 노예'라는 것을 깨달았고, 일본에서 생활하며 '일본인의 생활이 윤택한 것은 근면역행 때문이다'라고 하였다.[102] 그는 유럽미국의 번영이 식민지 탈취, 흑인 노예 무역 탓이라는 주장에 맞서 미국인들의 근면성, 성실성, 청교도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의 제일 악습고질인 나태(懶惰)를 타파하여 근면의 기풍을 양성한 후에 개발을 도모할지오……근검역행 10년 안에 국부(國富)의 정도가 가히 신국면에 들 것이다."라고 강조했다.[102] 민족의 낙후를 게으름으로 돌리고, 이러한 민족성을 고쳐야 나라의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땀흘려 일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며, 더럽고 힘든 일을 기피하는 자야말로 추악한 영혼을 가진 자라고 일갈했다. 그는 근면의 기풍이 확립되면 국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안은 '식산흥업'이라 했다. 이 방안은 일제의 '부원개발'(富源開發)의 일환으로, 식민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규완은 식산흥업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102]

1926년 1월 1일부터 그는 함경남도사환과 서기로 여성을 채용했다. 그는 여성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오랜 악습이라며 여학교 등을 졸업한 여성들에게 덧셈, 뺄셈, 주판, 부기, 타이핑, 장애 여부 등을 면접심사한 뒤 사환과 도서기에 임명했다. 그는 노동을 기피한 것이 대한제국이 망한 원인이라며 노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 것을 강조했다. 그는 도지사로 재직하면서도 똥지게를 짊어지고 텃밭을 가꾸었고, 인분가축분뇨를 보고 구역질하는 직원은 그 자리에서 분뇨 묻은 손으로 귀뺨을 후려쳤다. 그는 똥지게, 인분, 가축분뇨를 보고 구역질하는 직원들의 뺨을 갈기며, 너 같은 놈의 양반들이 나라를 말아먹었다며 호통쳤다.

3. 3. 근검절약론

1919년 7월 3·1 만세 운동이 진행 중일 때, 이규완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조선총독은 금년 3월 소요 발발 이래 여러번 유고를 발하여 각자의 행동을 경계했으나, 이제는 그 진정을 기하게 되었고, 구주장년의 전란(제1차 세계 대전)이 이미 그 종국을 고하고 지금부터는 여러 나라가 다 같이 화평을 즐기고 각기 국력충실에 부족함이 없는 때를 맞이하여 다시 7월 1일 융화 일치의 요체를 제시하고 일반 민중은 휴척을 상분하고 이해를 다 같이하여 육심 협력하여 시운의 진보에 기여하라는 취지의 간곡한 유고를 발표했다. 그러므로 각 관청은 이를 주지하고 힘쓸 것은 말할 것 없고, 이 기회를 잃지 말고 취지를 철저히 하여 유감없기를 기할지어다."라며 실력을 키우는데 만전을 기하자고 훈시하였다.

함경남도지사로 재직 중 그는 전라북도 옥구군의 옥구군수리조합을 견학하러 갔다. 전라북도청 농무국장이 고급 여관을 안내했지만, 그는 가까운 허름한 여관방을 찾아갔다. 여관은 어수선하고 누추했으며, 흙벽에는 빈대나 바퀴벌레, 모기를 잡은 자국이 많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방을 하나 골라 투숙하였다. 밤잠이 별로 없던 그는 대나무를 깎아 이쑤시개를 만들어 다음날 아침 안내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는 공짜는 없다며 사양하는 전북도청 농무국장 및 서기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숙박료 접대비가 남아 처리 곤란하다고 하자 그는 보통학교 장학금으로 주었다.

1919년 이하영대륙고무주식회사 설립에 출자하여 주주가 되었다. 그해 8월 1일 경성부 용산면 원효로1가에서 열린 대륙고무주식회사 창립식에 이하영, 이규원, 박영효, 박중양 등과 함께 창립발기인, 대주주의 1인으로 참석하였다. 그는 일본 고무회사에서 수입한 검정 고무신을 신는 것을 보고, 검정 고무신 하나 자기 손으로 못 만드는 민족이 무슨 염치로 독립할 생각을 하느냐며 한탄했다.

1919년 9월 10일 아들 이선길, 이재길의 결혼식을 같은 날에 치렀다. 그는 돈보다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며 축의금을 사양하고 간략하게 결혼식을 치렀다.

그는 도내 유지들이 기생, 배우를 불러 유희를 즐기면 인분이나 가축의 분뇨를 묻힌 손으로 연회장에 참석하거나, 낮은 신분 이들과 상인들의 연회에는 분뇨를 뿌려 연회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할 바에야 지역 내 불쌍한 아이들을 돕거나,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는 젊은이들 장학금이나 대거나, 자신의 땅에서 작물 하나 더 수확해서 굶는 사람들이나 도우라고 일갈했다.

도지사 재직 중 까마귀를 잡아 국을 끓여 먹다가 도 서기가 찾아오자 국을 권했다.[90] 서기는 맛있게 먹고 까마귀 고기임을 알게 되자 토했다. 그러자 이규완은 "도지사가 먹는 것을 도서기가 못 먹을게 뭐냐?" 며 따귀를 때렸다.[91] 함석헌은 그를 "조선에서 일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음식 투정을 미워하여 낭비를 용납하지 않았다. 희생당하는 동식물, 힘들게 수확하는 농부와 어부를 생각하며 쌀 한 알, 고기 한 점도 감사하며 먹으라고 주문하였다.

이규완은 며느리에게 가래질을 시켜 근검, 협동 정신을 가르쳤고, 보상주의로 노동의 가치를 깨우쳤으며, 자신도 신발을 직접 꿰매 신었다.[82] 매일 아침 세수 후 거울 앞에서 참되자, 진실되자, 하루를 살더라도 솔직하자고 외쳤다. 취침 전에는 자신에게 참되었는지, 자신과 가족을 속이지는 않았는지 자문했다. 자신을 속이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도 거짓을 남발한다며 자신에게 솔직한 인간이 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천사와 악마, 사후세계가 있다면 게으름, 탐욕, 음란함이 악마의 유혹일 것이라고 했다. 지옥은 게으름, 담배, 알콜중독, 마약중독, 범죄가 횡행하는 곳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규완은 조선이 망한 원인 중 하나로 낭비벽, 사치, 허세를 꼽았다. 그는 낭비를 없앨 것을 촉구하며 모범을 보였다. 강원도와 함경도 도장관 재직 시절 제복 한 벌 외에는 여름에는 중의 적삼, 겨울에는 무명옷이 상복이고, 두루마기는 넝마 같았다.[87] 자신을 위해 사치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당신이나 나나 지금까지 무엇을 했느냐, 대가 없이 열심히 해 본 적이 있느냐고 자신에게 질문해보라고 답했다. 무명 색옷을 입어 중국인 고용인으로 오인받기 일쑤였고, 구두강원도 도장관 임관 때 산 한 켤레를 30년 동안 기워 신었다.[87] 1910년 강원도 도장관 취임 후 산 구두를 30년간 신었다. 제복 입을 때만 신고 짚신을 신었고, 짚신이 해지면 한 쪽만 새 짚신으로 바꿔 신어 짝짝이 신을 신었다.[87] 그는 임종 시 "양반임을 자부하고 의식주에 궁함 없이 무위도식하며 부귀영화 꿈을 깨지 못하는 부유층과 그들과 합류하여 허송세월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98]라며 결혼, 장례식을 호화롭게 치르며 자랑하는 것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강원도관찰사 재직 중 춘천부 군수회의 때, 모 군수가 새벽에 인사하러 오자 퇴비에 쓸 인분과 흙을 섞고 있었다. 비단 두루마기를 입은 군수를 보고 "반갑다. 가까이 오라."고 했다. 군수가 악취에 찌푸리며 다가가자 똥거름을 만지던 손으로 두루마기를 잡고 껴안는 척하며 인분을 칠해 버렸다.

그는 사소한 것도 아껴 쓰라고 강조했다. 며느리에게 "빨래는 어떻게 하는가?" 물으면 "냇물에 가서 합니다."라고 답했다.[87] 그는 "빨래는 집에서 하고, 빨래를 빤 물은 모아 두었다가 다시 쓰거나, 거름에 섞어 밭에 주든지 퇴비에 끼얹어라. 때도 다 재물이니라."라고 했다.[87]

그는 때도 자원이라며 아끼라고 했다.[101] 세탁소에 가겠다는 지인이 있으면 손빨래 시범을 보이며 세탁비를 아낀다고 했다. 식구가 굵직한 장작으로 불을 때면 말렸다.[101] 남이 재물을 아끼면 인색하다 하고, 자신이 인색한 것은 근검절약이라 하며, 남이 화려하게 즐기면 사치라 하고, 자신의 사치는 고상한 취미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손자가 다알리아를 심으려 하자 뿌리는 먹을 수 있느냐고 묻고, 꽃집에 돌려주거나 다른 사람을 주라며, 꽃만 보면 눈만 피곤해질 것이 아니냐고 했다. 도라지뿌리는 반찬, 약재로 쓰인다고 하였다.

그는 사소한 나무 토막, 목재도 쓸 데가 있다고 봤다. "나무를 살 때는 손질해 딴 것으로 쓸 수 있는지 따져 골라 사야 한다. 쓸 만한 것은 따로 모아 가느다란 놈은 도구(망치, 장도리) 자루로 쓴다. 싸리나무는 빗자루를 만들어 쓰다가 다 닳으면 땐다.[101]"고 했다. 하찮은 먼지도 모아 거름으로 쓸 수 있다며, 똥, 오줌, 동물, 곤충 사체, 사람 , 손톱깎이로 깎은 손톱, 발톱, 달걀 껍데기도 거름으로 쓸 수 있다고 했다.

3. 4. 시간 절약론

이규완은 평소 시간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경멸하였다. 그는 시간도 절약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식구들에게 뒷간에 갈 때도 빈손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101] 신문 하나라도 갖고 가서 대변을 보면서 읽게 했고, 실 꾸러미라도 들고 가게 하여 그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못하게 했다.[101] 자기 자신은 변소에서 종이 노끈을 꼬거나 변소에까지 어망 얽는 장치를 해두고 잠시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다.[101] 다 쓰고 버린 잡기장을 주어다가 그 행간에 글씨 연습을 하고는 이를 잘라 노끈을 꼬아서 그 노끈으로 종이 조끼를 떠 입기까지 했다.[101] 그는 인생은 한 번뿐이며, 한 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며 시간을 아낄 것을 주문하였다.

공무상 출장을 가더라도 군수나 부윤이 정해준 고급 잠자리는 마다하고 누추한 주막을 찾아들었고, 비단 이불을 빌려 펴놓으면 그것을 거두고 밤늦도록 짚신을 삼거나 버려진 쪽을 주워와 늦도록 이쑤시개를 만들곤 했다. 그러고는 그 짚신이쑤시개는 아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101] 평범한 이부자리를 가져오면 바로 누워서 자고 고급 비단이불을 가져오면 밤늦도록 이쑤시개를 깎거나 짚신을 삼았다.

이규완은 도박, 노름, 음주, 오락, 게임 등은 쓸데없이 시간을 날려버리는 낭비라면서 그럴 시간에 작은 일을 하던가, 독서를 하던가 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오락도박, 유흥 같은 미친 짓에 빠지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는 도박오락을 하고, 유흥가에 갈 시간에 일을 하나라도 더 하던가, 그 시간에 낮잠을 자는 편이 낫다고 하였다. 한 젊은이가 돈을 모으는 방법을 묻자 그는 오락하지 않고, 유흥에 빠지지 말고, 경마, 도박하지 않는 것이 돈을 모으는 방법이라 답하였다. 그는 담배 조차도 시간을 허비하는 미친 짓이라고 조롱하였다. 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시간에 일을 하나라도 더 하고 물을 마시면 그것이 참말로 시원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게임, 경기, 오락, 도박 등을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고 규정하였다.

3. 5. 조선인 참정권 운동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이전부터 이규완은 조선인 참정권 운동, 자치권 운동을 구상하고 있었다.[103] 한일 합방 조약 이후 그는 조선인에게도 일본인과 같은 참정권, 자치권을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조선인들은 게으른 민족이 아니며,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명인임을 총독부 당국자들에게 역설하였다.

그는 부를 쌓아 실력이 양성된다면 일본의 국정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참정권을 주장하였다.[104] 그는 우리도 일본인과 똑같은 국민 취급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우리도 일본인과 같은 투표권과 참정권,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얻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시중에서는 지배자가 양반에서 왜인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노력해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비아냥이 가해졌다.

참정권은 3·1 운동민원식과 같은 적극적인 친일파에 의해서 적극 추진되고, 일제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제시한 것인데, 이규완은 이를 처음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제의 부원개발, 산업 발전, 민풍의 개선 등을 통한 문명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개화파 이래의 문명개화론에 입각하여 민족성을 개량하고 산업을 발전시켜 일본인과 동일한 수준이 된다면 일본의 국정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105] 그는 일본인들의 신뢰도 얻지 못하면서 구미열강의 신뢰를 얻어서 독립할 수 있겠느냐며 일본인에게라도 신뢰를 얻어 일본 국정에 참여할 참정권과 자치권을 획득해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4. 가족 관계


  • 아버지: 이기혁(李基赫, 1824년 ~ 1884년(?))
  • 어머니: 유씨(柳氏, 본관 미상, ? ~ 1871년)
  • 형: 이윤필(李允必, ? ~ ?)
  • 누나: 전주이씨
  • 매부: 강성형(姜盛馨)
  • 계모: 기계유씨(杞溪兪氏, 1826년 ~ 1876년)
  • 부인: 이름, 본관 미상, 갑신정변 이후 이혼
  • 부인: 이매자(李梅子, 1880년 5월 15일 ~ 1961년(?) 9월 14일, 본명은 나카무라 우메코(中村梅子), 일본 야마구치현 출신)
  • * 아들: 이각일(李覺一, 1897년 6월 12일 ~ ?)
  • ** 손자: 이순신(李順信)
  • ** 손자: 이순국(李順國)
  • ** 손자: 이삼랑(李三郞)
  • ** 손자: 이순길(李順吉)
  • * 아들: 이선길(李鮮吉, 1898년 6월 25일 ~ 1971년 1월 2일), 유도 선수
  • ** 손자: 이??
  • ** 손자: 이??
  • ** 손녀: 이옥
  • ** 손자: 이순영(李淳霙)
  • * 딸: 이송자(李松子, 1902년 5월 4일 - ?)
  • * 아들: 이영일(李永一, 호는 춘천(春泉), 1903년 5월 12일 ~ 1984년 9월 7일), 화가, 중고등학교 미술교사
  • ** 손자: 이공평
  • ** 손자: 이공식
  • ** 손자: 이공규
  • ** 손자: 이공철
  • ** 손자: 이공관
  • ** 손자: 이공영
  • * 딸: 이정자
  • * 사위: 안동혁(安東赫, 1906년 3월 11일 - 2004년 10월 14일), 정치인, 대학 교수
  • * 아들: 이대길(李大吉, 1909년 3월 25일 - ?)
  • * 딸: 이춘자(李春子, 1910년 6월 10일 - ?)
  • * 딸: 이부자(李富子, 1914년 1월 24일 - ?)
  • * 딸: 이절자(李節子, 1915년 10월 31일 - ?), 김종석의 후처
  • * 사위: 김종석(金鍾奭, 1899년 - ?), 공주 갑부 김갑순(金甲淳)의 아들
  • * 아들: 이재길(李載吉, 1920년 3월 14일 - ?), 브라질로 이민
  • ** 손자: 이화평(李和平)
  • ** 손자: 이화순
  • ** 손자: 이화진
  • ** 손자: 이화천
  • 첩: 민씨(閔氏, 1886년 - ?)
  • 숙부: 이름 미상
  • * 사촌 형: 이종필(李鍾弼, ? - ?)
  • 장인: 나카무라 이치(中村 一, ? - ?), 일본의 외교관
  • 장모: 마가렛 고츠(Margaret T. Gozh, 1855년 ~ 1928년), 스페인캐나다 혼혈인
  • * 처남: 이름 미상(1876년 ~ 1912년), 캐나다 벤쿠버의 은행원
  • 장모: 이름 미상, 장인 나카무라 이치의 일본인 부인이자 이매자를 양육하였다.

5. 평가

이규완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로 나뉜다.

그는 해방 직후 백성들에게 경거망동을 삼가고 배움에 힘쓸 것을 강조했으며,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근면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 박영효는 그를 신뢰할 수 있는 동지라고 평가했고, 함석헌 등은 그의 성실함을 칭찬했다. 조선총독부 공보국 역시 그의 충직함과 신념을 인정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그에게 포용력과 덕망이 부족하고,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며 친일을 신조로 삼았다는 평가도 내렸다. 그는 친일파 708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등 친일 관련 명단에 포함되었다.

5. 1. 긍정적 평가

이규완은 해방 후 경거망동을 삼가하고, 우연히 찾아온 해방인 만큼 다시는 권리를 빼앗기지 말자고 호소하였다.[97] 그는 주권을 잃지 않으려면 백성들 스스로 배우고 깨닫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항상 열심히 일한다는 주변의 칭찬에 대해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라며 칭송을 사양했다.[97] 그는 땀흘려 일하는 것이 정상이며 자신의 도리를 다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후세계는 규명하기 어려운 신기루이지만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방법이 있다며 항상 그 점을 생각하라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지적했다.[97] 그는 자신이 죽어서도 전직 고관대작이 죽었다는 이유로 시장과 저자거리를 점유하거나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칠 것을 염려하였다. 그는 자신의 장례 비용을 5환으로 정하고, 그 이상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97] 그는 자신은 한 일이 없으니 호화로운 장례식을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양반임을 자부하고 무위소일하며 부귀영달의 꿈을 깨지 못하는 부유층과, 관혼상제에 과분한 돈과 재물을 들이는 것이 다른 한국 동포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하는 큰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98]

그와 장년기를 함께했던 박영효는 임종 때 "내가 일생을 통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가장 신뢰할 동지(同志)는 이규완이다. 그는 참으로 솔직하고 의협심이 뛰어난 열혈호담(熱血豪膽)한 사람이었고, 비범한 역사(力士)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80]

평론가 이규태는 '그는 검약, 근면, 자조, 협동만이 대한민국이 살 길이라는 신념으로 풍화를 지도한 분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관찰사의 행정력이나 제도로서 이를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다[78]'라고 평가했다. 며느리들은 냇물에 가서 빨래하지 못하고 반드시 샘물을 떠다가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빨랫물을 두엄자리에 뿌리게 함으로써 땟물까지 절약했다[79]는 평가도 있다. 함석헌은 그를 "일제시대 일 하기로 유명했던 분[90]"이라고 평하였다. 함석헌, 이광수, 김교신은 그의 성실함은 조선에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며 찬탄을 보냈다.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그를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일찍부터 천하 사방을 돌아다니며 다스리려는 큰 뜻이 있었다. 직무에 충실하고, 신념과 기절(氣節)이 당당하며, 신식 학문에도 어느 정도 견식이 있고 품성이 영특하며, 함부로 사람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며, 자신의 신조를 행함에 있어서 과단성이 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라고 평가했다. 한편으로 조선인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도 내렸다.

한편 그는 당대의 인사들로부터 일을 열심히 하는 부지런한 인물 혹은 고관대작직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생을 자처하는 특이한 사람으로도 취급받았다. 이를 두고 "더러는 이규완을 무골(武骨)이라고도 하고 기인(奇人)이라고도 하고, 또 이인(異人)이라기도 하지만, 그가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진 것은 체면이나 안목 등 남의 시선을 묵살하고 자신의 소신대로 과감하게 실천해낸 그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107]"라는 평도 있다. "이씨를 말할 때에 먼저 친일성을 운운하는 사람도 있으나 파란 많던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내오면서 그 만큼 비도덕적 행실이 지적되지 않은 사람도 드물다고 하겠다[80]"는 평도 있다.

5. 2. 부정적 평가

이규완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97]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97]

조선총독부 공보국에서는 이규완에 대해 직무에 충실하고 신념과 기절(氣節)이 당당하며, 신식 학문에도 견식이 있고 품성이 영특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조선인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공보국은 이규완에게 너그럽게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이 없고, 어질게 부하를 복종시키는 덕망이 없다는 평가와 함께, "일관하여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정책과 함께 하였고, 親日을 신조로 삼았으며, 조선인 상당수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변절(變節) 성향이 없는 것 같음, 강직하고 고집스런 성격의 소유자"라는 평도 남겼다.

한편, 이규완은 당대 인사들로부터 "체면이나 안목 등 남의 시선을 묵살하고 자신의 소신대로 과감하게 실천해낸 그 특이성" 때문에 아웃사이더, 무골(武骨), 기인(奇人), 이인(異人) 등으로 평가받기도 했다.[107] 또한 "이씨를 말할 때에 먼저 친일성을 운운하는 사람도 있으나 파란 많던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내오면서 그 만큼 비도덕적 행실이 지적되지 않은 사람도 드물다고 하겠다"는 평가도 있다.[80]

6. 기타

그가 강원도 도지사로 재직할 당시 춘천 일대는 의병을 자처하는 이들과 도적, 마적들이 섞여 치안이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도회지로 몰려들었고, 도시는 놀고 먹는 백성들의 집합 장소로 변했다. 넉넉한 지주들은 사랑에 모여 바둑, 장기, 골패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이규완이 한 지주의 집에 저녁 마실을 오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약속한 날, 이규완은 지주들과 술잔을 나누며 "백성들이 피땀 흘려 농사지은 수확인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받아먹을 수 있겠소? 심심한데 노라도 꼬시지 않고..."라며 수일 내로 다시 올 것을 예고했다. 다음 날부터 지주들은 노를 꼬기 시작했고, 며칠 뒤 이규완이 다시 찾아와 노 몽둥이를 만져보며 솜씨를 칭찬했다.

열흘 뒤, 이규완은 다시 지주의 집을 방문하여 노 몽둥이 하나를 가리키며 누구의 것인지 물었다. 거짓말을 하는 지주를 발견한 이규완은 격투기 기술로 그를 제압하며 "나라가 왜 망한 줄 아시오? 당신네들 같은 작자들 때문에 이렇게 종살이를 하는 것이오."라고 호통쳤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백성들을 일깨우고 기운을 차리게 하는 것이라 말하며, 자신의 농장에 와서 보고 배우라고 권했다.

이규완은 일찍부터 무술 수련으로 뼈마디가 굵었다고 한다. 그는 김옥균을 처음에는 가볍게 보았으나, 나중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애지중지했다고 회상하였다.

1910년 초대 강원도 지사로 부임한 이규완 덕분에, 그의 3남 이영일은 소년 시절을 춘천에서 보내게 되었고, 그는 근대 초기 춘천 미술활동의 최초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108]

그의 집은 연당장 또는 연당집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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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서적 선비의 의식구조 신원문화사 1984
[98] 서적 선비의 의식구조 신원문화사 1984
[99] 서적 느낌표처럼 사랑했다 도서출판 유정 1996
[100] 서적 느낌표처럼 사랑했다 도서출판 유정 1996
[101] 서적 한국인의 힘 2 신원문화사 2009
[102]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
[103]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
[104]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
[105]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
[106] 서적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푸른역사 2005
[107] 서적 선비의 의식구조 신원문화사 1984
[108] 서적 강원 사회의 이해 한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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