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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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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구는 1931년 12월 29일 이왕 이은과 이방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이진의 요절로 왕세자가 되었으며,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줄리아 멀록과 결혼했다. 박정희 정권의 허가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 거주하며 사업을 했으나 실패하고 이혼 후 일본에서 생활했다. 1996년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를 맡았지만, 2005년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후 이원의 양자 입적과 후계 논란, 왕세자 대우 논란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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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 (193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어린 시절의 이구
이름이구
한자 표기李玖
로마자 표기I Gu
다른 이름황세손
다른 이름 한자 표기皇世孫
다른 이름 로마자 표기Hwangseson
사후 칭호회은황세손
사후 칭호 한자 표기懷隱皇世孫
사후 칭호 로마자 표기Hoeeun Hwangseson
출생일1931년 12월 29일
출생 장소일본 제국 도쿄 고지마치구 기오이초, 기타시라카와 궁전 (현재 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
사망일2005년 7월 16일
사망 장소일본 도쿄 지요다구 그랜드 프린스 호텔 아카사카
매장일2005년 7월 24일
매장 장소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영원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세례명요한
왕위 계승
왕조이씨 왕조
직위이씨 왕조 수장
재위 기간1970년 5월 1일 – 2005년 7월 16일
이전 수장이은 황태자
다음 수장 (논쟁 중)이원 또는 이석
가족 관계
아버지이은 황태자
어머니이방자 여왕
배우자줄리아 멀록 (1959년 결혼, 1982년 이혼), 아리타 키누코
자녀이은숙 (양녀)
직업
직업건축가, 사업가
기타
황세손 재위1931년 12월 29일 ~ 1947년 5월 3일

2. 생애

1931년 12월 29일 이왕 이은과 방자 여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0]은 요절했기 때문에, 이구가 왕세자가 되었다. 1932년 1월 4일 "구(玖)"라는 이름을 받았다.[11]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국헌법 시행에 따라 왕족 지위를,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발효에 따라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후시미노미야 히로아키 왕과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함께 미국 유학을 열망했다.[12] 학습원 고등과 졸업 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에 유학하여 건축학을 배우고 1957년 졸업했다.[13] 1958년 10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했고, 1961년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14] 1969년 양녀 유지니아(이은숙, 1959년 -)를 입양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모와 함께 1963년 귀국, 창덕궁 낙선재에 거주했다.[15] 1971년 항공 측량 회사 신한항공을 경영했으나, 1979년 도산하여 일본에서 생활했다.[15] 1970년 아버지 사망 시 상주를 맡아 3년상을 치렀다.[16] 1974년경부터 줄리아와 별거했고,[17] 1982년 이혼했다. 이후 점쟁이 아리타 키누코(한국 이름: 이키누코)와 재혼했다.[17][18]

1996년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에 취임하며 한국에 영주 귀국했으나,[19] 사업 실패 등으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2005년 7월 16일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0][21][22] 자녀가 없어 이왕 이은과 방자 여왕의 직계 자손은 단절되었다. 장례식은 7월 24일 서울에서 거행되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시호를 “회은(懷隱)”으로 정했다. 이원이 양자로 지명되었으나,[23] 이해원과 이석 사이에서 분쟁이 진행 중이다.

2. 1. 출생과 이왕세자 시절

1931년 12월 29일 오전 8시 22분 의민태자일본 황족 이방자의 둘째 아들로 일본 도쿄 부 국정(鞠町) 사저에서 태어났다.[27] 1932년 1월 4일 부왕 의민태자가 아들의 이름을 직접 지었으며, 근시와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구슬 구(玖)라고 선언하였다.[28][29] 같은 날 일본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치키 기도쿠로(一木喜德郞)가 궁내부 대신 명의로 일본에도 공식 발표되었다.[30] 형 이진이 일찍 죽어 그가 영친왕의 잠정상속자가 되었다.

생후 얼마 안 된 이구


국내에서의 그의 지위는 이왕(李王)이었던 아버지 영친왕의 이왕세자였다. 정확한 세자 책봉일은 알 수 없으나, 1933년에는 이미 왕세자 신분이었다.[31]

그러나 1945년 일본이 미국에게 패배한 후,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시행령에 의한 신적강하가 일어나면서 영친왕이 평민으로 신분이 격하되자 이구 역시 이왕세자라는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2. 2. 미국 유학

1953년 맥아더 사령부의 배려로 미국 유학을 떠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건축학과에 입학하였다. 어머니 이방자는 아들을 멀리 보내는 것을 망설였으나, 아버지 영친왕은 "구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라며 격려하여 유학길에 올랐다.[1]

1956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를 졸업하고[13] 뉴욕의 I. M. 페이 건축사 사무소에 취직하였다. 그는 하와이 대학교의 동서문화센터 등을 설계하는 데 참여하며 건축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장학금을 받으며 MIT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던 중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을 만났다. 두 사람은 모두 혼혈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곧 가까워졌다. 1959년 10월 25일 뉴욕 시 세인트 조지 성당에서 줄리아 멀록과 결혼하였다.[1] 그러나 일부 종친들은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하였고, 줄리아가 8살 연상에 혼혈이라는 점은 계속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구는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신혼 생활을 즐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영친왕 내외가 미국 유학 중인 이구를 만나기 위해 한국 여권 발급을 요청하자 "이은은 일본 사람이니 일본 여권을 내라고 해"라며 거절하였다. 결국 영친왕 내외는 일본 여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이구의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2. 3. 귀국과 국내 생활

1963년, 박정희 정부의 승인으로 한국에 돌아와 어머니 이방자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며, 1965년부터 대학가에서 건축설계학을 강의하였으며, 이듬해 트란스아시아 부사장에 취임하였다.[15]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연세대학교의 건축공학과에 출강하기도 했다. 1970년 아버지인 영친왕이 사망하였고,[16] 1971년 영친왕기념사업회를 설립하였다. 1973년 친척들과 함께 신한항업주식회사를 세웠으나 1979년에 도산하고 말았다.[15]

이승만 정권 하에서 귀국을 시도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게 왕자라는 지위를 사칭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귀국을 허용하였으나 이구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한국으로의 귀국을 취소하였다.

이구 귀국 및 국내 생활
연도내용
1963년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가족과 함께 창덕궁에 거주[15]
1965년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에서 건축설계학 강의
1966년트란스아시아 부사장 취임
1970년부친 영친왕 사망[16]
1971년영친왕 기념사업회 설립
1973년신한항업 주식회사 설립
1979년신한항업 주식회사 도산[15]


2. 4. 이혼과 일본 출국

1974년경부터 이구는 부인 줄리아 멀록과 여성 문제로 별거에 들어갔다.[17] 종친들의 종용에 못 이겨 대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강요당했으나, 그는 줄리아 멀록과의 결혼생활을 20여 년간 유지했다. 1979년 이구는 홀로 일본으로 떠났다. 1982년 이구는 부인이었던 줄리아 멀록과 이혼하게 되었는데, 이혼하게 된 원인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어머니 이방자는 줄리아가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하며 안타까워했다.[33] 줄리아 멀록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주변의 거듭된 반대와 비판에 시달렸다. 줄리아는 실내장식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며 시어머니 이방자의 명휘원 사업을 돕고 열심히 시어머니를 부양하였으나, 일부 종친들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줄리아 멀록과의 이혼 이후 그는 일본에서 무당 아리타 키누코(有田絹子, Arita Kinuko, 한국식 이름: 이견자(李絹子))와 재혼하여 함께 살았다.[17][18]

2. 5. 사망

2005년 7월 16일,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의 한 객실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되었다.[35] 호텔 종업원이 수일 간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방문을 열어보자 그는 화장실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객실 화장실에서 발견된 그의 시신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 일자와 시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일본 경찰 측에서 입수한 자료도 단편적이고, 그 단편적인 자료조차 공개하기를 꺼려하여 무수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공교롭게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자리는 1931년에 그가 태어난 곳이었지만, 일본 패전 후 영친왕의 경제적 능력 부족으로 매각하게 된 장소이기도 했다. 그는 만년에 호텔에 머무르며 자신이 태어난 곳을 내려다보는 것을 하나의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사인(死因)은 심장마비였다.[36]

이구의 시신은 2005년 7월 20일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운구되었으며, 7월 21일 성복제에서 입관 전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 공개된 뒤, 7월 24일 대한민국 국무총리 및 문화재청장 등 각계 인사들과 시민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37]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그의 시호를 "회은황세손(懷隱皇世孫)"으로 정하였다.[2][3] 그는 부모 곁에 있는 회인원(Hoeinwon) 능에 안장되었다.

이구는 후계자가 없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따르면, 이구의 사촌 형제인 이원이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구는 이미 황실 계승을 위한 후계자 입양을 고려하고 있었고, 이원이 고려되었다. 이원을 여러 차례 만난 후, 그의 외국어 능력에 만족하여 이원을 후계자로 삼았다. 2005년 7월 10일, 사망하기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이구는 종약원 이환의(李桓儀) 회장과 마지막으로 만났다.[4] 그리고 이원을 후계자로 입양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서명하였다.[5][6] 이구가 곧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7월 21일에 입양의 적법성에 대한 회의를 열었고, 그 다음 날인 7월 22일, 이원이 고 이구의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7]

3. 사후

영결식 후 종묘 앞에서 이구의 노제가 지내졌고[38],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안장되었다.[39]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추증한 사시(私諡)는 회은(懷隱)이고, 원호(園號)는 회인원(懷仁園)이다. 따라서 회은태손, 회은황태손으로 불리나 대한민국의 사학계에서는 이구를 황태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40] 다만 1945년 일제 패망 직후부터 1947년까지 한국의 일부 언론은 이구를 왕세자로 보도하기도 했다.[41][42]

3. 1. 후계 논란

이구는 후계자가 없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따르면, 이구의 사촌 형제인 이원이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구는 황실 계승을 위해 후계자 입양을 고려하고 있었고, 이원이 고려되었다. 이원을 여러 차례 만난 후, 그의 외국어 능력에 만족하여 이원을 후계자로 삼았다. 2005년 7월 10일, 사망하기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이구는 종약원 이환의(李桓儀) 회장과 마지막으로 만났다.[4] 그리고 이원을 후계자로 입양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서명하였다.[5][6] 이구가 곧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7월 21일에 입양의 적법성에 대한 회의를 열었고, 그 다음 날인 7월 22일, 이원이 고 이구의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7]

3. 2. 왕세자 대우 논란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아버지 영친왕은 국내 귀국을 시도했으나 군정기의 한국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 이구 역시 일본에서 체류하며 계속 학교에 다녔다.

1950년 도쿄의 일본 왕공족 귀족학교 학습원(學習院)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고등과 졸업 직후 그는 도쿄시내의 로지 상회에 취직하여 점원으로 활동했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그의 일본 국적은 자동 상실되었다.[32]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주장을 포기했고, 종래 일본 신민(국민)으로 포섭했던 조선인들에 대한 국적도 자동 포기해야 했다. 이 조약 발효와 함께 이구는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32]

이구는 1945년 이후 부왕 영친왕의 사후에 직접적으로 한국의 왕위나 황제위를 요구한 적은 없다. 그러나 해방 직후 한동안 한국 사회는 그를 왕세자로 대우하였다.[43] 1950년 3월 31일자 자유신문 기사에는 그를 왕세자로 칭했으며, 같은 날 경향신문 기사 2면에도 "舊王世子李玖 外人商店店員"이라 하여 이구를 왕세자로 보았다.

4. 가족 관계

항목내용
친조부고종
친조모순헌황귀비
아버지이은
어머니이방자
부인줄리아 멀록 (1958년 결혼, 1982년 이혼)
이혼 사유종친들의 압력[33]과 후사 문제[33]
양녀이은숙 (1959년 ~ )[44]
부인아리타 키누코(有田絹子, 한국식 이름: 이견자(李絹子)) - 일본인 무당[44]
양자이원 - 큰아버지 의친왕의 손자, 사후 양자로 입적[44]
양자 관련 문제* 대한민국 민법상 사후 입양 불가로 법적 문제 존재[44]


5. 태실

그의 태실은 도쿄 이왕가 사저에 있다가 1932년 1월 25일 조선으로 보내져 열차편으로 서울역에서 시종들이 봉행하여 연경당에 들렸다가,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서삼릉 내 경역으로 옮겨 매설하였다.[46] 한때 태실 봉안지는 신도면 계란고개로 정해졌었다.[47]

그의 태실은 조선의 역대 국왕 일부와 사도세자, 부왕 의민태자의 태실 근처에 있으며, 검은색 오석 비석이고 이름, 시호 없이 왕세자 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근처에 있는 일제 강점기 때 봉안된 다른 일부 조선 국왕의 태실은 소화 연호가 긁혀져 있다.

6. 평가

이구는 건축, 항공 측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나, 사업 실패와 사기 사건에 연루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사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은 이구에게 "회은(懷隱)"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이원을 양자로 지명하여 이가를 계승하도록 했다.[23] 그러나 이원의 고모 이해원과 숙부 이석 사이에 이가 계승 분쟁이 진행 중이다.

참조

[1] 웹사이트 Olde Centre 1952 · Centre College Digital Archives https://centre.omeka[...] 2023-10-01
[2] 뉴스 故이구씨 24일 영결식…남양주 영친왕 묘역에 안장 https://www.donga.co[...] 2005-07-25
[3] 뉴스 https://www.donga.co[...] 2017-12-06
[4] 뉴스 https://news.joins.c[...] 1999-11-27
[5] 뉴스 https://m.chosun.com[...] 2005-07-21
[6] 웹사이트 一位平凡上班族將續朝鮮皇室嫡統 https://bill12212013[...] 2006-09-23
[7] 뉴스 https://m.chosun.com[...] The Chosun Ilbo 2005-08-18
[8] 뉴스 故이구씨 24일 영결식…남양주 영친왕 묘역에 안장 https://www.donga.co[...]
[9] 웹사이트 회은황태손(懷慇皇太孫 李玖, 1931~2005) http://www.imperialh[...]
[10] 간행물 昭和6年宮内省告示第32号(『官報』第1501号、昭和7年1月4日) https://dl.ndl.go.jp[...]
[11] 간행물 昭和7年宮内省告示第1号(『官報』第1502号、昭和7年1月6日) https://dl.ndl.go.jp[...]
[12] 뉴스 元プリンス渡米 仲よしの伏見、李両君が留学 読売新聞 1950-05-24
[13] 서적 新城 2015
[14] 서적 新城 2015
[15] 서적 Beautiful as the Rainbow: Nashimoto Masako, a Japanese Princess Against All Odds for Love, Life, and Happiness Inspiring Voices 2013-09-13
[16] 서적 新城 2015
[17] 서적 新城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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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뉴스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 영결식, 창덕궁에서 거행 https://imnews.imbc.[...] 2005-07-24
[22] 뉴스 황세손 이구씨 영결식 거행 https://news.sbs.co.[...] SBS NEWS 2005-07-24
[23] 뉴스 昌徳宮で李王家末裔・李玖氏の告別式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0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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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기타 왕공족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신적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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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뉴스 李王世子殿下御命名あらせらる 朝鮮新聞 1932-01-05
[30] 뉴스 李王世子殿下御命名式, 玖殿下と申上げる 京城日報 1932-01-05
[31] 뉴스 http://newslibrary.n[...] 193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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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기타
[34] 뉴스 詐欺 혐의로 李玖씨 日서 被訴 동아일보 1984-06-19
[35] 뉴스 조선 마지막 황세손 이구 씨 별세 https://news.naver.c[...] SBS TV 2005-07-19
[36] 뉴스 이구 씨가 숨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https://news.sbs.co.[...] SBS 뉴스 2005-07-20
[37] 뉴스인용 영친왕 아들 이구 씨 영결식 열려 https://news.naver.c[...] SBS 생활/문화 2005-07-24
[38] 뉴스인용 '황세손' 이구 씨 노제 https://news.naver.c[...] YTN TV 2005-07-24
[39] 뉴스인용 영친왕 아들 이구 씨 영결식, 영릉에 안장(종합)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생활/문화 2005-07-24
[40] 일반
[41] 뉴스 舊王世子 李玖 外人商店 店員 경향신문 1950-03-31
[42] 뉴스 今日 경향신문 1947-05-03
[43] 뉴스 자유신문 1950-03-31
[44] 뉴스인용 김상열 씨가 밝히는 옛 황실 6대 비화 일요신문 제754호 2006-10-29
[45] 뉴스 일제 탄압 시달린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 적통문제 둘러싸고 갈등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0-08-28
[46] 뉴스 王世子殿下 胎衣御安着 (卄五日埋納御儀) 每日申報 1932-01-25
[47] 뉴스 王世子殿下 御胎衣埋納 每日申報 193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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